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신화 만들기
▶ 제단이 된 2번 테이블
『 한 그릇 메밀 국수 』 이야기에서 우리가 감동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 이상하게 생각되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매년(每年. 해마다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 섣달 그믐이면 2번 테이블에 팻말을 놓고 10여 년 동안이나 세 모자를 기다리는 북해정 주인의 행동이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제사를 지내듯이 일정한 시간, 그리고 제방(祭榜. 제사를 지낼 때 써 붙이던 글 - 옮긴이)을 붙이듯이 예약석이라는 팻말을 놓고, 아무리 붐벼도 그 자리만은 비워 두고 있는 그 행동이다.
더구나 그 테이블과 의자 역시도 보통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그들이 앉아 있던 옛날 것을 그대로 보존한 것이다. 한 마디로 이같은 행동은 일상적인 것과는 구별되는 의식(儀式) 행위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문화를 지탱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그리고 우리(한국인 – 옮긴이)와 다른 문화가 바로 모든 행위를 양식화하는 데 있다. 이른바 일정한 형식으로 정형화하는 일종의 ‘틀 만들기’이다.
(그 문화에 따르면 – 옮긴이) 마음이 있어서 어떤 양식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양식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생겨난다.
이런 원리는 차를 마시는 다도에서 노/가부키 같은 생활 예술 작품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의 광범위한 영역에 뻗쳐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멋’의 개념은 이와는 반대로 틀을 깨려고 하는 데서 생겨난다. 파격의 미학이다. 우리의 탈춤이나 판소리가 일본의 노/가부키에 비해 가장 다른 것도 이 점이다. 우리의 판소리는 형식의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일탈성이 강한 데 비해서, 일본 것(노/가부키 – 옮긴이)은 극한까지 그 형식미를 닦아 간다. 그들은 그것을 ‘미가쿠(磨く[마쿠])’ 또는 ‘깎는다(削る[게즈루/けずる - 옮긴이])’고 한다.
이같은 양식과 의식화에서 생겨나는 것이 이른바 ‘신화’라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신화라는 허구성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이 의식이다.
이 동화는 의식화와 신화의 허구 속에서 살아가는 일본적 문화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매년 섣달 그믐날 10시, 예약석의 그 2번 테이블은 ‘행운의 테이블’이라는 하나의 신화(옛 배달말로는 ‘본향풀이’ - 옮긴이)를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이 소문을 듣고 먼 곳에서까지 와서 이 테이블에 앉아 메밀국수를 사 먹고 가는 여학생, 또는 이 테이블이 빌 때까지 기다렸다 주문을 하는 젊은 부부들이 들끓는 것이다.
기능적인 면에서는 그 테이블(식탁 – 옮긴이)은 오히려 불편하다. 북해정이 번창하기 이전의 것으로, 개조된 다른 새 테이블보다 낡고 더럽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 테이블에 앉으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가진 신화적인 상징성, ‘행운의 테이블’이라는 허구 때문이다. 2번 테이블은 일종의 제단으로 바뀐 것이다. 그 허구가 현실을 압도하기 위해서는 십수 년이라는 그 역사적 지속성, 해마다 벌이는 북해정 주인의 그 제례적 행위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손님은 물론(勿論. 말할[論] 것도 없고[勿] - 옮긴이) 북해정 주인 역시(또한 – 옮긴이) 세 모자를 기다리는 것 자체가 생활의 일부가 되고, 그러한 빈자리를 만들어 놓고 예약석 팻말을 놓지 않으면 한 해를 지낸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세 모자가 나타나는 시간이 되면 북해정 주인 부부가 공연히 마음이 들떠 불안해하는 것이라든가,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지만 서로 그 테이블을 엿보는 행위 같은 것은 완전히 신을 기다리는 종교적인 태도와 매우 유사하다(비슷하다 – 옮긴이).
이 신화 만들기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일본은 현실과 신화를 완전히 혼융(渾融. 완전히 융합함 – 옮긴이)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아주 세속화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두드러져 있는 것이다.
이 동화( 『 한 그릇 메밀 국수 』 - 옮긴이 )의 내용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동화가 일본에 실제로 파문을 던진 ‘가케소바 증후군’의 유별난 현상을 놓고 보더라도, 일본 문화의 허구성과 그 신화 만들기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일본 사회는 이 동화의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 짧은 동화지만 이야기는 더욱 단조해서 거의 되풀이로 되어 있다. 무대도 시간 설정도 똑같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국민 학교(초등학교. 이 글은 ‘초등학교’라는 명칭이 생기기 전에 쓰였다 – 옮긴이) 학생에서 대학을 졸업, 성인(어른 – 옮긴이)이 되어 취직을 하게 되는 동안의 이야기인데도 시간은 매년 12월 31일(섣달 그믐날) 10시경으로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주인공이 이사를 하고 이동을 하는데도 무대는 북해정의 소바집(메밀국수집 – 옮긴이)으로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 되풀이 속에서 달라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메밀 국수를 주문하는 그릇수이다. 처음에는 한 그릇, 다음에는 두 그릇, 마지막에는 세 사람이 각각 삼 인분의 세 그릇을 시킨다. 이 그릇수의 증대가 이야기 전개의 지렛대가 되는 것이다.
▶ 일억 이천만의 눈물
(서기 – 옮긴이) 1987년 (양력 – 옮긴이) 5월, 이 동화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별로 화젯거리가 되지 않았다. 원래 이 이야기는 동화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구릿고노 가이’라는 구전 동화 모임의 통신 판매망과 강연장의 직판(直販. 생산자가 중개 상인을 거치지 않고, 제품을 소비자에게 직접 파는 일 – 옮긴이) 형태로 보급되어 왔기 때문에, 몇몇 동호인 사이에서나 알고 있는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일 년 뒤(서기 1988년. 이 해에 한국에서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 옮긴이) FM 동경 제작의 연말 프로 ‘가는 해 오는 해’에서 이 동화가 전문 낭독되고, 『 산케이 신문 』 의 사회면 머리기사로 알려지면서부터 뒤늦게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방송국에는 천 통이 넘는 청취자의 투고가 몰려들어 재방송을 하였고, 국회에서는 질문대에 오른 공명당 의원 한 사람(‘오쿠보 나오히고’)이 15분 가량 이 『 한 그릇 메밀 국수 』 를 낭독하여 시끄럽던 장내가 숙연해지면서, 이윽고 각료석에 앉아 있던 총무처 장관이 눈물을 흘리는 뜨거운 장면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드디어 이 동화는 ‘구리 료헤이’ 작품집 속에 수록되어 일반 서점에서 판매되기 시작, 일약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오르게 되고, 『 주간 문춘 』 이 ‘편집부원도 울었다.’는 선전 문구를 달고 전문을 게재(揭載. ‘싣거나[載] 내검[揭]’ → 글이나 그림을 신문/잡지에 실음 : 옮긴이)했다.
그러자 전(온 – 옮긴이) 일본 열도가 눈물로 침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이야기를 읽고 울지 않고 배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차 속에서 이 책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혹은 ‘정말 울지 않고 견딜 수 있는지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라는 말들이 신문/잡지에 쏟아져 나오게 되고, ‘나도 울었습니다.’라는 제목 아래 작가, 예술인들을 비롯 일본의 저명 인사들이 총동원되어 눈물 흘리기 콘테스트의 특집이 등장하기도 했다.
활자만이 아니라 ‘후지 텔레비전’ 같은 방송국에서는 이 동화를 무려 닷새 동안이나 낭독자를 달리해 가면서 되풀이 방송, 그것을 시청하는 사람들의 우는 모습을 실황 중계하기도 했다. 게스트로 나온 연예인들의 우는 얼굴을 비롯하여 시내의 각 국민 학교와 사친회(師親會. 교사[師]와 학부형[親]의 모임[會]. 학교 운영을 돕고, 학생들의 복지를 증진하며, 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서, 학부모 및 유지들로 조직되던 모임 – 옮긴이)를 찾아다니며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눈물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 공개했다. 일본인들이 잘 쓰는 말로 하자면, ‘일억 총눈물’의 바다가 재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한 감동에서 끝나는 현상이 아니었다. 경시청(한국으로 치면, 경찰청 – 옮긴이)에서는 이 『 한 그릇 메밀 국수 』 를 복사하여 일선 수사관들에게 배포했다. 피의자 신문을 할 때 우선 이 동화를 읽혀 눈물을 흘리게 하고, 마음이 순수해진 그 순간을 틈타서 자백을 시키라는 아이디어였다.
▶ 외톨이 두려운 사람들
만약 (이 동화를 다 읽고도 – 옮긴이) 울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이미 그것은 일본인이 아니다. 일억이 총(모두 – 옮긴이) 울어야 한다. 남들이 다 우는데 울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무라하치부(마을에서 따돌림을 받는 외톨이)가 된다.
‘다모리’라는 일본의 유명한 코미디언은 방송중 이 동화를 비꼬는 말을 했다. ‘울리는 이야기’이기는 하나, 좀 지나치다는 의견이었다. 그러자 젊은 사람들로부터 항의 편지가 쇄도하고, 결국 다모리는 대학 강단에서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자기 입장(처지 – 옮긴이)을 해명하는 강연회를 갖기에 이른다. 이런 현상을 두고 일본 언론이나 학계에서는 ‘소바(메밀국수 – 옮긴이) 증후군’ 또는 ‘가케소바 현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화 속에서는 2번 테이블의 신화가 생겨났듯이, 현실 속에서도 그와 똑같은 『 한 그릇 메밀 국수 』 의 신화가 탄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일본인들의 신화만들기만이 아니라, 이『 한 그릇 메밀 국수 』는 신화의 붕괴 과정을 동시에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욱더 우리는 일본 문화의 특이성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안데르센의 동화 「 인어 공주 」 이야기를 사실(에 바탕을 둔 – 옮긴이) 이야기로 믿었던 사람들이 뒷날 그것이 허구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고 코펜하겐에 세운 인어상을 부수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리고 로렐라이의 전설이 사실이 아니라 하여 관광객이 발길을 돌리고, 하이네의 그 유명한 노래가 불리어지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 동화( 『 한 그릇 메밀 국수 』 - 옮긴이 )는 이토록 일본 전 열도에 눈물의 신화를 만들어 내고서도, 그것이 원래 허구를 다루는 소설인데도 불구하고(‘불구하고’는 빼야 한다 – 옮긴이) 실화가 아니라는 이유(까닭 – 옮긴이)로 (일본인들이 – 옮긴이) 금시(今時. 곧/바로 – 옮긴이) 냉담하게 돌아서, 그 뜨거웠던 바람은 언제 불었냐는 듯 꺼져 버리고 말았다.
즉, 이 동화가 선풍을 불러일으키게 되자, 그것이 ‘진짜 이야기냐, 허구냐.’로 관심이 모아졌다. 더구나 이 동화의 책머리에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의 12월 31일 삿포로 시에 있는 소바집 북해정에서 생긴 일로부터 시작한다.’라는 도입문이 적혀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동화 속의 주인공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증을 갖게 되고, 그에 대한 온갖 풍문(風聞. 바람결[風]에 들리는 소문[聞] - 옮긴이)이 떠돌기 시작하게 된다.
형이 현재 삿포로 종합 병원에서 소아과 의사를 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느니, 동생이 교토에서 은행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곧 소원대로 메밀국수집을 연다느니, 심지어는 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어 작가인 구리 씨가 주례를 서게 되었다느니 하고 말이다.
▶ 허구와 사실의 갈등
그런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세상이 이렇게 떠들썩한데, 그게 사실이라면 어째서 그 모델들은 지금껏 잠자코 있는가. 이야기는 처음부터 허구를 사실인 체 꾸며 낸 작가의 사기극이다.’라는 비난이 일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1989년 6월 2일 『 석간 후지 』, 『 동경신문(도쿄신문 – 옮긴이) 』, 『 포커스 』 지 등은 이 작가의 과거 신상 문제에 대해 일제히 폭로성 기사를 내보냈다.
엉뚱하게도 ‘내가 그 소바집 주인’이라고 하며 나타난 사람은 3년 전에 작가인 구리 씨로부터 속았다는 ‘야마오카 고오조’ 씨였다. 자기는 북대의학부의 소아과 의사이지만, 뜻이 있어 병원을 그만두고 동화 작가가 되려고 공부를 하고 있노라고 하며, 자기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는데, 가짜 의료 행각 등이 발각되자 자기 자동차를 훔쳐 타고 달아난 사람이 바로 『 한 그릇 메밀 국수 』 의 작가 구리 료헤이라는 고발이었다.
실화냐 허구냐와 작가의 신상 문제가 이번에는 매스컴의 초점이 되면서 한 그릇의 뜨거운 눈물은 점차 식어 갔고, 그 감동의 불꽃은 곧 꺼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다시 1992년 이 이야기는 영화화되어 상영되었고, 어느 지방 기업체에서는 이 감동의 이야기를 이대로 묻어 두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하여 만화로 만들어 그 붐의 심지에 다시 불을 붙이는 운동을 펼쳤다(그것이 바로 필자[이어령 교수 – 옮긴이]에게 보내 온 만화책이다).
구리 료헤이를 위한 모임이 열리고, 그의 고향에서는 특별 영화 시사회와 강연회 등을 개최하여 그야말로 ‘하게마시 모임’을 가졌다.
이 이야기를 둘러싼 이상과 같은 사회적 반응에서, 우리는 동화보다 더 흥미있는 신화 만들기의 양면성을 엿볼 수 있다.
▶ 신화만들기의 전통과 역사
일본의 ‘검객에 대한 무용담’이라는 것은 대개가 다 일본의 이 신화 만들기의 소산(所産. ‘소산물[所産物]’을 줄인 말. 어떤 행위나 상황에 따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 – 옮긴이)이다. 거듭 말하자면, 신화란 어느 민족 어느 시대에도 있는 것이므로 일본만의 현상이라고 할 게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신화가 신화로서가 아니라 『 한 그릇 메밀 국수 』 의 그것처럼 막바로 역사와 현실에 밀착하여 구별할 수 없이 혼융되어 버리는 데 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일본의 미에(三重[삼중])현[혼슈 중부의 현이자, 남쪽으로는 태평양을 낀 현. 교토의 동남쪽, 나고야의 서남쪽에 있다 – 옮긴이]에 있는 ‘이가(伊賀[이하])’라는 곳에는 사적으로까지 지정되어 있는 ‘伊賀越 複讐 紀念碑(이하월 복수 기념비 – 옮긴이)’라는 비석이 있다.
350년 전(에도 시대인 서기 1642년 – 옮긴이) 일본의 신화적인 검객 ‘아라키 마타우에몬(荒木 又右衛門[황목 우우위문])’이 이 곳에서 36명을 벤 칼싸움을 벌인 현장이라는 것이다.
전설이나 신화(神話. 옛 배달말로는 ‘본향[本鄕]풀이’ - 옮긴이)의 경우 그것(베어죽은 사람의 수 – 옮긴이)이 백 명이면 어떻고 천 명이면 어떻겠는가. 신화는 어디까지나 신화이므로 트집잡을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신화가 아니라 하나의 사적이요 역사로서 실존했던 한 인물의 기록인 것이다. 정말 한 인간이 36명을 한 자리에서 칼로 베어 죽일 수 있는 것일까? 일본 사람들은 이것을 실제로 믿고 있으며, 신화가 아니라 사실의(사실‘인’ - 옮긴이) 역사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관(官 : 여기서는 에도 막부의 지방 관청 – 옮긴이)에서 조사한 기록을 보면, 아라키가 칼싸움에서 쓰러뜨린 상대는 36명이 아니라 겨우 두 명뿐이다. 그 나머지는 다른 사람의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가, 뒤에 부상으로 죽은 사람까지 두 명 정도이다.
이것이 일본 특유의 그 신화 만들기에 의해서 두 명이 네 명으로 불어나고, 다시 그것이 58명으로 불어났다가, 너무 과장이 심하여 허구성이 짙어지자 다시 수를 줄여 36명으로 낙찰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치고 아라키 마타우에몬의 36명 기리(斬り[참리] : 베기)의 신화를 신화로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이 일어난 곳 – 옮긴이)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처럼,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믿고들 있다(이게 서기 1992년의 현실이었는데, 한 세대 하고도 두 해가 흐른 지금도 상황이 이런지는 잘 모르겠다. 아시는 분은 댓글을 달아 주시기 바란다 – 옮긴이).
그래도 이런 것은 무용담이므로 별로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당장 역사(歷史. 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에 큰 영향을 끼친 근대 인물에 대한 신화화는 단순한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일종의 종교를 낳게 되어 모든 것에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일본 사람들은 ‘노기 다이쇼(노기 대장. 본명은 ’노기 마레스케[乃木 希典(내목 희전)]’다. ‘다이쇼’는 육군에서 가장 높은 계급인 ‘대장[大將]’의 왜국식 발음이다.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메이지 왜왕이 죽은 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 옮긴이)’ 라고 하면 청빈하고 청렴한 일본의 대표적인 군인상으로, 군신(軍神. 전쟁의 신/큰 무공을 세우고 전사한 군인을 높여 이르는 말 – 옮긴이)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러니 만약 그들에게 – 옮긴이) 노기(乃木[내목]) 대장이 오직(汚職. ‘직책[職]을 더럽힘[汚]’ → 벼슬아치가 직권을 남용해서 부정한 이익을 취함 : 옮긴이)에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말을 믿으려고 하는 일본 사람은 거의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기 대장은 지금 바로 노기 신사(神社)가 있는 동경(東京. 도쿄 – 옮긴이) 한복판 그 자리에 광대한 저택을 짓고, 40명이나 되는 고용인들을 부리며 살았다.
“대장 월급으로 어떻게 여러 사람을 고용하실 수가 있습니까?”
라고(하고 – 옮긴이) 누군가가 걱정스레 물었더니 노기 대장은, “걱정할 게 없어. 오쿠라(大倉[대창]. 근대 왜국의 재벌. 수로나 지하철을 건설했고, 군수품을 수출하기도 했으며, 광업회사를 세우기도 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미군에 의해 해체되었다. 이후 사원들이 다시 모여 회사들 가운데 건설사를 사들인 뒤, 새 사장을 뽑고 이름을 “타이세이”로 바꾸었다 - 옮긴이)가 전부 지불해 주니까.”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노기 대장에게 – 옮긴이) “오쿠라가 왜 그 돈을 지불하지요(내지요 – 옮긴이)?”라고 거듭 묻자, “글쎄, 나도 잘 몰라. 그저 군화를 오쿠라 이외에서 사서는 안 되게 해 주었지.”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직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쿠라가 지불해 주고 있는 그 사용인들의 급료는 뇌물인 것이고, 특정 기업에게 군화를 사게 하는 것은 엄연한 특혜 조치인 것이다.
(현실이 이런데도, “<일본[왜국]>은 정직하다.”거나 “<일본>은 믿을 수 있다.”고 우기는 친일국가의 게이샤 학자들이나 친일국가의 시민/국민들, 그리고 한국 안의 종일파[從日派. 왜국(日)을 (종처럼) 따르는(從) 무리(派)]들은 도대체 어디서 어떤 왜국을 보고 온 건가? 대중문화 속에 나오는, - 왜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검열을 거쳤기 때문에 - 갈마[‘역사’]나 현실과는 거리가 먼 왜국? - 옮긴이)
그런데도 일본 사람들은 ‘청렴한 군신 노기 장군’의 신화를 사실로서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한국인에게도 낯익은 임란(서기 1592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왜군의 근세조선 침략전쟁. 줄여서 ‘6년 전쟁’ - 옮긴이)의 악명 높은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등청정])’의 무용담은, 일본인의 신화 만들기의 대표적인 표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한국(당시, 그러니까 서기 1592 ~ 1598년에는 근세조선 – 옮긴이)에 쳐들어와 호랑이(순수한 배달말로는 ‘줄범’ - 옮긴이) 사냥을 한 이야기는, ‘호걸 가토 기요마사의 성가(聲價. 사람이나 물건에 대하여 세상에 드러난 좋은 평판이나 가치 – 옮긴이)를 올리는 무용담’으로 삼척 동자라도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조금만 사적(史籍. 갈마[史]를 [적은] 책[籍]/역사책 : 옮긴이)을 뒤져 보면, 가토 기요마사는 칼이나 창을 다룰 만큼 무예를 닦았던 흔적이 거의 없다. 있다면 총(근세조선에서는 ‘조총’으로 불렸던 화승총. 당시 왜국에서는 화승총을 ‘철포[鐵砲]’로 불렀다 – 옮긴이)을 쏠 줄 아는 정도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호랑이를 장창(長槍. 긴[長] 창[槍] - 옮긴이)으로 찔러 죽인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은, 총으로 쏘아 죽인 호랑이를 곁에 있는 부하의 창을 받아 창으로 찌른 듯이 연출을 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거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처럼 들릴는지 모르나, 가토 기요마사는 임란 때 고니시(小西行長[소서행장])보다도 용명(勇名. 용감하고 사납다는 명성 – 옮긴이)을 떨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한국(근세조선 – 옮긴이)의 정규군(관군 – 옮긴이)과는 거의 맞붙어 싸운 적이 없다. 고니시 군의 뒷전을 쫓아가거나, 조선군이 없는 동해안으로 해서 북상을 했기 때문이다. (가토는 – 옮긴이) 그러고는 단천의 은산(銀山 : 은광 – 옮긴이)을 수중(手中. 손[手] 안[中] - 옮긴이)에 넣고 은을 캐어 도요토미(도요토미 히데요시 – 옮긴이)에게 헌상했다. (그리고 그는 – 옮긴이) 경주 지역에서는 민간인(백성 – 옮긴이)을 학살하여 (그들의 – 옮긴이) 코를 잘라 바쳐 전공을 올린 것처럼 보고했다. 실제 싸움은 남이 하고, 전공은 가토가 독차지한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 사람들은 임란 때 승전을 한 장군을 가토로 알고 있다.
▶ 허구를 사실로 만드는 일본 환상
일본의 집단주의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은, 이렇게 허구를 사실로 만들고 신화를 역사로 믿게 하는 특성 가운데 있다. 거기에서 생겨난 것이 바로 ‘의사 혈연주의(擬似血緣主義. [사람들이] 실제로는 한 핏줄이 아니지만, 마치 한 집안/한 핏줄처럼 하나로 뭉치고 서로를 돌보자는 주장 – 옮긴이)’요, 의사 신화주의(신화, 그러니까 본향풀이를 실제 일어났던 일처럼 여기려는 이념 – 옮긴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일본인들이 ‘ 『 한 그릇 메밀 국수 』 증후군’이라고 불렀던 그 이상 현상들은 다른 합리적 분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메밀 국수 한 그릇을 놓고 국회에서 만화 가게에 이르기까지 일억 이천이 눈물을 흘린 그 ‘눈물놀이’는 대체 무엇이며, 신문 소설도 아닌 동화가 실화가 아니라 해서 하루아침에 그 감동의 신화를 쓰레기통에 내던지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와 신화의 영역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일본병’으로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라인강의 로렐라이 전설이 진짜가 아니라 꾸며낸 이야기라고 해서, 그 곳을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줄었다거나, 그것을 노래한 하이네의 시와 슈베르트의 음악의 인기가 떨어졌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번갯불 시험을 해서 벼락의 정체가 드러났다고 해서, 제우스 신이 부정되거나 거꾸로 제우스 신화를 믿는 (서양의 – 옮긴이) 기업가가 올림포스 동산에 전기 회사를 차리려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허구의 영역과 사실의 영역을 혼동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 질환이다. 흔히 연극을 보던 관중 가운데 하나가 그것을 사실로 알고 무대로 뛰어올라 악역을 맡은 배우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그 징후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 문학사에서 가장 특이한 현상이 ‘사소설(私小說)’이라는 개념이다. 사소설이란, 작가가 직접 자기에게 일어난 이야기를 (소설로 – 옮긴이) 써야 한다는 이론이다. 그리고 이런 사소설이 지금도 일본 문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역사의 상징적 영역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 라틴어. 한자로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공작인[工作人] - 옮긴이)’에 의해서, 신화의 상징적 영역은 ‘호모 픽토르(Homo pictor. “놀고 상상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놀이와 상상과 창조적 힘으로 끝없이 삶을 허구와 이미지로 충만하게 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에 의해서 움직인다. 좀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호모 파베르는 문명을 낳고, 호모 픽토르는 문화를 낳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영역이 혼란을 일으키거나 하나로 통합되면 『 한 그릇 메밀 국수 』 의 증후군 같은 이상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병의 특성은 (그 – 옮긴이) 누구도 (그걸 – 옮긴이) 병으로 생각하지 않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진주 조개란, 이상 물질의 침입으로 병에 걸린 조개들이다. 그런데 이 조개의 병이 만들어 내는 진주가 아름다운 광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건강한 조개보다도 훨씬 더 귀한 대접을 받게 된다.
『 역사의 종말 』 을 쓴 ‘프란시스 후쿠야마’도 지적한 바 있듯이, 일본의 역사를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관찰해 보면 분명 소련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이질성을 띤 종양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다만 소련이 악성이라면, 일본의 그것은 양성이라는 점만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상징을 역사로 믿는 그 징후 가운데 정점을 이루고 있는 것이, ‘2천 년 동안 한 번도 끊이지 않고 내려왔다.’는 만세일계의 천황(왜왕[倭王] - 옮긴이) 상징이며 그 제도이다. 그리스(올바른 이름은 ‘헬라스’ - 옮긴이)의 경우로 치자면 제우스 신의 자손이 그리스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
2차 대전 때의 (근대 왜군 출신 – 옮긴이) 특공대들이 ‘천황 만세’를 부르며 죽어간 것이 그 일본병의 특이한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전후에는 어느 맥주 회사의 퇴직 사원이 천황 폐하가 아니라 ‘기린비르(일본의 맥주 회사 이름 – 옮긴이) 만세’라고 부르고 죽었다는 이야기로 바뀐다.
이렇게 허구와 사실이 일체가 되는 일본병의 증후군이 군국주의(나아가 제국주의 – 옮긴이) 이데올로기와 만나면 우리(한국인을 비롯한 배달민족 – 옮긴이)가 겪었던 그 가혹했던 식민주의 통치(지배 – 옮긴이)가 되고, 그것이 산업주의 실용성과 만나면 오늘(서기 1992년 현재 – 옮긴이)의 경제 대국을 만든 일본식 경영이 된다.
그러나 그 같은 병으로 해서 『 한 그릇 메밀 국수 』 의 운명처럼 하루아침에 그 아름답던 눈물의 이야기가 거품 이야기로 꺼져 버리게 된다. 일본에 불황을 몰고 온 바로 그 거품 경제처럼 말이다.
▶ 혼다와 폭주족
‘장 가뱅(프랑스의 남성 배우 – 옮긴이)’이 나오는 프랑스 영화에「 르 샤(고양이) 」라는 것이 있다. 은퇴한 노인의 생활을 그린 이야기이다. 그 영화에는 변화하는 시대의 의미를 묘사한(그려낸/그린 – 옮긴이)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나온다 – 옮긴이).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것은, 장 가뱅이 길가에 세워 놓은 남의 오토바이를 손으로 만져 보면서 젊은 시절의 환상에 젖는 장면이다. 오토바이 뒤에 지금의 아내를 태우고 첫사랑을 하던 때의 그 기억이다.
그때 오토바이 임자인 젊은이가 나타나자, 장 가뱅은 이렇게 말한다.
‘여보게 젊은이, 나도 젊었을 때에는 멋있는 오토바이를 한 대 가지고 있었지. 데이빗슨이었어. 그런데 이 오토바이는 뭐야?’
그러자 젊은이는 ‘혼다!’라고 대답한다. 장 가뱅은 처음 들어보는 말에 약간 놀라면서 ‘혼다, 혼다라구?’ 하고 낯선 말을 되뇌어 보인다.
장 가뱅이 한창 인기를 날리던 흑백 영화 시대처럼 데이빗슨의 시대도 갔다. 그리고 일본의 시대, 혼다의 시대가 온 것이다.
우리는 그 노인의 처량한 뒷모습에서 서구 문명의 황혼을 느낀다. 그리고 이제는 중천에 뜬 혼다의 눈부신 태양을 본다(이 글은 일본이 아직 힘이 세고 영향력이 강하던 때인 서기 1990년대 초에 쓰였다 – 옮긴이).
그런데 바로 그 혼다 오토바이의 신화를 만들어 낸 주인공 ‘혼다 겐이치로’의 일생과 성공담을 들으면, 누구나 『 한 그릇 메밀 국수 』 에서 받았던 것과 같은 감동을 받게 된다. 혼다는 북해정 소바집 주인처럼 뒷골목 작은 공장에서부터 장사를 시작한다. 거기에서부터 착실히 기업을 일으켜 오토바이로 세계 제일, 자동차 일본 3위의 거대한 신화의 성(城)을 만들어 낸다. 당대의 경영자로서, 기술자로서 그의 매력적인 인간상을 그린 전기는 수없이 출판되어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그러나 이렇게 한몸에 존경을 받고 있는 일본 기업의 상징적 인물을 조금만 각도를 달리해서 바라보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리를 질주하는 폭주족이요, 소음 공해를 전 세계(온 누리 – 옮긴이)에 퍼뜨린 원흉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
‘아름다운 꽃밭에는 무서운 독사도 있다.’고 경고한 것은 셰익스피어였다. 누구나 아름다운 꽃에만 눈이 팔려서 발 밑의 독사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꽃밭의 독사는 한결 더 무서운 법이다. 일본의 한 작가(阿部 牧郎. 아베 마키로[아부 목랑])는 혼다 꽃밭의 독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혼다는 기술자의 행복을 한몸으로 구현한 인물이다. 소년 시절부터 기계가 좋아서 모든 것을 잊고 개량 개발에 온 정신을 팔아 왔다. (그는 – 옮긴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연구에 몰두했다. 몇 번이고 어려운 장벽에 부딪쳤지만 굴하지 않고 일에 매진, 차례로 우수한 차를 세상에 내놓았다.
초일류 기업의 사장이 된 뒤에도, 혼다는 뒷골목 작은 공장 주인 그대로였다. 일을 하는 데는 엄격했지만 부하에 대한 오모이야리(따뜻한 배려)가 있고 공평무사했다. 그는 손님이 원하는(바라는 – 옮긴이) 오토바이를 개발해 그것을 양산, 세계 시장에 내놓아 환영을 받았으며, 일본 경제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헌을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일생을 오토바이 만들기에만 골몰하여 다른 것은 몰랐던 외길 인생에 빠진 오타쿠족(おたく族)이었다. 오타쿠족은 자기의 좁은 세계에 틀어박혀 주위의 다른 일에 대해서는 둔감했다. 혼다는 자기가 만든 오토바이가 어떤 소음을 전세계(온 누리 – 옮긴이)에 뿌리고 다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혼다가 엔진을 너무 만진 나머지 난청증(難聽症. 듣기[聽] 어려워하는[難] 증상[症]. → 귀를 비롯한 청각 기관의 장애로 소리를 듣기 어렵거나 들을 수 없는 증상 : 옮긴이)에 걸려, 오토바이의 소음이 얼마나 시끄러운지를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은 여간 상징적인 일이 아니다.
폭주족들이 자기 도취에 빠져 오로지 자기가 밟아 대는 (오토바이의 – 옮긴이) 엔진 소리와 스피드밖에는 감지할 수 없었던 것처럼, 혼다 역시 기술자로서 경영자로서 오로지 앞만 보고 일에 매진함으로써 자기 세계 이외의 것에 대한 바깥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오타쿠족이었던 그는 ‘공평무사한 대 경영자’가 되었고, 동시에 같은 이유(까닭 – 옮긴이)로 ‘소음 공해의 원흉’이요 ‘폭주족의 대부’가 되기도 한 것이다.
혼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 기업이, 일본인 전체가 혼다와 같은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그들은 – 옮긴이) 세계로부터 혼다와 같이 번영했고 혼다처럼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역시 혼다와 마찬가지로 일본 열도에만 틀어박힌 폐쇄적인 오타쿠족이 되었고, 동시에 세계(누리 – 옮긴이)에 여러 가지 마찰의 소음을 일으켜도 자기가 만든 것(소음 – 옮긴이)을 자기 귀로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오타쿠족이 바깥 세계로 나가면 폭주족으로 변하듯이, 안으로 똘똘 뭉친 ‘우치와’가 밖으로 향하면 세계 시장을 질주하는 무역 폭주족으로 변한다. 일본 사람 때문에 실업자가 늘어나고, 수백년 동안 쌓아올린 기업들이 쓰러져도, 그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난청자가 되어버린다(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서른 두 해 전인 서기 1992년, 그러니까 일본의 기업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서양의 기업들을 쓰러뜨리던 시절에 쓰였다 – 옮긴이). 따라서 (일본인들에게는 – 옮긴이) 일본을 향한 세계의 소리는 시기와 질투에서 나온 ‘저팬 배싱(일본 때리기)’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사카야 다이지’가 지적하였듯이, 수십만의 보트 피플이 바다 위를 떠다닐 때 그것에 동정을 표시한 일본인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일본 정부의 훈령은 “바다에 이상한 것이 떠 있으면 도망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도 그 보트 피플 속에 캄보디아 인과 결혼을 한 ‘나이토(內藤[내등])’라는 일본인 여성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일본의 – 옮긴이) 매스컴이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수선을 폈다.
폭주족들은 오로지 자기의 폭음 이외의 것은 듣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 옮긴이) 자기 머리를 보호하고 있는 헬멧 속에 감춰진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외길 한 줌밖에는 보지 못한다.
그렇다. 그렇게 된다. 조심스럽게,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와 ‘저 ……, 메밀 국수 일 인분만 되겠습니까.’라고(하고 – 옮긴이) 말하던 그 여인의 한없이 공손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북해정 밖 다른 세계(그러니까, 일본 밖에 있는 다른 나라 – 옮긴이)로 나가면 귀가 멍멍한 폭주족의 오토바이 소리로 변하고 만다. 10여 년 만에 다시 돌아와 처음으로 세 식구가 세 그릇의 메밀 국수를 시킬 때 북해정에 울려 퍼졌던 화기애애한 북해정 안의 박수 소리 ―― 나카마들의 그 박수 소리가 일단 산맥을 넘고 바다를 건너 바깥 세계로 번져 가면 천억이 넘는 달러가 쏟아지는 황금의 폭음이 되는 것이다. (이사실에서 알 수 있듯, - 옮긴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메밀 국수 한 그릇을 가운데 두고 세 식구가 사이좋게 도시코시 소바를 먹고 있는 그 꽃밭의 정경 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뜻밖의 독사가 숨어 있다.
▶ 한국인과 ‘한 그릇 메밀 국수’
한국의 어느 칼럼니스트는 『 한 그릇 메밀 국수 』 를 읽고 그것을 한국인과 이렇게 비교한 적이 있었다.
‘우리 한국 사람이라면 못 사먹을 지경이면 차라리 가지를 말지, 한 그릇 갖고 셋이 나누어 먹는 궁상을 소바집에까지 가서 떨지는 않았을 것이다.
첫 해와 둘째 해에는 한 그릇을 셋이 나누어 먹고, 그 다음 해에는 두 그릇을 셋이, 그리고 10여 년 뒤에야 비로소 세 그릇을 셋이 나누어 먹었다는 데서, 자신의 분(분수? - 옮긴이)대로 사는 일본 사람과, 분보다 체면을 중요시하는 우리 한국 사람의 차이가 대조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보다 소바집의 주인한테서 보다 그 분(分) 의식이 강렬하다.
세 모자가 와서 메밀 국수 한 그릇을 시켰을 때, 측은하게 생각한 소바집 안주인은 세 그릇을 말아 내려 했다. 한데 바깥 주인은 ’안 돼, 오히려 그 때문에 불편하게 생각할 거야.‘ 하며 애써 세 모자가 지키려는 분을 눈물 흘리며 보장해 주고 있다. 무서운 일본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 우동집 같으면 한 그릇 갖고 셋이 나눠 먹는 손님 따위는 시덥지 않게 여기거나, 가엾게 여겼다면 세 그릇 말아 주고 돈을 받지 않거나 했을 것이다. 나의 분도 주변 상황에 따라 흔들리고, 남의 분도 지켜 주지 못한다.
자타(自他. 나와 남 – 옮긴이)간에(사이에 – 옮긴이) 분을 지키지 못하기에 의타적(依他的. 다른 사람[他]에게 기대는[依] 성향[的] - 옮긴이)이 되고, 매사(每事. 모든 일 – 옮긴이)에 남의 탓만 하며 원망할 거리도 많아진다.
스스로의(자신의 – 옮긴이) 분을 지키며 역경을 이겨 내고 또 그 분이 흐트러지지 않게끔 보장해 주는 일본 사람들의 분 의식이 소복이 담긴 (작품이 – 옮긴이) 『 한 그릇 메밀 국수 』 이다.
일본 사람들은 울었다지만, 우리 한국 사람은 일본 사람 대하는 시각을 달리해야 할 『 한 그릇 메밀 국수 』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칼럼을 인용 보도한 (오늘날, 그러니까 서기 2024년이 아니라 그보다 한 세대 전인 서기 1990년대 초의 – 옮긴이) 일본 사람들은 칭찬으로서가 아니라 일본인의 이같은 ‘외곬’의 오타쿠족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 칼럼을 인용하면서 – 옮긴이) ‘스스로 반성해야 된다.’는 결론을 덧붙이고 있다(일본의 불황이 심해지기 전인 서기 1990년대 초였으니까 일본인들에게서 이런 냉정하고 이성적이며 올바른 결론이 나왔지, 만약 오늘날, 그러니까 고령화나 저출생이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문에 엉망이 된 서기 2024년의 왜국[倭國]에서 사는 왜인[倭人]이었다면 그와는 반대로 ‘한국 놈들이 우리를 존경한다는 증거’라고 우기고 ‘툭하면 반일하는 한국도 우리가 훌륭하고 자기들은 형편없다는 것을 이 글로 입증한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론을 친일국가들과 국제사회에 널리 퍼뜨렸으리라 - 옮긴이).
( → 9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