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압구정로를 달린다. 욕망과 소비, 화려함과 환락이 번득이는 곳. 새벽 2시의 거리에도 불빛은 사그라들지 않고, 흥청거리는 군상(群像)들은 밤을 잊었다.
뒷좌석에는 20대의 젊은 여자가 혼자 앉아 있다. 조금 전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훌쩍거리는 소리까지 내고 있다. 룸미러로 힐끔힐끔 그녀를 훔쳐 보면서도 나는 예전에 분명히 가졌음직한 호기심 따위가 솟아나지 않음을 느꼈다. 이상한 것은 그뿐이 아니다. 10시간이 넘도록 식사를 하지 않았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다. 택시운전을 시작한 후 신체 대사나 여러 사고(思考) 작용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을 가끔 받는다.
반포에 이 여자를 내려주고 어디로 가야 할까 하는 생각만 머리 속을 맴돌고 있다. 그리고 승객 한두 팀을 더 실어 나른 후 급히 독산동 차고지로 돌아가야 한다. 환락의 거리와 그 거리 속에서 울고 웃는 군상들의 사연에 관심을 둘 여유는 팍팍한 삶에 찌든 기사들에게는 없다. 지금 이곳과 이곳을 헤매는 사람들은 택시에 있어 가장 큰 수입원이며, 지금 이 시간은 가장 부지런히 달려야 할 시간인 것이다.
뒷좌석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조금 전 청담동에서 여자와 함께 타 분당으로 가자고 하다가 여자가 끝내 거부하자 차를 세우고는 내려버렸던 그 남자에게 거는 전화 소리였다. “이제 그만 만날 거지” 어쩌고 하다가 전화를 끊고 차를 길가에 세워달라고 한 후 한동안 눈물을 흘리고 있다. 피 같은 시간이 흐른다. 나는 그 여자의 눈물에 대한 궁금증보다도 분당으로 가자던 남자를 말려 장거리 운행 수입을 올리지 못하게 하고, 얼마 안 남은 영업시간까지 축내고 있는 여자가 미울 뿐이다. 잠시 후 여자는 1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흘리듯 던져두고 떠나 버린다. 거스름돈을 줄 여유는 없었다. 조금은 화가 풀린다.
8년 동안 해온 ‘기자’라는 직업을 잠시 접어두고 ‘기사’가 된 지 8일째. 처음 미터기도 꺾지 않고 목적지까지 갔다가 낭패를 봤던 풋내기는 이제 사고방식이나 행동까지도 그들을 닮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흉내를 낼 수 있을 정도일 뿐이다. 오늘 수입금 20만원을 돌파해보자고 작심했던 것 역시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졌고, 8일 동안 기사들의 하루 평균 수입에 도달한 날도 이틀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차고지에 돌아가 수많은 사람들의 구둣발에 짓밟힌 매트를 모두 꺼내 씻고 세차를 한 후 택시회사 앞 육교를 건너갈 때면 발 밑이 붕붕하고 흔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집에 돌아가 지친 몸을 누이면 온몸이 누운 자리에서 빙빙 도는 것 같지만 잠은 금방 들지 않는다.
초보 기사는 30대 젊은 나이라도 3개월 동안은 집에서 잠만 자야 그런 현상이 없어진다고 한다. 나는 아직 2개월 20일을 더 견뎌야 할 것이지만 이제 내일은 이 ‘위장취업’을 그만두고 기자로 돌아갈 것이다.
지난 8일 동안 나는 실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젊은 기사 아저씨 힘 내라며 몇 백원 잔돈을 받지 않으려던 출근길의 아가씨, 입으로 돈을 물어뜯어 던져주던 취객, 도착할 때까지 계속 전화에다 욕만 해대던 목수 아저씨, 길이 막혀 차비가 많이 나왔다며 요금을 깎던 여자….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선배 기사’들의 모습이다. 교대받을 차가 늦게 들어온다며 안절부절못하던 기사, 사고를 내고 면허정지를 당한 후 막막한 앞일을 걱정하던 기사, 그리고 내게 새벽 출근 택시비가 부담이 되면 버스가 다니는 시간으로 교대시간을 바꾸라고 말해주던 관리부장의 모습들은 모두 지금껏 직접 보지 못했던 처절한 삶의 모습을 생생히 느끼게 해줬다.
●생생한 ‘생활전선’ 새벽부터 실감
서울 독산동 S택시로 첫 출근하던 11월 14일 목요일 새벽 3시. 긴장감으로 뒤척이다 두 시간 남짓 눈을 붙이고 나온 길은 쌀쌀했고, 두려웠다. 길거리를 청소하고 있는 환경미화원들과 공사판에 나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인부들을 보면서 새벽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심정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첫날 나는 3년 6개월 동안 61만㎞를 달린 낡은 쏘나타3 택시를 배차받았다. 전속(專屬) 운행 차량이 없는 이른바 ‘스페어(spare) 기사’인데다가 영업용 운전 경력도 전혀 없는 나에게 첫날부터 좋은 차를 줄 리 만무한 노릇이었다.
거리에는 빈차들이 널려 있었지만 손님들의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막막했다. 우선 길을 잘 알고 유흥가가 있는 신림사거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도착할 때까지도 사람은 없었고 도착해서도 모든 방향으로 줄지어 서 있는 빈차의 행렬 때문에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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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의 택시들.위로부터 1955년 미국 지프를 개조해 만든 시발택시.1962년 국산기술로 조립생산된 시발택시,1975년부터 시판된 국산 자동차1호 포니 |
서울대 반대 방향으로 차를 대놓고 기다리자 8대 정도 서 있던 앞차가 한 대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30여분을 기다린 끝에 30대 여자 한 명이 탔다. “성대시장(대방동)이요”라고 말할 때 술냄새가 풍겼다.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더 드릴 테니까 좀 올라가 주세요”라고 했다. 신림동 작은 술집의 주인 혹은 마담쯤 될까.
양쪽에 빽빽이 차들이 주차돼 있는 좁은 언덕길을 낑낑대며 올라가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청소차가 왔다. 그 여자는 빨리 내려야겠다면서 3000원을 줬다. 그제서야 미터기를 꺾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미터기 미사용 영업은 벌금 40만원감이다. 그 여자는 “매일 타서 아니까 괜찮아요”라면서 “원래 2000원쯤 나오는데 기사들은 가깝다고 싫어해요”라고 했다. 실제 당해보니 참 싫기는 싫은 일이었다. 막히지 않는 시간에 조금만 달리면 1만원은 벌 수 있는데 30분이나 기다려서….
여자가 내린 후 차를 빼는 게 더 힘든 일이었다. 청소차를 피해 100m쯤 후진하는데 진땀이 났다. 승용차가 이렇게 뻑뻑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가속페달도 쉽게 밟히지 않아 가볍게 차듯 밟아야 덜컥하고 내려갔고, 언덕길은 2단 기어로도 오르기 힘들 만큼 힘이 없었다. 10여년 전 면허시험을 칠 때 몰아봤던 1.5t 트럭보다 더 심하게 느껴졌다.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이미 왼쪽 무릎이 아파왔다. 첫 수입 3000원의 가치가 새롭게 느껴졌다.
별수없이 다시 신림사거리에 차를 대 4시45분쯤 게임방에서 밤을 샜다는 대학생을 태웠다. 쑥고개까지 2000원이 나왔고, 그는 “돈 많이 버세요”라면서 내렸다. 그 말 때문에 새벽에 배차해주던 부장이 ‘한 시간에 1만원은 찍겠다는 생각으로 해보고, 새벽 5시까지는 조금 더 벌도록 해보라’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5시가 다 됐는데 총 수입은 5000원. 시내버스마저 다니기 시작해 마음은 더 초조해졌다.
가까운 봉천사거리 쪽으로 넘어가는데 뒤따라오던 빈차가 급하게 추월을 하더니 편의점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젊은 여자 앞에 차를 댔다. 뒤에서 지켜봤더니 1~2분 후 여자들은 그 택시를 타고 떠나갔다. 화가 치밀었다. 나중에 터득하게 된 택시 노하우 중 하나는 빈차로 달릴 때도 여유를 부리지 말고 ‘목표물’을 발견할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 빨리가야 하며, 특히 다른 빈차에 추월당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빈차들마저 씽씽 달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여자들이 떠난 후 빈차도 사람도 없는 그곳에서 오기로 5분을 기다리자 여관골목 쪽에서 40대쯤의 남자가 나와 중부경찰서로 가자고 했다. 중부서야 기자라면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곳이니 세 번째 손님까지 길 모르는 곳에 가자는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5시30분 중부서에 도착했고 남대문 시장, 홍제동, 서울역 등을 돌며 영업을 했다.
그런데 6시부터 7시까지 엄청나게 헤맸지만 신기할 정도로 손님이 없었다. 서울역 앞 택시승강장에 갔다가 세 줄로 늘어선 수십대의 빈차 행렬 뒤에서 5분을 기다려도 단 한 대도 빠지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서 차를 빼기도 했다. 택시 운전을 하는 동안 가장 끔찍했던 것은 경찰차가 아니라 가도가도 끝이 없는 빈차 행렬이었다. 타려고 할 때는 잘 안 보이던 빈차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새벽 3시가 넘어서도 5시까지는 어느 정도 승객이 있지만 그때부터 7시 무렵까지는 손님이 가장 없는 시간이다. 개인택시의 부재 기준 시간이 4시이기 때문에 3~5시까지는 운행하는 택시 수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택시기사, 대접 못 받는 전문가들
7시 무렵 날이 밝고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해지기 시작하자 영업도 조금씩 풀려나갔다. 지하철이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해 홍제역에서 세검정 쪽으로 우회전을 했더니 기본요금 손님이었지만 한 명이 탔다. 다시 하림각 쪽으로 가서 홍제동 아파트에 가는 아주머니를 태웠고, 7시20분쯤 그 아파트 단지에서 신정동 어느 고등학교에 앨범 사진을 찍으러 간다는 스튜디오 주인을 태웠다. 교통방송에서는 출근길 정체가 시작됐다고 했지만 내가 가는 길은 막히지 않아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길을 몰라 좀 헤매는 바람에 1만1600원이 나왔는데 1만1000원만 받았다. 어찌됐든 처음으로 1만원이 넘는 장거리 손님이었다.
신정동 골목길을 빠져나오다가 합승도 하게 됐다. 출근 중인 젊은 여자가 타서 목동역으로 가자고 해서 내가 길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하자, 그녀는 의아한 듯 “왜 택시기사를 하게 됐어요?”라고 물었다. 곤혹스러웠다. 골목길에서 막혀 서 있는데 또 다른 젊은 여성이 목동역을 외치며 다짜고짜 탔다. 합승을 하다 걸리면 벌금이 20만원이라는 사실을 나는 며칠 뒤 택시회사 게시판을 보고서야 알았다.
길이 막혀 목동역에 다 와서 좀 서 있는 바람에 2200원이 나왔고, 내가 2000원씩만 받으려 하자 굳이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두 개씩 더 꺼냈다. 그리고는 “운전하신 지도 얼마 안되는 것 같은데…”라고 했다. 순간 정말 택시기사가 된 것처럼 가슴이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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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방역 앞에서 줄지어 손님을 태우는 택시 행렬 |
목동역 근처 지리를 몰라 사람은 없고 차는 막히는 길로 들어가 고생을 했다. 어딘지도 모르고 우회전하자 대림3동사거리로 가자는 출근길 청년이 탔다. 그에게서 길 지도를 받아가며 가긴 갔지만 다시 가보라면 자신이 없었다. 택시 영업을 하면서 길을 모르는 게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고참 기사들은 택시 경력 6개월은 돼야 서울시내 간선도로를 대충 알게 되고, 1년은 지나야 손님들이 말하는 지명을 대략 다 알아듣게 되며, 2년은 돼야 좁은 길까지 어느 정도 알게 된다고 말했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 기사가 돼서도 제대로 된 기사가 되려면 2년이 더 걸린다는 얘기다.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뉴욕 맨해튼도 번지만 알면 길 찾기는 쉽지 않은가. “택시기사나 해볼까”하는 말은 뭘 모르고 하는 얘기다. 서울의 택시기사들은 수가 많아서 그렇지 아무나 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 전문가들이다. 그러나 별로 대접 받지 못하는 전문가들인 셈이다.
택시기사를 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손님들의 매너가 생각만큼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 오전 8시30분쯤 태운 점퍼 차림의 40대 사내 같은 몇몇 사람 때문에 택시기사들은 엄청 고생을 한다. 그는 택시를 타면서 핸드폰에 한참 고함을 지르기만 하고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다. 아침인데도 술냄새가 심하게 풍겼다. 사거리 바로 앞에서 타고서도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대기하고 있자, 전화를 든 채로 “봉천4동 가요”하고 고함을 질렀다. 차를 출발시키자 “아 좌회전하라니까”라며 또 고함을 질러 할 수 없이 좌회전 차선으로 무리하게 끼어들었다. 차들이 빵빵댔다. “하여튼 영업용들은…” 어쩌고 하는 소리가 뒤통수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사내는 잠시 후 전화를 끊더니 봉천동 공사 현장에 원래 6시까지 갔어야 하는데 새벽까지 카드를 치느라 늦었다면서, 내게 공사판에 따라다니면 하루에 7만원은 버는데 왜 이 짓을 하느냐고도 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온갖 육두문자를 쓰면서 어제 따간 50만원을 오늘 밤에 다시 토하라고 욕을 했고, 계속 담배를 피워댔으며, 컵홀더에 담겨 있던 내 물병을 입을 대고 마셨다.
●첫날 한끼 먹고 11시간 일해 8만원… 순수익 2만원
더 큰 문제는 당곡사거리를 지나 은천길로 접어들면서 일어났다. 9시가 지났는데도 차가 막혀 꼼짝하지 않자 그는 왜 다른 길로 가지 않았느냐고 난리를 쳤다. 9시20분쯤 목적지에 도착하자 요금은 9700원이 나왔는데 그는 9000원만 주고 가버렸다. 나는 차에서 내려 생수병을 휴지통에 처박아 버리고, 심호흡을 했다. 길이 막혀 출근시간에 1시간 가까이 손님을 태우고도 1만원도 못 벌었고 뻑뻑한 클러치를 계속 밟아 대느라 다리만 아팠다.
10시30분쯤 집 근처로 가게 돼 집에서 밥을 먹었다. 7시간 동안 계속 일을 해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화장실에 가고 싶긴 했지만 택시를 몰고 기사식당 같은 곳에 가는 것이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식사 후에는 그 이전보다 더 성적이 안좋았다. 대방역에서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기본요금 손님을 태우고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해 20분을 갇혀 있었고, 노량진역으로 넘어와 20분을 기다려 태운 손님은 내가 길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하자 앞에다 차를 세워달라면서 냉큼 내려버렸다. 1시간쯤 그냥 날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신도림역에 가서 줄서 있는 빈차들의 행렬에 놀라 차를 돌린 다음에는 30여분을 빈차로 헤매기도 했고, 영등포역까지 빈차로 와 대기한 끝에 남자 4명을 태우고 목동으로 가서 4000원을 받아들고 택시 요금이 참 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오후 3시 차고지로 돌아오면서 손에 쥔 돈은 8만2000원. 한끼만 먹으면서 11시간을 일해 번 돈이다. 손님을 태운 횟수는 23번이었는데 한 번에 평균 3500원꼴밖에 안되는 짧은 거리였던 것이다. 총 주행거리는 190㎞. 보통 택시기사가 주간에 평균 200~230㎞를 달려서 14만~16만원의 수입을 올린다는 것에 비하면 크게 모자라는 성적이었다. 사납금 4만원, 가스비 1만4000원, 아침 출근 때 탄 택시비 7000원 등 6만1000원을 빼면 순수입은 2만원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다른 기사들처럼 한두 번 밥을 사먹었다면 이날 순수하게 번 돈은 1만원 남짓뿐일 것이다.
관리부장은 첫날 8만원 정도 찍었으면 잘 한 것이라고 했지만 다른 고참 기사는 “놀지 않고 하기는 했느냐”고 물어 기를 죽였다. ‘내가 만약 생업으로 택시를 몰게 됐다면’하고 생각하자 눈앞이 캄캄했다. 오늘 내가 뭘 잘못했을까. 쉬지 않고 일했고, 손님에게 친절히 대했으며, 가자는 곳에 다 갔다. 그게 잘못된 것일까.
이튿날은 수입이 좀 나았다. 미터기에 찍은 것은 10만5000원 정도였지만 실제로는 11만원 정도를 벌었다. 사납금 등을 빼고 4만2000원 순수익이었다. 그러나 이것에 25를 곱해도 월 100만원 조금 넘는 돈일 뿐이다. 역시 4인 가족 최저 생계비정도밖에 안되는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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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정 무렵 광화문에서 택시를 잡기 위해 길거리로 나서고 있는 시민들 |
첫 출발은 덜컹거렸다. 새벽 3시10분쯤 회사에 도착했지만 3시간 넘게 하릴없이 기다리다가 6시30분이 돼서야 배차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입사가 얼마 안 된 ‘스페어 기사’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했다.
차를 몰고 나와 남부순환도로를 동쪽으로 달렸다. 기본요금 남짓한 손님을 기다리며 가슴을 졸이던 첫날 생각을 하면서 어찌됐든 강남으로 한번 가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낙성대 쪽에서 택시를 잡은 첫 손님은 믿기지 않는 소리를 했다. “분당 가 주세요.” 고속도로를 거쳐 분당 서현동까지 가는 데 4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미터요금에 2000원을 더 얹어줬고, 바로 돌아오지 않고 다른 서울 택시들과 함께 대기해서 역삼동으로 출근하는 승객까지 태우는 바람에 왕복으로 3만원 넘게 벌었다. 나올 때 차가 막히긴 했지만 8시50분까지 2시간여 만의 수익으로는 짭짤했다. ‘아 이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돌리려는데 바로 어떤 중년 여자가 탔다. 앞쪽에서도 합승을 하겠다는 뜻으로 몇명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주 미안한 듯 골목길로 들어가자고 한 여자는 약 3분 후 내리면서 2000원을 주고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다. 그 다음 태운 매봉역에서 내린 2300원짜리 손님도 3000원을 내고 그냥 갔다. 역시 강남이었다. 강남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날 영업은 대체로 순조로웠지만 오후에 낭패를 당했다. 교대시간 때문이었다. 요금을 깎는 손님은 오전에도 있었다. 남산에서 중구청으로 가는 30대 초반의 여자는 퇴계로 3가에서 명보극장 쪽으로 좌회전하려 하자 더 가서 중구청 사거리에서 좌회전해야 한다고 우겼다. 가봤더니 좌회전 금지였고, 더 가서 U턴을 해도 진입조차 할 수 없게 돼 있었다. 그녀는 왜 좌회전을 안 하느냐고 난리를 치면서 요금은 2400원 나왔는데 2000원만 던지듯 하고 가버렸다. 이틀 동안 ‘황당형’ ‘깍쟁이형’ ‘무식형’의 세 가지 요금 깎는 유형을 모두 만났으니 의외로 이런 일이 많을 것이라고 짐작됐다.
청량리역에서 차 트렁크가 열려 있는 사이 대학생 3명이 무거운 철제함을 트렁크에 막 싣고 있었다. 외대에 간다는 그들에게 교대시간이라 힘들다고 했지만 못들은 양 차에 탔고 그야말로 그 유명한 떡전교 밑을 정면으로 뚫고 외대 정문을 통과, 학생회관 앞까지 갔다. 택시를 몰고 대학 구내에 들어서니 기분이 묘했다. 4400원이 나왔고, 학생들은 영수증을 떼 달라고 했다. 내가 택시를 모는 8일 동안 영수증 발급을 요구한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 차량마다 몇만원씩 들여 달아놓은 자동 영수증 발급기는 효용성 없는 투자같았다.
영동 프리마호텔에 간다는 학생을 태우고 강남 쪽으로 빠져나오는데 동부간선도로 역시 엄청나게 막혔다. 주5일 근무제가 정착되기 시작하면서 금요일 오후는 예전의 토요일보다 더 막혔다. 프리마호텔에 내려주고 독산동 차고지 쪽으로 급히 방향을 잡았다.
이때 ‘기자’와 ‘기사’는 ‘마감’에 쫓긴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감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큰 문제가 생기고 누군가 신경질을 낸다는 것도 똑같으며 쫓기는 시간 동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도 똑같은 것 같았다.
테헤란로로 내려와 서쪽으로 달리는데 승객들이 계속 손을 들었다. 방향이 맞을 때만 태우고 달렸는데 방배역까지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직진방향을 가리키며 합승하려는 사람도 많았다. 이들을 다 태우면 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배역부터는 완전히 장사를 포기하고 그냥 달렸지만 꽉 막혀 돈도 못벌면서 교대시간을 1시간30분이나 넘긴 5시30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자신도 ‘스페어 기사’라는 교대자는 엄청 인상을 쓰면서 “전속 기사에게 걸렸으면 더 혼난다”고 말했다.
장사를 하지 못했지만 노하우를 하나 얻었다. 우연이긴 했지만 내가 차고지로 돌아오는 길이 손님이 많은 이른바 ‘맥’을 짚는 길이었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고참 기사들이 ‘리듬’이 있다고 한 말이 실감났다.
11월 16일 토요일은 최악이었다. 역시 6시쯤 배차를 받아 남부터미널과 잠실 쪽을 돌면서 오전에는 잘 나갔는데 오후에는 꽉 막혀서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여의도에서 평창동까지 1시간30분 걸려 1만5000원을 번 것 이외에는 이렇다할 돈 되는 일이 없었다.
●‘여의도 출근길 합승’, 그러나 별로 안 남는 장사
11월 17일 일요일은 완전히 뻗어버렸다. 자명종까지 눌러버리고 자는 바람에 눈을 떠보니 5시가 넘어 있었다. 운전 사흘째가 가장 힘들다고 했는데 사실이었다. 황급히 출근해 6시30분쯤 차를 끌고 나왔다. 일요일은 다니는 사람은 적지만 나오는 기사 수도 적고 길도 안 막히기 때문에 장사는 괜찮게 되는 편이었다. 게다가 비까지 내려 가까운 거리 손님이라도 심심찮게 있었다.
이날 터득한 중요법칙은 사람이 많을 것 같은 곳엔 택시도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손님은 많지만 태우려면 많이 기다려야 한다. 오전에 흑석동에서 인천공항에 가는 손님을 태우고 4만원을 받았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공항에서 망신을 당했다. 여객터미널 택시 계류장에 들어가려 했더니 막혀 있었고 번쩍하고 사진이 찍히는 것이었다. 게이트에 앉아 있는 직원이 창문을 열고 “여기서 영업 처음 하느냐”고 묻더니 “순번이 되면 부르게 돼 있으니까 택시주차장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택시 주차장에서 1시간을 기다려도 연락이 올 기미가 없었다. 다른 기사에게 물어봤더니 “1시간 기다렸으면 아직 멀었다”며 “7시간까지 참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말을 듣자마자 빈차로 나왔다. 오후에 하얏트호텔에 가서도 늘어서 있는 빈차에 질려 바로 돌아나왔다.
이튿날 월요일에는 고참기사들이 말하는 ‘출근길 단거리 합승’에 도전해봤다. 8시30분쯤 여의도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택시를 타는 대방역 여의도 쪽에 차를 댔다. 실은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는데 줄 제일 앞에 서서 “라이프”라고 말한 사람을 태우고 출발하려하자 뒤에 줄서 있던 사람들이 마구 몰려들면서 행선지를 외치기 시작했다. “63”, “국민은행” “별관 뒤” “성모병원” 등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라이프 가는데요”라고 했더니 성모병원 가는 사람이 문을 열고 탔다. 나는 라이프를 라이프상가로 알아들었는데 63빌딩 옆의 라이프 오피스텔을 일컫는 것이었다. 그걸 알았다면 승객에게 욕을 먹더라도 63빌딩에 간다던 사람 두 명을 더 태울 수 있었을 것이고 한 번에 6400원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그리 수지 맞는 장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됐다. 합승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은 8시30분부터 9시10분 정도까지밖에 안돼 빈차로 바로 다시 온다고 해도 두세 번이면 고작이고, 가끔 단속도 나오기 때문이다. 두 번 왕복을 한다고 하더라도 대기시간까지 40~50분이 걸리며 1만원 정도의 수입은 출근시간에 좀 멀리가는 손님 한 번 받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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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근시간 대방역 앞에서 합승을 하기 위해 몰려드는 택시와 시민들. |
월요일은 대낮에도 지긋지긋하게 차가 막혔다. 190㎞ 주행에 10만 5000원을 찍었다. 야간반의 수입이 어떨 것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회사에 야간반을 해보게 해달라고 했지만 초보자는 한 달간 주간반만 해야 한다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튿날인 11월 19일 새벽, 의도적으로 결근을 했다. 회사에서 두 번이나 전화가 걸려왔지만 아파서 못 나가겠다고 하고 자버렸다. 오전 9시까지 잤더니 드디어 며칠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정상적인 사람의 정신상태’로 돌아온 것 같았다. 멍한 기분도 한결 풀렸고 항상 쓰라리던 시력도 제대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오후 3시 교대시간에 슬그머니 출근을 했다. 운좋게 배차를 받을 수 있었고 처음으로 오후반 일을 하게 됐다. 야간반의 수입은 확실히 좋았다. 11월 19일 오후부터 20일 새벽까지 영업에서 12만8000원을 찍었다. 밤 시간에 택시를 타는 사람들 중에는 100원 단위는 물론이고 1000원 단위의 거스름돈도 받지 않는 사람이 종종 있어서 총 수입은 14만원 가까이 될 것 같았다. 야간 사납금이 5만원으로 주간보다 많고 주행거리도 220㎞가 넘어 가스비가 1만8000원 들었지만 순수익이 6만원 정도는 되는 것이다. 이렇게만 한 달을 번다면 월 150만원 수입은 된다.
●회식 가는 남자들 반드시 회사 얘기
20일 오후부터 21일 새벽까지에는 240㎞를 달려 16만5000원을 벌었다. 기사노릇을 한 후 최고의 성적이었다. 숙달된다면 먹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간반의 수입은 합승이 아니라 장거리에서 나온다. 피크타임이라는 밤 11시30분부터 1시 사이에도 빈차는 널려 있기 때문에 합승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게다가 저녁 9시까지는 차도 심하게 막히고 손님도 별로 없다. 19일 밤 8시30분부터 거의 한 시간을 공치기도 했고, 낮부터 비가 내린 20일에는 그야말로 극심한 체증 때문에 오후 5시에 서울역에서 남대문을 빠져나오는 데 40분이 걸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19일에는 할증시간에 광화문에서 개포동, 신사동에서 광화문, 종로에서 풍납동 등을 뛰면서 벌충했다. 20일에는 오후 7시30분쯤 신촌에서 탄 20대 여자가 안산까지 가자고 해 2시간 만에 5만원을 벌었고 자정 무렵에도 과천, 안양 등을 오가며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중요한 시간대에 빈차로 다니는 시간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있다. 예를 들어 개포동에 들어갔다가 그 시간에 번화가로 나오는 손님을 만나는 것은 거의 어렵다. 또 새벽 2시 무렵 신천역 앞에 무려 300m 정도 줄을 서있는 빈차를 보고 놀라기도 했다. 어떤 기사에게 물어봤더니 “길어 보이지만 30분 정도면 빠지게 돼 있다”고 말했다. 기다리기 싫은 기사들은 유흥가의 골목길로 들어가 유흥업소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곧바로 태우기도 한다. 그것도 작은 노하우 중의 하나다.
야간반 운전을 하면 서울 사람들이 사는 풍경이 낮보다 훨씬 잘 보인다. 퇴근길에 회식이나 술자리에 가는 남자들은 반드시 회사 얘기를 한다. 밤 승객들이라고 매너가 나쁘지는 않았다. 새벽 2시쯤 논현동 뒷골목으로 귀가하던 술집 아가씨는 거스름돈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들고 가던 빵을 하나 주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매일 밤 한두 명은 반드시 애를 먹였다.
19일 밤에 태운 술 취한 두 남자는 목적지라고 한 용산에서 두세 바퀴를 돌다가 내려서는 다시 차문을 열고 “여기 있던 나이트클럽 어디로 사라졌어”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고, 20일 밤 남영역에서 성북동에 가자고 한 만취한 남자는 반드시 자기가 찍어주는 길로 가야한다면서 차선에 관계없이 좌회전, 우회전을 외쳐대기도 했다.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어서 갓길에 차를 댔더니 괜찮다면서 신경질을 냈고, 돈을 계속 입에 물고 있다가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입으로 돈을 물어뜯어서 던져 줬다.
그러나 목적지도 말하지 않고 곯아떨어지거나 차비를 주지 않거나 혹은 택시 안에 오물을 토해 영업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이른바 ‘진상’은 다행히 한 명도 만나지 않았다. 기사들은 그런 경우가 걸릴 확률은 1년에 한두 번 정도라고 했고 한 번 만나면 10만원 정도 손해를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야간반은 10시 이후면 교통체증이 풀려 밤 운전이지만 오히려 피로가 덜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새벽 4시 무렵 퇴근을 하면 피곤하긴한데 곧바로 잠이 들지 않았고, 주간반과 정반대의 시간에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1주일에 한 번씩 바이오리듬이 심하게 무너지는 게 큰 부담이었다.
11월 20일 밤 처음으로 역삼동 경복아파트 사거리에 있는 기사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기사식당의 풍경은 4인용 테이블에 꼭 한 사람씩 앉아 말없이 TV를 보면서 밥을 먹는 것이다. 그 넓은 식당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TV와 주문을 받는 종업원의 목소리뿐. 일반인들이 가끔 만나는 ‘말 많은 기사’는 특이한 경우인 것으로 여겨졌다. 택시기사들은 대부분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같았다. 택시기사들은 자기 직업의 최대 장점으로 ‘일단 차를 끌고 나가면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것’을 드는 사람들이 많다.
●“그 오빠, 돈은 잘 쓰지만 자꾸 추근대”
11월 22일 새벽 4시. 강남을 빠져 나온 나는 여의도를 거쳐 독산동 차고지로 달려가고 있다. 대방동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손님이 손을 든다. 술에 취한 두 명의 40대 여자. 행선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시흥사거리. 차고지와는 2~3분 거리다. 택시기사로서 마지막 퇴근길을 빈차로 가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손님들이다. 두 여자는 “오빠, 안양 택시 타는 데에서 내려줘”한다. 그리고 이내 밤새도록 같이 술을 마신 남자들의 얘기를 쉬지 않고 주절댔다. “그 오빠는 돈은 잘 쓰는데 자꾸 추근대잖아…, 그래 그 옆의 오빠가 괜찮은 것 같애…. 그런데 웬 팁을 5만원이나 달래?”
택시기사를 하고 있으면 세상이 보인다. 코앞에 닥친 대선(大選)의 판도도, 남대문시장판과 증권가 브로커들의 최근 경기(景氣)도 그리고 직장 속의 편가르기와 줄서기, 배신과 음모의 이면(裏面)도….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기사들에게는 그냥 흘러지나가는 얘기들일 뿐이다.
내일부터는 기사에서 기자로 되돌아간다. 기자 역시 세상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나 택시기사들이 보는 것 이상의 더 깊은 내면과 평범하지만 속깊은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을까 하는, 지금껏 가져보지 않았던 두려움이 불현듯 밀려온다.
(김덕한 주간조선 기자 ducky@chosun.com)
●기자와 기사의 공통점 -- 세상을 들여다본다 -- 마감(교대)시간엔 피가 마른다 -- 일하는 데 밤·낮이 따로 없다
●기자와 기사의 차이점 -- 기사는 월급이 없지만 기자는 있다 -- 기사는 가공되지 않은 진짜세상을 본다 -- 기사는 시간에 맞춰 출퇴근 한다 -- 기사는 만난 사람을 또 만나기 어렵다
◆택시에서 본 대선 민심
싸늘한 민심… “대선” 얘기하면 고개 돌려 지지후보 정했어도 말하기 꺼려해… 투표율은 높을 듯
택시기사로서 바라본 대선(大選) 민심은 싸늘했다. 대선에 관해 흔쾌히 의견을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선 때 투표하실 거냐”고 운을 떼면 ‘또 피곤한 기사를 만났구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외면하기 일쑤였다.
증권회사에 다닌다는 40대 남자는 “누가 되는 게 영업에 도움이 되겠느냐”고 묻자 “누가 되든…”이라고 말을 흐린 후, 자신도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 “맞아요, 지난 대선 때는 그런 대화가 많았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회사에서도 별로 화제가 안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자기 의견을 비교적 강하게 피력하는 쪽은 주로 싫어하는 후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건설업을 한다는 50대 남자는 “누가 뭐라 하든 나는 이회창이 싫다”면서 “군대를 어떻게 뺐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들들을 모두 군대에 안 보낸 사람이 국가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게 무슨 나라냐”며 흥분했다. 내릴 때까지 계속 떠드는 바람에 ‘괜히 말을 꺼냈다’고 후회될 정도였다.
노무현(盧武鉉) 후보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낮았다. 상도동의 어느 아파트로 가던 40대 아주머니는 “오락가락하는 것 같아 불안해요”라고 말했고, 술 한잔 하고 과천으로 귀가하던 30대 은행원은 “믿을 수 있겠어요?”라고 반문했다.
자영업자들이 정몽준(鄭夢準) 후보를 좋아할 것이라는 판단은 선입견 같았다. 남대문상가에서 의류 도매업을 한다는 50대 아주머니는 “월드컵 얘기만 나오면 머리가 아프다”면서 “6월에 장사를 완전히 공친 후 경기가 전혀 살아나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그녀는 또 “재벌 아들이 세상을 어떻게 알겠어요”라고도 했다.
외대에 다니는 한 졸업반 학생은 “노무현이 인기가 있기는 하지만 대선 열기는 별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조용하다”고 말했다.
8일간 택시 속에서 느낀 민심은 이미 지지후보를 정해 놓았지만 그걸 드러내놓고 말하거나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고 나서지 않고 그냥 선거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대선 후보에 대해 말을 피하는 사람들도 투표는 당연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조용한 가운데에서도 투표율은 매우 높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얼마나 버나?
70%가 주 6일 12시간 근무로 월 150만~200만원 벌어
보통 택시회사의 주간조 사납금(社納金)은 8만~9만원선이다. 그러나 기자가 낸 사납금은 절반 수준인 4만원이었다. 이 차이는 이른바 ‘정액제’와 ‘도급제’로 나뉘어진 급여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실제 수입은 대동소이하다.
정액제란 사납금은 좀 많은 대신 한 달에 24~25일 동안 빠지지 않고 근무를 해 사납금을 다 채우면 정해진 월급을 받고, 일정량의 가스도 회사가 제공하는 방식이다. 물론 사납금 이상의 수입은 기사가 갖는다. 반면 도급제는 최소한의 사납금만 회사에 납부하고 가스도 스스로 넣고, 사납금 이상의 수입을 모두 기사가 갖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택시회사들은 신규 기사들에게 처음 한 달간은 도급제를 적용한다.
기자가 취직했던 회사의 도급제 사납금은 주간 4만원·야간 5만원이었고, 정액제 사납금은 주·야간 각각 8만2000원·8만3000원이다. 정액제의 경우 월급이 65만원 정도로 이를 일당으로 계산하면 2만6000원이고, 회사에서 매일 27ℓ의 가스를 지급하니 가스비 1만4900원까지를 포함, 회사가 하루에 4만1000원 정도를 기사들에게 지원하는 셈이다.
따라서 순수 사납금은 4만원 남짓이 되는 셈이므로 도급제나 정액제나 순수사납금은 비슷한 수준이 된다. 기사의 근속 연수가 높아질수록 회사에서는 좀더 많은 혜택을 준다. 사납금이 많은 회사의 월급은 사납금이 적은 회사의 월급보다 조금 많다고 보면 된다.
택시 회사는 결국 택시 한 대를 굴려 하루에 8만~9만원의 수입을 얻고 이 돈으로 차량을 관리하고 각종 경상비를 지출하는 것이다.
회사 택시는 고장 혹은 사고가 나거나 큰 수리를 해야 하는 날이 아니면 하루에 보통 20시간 이상 굴러다닌다. 운행거리로는 매일 500㎞가 넘고, 수명은 4년이다. 6개월씩 2회 연장이 가능하니 최장 5년을 운행할 수 있다. 큰 사고가 나 ‘중병’에 걸리지 않는 한 보통 70만~80만㎞ 정도 달려야 생애를 마칠 수 있다. 지구를 20바퀴쯤 도는 거리다. 택시의 매출을 하루 25만원 정도로 잡으면 장사를 잘 한 택시는 숨을 거둘 때까지 4억5000만원 이상을 벌어준다.
그렇다면 택시기사는 얼마나 벌까. 일반적인 기사들이 쉬지 않고 일할 경우 주간반 12만~16만원, 야간반 15만~20만원 정도가 평균 하루 매출이라고 한다. 정액제 기사의 경우 사납금과 1만5000원 정도가 드는 식대, 교통비, 추가가스비 등을 빼고나면 하루 평균 4만~5만원 정도의 순수입이 있다는 얘기다. 월급 60여만원을 합치면 월 수입은 대략 150만~200만원 정도로 계산된다. 이 범위 내의 수입을 올리는 기사가 70% 정도이며, 200만원 이상 버는 기사는 13%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회사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택시기사는 보통 오전·오후 3~6시 사이에 맞교대를 하므로 하루 12시간씩 6일 일하고 하루를 쉰다. 쉬는 날 전후로 오전반과 오후반을 일주일 단위로 바꾸는데 어떤 택시회사는 쉬기 전날 24시간 동안 ‘곱빼기’운행을 하도록 하기도 한다.
많은 기사들은 아주 재수가 좋은 날 야간에 25만원 정도까지 버는 사람도 있지만 개인 사정으로 근무를 못하는 날 사납금을 채워야 하고, 운행정지를 먹거나 사고가 나는 경우 대책이 없기 때문에 항상 그만한 수입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합승 땐 벌금 20만원 등 갖가지 제약
게다가 택시기사에게는 제약이 무척 많다. 합승, 승차 거부, 부당요금 징수, 장기정차 및 호객행위 등을 하다 적발되면 1차에 20만원 벌금을 물게 되고 2차에는 30만원 벌금에 20일 정지를 먹게 된다. 정원초과는 30만원, 미터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40만원, 택시운전자격증을 부착하지 않으면 20만원 벌금이다. 심지어 동시통역을 알리는 스티커를 부착하지 않아도 20만원 벌금이고, 차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운전 중에 휴대폰을 받아도 10만원 벌금이다. 물론 버스전용차로 위반, 과속, 신호위반 등 일반적인 범칙행위에 대한 벌금도 일반차량과 똑같이 부과된다.
기자가 취직했던 S택시는 100대의 차량을 운행하므로 250여명의 기사가 있는데 10월 한 달 동안만 80여건이 적발돼 450여만원의 벌금이 부과돼 있었다. 택시기사가 하루 영업을 나가 범칙금을 물게 되면 그날만 망치는 게 아니라 며칠간 번 돈을 통째로 날리게 되는 셈이므로, 택시기사들에게 과징금이 부과되는 것은 정말 끔찍하게 싫은 일이다.
서울에는 258개의 택시회사에 2만3130대의 회사 택시가 있고, 이들 회사에서 일하는 기사 수는 대략 4만2000명으로 추산된다. 또 개인택시는 4만6878대가 있다. 따라서 서울 시내에서 택시기사로 일하는 사람은 총 8만8800여명이고, 서울 인구를 1000만명으로 잡을 때 서울 인구 113명당 1명이 택시기사인 셈이다.
회사 택시기사들의 꿈은 개인택시를 갖는 것이다. 회사 택시기사로서 무사고 경력 3년6개월이 넘으면 개인택시를 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10년이 넘으면 개인택시를 받을 수 있는 기본 자격이 생긴다. 그러나 무사고 횟수와 각종 조건은 개인택시 자격심사를 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택시기사가 무사고 운행을 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수입을 올리기 위해 다소 무리한 운행도 해야 하고, 신경써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승객을 태웠을 때도 안전운전을 방해하는 승객이 많아 주의가 분산되기 쉽다. 또 억울한 사고도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뒷좌석에 탔던 승객이 갑자기 문을 열어 뒤에서 달려오던 오토바이와 부딪혀 사람이 다치면 이것 역시 택시기사가 저지른 사고가 된다. 정차할 때는 오토바이가 지나갈 수 없을 만큼 길에 붙여야 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년 무사고 경력을 채워도 개인택시를 바로 받을 수 없다. 서울시는 회사택시와 개인택시를 합쳐 7만대 정도를 유지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구가 늘지 않는 한 개인택시 수가 늘어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1999년 개인택시 자격 심사를 통과하고도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3000명에 이를 정도다. 심지어 안양, 시흥 등 인구가 늘어나는 주변 도시로 주소를 옮겨 놓고 그곳의 개인택시를 받으려고 기다리는 기사들도 있다.
또한 한번 나온 개인택시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순환은 더욱 느리다. 즉 개인택시 운전기사가 20년이건 30년이건 영업을 하다가 더 이상 하기 싫거나 할 수 없을 때는 이 택시를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있으니 개인택시 수는 줄어들 리가 없다. 개인택시 업계의 반발이 크긴 하겠지만 본인이 무사고 경력을 채워 받은 개인택시가 아니라면 개인택시 운행 연한을 제한하는 것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택시기사가 되기까지
‘1종보통 면허·1년간 무사고’는 기본 택시자격시험·신규교육·정밀검사 받아야
택시기사가 되는 길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1종보통 운전면허 소지자에 1년이상 실제 무사고 운전 경력이라는 기본 요건을 갖춘 사람이라도, 두 번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고 교육도 세 가지나 받아야 해 최소 1주일 정도의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기자 역시 지난 10월 31일 서울 잠실 교통회관에 있는 서울시 택시운송사업조합에 가서 택시운전 자격시험 응시원서를 내고 매주 금요일 시행되는 자격시험을 치르기 위해 이튿날 시험장에 갔다. 택시회사에서 나온 ‘부장’들이 신참 택시기사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자기 회사 포스터를 걸어놓고 명함을 돌리고 있는 게 신기했다. 그만큼 택시회사들이 기사난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노는 택시들이 회사마다 몇대씩 있다고 한다. 노는 택시만큼 사납금이 줄기 때문에 택시회사는 항상 신참 기사를 구하기 위해 애를 쓴다.
11월 1일 서울시 택시기사 자격 43차 시험에는 약 500명이 원서를 접수했는데 결시자와 불합격자를 빼면 300여명 정도만 남고, 이후 신규채용자 교육과 운전정밀검사 과정에서 탈락하거나 포기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서울 시내 258개 택시회사는 한 기수에 신참 한 명도 확보하기 어렵다. 그나마 확보한 신참 기사 중에서 한 달을 넘기는 사람은 반 정도밖에 안 되며 1년을 넘기는 비율도 30~40%밖에 안 된다고 하니 만성적인 기사난에 시달리는 구조다. 정규 직원을 시험장이나 교육장에 파견하거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회사는 신규 기사 모집 브로커에게 데려오는 기사 한 명당 얼마씩 사례금을 주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만성 기사난…시험장에서 곧바로 ‘스카우트’
기자도 시험장에서 곧바로 ‘스카우트’됐다. 자격시험을 치르고 나오는 길에 합격자가 발표되지 않았는데도 독산동 S택시의 K부장이 명함을 내밀었다. 그는 “초보자가 적응할 때까지 납입금도 깎아주고 운행 노하우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고 말했다. 신규 교육을 받기 위한 각종 서류를 대신 작성, 접수해주는 등 친절을 베풀고 월요일부터 교육에 꼭 나와 만나자고 신신당부했다.
오후에 발표된 시험 결과는 82점, 합격이었다. 시험 내용은 서울지리와 교통관련 법규를 묻는 것으로 이뤄져 있고, 100점 만점에 60점을 받으면 합격인데 한 번에 합격하는 비율은 70%쯤 된다고 했다.
11월 4일부터 사흘간은 서울시 교통연수원이 실시하는 신규채용자 교육과정 교육을 받았다. 택시운전자격증은 땄지만 이 교육 이수증이 없으면 택시회사에 원칙적으로 취업할 수 없다. 교육 내용에는 서울지리, 실제 택시기사의 경험담, 생활영어, 승객에 대한 예절 등 실용적인 것도 있었지만 정치, 경제, 정보통신산업 현황 등 추상적인 내용도 많았다. 시간대별로 일일이 출석을 확인해서 한 강좌라도 결석했을 경우 다음 기(期)에서 보충교육을 받아야 수료증을 딸 수 있다. 교육 마지막날인 수요일 오후에는 한국가스안전공사 강사들로부터 LPG안전교육을 받고, 두 가지 수료증을 받아들었다.
●취업한 ‘신참’ 절반은 한 달 못넘겨
그러나 택시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단계가 남아 있었다. 교통안전공단에서 주관하는 ‘운전정밀신규검사’인데 기자는 밀린 기사를 쓰고 며칠 뒤인 11월 11일 성산동 서부자동차검사소로 가서 검사를 받았다. 오전 7시 무렵에 도착해 대기번호표를 뽑았지만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검사내용은 기기를 이용한 검사와 지필검사 그리고 인성검사 등으로 이뤄져 있었다. 기기검사는 앞뒤로 왔다갔다 하는 물체가 가운데 지점에 왔을 때 버튼을 눌러야 하는 거리지각 능력 측정,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가 일정한 지점에 정지할 수 있도록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속도 및 거리예측 검사 등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기자에게는 단순한 컴퓨터 게임처럼 느껴졌다. 지필검사는 복잡한 도형 속에 숨어있는 단순한 도형찾기, 단순한 도형이 모여서 이뤄질 수 있는 복잡한 도형찾기 등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기자에게는 매우 쉽게 느껴졌지만 도형들을 어떻게 찾아내는지를 이해하지 못해 끙끙대는 40~50대 응시자들을 보면서 과연 이런 검사가 필요한 것일까 하는 심각한 회의가 들었다.
오후에 종합판정표를 받을 때 보니 10명에 한 명꼴은 부적합 판정을 받는 것 같았다. 한 번 부적합 판정을 받으면 한 달 후에야 재응시가 가능한데 당장 생계가 급한 사람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었다. 그들은 한 달 후에 재응시하러 오면서 이 검사들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 요령만 여기저기서 배워올 게 뻔했다. 이런 시험이 운전능력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것인지, 또 교육을 시켜주는 데도 한 곳 없는데 한 달 동안 운전능력이 향상될 수 있을 것인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택시기사 자격을 모두 갖추는 데에는 비용도 만만찮게 든다. 한 번에 모두 통과한다고 하더라도 자격시험응시료 1만원, 택시운전자격증 발급료 3000원, 교통연수원 교육비 2만1300원, 가스안전공사 LPG 안전교육비 1만500원, 교통안전공단 운전정밀검사비 1만5000원 등 6만9800원이 기본 비용이다. 택시회사에 취직할 때 요구되는 다른 증명서들, 예를 들어 면허시험장에서 발급하는 무사고운전경력증명서 등을 뗄 때도 1통당 2000원이 든다. 대부분의 택시회사들은 건강진단서도 요구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1만원 정도는 든다.
모든 서류를 다 갖춘 후 11월 12일 S택시 K부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튿날 바로 택시회사에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후, 명찰과 기사용 티셔츠를 받아들었다. 11월 14일 새벽부터 영업에 나서게 된 것이다.
2002. 12
첫댓글 주간반 12만~16만원, 야간반 15만~20만원 정도가 평균 하루 매출? 에구 저는 수입이 평균에서 한참모질라네여.ㅠ.ㅠ
2002년엔 지금보다 조금 낫나 보네요
2002년에도 어렵긴 마찬 가지인데..어렵지 않다해도.주간12만-16만 야간이 15-20만 이라니 참으로 놀랄만하내요.하긴 처음엔 밥도 안먹고 죽을지 살지 모르고 뛰는법이지.게다가 젊겠다.그러다 해가 갈수록 자동으로 수입이 감소하지요 ㅋㅋㅋ
보통 택시기사가 주간에 평균 200~230㎞를 달려서 14만~16만원의 수입을 올린다는 것에 비하면 크게 모자라는 성적이었다. ------> 이문구가 맞나? 요즘 내 경우는 180정도 달리고 평균 10만원도 빠듯한데...그리고 월 수입이 150~ 200만원 정도라고???? 넘 과장 된것 같다...요즘 보면 100~120만원이 정답 같은데..
2002년도 얘기라서..지금이랑 좀 틀리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