3월8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전국 동시 조합장 선거
2022년 NLL 침범 北 선박 나포..선박 쫓던 北 경비정은 軍 경고사격에 퇴각
8일 오전 9시30분쯤 서해 백령도 동쪽 방향 10㎞ 인근 해상에서 용도가 확인되지 않은 길이 10m 가량의 철제 선박 1척을 백령도로 예인해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선박 내부에는 무장을 하지 않은 군복 차림의 6명과 사복 1명 등 7명이 탑승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나포 당시 "이삿짐을 나르다 항로를 착오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군은 월선한 선박은 나포해 백령도 인근으로 인계했다. 선박에 타고 있던 7명에 대해 절차에 따라 합동심문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합참은 "(구체적 사실은) 합동정보조사가 끝나봐야 알 수 있다"고 전했다.
합동참모본부는 해당 선박을 쫓아 내려온 북한 경비정이 NLL을 침범해 해군 참수리 고속정이 40mm 함포 3발로 한 차례 경고사격을 가했다고 설명했다. 북한 경비정은 NLL 이남 1km 정도 내려왔으나, 우리 군의 경고 사격 이후 항로를 북측 방향으로 틀었다. NLL 남측 수역에 머문 시간은 약 7분 정도로 알려졌다.
2016년 정부 금융해운 제재 뼈대로 한 독자적 대북 제재조처 발표
2014년 승객·승무원 239명 탄 말레이시아 항공 MH370편(베이징 행) 인도양에서 실종
17개월 만에 인도양 남부에서 잔해 발견(2015.8)됨
2012년 '일본의 부동산 왕' 모리 미노루 별세
2011년 ’상하이 총영사관 스캔들’
중국 상하이(上海) 주재 한국총영사관에서 근무한 영사들과 김정기 전 총영사가 중국 여성 덩신밍씨와 친밀히 지내며 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국무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실의 조사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김 전 총영사는 조사에서 “이번 사건은 ‘미녀 스파이’ 사건이 아니라 정보기관이 나를 음해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벌인 것” 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주상하이총영사관에서 덩씨를 사이에 두고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켜 소환됐던 법무부 파견 H영사와 지경부 파견 K영사, 외교부 P영사 외에도, 김 전 총영사와 부총영사가 심각한 갈등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돼 재외공관 관리의 총체적 난맥을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공직복무관리관실은 김 전 총영사를 서울 종로구 창성동 별관으로 불러 그가 덩씨와 함께 사진을 찍게 된 경위와 총영사관 서류, 그가 갖고 있던 2007년 대통령 선거 당시 한나라당의 비상연락망 등이 유출된 경위 등에 대해 조사했다. 김 전 총영사는 이날 “덩씨는 한국을 좋아하고 총영사관을 많이 도와줘서 만났을 뿐 나는 의심이 갈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전혀 없다”고 했다.
이에 앞서 덩씨의 남편인 한국인 J씨는 김 전 총영사를 비롯한 주상하이 총영사관 관계자들이 자신의 부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국가 기밀을 유출했다며 이를 처벌해 달라고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기관에 투서를 해왔다. 이후 H, K영사 모두 국내로 소환돼 공직복무관리관실의 조사를 받았다.
국무총리실, 외교통상부, 법무부 직원으로 구성된 정부합동조사단이 3월 14일 상하이로 건너가 국내 1차 조사 결과를 기초로 비자 부정 발급, 정보 유출, 우리 영사들과 중국 여성 덩신밍씨의 부적절한 관계 등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상하이 총영사관 스캔들’을 조사해온 국무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실은 25일 “이 사건은 스파이 사건이 아니라 중국 여성 덩신밍(鄧新明)이 이권을 노리고 (한국)영사들에게 접근해 벌어진 공직기강 해이 문제”라는 결론을 내놨다. 총리실은 유출된 자료가 국가기밀은 아니라고 판단했으며 김정기 전 총영사를 비롯한 전·현직 영사 10여명에 대해 ‘공직기강 해이’의 책임만 물어 해당 부처에 징계를 요구하기로 했다
2009년 쇼트트랙 이호석 세계선수권 종합우승
이호석(고양시청)은 2009년 3월 8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ISU(국제빙상경기연맹) 쇼트트랙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남자 1000m에서 우승, 6일 1500m 금메달에 이어 두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어 남자 3000m 수퍼파이널에서 은메달을 추가한 이호석은 남자부 종합 우승까지 차지했다. 작년 강릉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아폴로 안톤 오노(미국)에게 져 종합 2위에 머문 아쉬움을 시원하게 털어버린 하루였다.
이호석은 남자 1000m 결승에서 1분33초060으로 오노(1분33초262)를 밀어내고 우승했다. 4명의 출전 선수 중 2~3번째로 레이스를 펼치던 이호석은 결승선을 3바퀴 남기고 벼락같은 스퍼트를 시작했다. 순식간에 선두에 있던 오노를 제친 이호석은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끝까지 지켰고, 두 손을 번쩍 치켜든 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자신감의 표시였다. 함께 출전한 곽윤기(연세대)는 마지막 바퀴에서 추월하는 과정이 반칙으로 지적돼 실격당했다.
이호석은 개인 성적 상위 8명만 출전한 3000m 수퍼파이널에선 여유있게 경기를 운영한 끝에 J R 셀스키(미국)에 이어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2009년 신지애, LPGA 시즌 첫 우승
신지애는 2009년 3월 8일 싱가포르 타나메라골프장(파72)에서 끝난 LPGA(미국여자프로골프) 투어 HSBC위민스챔피언스 마지막 4라운드에서 버디만 6개를 쓸어담으며 합계 11언더파로 우승했다. 무시무시한 역전 드라마였다. 전날까지 선두였던 캐서린 헐(호주)은 합계 11언더파에서 4라운드를 시작했고, 신지애는 합계 5언더파 공동 6위였다. 하지만 신지애는 6타 차 열세를 극복했고, 헐(최종합계 9언더파 2위)은 자멸했다.
지난해 LPGA 비회원으로 3승을 거뒀던 신지애는 올시즌 세 번째 대회만에 첫 승을 거둬 목표인 신인왕을 향한 순항을 시작했고, 우승상금 30만달러(약 4억5000만원)를 챙겨 시즌상금 32만4000달러로 로레나 오초아(멕시코)를 제치고 상금랭킹 1위로 올라섰다.
신지애는 1번홀부터 4번홀까지 신기의 4홀 연속 버디를 잡아내며 선두 헐에 2타 차로 따라붙었다. 한때 4타 차로 다시 격차를 벌렸던 헐은 신지애가 계속 압박을 가해오자 13번홀(파5)에서 치명적인 더블 보기를 범해 동타가 됐다.
이후 신지애는 차분하게 파를 세이브하며 15번홀(파5)에서 가볍게 버디를 낚아 2타차 선두로 앞서나갔다. 신지애는 "너무 기쁘다. 욕심을 버리고 차분히 경기하자고 다짐한 것이 경기를 쉽게 풀리게 했다"고 말했다.
신지애는 지난달 미래에셋자산운용과 5년간 최대 75억원의 초대형 스폰서십을 체결한 뒤 곧바로 열린 LPGA 시즌 개막전 SBS오픈에서 컷탈락했다. 그러자 '큰 돈이 생기니 이제 마음가짐이 흐트러진 것이 아니냐'는 시선이 쏟아졌다. 이번 우승으로 이런 우려를 불식시켰다. 신지애는 올초 "시즌 첫 승을 언제 거두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새내기 신지애의 어깨를 가볍게 해준 우승이었다.
2003년 원로시인 조병화씨 별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과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을 지낸 조병화 시인이 자신의 호 ‘한 조각 구름(片雲)’처럼, 2003년 3월 8일 오후 8시 55분 경희의료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경기도 안성 출신인 조씨는 젊었을 때 경성사범학교·제물포고·서울고 교사를 지냈으며, 후에는 경희대·인하대·중앙대 교수, 대학원장, 이사 등으로 교직과 인연을 가졌다. 문단에서 그는 언제나 너그러운 웃음을 띤 반듯한 신사였다.
‘목마와 숙녀’를 쓴 박인환과 더불어 그의 파이프 담배는 유명하다. 특히 지긋하게 눌러쓴 도리우찌(사냥모자)는 그의 오랜 멋으로 굳어져 있다.
조병화 시인은 자유로운 삶의 응시, 인생이라는 흐름 속에 솟구치는 죽음·허무·고독 같은 주제와 늘 대면했다. 부인을 1998년에 먼저 보내고 이듬해 낸 ‘시와 그림’이라는 시화집에는 아내 없이 긴긴밤을 홀로 보내야 하는 노구(老軀)의 심사가 어려있다.
그는 생전에 시집·시선집·시론집·수필집 등 160여권의 책을 남길 만큼 정열적인 집필을 쉬지 않았다. 그는 또한 서울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작업실에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 1973년부터 유화전과 시화전을 20여차례(초대전 포함)나 가진 바 있다. 조병화 시인은 시 계간지 ‘시로 여는 세상’에서 실시한 여론조사(2002년 봄 창간호) 결과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생존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했다.
1999년 미국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사망
미국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가 1999년 3월 8일 폐암으로 사망했다. 85세였다. 1936년부터 1951년 은퇴할 때까지 3차례 아메리칸리그 MVP를 수상했고 9차례 올스타전에 나갔다. 그가 현역으로 뛰던 시절 양키스는 9차례나 월드시리즈 정상에 올랐고 디마지오는 ‘양키스의 에이스’로 불렸다.
특히 1941년 7월 16일 그가 세웠던 56개 연속안타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는 선수시절 1천7백36경기에 출장, 6천8백21타수 2천2백14안타로 통산타율 0.325를 기록했다. 또 3백61홈런,1천5백37타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1954년 숱한 화제속에 마릴린 먼로와 결혼한 그는 1년여 짧은 결혼생활보다 이혼 후 먼로에 대한 애절한 사랑으로 더욱 미국인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사랑을 받았다. 1955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디마지오는 은퇴 후 집이 있는 플로리다주 할리우드에 ‘조 디마지오 어린이 병원’을 설립, 결손가정 어린이들을 돌보면서도 야구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
1997년 여야 3당 노동관계법 단일화로 노동법 사태 일단락
1996년 12월 26일 신한국당의 노동관계법개정안 날치기통과로 사상 초유의 노동계 총파업을 야기했던 노동법사태가 2개월여만인 1997년 3월 8일 일단락됐다.
여야는 이날 국회에서 신한국당 이상득, 국민회의 이해찬, 자민련 허남훈 정책위의장과 이긍규 국회환경노동위원장, 진념 노동부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협상을 갖고 정리해고 요건, 노조전임자 임금문제, 직권중재 대상 필수 공익사업 등 미타결 쟁점에 대해 합의를 도출해 단일안을 확정했다.
협상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대목은 정리해고제와 복수노조 허용문제였다. 여야는 정리해고의 요건에서 기업의 인수. 양도. 합병의 경우를 제외하고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있을 때로 한정했고 또 정리해고에 대한 근로자들의 반발을 우려, 2년간 시행을 유예키로 했다. 또 상급단체 복수노조는 즉각 허용하되 기업단위 복수노조는 5년간 유예한 뒤 시행키로 했다.
직권중재 대상 필수공익사업의 범위에 의료사업, 철도, 방송을 포함시키고 은행, 시내버스 운송사업은 2001년부터 대상에서 제외하되 한국은행은 계속 필수사업으로 두기로 했다. 또 임금을 포함한 단체협약 유효기간은 2년으로 했다. 이 노동관계법 단일안은 10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통과된 법안은 `근로기준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노동위원회법`과 종전의 노사협의회법에서 명칭이 변경된 `근로자참여 및 협력증진법` 등 4개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하나회 숙정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3월 8일 김진영 육균 참모총장과 서완수 국군 기무사령관을 전격 교체함으로 군 사조직 하나회 숙정을 시작했다. 이는 1980년 신군부세력 등장이후 군요직을 독점하다시피 해온 육군 내 하나회 인맥의 대수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공이후 군부를 주름잡아 왔던 하나회 출신 제거는 김영삼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과감한 결단에 따른 것이다.
하나회는 육사 11기생의 친목모임인 ‘칠성회’ 로부터 시작됐다.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영남출신 육사 11기생 7명이 초급장교시절이던 1958년 결성한 칠성회는 5.16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로 군부내 요직을 장악하면서 후배들을 끌어들여 1962년에 하나회로 확대 발전해 왔지만 이날 부로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1990년 한필성-한필화 남매 일본에서 상봉
1971년 2월 일본 삿포로 동계올림픽 !
이 대회에 북한 스피드 스케이팅 대표선수로 출전한 한필화씨는 1․4후퇴 때 단신 월남했던 오빠 필성 (당시 38살)씨와 일본 <아사히신문>의 주선으로 국제통화를 가졌다.
여보세요, 나 한필성입니다!
오빠~ 오빠~ 나야 나, 필화야 !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두 남매는 흐느꼈지만, 당장은 서로의 눈물을 닦아줄 기회를 갖지 못했다.
필성씨는 그 길로 도쿄로 달려갔지만, 만남의 형식을 놓고 남북한 당국의 의견이 엇갈리는 바람에 간절한 상봉의 꿈은 무산될 수 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19년 뒤, 1990년 3월 8일 동계아시아대회가 열린 일본 삿포로에서야 한필성․필화 남매는 감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1989년 평민당, 주간조선 기사에 불만을 갖고 조선일보 관련자 5명을 명예훼손혐의로 고소
평민당이 1989년 3월 7일 김대중 총재의 유럽순방에 관한 주간조선 기사가 `허위-왜곡`됐다는 주장아래 수행의원들의 이름으로 필자인 조선일보 부지영 기자와 함께 고위 간부 5명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고소인들은 소장에서 "피고소-고발인들은 주간조선 제1039호(3월 5일자)에 `김대중 총재 유럽순방 뒷얘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부기자 이름으로 작성 게재, 공공연히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김총재 및 고소 고발인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평민당은 또 조선일보를 비난하는 내용이 담긴 긴급 당보 1백만부를 3월 8일자로 발행, 배포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 관계자는 김대중 총재 유럽순방 기사와 관련, 평민당측의 법적조처위협에도 불구하고 이 기사가 사실에 입각한 보도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3월 16일 평민당 총재이며 `평민신문`의 발행-편집인인 김대중씨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했다. 이 사건은 결국 1989년 10월17일 평민당이 형사고발과 민사소송을 조건없이 취하, 일단락됐다.
1983년 부산 미 문화원 방화범 김현장-문부식 사형 확정
1983년 3월 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범으로 밝혀진 김현장과 문부식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들은 방화의 동기를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올바로 정립하고 5.18에 있어서의 미국의 책임을 묻는 것 이라고 밝혔다.
이 사건은 그 당시 반미운동의 무풍지대로 인식되어온 남한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미국은 물론 온 국민을 충격 속에 몰아넣은 사건이었다.
김현장으로부터 1980년 12월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해 전해들은 문부식, 김은숙은 광주의 참상과 독재자들의 만행, 그리고 광주항쟁에 미국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상징적 의미로 부산 미문화원에도 방화하기로 결심했다.
1982년 3월 18일 4명의 여학생이 문화원에 직접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지르는 방화조로, 3명의 남학생은 부산시내에서 유인물을 뿌리면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실행에 옮겨졌다.
사건 발생 14일만에 주범 문부식과 그의 애인 김은숙이 자수했고, 방화범과 전단 살포범 등 관련자 10여명이 경찰에 의해 검거됐다. 다음날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가톨릭 원주교육원에서 문부식과 김은숙 등에게 의식화학습을 시킨 김현장을 방화사건의 배후조종혐의로 체포하는 한편, 원주교육원장 최기식 신부를 국가보안법 위반 및 범인은닉 혐의로 체포했다.
이에 따라 문부식과 김현장에게 이날 사형이 선고됐고 김은숙 등은 무기형을 선고 받았다.
이 사건은 투쟁의 격렬성과 대담성으로 인해 세인들뿐 만아니라 운동권에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1980년대 반미투쟁과 광주, 대구 등 잇따른 미문화원방화사건 및 점거농성투쟁의 선도적 투쟁이 되었다.
1981년 고려본 삼국사기 발견
1981년 3월 8일 삼국사기 최고본(最古本)이 학계에서 확인됐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로 인증된 책자는 성암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삼국사기본으로 밝혀졌다. 이 책에서는,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라고 알려졌던 정덕본과 서로 다른 글자가 발견돼 학계는 성암본이 정덕본보다 앞지른다고 발표했다.
성암본으로 이름 붙여진 삼국사기 최고본은 지난 1975년 서울에서 열렸던 국제도서관학회 학술회의에 그 목록만이 이 분야 책자중 최고일 것이라는 단서가 붙은 채 보고된바 있었는데, 그동안 학계의 연구결과로 이번에 가장 오래된 책자로 인증된 것이었다.
서강대 이기백 교수는 "성암본은 중종때 나온 것과 다른 글자이고 또 글자 자체가 선명하여 그 내용으로 보아 정덕본보다 연대가 앞서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성암본은 13세기 후반에 만들어져 삼국사기 전체 50권 중 끝부분의 `열전` 7권을 한책으로 묶은 것으로 한페이지에 9행 18자씩 들어있어 크기와 체제가 정덕본과 흡사하다.
1979년 경북 달성군 월배국민학교서 첫 태양열교실 등장
1977년 카다피, 인민주권 선언
1975년 시인 신석초 사망
1972년 홍콩, 해저터널 공사
1970년 영덕 해안초소 근무병이 해안순찰중, 동력보트와 적탄통을 발견, 수색작전 끝에 해병대 병력이 간첩 2명 사살.
1965년 알제리 여성 행진
1965년 미국 해병대 베트남 다낭 상륙
1962년 미국-소련 문화교류협정 조인
1958년 체신부, 한국 최초로 미국에 사진전송 성공
1957년 한국-터키 국교 수립
1954년 정부, 형사소송법 비토
1949년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 결성
일제 병영교육의 잔재로 좌익으로부터 나라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기 위해 결성.
이후 정통성없는 정권의 교육개입 심화, 학교가 병영화되는 계기가 되고 반공교육의 첨병이 된다.
이승만 정권 건국 직후의 교육정책은 초대 문교부장관인 안호상이 내세운 `일민주의'라는 교육 슬로건에서 집약된다.
일민주의라는 이념은 겉으로 민주민족교육을 표방하면서도 이면으로는 반공교육, 교육과 정치의 조합관계를 틀 짓는 극우 민족주의 이론이었다.
이 이념에 따라 1948년 12월 중등학교 이상의 각급 학교에 학도호국단 조직, 배속 강교제, 중^고 교감^교장에 대한 사상, 시사, 군사과목 중심의 재교육 등 학교교육이 군국주의화되어 갔다.
또한 1949년 11월 30일에 제정^공포된 교육법에서 `모든 교육기관은 국가의 감독을 받으며, 교육을 법률로써 정한다'라고 하여 국가의 교육감독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교육의 정치에 대한 예속은 심화되었다.
1948년 김구, 남북협상 제의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토지개혁법령 세칙 발표. 토지개혁 착수
1946년 최초의 영국 자동차를 만든 란체스터 사망
1942년 일본군 버마수도 점령
1930년 미국의 제27대 대통령(1909-13) 태프트 사망
1921년 소련 신경제정책 채택
1920년 러시아 과격파정부 수립
1919년 만주 연길에서 조선독립신문 창간
3․1운동의 주체세력에 의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 봉기와 동시에 지하신문으로 발행된 신문이다.
조선독립신문」은 3․1운동 기획 때에 3․1운동의 한국민족측 기관지의 일종으로 기획되어 천도교 계열의 보성전문학교 교장 윤익선이 천도교측 33인의 1인인 이종일 등과 협의하여 발행한 전단 성격의 3․1운동 지하신문이었다.
조선독립신문」은 윤익선을 발행인으로 하여 그 제1호를 3월 1일 독립선언과 동시에 약 1만매를 인쇄하여 발행하였다.
이 신문의 발행인 윤익선이 일제에게 체포되자 「천도교회월보」 편집인 이종린이 천도교측 3․1운동 주체세력들과 제2호, 3호, 4호를 인쇄하여 발행하였다.
이 신문의 승계 발행인 이종린이 일제에게 체포되자 「조선독립신문」은 3․1운동의 다른 지식인 주체세력들에 의하여 계승되어 제26호(1919년 4월 10일 발행)까지 발행되었으며 그후 8월 29일 국치일에는 「국치기념호」를 내었다.
임시정부의 조직예정을 국민들에게 알린 「조선독립신문」 제2호는 바로 3․1운동의 천도교측 주체세력의 핵심요원들에 의하여 발행된 것이었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 발발
1차 대전 발발은 러시아를 더욱 궁지로 몰았다. 독일과 개전 1년 만에 15만명이 전사하고 70여만명이 부상한데다, 서부 공업지대의 함락으로 물자부족과 물가폭등이 야기돼 곳곳에서 파업과 시위가 반복됐다. 1917년은 파업과 함께 열린 해였지만, 동시에 파업을 마무리한 해이기도 했다.
‘세계여성의 날’이기도 한 1917년 3월8일(러시아 구력 2월23일),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의 한 섬유공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빵을 달라!”며 파업을 일으켰다. 러시아 ‘2월 혁명’의 봉화가 솟아오른 순간이었다. 날이 갈수록 파업 가담자가 늘어나고 시위 지역도 전 도시로 확산됐다. 시위에 합류하는 군인들도 생겨나 위에서 발포명령을 내려도 하늘을 향해 쏠 뿐 진압에는 관심조차 없고 심지어는 장교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기도 했다. 감옥 문도 열려 2400여명의 정치범이 풀려나는 등 페테르부르크는 혁명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결국 반란진압을 포기한 군 장군들의 호소에 짜르(황제) 니콜라이 2세는 황제직을 포기하고 동생에게 양위했지만, 동생마저 신변에 위협을 느껴 거부함으로써 303년 동안 이어온 로마노프 왕조가 막을 내렸다. 3월16일이었다.
빈 자리는 임시정부가 차지했지만, 스위스로 망명했던 레닌이 4월16일 돌아오면서 러시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레닌의 귀국에는 러시아의 혼란을 기대한 독일의 지원이 있었다. 10년 만에 조국 땅을 밟은 레닌 앞에는 수많은 붉은 깃발이 펄럭였고 군중들은 프랑스대혁명 노래 ‘라 마르세즈’를 부르며 그를 환영했다.
이튿날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평의회)로”라는 구호아래 10개항의 ‘4월 테제’를 발표했다. 상황도 레닌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독일군에 가한 임시정부의 무리한 대공세가 참패로 끝나 반전(反戰)을 외치는 레닌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고, 육군 참모총장의 쿠데타까지 일어나 임시정부의 위상까지 흔들렸다. 보잘것없는 소수파 볼셰비키는 혼란한 틈을 이용해 자체 군대까지 보유한 거대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10월 혁명을 향한 시계추는 점점 빨라졌다.
1910년 국제부인데이 시작
1908년 미국 여성 노동자 시위
1907년 그리스의 전 대통령(1980-85, 1990-95 재임) 콘스탄틴 카라만리스 출생
1879년 핵분열 발견으로 노벨화학상 수상한 독일 화학자 오토 한 출생
1874년 미국의 제13대 대통령 밀라드 필모어 사망
1869년 프랑스 교향곡 작곡가 베를리오즈 사망
프랑스의 교항곡 작곡가로 유명한 베를리오즈가 1869년 3월 8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남프랑스의 라코트생앙드레 출신인 그는 `표제음악`이라는 새로운 관현악곡 스타일을 창시하여 많은 작곡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위고, 리스트, 쇼팽, 힐러, 넬바르, 뒤마(부친) 등과 교유하면서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 시기의 작품에는 독주 비올라에 이탈리아의 추억을 상기시킨 교향곡 `이탈리아의 해롤드`(1834), `레퀴엠`(1837),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 `(1838), 그리고 독창과 합창이 곁든 극적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1839) 등이 있다.
1842년부터 국외로 나가 연주여행을 하면서 서곡 `로마의 사육제`(1843)를 남겼다. 또한 문장에도 뛰어나 바그너와 더불어 명문장가로 명성이 높았으며, 자서전 `회상록`은 음악가가 쓴 전기문학 분야에서 걸작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1445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간행
조선 건국의 대업을 찬미한 가요집.
10권 5책 125장.
권제․정인지․안지 등이 봉명 찬집.
6대(목조-태종) 사이의 사적을 한자와 훈민 정음을 혼합하여 가요에 연결, 관악에 맞추어 조제 연향(朝祭宴享)의 악사(樂辭)로 한 것.
조선 건국을 은(殷)․주(周) 혁명에 비유하여 합리화 시키기 위한 것.
훈민 정음 반포 전의 첫시험.
사료적 가치가 많으며, 우리글로 된 최초의 문헌으로 조선의 시가 및 고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440년 남녀성혼기를 16세, 14세 이상으로 정함(세종 22년)
1388년 최영 장군, 팔도도통사가 됨
고려 말, 명나라는 철령 이북 지방을 자기네 땅으로 삼겠다고 통고해 왔다.
이에 최영은 한 치의 땅도 명 나라에 빼앗길 수 없다고 왕에게 상주, 1388년 오늘 팔도 도통사로 임명되어 73세란 노구로 병사를 이끌고 명 나라의 땅인 랴오뚱 정벌에 나섰었다.
그러나, 고구려 옛 강토를 되찾으려는 최영의 웅대한 꿈은 우군 도통사로 따라 갔던 이 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깨지고 말았다
725년 (신라 성덕왕 24) 오대산 상원사 동종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