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의 발견과 미의 복원 / 이재복(2)
3. 순수와 비 순수의 진경(珍景)
송찬호 시의 상징이 미적인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진 주름의 산물이라는 사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 상징이 드러내는 의미일 것이다. 그의 시의 상징은 개념이나 도구적인 연관성 없이 의식의 직접성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여기에 내재된 의미 역시 낯설고 참신할 수밖에 없다. 그의 상징이 드러내는 의미는 기본적으로 의식 주체가 대상을 어떤 태도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것은 의식 주체가 어떤 대상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보다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와 관련하여 이미 그는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에서 자신의 입장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 보인 바가 있다. 많은 이들이 이 시집을 ’동화적 상상력‘에 기반하고 있다고 한 것은 그의 이러한 입장을 어느 정도 간파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집에서 의식 주체가 동화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예는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하지만 이렇게 ’동화적 상상력‘이라고 말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동화의 성격이다.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에서의 동화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나이브한 차원의 동화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이 시집에서의 ’동화적 상상력‘은 상징에 기반한 고도의 미적 깊이와 단조로운 주름이 아닌 중층적인 주름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며,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나이브한 차원을 넘어선다. 그의 시에는 천진난만하고 마냥 순수한 세계를 겨냥하는 의식의 흐름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의 어떤 혹은 순수와 길항 관계에 있는 비순수의 세계를 겨냥하는 흐름이 일정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번 시집이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의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면 바로 이런 차원에서이며, 순수와 비순수의 길항을 통한 시적 긴장은 이번 시집의 상징적 의미 혹은 주름의 의미 층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주목에 값한다고 할 수 있다.
순수와 비순수의 길항은 한 편의 시에서 드러나기도 하고 또 시와 시의 관계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시에서 의식의 주체가 겨냥하는 궁극은 순수이다. 하지만 이 궁극에 이르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이 과정에서 의식의 주체는 자연스럽게 순수의 이면에 은폐되어 있는 비순수의 실체와 만나게 된다. 이것은 순수와 비순수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한 몸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환기한다. 순수의 이면에 은폐되어 있는 비순수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어떤 불순한 것이 순수의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와 균열을 일으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여기에서 말하는 ’어떤 불순한 것‘이란 의식 주체의 내면에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고 또 주체의 외부에서 생겨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둘 중 어디에서 생겨난 것인지 분명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나는 한때 이슬을 잡으러 다녔다
새벽이나 이른 아침
물병 하나 들고
풀잎에 매달려 있는 이슬이란 벌레를
(----)
나는 한때 불과 흙과 공기의 조화로운 건축을 꿈꿨으나
흙은 무한증식의 자본이 되고
불은 폭력이 되고
나머지도 너무 멀리 있는 공기의 사원이 되었으니
돌이켜 보면 모두 헛된 꿈
이슬은 물의 보석, 한번 모아볼 만하지
기껏 잡아놓은 것이
겨우 종아리만 적실지라도
이른 아침 산책길 숲이 들려주던 말,
뛰지 말고 걸어라 너의 천국이 그 종아리에 있으니
- <이슬> 부분
가령 이 시에서 의식 주체의 순수한 꿈을 깨트린 어떤 불순한 것은 무엇일까? 시의 전체적인 문맥으로 보아서는 의식의 주체는 ’나‘는 여전히 순수한 꿈을 포기하지 않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처음에 가졌던 꿈이 많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원인을 제공한 대상이 모호하다. 순수한 꿈을 포기하지 않은 ’나‘의 상태로 보아서는 그 대상이 외부에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어떤 불순한 것의 존재를 더욱 애매모호하게 하는 “흙은 무한증식의 자본이 되고 / 불은 폭력이 되고 / 나머지도 너무 멀리 있는 공기의 사원이 되었으니”라는 진술이다. 이 각각은 어떤 불순한 것의 주체를 드러내고 있는 진술이 아니다. 이것은 어떤 불순한 것의 존재를 숨긴 채 그 결과만을 진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시의 행간에서 어떤 불순한 것의 존재를 지각할 수 있다. 의식 주체의 순수한 꿈을 약화시킨 존재가 자신일 수도 있고, 또 외부의 어떤 대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애매하고 모호한 지각장의 형태로 제시하고 있는 시인의 의도를 읽어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만일 시인이 어떤 불순한 것의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냈다면 모호함은 사라질 것이다. 아울러 그 모호함에서 오는 의식 주체의 내면과 외부 사이에서 발행하는 긴장도 사라질 것이다. 의식 주체의 내면과 외부 사이의 이러한 긴장은 결과적으로 순수와 비순수 사이의 길항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이 시처럼 그의 시는 대부분 어떤 불순한 것의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은 채 순수와 비순수의 길항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모란이 피네>의 경우, 문면에 드러나는 것은 의식 주체의 순수한 마음이다. ’모란의 마지막 벙그는 모습‘을 ’종지기가 죽고 종탑만 남아 있는 사원의 마지막 종소리‘로 치환 것도 그렇고, 그것을 ’당신께 가져다가 펼쳐놓는 것‘도 모두가 의식 주체의 순수함을 표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에는 의식 주체의 순수함만 존재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위해 우리는 ’왜 마지막 벙그는 모란을 당신께 보여주려 했는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모란은 곧 지게 되고, 이 상황은 의식 주체의 순수함을 절정으로 치닫게 했지만 그 이면에는 순수함을 위협하고 불안하게 하는 비순수함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이 비순수함을 시인은 시 속에 언표화하지 않고 있다. 비순수함의 은폐로 인해 순수는 그만큼 긴장의 정도를 더하게 된다.
이렇게 비순수의 존재를 문명에 드러내고 있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또 그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장미>라는 시에서는 순수와 함께 비순수의 존재가 전경화되어 있다. 의식의 주체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비순수에 대한 순수의 호출이다. 의식의 주체는 우리를 향해 “이 세계의 피가 모두 빠져나간 / 창백한 저 흰 사원을 / 우리의 폭력으로 / 붉게 다시 채워보자”고 한다. 이 시의 행간을 조금이라도 읽어낼 수만 있다면 이 외침의 진의가 순수의 지향에 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순수에 대한 갈망이 비순수의 형식으로 제시되고 있다. “악이 대물림”되는 비순수의 세계에 순수의 ’폭력‘으로 저항하려는 의식 주체의 태도는 시상의 단조로움과 의미의 단성성이라는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순수에 다가가려는 의식 주체의 태도는 독특한 시적 상상력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박카스 빈 병은 냉이꽃을 사랑하였다
신다가 버려진 슬리퍼 한 짝도 냉이꽃을 사랑하였다
금연으로 버림받은 담배 파이프도 그 낭만적 사랑을 냉이꽃 앞에 고백하였다
회색 늑대는 냉이꽃이 좋아 개종을 하였다. 그래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긴 울음을 남기고 삼나무 숲으로 되돌아 갔다
나는 냉이꽃이 내게 사 오라고 한 빗과 손거울을 아직 품에 간직하고 있다
자연에서 떠나온 날짜를 세어본다
나는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 <냉이꽃> 전문
의식의 흐름이 ’냉이꽃을 항하고 있다. 의식의 주체인 ‘나’는 물론 “박카스 빈 병” “담배 파이프” “회색 늑대”까지 “냉이꽃”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고백의 주체가 인간만이 아니라 사물이나 동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다는 것은 “냉이꽃”이 이 모든 것들을 아우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냉이꽃‘이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 의식의 주체는 ’냉이꽃‘이 ’자연‘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의식의 주체에게 ’자연‘은 꼭 돌아가야 하는 곳이다. 그것은 ’자연‘을 자신의 존재가 시작된 곳으로 인식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연‘은 순수의 시원(始原) 혹은 순수의 원적지(原籍地)라고 할 수 있다. 의식의 주체는 이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연“에서 너무 멀리 왔기 때문이다.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 그만큼 순수함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것이다. 이 사실은 곧 의식 주체 자신이 점점 비순수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냉이꽃‘으로 표상되는 순수의 상실과 순수에의 동경이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해명될 성질의 것이라면 순수에 균열을 내는 어떤 불순한 것은 문명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박카스 빈병“ ”버려진 슬리퍼 한 짝“이 환기하는 것은 문명의 그늘이라고 할 수 있다. 순수에서 비순수로, 자연에서 문명으로 의식의 흐름이 이동할수록 그의 시의 상징은 알레고리의 속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가령 <검은 백합>의 경우, 그 강한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어지러워짐과 흑사병에 의해 검은 백합‘으로 변해가는 이야기가 마치 인간의 검은 역사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알레고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사물‘과 ’발화(말)‘를 통해 시적 숙명의 문제를 의인화하여 서술하고 있는 <울부짖는 서정>과 ’구덩이에 던져진 피 묻은 마대자루‘를 초점화하여 ’삶‘에 대한 시상을 전개해나가고 있는 <구덩이> 그리고 ’폭설‘을 의인화하여 ’시간의 폐허와 적막‘을 이야기하고 있는 <폭설>과 ’사막‘에서의 ’자동차‘ 사고를 통해 가공할 속도로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는 현대 문명의 무반성적이고 ’야만과 광기‘에 가득 찬 이면을 폭로하고 있는 <북쪽 사막>등은 지금, 여기의 우리의 현실과 삶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비순수로의 흐름과 알레고리적인 성격과 관련하여 가장 문제적인 시편 중의 하나는 <붉은 돼지들>이다. 이 시가 알레고리적인 것은 ’붉은 돼지들‘의 운명이 일정한 이야기 혹은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축장‘으로 실려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잉태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비극이지만 이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운명에 저항하는 법, 다시 말하면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다. ’붉은 돼지들‘은 ”환란이 다쳐오면 그들은 /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후각으로 흙을 헤쳐 / 붉은 돼지씨를 심“거나 ”’환란이 닥쳐오면 / 본래 너의 땅으로 돌아가라‘ /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그 말을 / 몸으로 살찌워 운반“(<붉은 돼지들>)한다. ’환란‘과 같은 자신들의 비극적인 운명에 좌절하지 않고 ”붉든 돼지씨를 심“거나 예언처럼 ’전해져오는 본래의 땅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몸으로 실찌워 운반‘하는 이들의 모습은 인간(인류)의 역사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힌다. 이들이 보여주는 비극적인 운명에 대처하는 법으로써의 ’붉은 돼지씨 심기‘와 ’본래의 땅으로의 귀환‘은 환란과 도살이 횡행하는 비순수의 시대에 순수를 희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씨‘와 ’본래‘가 은폐하고 있는 순수의 의미를 의식 주체가 발견해냄으로써 이들의 행위는 실존적인 역사성을 띠게 되고, 이로 인해 의식의 주체가 궁극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이 ’붉은 돼지들‘의 역사를 넘어 인간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환란‘과 ’도축‘의 운명 속에서도 새로운 실존을 모색하는 ’붉은 돼지들(인간)‘의 모습은 비순수의 순수 혹은 순수의 비순수라는 삶의 일정한 미적 수준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순수와 비순수의 역설에 은폐된 삶의 진경(珍景)을 발견하기 위해 의식 주체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그런데 묻는 방식이 매혹적이다. ”이제 다시 불은 휘어지고 흙은 구워지는가 / 꺼진 불 속에서 검은 숯과 재가 서로 얼굴을 더듬어 찾는가“ ”그곳에서 암소로 변신한 국가도 평화롭게 풀을 뜯을 수 있는가“(<나는 묻는다>)
4. 미의 복원과 고전적 깊이로서의 시
우리 현대시사에서 미학의 조건과 미학성을 견딜 만한 시인을 발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송찬호의 존재감은 무게를 더한다. 시의 토대를 이루는 말과 언어에 대한 깊이 있는 모색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상징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그의 시 세계는 미에 대한 고전적인 품격과 깊이를 지닌다. 그의 시의 이러한 면모는 어떤 개념이나 도구적인 연관성 없이 세계에 은페된 의미를 발견하려는 미학의 고전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 시인들의 미에 대한 탐색이 대부분 한때의 유행이나 깊이 없는 실험의 차원에 그친 데 반해 그의 탐색은 일정한 맥락과 전망을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시집 역시 미에 대한 이러한 맥락과 전망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현상과 본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형상과 질료, 은폐와 탈은폐, 미와 현실, 소여와 지평, 상징과 알레고리, 순수와 비순수, 애매성과 긴장 등 미학을 이루는 원리와 그 과정을 시로 구현해보이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망각해왔거나 상실해버린 ’미학으로서의 시‘ 혹은 ’시의 미적 정체성‘의 문제에 다름이 아니다. 그는 지금, 여기의 흐름 속에서 그것은 복원하려고 한다. 그가 복원하려는 미학은 시의 미적 원리를 이루는 기본적인 조건이면서 미적 이상과 보편성을 실현하는 토대라는 점에서 ’고전적‘인 성격과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고전적인 시(미학)의 원리와 조건을 지니고 있는 시인을 지금, 여기에서 발견하기는 쉽지 않으며, 이렇게 된 데에는 미의 고전적은 품격과 깊이를 도외시하는 사회적인 상황도 한 원인으로 볼 수 있지만 그것 이상으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시인 자신의 미 혹은 미학성에 대한 자의식의 결핍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의 고전적인 품격과 깊이는 요즘 우리 시가 상실한 미학성의 복원을 드러내는 한 예로 볼 수 있다. 특히 개념이나 도구적 연관성 없이 세계 내에 은폐된 대상을 발견해 그것을 하나의 상징으로 만들어내는 솜씨는 인습화되고 고정화된 관념을 넘어 낯설게하기가 시의 기본 원리라고 알고 있는 이들에게 전범이 될 만한 미학적 사건이다. ’흙‘ ’의자‘ ’동백‘ ’고양이‘ ’나막신‘ 등과 같은 일상의 평범한 대상을 ’사각형의 기억‘ ’얼음 속 불꽃(부재의 실존)‘ ’붉은 눈‘ ’비린내와 궁기‘ ’맫드라미 즙이 문질러진 분홍 나막신‘ 등과 같은 낯설고 새로운 상징으로 변화시켜 질적 도약을 이루어온 그의 저간의 궤적은 우리 시의 한 진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상징은 진화하는 중이다. 이번 시집 속 ’붉은 돼지들‘의 알레고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시의 상징은 미학의 감옥에 갇혀 있지 않고 현실로 통하는 길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새로운 시의 지평은 고전적인 미의 탐색을 통해 열린다는 이 역설은 송찬호에게 ’맨드라미 즙이 문질러진 분홍 나막신‘만큼 선명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