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지켜낸 어머니
(입력: 월간현대경영 2022년 11월)
초계 변씨 - 조선을 지켜낸 어머니
윤동한 회장 발굴 ‘이순신 장군 어머니’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서울여해재단 이사장
우리나라 100대기업 CEO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현대경영 조사)’은 이순신 장군이지만, 장군의 어머니 ‘초계 변씨’가 위대한 어머니(The great Mother)이신 것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도산서원의 액자를 쓴 한석봉의 어머니 등이 유명하지만, 이순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는 분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학자이며 한국콜마를 경영하는 윤동한 회장이 ‘기업가 문익점’과, ‘80세 현역 정걸(丁傑) 장군’에 이어, 세 번째 역사경영시리즈로 올해 ‘조선을 지켜낸 어머니-초계 변씨’를 발굴,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를 21세기 국민이 존경하는 위대한 어머니로 재현해냈다.
글_박동순 편집인
자식은 효도코자 하나 부모님은 기다리시지 않는다
윤동한 회장은 “장군의 어머니만큼 지혜롭고 위대하며, 아들 사랑이 지극했던 인물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임진왜란으로 한반도가 절체절명의 누란(累卵)의 위기에 빠졌을 때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한 초계 변씨의 정신은 위대한 어머니상(像)으로 발전시키고 재평가돼야 한다고 윤 회장은 역설한다. 한국콜마 회장이면서, 재야 역사학자로서 서울여해재단과 이순신학교를 이끌고 있는 윤 회장을 만나, 장군의 ‘하늘’인 초계 변씨 이야기를 들어봤다. 회장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기자도 매사에 어긋남이 없었던 어머니에 대한 불효가 떠올랐다. 아아! 자식은 효도코자 하나 부모님은 기다리시지 않는구나!
※여해((汝諧): 이순신 장군의 자(子)는 여해(汝諧), 호(號)는 충무(忠武)
이순신 장군 표준 초상 │이순신 장군 동상(진해 해군사관학교)
650일 전쟁 중 110일 어머니께 편지
승전과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 장군은 우리 국민들에게 온갖 난관 속에서도 나라사랑의 일념으로 백의종군(白衣從軍)하여, 한길을 걸어간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영웅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의 뒤에는 대쪽 같이 강직한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앞서 떠나보낸 초계 변씨(草溪 卞氏: 1515∼1597)는 셋째 아들 충무공을 홀로 뒷바라지하며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키워냈다. 재야 역사학자로서 이순신 연구의 ‘서울여해재단’ 이사장으로 봉직하고 있는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은 이번 ‘조선을 지켜낸 어머니’에서 초계 변씨를 소환해, 일반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변씨의 일생을 조명했다. 윤 회장은 “어머니가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충무공이라는 위대한 영웅을 길러내지 않았더라면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어쩌면 조선은 사라지고 말았을 수도 있다”고 역설! 이순신 장군과 어머니 변씨의 관계는 일반 모자 관계보다도 돈독했는데, ‘난중일기(亂中日記)’에 기록된 약 650일의 일기 가운데, 어머니를 사모하며 쓴 편지와 일기가 110일이 넘을 정도라고 한다. 어머니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장군의 몇 가지 애달픈 글을 독자와 함께 음미해보자.
1592년 1월 초하루 일기 이후, 장군이 어머니에게 보낸 몇 가지 글을 보자.
•아산 어머니께 문안차 나장(羅將: 조선시대 병조에 속한 하급병사 또는 나졸) 두 명을 내어보냈다. (난중일기 1592년 2월 14일)
•아침에 어머니께 보낼 물건을 쌌다. 저녁나절에 여필(장군의 동생 우신)이 떠나갔다.
객창에 홀로 앉았으니 만단의 회포가 어리어온다. (1592년 4월 초파일)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날이건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祝壽)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 한이 되겠다. (1593년 5월 초4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씻어라”
이순신 장군의 가족사(家族史)를 보면, 아버지 이정(李貞)과 부인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위로부터 희신(羲臣), 요신(堯臣), 순신(舜臣), 우신(禹臣)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과 남편, 큰 아들 순으로 모두 세상을 떠났고, 재산마저 화재로 날려버렸다. 그러나 초계 변씨는 그대로 주저앉아 포기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근성과 자주·자립의 정신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별급문기(別給文記) 조선시대, 재산을 증여할 때 사용하던 문서)’를 발간하는 등 이재(理財)에도 철저하고 꼼꼼하게 밝았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집은 원래 서울 건천동(乾川洞: 을지로 3가 일원)으로, 과거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모여든 동학과 가까웠고, 무과생들을 위한 훈련원도 가까워, 자식 교육에는 좋은 입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순신의 조부와 남편이 벼슬에서 멀어지면서 가세가 기울고 자식들의 입신출세에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자, 어머니는 가솔을 이끌고 변씨 가문의 터전인 아산으로 두 번째 이사를 한다. 변씨의 세 번째 삶터는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 송현동이다. 그는 아들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있을 때 아들과 가까운 이곳에서 생애 마지막 5년 동안 기거하며 장군을 물심양면으로 도와, 당시 우리나라가 열세(劣勢)를 이겨내고 23전 23승으로 왜군을 격멸한 아들의 지킴이 역할을 했다. 누구보다 섬세하면서도 배포가 큰 여장부였던 어머니가 장군의 정신적인 ‘안정처’ 역할을 한 것은 ‘난중일기’ 곳곳에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갑오년(1594년 1월) 음력 설날, 폭우가 쏟아졌다 장군은 이렇게 시 한수를 기록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비기 퍼붓는 듯 내렸다.
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한 살을 더했다.
전쟁 중이라도 행복한 일이구나. (1594년 1월 초1일)
초계 변씨가 노령에도 불구하고 홀로 여수로 내려간 깊은 뜻은 무엇일까?
“내 아들이 기쁠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어디든 감당할 것이다.”
이리하여 동년 1월 11일∼12일에 드디어 모자(母子) 간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던 이날, 이순신 장군은 작정하고 어머니를 찾았다.
아침에 어머니를 찾아뵈려고 배를 탔다. 바람 따라 한달음에 곰내(어머니가 사시는 여수 웅천)에 이르렀다. 어머니를 뵙고 인사들 드리려 했더니 여전히 주무시며 일어나지 않으셨다. 큰 소리로 불렀더니 놀라 깨어 일어나셨다.
기력은 약하고 숨이 금방 끊어지실 듯, 해가 서산에 이른 듯했다. 남몰래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시는 말씀에는 어긋남이 없으셨다. 적을 무찌를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장군은 이날 하루를 어머니와 함께 하며 어머니를 위로해드리고 잠까지 같이 잤으니, 더 이상 이룰 소원이 없을 만큼 모자간에 회포를 풀었다.
다음날(1월 12일) 아침, 다행히 날씨는 맑았는데 어머니도, 아들도 헤어지기 싫었을 것이다.
당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를 맡고 있던 장군은 어머니에게 이별을 고했다. 바로 이 이별의 글이 난중일기에서 가장 스펙터클(spectacle)한 장면이 아닐까?
“아침식사를 한 뒤에 어머니께 돌아가겠다고 인사를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라고 분부하여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이별하는 것을 탄식하지는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오니 몸이 좀 불편한 것 같아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 난중일기(1594년 1월 12일)
윤동한 회장은 바로 이 스펙터클한 상황과 관련, “한반도 어머니들 가운데 이런 어머니는 없을 것 같다”며 “노령의 어머니는 이 상황에서 헤어지기 싫어하며 매달려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의연했다”고 풀이한다. 장군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사랑한다. 아들아. 몸조심하라”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부디 나라의 치욕을 씻어야 한다”고 했으니, 이 스펙터클한 장면은 ‘장군의 위대한 어머니’라는 타이틀의 영화(K-무비)로 만들어 전 세계에 알리면 좋지 않을까?
어머니의 국가관(國家觀)은 이순신 장군의 자립, 자주, 충성의 가치관을 쌓아나가는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 어머니의 목숨을 건 뱃길 상경이다.
“나의 관을 짜서 배에 실어라”
정유년(1597년),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호시탐탐 재침을 노리는 일본군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모함에 착수했고, 속 좁은 선조와 조정의 대신들이 이른바 ‘짜고 치는’ 음험한 계략이 작동했다. 조선의 이런 상황을 간파한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이순신이 있는 한 서해로 나갈 수도 없고, 나가봐야 패전이 분명해지자, 선조가 이끄는 조정과 이순신을 갈라치기했다. 결국 1597년 2월 장군은 한산도에서 체포되어 그해 3월 4일 서울 전옥서(典獄署: 교도서)에 수감되었다. 아들의 하옥(下獄)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이번 일로 아들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다시 서울행을 감행한다. 다른 아들과 손자가 말리는 와중에서도 어머니는 “나의 관을 짜서 배에 실어라! 나는 죽어서도 서울에서 통제사 아들을 만나고야 말 것이다”라고 부르짖으며 서울행에 올랐다.
어머니는 배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 계속 빌었다.
“하늘이시여! 내 목숨을 받으시고 내 아들 순신을 제발 살려주소서!”
마침내 어머니는 “내가 죽고 아들이 살아야 한다면 마땅히 죽겠다”라는 결단으로, 당시 뱃사람들도 꺼려하는 음력 2, 3월의 험난한 뱃길을 따라 서울로 향한 것이다.
“내가 죽고 아들을 살릴 수 있다면?”
오호통재(痛哉)라!
노약한 변씨는 배를 타고 비바람을 맞으며 상경하던 중애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었다.(1597년 4월 11일)
그러나 하늘의 도움이신지, 변씨의 염원대로 순신은 옥에서 풀려났다.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어머니 앞에서 순신은 하늘이 캄캄해져 뛰쳐나가 가슴을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난중일기에는 당시의 통한을 이렇게 기록했다.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며 울부짖었다.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에필로그 - 국민의 어머니상(像)으로 모시자
어머니를 영원히 보내는 장군의 몸부림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애통의 현장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자신이 어머니에게 씻을 수 없는 불효를 저질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명량에서, 노량에서 보여준, 목숨을 건 승전보(勝戰譜)는 “바로 어머니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처절한 은혜 갚음이었을 것”이라고, 윤동한 회장은 결론내리고 있다.
장군의 그리움을 하늘도 허용하신 것일까. 결국 장군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바로 그 다음해(1598년 11월 19일),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노량 앞바다에서 장렬하게 목숨을 던졌다.
윤동한 회장은 “우리 역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만큼 위대하며 아들 사랑이 지극했던 역사적 인물을 찾아낼 수 없다”며, “장군의 어머니 초계 변씨를 국민의 어머니상(像)으로 재조명하자”고 당부하는 것으로 끝맺음하고 있다.
장군의 어머니를 21세기 ‘위대한 어머니’로 소환한, 윤동한 회장께 독자를 대신하여 감사 올린다.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백성 사랑과 불굴의 정신으로 무패의 신화를 만든 난세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는 이순신 정신을 선양하고 교육함으로써 이 사회의 근본을 바로 세워 밝고 건강한 사회를 이룩해 이를 후손에게 물려줄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강의일정: (제16기) 2022년 10월 31일∼12월 19일 | 매주(월) 강의 8회 및 수료기행
모집대상: 공사기업체 임직원 (30명)
수 강 료: 1인당 50만원
홈페이지: seoulyeohae@naver.com
윤동한 회장은
한국콜마 회장 서울여해재단 이사장 경영학 박사
농협중앙회 근무 대웅제약 부사장 한국콜마 대표이사 회장
2014년 다산경영상 수상, 국민훈장 동백장
2018년 한국능률협회 ‘한국의 경영자상’
2019년 언스트앤영(EY) ‘최우수 기업가상’
저서: 인문학이 경영 안으로 들어왔다(2016), 기업가 문익점(2018), 80세 현역 정걸 장군(2019)
조선을 지켜낸 어머니(2022)
* 자세한 내용은 월간현대경영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2022.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