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유증 / 이완호
이별은 언제나 애틋하다. 미국에서 고향을 찾은 심우의 귀국일이 가까워질수록 벌써부터 아쉬움이 밀려온다. 늘그막에 자식 따라 이민 간 뒤로 가끔씩 다니러 올 때마다 왜 그리 시간이 빨리 가는지. 멀리 있어도 이동통신 기기 덕분에 자주 안부를 주고받긴 하지만 그걸로 만남의 갈증은 충분히 해소되지 않았다. 코로나가 한고비를 넘기며 삼 년 만에 이루어진 이번 상봉은 남북 이산가족들처럼 조급한 마음에 더더욱 시간이 어떻게 지나간지 모르게 흘러갔다. 그동안 함께 보낸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수목원에 가서 알록달록한 늦가을 단풍도 감상하고, 성탄절 특송을 위해 성가 연습에도 참여하고, 왕복 여덟 시간을 운전하여 보고 싶던 한 수도자와도 만나고, 그림 같은 저수지 옆 산책로를 따라 정처 없이 걸으며 순례자행세도 하면서, 소문난 맛집에 들러 구수한 향토음식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래도 뭔가 부족하여 헤어지기 전에 추억여행이라도 하려고 두 부부가 함께 가까운 자연휴양림으로 이박삼일 짧은 여행을 떠났다.
먼저 예산 수덕사에 들러 한숨 돌리기로 했다. 덕숭산의 넉넉한 자락에 포근히 안긴 천년 고찰은 고요함과 평화로움으로 방문객의 온갖 번뇌를 잊게 해주었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좋은 만남의 인연에 감사하며 유구한 산사의 무상함에 마음을 비우고 일주문을 나섰다. 잠시 욕심을 비운 탓인가 사찰 입구 상가에서 들리는 호객 소리에도 무심한 채 숙소로 향했다.
가야산 계곡 숲속에 자리한 통나무집에 여장을 풀고 밖으로 나오니 우거진 숲과 계곡의 물소리가 조붓한 오솔길로 우리를 이끌어주었다. 슬며시 허기가 밀려올 즈음 수제만두에 막걸리를 반주로 오붓한 저녁 식사를 했다. 기분 좋은 포만감에 세상 편한 자세로 앉아 시작된 숲속의 정담은 밤늦도록 이어졌다. 이튿날 곤한 잠자리를 나와 둘레길 산책에 나섰다. 이른 아침 고갯마루에서 부는 써늘한 바람에 정신을 차려보니 자연은 없는 듯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반나절 거리의 해미에 도착했다. 읍성에 들어가니 높은 성벽으로 포위된 성안에는 지방관이 업무를 보았던 관청과 평민들이 살았던 초가집 몇 채가 옛 모습을 재현해주고 있었다. 나머지 공간에는 죄인들을 가두고 문초하던 감옥과 그 앞에는 천주교인들을 목매달았다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처연하게 서 있었다. 성을 나가니 지근거리에 잡혀 온 교인들을 묶어 생매장했다는 둠벙 터가 있었다. 목숨까지 바쳐가며 지키고자 했던 신앙이란 과연 무엇일까. 숙연한 마음으로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천국에서 영복을 누리기를 기도하며 순교성지를 나왔다.
오후에는 인근에 있는 천수만을 찾았다.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방조제의 중간쯤에 가니 축조 당시의 특수공법에 대한 안내판이 있었다. 양쪽에서 쌓아오던 제방이 가까워지면서 좁아진 통로의 거센 물살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어 고심하던 차에, 유명기업의 총수가 폐유조선으로 급류를 막아보자는 제안을 하여 무사히 방조제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참 기발한 아이디어다. 담수호에는 먼 여행길에 잠시 휴식 중인 철새들의 군무가 여행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새들의 날갯짓에는 철 따라 서식지를 옮기며 살아야 하는 생의 고단함이 배어 있었다.
방조제 끝부분에 붙어 있는 간월암에 오르니 수백 년생 사철나무와 팽나무가 자그마한 암자를 의연하게 지키고 있었다. 해풍에 힘겨운 암자도 두 지킴이가 있어 훨씬 덜 외로워 보였다. 시나브로 해안선 멀리 내려앉는 해거름이 하루의 여정을 마감하게 해주었다.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한동안 마음 한구석에 숨어있던 무엇인가 헛헛하고 채워지지 않았던 아쉬움의 정체를 어렵사리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감염병으로 인한 강제 격리의 고통이 가져다준 심리적인 후유증 같은 것이었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던 첫해 코로나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감염자가 생기면 그 경로를 탐문하여 접촉자를 모두 격리 치료하던 실정이었다. 더구나 치명률도 높아 기저 질환자는 물론 멀쩡한 사람도 감염되면 생명이 위태로웠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 사이라 할지라도 직접 대면한다는 것은 여간 위험천만한 일이 아니었다. 만나고 싶을 때 만나고,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었던 것을 할 수 없게 된 초유의 사태가 왔다. 당연하던 것이 당연하지 않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 닥치니 그야말로 집단 멘붕 상태가 찾아온 것이다.
집단감염의 확산을 막고자 단체 활동이나 공동체의 행사를 억제한 결과 파생된 비대면 문화는 어느새 우리 삶의 곳곳에 여러 가지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학교 수업이나 물건구매도 인터넷으로 바뀌고, 많은 기업에서는 재택근무의 비중을 늘리기에 이르렀다. 그뿐 아니다. 각급 단체의 여러 행사는 물론 공연예술 일정도 줄줄이 취소되고 해외 연수나 여행도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개인의 사적 모임이나 종교활동까지 제약을 받았다.
감염병으로 인한 갑작스런 관계의 단절은 단순히 바이러스의 확산만을 막은 게 아니었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만남과 친교의 자유와 함께 어울림의 즐거움마저 앗아갔다. 물론 이동통신 수단이나 사회 관계망 서비스를 통해서도 소통이야 가능하다지만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 사이의 친화와 교감은 기대할 수 없었다.
어느덧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해제되고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도 대부분 풀렸다. 완전하진 않아도 몇 가지 예방백신이 개발되어 보급되고 최근엔 치료약까지 상용화되다보니, 어느 정도 바이러스에 대한 통제력과 자신감이 생긴 덕분일 것이다. 우리의 일상도 겉으로는 점차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다지만 사람 사이의 정서적 관계단절의 후유증은 그리 빨리 치유될 것 같지 않다. 한 번 끊어진 관계의 회복은 풀로 이어붙이 듯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심리적 고립감과 외로움의 응어리가 풀려 다시 제자리를 잡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늦었다고 여길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처럼 많은 시간이 걸린다 해도 상처를 보듬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재발되지 않도록 하는 근원적인 노력이 더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라도 바이러스라는 미물이 우리에게 온 것도 따지고 보면 무한 성장과 과잉 소비를 탐하느라 자연생태계의 영역까지 침범한 대가라는 자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다.
궁극적으로 어떠한 사회적 현상도 서로 만나고 어울리고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가로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빼앗길 수 없는 소중한 가치도 자연의 섭리를 등한시하고 눈앞의 경제적 이익과 편리함만을 추구하다 보면, 언젠가 더 큰 재앙 앞에 의미를 잃을 날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은 괜한 기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