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3. 알베르 까뮤(Albert Camus, 1913~1960)-페스트
알베르 까뮈[페스트] 줄거리
오랑이라는 도시에 갑자기 페스트가 발병한다. 사람들은 초기의 페스트에 별다른 관심 없이 자신만의 일을 해나간다. 하지만, 사람들의 무관심이 페스트라는 엄청난 병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페스트란 병은 정말 굉장한 존재인 것이다. 그 어떤 누구도 오랑 사람들의 일상을 해칠 순 없었다. 지금까지 오직 페스트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페스트로 인해 시의 외곽에는 담장이 쳐져 누구도 시 밖으로 떠날 수 없게 되었다. 페스트가 발병한 그 순간 그곳 사람들은 장소이동을 금지 당하고 대화마저 끊어지게 된 것이다. 오랑 사람들은 그 때까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페스트 같은 재앙이 존재하는 한 누구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자유는 인간에게는 정말 소중한 권리이다. 하찮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자유,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인간적인 자유이다. 그런 면에서 까뮈는 이러한 재앙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감금상태가 계속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광란의 페스트가 휘젓고 다니는 도시의 모습은 살벌한 기운이 감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행동만이 남아 있는가? 이제 죽기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이 책의 곳곳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답을 말하고 있다. 이제 누가 죽을지도 모르는 참혹한 현실 속에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것인가? 까뮈의 답은 간단하다. 여기서 이렇게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자유가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페스트는 소설의 인물들에게서 각각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반응은 하나같이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 같은 재앙에 직면하여, 다른 많은 고난들과 같이 그 문제들로부터 도피하는 길을 선택했다. 어떤 이는 그들 자신의 이익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여 페스트를 환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결국에는 페스트에 맞서서 싸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부류에 합류했다.
작가는 코타르(Cottard)의 존재가 페스트를 환영하는 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범죄인이며 페스트로 거의 절멸상태에 이른 오랑의 상황이 오히려 편안하다. 모든 이들이 죽음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을 때 그 때문에 자신의 형집행이 연기된 것을 그는 즐기고 있다. 그를 통해 까뮈는 모든 형태의 폭력에 의한 죽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오직 페스트에 의한 죽음만은 제외하고서 말이다. 그의 죄가 무엇으로 언명되든,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그 결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판결을 받기보단 자살하는 게 더 낫다고 여긴다. 페스트는 적어도 코타르에게 미래를 위한 희망의 틈이 열릴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반면 페스트를 물리치는데 동참했던 사람으로, 이방인이자, 오랑시의 방문자이기도 했던 타루(Tarrou)가 있다. 타루는 까뮈의 이념과 그의 믿음, 그리고 바로 까뮈 자신이 갖고 있었던 의문을 가장 잘 전달한다. 타루란 인물의 존재는 이 소설의 주제를 나타내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타루는 이방인으로 등장한다. 그는 오랑시의 거주민이 아니며 사업차 오랑시에 온 것도 아니다. 그는 휴가 중이었다. 페스트가 그 도시를 휩쓸었을 때, 타루는 그 도시의 시민들을 도울만한 어떠한 외부적인 동기도 없었다. 하지만 타루는 모든 행위를 멈추고, 이기심 없고 순수한 성자로 나가는 길을 찾고 있다. 그는 어떠한 악의 일부분도 원치 않는다. 페스트가 만연하는 동안, 그는 결국엔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그 페스트균과 싸우는 자원봉사단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타루는 대단한 사람 이 아니고, 그저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한 인간일 뿐이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 하는 데로 살고 또 행동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 안에서 그는 카뮈 자신이 갖고 있었던 실존주의적 믿음을 그대로 펼쳐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타루와 리유는 함께하며 별들이 무수히 넘쳐나는 밤에 몇 번의 침묵을 교환한다. 그들은 "행복이란 모든 것을 잊지 않는 것, 살인까지도 잊지 않는 그것"이란 정의에 공감을 보낸다. 그 정의는 다소 부조리하게 보인다. 왜냐 하면 타루는 고통스럽고 또한 그 고통이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지프의 신화>에서 작가는 "의식으로의 복귀, 일상 속 숙면으로부터의 탈출은 부조리한 자유로의 첫 걸음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고로 타루는 까뮈의 실존주의를 말하는 또 하나의 엠블럼인 것이다.
또한 까뮈는 타루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이 내부에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선의지'를 갖고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보여주었다. 타루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이 되길 원치 않았고, 영웅적인 자질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는 성자가 되고 싶었다. 문제는 이것이다. 먼저, 성자는 천상의 평화를 소유한 사람이다. 하지만, 성자는 이것보다 더 고귀한 것을 지닌 사람이다. 성자는 인간을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위대한 실천가이다. 타루는 그의 생애를 통해 그 길을 따르며, 고통당하는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고,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일한다. 타루를 통해서, 까뮈는 실존주의의 다양성을 뛰어넘는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펼쳐 보인다. 인간은 타인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며 선의를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찾고 또 스스로의 삶에 뜻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천명하는 것이다.
파늘루(Paneloux)신부는 실존과 신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그는 페스트를 막기 위해 노력한다. 이 소설의 초반부를 살펴보면, 파늘루 신부는 확고한 기독교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페스트가 확산되는 가운데 열린 그의 첫 강론에서, 페스트는 ‘악인들의 죄를 응징하기 위하여 신이 친히 보낸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는 후에 리유나 타루처럼 사람들을 도우며, 페스트에 맞서 투쟁하는 일에 동참하지만, 그의 믿음은 시험에 놓이게 된다. 이 시험은 소설의 인물들이 무구한 아이가 하나둘씩 고통을 받으며 죽게 되는 것을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였을 때 극에 달한다. 고통 받는 아이들의 죄가 무엇이건데 그 죄를 벌하기 위해 무구한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는단 말인가? 아이들은 잘못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자신들 앞에서 아이들이 하나둘씩 신음 속에서 죽어나가도록,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파늘루는 새로운 강론을 쓰기 시작한다. 이것은 첫 강론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그 강론에서,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사실을 반영한다. 두 번 째 강론에서 파늘루는 페스트가 신이 보낸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페스트를 악의 일부분으로 규정하고, 기독교는 그것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작가는 기독교와 실존주의와의 화해를 시도하긴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에 파늘루 신부가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리유는 그 도시에서 페스트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일처음 깨달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항하는 싸움을 주도하는 일을 돕는다. 리유는 자신이 알고 있는 창조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진정한 반항인이고, 그의 투쟁은 인간의 부당한 현실에 대한 항의였다. 그는 평범한 반항인이 아니었다. 그는 의사였다. 의사로서, 감염에 대한 위험과 공포심이란 보통 사람이 견디어 내야할 것 이상이었다. 리유는 매일 그의 일 속에서 이 같은 사실에 직면한다. 리유의 냉정함이란 무관심에 대한 카뮈의 신념에 반하는 것같이 보일지 모른다. 리유는 정말로 자기 스스로 무관심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었다. 왜냐 하면, 리유는 모든 환자들에게 동정을 가질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의무에 전념해야만 했다. 자신의 감정을 옥죄이고 그리고 동정심을 묶는 것 외에는 어떤 방책도 없었던 것이다. 리유는 타루가 찾고 있던 것과 같은 평화를 분명하게 단정치 못한다. 리유는 그가 참여했던 그 투쟁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까뮈는 사회가 인간에게 주는 고통스런 무관심의 문제를 막아낼 수 있는 하나의 이념으로 실존주의를 인식했다. 그의 소설 <페스트>는 이것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시도였다. <페스트>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작품내의 엄연한 리얼리즘은 달리 풀이하자면, 상징적인 투명함에 감명한 모든 독자가 그 소설내의 열정에 대한 만족을 느낄 수 있게 하며, 그것이 형이상학적이건 도덕적인 가르침이건 역사적인 교훈이 되었건 간에, 중요한 무언가를 깨우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페스트>는 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에 의해 점령당한 프랑스를 각색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특정한 사건이나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일반적인 인간애를 상징화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페스트>가 무관심에 맞선 투쟁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완벽한 상황의 가정이 소설에 한계를 설정 하진 않고 있다. 모든 인간은 선의지를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할 수 있다. 실존주의자건 아니건 간에 까뮈의 철학은 어떤 설명도 능가하는 중요한 가치를 전해준다. 그 같은 고귀한 가치를 마음속에 품고 까뮈는 <페스트>를 집필했던 것이다. 어쨌든 당신이 비극의 세계에 처한다면 카뮈를 생각하라.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반항하라고 당신의 인간적인 충실함을 이길 수 없도록 발버둥 치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