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블로 네루다와 “마추 삐추의 정상” / 민용태
1. 네루다와 민중시
여기서는 산골짜기는 보지 못한다. 산 정상과 산맥을 체크하면 되는 것이다. 산골짜기로 해서 산 정상이 있다는 이야기 정도는 담담한 논리일 뿐이다. 신대륙일수록 산의 굴곡이 심하고 산골짜기 물이 핏빛일 경우가 많이 있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뿌리박은 뒤로 제3세계는 이 지도의 굴곡을 더욱 뼈저리게 감지해야 하는 불행 속에 처한다.
중남미가 지닌 문제성과 역사의 굴곡은 민중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피지배자의 수난을 배경으로 한다. 초기의 싸움은 자연과의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내 수탈자의 노예로 전락한다.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를 막론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 가진 자와 안 가진 자의 출현은 불가피하다. 여기에서 출발하는 현대 제3세계의 갈등은 심각한 나머지 게릴라 운동으로 혹은 테러 투쟁으로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 계급에서 벗어나 다른 계급으로 돌입할 가능성이 없을 때 계급의식이 발동한다”고 싸르트르는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 소 부르조와지, 그것도 극히 미세한 부르조아지는 돈을 벌기도 쉽고 망하기도 쉬어 질적인 부르조와지의 부재 현상을 체험하고 있다고 일이레호 까르뻰띠아르는 진단한다. 문제는 기회만 잘 잡으면 한탕 해서 천문학적인 부가 되기도 하고, 망하면 하루아침에 감옥에 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면 이것은 계급투쟁 따위의 사치스러운 해석보다 근본적인 불의의 문제다.
그러나 불의보다 더한 제3세계의 암은 우리 모두의 비인간화된 의식이다. 지배자는 지배자이니만큼 민중을 숫자와 여론이라는 유령적인 실체로 간주한다, 지배자의 임무는 지배하면 되는 것이고 피지배자는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되는 역학이 모두를 비인간화시키고 있다. 피지배자의 대표들은 피지배자들을 교육 – 선도 - 의식화하는 사명 속에서 자신을 비인간화한다. 해방신학이 파헤친 우리 사회의 소외현상은 바로 이런 우리 자신의 비인간화 생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의 제시에 속한다. 마르께스의 <백 년간의 고독>에서처럼 구토에서 구토로 이어지는 사회의 악순환 속에 인간이 밑뿌리까지 고독을 체험해야 하는 것은 이미 낡아빠진 정치 - 사회의 과제를 넘어 우리의 실존의 의미로 육박한다. 여기에 현대 중남미 사회에서 작가 시인에게 주어지는 민중의 기대가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한 사회의 지성으로서 직면한 경치 경제 문제에 설복과 투쟁으로 맞서 줄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고, 둘째는 민족의 뿌리를 파헤쳐 잃어가는 인간성 회복에 거름을 주어야된다는 필요성이다. 특히 페루의 소설가 바르가스 요사의 펜클럽 연설문, <라틴 아메리카에서 글쓰기>라는 글에 이 점은 분명히 나타난다. “문학이 사회를 계몽하는 역할, 다시 말해서 언론이 왜곡하고 정치가 엄폐하는 것을 되찾아 주는 행동”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든 오늘날 사회의 비리가 뿌리를 내렸다면 문학가는 그 속에 마지막 시들어가는 인간성에 물을 주고 보다 깊은 인간 정의의 뿌리를 찾아 주는 것이 세사르 바에호나 빠블로 네루다가 의도한 사회시 경향이다. 이 두 시인의 사회시,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민중시, 정치시가 싸우고 지향하는 목표는 뚜렷하면서 뚜렷하지 않다. 그것은 공간적으로 현대, 즉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고발 지향을 포함해서 시간적으로는 잉카문명 이전의 원시사회의 고통까지 소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물질이 교환가치가 아닌 실용가치로 이용되면 유토피아적인 원시 공산시대는 중남미 해방시의 깊은 향수의 근간을 이룬다.
돈은 없었지요
그 같은 건 동아뱀이나 만들 때 쓸까
동전을 만들지는 않았어요
- 에르네스또 까른데날(니카라과)
그러나 이것이 복고주의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작품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이 오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본과 계급 사이의 갈등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이것은 신랄한 비평이 될 수도 있다.
같은 민중시이면서 네루다의 <총가요집>은 중남미 대륙의 서사시라고 불리운다. 복잡한 대륙의 역사 속에서 본 민중의 고통과 투쟁, 그 속에서도 너와 나의 가슴과 가슴으로 맥맥이 이어져 오는 샘물 같은 민중의 전통이, 즉 마음이 그 테마이다. 중남미처럼 “흥망이 잦고 빈곤과 치부, 성공과 실패, 압박과 피압박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인간집단이 엄존하는 사회에서 문학가가 다루어야 할 소재는 모두 서사적인 테마가 되고 만다”고 까르멘띠에르는 술회한다. 그러듯 빠블로 네루다의 시는 중남미적인 현실 충동 속에서 산출된 지성의 목소리이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듣는 고통에 가까운 황금빛 신음소리이다.
2. 네루다의 생애와 민중의식
네루다는 1904년 칠레의 어느 조그만 시골 마을인 빠랄에서 태어났다. 원 이름은 레프딸이 리까르도 레예이고, 빠블로 네루다는 필명이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선생이었고, 아버지는 가난한 열차기관사였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을 체험한 그의 일생은 끝내 사회문제와 무관할 수 없는 성격을 만들게 한다. 학교 다닐 때는 보헤미안 생활에 일찍부터 시를 읊조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1906년 최남단 띠무꼬로 이사를 간 사실로 보아 그가 열다섯 되던 때까지 민첩한 아라우칸음 인디언들과 접촉하면서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가 그곳에서 밀림을 뚫으며 철로 놓는 작업에 종사했다는 사실은 네루다의 기억에 파이어니어적인 것으로 남게 된다.
원래 태생이 가난했고 시골인지라 인디안을 비롯한 아주 서민적인 분위기에서 사춘기를 보냈다는 사실은 그의 감정의 뿌리가 사회적으로 귀족적일 수 없었다는 일면을 시사해 주고 있다. 또 한편 비가 많고 황토 흙이 질퍽거리는 메무꼬에서의 기억은 그가 자연과 떨어져서 살 수 없는 시인이 되게 한 연유이다. <나는 살았었다고 고백한다>라는 그의 자서전에서 네루다는 자주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비와 밀림과 밀림 속의 작은 곤충들과 놀던 일을 시처럼 기억하고 있다.
1924년 그에게 시인으로서 첫 번째 영광을 안겨다 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두 번째 시집)로부터 1934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영사로 가기까지 네루다의 삶은 희망과 고통과 사랑과 고독으로 점철되어 있다. 1927년 버마(미얀마)의 랑군으로 명예영사 발령을 받았으며, 고국에서 한 푼 보내오지 않는 거지 신사의 신세를 면치 못한다. 말 한 마디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콜롬보, 자바를 헤맨 외교관 아닌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그는 인간 상황의 고독을 피부와 뼈로 체험한다. 그때 그의 체험과 사고를 담은 것이 뒤에 <지상에서의 거주>라는 시집으로 종합된다. 그 당시 그의 눈에 비친 인간의 실존은 “땅에 떨어진 먼지투성이의 시선, 소리 없이 묻히는 잎사귀, 공허에 빛을 잃은 쇠붙이, 갑자기 죽어 버린 날의 부재”(<동맹>에서)이거나 ‘죽음밖에 없는’ ‘죽어갈 것밖에 없는’ 어두운 풍경이다. 시어는 초 현실주의 기법을 닮아 극도로 어두워가고 내용조차 암담하고 숨 쉴 구멍조차 없는 고독이 들어앉은 곳이 <지상>이다.
1935년 그는 마드리드로 발령을 받는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총살당하기 일 년 전의 사회주의 부류에 속해있던 시인 페레리꼬 가르시아 로르까와 공산주의자 라파엘 알베르띠이다. 그러자 1936년 스페인 내란이 터지고 알베르띠는 집을 불태운 채 망명하고 로르까는 총살당했으며, 다른 시인 친구 미겔 에르난데스조차 감옥살이에 지쳐 쓰러진다. 여기에서 그는 시인이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는다. 드디어 그는 정치적인 포지션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의 시도 민중과 노동자를 위한 무기로 바뀌어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스페인 내란이 낳은 위대한 전쟁 시인이 있다면 스페인의 미겔 에르난데스, <서반아여, 내게 이 아픔의 잔을 가져가 다오>의 페루 시인 세사르 바에호, 그리고 <심장 속의 서반아>(1938)를 쓴 빠블로 네루다를 들 수 있다.
빠블로 네루다는 이때부터 은둔시에 가까운 그의 시풍을 버린다. 말도 민중이 알아들을 수 있고 큰소리로 외쳐도 되는, 길거리에서 같이 즐길 수 있는 말투로 바뀐다. 그러나 큰 변화를 보인 것은 형식에서보다 내용에서이다. 그의 고독의 감성, ‘풀처럼 외로운’ 감성은 분노와 격정과 투쟁의 내용으로 탈바꿈한다. 그는 그 전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 시 한 방울, 사랑 한 모금으로 세상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그걸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투쟁과 단호한 심장뿐이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그의 정치열은 극도에 이른다.
“그러나 난 다른 길로 가고 있었지요. 나는 내 민중의 벌거숭이 가슴을 만진 거요. 난 자신 있게 민중 속에 사는 비밀을 실현시키게 된 겁니다. 민중의 힘은 봄보다 더욱 강하고 콩보다 더욱 기름지고 물보다 더욱 낭랑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진실의 숨겨진 힘이지요. 나의 천하고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민중이 그의 영토 속 그 딱딱한 지각에서 꺼내는 진실 말이요.”
이때부터 그는 민중이 파괴의 원동력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적인 지하의 힘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때를 정점으로 중남미와 모국 칠레 민족을 테마로 한 서사시 작업에 착수한다. 1938년에 시작되어 무려 12년이나 걸려서 완성한 서사시 <마추삐추의 절정>은 시인의 생애로 보아도 절정기요, 작품 분량으로 보아도 일만 오천 싯귀가 넘는 역작이며, 많은 평자들이 네루다의 최고 걸작으로 간주하는 기념비적인 수작(秀作)이다.
3. 해방시의 원형 <총 가요집>
헤수스 마뉴 이라기는 “<총 가요집>이야말로 어떤 속박 속에서도 해방을 찾는 전 아메리카의 서사시”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는다. 아메리카 정신이란 ‘땅의 아들’의 의미로 지구에서 떨어지지만 동시에 하나의 개성이 됨을 포기하고 민중으로 되뭉쳐지는 이미지를 포괄하고 있다. 특징 없는 별다른 표정 없는 한결같지만 조금은 서러운 아메리카 인디언의 모습은 각 개인의 얼굴이 아니라 한 얼굴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의 구성은 총 15편의 노래 및 송가(Canto)로 되어있는데, 한편으로는 네루다의 생애의 의식을 통한 여행이라고 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메리카 역사를 총괄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떼무꼬의 비 많고 흙냄새 짙은 곳에서의 자연이, 그 사춘기 소년이 자연의 목소리를 잃고 차차 도시의 소음 속에서 소외되어 가는 현상이 그려진다. 도시의 비인간화를 뼛속 깊이 체험한 그는 마침내 인간 자체, 즉 민중의 깊은 마음으로 변질해 간다. 자연의 목소리로 태어나 인간 속의 자연으로 환원되는 모습이다. 중남미 역사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 서사시는 새로운 역사의식을 제시한다. 즉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의 아메리카에 대한 노래는 ‘땅에선 램프’처럼 태어나기 이전의 인간의식을 조명한다. 다음 제2의 시에서 그는 잉카 이전의 고전 ‘마추삐추 정상’을 노래한다. 고생하다 죽은 이름 없는 노동자들이 파묻힌 그곳에서 그는 지축으로부터 샘솟는 동족의 연민과 힘을 느낀다. 이어 그는 소위 아메리카의 정복자라고 하는 서반아인, 독립운동가들, 반역자들에 대한 회상이 나온다. 6편에서 그는 “아메리카여, 내가 너의 이름 소리쳐 부르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오늘의 미대륙의 밤을 이야기 한다. 그가 부르짖는 것은 노동자들의 결속과 우정을 통한 단결이다. 이 책의 2편은 ‘칠레의 총 가요’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고향의 자연에 대한 칭송에 이어 영웅적인 농부들을, 이름없는 노동자들을 찬양한다. <땅의 이름은 환이다>라든지 기타 많은 작품은 땀과 성실로 인생을 살다 간 영웅 아닌 영웅들, 그러나 이 책이 모두 과거의 역사만을 다룬 것은 물론 아니다. 네루다가 살았던 정치적인 이슈도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소재이다. 우선 역사 속에서 칠레의 정복자로 알려진 발디비아는 ‘사형집행인’이고 인디언들은 이들의 희생물이다. 가장 현대적인 소재로는 그를 칠레에서 도망가게 했던 정치적 원 ‘곤잘레스 비델라’는 물론 ‘우뚝 선 유다’이며 브라질의 까를로스 쁘레스떼스 대통령의 부인이 가스실에서 죽는 사건도 시화하고 있다. 결국 이 모든 갈등과 고뇌 뒤에 그가 이상으로 여기는 오늘의 아메리카가 등장한다. 11장부터 마지막 15장까지는 네루다 자신의 체험이 포함된 역사적 현실로 <뿌니따끼 꽃>과 데모 및 암흑에 갇힌 조국에 대한 아픔을 노래한 <위대한 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이라는 시에 이른다. 시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노래하며, 민중의 한 임자로서 자연에서 인간의 자연으로 환원된 자신을 노래한다.
이와 같이 한편으로는 시인의 생애와 또 한편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의 생애, 그리고 상징적으로는 지구에서 떨어진 흙덩이가 민중의 흙으로 돌아가 다시 지구처럼 하나가 되는, 이론상으로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인 과정이라 볼 수도 있으나, 재미있는 것은 개인의식의 변증법 내지 구체적인 칠레의 역사에 대비시킨 점이 신선감을 더해 준다고 할 수 있다.
4. 서사시 중의 서사시 <마추 삐추 산정>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네루다의 <총 가요집>에 대한 이야기를 재검토하는 입장에서 이 ‘대서사시 중의 소서사시’(잔프랑코)라고 일컬어지는 걸작 <마추 삐추 산정>을 검토해 보자. 이 작품은 총 12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 Canto General의 내용과 같이 네루다의 정치 사회적 의식의 발전을 공허한 개인주의로부터 벗어나 피압박자의 고통을 같이하는 역할을 맡는 순간까지 잘 묘사되어 있다. 언어는 일반 서서시체보다 훨씬 ‘지상의 주거’에 가까운 은유와 상징을 쓰고 있으며 전기의 네루다의 시가 그렇듯이 이미지의 비약과 축적이 “거품처럼 뛰어나오는 영상들”(<시학>, <지상의 주거>)을 풀어 놓은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시1은 경박한 생활 속에 “허공에서 허공으로, 빈 하늘에 펼쳐진 그물처럼 거리를 오갔다”고 시작한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깊은 물결들 사이에 이마를 묻고, 유황빛 평화 사이 하나의 물방울처럼 밑으로 내려갔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눈먼 사람처럼 닳아진 인간의 불 속 자스민꽃에 도달했다”는 것. 여기서 그는 의식의 심층으로, 마추 삐추 깊은 동굴 속 심연으로 내려간다. ‘영원한 맥을 찾아서 헤매던’ 그는 마침내 “손에 잡히는 것이라곤 몇 꾸러미 얼굴과 가면밖에 없다”(시2)는 것을 안다. 그는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이던가? 그 툭 터진 대화 어디에, 백화점과 휘파람 소리 사이 어디에, 그 쇳소리 나는 움직임 속 어디에, 부서질 수 없는, 사위어질 수 없는, 즉 생명이 살아 있었던가?” 그래서 그 대답을 찾아 다시 “땅의 지층에서 잊혀진 밀림의 무서운 덩굴 속으로 올라왔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 속에 시인이 발견한 것은 마추 삐추, “인간의 여명이 일으킨 높은 절벽, 암초”다. “이제 더이상 그대들은, 거미 손이 아니다, 그 약한, 풀줄기 얽힌 거미줄 삶 속에 모든 것은 가시고 말았다. 습관도 헐은 말소리도, 황홀한 불빛의 가면도, 그러나 이제 돌아온 건 영원한 돌과 말의 축제”(시7) 그 죽어서 숨 쉬는 고통과 분노의 뿌리 앞에서 시인은 묻는다. “묻힌 아메리카여, 너도 그 깊은 속 깊이, 아래로 아래로 그 쓰라린 애간장 속에 배고픔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네루다 자신의 삶과 의식이 마추 삐추에 묻인 그 많은 “석공 환", "추위에 떠는 벌거숭이 환", "맨발의 환"과 일체인 것을 느끼면서 "천 개의 몸뚱아리가 하나의 몸뚱아리임"(시11)을 본다.
올라와 나와 함께 태어나자, 형제여
내게 손을 다오, 그 깊은
너의 고통이 뿌려진 그곳으로부터
바위 밑바닥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땅 밑의 시간으로부터 올라오는 것은 아니다.
굳어진 너의 목소리가 올라오는 것은 아니다.
구멍 뚫린 너의 눈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땅 밑으로부터 날 봐다오,
농부여, 방직공이여, 말 없는 목동이여:
사나운 고슴도치를 길들이던 친구여:
일어나는 발판을 만드는 미장이여:
손가락이 다 뭉개진 보석공이여:
씨앗 속에 떨고 있는 농부여:
네가 벼른 점토 속에 녹아버린 도자기공이여:
이 새로운 삶의 잔에
땅에 묻힌 너의 오랜 고통을 가져오라.
너희 피, 너희 이랑을 보여달라,
말해 다오, 여기 내 벌 받고 죽었노라고
보석이 빛이 안 나서, 아니면 땅이
제 때에 돌이나 곡식을 주지 않아서 그랬노라고,
그대들이 떨어져 죽은 돌을 가리켜다오.
그리고 그대들을 처형시킨 그 통나무를
그 오랜 부싯돌을 켜다오,
그 오랜 램프를, 몇 세기 두고 상처에 붙어 있는
그 채찍을 보여다오,
그리고 피묻은 광휘로 빛나는 그 토기들을
나는 그대들의 죽은 입을 통해 말하러왔다.
흙 사이로 모두를
흐트러진 그 조용한 입술들을 모아 다오
그리고 밑바닥으로부터 내게 말을 해 다오 이 길고 긴 밤이 지새도록,
내가 너희 속에 돛을 내린 것처럼.
내게 모든 걸 이야기해 다오, 사슬 사슬마다
줄거리 줄거리마다, 그리고 차근차근,
숨겨 놓은 칼을 갈아,
내 가슴과 내 손에 쥐어 다오
노란 광휘의 강물 같은
묻혀 있던 호랑이의 강물 같은
그리고 날 울게 해 다오, 시간이 가도, 날이 가도, 해가 가도.
그 눈먼 세월들을, 별의 세기들을 울게 해다오.
내게 침묵을 다오, 물을 다오, 희망을 다오.
내게 투쟁을 다오, 화산을 다오.
너의 몸들에 내 몸을 자석처럼 붙여 다오.
나의 핏줄과 나의 입으로 와 다오.
나의 발과 나의 피로 말 좀 해 다오.
- <마추 삐추> 시12 전역
5. 결론
네루다의 민중시는 역시 인간 해방에 대한 구가다. 억눌린 자와 고통에 시달리는 노동자-농민들의 아픔과 고통은 공간적으로는 우리 눈앞에서 우리의 가슴을 부르고, 민족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손을 찾고 있다. 우리 모두가 인간이고, 인간이어야 할 세상에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점차 비 인간이 되어 가는 삶의 비극 속에서 그는 용감하게 하나의 길을 택하고 뛰어든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서사시 속의 영웅들은 역사 속의 영웅들이 아니라(그들은 대부분 반역자나 사형집행인으로 그려진다) 평범한 시민, 그중에서도 생을 가파르게 영위하다 그 물결에 휩쓸려간 수많은 인류 그 자체다. 인간이 창조하는 불의와 영욕과 제도의 희생물이 된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역설이다. 여기에서 그는 투쟁과 칼과 화산을 부르짖는다. 산은 산만이 아니라 골짜기가 있기 때문에 산이기 때문이다. 골짜기는 산 정상을 향하여 용암을 퍼부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화산’도 인간성 그대로를 간직한 자연인 집단으로 복귀하려는 투쟁일 뿐이다. 빠블로 네루다의 유토피아는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다.
이 투명한 빛 위에
농장이, 도시가, 광산이 태어나리라.
이제 땅처럼 굳고 땅처럼 싹틔우는
이 단결 위에, 영원한 창조
생명들을 위한 새로운 도시의 싹이 놓였다.
- <뿌니따끼의 꽃>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