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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땅을 뚫고 자그마한 새순이 고개를 내밉니다. 내리 붓는 봄 햇살에 한 뼘 넘게 훌쩍 자라난 보리새순이 광활한 언덕을 뒤덮겠지요. 따사로운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인 채 마치 진초록 물감이라도 쏟아 부은 듯 출렁이는 보리물결. 보리알처럼 무르익는 봄날, 고창 청보리 밭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그리곤 17만 평의 넓은 들판에 빼곡하게 들어선 초록의 바다, 그 사잇길을 거닐어 봅니다. 보리밭에는 바람결에 실려 오는 풀내음만큼이나 풋풋하지만 코끝 찡한 이야기들이 스며들어있지요. 보리밥과 열무김치 하나로 끼니를 때웠어도 행복했던 그 때, ‘필 닐릴리’ 봄 언덕 고향 그리워하던 까까머리 시절 아버지의 보리피리 소리 같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려거든 보리밭 사잇길을 걸어보세요. 걷다보면 ‘기억 디스크’ 속에 하나둘 저장된 아련한 그리움이, 추억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올 테니까요.
반 고흐의 명화‘삼나무가 있는 보리밭’을 아시나요?
바람결에 출렁이는 보리밭의 모습은 그야말로 목가적 풍경의 클라이맥스이지요. 4월에 만난 고창의 청보리밭은 여기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더합니다. 바로 보리피리 만들며 뛰어놀던 까까머리 머슴애들의 추억과 가난 · 배고픔의 그림자, 과거 ‘보릿고개’ 시절에 대한 기억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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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보리밭에 대한 느낌과 의미는 세대별로 달라집니다. 현재를 사는 아이들에게는 그저 신기한 풍경쯤으로 여겨질 법도 하겠지요. 허나 적어도 30년 전 쌀이 떨어지고 봄보리가 패기 전에는 굶주려야했던, 보릿고개 시절을 겪은 세대들에게 청보리의 모습이 결코 추억일 수만은 없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넘기 어려운 고개가 보릿고개라 말했던 우리네 할아버지에게도, 배고픔에 슬그머니 보리 서리하던 때의 우리 부모님 또한 지금의 풍성한 생활에 격세지감을 느끼게 됨은 어쩌면 당연지사겠지요. 허나 푸르른 빛을 뿜어내는 고창의 청보리밭의 풍경은 배고팠던 유년시절의 아픈 기억을 추억과 아련한 향수로 바꿔버리는 게 되는 묘한 힘이 있습니다.
‘필 늴리리’보리피리 불면 그리운 시절의 추억 새록새록 피어나
고창 청보리밭 하면 공음면 선동리에 위치한 ‘학원농장’ 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넓은 보리밭으로 유명하지요. 故 진의종 전 국무총리의 아들 진영호씨 부부가 운영하는데 해마다 이 맘 때면 17만평 정도의 청보리밭이 봄 풍경의 극치를 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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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임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잠시 차를 세워두고 녹색보리 일색인 보리밭 사잇길로 들어가 봅니다. 물론 드라이브하듯 슬쩍 보고 지나쳐갈 수도 있지만 보리밭의 참 맛은 사이사이 길을 직접 걸어보는데 있지요. 지그재그로 만들어놓은 산책로를 따라 보리밭을 걷다보면 입안에서 콧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집니다. 그리곤 그동안 잊고 지냈던 옛 추억이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 피어오르지요. 마치 합창이라도 하듯 곳곳에서 콧노래가 들려옵니다. 청보리보다 더 풋풋하고 푸른 아이들의 웃음소리, 팔짱을 낀 채 밀어를 속삭이며 걸어가는 연인들의 수줍은 미소도 정겹습니다. 중년의 여성들도 여고생 마냥 꺄르르 웃어대며 보리밭에서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깁니다. 제각기 가진 ‘추억의 색’ 은 다르겠지만 유년시절의 귀중한 추억을 한없이 떠오르게 함은 틀림없겠지요. 어깨동무를 한 초록 물결이 바람에 넘실거립니다. 온몸에 초록물이 드는 듯 이내 가슴이 후련해집니다.
보리밭 샛길 걷고, 꽃마차 타고 … 청보리 물결치는 고창은 지금 축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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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는 연초록빛을 피우다 황금빛으로 익기 직전인 5월 중순까지가 절경인데요, 때맞춰 축제가 열립니다. 짙푸른 청보리밭을 배경으로 추억과 애틋한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축제이지요. 올해로 6번째를 맞는 고창 청보리밭 축제는 4월 18일부터 5월 17일까지 30일간 열리게 됩니다. 보리밭 샛길 걷기와 보리피리불기, 시골길 자전거타기, 전통도예 및 민속놀이, 추억의 소품에 어울리는 모델선발대회, 꽃마차 타기 등 체험행사와 볼거리가 풍부하지요. 여기다 전통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고창농악 및 판소리와 국악공연, 작은 콘서트도 열립니다. 먹을거리 또한 넘쳐납니다. 시골장터와 농특산품 판매장에서는 봄나물에 고추장을 넣어 비빈 보리밥과 보리개떡, 보리뻥튀기, 복분자 와인 등을 맛볼 수 있지요. 축제장 인근에서는 고창의 별미인 풍천장어를 판매하는 음식점들이 많아 가족들의 봄나들이 장소로 제격입니다.
‘국화꽃’닮은 누이의 웃음 피어난‘돋음별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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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는 미당시문학마을과 박물관도 있으니 함께 둘러봐도 좋을 듯 합니다. 폐교를 단장해 만든 공간인 미당시박물관에는 서정주 시인의 육필원고와 시집의 초판본, 시화도자기, 문방구, 서예작품들까지 그의 문학적 흔적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화사한 봄의 향연’펼쳐지는‘선운사 산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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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에 가면 역시 천년고찰인 선운사를 빼놓을 수 없겠지요. 절도 절이지만 선운사의 봄은 화려한 꽃으로 대표됩니다. 하나는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벚꽃이요, 다른 하나는 동백꽃입니다. 경내 주차장에 내리자마자 입구를 따라 늘어선 벚꽃이 화사하게 방문객을 맞이하지요. 봄이면 만발하는 벚꽃은 스님들의 수행에 방해되진 않을까 걱정될 만큼 요염합니다. 선운사의 동백 역시 봄에 피는 춘백으로 벚꽃과 함께 화사한 봄의 향연을 펼칩니다. 선운사 입구 오른쪽 경사진 곳에서부터 절 뒤쪽까지 5000여 평에 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있는 수백 년 된 동백나무 300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동백숲은 그야말로 장관이지요. 멀리서 보면 대웅전의 건물과 함께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합니다. 선운사에서 나오면 좌우로 온통 작설차 차밭이지요. 도솔천을 따라 이어진 오솔길은 졸졸졸 흐르는 냇물소리를 들으며 여유롭게 산책을 할 수 있어 좋습니다.
<화창한 봄날, 고창에 오셨다면? 바로 여기>
고창읍성 고인돌군 풍천장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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