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용설명서Ⅱ-스물다섯 번째 이야기】
혁명이 남긴 동남아시아의 그림자/ 이은화
위태로운 공존/이념전戰의 경고/위장된 평화
동아시아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품고 있는 것들이 우리가 지고 있는 역사의 무게로 다가온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붙든 체제(입헌 군주제)와 이념(공산주의)이 여전히 그들을 묶고 있고 거기에서 나오기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타이가 꿈꾸던 1980년대 동아시아의 주역이던 네 마리의 용(대한민국, 홍콩, 대만과 싱가포르)의 역할 축소는 동아시아 역사학의 위기다. 과거 어느 시대보다 다각적인 면에서 우리와 다른 그림을 그리는 두 나라(중국과 일본)의 역사학의 방향을 보면서 동아시아 역사학의 위기를 읽는다. 우리의 역사와 함께 아우르면서 대한민국이 풀고 써야 할 동아시아의 역사학이다. 대한민국은 근대로 들어서면서 역사에 스스로 등한시한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책임 소재를 따지며 갑론을박할 만큼 느긋할 여유는 없어 보인다. -필자 주 |
프롤로그-투쟁과 혁명사를 품은 동남아시아의 역사 속으로
만석인 비행기로 6시간을 날아 도착한 화려한 조명의 방콕(수완나품)공항은 인천공항 다섯 배에 이르는 규모로 우리를 압도했다. 두 달 전 다녀간 치앙마이 공항의 깔끔한 기억이 무색하게, 현대식 건물이 도열한 수완나품 공항의 야경은 화려했다. 이곳 수도공항을 두 배 이상으로 확장하며 동남아시아 지역 항공 허브로 도약하기 위해 인천 국제공항이 모델로 대대적인 투자에 나선다는 새로운 뉴스가 들려온다. 방콕의 새벽은 도로를 채운 조명과 무더운 더위로 뜨거웠다.
숙소인 호텔로 가기 위한 여정은 복잡한 도로를 헤치면서 시작됐다. 타이도 피해 가지 못한 기상이변으로 현지인들도 고개를 젓는 5월의 더위는 사우나를 방불케 했다. 시원한 차 안 공기에 숨통이 트였는데 도착한 호텔의 규모에 다시 압도당했다. 로비에 늘어선 여행 가방들은 공항이 붐비는 이유를 말하고 있었다. 엔데믹으로 만회한 관광특수는 이미 팬데믹으로 인한 관광불황의 80%를 회복했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들었던 ‘고맙다’는 인사를 타이에서도 들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은 다른 나라의 경제 회복을 돕고 있는 셈이다.
두 달 만에 방문한 타이가 부쩍 가깝게 다가왔다. 사원으로 시작해서 사원으로 끝난 치앙마이 경험으로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역시 타이는 도심도 사원의 나라다웠다.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나라에서 자신의 종교심으로 짓는 사원을 허락하고 사원의 상품화도 어렵지 않은 이곳에서는 가는 곳마다 개인이 짓는 사원이 건설 중이었다. 특색이 있는 사원들은 관광지로서 많은 손님을 맞아 특수를 누리고, 그것이 개인의 치적으로 기록되는 나라였다. 궁금한 곳은 파타야보다 방콕이다.
하늘로 솟은 사원의 많은 탑처럼 가는 곳마다 볼 수 있는 초상화는 현 국왕인 라마 10세 부처 초상화였다. 사원만큼 많은 초상화가 세워진 나라에서 첫 주의 사항은 초상화를 향한 어떤 모욕적인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존의 왕이 존재하는 나라임을 확인했다. 수도 방콕으로 입성하는 도로는 꽉 막힌 도시 분위기 그대로였다.
왕의 도시, 방콕의 살인적인 더위는 차 안과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해소되었지만 그들이 전하는 정책적인 사항들이 잠시 스쳐가는 관광객이 듣기에도 불공정과 불평등하여 탄식을 불러왔다. 합리적이지도 일관성도 없는 법은 억지스러워 보였다. 왕이 법을 제청하고 지시하면 법을 바꿀 수 있는, 왕정이 살아있는 타이는 공산국가인 베트남의 정치적인 면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입헌군주제 국가였다.
타이는 절대군주제 국가였으나 1932년 민주개혁 쿠데타로 입헌군주제 체제로 돌아서게 된다. 국왕은 명목상의 군주로서 통치는 할 수 없지만 국가 통합의 구심점으로, 타이 왕실은 타이 각지의 복지와 환경 사업에 참여로 국민들의 신뢰를 얻는다고 한다. 왕이 가진 실권은 상징적이라기보다 실제적인 국민의 절대적 지지가 우선하는 분위기는 느껴졌다.
그들의 혁명 기간은 길었고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정권이 흔들리면서 다른 나라와 전쟁을 겪고 열강의 지배를 받았던 시기가 겹치는 비슷한 나라가 인접해 있었다. 그러나 혁명의 승패가 가른 국가의 운명은 달랐다. 동남아시아의 운명을 대변하듯 인접 국가 세 나라는 다른 모습이지만 그들이 가진 것보다 많은 것을 놓친 듯한 분위기는 같았다.
역동적인 베트남의 모습에서 긍정적인 미래를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분위기 탓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캄보디아에서 읽은 미래는 앙코르 와트의 색처럼 어두운 전망을 평화로 숨긴 듯한 분위기였다. 타이의 젖줄 짜오프라야강을 품은 타이는 낮과 밤이 다른 강처럼 가늠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이 겪은 혁명과 전쟁이 근대사와 접점을 공유하고 대한민국과도 얽혀 있는, 양가감정이 존재하는 나라들이 얽힌 역사적 줄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같은 시기에 같은 전쟁에 휘말리고 같은 나라에 지배를 동시에 받았던 나라들이고 비슷한 시기에 혁명과도 같은 변혁의 바람이 불었던 세 나라는 외연은 바뀌었지만 달라지지 않는 정치는 답보 중이거나 나아가지 못했다. 붉은색과 노란색이 주는 압박이 크게 다가온 이들 국가가 아시아에 끼칠 그림자가 짙을수록 동아시아의 기상도는 요동칠 것이다. 이들의 행보는 동아시아의 불안한 미래를 담지하고 있다.
짜오프라야강을 따라서–왕과 군부의 ‘위태로운 공존’의 나라로
타이는 19세기 중반까지도 프랑스와 영국을 합친 것보다 넓었지만,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오늘날의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속하는 영토를 프랑스에 할양하면서 지금 타이가 되었다. 시암(타이)의 시작은 아유타야 왕조였다. 버마(미얀마)군이 아유타야를 함락하기 전, 아유타야를 탈출한 딱신(1743~1782)은 시암(태국) 동남부의 짠따부리를 근거지로 반년 만에 아유타야를 탈환한다. 아유타야는 황폐해져 수도를 현 방콕 서부인 톤부리로 옮긴다. 방어와 해상으로 진출이 편한 톤부리를 수도(1768년)로 정하고 아유타야를 할거한 세력들을 통합하면서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아유타야 왕조를 이은 톤부리 왕조의 건국자인 딱신은 톤부리 왕조의 유일한 국왕이다. 1767년 아유타야의 몰락 이후 점령한 버마(미얀마)에 맞서 시암을 해방시키고 시암을 통일시킨 지도자로 존경을 받는다. 톤부리에 새로운 도읍을 정하고 북부의 미얀마의 침공을 물리치고, 라오스의 왕조였던 란나 왕국(치앙마이,1776)과 캄보디아(1769)도 병합한 그는 명실상부한 시암의 대왕이다.
딱신의 사망 이후 선왕의 전쟁을 이어간 짜끄리 왕조의 창시자 라마 1세는 타이의 수도 아유타야 함락(1767) 뒤 딱신의 부대에 들어가 북쪽 지방(차오 프라야짜끄리)의 장관을 겸한 장군으로 10년간 타이군을 이끌며 미얀마군을 내쫓고 국경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1782년초 수도에서 반란이 일자 되돌아와 4월 왕이 된 짜그리 왕조의 왕 라마 1세는 1782년에 수도를 톤부리 건너편인 방콕으로 옮긴다. 이때 아유타야의 폐허에서 자재를 운반하여 건설해 방콕이 아유타야를 대신하는 시암(타이)의 수도임을 명확히 했다. 처음으로 타이법을 성문화했으며(1805), 행정체계 강화와 인도차이나반도 중심부에서 타이의 군사적 패권을 확립했다.
라마 1세의 시기, 시암의 영토는 더욱 확장되어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속국이 되었고 치앙마이가 중심인 란나도 복속되어 영토 회복을 이룬다. 라마 1세 때의 영역은 최대의 영토 확장으로 동남아시아 패자로서의 위치를 재구축할 수 있었다. 라마 1세는 당시 멸망한 베트남 안남국의 후계자 응우옌푹아인의 요청으로 사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지만 베트남 떠이썬 왕조의 응우옌반후에에게 대패해 함께 철수하는 패착을 경험한다.
시암의 영토는 라마 3세 때 최대를 이루고 라마 4세는 프랑스와 영국의 공세에 대나무 외교를 펼쳤어도 치외법권과 관세 인하를 인정하며 압력에 굴복하여 열강과 대치하게 된다. 하지만 1896년에 양국의 조약을 이끌어 내며 전쟁은 피하면서 독립은 유지한 외교적 수완은 라마 4세의 능력이었다.
타이와 시암 역사를 통틀어 뛰어난 명군으로 평가받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은 현 국왕인 라마 10세 증조부이다. 재임 동안 현대화와 개혁정책을 펼쳐 1905년에 인권의 사각지대인 노예제를 폐지하고, 교통망과 법체계를 선진화하며 근대화를 추진해 개혁적 성과가 눈부신 대왕으로 불렸다. 서구식 교육을 이수한 최초의 타이 국왕으로 1868년, 15세였던 즉위하여 5년의 섭정을 맡겼지만 성인이 된 1873년부터 직접 통치를 하였다. 귀족의 저항에도 개혁을 추진, 결국 저항은 줄게 된다.
국가 제도와 문화에 이르는 개혁을 통해 왕자들에게 정부의 요직을 맡기는 동시에 유럽파견으로 선진 제도와 문화를 도입했다. 유럽에 대한 동경으로 지식인과 왕족의 유학이 적극적으로 이뤄진 5세의 개혁은 쌀 수출국의 지위도 확보했다. 청나라 상인들이 진출하며 타이 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전원적 분위기의 치앙마이와 방콕의 경제적 격차를 만든 이유는 선택과 집중의 예측 못 한 정치 결과였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지 못한 시대가 이어졌다.
시암혁명(1932)- 군부와 함께 한 입헌군주제 승인
1910년에 라마 5세가 죽은 뒤 장남 와짜라웃이 라마 6세로 등극했지만, 당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관심이 없고 낭비만 일삼아 나라에 재정적자를 안겼다. 1925년에 후사 없이 죽자 동생 프라차티뽁이 라마 7세로 등극했다. 라마 7세도 영국 이튼스쿨 출신에 프랑스 군사교육까지 받은 엘리트였으나 국정 수행능력은 미흡했다.
1920~30년대는 대공황으로 타이 경제가 흔들리고 민족주의의 폭풍이 일었다. 1932년, 군부가 일으킨 ‘시암 혁명’을 계기로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선회했고 국명도 ‘시암’에서 ‘타이’로 바뀌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왕족이 아닌 ‘쁠랙 피분송크람*’ 이라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시암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쿠데타를 주도하고 시암 최초의 헌법을 공포했다. 라마 7세는 군대의 통제권마저 잃었고, 이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면서 틀어진 정부와 왕실은 마지못해 입헌군주국 헌법을 승인했다. 1934년에 영국으로 떠난 국왕은 1935년에 스스로 퇴위하여 1941년에 사망했다. 왕정의 불안한 미래는 예견된 재난으로 이어졌다.
타이 정부는 스위스에서 유학 중인 어린 아난다를 라마 8세로 추대했지만, 송크람은 여전히 국가를 독재로 통치했으며 그들을 견제할 세력은 없어 1938년 그가 총리가 된다. 송크람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내세웠지만 민주주의에 부정적이었고, 독일 제3제국과 일본 제국을 모티브로 하여 전체주의적 민족주의 국가를 위한 완전한 독재를 원했다. 나치독일에 심취한 송크람은 1941년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지만 그해 12월, 일본이 영국령 미얀마를 침략한 길을 열라는 요청에는 저항한다. 그러나 일본과의 전쟁(1942) 몇 시간 후, 휴전을 요청하고 일제의 강압에 동맹을 맺게 되면서 연합군에 선전포고까지 하면서 오히려 그의 독재는 공고해졌다.
그러나 1944년 8월이 되자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고, ‘자유 타이’ 운동 같은 ‘반일’, ‘반송크람’ 조직이 출현했다. 태국이 폭격까지 받자 송크람의 정부가 와해되며 송크람의 사임과 함께 새로운 총리가 임명되고 1945년 9월 2일 평화 선언을 발표했다. 타이의 새 정부는 반일정서로 연합국으로부터 전쟁 책임을 피하고 국토 회복 계획 중에 확장했던 국토도 모두 반환하며 정치적 모색으로 나라를 지킨다.
새 정부가 군주제를 부활시키면서 라마 8세가 고국에 돌아왔으나 1946년에 의문의 총기 사고로 사망하며 동생 푸미폰 아둔야뎃이 라마 9세로 왕위를 계승했다. 푸미폰 대왕으로 불리는 라마 9세의 등장 시기에도 사회 혼란이 지속되어 1947년 11월에 송크람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이듬해 다시 총리가 됐다.
1948년 4월 수상에 취임해 냉전의 기류 속에서 미국 및 국제연합과 유대를 강화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유엔의 이름으로 한국에 파병한 나라가 타이였다. 그렇게 해서 6.25 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원조를 받아 경제호황을 맞고 공산화 저지선으로 변모시켜 다시 지지를 얻지만 달콤한 미국의 원조는 부정부패를 키웠다. 미국은 내각에 민주주의 정부를 요구했지만 송크람은 부정선거로 무시했고 일부 군인들도 쿠데타를 감행하지만 실패했다. 결국 쿠데타로 일어선 군부가 무너지는 데는 다른 군부가 개입으로 시작했다.
1957년 9월에 사릿 타나랏이 쿠데타를 성공시켜 송크람 정권을 무너뜨렸고, 송크람과 그의 부하들은 일본 등 국외로 빠져나갔다. 1963년에 사릿 타나랏 총리가 사망하자 동료였던 타놈 장군이 총리가 되었는데, 당시 베트남 전쟁을 겪으며 동남아에 공산화의 물결이 밀려오자 미국은 타놈에게 다시 민주화를 요구했다. 1968년에 헌법을 고치고 의회도 새로 조각했지만 1971년에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강력한 반공 독재로 돌아섰다. 타이의 반공은 멀고 먼 민주의 길이 되었다.
이러한 위기 때마다 라마 9세는 중재자와 국민 보호에 앞선 왕으로 불린다. 일촉즉발의 정치적 위기의 순간마다 중재자 역할을 맡아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해 타이 국민들로부터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타이 근현대 역사는 라마 9세의 영향력이 짙고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명군이기 때문에, 타이에서 왕실에 대한 험담은 절대 금기로 여기게 된다. 2016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10월 13일에 세상을 떠나고 외아들 마하 와치랄롱꼰 왕세자(라마 10세)가 승계하여 국왕으로 즉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라마 9세는 무궁화대훈장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이다. 1981년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전두환 씨가 타이 방문 당시 수훈한 것이라고 한다. 라마 9세는 죽어서도 현재 타이의 진행 중인 역사다.
1973년 민주화 운동-푸미폰(라마9세)의 통치와 잠롱(1935~)의 등장
1968년부터 시작된 대학가 민주화 시위는 1971년 비상사태 선포 후 1973년에 크게 격화된다. 이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총격이 발생해 수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했다. 이로 인해 군부 내부에선 타놈 총리 지지를 철회했고, 푸미폰 국왕이 상황을 만든 현 정부를 비판하며 사임을 권유하자 그는 해외로 도망갔다. 새 민주 정부 총리에 탐마삿 대학의 법학 교수가 임명되어 새 출발의 길이 열리는 듯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다. 1973년에 민간정부가 수립됐으나 어느 정당도 과반수가 안 돼 정치 불안이 이어지고, 1975년 인도차이나 공산화로 불안은 심화됐지만 정부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1976년 쿠데타가 일어나 재집권한 군부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공산주의로 낙인을 찍어 탐마삿 대학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체포해 고문하고 죽이는 탐마삿 학살이 일어난다. 지성인의 목소리를 진압하는 대책은 늘 강경한 대응과 학살이었다.
체포를 면한 학생들은 도주해 공산군과 합류해 군부와 내전 단계까지 악화되는 듯했으나, 1983년이 되면서 공산주의 견제는 불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군부가 물러간 후 민간정부가 들어섰다. 1980년대 타이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대한민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을 이르는 말)처럼 급속한 산업화를 경험한다. 일본 제조업체들이 노동력이 저렴한 태국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태국의 수출은 급속히 증가해 1985년과 96년 사이 태국 경제는 연평균 9% 성장률을 보였다. 경제 성장으로 방콕에서 늘어난 중산층이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지만, 북동부 지방의 농촌과의 격차는 커져 정치 불안의 불씨가 된다. 피할 수 없는 빈부 격차는 사회를 양분하기 때문이다.
다시 1991년에 장군들의 쿠데타가 일어나는데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반공성향 때문에 타이인들이 실망하고, 1992년 총선에서 장군 수친다가 승리하자 분노한 국민들은 전 방콕 시장 잠롱 스리무앙(태국의 전 방콕 시장으로 세계 청백리의 대명사로 불림)의 지휘하에 반군부 민주화 투쟁을 일으켰다. 이에 수친다 내각은 군경에 발포 명령에 50여 명이 학살되고 이 참상이 외신으로 보도되면서 군부는 궁지에 몰렸다. 이때 라마 9세가 개입하며 민주화 진영의 손을 들어 다시 민주 정부가 수립됐으나, 2006년과 2014년에 또 다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며 타이는 여전히 쿠데타와 민주화 요구 시위의 반복 중이다. 왕과 군부세력의 공생이 가져 온 굴레다.
내각은 민주주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정관유착과 부패로 국민들에게 엄청난 실망감만 안겨주었다. 이념이나 정책 차이도 없는 정당들이 난립하면서 연정은 어려워지고 내각은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교체만 되었다. 국민들의 불만은 2001년 총선에서 통신 재벌 탁신(1949~)의 압승으로 이어져 탁신의 신생 정당은 과반수를 획득한다. 탁신은 기존의 정치인들을 포함한 엘리트들에게 무시당하던 농민과 도시 빈민들을 겨냥한 포퓰리즘 정책으로 인기를 끌지만 부패와 족벌주의로 이권을 독점하면서 엘리트와 중산층들의 미움을 동시에 받는다. 2006년 탁신은 해외로 망명하지만 선거에서는 탁신당이 이기자 친탁신과 반탁신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그렇게 탁신은 잠롱의 퇴진 요구를 받을 정도로 부패한 정치인으로 드러났다.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국가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면 그 반대세력의 정치인들은 대대적인 숙청을 당하지만 타이에서는 정적들에 대한 숙청이 별로 없었다. 국왕과 왕실세력의 비호 아래 정적들에 대한 안전한 퇴임을 쿠데타 세력에게 요구하면 쿠데타 세력 역시 국왕과의 정치적 관계를 위해 정적들을 망명 보내는 선에서 수긍하는 편이었다. 왕을 비호하는 세력이 군인이었고 군인의 정치적 동맹은 왕인 셈이다.
정치적인 노력을 쏟았던 대왕 라마 9세가 2016년 10월 13일에 승하하면서 타이 정계도 풍파의 조짐에 휩싸이고 있다. 정식 왕위계승자로 선정된 와치랄롱꼰 왕세자가 사생활이 문란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데다 논란이 많은 탁신 총리와도 친분이 있어 라마 9세의 아들이라는 것을 빼면 국민들의 인정을 못 받는다. 국민들은 라마 9세의 심성을 닮은 둘째 공주 짜그리 시린톤을 지지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그들의 불안한 동거가 언제 급변할지 모르는 태국의 정세만큼 방콕 거리로 몰려든 차량들이 무질서했지만 여행 내내 경적 소리는 듣지 못했다.
쁠랙 피분송크람* -태국의 전 총리대신이자 군사 독재자. 1938년 12월 16일~1944년 8월 1일(3대), 1948년 4월 8일~1957년 9월 16일(11대) 2번 총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