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상상력과 시 / 성민엽
허수경 시인이 독일로 건너간 것이 1992년이었으니 그녀의 독일 생활도 어느새 햇수로 14년이 되었다. 그동안 그녀는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해왔고(대학 시절 그녀의 전공은 국문학이었다), 2003년에는 뮌스터 대학 고고학 교수와 결혼하여 독일에 정착했다. 1987년에 등단하여 1992년 독일로 건너가기까지의 시간이 5년인데 비해 그녀가 독일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며 지낸 시간은 그 3배에 가깝다. 작품 읽기보다 작가의 삶에 대한 정보를 앞세우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허수경 시인의 새 시집은 (2001년에 나온 지난번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도 마찬가지로) 그럴 것을 요구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를 보자.
에이디 2002년 팔월 새벽 여섯 시 삽으로 정방형으로 땅을 가른다. 비씨 2000년경 토기 파편들, 돼지뼈, 염소뼈가 나오고 (----) 한 삼십 센티 정도 밑으로 내려가자, 다시 토기 파편들, 돼지뼈, 소뼈, 진흙개, 바퀴, 이번에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곡식알도 나온다. 비씨 2100년경의 무너진 담이 나온다 (-----) 다시 밑으로 합쳐서 일 미터를 더 판다 체로 흙을 쳐서 흙 안에 든 토기 파편까지 다 건져낸다 일 미터를 지나왔는데 내가 파낸 세월은 한 오백 년, 내가 서 있는 곳은 비씨 2500년.
- <시간 언덕> 부분
고고학 발굴 현장에 대한 묘사이다. 일 미터 깊이가 오백 년 세월과 등가인 고고학의 세계는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이 세계의 일상적 체험이 시인의 상상력에 내면화되는 방식은 더욱 흥미롭다. 그것은 우선 시각의 거시화(巨視化)로 나타난다. 삼십 센티 두께의 퇴적층에서 100년의 세월을 보니 그러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리고 그 시각은 비관주의적인 것이 된다. 시인의 한 산문에 씌어진 다음과 같은 구절은 새겨볼 만하다: “폐허의 어느 깊은 골에서는 검은 띠가 물경 2미터 두께로 둘러져 있었는데 고고학자들이 부르는 ‘파괴 층위’의 자취였다. 그것인가, 모든 역사가 끝난 뒤 파괴층의 검은 띠가 상가(喪家)의 검은 색 상장처럼 두르고 있는 것, 그것을 위해 왕들은 세계 질서를 위한 전쟁과 살육을 마다하지 않았는가?” 하나의 고고학적 지층의 끝, 즉 ’역사‘의 끝이 파괴층이라는 이 비관적 인식에는 순환주의적 시각이 수반된다. 파괴층으로 끝나는 고고학적 지층들이 여러 겹으로 쌓여 있는 것은 반복 순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시가 생겨난다.
오래전에 어떤 왕이 죽었다. 이 남자들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죽었다. 그런데 남자들의 눈동자는 이글거린다. 무덤을 찾아내면, 내 식구들이 어디에서 죽어갔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
-<오래전에 어떤 왕이 죽었다> 부분
현재와 과거(고고학적인 거시적 규모에서의 과거)가 반복 순환의 원리 위에서 겹쳐지고 있다. 이 시집의 많은 시편들이 이러한 겹침을 보여주거니와, 이러한 상상력을 고고학적 상상력이라고 불러볼 수 있겠다.
이 고고학적 상상력의 비관주의는 극단적이다. 한 지층의 내용은 ’전쟁과 살육‘이고 그 지층의 끝은 파괴층이며 이러한 지층의 반복 순환이 인류의 역사이니 말이다. 그 비관은 거의 인간에 대한 환멸에 다다를 정도이다. 그러나 정작 시인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희망이다. 시집의 뒤표지 글에서 “이런 비관적인 세계 전망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나지막한 희망, 그 희망을 그대에게 보낸다”라고 쓴 시인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 도시가 세워지고 사람들이 한 세상을 그곳에서 살고 그리고 사라진다는, 혹은 반드시 사라진다는 이 롱 뒤레의 인식이 비극적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적인 그리고 자연적인 비극이다. ’그러므로‘라는 말에 이끌려 나오는 결론은 그다지 설득력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인간적‘ ’자연적‘이라는 말의 실제 내용이 무엇인지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 시집의 ’시‘가 그 실제 내용이다. 그것은 산문으로는 온전히 나타낼 수 없는, 오직 ’시로써만 나타낼 수 있는 그러한 것이리라. 우리는 그 ‘시’를 읽어야 할 것이다.
이 시집에서 주목할 만한 이미지들이 여럿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달’이다. ‘달’은 기왕의 무수한 시편들 속에 무수히 등장해온, 그래서 그 자체로는 조금도 신기할 것이 없는 이미지이다. 하지만 허수경의 ‘달’은 종전의 무수한 ‘달’들과는 구별되는 자기만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 특성이 허수경의 ‘달’을 참신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1-1 저 달이 걸어오는 밤이 있다
1-2 달은 아스피린 같다
1-3 꿀꺽 삼키면 속이 다 환해질 것 같다
2-1 내 속이 전구알이 달린
2-2 크리스마스 무렵의 전나무같이 환해지고
2-3 그 전나무 밑에는
2-4 암소 한 마리
3-1 나는 암소를 이끌고 해변으로 간다
3-2 그 해변에 전구를 단 전나무처럼 앉아
3-3 다시 달을 바라보면
4-1 오 오, 달은 내 속에 든 통증을 다 삼키고
4-2 저 혼자 붉어져 있는데, 통증도 없이 살 수는 없잖아.
4-3 다시 그 달을 꿀꺽 삼키면
4-4 암소는 달과 함께 내 속으로 들어간다
5-1 온 세상을 다 먹일 것을 생산할 것처럼
5-2 통증이 오고 통증은 빛 같다 그 빛은 아스피린 가루 같다
5-3 이렇게 기쁜 적이 없었다
- <달이 걸어오는 밤> 전문(각 행 앞의 숫자는 연과 행을 표시하기 위해 인용자가 붙인 것임)
1-1부터 심상치 않다. 우선 ‘저 달’의 ‘저’라는 관형사가 갖는 독특한 어감을 염두에 두어야겠다. ‘저 달’이 (‘나’에게로) 걸어온다. 하늘에 떠 가는 것이 아니라 걸어오는 ‘달’이므로 ‘나’와의 직접적 접촉이 가능해진다. ‘저’라는 관형어는 둘 사이의 거리가 있되 그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라는 어감을 띠게 된다. 그런데 "----하는 밤이 있다"라는 구문은 이런 일이 늘 있거나 흔히 있는 일이 아님을 암시한다. 아마도 가끔 한 번씩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런 일이 있을 때, 그 달은 아스피린 같은 달이고(1-2) 삼키면 속이 환해질 것 같은 달이다(1-3). 왜 달이 아스피린 같을까. 둥그랗고 하얗기 때문에? 삼키면 속이 환해지는 것은 달이 발광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스피린이 해열 및 진통 작용을 하는 약임을 생각한다면 속이 환해진다는 것은 해열과 진통을 뜻하는 것이리라. 여기서 빛과 진통은 등가 관계인 것처럼 보인다.
제2연에서 ‘내 속’은 환해진다. 4-3과 관련하여 보면 제1연과 제2연 사이에는 그 달을 꿀꺽 삼키는 행위가 숨어 있다. 달을 삼키자 ‘내 속’이 ‘전구알이 달린 크리스마스 무렵의 전나무같이’ 환해진 것이다(2-1, 2-2) 이렇게 환해진 ‘내 속’에는 ‘암소 한 마리’가 있다.(2-4).
제2연과 제3연 사이에는 일종의 위상 차이가 존재한다. 제2연에서의 ‘나’는 ‘내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데 반해 제3연에서의 ‘나’는 ‘내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 속의 공간에 또 달이 있다. 이 달은 제1연과 제2연의 연간(聯間)에서 삼킨 그 달일 것이다. ‘나’는 ‘다시’ 달을 바라본다(3-3)
그 달을 ‘나’는 다시 삼킨다(4-3). 왜 삼키는가, 달이 ”내 속에 든 통증“을 다 삼켜버렸는데(4-1). 통증이 없는 삶은 진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4-2). 그러고 보면 제1연과 제2연의 연간에서 달을 삼키는 것은 통증을 되찾기 위한 것이다.
다시 달을 삼키자 통증이 온다(5-2). 이 통증은 ”온 세상을 다 먹일 젖(이 ‘젖’은 4-4에서 달과 함께 ‘내 속’으로 들어온 암소와 관계된다)을 생산할 것“ 같은 생산적인 통증이다(5-1). 이 통증은 빛 같고, 이 빛은 아스피린 가루같다(5-1). 제1연에서의 진통=빛이라는 등식이 여기서는 통증=빛으로 바뀌었다. 이 생산적인 통증=빛의 체험에서 ‘나’는 기쁨을 느낀다(5-3).*
* 1-2에서 아스피린은 동그란 모양으로 연상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반해 5-2에서의 아스피린은 가루 상태의 것임이 명시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 변화가 진통에서 통증으로의 변화와 동궤일 것이라는 짐작은 가능하다.
이상과 같이 읽고 나서 다시 돌아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에 추가적으로 주목하게 된다. 첫째, 생산적인 통증=빛의 체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번의 달 삼키기가 필요한 것일까? 그런 것 같다. 왜냐하면 암소 없이는 그 체험이 성립되지 않는데, 그 암소는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달 삼키기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 시의 내러티브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암소라고 할 수도 있다. 둘째, 이 시에서의 달을 월경이나 임신과 연관지어 전체적으로 일관되게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부분적인 연관이 있음은 인정할 수 있겠다. 적어도 이 시에서 달이 월경이나 임신과 같은 것들을 포괄하는 여성성의 이미지임은 분명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여성성의 자기 응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여성성의 이미지로서의 ‘달’은 이 시집의 도처에서 환하게 빛난다. 그것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알아보기 위해 그와 대조적인 ‘해’ 이미지의 남성성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아직 해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만
이곳으로 올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삼 초 간격으로 달라지는 하늘빛을 보세요
마치 적군의 진격을 목전에 둔 마을
여인들의 공포 같은
빛의 움직임
해가 정격 포즈로 하늘을 완전 점령하고 나면
이 발굴지를 덥석 집어 제 식민지를 건설합니다
사탕수수도 목화도 자라지 않는 이 폐허
해는 이곳에 아찔한 정적을 경작하고
햇빛은 자유 데모보다 더 강렬하게
폐허의 심장을 움켜쥐지요
- <새벽 발굴> 부분
이 시는 새벽의 고고학 발굴 현장에 대해 묘사한다. 발굴 현장에서 (더구나 중동 지역에서) 햇빛이 얼마나 고통을 줄 것인가 하는 외적 사실에 입각해서 이 시에 묘사되는 ‘해’의 공격성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가능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좀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해’는 여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적군의 진격과 동일시되고 지상에 대한 식민 권력으로 비유된다. 이 ’해‘는 긍정적 의미에서 환하게 빛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 의미에서 작열한다. 이미 있는 폐허 위에 해가 비치는 것이 아니라 해의 작열이 바로 이 폐허를 만들었고 계속 폐허이게끔 하는 것만 같다. 이 ’해‘는 죽음의 해이다. 그래서 이 ’해‘는
폭탄을 가득 실은 비행기가 날아가던
해 뜰 무렵
- <해는 우리를 향하여> 부분
에서처럼 전쟁을 수반하고 ”마치 도륙이 시작되던 어느 도시의 / 새벽녘처럼 그렇게 / 삼엄하게“ 떠오른다(<영변 갈잎>) 그래서 이 ’해‘는,
옥수수를 심을걸 그랬어요 그랬더라면 아이들이 그 잎 아래로 절 숨길 수 있을 것을 아이들을 잡아먹느라 매일매일 부지런한 태양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을
- <물 좀 가져다주어요> 부분
에서처럼 피해야 할 대상이다. ’해‘의 시간은 아이들을 군인으로 만드는 ’뜨거운‘ ’청동의 시간‘이다(<물 좀 가져다 주어요>).
까마귀 걸어간다
노을녘
해를 향하여
우리도 걸어간다
노을녘
까마귀를 따라
결국 우리는 해를 향하여,
해 질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해 뜰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갔던 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나이 어려 죽은
손발 없는 속수무책의 신들이 지키는 담장 아래 살았던
아이들
단 한 번도 죄지을 기회를 갖지 않았던
아이들의 염소처럼 그렇게
- <해는 우리를 향하여> 부분
여기서 해를 향해 걸어간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뜻이다. 해 뜰 무렵 해를 향해 걸어간다는 것은 나이 어려 죽는다는 뜻이다. 까마귀라는 새는 물론 그 죽음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새로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와는 반대로 제목이 왜 ’해는 우리를 향하여‘일까. 본문대로라면 ’우리는 해를 향하여‘가 맞을 텐데 말이다. 죽는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제목 속에 숨겨놓음으로써 일정한 효과를 의도한 것이라 짐작해볼 수 있겠다.
하늘에 뜬 채 멀리서 위압적으로 빛을 내뿜는 해와는 달리 허수경의 달은 ’나‘의 내부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교통하는 가까운 존재이다. 앞에서 살펴본 <달이 걸어오는 밤>에서는 물론이고 그 밖의 많은 시편들에서도 그러하다.
자진자진 햇살에 말라가던 고구마 박, 꿈으로 생으로 들어오는
그러다 달이 휘영청 떴지요
-<달 내음> 부분
여기서 꿈으로, 생으로 들어오는 것은 ’고구마 박‘이지만 ’그러다‘라는 접속사가 그 들어옴과 월출을 내적으로 연결시켜준다.
처녀들은 가슴에 달을 안았다 처녀들은 달을 안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달이 품 안에서 깨기도 전에 극장 안에 있는 환풍기
는 붉은 햇살을 끌고 들어왔다 처녀들은 누런 달을 품고 잠으
로 들어갔다 그렇게 나무에는 달 같은 얼굴이 열렸다
- <빈 얼굴을 지닌 노인들만> 부분
아직 내부로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여기서 달은 가슴에 품고 잠들 정도로 가까운 존재이다.
그때 달 하나 마치 나를 그릴 것처럼 저 혼자 내 속에서 돋아나더니
내 속을 빠져나가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둠에 감추어져 있던 나는
그렇게 빛 아래 서게 되었는데 (어쩌다가 내 속은 달을 돋아나게 했을
까, 일테면 파충의 기억을 내 속은 가지고 있었던가) 후두득 까마귀가
날아가는 소리 컹컹 늑대 우는 소리 저 먼 산이 나무들을 제 품속에서
끄집어내어 올빼미를 깃들게 하고 (그때 또 달 하나 저 혼자 내 속에서
돋아나더니 내 속을 빠져나가) 먼저 걸어나간 달이 새로 걸어오는 달을
성큼 집어먹자 산은 깃든 올빼미를 얼른 품으로 끌어안아 들었습니다
(그때 또 달 하나 저 혼자 내 속에서 돋아나서는 내 속을 끌고 허공으
로 걸어갔습니다) 달을 잡아먹은 달은 새로 걸어오는 달과 내 속을 바
라 보았습니다 그때 빛 속에 서 있던 나는 내 속을 성큼 잡아먹었습니
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바라보았습니다 내 속에서 돋아든 달과 내 속을
잡아먹은 나는 그렇게 서로 바라보았습니다
- <그때 달은> 전문
<달이 걸어오는 밤>에서는 외부의 달을 ’내‘ 속으로 삼키는 데 반해 위 시에서는 ’내‘ 속에서 달이 돋아나 외부로 나간다. 처음 돋아난 달은 두 번째 돋아난 달을 집어먹고, ‘나’는 세 번째 돋아난 달에 끌려 나간 ‘내 속’을 집어먹는다. 그러고서 달과 ‘나’는 서로 마주본다. 마주보는 달은 첫번째 달인 것으로 읽히는데, 그렇다면 세번째 달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서슬되지는 않았지만 그것 역시 두번째 달과 마찬가지로 첫번째 달에게 달에게 집어먹힌 것일까? 이 몽환적인 풍경은 그 비유적 의미가 모호하지만 <달이 걸어오는 밤>과 구조적 상반임이 분명하다. 두 시편에서 달과 더불어 삼키고 뱉으며 들어가고 나오는 ‘놀이’를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은 잉태와 출산이라는 생명의 비밀을 주관하는 여신(女神)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그렇다면 그 모습을 노래하는 시인은 그 여신의 사제(司祭)일 것이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물’이다. 이 역시 중동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 경험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되거니와 이 시집에서 물의 결핍은 중요한 모티프가 되고 있다.
이름 없는 집단 무덤
해골 없이 다리뼈만 남아 있거나 마디가 다 잘린 손발을
가진 그대들
해와 달이 다 집어먹어버린 곤죽의 살덩이들은
흙이 되어 가깝게 그대들의 뼈를 덮었는데
아직 흙에는 물기가 남아 있어
비닐봉지에 그대들을 담으면 송송 물이 맺힙니다
(----)
저 해는 제 식민지를 잘 관리하는 이를테면 우주의 소작
인인데
그리하여 우주보다 더 혹독하게 폐허의 등허리를 누르는데
흙먼지 바람 속에 찬연히 들어와 움직이는 식민 권력 속에
목마른 이는 물을 구하러 마을로 가고
폐허에 남은 이는 그대가 든 비닐봉지에 구멍을 뜷어주며
그대의 마지막 물기를 말리고 있습니다
- <새벽 발굴> 부분
비닐봉지에 맺히는 물기는 마지막으로 남은 생기(生氣)이다. 그러니 그 마지막 물기마저 다 마르고 나면 남는 것은 완벽한 죽음이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성분 중 물이 차지하는 비율이 70% 이상이니 물이 생명을 의미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여기서 물의 결핍은 주로 ‘해’로 인한 것이다(위 인용 제3행의 ‘해와 달’은 세월. 시간의 뜻으로 새겨져야 할 것 같다).
몸에 남은 물의 기억을 다 태우는 당신과
당신 물의 기억이 다 지는 것을 들여다보는
나는 어쩔 것인가
- <불을 들여다보다> 전문
위 인용에서는 남은 물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물의 기억’마저 태워진다. 물 결핍의 가장 극단적인 예라 할 것이다. 물의 결핍 혹은 빈곤이라는 삶의 조건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물에 대한 갈구를 호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 좀 가져다주어요
물은 별보다 멀리 있으므로
별보다 먼 곳에 도달해서
물을 마시기에는
아이들의 다리는 아직 작아요
-<물 좀 가져다주어요> 부분
그러나 이 시집에는 풍부한 물을 묘사한 경우도 적지 않다. 가령 <여름 내내>에서는 풍부한 물에 책종이가 물렁해지고 물처럼 흐르고 마침내 물회오리가 되며, 그 풍부한 물로 인해 사과알, 나무, 집, 새 등은 물론이요 심지어 구름, 해, 하늘조각까지 책 속으로 들어온다. 여기서 ‘들어옴’은 앞에서 살펴본 달 삼키기와 같은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흰 부엌에서 끓고 있는 붉은 국을 좀 보아요>에서 끓는 국은 풍부한 물속에 수많은 재료가 (심지어는 세계가) 들어가 있다.
요컨대 ‘달’과 ‘물’은 허수경 시인이 독자들에게 보내고자 하는 희망의 근거이고, 비극을 더이상 비극적이지 않게 해주는 ‘인간적’ ‘자연적’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의 본질은 요즘의 유행어로 바꿔 말하면 여셩성이다. 나는 이 여성성이 여성의 여성성이 아니라 인간의 여성성이라고 생각한다. 허수경의 시는 고고학적 상상력의 비관주의가 그 여성성과 결합하여 빚어낸 희망의 언어라 할 수 있다.
나는 눈먼 사제의 딸, 이렇게 죽인 소를 사지요. 잘 다져서 볶지요. 고춧가루 마늘에데 은밀한 산그늘에서 가지고 온 고사리를 넣고 끓이지요. 세계를 국솥에 두고 끓이지요 먼 나라에서 온 악기쟁이들을 불러다놓고 끓이지요. 햇빛에 달빛에 별빛에 바람 오는 자리들을 깊숙이 세계의 한켠에다 집어두지요.
- <흰 부엌에서 끓고 있던 붉은 국을 좀 보아요> 부분
이 국 끓이는 여사제(女司祭)야말로 시인 허수경의 자화상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모든 진정한 시인의 전형일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거머리총관을 든 귀 먼 용”에게 잡혀가 “세계가 화덕에서 검게 졸아드는”일이 결코 없기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