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安重根, 1879년∼1910년)의사
安重根은 以庚戌陽曆三月二十六日上午十時에 立刑場하여 欣然而曰 余爲大韓獨立而死하고 爲東洋平和而死하니 死何憾焉이리오? 遂換着韓服하고 從容就刑하니 年三十有二러라.
안중근은 경술년 양력 3월 26일 오전 10시에 형장에 서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이 한스럽겠소?" 하였다. 마침내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용이 형장으로 나아가니, 나이 32세였다.
한국통사(韓國痛史)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영웅이자 한민족의 대영웅.
그가 쏜 총알 세 발이 아시아의 역사를 바꾸었다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910년 3월 26일에 순국했다.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계몽운동가이며 한국군 정규 군인이자 의병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평화주의적 아시아주의자.
본래는 교육 산업 등 민족의 계몽 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의군을 조직하였다. 곧이어 무력단체의 참모중장으로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마지막으로는 FN M1900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아명은 안응칠(安應七)이고 아명인 동시에 이분의 자(字)이기도 하다. 가톨릭 세례명은 토마스. 이것에서 '도마 안중근'이라는 호칭이 나왔다. 과거에는 가톨릭에서 사도 토마스를 도마로 국역했기 때문.
2.1. 하얼빈 의거 이전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부에서 진해현감 안인수의 아들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로 불렸다.
전형적인 무골로, 어렸을 적부터 무술을 연마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격의 명수였다. 놀랍게도, 그는 화승총을 쏘아 20보나 되는 곳에 놓인 동전을 맞추었다고 한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친분이 있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을 '안씨 집안의 총 잘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개화파 청년그룹이었는데, 갑신정변으로 일본 유학이 좌절되자 당시 7살의 안중근과 함께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으로 은둔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 정현석과 해주감사가 청계동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때 16살의 안중근은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박석골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3년 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다시 정부 문서에 등장하는데 내무 대신인 남정철이 쓴 보고서에 따르면 안태훈이 동학농민군 향장 유만현을 제거하고 빼앗은 세금을 마음대로 썼기 때문에 이를 원상복구하라는 내용이다.(1897년 5월 6일자 조회 제6호) 안중근은 동학군이 버리고 간 쌀 500석을 군량미로 썼다고 한다.
이때 안태훈은 천주교회를 찾아가 프랑스인 니콜라 빌렘 신부의 도움을 받았으며,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 안중근 의사가 진압한 동학농민군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는 만큼 동학농민운동 항목을 참조하기 바람.
2.2. 대한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은 그의 전 생애를 설명해주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얼빈 의거 참조. 다만 안중근 본인은 이 일을 의거가 아닌, 김두성의 명령을 받고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적국의 장수를 처단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안중근은 대한의군 소속으로 활동했다.
안중근과 거사를 함께한 유동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거사일 당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다고 한다. 알고 있는 것은 대략적인 얼굴상과 특징 뿐이었는데, 사진을 구하기 쉬운 때도 아니었거니와, 이토 히로부미가 원태우의 돌팔매에 헤드샷 마빡이 터져 죽을 뻔한 일을 겪은 뒤로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나도는 것을 극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러시아어 통역 담당 유동하와 조를 나누어 우덕순과 유동하는 차이쟈거우(蔡家溝) 역에,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 매복했다. 하지만 차이쟈거우 역의 지하 숙소에 매복하던 우덕순과 유동하는 기차가 멈춘 4분 동안 문이 잠기는 바람에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고, 기차는 그대로 하얼빈 역에 정차했다.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체념하던 순간에,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준 덕분에 안중근이 이토의 얼굴을 확인하고 FN M1900으로 3발 저격했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4발 저격했다. 제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제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제3탄은 윗배 중앙 우측으로 들어가 좌측 복근에 박혔다.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 俊彦)의 팔꿈치에 1발,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다이지로(森 泰二郞)의 복부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 淸太郞)의 왼쪽 무릎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나카무라 요시히코(中村 是公)의 오른쪽 장딴지에 1발을 맞췄다. 하지만 민간인이 다칠 것을 우려하여 자폭하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체포당했으며 안중근은 체포당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코레아 후라->종종 러시아어로 잘못 전달되는 경우가 있는데 안의사는 재판에서 세계공통어로 대한제국만세를 외쳤다고 진술하였다. 이시기 에스페란토어는 세계어 또는 세계공통어로 불렸고, 또한 안의사의 조카 역시 에스페란토 번역가였음을 보았을때 러시아어로 외쳤다는 말은 신빙성이 없다. 하얼빈에서 러시아어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중국어나 일본어 한국어도 아닌.
대한 만세! 대한 만세!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저격을 받고 얼마 후 사망. 일본 야마구치 현 히카리 시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으며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다.
이토히로부미의 죄악
하나. 일천팔백육십칠년, 대일본 명치천황 폐하 부친 태황제 폐하를 시살(弑殺)한 대역불도의 짓
둘. 천팔백구십사년, 자객들을 황궁에 돌입시켜 대한 황후 폐하를 시살한 짓
셋. 일천구백영오년, 병사들을 개입시켜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위협해 강제로 다섯 조약을 맺게 한 짓
넷. 일천구백영칠년, 다시금 병사들을 이용해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여 강제로 일곱조약을 맺게 한 후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폐위시킨 일
다섯. 한국내 산림과 하천 광산 철도 어업, 농, 상, 공업등을 일일히 늑탈(勒奪)한 짓
여섯. 소위 제일은행권을 강제 하여 한국 내의 땅들을 억지로 팔게 만든 죄
일곱. 국채 일천삼백만원을 한국에 강제로 지게 한 짓
여덟. 한국 학교 내의 서책을 압수하여 불사르고, 내외국의 신문을 인민들에게 전달하는것을 막은 짓
아홉.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수많은 의사들의 봉기를 폭도 취급해 쏴죽이거나 효수하고 심지어 의사들의 가족까지 십수만인을 살육한 짓
열. 한국 청년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짓
열하나. 소위 한국 정부의 대관이라는 오적(을사오적)칠적(정미칠적) 등 일진회 놈들을 통해 일본의 보호라는 헛소리를 운운한 짓
열둘. 일천구백구년 또다시 거짓으로 다섯가지 늑약을 맺게 한 짓
열셋. 한국 삼천리 강토를 욕심내어 일본의 것이라 선언한 짓
열넷. 한국自 일천구백오년 都無安日 이천만 생령의 살육의 곡소리가 하늘에 끊이질 않고 포성과 총알이 비오듯 쏟아져 숨쉴틈 없는 와중에도 한국이 무사태평한것처럼 명치천황을 속인 짓
열다섯. 동양 평화의 영위를 파괴하여 수많은 인종의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짓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통감부문서 7권/ 싱가포르 영자신문 기록. 내용과 순서가 다르다.
원래대로라면 러시아에서 수완을 쌓은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지원을 받아 제3국 입장인 러시아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하였으나, 아래 법률적 평가 문단에서 나오듯 일제의 알력에 의해 뤼순(현재는 다롄의 일부)에 있는 일본 법원으로 송치되어 버리고 만다.
의거 소식이 들리자 한국은 물론 러시아·영국·스페인, 심지어 일본(!)에서까지 수많은 국제 변호사들이 안중근의 변론을 맡겠다고 몰려들었다. 그러나 선임이 불허되었고, 일제 측의 관선 변호사가 변론을 맡게 된다. 外안중근 평전 - 저:김삼웅(제 7대 독립기념관장)
2.2.1. 법률적 평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두고 법률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 중 재판상에서도 문제가 된 안중근과 이토의 신분 여부가 가장 큰 문제였다. 뤼순 소재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은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교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순구 교수는 첫째, '대한의군 참모중장'(군인) 신분이었던 안중근은 1907년 발효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의 "비정규군도 교전자격이 있다"는 규정에 따라서 보호받을 수 있다는 점과 둘째, 이토는 1909년 10월 사망 당시에 이미 조선 통감을 사임했지만, 대신 추밀원 의장을 맡고 있었고 그가 민간인이더라도 하얼빈 방문 자체가 한반도 지배를 포함한 대륙 진출을 목적으로 한 침략 행위였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따라서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교전에 해당될 수 있다고 말한다. 다만 이 주장이 국제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장인지는 의문이 있다. 아무리 침략행위와 연관이 있다하더라도, 단순한 방문이 문언적으로 "교전"에 해당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교전의 의미를 지나치게 넓게 해석하면 당장 비슷한 시기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도 교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극단적으로는 이라크에서 있었던 각종 테러범들도 자신들이 교전자라고 주장할 여지가 있다. 설령 이토 히로부미의 방문이 교전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교전단체에 소속된 자가 교전에 참가한다고 그 자체로 교전자의 자격이 인정되지는 않는다. 당시 적용되었을 헤이그 육전규칙(1907) 교전자격 요건에 의하면 민병이나 의용병단이더라도 부하에 의해 책임지는 자에 의하여 지휘되고, "고착된 표지", 즉 제복(혹은 이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전투원임을 식별할 수 있는 복장)을 갖추고, 공연하게 무기를 휴대하며, 전쟁법을 준수하여야 교전 자격이 인정된다. 다만 군민병이라면 공연한 무기휴대와 전쟁법 준수만으로도 교전자로서 자격이 인정되나, 안중근 의사를 군민병으로 볼 수 있을지도 의문시 되며 안중근 의사가 군민병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공연한 무기휴대 요건이 결격사유가 된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모두가 볼 수 있을 정도로 권총을 들고 다녔다면 거사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 아닌가. 물론 이것말고도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재판과정이 불법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요소는 많지만, 적어도 안중근 의사가 당시 국제법을 기준으로 교전자로서 포로 대우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편 재판 관할의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일본 검찰 측에서는 "하얼빈은 청국 영토이지만 동청철도의 부속지로서 모든 나라에 대해 자유지역이며, 일본국은 조약상 이 곳에 대해서 치외법권을 가진다."고 주장했으며, "메이지 38년(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일한보호협약(을사조약) 제 1조에 의해 국외에 있는 한국인에 대한 보호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 주장에는 을사조약 체결의 조약상의 문제점(강압적 체결)과 한국인에게 적용될 대한제국의 법률에는 섭외법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상존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 법원은 일본 형법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2.3. 낯선 타국 이름 모를 야산에 잠들다
순국 5분전 사진. 어머니가 짜주신 새하얀 수의를 입고 찍은 사진이다.
1910년 2월 14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후 3월 26일 오전 10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32세였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가 처형당한 뒤 두 동생이 유해를 인수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일본 당국은 안중근 의사의 묘지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 온갖 트집을 잡으며 유해를 넘겨주지 않았고, 뤼순 감옥인근 죄수 묘지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2.4. 유해 발굴 시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김구는 삼의사의 유해를 찾으려 시도했으나 암살당하며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유해 발굴에 호의적이던 장제스가 국공내전에서 패전해 현지의 도움은 사실상 기대할 수가 없어졌다.
북한의 경우 안중근을 높게 평한 김일성은 1970년대에 직접 주석명령을 내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우생 씨를 단장으로 하여 조사를 벌였고, 1986년에도 북한은 대규모 유해발굴단을 보내 조사를 벌였다고 하며 물론 둘 다 성공하진 못했다.
또한 뤼순 주변은 대부분 1930년대 이후 여러차례 개간되어 이미 1910년대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고, 2008년 남북이 공동으로 진행한 발굴사업에서도 결국 유해를 찾지 못해 사실상 그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1997년 8월 15일, MBC 뉴스데스크에서 안중근의사가 순절한 여순형무소(여순감옥)를 취재하여 시청자들에게 최초로 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장소를 공개하였다. 당시 여순형무소는 외국인 방문이 금지돼 있어서 취재직전까지 공식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지만, 당시 MBC가 처음으로 취재 비자를 받아서 여순 형무소에 남아 있는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시청자들에게 공개하였다.
당시 MBC뉴스에 보도된 여순형무소에서 안중근 의사 시신 수습에 대해 말하자면
형장에 걸린 밧줄에서 수직으로 2m쯤 아래에는 나무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교수형을 당한 시신을 바로 이 상자 안으로 떨어뜨린 뒤 흙으로 덮으면 사형 집행이 모두 끝나는 형식으로 사형이 이뤄졌다. 안 의사의 처형은, 그러나 이곳이 아닌 본관과 교수 형장 사이의 공터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남은 것은 안 의사가 처형된 곳임을 알리는 현판 하나가 전부. 사형을 당한 시신들은 나무상자에 넣어져 땅 속에 묻혔다. 이 중 어딘가에 안 의사의 유해가 있지만 아직까지는 찾지를 못했다. 안 의사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한 기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MBC 뉴스 1997년 8월 여순형무소 안중근 의사 순절현장 취재 내용 -
2010년 3월 중엽, 정보통제기간이 끝난 일본의 기밀정보 중 일부가 일반 정보로 풀리면서, 일제가 안중근 의사를 체포한 이후 철저하게 감시했고 재판에도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였단 자료가 튀어 나왔다. 그동안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체포와 이후의 심문과 사형에 이르는 재판과정에 일체 개입을 하지 않았으며, 당시 효력을 발하던 국제법에 따라 매우 공정한 재판을 진행했다고 주장해 왔으나, 풀려버린 자료에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이 다수 실려 있어 결국 사과의 의미로 유해발굴에 협조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왔고 중국 정부도 당시 재판과정에 대한 책임을 마무리 하기 위해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마지막 기회로 보고 한중일 공동유해 발굴단이 결성을 의제로 추진하게 되었으나 이렇다 할 결실은 거두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 버렸다. 결국 안중근은 고국이 광복을 맞이하였음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유해의 회수에 실패하였기에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역에 허묘로 비도 없이 모셔져 있다.
3. 신앙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 성경 지혜서, 3장 1절 - 7절.
이미 오래 전부터 가톨릭교회 일각에서는,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했던 잔 다르크가 시성된 것처럼 안중근도 시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이에 따라 2011년 10월 31일,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안중근 의사의 시복(諡福)을 추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고 한다.外관련기사.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은 "안중근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모범"이라며, "순교자"는 아니지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신앙 고백함으로써 의연한 신앙의 자세를 견지한 증거자"라고 밝혔다. 염 추기경은 안중근의 동양평화 사상과 노력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다"며, 안중근을 "민족주의 관점에서만 평가되는 반쪽짜리 인간"으로 만들지 않기를 당부하며, 서울대교구는 안중근 토마스 의사를 시복하기 위해 빠른 시일 내에 신학적 검토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서울대교구가 시복을 추진 중에 있는 인물은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1792~1835) 주교를 비롯해 조선시대 및 근현대 신앙의 증인 570여 명이며, 여기에는 안중근도 포함되어 있다.
안중근이 명백히 사람을 죽일 목적으로 총을 쏴 살인한 것은 맞지만 그의 생애를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한정시키지 않고 처형당하기 전 마지막 시기인 ‘동양 평화를 위한 수인(囚人)기’ 등을 깊이 조명하면 성인으로 공경할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본 것이다.
구체적으로 성인으로 시성된 전쟁 영웅 잔 다르크와 함께 성경에도 안중근과 비슷한 사례로는 구약시대의 유딧이 있다. 유딧은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의 침략을 당하자 적진으로 찾아가 홀로페르네스 장군의 신임을 얻고, 연회 때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장군의 목을 잘라 귀환해 이스라엘을 구한 과부이다. 즉 안중근의 저격은, 유딧의 칼부림을 누구도 살인으로 일컫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2016년 10월 22일 충남 홍성군의 홍주 생매장터 순교성지의 14처 봉헌 미사에서 천주교 대전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는 미사 중 강론을 통해 안중근 토마스 의사에 대한 시복 및 시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추진할 것임을 밝혔다. 본래 시복 및 시성 추진 관련 업무는 해당 성인의 출신지 교구장이 하는 것이나 황해도가 북한에 있으므로 한국 천주교에서는 주교회의를 통해 이 직무를 맡을 주교 한 사람을 선출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유 라자로 주교가 이를 맡게 된 것.
사실, 안중근의 집안이 통째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독립운동 때문에 일가가 중국·미국·북한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탓에 이들의 후손들 대부분이 외국에 살고 있어, 안중근의 유명세에 비해 이 집안에 대한 정보는 한국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안중근의 고명딸 안현생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2010년 3월 25일에야 '해방 후 귀국해서 1953~1956년에 효성여자대학교(現 대구가톨릭대학교) 불문과 교수로 재직했다'는 공식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안중근의 어머니인 조마리아는 안중근이 하얼빈 형무소에서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유명하다.
장한 아들 보아라.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 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편지는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잘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일제시대의 여성 독립운동가」, 2014. 5, 국가보훈처이후 안중근의 장남은 어렸을 때 일제에 의해 독살당한다. 그리고 이것 때문인지 안중근의 차남인 안준생은 이후 변절, 1939년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伊藤 文吉)에게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발언을 하고, 나중에 소위 이토 가문과의 화해란 명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모시는 사찰에서 이토 분키치에게 공개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저질렀다. 이 일은 친일 매체에 의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으며, 이에 분노한 김구가 안준생을 죽이라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암살 계획을 세웠었다는 대목이 <백범일지>에 있다. 김구 본인이 안태훈의 집안과 친분이 있었으니 김구의 분노는 더 컸을 듯. 안준생을 죽여야 한다며 암살 계획을 짰다는 부분은 얼핏 보기에 김구가 '배은망덕한 인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당시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러한 반응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5. 저작물
5.1. 동양평화론
세계 열강이 동양을 침범해 옴에 따라 한중일 3국이 서로를 돕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해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일본이 3국간섭으로 뤼순을 청에 반환하고 한중일 3국이 공동관리하는 중립지대를 만들며, 그곳에 3국 평화회의를 설립하고 3국에서 대표를 파견하며 동양 3국의 의견을 조율하며, 3국 청년들로 구성된 군단을 창설하고 은행, 공용화폐 등을 만들자는 주장이 실려있지만 서문만 완성하고 사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했다.
그의 사상은 공용화폐나 유럽의회를 통해 유럽의 평화와 통합을 추구해 나가고 있는 유럽연합과 비슷하다.
한국에서는 당연히 의사(義士)로 추앙받으며, 항일 활동가 중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인지도 또한 높다. 그의 올곧은 정신과 이를 잘 드러내주는 서예 작품 등 또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온건론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한일 강제 병합을 앞당겼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지만 이미 을사늑약 등에 이토 히로부미가 활발히 참가해 왔고 조선을 일본에 종속시키려는 장기적 계획이 일본 내에서 꾸준히 논의되어왔으며(대한시설강령 등) 일본의 각의는 1909년 7월 조선 병합을 가결하고 가쓰라 수상을 필두로 병합을 추진 중이었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가 죽기 전이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병합이 됐네 어쨌네는 잘못된 지식을 가진 자들이나 일본찬양론자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지금도 넷상에선 이런 개드립을 믿는 자들이 보이며 특히 일본 극우들이 이 떡밥을 물어 안중근 팀킬론을 신나게 떠들고 있다.
무엇보다, 이토 히로부미는 평화주의자, 혹은 친한파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정한론을 반대한 것은 일본 국회에서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패론당하였던 정한파들(사이고 다카모리, 에토 신페이,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소에지마 다네오미 등)을 성급한 인물들이라고 경계하였고 그들로만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확실한 계획(실제로는 조선 정부의 청국 개입에 막혔다는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 실패 (그 이후로는 톈진 조약 이용) 이후로도 조선-청국 김옥균 암살 논란(청일전쟁 요인)에 대한 철저 분석, 시모노세키 조약, (삼국간섭(러일전쟁 요인) 이후) 포츠머스 조약, 제1차~제2차 한일협정 이용, (2차 협정만 무효시키려는 고종의 반일 의식으로만 슬쩍 꾸몄던) 헤이그 특사 저지, 제3차 한일협정 이용, 경술국치)을 내세워서 조선을 완벽하게 지배해야한다고 생각했었다. 즉 그가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강제 병합은 일어났을 것이며, 되려 살아남으려는 강제 병합이 이토의 생각대로 추진됐다면 소설 비명을 찾아서->소설 원작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같은 끔찍한 현실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안중근이 누구를 저격했는가를 떠나서, 처음으로 독립을 위해 일본 고위 관료를 사살했기 때문에 이후 의열단을 비롯한 독립운동단체들이 일본 관료 암살과 조선총독부등의 기관 폭파 등을 통한 독립을 얻고자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6.1. 이승만의 평가
한편 미국 유학 생활 중이던 이승만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절하했다. 이승만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서도 비판한 바 있을 정도로 무력을 사용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성향이었다.
안중근이 일본의 거물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 각종 언론 신문에는 '한국인들은 잔인한 살인마이며 무지몽매하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자주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한국인인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 했고, 교수들은 나를 무서워해서 만나주지 않았다.
이승만은 전년도인 1908년, 친일 외교고문으로 한일합방을 찬미하고 홍보하는 외교관 '더럼 스티븐슨'을 처단한 전명운과 장인환 의사들 법정 통역을 거부했는데 거부 사유가 자신은 '기독교' 신분이라며 살인자들을 변호할 생각없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인들 여론상황 반응만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법정통역을 거부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오히려 이승만의 소극적인 태도를 더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찾아오자 1959년 05월 29일 이승만은 안중근 의사에 헌화하고 참배했다.
6.2. 박정희의 평가
박정희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1972년 1월 ‘祖國統一 世界平和’(조국통일 세계평화)라는 휘호를 보냈고, 안중근 장군 탄신 100주년이던 1979년 9월 2일에는 ‘민족정기의 전당’이라는 휘호를 내려 기념관을 이순신의 현충사에 버금가는 성역(聖域)으로 조성하려고 계획했다. 즉, 안중근을 민족정기의 화신(化身)으로 추앙하여 이순신과 동격의 위인으로 높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해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10.26은 개관식 날짜이기도 했다.
육군사관학교에 爲國獻身軍人本分를 새긴 바위를 세우기도 하였다
↑왼손 약지가 잘린 손을 보이고 있는
안중근 의사(安重根義士)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 마리아 모습
(1862∼1927)
아들의 사형선고 소식에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짧고 단호한 편지를
아들에게 보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 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안중근 의사 가족사진
↑안중근 의사 순국 15분전 모습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기 전
안중근 의사의 두 동생
정근, 공근과
홍석구 신부
(프랑스 이름 조셉 빌렘,
Nicolas Joseph Marie Willhelm)에게
전하는 마지막 유언 장면이다.
↑안중근 의사 순국 5분전
어머니가 지은
하얀 수의를 입고 찍은 모습
1910년 2월 14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1879년 7월 16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31세의 나이로
1910년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사형으로 생을 마감하신
우리의 자랑스러운 영웅이자
애국자이자,
당시 대한독립군 중장의 신분
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아침 9시 도착,
러시아의 재무상과
회담 예정의 날 아침에,
불과 5m의 거리에서
7발의 권총사격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했다.
그가 6차례의 재판을 받는 중에,
왜 그를 암살했나는 질문에
15가지의 이유를
명쾌히 설명,
당시 검찰관이나
형무소 헌병도
그를 존경하게 만들었던 사실이
동영상에 여실히 나온다.
동양평화론은,
그 당시 아무도 생각지 못한
명쾌한 새로운 세계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한중일 3개국이
경제통합하고,
통화도 단일 통화를 채택하면
더욱 번성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동영상의 하부에서는
일본의 학자도,
1910년 8월 22일의
한일합방은 지나친 것이었다고
시인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간 것은,
한일합방과 만주 이권을
러시아와 담판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1. 보물 제569-1호
백인당중 유태화
(百忍堂中 有泰和)
백 번 참는 집안에 태평과 화목이 있다.
중국 당 고종이
운주 장공예(張公藝)의 집 당호(堂號)로,
9대가 한 집에 화목하게 산 것을
칭찬하며 지어 준 글이다.
2. 보물 제569-2호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
3. 보물 제569-3호
년년세세화상사
(年年歲歲花相似)
세세년년인부동
(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계절 따라 같은 꽃이 피건만
해마다 만나는 사람들은 같지 않네.
4. 보물 제569-4호
치악의악식자 부족여의
(恥惡衣惡食者 不足與議)
궂은 옷, 궂은 밥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의논할 수 없다.
『논어』 이인(里仁) 편에서 인용
5. 보물 제569-5호
동양대세사묘현
유지남아기안면
화국미성유강개
정략불개진가련
(東洋大勢思杳玄
有志男兒豈安眠
和局未成猶 慷慨
政略不改眞可憐)
(동양 대세 생각하매 아득하고 어둡거니
뜻있는 사나이 편한 잠을 어이 자리
평화 시국 못 이룸이 이리도 슬픈지고
정략(침략전쟁)을 고치지 않으니 참 가엾도다.
6. 보물 제569-6호
견리사의 견위수명
(見利思義 見危授命)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논어』 헌문(憲問) 편에서 인용
7. 보물 제569-7호
용공난용 연포기재
(庸工難用 連抱奇材)
서투른 목수는
아름드리 큰 재목을 쓰기 어렵다.
『통감(通鑑)』에
자사(子思)가 위왕(魏王)에게 말한
내용에서 인용
8. 보물 제569-8호
인무원려 난성대업
(人無遠慮 難成大業)
사람이 멀리 생각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논어』 헌문(憲問) 편에서 인용
9. 보물 제569-9호
오로봉위필 청천일장지
삼상작연지 사아복 중시
(五老峯爲筆 靑天一丈紙
三湘作硯池 寫我腹中詩)
오로봉으로 붓을 삼고
삼상의 물로 먹을 갈아
푸른 하늘 한 장 종이 삼아
뱃속에 담긴 詩를 쓰련다.
10. 보물 제56
10. 보물 제569-10호
세한연후 지송백지부조
(歲寒然後 知松栢之不彫)
눈보라 친 연후에야
잣나무가 이울지(시들다/쇠약해지다)
않음을 안다.
『논어』 자한(子罕) 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에서 인용
안중근 의사의 며느리
정옥녀 여사가
소장하던 것으로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옥중 심경을
토로한 것이다.
추사 김정희
1786(정조10)∼1856(철종7)가
제주 유배 시에 그린
세한도(歲寒圖)에도
이 글귀가 인용되었다.
11. 보물 제569-11호
사군천리 망안욕천
이표촌성 행물부정
(思君千里 望眼欲穿
以表寸誠 幸勿負情)
임 생각 천 리 길에
바라보는 눈이 뚫어질 듯하오이다.
이로써 작은 정성을 바치오니
행여 이 정을 저버리지 마소서.
12. 보물 제569-12호
장부수사 심여철
의사림위 기사운
(丈夫雖死 心如鐵
義士臨危 氣似雲)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그 기풍은 구름 같도다.
13. 보물 제569-13호
박학어문 약지이례
(博學於文 約之以禮)
널리 글을 배우고
예법으로 몸단속을 한다.
『논어』 옹야(雍也) 편에서
공자가 한 말이다.
14. 보물 제569-14호
(지정일: 1972. 08. 16.)
제일강산(第一江山)
폭 96.6cm × 길이 38.6cm.
원 김양선 목사 소장으로
숭실대학교 한국 기독교
박물관에 기증 함.
15. 보물 제569-15호
(지정일: 1972. 08. 16.)
청초당(靑草塘)
37.6㎝×67㎝(가로) ×37.6㎝(세로)
민병기 소장.
16. 보물 제569-16호
(지정일: 1972. 08. 16.)
고막고어자시(孤莫孤於自恃)
스스로 잘난 척하는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없다.
크기: 74.9㎝(가로) ×39.7㎝(세로)
한중호 소장.
17. 보물 제569-17호
(지정일: 1972. 08. 16.)
인지당(仁智堂)-
어질고 지혜로운 집
크기: 67㎝(가로)×37.6㎝(세로)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18. 보물 제569-18호
(지정일 1972. 08. 16.)
인내(忍耐): 안중근은 어려움을 참고
견딘 남자이다.
크기: 26.8㎝ × 72.1㎝,
김성섭 소장.
19. 보물 제569-19호
(지정일 1972. 08. 16.)
극락(極樂): 지극히 즐거운 곳
크기: 68.2㎝(가로) × 33.2㎝
강신종의 소유로
안중근의사 기념관에
기증 되었다.
20. 보물 제569–20호
운재(雲齋):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 있을 때,
공부하는 건물 이름의
재호를 쓴 것임.
크기: 67.8㎝(가로) x 32.8㎝
안중근의사기념관 소장.
21. 보물 제569-21호
욕보동양 선개정략
시과실기 추회하급
(欲保東洋 先改政略
時過失機 追悔何及)
동양을 보호하려면
먼저 정략을 고쳐야 한다.
때를 놓쳐 실기하면
후회한들 무엇하리요.
22. 보물 제569-22호
국가안위 노심초사
(國家安危 勞心焦思)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유묵 오른쪽에 증(贈) 안강(安岡)
검찰관이라 씌어져 있다.
이는 친절하게 대해 준
당시 뤼순법원 검찰관
야스오카에게 증정한 것이다.
야스오카 사후 장녀 우에노(上野)가
소장하다가
1976년
도쿄 국제한국연구원을 거쳐
남산 안중근의 사기념관에 기증했다.
22. 보물 제569-23호
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안중근 의사를 경호했던
일본군 헌병
지바 도시치(天葉十七)에게
써 준 유묵이다.
제대 후 지바는
안 의사의 인품과 사상에 감복하여
이 유묵을 일본에 가지고 가
사진과 함께 정성으로 모셨다.
그의 사후
미망인과 양녀 미우라(三浦)가
봉안하다가
구리고마의 다이린지(大林寺)를 거쳐
1980년
도쿄 국제한국연구원을 통하여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증되었다.
24. 보물 제569-24호
천여불수 반수기앙이
(天與不受 反受其殃耳)
만일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벌을 받게 된다.
『춘추』 의전(春秋義戰)의
‘天與不取 反受其咎’
(천여불취 반수기구)와
같은 뜻이다.
25. 보물 제569-25호
언충신 행독경 만방가행
(言忠信 行篤敬 蠻邦可行)
말에 성실과 신의가 있고,
행실이 돈독하고 경건하면
비록 야만의 나라에서도
이를 따르리라.
26. 보물 제 569-26호
임적선진 위장의무
(臨敵先進 爲將義務)
적을 맞아 먼저 전진하는 것이
장수의 의무이다.
2007. 11월 보물지정,
진해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27. 지사인인 살신성인
(志士仁人 殺身成人)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논어 위령공(衛靈公)' 편에
'지사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해 인을 해치는 일이 없고
몸을 죽여 인을 이룩한다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안중근의사숭모회 소장.
2022년 6월 23일 보물 지정.
28. 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
(黃金百萬兩 不如一敎子)
황금 백만 냥이라도
자식에게 하나를 가르침만 못하다.
『명심보감』 훈자(訓子)편에
‘황금 한 궤짝이
자식에게 경서 한 권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
(黃金滿盈 不如敎子一經)’와 같은 뜻이다.
재일교포 김주억이 일본에서 확인했으며
뤼순감옥 경수계장 나카무라(中村)에게
써준 것으로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2022년 6월 23일 보물 지정.
29. 인무원려 필유근우
(人無遠慮 必有近憂)
사람이 멀리 생각지 못하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 근심이 생긴다.
『논어』 위령공(衛靈公)편에
나오는 말로
중국 대련 세관의
세무관으로 있던
카미무라 주덴(上村傳)이
안중근으로부터 직접 받은 유묵이다.
현재 국내 개인 소장.
2022년 6월 23일 보물 지정.
30. 일통청화공
(日通淸話公)
청나라말을 할 줄 아는 일본인 통역관.
(날마다 맑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오른쪽에 ‘증 키요타(淸田) 선생’이라고
쓰여 있다.
국내 개인 소장.
2022년 6월 23일 보물 지정.
31. 세심대
(洗心臺)
마음을 씻는 대.
국내 개인소장.
2022년 6월 23일 보물 지정.
32.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순국 직전 뤼순 감옥에서 쓴
유묵 ‘경천’
33. 독립(獨立)
시타라 마사즈미 소장
獨立(독립)
34. 담박명지 영정치원
澹泊明志 寧靜致遠
(담박명지 영정치원)
담백한 밝은 뜻이
편안하고 고요하여 오래 전수된다.
박원범 소장
35. 빈이무첨 부이무교
貧而無諂 富而無驕
(빈이무첨 부이무교)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는다.
일본 동경 도립 로카기념관 소장
36. 계신호기소불도
戒愼乎其所不睹
(계신호기소불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간다.
일본 죠신지(淨心寺) 소장
37. 백세청풍
(사토 가즈오 소장)
百世淸風(백세청풍)
백세에 걸쳐 부는 맑은 바람
'충절과 곧은 절개'의 상징으로서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37. 천당지복 영원지락
天堂之福 永遠之樂
(천당지복 영원지락)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다.
안중근의사숭모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