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사랑은 삼천억 세계를 넘어서
음성이 곽범을 달랬다.
"석기야. 우리 사랑은 이렇게 삼천억 개의 은하에서 나누어져 이루어지고 있는 거야. 시작이 없었으니 끝도 없어. 영원히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거야.”
"난 석기가 아니에요. 곽범이에요. 내 아내 양설만 있으면 돼요.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요.”
“그렇게 못 견디겠니?”
음성에서 한숨이 느껴졌다.
"나는 늘 네 곁에 있어. 우리가 세계의 조각에서 조각으로 흩어지더라도 우리는 항상 만나. 이건 우리가 정하고 내가 묶은 우리 운명이야. 어떤 신도, 무적자도, 우주의 질서도 이 운명을 바꾸지는 못해.”
"나는 양설만 있으면 돼요.”
곽범은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양설은 너를 떠나지 않아. 늘 곽범과 함께 있어. 우리가 정한 운명이니까. 하지만 석기야. 우리는 모두 부분이야. 부분이기에 전부인 것이고. 지금 우리는 우리 전부로 적들 전부에 맞서야 해. 신들도, 악마들도.”
음성은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설득하려 들었다.
하지만 곽범은 요지부동이었다.
"내 아내 양설은 어디 있어요?”
“석기야. 우리가 처음 태어난 세상에서 지금 세상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니?”
음성은 끈기를 잃지 않고 곽범을 달랬다.
"영겁 같은 긴 세월들이 우리를 잇는 줄이었어. 이제 지금 세상에서 네가 종결자가 되어 이 끔찍한 신들과의 전쟁을 끝내야해. 그럼 우리는 항상 같이 있을 거야. 삼천억 은하에서 만들어지는 우리의 사랑으로.”
듣고 있던 곽범이 울부짖었다.
"나는 곽범이에요. 나한테 이상한 말 하지 말아요. 당신이 내 아내를 데려갔지요? 돌려줘요.”
음성이 다시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양설은 너와 같이 있어. 좀 쉬고 있을 뿐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곽범의 마음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역시 양설은 죽은 게 아니었다.
"설은 왜 그런 거예요?”
곽범의 물음에 음성이 조금 있다가 대답했다.
"너무 행복해서. 네가 너무 행복하게 해주니까. 너 때문에 너무 행복하니까. 양설의 몸은 그런 행복을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하지 못하거든.”
"말이 안 돼요. 그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설은 몸도 점점 좋아지고 있었는데.”
"나 때문이야. 내가 많이 아팠거든. 그래서 양설은 안 아프게 하려고 애썼지만 지금 정도가 한계였어.”
"당신은 전능하잖아요. 왜 더 건강하게 못해줘요?”
곽범이 항의했다.
곽범이 느끼기에 음성의 주인은 전능하다.
“미안해. 너를 힘들게 해서.”
음성이 부드럽게 곽범을 달랬다.
"내 힘의 대부분이 우리를 무한히 만나게 하는데 쓰였거든. 그래서 양설이 아픈 거야. 너무 행복하지만 않았어도 지금처럼은 안 되었을 거야. 혼자 외롭게 있다가 너를 만나고 친구들도 생겼어. 양설의 약한 몸이 어떻게 그 행복을 견뎌내겠니?”
곽범은 어린 아이처럼 보챘다.
"난 언제 설을 볼 수 있어요?”
"곧.”
음성이 대답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으니까 내가 양설을 불렀어. 방법을 알려줬으니까 이제 양설이 직접 할 수 있어. 네가 도와야하지만.”
곽범은 달빛 아래에서 춤추던 양설이 신 내린 무녀처럼 무아지경에 빠져들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이상한 음성이 양설을 불러 갔던 것이다.
곽범은 양설이 살 수 있다는 말에 마음에 맺혀있던 모든 게 풀어졌다.
음성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내가 당신을 아프게 했나요?”
"훗. 그건 알고 있네.”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말이 들려왔다.
"석기야. 네가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데 내가 안 아플 수가 있겠니? 종결자의 지독한 사랑에 나는 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았단다. 우리 사랑이 너는 나를 무적자로 만들고 나는 너를 종결자로 만들고 있단다. 내 사랑, 내 색마.”
"당신 색마 아니에요. 난... 내 아내의 색마에요.”
곽범은 혼란 속에서도 부인했다.
소리가 들렸다.
"난 네가 누구의 색마여도 상관없단다. 거품 방울 같은 세상에 무엇이 비친들 어떻겠니? 네가 조금이라도 즐거울 수 있으면 마음대로 즐기려무나. 세상의 모든 미녀 다 취해도 네가 좋다면 나는 기쁘단다. 내 사랑 석기야.”
곽범이 화가 나서 외쳤다.
"나를 유혹하려 들지 말아요. 다정하게 부르지도 말아요. 난 곽범이에요.”
"유혹하는 게 아니야. 어느 세상에서 내가 너에게 부르던 말, 하던 말이었던 걸. 보고 싶어 하다가 보니까 나도 참지 못하고 나온 말이야.”
소리는 조금도 화를 내거나 서운해 하지 않았다.
"너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거든. 내 사랑 석기가 나를 보러 이렇게 세계를 거슬러 올 줄은 몰랐었어. 하지만 내 사랑 석기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곽범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에 소리가 멀어졌다.
"다시 만날 때는 너도 많이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나한테 노래불러달라고 하면 안 돼. 이 세상에서 나는 아직 어리거든.”
소리가 멀어지면서 아지랑이가 줄어들었다.
곽범은 갑자기 물이 빠진 연못에 떨어지는 것처럼 추락했다.
하지만 어떤 힘이 부드럽게 곽범을 받아주었다.
귓가에 희미한 음성이 미풍처럼 지나갔다.
"내 사랑 석기. 나의 모든 것(all things).”
곽범은 두 번이나 반복되는 음성의 달콤함과 애절함에 섬뜩했다.
***
눈을 뜨니 침실이었다.
수원 자매가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은 채 축원하고 있었다.
"천지신명께 비옵니다. 칠성님께 비옵니다. 우리 나으리 다시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부처님께 빕니다. 우리 낭낭 극락왕생하게 해주십시오.”
뒷말은 수원이 한 말이었다.
곽범은 벌컥 화가 났다.
"설은 극락 안가!”
버럭 호통 쳤다.
"엄마야!”
동진과 희야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수원은 달아날 듯이 몸을 돌리다가 소리쳤다.
"나으리!”
수운은 기뻐서 자기도 모르게 붙잡으러 달려든다.
곽범은 수원을 밀쳐 버리며 양설의 뺨에 왼손 손등을 대었다.
오른손 새끼손가락으로는 목의 맥을 읽었다.
미약하면서도 규칙적인 맥동이 느껴졌다.
꿈이었지만 꿈이 아니다.
곽범은 이상한 소리와 만났던 것이 꿈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가슴에서 뜨거운 감정이 울컥 치솟아 오르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양설에게 속삭였다.
"설, 이제 일어나요.”
순간 양설의 가슴이 꿈틀하며 맥이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코로 따뜻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양설이 힘없이 눈을 뜨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 깼어요?”
곽범은 대답대신 입을 맞췄다.
희야가 울음을 터뜨렸고 동진과 수원도 따라 울었다.
곽범은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입맞춤을 계속했다.
양설이 곽범의 등을 안고 어루만져주었다.
이윽고 곽범이 말했다.
"더 자요.”
양설이 고개를 저었다.
곽범의 희게 변한 머리카락을 만지며 말했다.
"힘들었지요?”
곽범은 도리질하며 말했다.
"하나도.”
"제 몸이 깨끗하지 못해요. 당신 조금 나가 있다 와주실래요? 여자들 일이에요.”
양설의 말에 곽범은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양설은 수원 등에게 말했다.
"나 좀 씻겨줘. 옷도 챙겨주고. 배가 아파.”
"먼저 좀 드세요. 금방 가져올 게요.”
동진이 양설을 부축했다.
양설이 웃었다.
"안 돼. 지금 몸이 정하지 않아. 달거리 아픔이야. 씻는 게 먼저야.”
수원은 목욕물을 데우기 위해 욕간으로 달려갔다.
동진은 죽을 데우려 부엌으로 달려갔다.
희야는 양설을 안고 훌쩍훌쩍 울었다.
욕간에서는 곽범이 내공을 일으켜 물을 데우며 몸을 떨고 있었다.
오랫동안 먹지 못하여 곽범 역시 기력이 쇠할 대로 쇠한 상태였다.
수원은 물 데우는 아궁이에 불을 붙였다.
곽범을 대신하여 양강의 기운을 손으로 끌어내 물을 데웠다.
수원과 희야가 양설을 씻기는 동안 곽범은 욕간 밖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수원과 희야가 나오더니 말했다.
"들어오시래요.”
곽범이 들어가자 새로 물을 간 목간통의 증기 속에서 양설이 말했다.
"들어오세요. 당신도 씻어야지요.”
곽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옷을 벗고 들어갔다.
양설이 힘없는 손으로 곽범의 몸을 씻겨주었다.
욕간은 커지지 않았고 주지육림도 없었다.
하지만 전날 곽범이 원했던 것처럼, 양설과 곽범은 목간통에서 동진이 가져다 준 죽과 과자를 먹었다.
***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이심전심은 공감이다.
생각에 이르는 길이나 생각이 쌓인 사고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감정의 상승과 하강이 이어지는 것이다.
슬프면 같이 울고 웃으면 따라 웃는 것이 이심전심이고, 인지상정이다.
인지상정으로 사람과 사람은 하나가 되어 사회를 이루고 하나 된 세상을 만들었다.
사람 같이 산다는 것,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이런 의미로 볼 때 개인을 넘어서는 위대한 지향이다.
나로서 산다는 것은 종종 사람답게 산다는 것과 일치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사람다움을 확장하여 세상을 키운다.
하나의 존재가 또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것도 <나로 산다>는 것이 <나>라는 존재의 중첩을 이루는 과정이다.
곽범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왜 알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알고 있는 사실을 설명해낼 방법이 없었다.
고작 말할 수 있는 게 구름이 올라가 비가 된다는 것과 같은, 가까움이 느껴지지 않는 비유 정도다.
첫댓글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왠지 메텔과 철이의 모습이 투영되네요
ㅈㄷ
시공을 넘나드는 사랑이 존재하는건가요?
감사합니다 ^^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겁게 열독하고 갑니다.
즐독 햇습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