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22회 '두근두근 가을여행'시 일정 중에 '전주한옥마을'이 있었습니다.
이 전주한옥마을은 우리 22회 여행을 위해 개인적으로 한번 찾았었고,
임원진들과 답사를 위해 또 한번 찾았었지만 시간 관계상 이 '동학혁명기념관'은
눈빛으로만 담아두고 안으로 들어가보지 못했었습니다.
이번에 마음 먹고 친구들의 자유시간을 이용해 기념관 안으로 스며들어서
정신없이 사진만 찍고 나왔습니다.
'동학혁명기념관'
'동학혁명기념전시관 1층'이라고 되어 있네요.
서두르느라고 2층에 뭐가 있는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느낌으로 별 것 없은 것 같았는데...
입구를 들어서면 이런 모습입니다.
저 앞에 분은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분이십니다. ^&^
아~ 우측 옆에 안내글이 보이네요.
천도교 전주교구(2층..)
2층은 천도교 기도도량인가봅니다.
작품명: 새 세상을 여는 사람들
인물 안내가 있는데 글씨가 잘 안보입니다.
흐릿하게 최시형. 손병희. 전봉준. 김계남...등등이 보입니다.
기념 전시관 전체적인 모습입니다.
저 모니터는 꺼져 있어서 짐작만 합니다.
동학혁명에 관한 모든 것을 방영하지 않을까 하는...
3.1혁명 100주년 기념 특별전시
신간회 참여와 무인멸왜기도
3,1운동 이후 일제는 일제지배 하에서 자치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 자치운동을 추진했다.
이에 이상재, 권동진 등은 '비타협적 민족전선의 수립'을 제창하면서 자치운동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과의
협력을 모색했다.
그 결과 1927년 최대민족단체인 신간회가 창립되고 각지의 독립운동가.민중운동가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의암 손병희의 뒤를 이어 천도교 4세대도주가 된 춘암 박인호 상사는 천도교인들에게 신간회 활동을 지시하여
독립의 뜻을 이어갔다.
신간회 해산 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심화되던 1936년 박인호 선생은
8월 14일 주요 두목들을 불러 민족정신사의 회복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의 패망을 기원하는 기도 운동을
전개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천도교의 기도운동은 천도교경전인 용담유사 안심가의 구절을 매일 아침저녁 기도문으로 외우며 독립의 의지를 굳건히
하는 것이었다.
이를 '무인멸왜운동'이라 한다.
개 같은 왜적 놈을 한울님께 조화(造化) 받아
일야간(一夜間:하룻밤 사이)에 소멸하여
전지무궁하여 놓고 대보단에 맹세하고
한(汗:땀 한)의 원수 갚아보세
'(무인멸왜기도문 일부-용담유사 안심가 구절)
천도교 청년회 창립과 신문화운동
3.1혁명으로 천도교 지도부가 대부분 투옥되어 교단 붕괴의 상황에 처하자 의암 손병희의 셋째 사위
소파 방정환, 춘암 박인호의 아들 현파 박래홍, 해월 최시형의 외손자 정순철(짝자꿍, 형제별, 졸업식 노래 작곡가),
소춘 김기전 등이 주도하여 19919년 9월 21일 천도교청년회를 창립하고 이후 청년회 산하 소년부를 각립하여
1921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를 창립한다.
천도교소년회는 창립1주년을 맞아 어린이날을 만들고 어린이 인권운동을 세계 최초로 시작하였다.
천도교청년회는 개벽사를 설립하여 잡지 개벽, 신여성, 어린이, 조선농민 등을 발간하여 신문화운동을 주도하였다.
개벽 잡지는 당시 종합잡지로서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등의 시와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등의
소설이 실리며 일제강점기 문학의 산실이 되었다.
개벽 잡지에 대표적인 작가로는 염상섭, 현진건, 나도향, 이상화, 김억, 김소월, 변영로, 박종화.김동환, 박영희, 김기진.
이기영, 최서해 등이 있다.
3.1혁명? 3.1운동? 끝나지 않은 혁명의 과정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및 3.1운동의 이름 찾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월1일 보성사에서 나온 조선독립신문에 가정부(假政府)라는 이름이 등장하여
임시정부를 준비하는 움직임 역시 미리 준비 진행되고 있었다.
3.1독립선언 이후 국내외 각 처에서 임시정부가 나타나는데 특히 노령의 대한민국의회정부,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가 실질적인 정부역활을 할 수 있는 역량을 드러냈다.
3.1운동이후 세워진 임시정부들은 공통적으로 군주제가 아닌 민주공화제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항일투재으이 일원화의 필요성에 따라 각립한 정부들 사이에 통합의 요구가 대두되었다.
임시정부의 통합은 5월25일 도산 안창호 선생이 상해에 도착함으로 급진전하게 되었다.
결국 9월 상해에 단일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48년 정부수립이 될 때까지 우리민족의 유일한 정부로서 역활을 다했다.
임시정부에서는 천도교에 대표단 파견을 요청하여 강재 신숙 선생이 참여하였고, 김일성의 스승으로
알려진 최동오 선생도 천도교인으로서 임정에 끝까지 함께 하였다.
프랑스혁명은 1787년 귀족반란을 시작으로 군주정과 공화정이 여러 차례에 걸쳐 뒤바뀌며 100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3.1혁명은 일제당시 구성원들이 3.1혁명이라 명명해 사용해오다 1948년 제헌헌법을 제정시 운동이라는
명칭이 붙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혁명이란 기존질서를 무너뜨리고 새시대를 여는 것이라는 말을 대입해 보아도 제국주위를 벗어나
민주공화정의 기치를 가졌던 3.1만세는 혁명으로 이름을 돌려줘야 할 것이다.
일제의 잔악한 보복(제암.고주리 학살)
전주의 3.13 만세
전북지역은 1910년대 대한독립의군부를 중심으로 한 항일운동과 천도교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서울에서 온 인종익은 천도교 전주교구에 독립선언서 1천여장과 독립운동의 행동방법 등을 전달하였고
전주교구 직원 배상근, 김진옥 등이 임실, 남원, 순창, 옥구, 익산, 함열 등 각 지방으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천도교인 민영진, 김태경, 서호순, 유선태, 유원 등이 전주 읍내와 각 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거사에 대비하여 긴밀히 연락해오던 기독교측과 함께 논의하여 3월 13일 전주읍 장날로 만세계획이 결정되었다.
천도교 전주교구에서는 등사기를 이용 독립선언서 수천장을 제작해 교인들을 통하여 배포하고 만세를 준배해갔다.
3.13일 전주장날이 되자 천도교인들은 태극기를 채소 가마니로 위장하여 남문장터까지 무사히 운반하고
정오에 남문의 인경 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만세시위에 돌입하였다.
이때 천도교인 뿐만 아니라 서문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학생들이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만세"를 외쳤다.
시위군중은 남문에서 제2보통학교 시장거리를 지나 행진을 계속 하였는데 일본군경이 총격을 가하자 일시적으로
시위대열이 흐트러졌으나 다시 남문시장에 집합하여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천도교 격문
-위 글은 스마트폰으로도 잘 보일테니 옮기지 않습니다.
독립정신
전국의 3.1운동의 전개 과정
3.1독립선언 발표
2.8독립선언이 알려지자 국내의 독립선언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무장투쟁이었던 독학혁명의 고통스런 경험을 가졌던 손병희 선생은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대 원칙을 가지고
천도교를 넘어 기독교, 불교, 유림을 망라하는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이런한 제의에 불교와 개신교의 감리교와 장로교가 적극 호응하여 조직적인 준비가 진행될 수 있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독학혁명 참여자는 총9인(손병희,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박준승, 이종훈, 임예환, 홍기조, 홍병기)이
연명하여 독학혁명과 3.1독립운동이 한 뿌리임을 증명한다.
1919년 2월 28일 손병희 자택에서 모인 민족대표들은 무력충돌을 피하고자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하였다.
탑골공원에 모인 군중과의 연락을 위해 태화관 선언장소 옆방에 청년대표들이 함께 배석하였다.
3월 1일 독립선언을 발표한 민족대표 33인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며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이들까지
총48인이 주모자로 재판을 받게 되어 민족대표 48인이라고도 말한다.
한일 병탄과 독립에 대한 준비(동학에서 천도교로)
우리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활동을 노골저거으로 전개하던 일본은
1905년 11월 매국5인(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 이근택)을 앞세워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찬탈하였다.
해월 최시형 선생을 이어 동학3세 교조가 된 의암 손병희 선생은 그해 12월 이용구가 이끄는 친일세력인 일진회 일당을
출교시키고,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어 종교의 체계를 갖춘다.
1910년 일본은 천도교에서 출교된 이용구, 손병준을 이용해 합방청원서를 작성하게 하여 이완용에게
충성경쟁을 유도함으로써 이완용 내각은 8월 22일 한일병탄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일본은 이 조약을 근거로 8월 29일 국권을 빼앗아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한일 병탄 이후 10년 안에 나라를 뒤찾겠다고 다짐하고 독립지사 양성을 위해 북한산 자락에
봉황각을 짓고 7차례에 걸친 특별 수련으로 천도교 지도자 483명에게 민족정신을 함양시켰다.
그리고 수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지도자들에게 등사기(복사기)를 한 대씩 들려보냈다.
이 등사기는 후일 3.1운동 당시 선언서 및 태극기 제작에 이용되었다.
일제의 야욕과 항일의 시작, 동학농민혁명 2차 기포
동학혁명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중국과 일본사이 텐진조약(1885)을 이유로 들며 조선에 상륙하여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급기야 7월 23일(음6.21) 경복궁 점령하기에 이른다.
일본군의 침략을 전해들은 동학군은 일본군을 몰아내겠다는 "척왜(斥倭)" 의 기치로 9월 18일(양10.6) 총기포를 통해
2차 봉기를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게 된다.
호남 중심이었던 1차 봉기와 다르게 2차 봉기는 전국의 동학교도들이 참여를 하였다.
동학3세교조인 의암 손병희 성사는 통령으로 전봉준 장군은 총대장으로 참전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상징인
백범 김구 선생도 이때 해주지역 접주로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수많은 동학군이 희생당하고 말았다.
이후 동학군은 항일활동을 이어갔으나
현재 우리나라의 보훈기준은 동학혁명 1년 후인 을미의병부터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새 세상을 만들다
1892~1893년 공주, 삼례, 광화문, 보은, 원평에서 이뤄진 5차례의 집회는 수운 최제우의 복권을
요구하는 교조신원운동과 함께 보국안민, 탐관오리척결, 척왜양창의의 기치를 내세웠다.
이곳 전라지역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을 계기로 1894년 고부봉기, 무장기포, 백산대회를 시작으로
동학농민혁명 1차기포가 일어났다.
전봉준, 김덕명, 손화중, 김개남 등이 이끈 동학군은 황토현, 황룡전투 등 승전의 기세로 전주성에
무혈입성하여 정부에 서정에 협력하는 폐정개혁안 12개조를 제시하여 전주화약을 이끌어냈다.
이후 전주성에서 철수한 동학군은 치안질서와 구폐청산을 위한 집강조를 설치하여 우리 역사상 최초의
자치 민권행정을 이루었다.
동학,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다.
1860년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창시한 동학은 "내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 진리
즉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모든 사람이 존귀하다는 만민평등사상을 세상에 알린다.
이로 인해 수운선생은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사상을 퍼트렸다는 죄명으로
1864년 3월 10(음) 사형당하고 동학은 조선 정부로부터 핍박 받게 된다.
동학의 2세 교조인 해월 최시형 신사는 수십 년간 도피생활을 하며 동학경전인 동경대전, 융담유사를 펴내며
동학의 시천주, 인내천 사상을 "사람을 한울님처럼 섬겨야 한다" 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윤리로서 평등사상과
여성해방 어린이존중을 주창하고 교화하여 많은 사람을 동학교도로 이끌었다.
우리가 역사를 만드는 주인공
3.1 독립선언서
1 이제 우리는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를 세계만방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자존의 올바른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한다.
2 (우리는) 반만년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모아 우리의 독립을 널리 퍼뜨려 알리는 것이고,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발전을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며, 전인류가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는 세계 개조의 큰 뜻을 따르고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며 시대의 큰 흐름이며 전 인류가 더불어 살아가는 권리를 얻기 위한 정당한 주장이자 활동이므로, 세상 그 무엇도 우리의 독립을 막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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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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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천개벽도 (2014 박홍규)
천도교의 출현과 독립운동
-의병항쟁과 독립운동: 1895년 들어 전국적으로 항일의병전쟁이 전개되자, 동학농민군은 의병들과
결합하여 참전했고,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독립운동의 주축을 이루었다.
-의암 성사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동학교단의 주류는 자주적 근대 개화의 노선을 선택하여
1904년에는 갑진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동학을 근대적 종교로 대고천하(大告天下)하고 세력을 결집하였다.
-의암 성사는 1905년 마침내 동학교단을 "천도교"로 선포하여 근대적 '종교'로 개신하고, 문화개벽과 정신개벽,
정치개벽을 통한 자주독립과 문명개화의 길을 채택하였다.
-신(新) 동학혁명- 3.1운동
국권 상실 후 천도교단은 바로 '자주독립'을 위한 세력 확장과 준비를 거듭해 1919년 기독교, 불교와 연합하고,
학생 등 각계각층 시민들을 결집하여 거국적인 운동을 1년 동안 전개하였다.
이어 1920년 이후 신문화운동, 어린이운동, 6.10만세운동, 무인멸왜기도운동 등을 전개했다.
-3.1운동 준비: 1910년대 이후 전국적으로 300만 명의 교세를 회복한 동학 천도교는
1918년 하반기부터는 기독교, 불교, 학생대표 등과 연합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동학정신이 천도교로 이어지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천도교인 대표(총15명) 중 7명은동학농민혁명 당시 대접주 출신이다.
또 전국의 3.1운동 지도자 중에는 동학 접주가 다수 포함되었다.
의병, 독립, 근대화 세력으로 진화
동학농민혁명은 1895년 이후 몇 개의 방향으로 계승되어 갔다.
의병항쟁과 독립운동(만주)으로의 전환, 근대화와 종교적 역활, 나라가 망한 후에는 중구긍로 이주하여
독립운동 세력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 사이에 국권이 상실되자, 운동의 방향은 '자주독립'이라는 것으로 집결되어갔다.
동학혁명 계승과 의병항쟁
해월 신사로부터 동학의 도통을 이어 받은 의암 성사 손병희를 중심으로 동학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재기를 도모하여 진보회 등을 통해 동학 정신을 계승해 나간다.
사진:귀국하는 의암 성사와 환영 나온 천도교 교인들
3.1운동 자금
3.1운동 자금은 천도교 중앙대교당을건립하기 위해 전국의 천도교인이 낸 성미(誠米)와 성금으로부터 나왔다.
이러한 3.1운동의 성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3.1운동 이후 민족운동
3.1운동 후 천도교는 6.10만세운동, 신간회운동, 신문화운동(어린이 여성 청년 학생 노동자 농민 상인),
무인멸왜기도운동, 조국광복회운동 등을 통해 동학농민군의 꿈을 실현코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천도교의 신문화, 개벽운동
특히 동학 천도교단은 민족 운영의 미래를 짊어질 어린이, 학생, 청년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어린이날을 만든 선구적 운동가 소파 방정환도 천도교 청년이자,의암 성사의 사위이다.
염주와 청수 그릇
천도교의 청수(淸水)는 동학 창도주 수운 최재우 대신사 때부터 시작된다.
수운대신사는 청수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면 기도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수련하실 때 염주를 사용하신 것으로 전한다.
특히 2세 교조 해월신사께서 1875년 유교식 제사방식의 제수를 이체 폐지하고 청수 한 그릇만으로
대신 할 날이 온다고 하였고, 천도교 시대에 이를 제도화 하여
기념식, 시일식, 기도 등 모든 의식의 표준물로 청수 한 그릇을 봉전하는 의례가 정착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관군이 동학농민군으로부터 노획한 전리품에는 염주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ㄷ.
염주는 우너래 동학교인이 소지한 수행도구였으나 주문, 염부와 함께 신앙심을 높이는 신앙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전봉준 접주도 손에 105염주를 지녔다고 하였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이 한창 승승장구할 때의 기록으로 '모두 다투어 동학에 입도하는데, 길 가는 자는
우물이나 개천을 향해서 입도식을 하고, 산에는 나무하던 자는 계곡물을 놓고 입도를 했다.'는 것으로 보아,
동학의 청수가 들불처럼 확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파 방정환선생과 어린이 운동
3.1운동 후, 소파 방정환 소춘 김기전의 지도로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창립하고 1주년을 맞아,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선포하였다. 1923년 5월 1일(현재5월 5일) 천도교소년회, 불교소년회,
조선소녀군이 함께 소년운동협의회를 조직하고 제1회 '어린이날'을 제정 계승하였다.
'어린이' 잡지는 '개벽사'에서 1923년 3월 1ㅇ리 초대 편집인 방정환을 중심으로 창간한 아동문학잡지이다.
천도교 3세 교조 의암 손병희의 셋째 사위인 방정환이 천도교의 물심 양면의 도움으로 발행한 '어린이'잡지는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었고, 수많은 아동문학가를 배출하였다.
이 어린이지를 통해 '어린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보편화되었다.
이하 제목만 옮김
'천독회월보'
'천도교사 '
'조선농민', '농민': 개벽사의 잡지 중 하나
'농민':월간 교양지
'신인간':천도교의 기관지
개벽(開闢): 천도교청년회에서 펴낸 월간잡지
조선지위인(朝鮮之偉人) 부록 '정봉준선생':개벽사 주필 소춘 김기전이 1922년에 저술한 책.
3.1운동과 독립선언서:기미년(1919) 3.1일운동 당시 우리나라가 배포한 선언서.
최남선이 기초하였으며, 손병희 한용운 이용운 등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발표.
3.1독립운동약사:1969년 3월 1일. 3.1절 50주년을 기념하여 대중에게 배포하기 위해 천도교중앙총부에서 발행.
의암 손병희 선생 전기:
해월신사의 최후
손병희 등의 호위 속에 피신하던 해월신사 최시형은 원주 송골 원덕여의 집에 있던 중,
1898년 4월 5일 관군에 체포, 서울로 압송되어 서소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는다.
해월 신사의 순도
단성사 뒤편 고등법원 감옥서(監獄署), 교형장). 해월 신사 최시형은 1898년 6월 1일 사형판결 다음날
교수형으로 순도한다.
이 사진은 교수형 직전에 러시아 공사인 파블로프가 찍은 것이다.
동학혁명의 의의
동학농민혁명은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편한 '청인전쟁'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개혁인 '갑오개혁'이라는
대사건을 불러왔다는 것만으로도 우선 주목받을 사건이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는 그런 외형에 있는 게 아니라, 농민혁명의 내용 자체에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현재까지 면면히 흐른 정신은 무엇인가?
통치질서가 파탄에 처하고 일본 등 열강의 침탈이 자행되던 19세기말, 조선은 크게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안으로는 낡은 신분질서를 뜯어고치고 모든 민족 구성원이 평등의 원칙 아래 자유를 누리며 역사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견설해 가는 개혁, 즉 근대화가 필요했다
밖으로는 이런 내적인 역사발전을 해치는 외부로부터의 힘에 대응하는 것, 즉 자주화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당시 조선은 침략을 배격하는 자주적 입장에서 사회적 개혁을 이루해야 했다.
이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지 못하는 한, 조선은 어떤 형태로든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과제에 부응하기 위해 위정자들의 고민과 노력이 전혀 없엇던 것은 아니다.
양반지배층의 위정척사(조선 말기에 정학인 주자학을 지키고 사도를 물리치자는 유교의 격이단 이념) 운동과
개화지식인들의 개화 운동이 그런 맥락의 노력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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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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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동학농민혁명은 현대에 전개된 여러 민주화 운동, 즉 4.19 의건, 5.18 광주민주화항쟁 등의
정신적 본령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은 끝내 실패로 마무리된 사건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대한 대중적 요구가 제대로 수요되지 못할 때, 부패한 지배세력이나
노골적인 외세침략에 대한 대중적 비판과 저항이 미약할 때, 그 공동체가 어떤 처지로 전락하는지를
현재의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경험이자 역사로 남아 있다.
동학 농민혁명의 좌절과 계승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산발적인 전투에도 불구하고 전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동학군의 씨를 말리고 발본색원 하는 전원 살육작전"을 전개한 일본군의 만행으로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학살되거나 지하로 숨어들어 후일을 도모하였다.
4대 명의
1.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재물, 가축)을 해치지 마라.
2.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라.
3.일본사람들을 몰아내고 성인(聖人)의 도(道)를 밝혀라
4.군사를 몰아 서울로 진격하여 권세귀족을 모두 없애라.
12개조 기율
1.항복하는 자는 대접한다.
2.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3.욕심이 많고 포악한 잔느 추방한다.
4.순종하는 자에게는 경복한다.
5.도주하는 자는 쫓지 않는다.
6.굶주린 자는먹인다
7.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그치게 한다.
8.가난하고 군색한 자는 도와준다.
9.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10.거역하는 자는 알아듣게 타이른다.
11.병든 자에게는 약을 준다
12.불효자는 죽인다.
폐정개혁 12개조
1.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2.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3.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4.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노비문서를 소각한다.
6.7종의 천인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7.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8.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9.관리 채용에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왜(인본)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1.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12.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일본군의 침략과 동학농민군의 최후 항쟁
세성산/홍주성 전투
우금치전투
우금치 이후
동학농민군의 제기포와 해월의 총기포.
청일전재에서 승리한 일본국은 본격적으로 동학농민군 토멸작전을 시작하였고, 동학농민군은
이와 맞서 총기포를 단행한다.
동학농민혁명혁명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식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의 화력으로 인해 통한의 좌절을 겪게 된다.
삼례기포와 청산기포
일본이 경복궁 침탈 이후 친일정권을 수립하며 조선침략을 노골화하고, 동학도 탄압과 학살이 가시화되자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의 9월초 삼례기포를 결정하였다.
이에 동학교단의 최고 지도자 해월 신사는 청산 대도소에서 9월 18일 전국의 모든 동학도들이
총기포하여 호응할 것을 명령하고 통령기를 손병희에서 주었다.
전국적인 기포
해월 신사의 기포령에 따라 전라도 충청도는 물론 강원, 경상, 황해, 평안도에서도 동학군이 기포하였다.
특히 애기접주 김구(본명:김창수-일제침략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 됨)는 황해도 해중서 기포했다.
전주성 점령과 집강소 설치
승세를 잡은 동학농민군은 4월 27일(양 5월 31일)전라도 수부인 전주성을 점령하였으며, 김학진 감사와의 사이에
전주화약을체결하고, 폐정개혁안을 제시하여
최초의 민주적인 지방자치 활동인 집강소 정치를 전라도 지역에 시행하면서 외세 동향을 예의 주시하였다.
전주성 점령과 전주화약
황토현, 황룡천 전투의 승리에 고무된 동학농민군은 곧장 전주성을 함락하였으나 외세 개입 소식을 듣고,
전주화약을 통해 잠정 해산을 결정하였다.
집강소 활동
전라도 지역을 석권한 동학 농민군은 폐정개혁안을 실현하기 위하여 집강소를 설치하고 자치 행정 업무를
시행해 나간다. 우리나라 민주적 지방자치에의 효시가 된다.
청군과 일본군 개입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조선에서의 주도권 싸움을 벌이던 청일 양국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풍도해전 등을
시작으로 청일전쟁을 치르게 된다.
백산대회.황토현전투.황룡전투
백산대회
무장기포 이후 고부를 점령한 다음 3월 25일 전략 요충지인 백산에 모여 혁명군으로 군제를 정비하였다.
전봉준을 동도대장으로 추대하고, 김개남과 손화중을 총관령으로, 김덕명과 오시영을 총참모로, 최경선을 영솔장으로
확정하고 지휘체제와 조직을 갖추는 한편 격문과 4대명의 12개조 군율을 선포하였다ㅏ.
황토현전투, 황룡전투
동학농민군은 4월 7일 관군을 황토현으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둠으로써 동학혁명의 초반승기를 잡은 것은 물론
동학농민혁명의 꺾일 줄 모르는 대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황룡 전투에서는 서울에서 파견된 정예병인 경군을 격파하여 전주성 점려의 전략적 승리를 안겨주었다.
사진: 백산기념비. 황토현 전경. 황토천 기념비
포고문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김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군신과 부자는 가장 큰 인륜으로 꼽는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충직하며 아비가 자애롭고 아들이 효도를 한 뒤에야 국가를 이루어 끝없는 복록을 불러 오게 된다.
지금 우리 임금은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애로우며 지혜롭고 총명하시다. 현량하고 정직한 신하가 있어서 잘 보좌해
다스린다면 예전 훌룡한 임금들의 교화와 치적의날을 꼽아 기다려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신하가 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하려는 생각을 아니하고 한갓 작록과 지위를 도둑질하여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아부를 일삼아 충성스런 선비의
간언을 요사스런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庇徒)라 한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바깥으로는
백성을 갈취하는 벼슬아치만이 득실거린ㄷ. 인민의 마음은 날로 더욱 비틀어져서 들어와서는 생업을 즐길 수 없고
나와서는 몸을 보존할 대책도 없다. 학정은 날로 더해지고 원성은 줄을 이었다.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구분이 드디어 남김없이 무너져 내렸다. 관자가 말하길 '사유(四유:예의염치)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멸망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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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
격문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내몰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 앞에 고통을 맏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의 밑에서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돌이키지 못하리라.
고부기포와 무장기포
평화적인 시위와 집회 및 상소운동을 통한 교조신원과 서정 혁신 노력에 한계를 느낀 동학교단은 조선 왕조의
혁명적인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켜 나갔다. 전봉준이 고부기포로 혁명의 횃불을 들자, 전라도
지역의 동학 조직이 호응하여, 승승장구해 나갔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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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생략
동학농민혁명의 발생과 전개
동학농민혁명의 발생원인
고부기포와 무장, 백산기포의 혁명출정식
사진 좌로부터 손화중, 전봉준, 손병희
죽창과 무라타소총
죽창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혁명군들의 주요 무기는 죽창이었다.
본 죽창은 동학 대접주 동학농민군 총관령이었던 김개남 장군 부대 주둔지 전라도 남원 교룡산성 안에서 수집하였다.
무라타 소총
1880년 일본군 포병장교 무라타츠네요시가 서구의 소총을 참고해 자국민의 체형에 맞게 개발한
최초의 일본산 소총, 일본군이 동학농민혁명 당시 사용
목검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재우 선생은 검가(검결)를 지어 노래 부르며
목검을 들고 검무를 추어 심신단련과 척왜양창의 기치를 들었다.
동학혁명 당시 동학농민군들은 검가와 검무로 훈련하였다.
화승총
18세기부터 주로 사냥 등에 사용되어 온 원시적 총포.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부 사용되었다.
교조신원운동의 원인과 사회적 배경
밖으로 외세가 몰려오고 안으로 민란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1860년경 최제우에 의해 동학이 창시되었다.
동학은 현세구복적인 순수 종교적 측면과 아울러 반봉건 반외세 사상으로 발전하면서 날로 교세를 더해갔으며
특히 삼남일대(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아울러 이르는 말)에서 번성하였다.
이에 정부는 민심을 어지럽히는 사교로 동학을 탄압하였고, 교조 최제우를 체포하여 1864년(고종 1) '좌도혹민'의 죄명으로
처형하였다. 그러나 2세 교주 최시형의 지도로 1870년(고종 7) 이후 동학은 다시 그 세력을 회복, 신장시켜 나갔다.
이러한 세력 신장을 바탕으로 1892(고종 29) '삼레집회'에서 억울하게 죽은 최제우의 죄를 벗기기 위한 제1차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되었다.
이하 생략
교조신원운동의 전개
1890년 들어 관의 동학 지목이 극한에 이르자, 교조 신원(伸寃)으로 동학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고자
지방관과 임금에게 잇따라 상소를 제기하였다. 운동이 심화되면서 동학도들은 척왜양창의라는 목표를
설정하면서 운동의 질적 향상을 꾀하였다.
공주, 삼례, 광화문 신원운동
보은, 원평 척왜양창의운동
수행, 경전 간행과 제2차 동학 재건
1870년대 중반 이후 해월 신사는 가는 곳마다 포덕을 재개하여 동학 세력을 경상도와 강원도는 물론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까지 확장하였고, 교도들을 위하여 경전 간행, 각종 조직 제도와 규범의 정비,
생활 속의 법설강론 등을 실시하였고, 교세가 확장하자 관의 지목도 재연되었다.
해월 신사와 제1차 동학 재건
수운 선생으로부터 북접대도주로 도통을 이어 받은 해월 신사는 고비원주의 유훈을 받들고 동학 재건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영해동학운동이 실패하면서, 또다시 동학 탄압에 따른 시련이 재연되었다.
사진: 황오동과 검곡, 영양 용화동, 영해시(영해동학운동), 영월 직동
수운대신사의 순도와 해월 신사
동학을 편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부와 관의 탄압이 이어지고, '서학'이라는 혐의까지 씌어졌다.
수운 대신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경전을 짓고, 제자들을 수련시키고, 접 조직을 구성하는 노력을 다한다.
이후 조정에 체포되어 1864년 3월 10일 대구 관덕당에서 순도(殉道)하였다.
은적암:수운 대신사가 관의 탄압을 피해 수 개월간 머물며 경전을 지은 곳.
이곳에서 지은 동학론에 동학의 핵심이 담겨 있다.(전북 남원 교룡산성 내)
홍해 매곡동:동학 최초의 조직인 '접(接)'을 설하고 접주를 이곳의 손봉조의 집에서 임명하였다.
이로써 진리(경전)와 공동체(조직)와 수행자(제자)의 골격이 완비된다.
경상감영과 관덕당: 수운 대신사는 조선 조정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좌도난정이라는 죄목으로
1864년 3월 10일 관덕당에서 순도하였다.
신사 매월 최시형상
천도교 제2세 교조 신사 해월 최시형은 동학혁명을 주도하시다가 포덕39(1898)년 4월 5일(음) 원주 송골에서
관헌에 피체되어 동년 6월 2일 향년 72세로 경성감옥에서 순도하시다.
이 좌상은 순도 직전의 최후 모습으로서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하여 고 종법사 김창업의 특성으로 세우다.
동학혁명기념전시관 관람 안내
동학은 1860년 4월 5일 창도된 이래, 다시 개벽의 새 세상으로 가는 길을 민중들에게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중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는 물론 동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끼쳤으며,
세계사적인 혁명으로서 우리나라의 자랑이자 길이 빛날 역사이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 존영
사발통문
1893년(고종30) 11월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지도자 20여명이 사발모양으로 서명한 것으로
고부관아 점령, 고부군수 조병감의 처단, 화약고와 무기고의 점령, 탐관오리 처벌,
전주성 점령, 한양으로 직행 등의 결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발통문의 특징은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게
하는 의미도 있지만 또한 서명자 모두가 주모자라는 공동운명의 성격도 있다.
동학혁명기념관
첫댓글
사진에 있는 동학혁명의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을 옮기다가
너무 많아 쉬었다가 이어갑니다.
우와..
읽다가 배고파서
냉장고 탐색갑니다.
우선
3분의1은 읽은 듯...
방정환이 손병희의 사위라고
하나 배우고 갑니다
@21회 김석순 짝자꿍..
윤석중 작사
정순철 작곡
https://youtu.be/NVxaDzfiiAM
PLAY
@21회 김석순
읽다가 배고파서...^&^
냉장고 탐색하러...^&^
네. 좀 길지요.
이것을 다 읽으리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판을 두두리다 보면
나도 배우고 먼 훗날에 그 누구가
할 일없이 흥얼흥얼 읽을지 압니까.
@21회 김석순
네. 나도 여기서 알았습니다.
방정환이 손병희 선생의 셋째 사위라는 것.
19919년...아주 먼 미래를 열었습니다. ㅎㅎ
1919년이겠지요.
아이고..언제 이걸 다 쓰셨을꼬...
전주 장날 태극기를
채소 가마니로 위장하여
장에 가서
만세 불렀다는 대목까지
읽고 잡니다
천천히 어느 정도 쓰고 쉬었다가
다시 두두리고 쉬고...
가다보면 못갈 곳 있으리오.
@22회 이광호 참 대단하십니다.
학자의 길로 갔으면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하고
참 좋아서 했을텐데
아쉽습니다.
다음 생에는...
@21회 김석순
별말씀을...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함께'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사실 이런 류의 글과 사진은 영 아니올시다란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22회 이광호
이제서야 다 끝냈습니다.
말미 부분에 약간 중략 내지는 생략된 부분이 있지만
어쩔 수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