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을 초월한 시대의 목소리 / 정상원
에리히 캐스트너의 삶과 시
이 책은 에리히 캐스트너(1899~1974)가 1936년에 발표한 <에리히 캐스트너 박사가 시로 쓴 가정상비약>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에리히 캐스트너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후반기인 1928년 첫 시집 <허리 위의 심장>을 발표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929년 <거울 속의 소란>, 1930년 <한 남자가 털어놓는다>, 1932년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노래>를 계속 발표했다. 이 시집들은 “캐스트너가 등장한 이후 사람들이 다시 시를 읽기 시작했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에리히 캐스트너 박사가 시로 쓴 가정상비약>은 이미 출간된 시집에서 대표 시들을 뽑고 새롭게 쓴 시들을 추가해 펴낸 시집이다. 에리히 캐스트너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이후 독일에서 출판 활동이 금지되어 스위스에서 이 시집을 출간했다. 이 시집은 바르샤바 게토에서 유대인들이 손으로 직접 써서 돌려가며 읽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유대인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준 당시의 필사본 중 하나가 지금도 폴란드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오늘날까지도 독일에서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읽히며 독일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 저작권 계약 없이 처음 출간되어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이후 정식 계약 판으로 2004년에 다시 출간된 적이 있다. 이 초기 번역판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박흥규 교수가 쓴 <에리히 캐스트너 평전 –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필맥 2004)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책은 이전 번역판의 오류를 바로잡고 누락 된 시와 구절을 새로 옮겨 원본에 충실한 번역을 하고자 노력한 결과물이다.
에리히 캐스트너는 독일 드레스덴에서 피혁 수공업자로 일했던 아버지와 부업으로 생계를 도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미장원을 개업해 아들의 학비를 도왔고 아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우편으로 옷을 받아 세탁해 다시 보낼 정도로 아들 사랑이 각별했다. 이런 내막은 이 책에 실린 여러 편의 시에도 나타난다. 에리히 캐스트너는 교사가 되고자 사범학교에 진학했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었다. 그는 사범학교의 억압적인 교육 방식으로 인해 교사의 꿈을 접게 되고 교육 제도 전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때의 교육 방식에 대해 에리히 캐스트너는 “국가는 최고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교육 정책을 펼쳤다. 연금을 보장해 주는 대가로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소시민적 공무원을 양성했고(----) 우리 교육은 사관학교에서처럼 진행되어 학교가 병영과도 같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무단결석한 적도 있었고 “모범생”이었던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은 에리히 캐스트너에게 군국주의에 대한 환멸을 심어주었고, 혹독한 군사훈련은 평생 정기적인 치료를 요하는 심장병을 남겼다. 특히 폭군처럼 지휘했던 상관 바우리히 중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시로 비판하고 있다.
바우리히 중사
12년 전
그는 우리의 중사였다.
그에게서 우리는 “받들어 총!”을 배웠다.
한 병사가 넘어지면 그는 비웃으며
모래 위에 쓰러진 병사에게 침을 뱉었다.
“무릎 꿇어!”가 그가 가장 좋아한 말이었다.
이백 번도 더 외쳤다.
그럴 때면 우리는 황망한 연병장에서 서 있다가
골리앗처럼 무릎을 꿇고
증오를 배웠다.
기어가는 병사를 보면
상의를 낚아채고는
“이 얼어 죽을 놈!”이라고 으르렁거렸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우리는 청춘을 값싸게 팔아 넘겼다 ---
그는 재미 삼아 나를 모래밭 속에 뒹굴게 했고
뒤에서 지켜보며 물었다:
“내 권총을 빼앗아서
당장 나를 쏘아 죽이고 싶겠지?”
나는 “예!”라고 말했다.
그를 아는 사람은 결코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를 마음에 새기고 있다!
그는 짐승이었다. 침을 뱉고 소리를 질러댔다.
바우리히 중사는 짐승으로 불렸다.
우리 모두는 왜 그런지 안다.
그는 내 심장을 망가뜨렸다.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심장이 쑤시듯이 아프고 두근두근 뛴다.
잠들기 전 무서운 생각이 들 때면
그가 떠오른다.
이상이 <바우리히 중사>라는 시의 전문이다. 굳이 이 시를 소개한 이유는 이전 번역판의 오류 때문이다. 이전 번역판에서는 마지막 연에서 원문에는 없는 다음과 같은 행을 덧붙였다. "참호 속으로 날아 들어온 수류탄을/몸으로 덮어 우리를 살리고/그는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에리히 캐스트너에게는 악몽이었던 바우리히 중사를 영웅으로 둔갑시켜 놓은 것이다. 아직도 소셜미디어에서는 이 마지막 구절을 언급하며 엉터리 “감동”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이제 이런 부끄러운 일이 더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에리히 캐스트너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라이프리치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 과정 중에 신문사 기자가 되었고 여러 일간지와 잡지에 시를 발표했다. 그리고 1927년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인 저술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베를린은 용광로와 같은 도시였다. 어려웠던 독일 경제가 다소 안정되면서 베를린은 “황금의 20년대”를 맞아 유럽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연극 극장과 영화관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라디오가 대량 보급되었으며 신문과 잡지 등 정기간행물의 출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남으로써 대중문화가 활짝 꽃피던 시기였다. 하지만 1929년 미국 대공황의 여파로 독일 경제는 또다시 위기를 겪는다. 실업자가 400만 명이 넘어서고 극우파인 히틀러의 나치당과 극좌파인 공산당 사이에 무력 충돌이 빈번하게 벌어질 정도로 극심한 혼란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 시기에 에리히 캐스트너는 풍자소설 <파비안-어느 모럴리스트의 이야기>(1931)와 아동소설 <에밀과 탐정들>(1929), <핑크트헨과 안톤>(1931), <하늘을 나는 교실>(1933), 등을 발표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우뚝 서게 된다. 에리히 캐스트너가 이렇게 아동 문학에 집중했던 이유는 투쟁 구호만 난무하고 미래를 위한 대안을 찾기 어려웠던 당시 상황에서 “어린 시절의 소중한 가치들을 질식시키지 않는다면 인류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틀라우스 코르돈. <망가진 시대>131) 이런 염원에 화답하듯 현재 독일 전역에서 115개 이상의 학교가 에리히 캐스트너의 이름을 학교명으로 내걸고 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에리히 캐스트너는 집필 금지를 당하는 것은 물론 그해 5월 10일, 나치에 의해 자신의 책이 불타는 것을 직접 지켜보게 된다. 이렇듯 자유와 평화를 노래하며 사회의 불의를 비판했던 에리히 캐스트너의 진면목에 대해서는 친구였던 작가 헤르만 캐스텐이 다음과 같은 말로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둘 다 급진적이긴 했으나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다. 우리는 어떤 정치적인 당파에서 가입하지 않았지만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 정의와 자유의 편에 서서 모든 사회적인 억압, 군국주의, 쇼비니즘, 비인간성에 맞서 싸웠다.”(클라우스 코르돈, <망가진 시대> 102)
신즉물주의
에리히 캐스트너는 흔히 신즉물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꼽힌다. 신즉물주의는 1929년대 후반 독일에서 일어난 예술 운동으로 감정 표현을 억제하고 냉정한 관찰과 사실적이고 정확한 묘사를 강조하였다. 에리히 캐스트너의 시에서도 친숙한 일상어 구사나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대상을 건조하고 냉정하게 묘사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는 결국 문학이란 동시대의 아픔을 담을 수 있어야 하며, 가장 쉬운 말로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소신으로 이어졌다. 이런 경향이 잘 나타나는 시가 바로 이 시집에 수록된 <냉정한 로맨스>이다. 이 시는 독일의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국민 시’로 애송되고 있다.
사귄 지 8년이 되었을 때
(하여 서로를 정말 잘 아는 사이라고 말해도 되리라.)
그들은 갑자기 사랑을 잃어버렸다.
곁에 있던 지팡이나 모자를 잃어버린 것처럼.
그들은 슬펐지만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키스를 하고
서로를 쳐다볼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자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그저 옆에 서 있을 뿐.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배에 손짓하는 사람이 있었다.
벌써 4시 15분
커피 마시러 갈 시간이 되었다고 남자는 말했다.
옆방에서는 누군가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근처 자그마한 카페로 들어가
찻잔을 저었다.
저녁이 되어도 그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텅 빈 카페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두지 알 수 없었다.
이 시는 에리히 캐스트너가 직접 경험했던 사람과 이별의 슬픔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절제된 감정 표현이 오히려 더 절실한 울림을 준다. 거의 100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바로 감정이입이 가능하다. 이 시의 모델이 된 연인 율리우스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고 한다. 에리히 캐스트너의 시 중에서 역설paradox을 담은 아포리즘은 매우 평이한 비유와 상징으로 반어적 위트를 이야기하며 읽은 이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 시집의 맨 앞에 등장하는 <덫에 걸린 쥐에게>와 마찬가지로 <도덕>이라는 시 또한 곱씹을수록 묘미가 되살아 난다.
선은 없다.
예외는 있다: 우리가 선을 행할 수는 있다!
첫 행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아는 세상에 대해 ‘선은 없다’고 규정을 내린다. 두 번째 행에서는 이러한 규정이 너무 부정적이고 잔인하다고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도 선은 존재할 수 있다’의 의미의 예외를 설정한다. 하지만 이 두 번째 행은 첫 행과는 달리 그 자체로 진리라고 말할 수 없고, 실행될 때에야 비로소 참이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저자의 요청을 이행할 때 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 행이 역설을 말하지만 서로 모순되지 않는 효과를 발휘한다. 독일의 저명한 정치학자이자 언론인 돌프 슈테른베르거는 이 시를 “작은 걸작”이라고 극찬하며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 서문에서 자신의 책은 순수실천이성이 있다는 것만을 밝히고, “이성이 순수이성으로서 실제로 실천적이라면 자기의 실제성을 (---) 행위를 통해 증명하고, 그런 가능성에 반대되는 일체의 궤변은 헛된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돌프 슈테른베르거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칸트와 캐스트너의 역설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이성이 있다는 것은 오직 행위를 통해서만이 증명된다. 이성은 하나의 사실이나 존재 또는 본질로서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예외는 우리가 선을 행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좌파 멜랑콜리
에리히 캐스트너는 학계와 일반 독자의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작가였다. 그가 쓴 시와 소설 그리고 아동소설은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번역되었고 영화화되거나 연극 무대에 올려져 독일은 물론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독일 학계의 평가는 인색했다. 이런 평가에 발터 벤야민이 1931년에 발표한 서평이 큰 역할을 했다. "좌파 멜랑콜리-에리히 캐스트너의 새 시집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이 서평에서 벤야민은 캐스트너에 대해 ”불만에 차 있고 우울하며“ ”판에 박힌 우울증“을 토로하고 ”몰락하는 시민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모방한다“고 진단한다. 나아가 "정치적으로는 정당이 아니라 패거리를, 문학적으로는 유파가 아니라 유행을, 경제적으로는 생산자가 아니라 중개인을 만드는데" 기여하고, 혁명을 외면하고 “오락과 유흥”에 탐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캐스트너가 표방하는 “이러한 좌파 급진주의는 엄밀하게 말해 그 어떤 정치적 행동”도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2천 년 동안 변신해 온 멜랑콜리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이러한 서평을 읽으면 이 서평을 쓴 사람이 발터 벤야민, 탁월한 문화비평가이자 문학 이론가였던 바로 그 발터 벤야민이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 이 서평에서는 문학이 정치와 계급투쟁의 도구로 전락해 있다. 그리고 정작 캐스트너 시집에 대한 서평임에도 시에 대한 분석은 찾아볼 수 없다, 또 좌파와 우파의 극한 대립이 팽배했던 당시 상황에서 우리가 아니라 오히려 연대해야 할 캐스트너와 같은 좌파 진영의 인물에 대해 이데올로기 공격을 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벤야민은 “멜랑콜리”에 대해서 “나태함과 둔감함”의 성향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성과 명상의 힘”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독일 비애극의 원천>224) 이 책에 실린 캐스트너의 시를 읽은 독자라면 벤야민이 말한 멜랑콜리의 긍정적 요소인 “지성과 명상의 힘”을 어렵지 않게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벤야민의 비판이 벤야민과 유사한 입장을 견지하는 좌파 성향의 학계 인사들에 의해 답습되었다는 사실이다. 현실 사회주의자가 몰락한 이후에야 비로소 이러한 편향되고 왜곡된 평가가 수정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1999년 캐스트너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새롭게 출간된 전집과 영화 제작 및 상영, 언론의 집중 조명 그리고 다양한 기념행사로 '캐스트너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러한 재평가 작업의 일부로 볼 수 있다.
나치가 지배한 독일에서 대부분의 좌파 성향 작가들은 외국으로 망명했지만, 에리히 캐스트너는 독일에 머물렀다. 독일에 남아 한편으로는 어머님을 보살피고자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의 목격자로서 대하소설을 쓰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에리히 캐스트너는 1949년 독일 펜클럽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56년 뮌헨시 문학상을, 1957년 게오르크 뷔히너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60년에는 안데르센 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년에 이르러서도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고, 반전 및 반핵 운동을 펼치다가 1974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