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5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영월서 송전공사 투입 민간헬기 추락 2명 사망
2020년 정부, 코로나19 피해 큰 대구와 경북(경산 청도 봉화) 특별재난지역 선포
2019년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의 이슬람사원 두 곳에서 무슬림 혐오 테러 사망 50명
2017년 삼성중공업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2만150TEU) 건조
2013년 러시아 모스크바 폭설 31cm 3월 강설량 130년 만에 최고
2013년 전남 여수 국가산업단지 대림산업 폭발사고 비정규직 6명 사망 11명 부상
2011년 시리아 내전 일어남,
퇴진촉구시위를 알아사드 대통령이 무력진압, 시리아인권관측소(SOHR 시리아내전감시단체 영국)에 따르면 2018년 9월까지 사망 36만4792명(민간인이 3분의1 어린이2만여명 여성 1만3천여명) 인구2100만명 가운데 난민1200만명, 이 가운데 560만명 시리아 떠남
2009년 예멘, 폭발물 테러... 한국인 4명 사망
2009년 3월 15일 오후 5시 50분쯤(현지시간) 예멘 남동부 하드라마우트주(州)의 고대 도시 시밤에서 자살폭탄으로 추정되는 폭발이 발생해 예멘인 1명과 한국인 관광객 일행 18명 중 4명이 숨졌다.
지난 9일 오후 11시 55분 (이하 한국시간) 에미레이츠항공을 이용해 인천공항을 출발한 16명의 관광객들은 9박10일 일정으로 예멘과 두바이 관광지를 둘러보는 1인당 495만원짜리 여행상품을 이용했다. 특정 단체 소속은 아닌 개인 참가였으며 현지에서는 여행사 인솔자 1명과 요르단에서 건너온 가이드 1명이 동행했다.
이 날 공격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시밤 인근 지역에서 사진을 찍던 중 발생했다.
예멘의 시밤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으로 높이 솟은 진흙벽돌 빌딩이 있어 ‘사막의 맨해튼’이라 불리는 지역이다. 하지만 이 지역을 포함한 예멘은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의 선조들이 살아온 지역으로 끊임없이 테러가 발생해왔다.
2000년 10월에는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폭탄을 적재한 소형 보트를 타고 예멘 아덴항에 정박해 있던 미 해군 구축함 콜 호를 공격해 미 해군병사 17명이 숨졌으며, 2007년 7월에는 예멘 중부 고대 사원에서 자살폭탄테러로 스페인인 8명과 예멘인 2명이 사망했다. 지난해 1월에는 이번 사건이 발생한 하드라마우트주에서 벨기에 관광객 2명이 총에 맞아 숨졌고, 두 달 뒤인 지난해 3월에는 미 대사관을 겨냥한 박격포 공격으로 2명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또 알-카에다 예멘 지부는 올 1월 인터넷에 올린 영상 메시지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와 예멘 지부를 ‘아라비아 반도 알-카에다’로 통합한다고 밝힌 바 있다. 때문에 우리 정부는 예멘을 여행 경보단계 3단계인 ‘여행제한’ 지역으로 지정해 긴급한 용무가 아니면 여행을 가급적 삼가도록 당부해왔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도 3월 초 여행이나 방문 시 신변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운 위험한 나라 8위에 예멘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2008년 삼성 특검: 특검 수사팀은 전용배 삼성전략기획실 상무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하여 조사.
2007년 보잉사의 보잉 747-400 여객기 생산 중단
2006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700번째 수요시위, 세계 8개국 14개 도시 연대집회.
2003년 대북송금 특검법(특별검사제) 공포
2003년 중국 국가주석, 후진타오(胡錦濤) 선출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가 2003년 3월 15일 10기 제1차 회의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을 선출하고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장쩌민(江澤民) 현 주석을 유임시켰다. 전인대 상무위원장(국회의장에 해당)에는 우방궈(吳邦國) 부총리가, 국가 부주석에는 장 주석의 최측근인 쩡칭훙(曾慶紅) 정치국 상무위원이 선출됐다. 이로써 후 신임 주석을 정점으로 하는 중국의 제4세대 지도부가 출범했다.
전인대는 특히 공산당과 행정조직의 ‘연경화(年輕化·연소화)’와 고학력화 추세에 맞추어 지금까지 평균 연령 68세이던 국가중앙군사위원회(위원 8명)의 구성을 평균 연령 63세로 낮추고, 군 간부들의 고학력화를 추구하는 등 향후 5년간 젊은 중국을 만들어보자는 의지를 다졌다.
장쩌민이 중앙군사위 주석에 유임됨에 따라 후진타오가 어느 정도 국정을 주도할지 그 귀추가 주목됐지만, 후진타오는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신 지도부 등장을 내외에 알리고 당·정 최고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새 지도부 구성에 따라 3세대 핵심 지도자인 리펑(李鵬) 전인대 상무위원장과 주룽지(朱鎔基) 총리는 은퇴했다. 전인대는 17일 부총리와 국무원 산하 각 부처 부장(장관) 등 국무원 후속 인선을 마무리한 뒤 18일 폐막했다.
2003년 국방부, 軍복무기간 2개월 단축 발표
2003년 10월 입영하는 현역병부터 군 복무기간이 2개월 단축됐다. 국방부는 2003년 3월 15일 노무현 대통령에게 한 올해 업무계획 보고에서 “국민의 병역의무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현역병 복무기간을 단축키로 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에 따라 육군은 26개월에서 24개월로, 해군은 28개월에서 26개월로, 공군은 30개월에서 28개월로 복무기간이 각각 줄어들게 됐다.
복무기간 단축은 현역에서 전환 복무하는 전투경찰, 교정 경비시설의 경비교도원, 의무소방원 등에게도 똑같이 적용돼 전경·경비교도원은 26개월에서 24개월로, 의무소방원은 28개월에서 26개월로 복무기간이 각각 줄게 됐다.
국방부는 그러나 예비군 복무기간은 현 안보 상황과 예비 전력 소요를 고려해 단축하지 않고 훈련기간을 줄이는 방향으로 예비군 훈련제도 개선안을 올해 안에 마련, 2004년부터 시행키로 했다.
국방부는 이와 함께 현재 중장인 기무사령관 계급을 소장으로 낮추고 육·해·공 3군본부 기무부대를 하나로 통합하며, 총 7명인 기무사 소속 장성을 3~4명으로 줄이는 등 기무사 인원 및 기구를 축소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기무사 개혁도 추진키로 했다.
2000년 초대형 인터넷 연합체 ‘예카’ 출범
한글과컴퓨터가 주도하는 국내 117개 인터넷업체 연합사이트 ‘예카’ 가 15일 출범했다.
예카는 한 번의 로그인으로 회원 업체들의 모든 서비스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한 서비스. 연합을 주도한 한컴 전하진 사장은 “이달 말까지 200개사가 넘는 회원사를 확보할 계획” 이라고 밝혔다. 예카에 참여하기로 한 업체는 네띠앙·드림라인·메디다스·무한기술투자·비트컴퓨터·삼성에버랜드·심마니·하나은행·LG텔레콤·한국오라클 등 모두 117개사.
전 사장은 “기존의 포털·허브사이트가 신규 콘텐츠 첨부나 사이트 링크에 그치는 데 비해 예카 서비스는 회원사간의 정보공유를 통해 맞춤형 정보서비스를 제공할 예정” 이라고 설명했다. 이 서비스는 기업과 소비자간 거래(B2C)는 물론, 기업간 거래(B2B)에도 이용될 예정이다.
1999년 한국 최초 인증기관 한국전자인증 설립
1998년 전 국회부의장 고흥문씨 별세
고흥문 전 국회부의장은 개인사업을 하면서 유석 조병옥 박사를 도운 인연으로 5·16후 정치에 입문한 뒤 정통야당의 길을 한 차례도 벗어나지 않은 한국 야당사의 증인이었다. 광복 직후 조만식 선생의 조선민주당에 참여, 황해도당 재정부장을 지낸 것을 비롯, 야당에서 살림살이를 주로 맡았었다. 진산계의 `참모장` 역할을 하면서 1971년 야당 대통령 후보 지명 때는 40대 기수인 김대중 김영삼씨 간 조정역할도 했으나 당시 유진산 당수와 더불어 김영삼씨를 후원했다. 한때는 야당의 그랜드(개인사무실이 그랜드호텔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계라는 독자계보를 이끌기도 했다.
매사에 무리하지 않고 상식 선에서 처신, 투쟁적인 야당인 보다는 관리자로 인정받아왔다. 약속한 일은 꼭 지킨다 하여 정치일선에 있을 때는 `보증수표`라는 별명을 얻었다. 오랜 계보활동에도 불구, 모나지 않은 성품 때문에 당내 주류, 비주류의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1980년 신군부의 5·17 이후 정계일선에서 강제로 후퇴한 뒤 1984년 해금됐다.
여권으로부터는 국회의장, 국무총리 등의 자리를,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씨 등으로부터 야당 당수 제의를 받는 등 끊임없는 정치복귀 유혹에도 불구, 저술과 신문기고 등의 활동에 전념해왔다. 14대 대선을 앞두고는 당시 야당지도자들의 퇴진과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주장하는 정치발언을 하기도 했다.
1994년 초고속정보통신기반구축 기본계획 수립
1990년 고르바초프, 초대 소련대통령에 취임
고르바초프 소련 최고회의 의장이 1990년 3월 15일 소련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2일 개막한 임시인민대의원대회는 13일 대통령제 도입을 위한 헌법개정안을 압도적 다수로 채택, 14일의 투표에서 고르바초프를 대통령에 선출했다.
신설된 소련 대통령은 군 통수권, 대통령령의 포고권, 수상을 포함한 각료의 임명-해임권, 법안 거부권, 비상시의 특별권한을 부여받아 미국과 프랑스 대통령과 같은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됐다. 고르바초프는 서방세계에서는 높은 평가와 기대를 받았지만, 소련 국내에서는 경제 부진, 민족문제 등으로 난관에 부딪쳤다. 고르바초프는 이러한 난관에 대처하기 위한 강력한 권한으로 소련공산당 서기장 대신에 대통령직을 신설, 취임하게 됐다.
1990년 국제환증서 한도액 인상(25달러→100달러)
1986년 싱가포르,뉴월드 호텔 붕괴
1983년 격번제 버스정차
1981년 프랑스의 영화감독 르네 클레르 사망
1980년 수리남 민족군사평의회, 새 수상 임명
1979년 중국군 베트남 철수 완료 발표
1979년 터키 중앙조약기구(CENTO)로부터 이탈 선언
1975년 선박왕 오나시스 사망
1975년 3월 15일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생을 마감했다. 자신의 외동딸과 음식물을 포함한 만물을 황금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처했던 그였지만, 질병과 죽음 앞에서는 그도 어쩔 수 없는 한 인간에 불과했다.
1905년 1월 15일 가난한 나라 터키에서 태어난 그는 17세때만 해도 무일푼의 방랑소년이었다. 그러나 담배수입상으로 일하다 25세 때에 이르러 일약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가 거부로의 첫발을 디딘 것은 1930년대 세계적인 불황이 닥쳐왔을 무렵, 2척의 캐나다 화물선을 사들임으로써 시작됐다. 1930년대 중반쯤 그는 스웨덴으로부터 유조선을 주문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20년에 걸쳐 1백척에 가까운 탱커와 포경선을 보유하기에 이른다. 생전 카지노엔 발도 디디지 않았던 그였지만, 그는 투기적인 포경에 탐닉했다. 이는 곧 부의 부를 창출하며 그를 역사상 세계적인 갑부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땅딸막한 몸집에 연한 색안경을 낀 그는 여성들의 매력을 끌기에 충분했고, 1968년 故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젊은 미망인 재클린여사와 말썽많은 재혼을 하기 전까지 오페라의 여왕 마리아 칼라스 등 유명 여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오나시스의 사생활은 그 대부분이 황금의 방벽에 가려져 있었다. 예컨대 재클린과의 결혼식도 그가 소유한 그리스의 스콜비오스섬 그러했다. 세상의 호기심은 그를 향해 커져만 갔지만, 채워질 수 없었다.
그러던 1973년, 가족비행기의 충돌사고로 아들 알렉산더를 잃은 후 담낭수술을 받는 등 심신의 병을 앓던 그가 이날 기관지 간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기증된 유산을 제외한 그의 막대한 유산의 절반이 외동딸 크리스티나에게 상속되었지만, 그의 딸 역시 평생을 우울증과 약물 복용에 시달리다 세 살배기 딸 아티나양을 홀로 남겨두고1988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1975년 국회외무위 핵무기비확산조약비준안 통과
1974년 지젤 브라질 대통령 취임식
1974년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
1971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설립
1969년 미군부대 병력 피격사건
미군 병력이 GP 앞의 군사분계선 작업을 위해 진입중 공비의 총격을 받았음. 피해(부상 3명) ※ 이틀후 후송하던 헬기추락으로 7명 사망
1969년 중국과 소련, 전바오 섬(珍寶島) 무력충돌 격화
중국과 소련의 동부국경에서 1969년 3월 2일 오전 4시10분 중소 양군이 무력충돌, 쌍방에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충돌이 일어난 국경은 하바로스크 남쪽에 있는 오소리강(소련명 우수리강) 전바오 섬(珍寶島, 소련명은 다만스키섬)이었다.
소련의 국영 타스통신은 `무장한 중국군 300명`, 중국의 베이징방송은 `무장한 소련국경경비대`가 먼저 자국 영토에 침입, 도발했다는 비난성명을 각각 발표했다.
첫날 전투는 다수의 사상자만 내고 막을 내렸지만 3월 15일 다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9시간에 걸친 대접전 끝에 중국은 1,000명의 전사자와 2,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큰피해를 입었으며, 소련의 '프라우다'는 소련군 240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이 섬의 영유권문제는 100년전의 제정 러시아-청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바오 섬(珍寶島)은 면적이 0.74㎢밖에 안되는 작은 섬이지만 소련입장에서 시베리아 개발의 심장부인 흑룡강(아무르강)과 오소리강 일대는 극동전략의 중요한 요충지였다. 중국입장에서도 동북지방의 공업지대와 유전지역인 대경에 가까운 이 지역의 전략적 의미는 매우 컸다.
중소관계 결렬 이후 이 섬의 귀속을 둘러싼 충돌은 자주 있었지만 본격적인 군사충돌은 처음이었다.
중소 양국의 국경분쟁은 1956년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면서부터 불거졌다. 당시 마오쩌둥은 '소련 수정주의'라며 모스크바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1958년 소련이 중국 내에 장파(長波)무선국 건설과 연합 잠수함대 창설을 제안했으나 중국이 주권에 위협된다면서 반대하자 양국의 갈등은 더욱 증폭됐다. 이후 1960년 7월부터 중국에 파견된 소련 기술자 전원이 철수하고 중소 양국의 각종 협정이 파기되면서 양국의 관계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단계로 들어섰다. 양국은 국경지대에 100만 명의 병사들을 배치했다.
소강상태에 있던 국경분쟁이 다시 문제가 된 것은 흐루시초프가 실각하고 브레주네프가 득세한 1964년이었다.
1964년 10월부터 1969년 3월까지 총 4,189건에 달하는 국경분쟁이 발생했으며 진보도의 무력충돌이 중소 양국 국경분쟁의 정점이었다.
국경문제는 고르바초프가 등장하고 나서야 해결됐으며 현재 전바오 섬(珍寶島)은 중국령에 속해있다.
1968년 광화문 복원 공사 기공
1968년 파리 금시장 온스당 44달러로 사상최고시세, 파운드는 대폭락
196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한국 서명
1966년 파월 해군수송단대를 해군수송전대(백구부대)로 증현하고 군사령부 직할로 전환
1965년 쇼팽 피아노 콩쿨대회 열림
1964년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의 결혼
테일러는 시대를 풍미하며 7명의 남자와 8번 결혼을 한 것으로도 화제를 몰고 다녔다. 테일러는 영국 런던에서 미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2차대전 발발 직후인 1939년 미국에 정착했다. 11살때 스크린에 데뷔했고 이듬해 아역스타로 발돋움했다. ‘신부의 아버지’(1950)에서 첫 성인 역할을 하고, ‘젊은이의 양지’(1951)를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록 허드슨과 제임스 딘이 함께 출연한 ‘자이언트’(1956)에서는 정상급 배우로 위상을 다졌다.
테일러가 리처드 버튼(1925~1984)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은 ‘클레오파트라’(1963년 6월 개봉)를 촬영하던 1962년 로마였다. 당시 테일러는 4번째 남자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고, 리처드 버튼은 부인과 두 딸이 있었다.
리처드 버튼은 영국 웨일스에서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3년 연극배우로 데뷔하고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부터 수년간 영국 공군의 조종사로 종군했다. 1949년 영화배우로 데뷔하고 연극에서는 유명한 셰익스피어 연기자로 이름을 날리고 라디오 방송에는 600편의 드라마에 성우로 출연했다.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빠져들어 영화 촬영장에서도 격렬한 애정 표현을 마다하지 않았다. 스캔들이 세상에 알려져 팬들이 부적절한 관계를 비판하고 교황청까지 나서서 비난할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1964년 3월 15일 결혼했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애정과 존중보다 소동과 증오, 과도한 음주로 더 유명했다. 버튼은 상대에 대한 조롱을 자제하지 못했고, 테일러는 욕을 참지 못했다. 사석에서건 대중 앞에서건 가리지 않고 불같이 싸웠다. 그러면서도 밤이면 서로의 품에 안겨 사랑을 불태웠다. 기묘하고도 열정적인 기질로 인해 싸우면서도 서로를 사랑한 것이다.
두 사람은 부부로 지내는 동안 10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이 사라졌다. 싸움이 없어지니 사랑까지 식어 결국 10년간의 폭풍 같은 결혼생활을 접고 1974년 6월 이혼했다. 하지만 이혼은 16개월을 넘지 못했다. 1975년 10월 재결합했으나 예전과 같은 일이 반복되자 결국 9개월 만인 1976년 7월 다시 이혼했다
1963년 군사정부 내각 총사퇴 결의
1963년 육군장교 80여명 최고회의에 앞서 군정 연장요구 데모
1961년 앙골라 흑인 폭동
1960년 3ㆍ15부정선거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선거일인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정권이 대대적으로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정-부통령 후보에는 자유당에서 이승만과 이기붕, 민주당에서 조병옥과 장면이 출마했지만 선거를 얼마 안남긴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가 미국에서 치료받던 중 급사했다.
이제 관심사는 대통령보다는 부통령이 누가 되느냐였다. 4년 전 선거에서 부통령에 당선된 현직 부통령 장면은 이기붕에게는 너무 강적이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이 85세로 고령인 점을 감안하면 부통령은 사실상 준 대통령이었다.
선거결과를 미리 분석한 이승만 정권은 정당한 선거를 통해서는 전혀 승산이 없음을 알고, 관권을 동원한 대대적인 부정선거계획을 세웠다.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정부-여당의 야당에 대한 선거운동 방해사건이 연일 계속됐다.
선거 1년 전에 내무장관에 임명된 최인규는 대대적인 부정선거의 지침을 각급 기관장에게 극비리에 하달했다.
최인규는 직위를 이용해 각급 기관장의 적극적인 선거개입을 강요하고 대기업으로부터 막대한 선거자금을 마련했다.
이러한 음모는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 사본을 민주당에 제공함으로써 폭로됐다.
선거 당일 새벽, 이승만 정권은 4-%나 되는 찬성표를 투표함에 미리 투입해 놓았고, 투표소 안팎으로 무장경찰과 완장부대를 배치했다. 개표 결과 이승만-이기붕 후보가 각각 963만 표(89%)와 833만 표(79%)의 득표로 정-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장면은 184만 표뿐이었다.
그러나 자유당의 이같은 선거부정은 3ㆍ15선거 당일부터 시위를 유발했다.
특히 마산은 시위가 심해 오후 6시부터 마산시청앞에서 시작한 시위가 그날 밤 11시 경에야 강제 해산됐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8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하다는 등 유혈사태를 빚었고,
이날 행방불명됐던 김주열 군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참혹한 시체로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됐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나가 4ㆍ19혁명과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이루어냈다. 최인규 등 부정선거 원흉들은 혁명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1959년 북나이지리아, 영국연방내 독립국으로 발족
1951년 이란, 석유 국유화 법안 가결
이란의회가 이란의 석유를 독점지배하고 있는 영국자본의 앵글로·이란석유회사(AIOC)에 대한 국유화 법안을 1951년 3월 15일 가결했다.
석유 국유화는 모사덱을 지도자로 하는 국민전선이 주도했다. 모사덱은 70세를 넘은 노인이었지만, 장관과 법관 등을 역임한 실력자로 이란 국민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의회는 모사덱을 석유위원회 위원장으로 지명했고, AIOC의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국유화를 지지해 이날 국유화가 가결된 것이다. 게다가 8일 전인 3월 7일 ‘외국의 지원없이 석유 국유화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해 온 알리 라즈마라 수상이 광신적인 이슬람교도에게 암살된 것도 석유 국유화를 촉진시켰다.
팔레비 이란 국왕도 국민전선의 압력으로 무사덱을 수상으로 임명하고 석유 국유화 법안에 서명했다. 모사덱이 석유 국유화에 이어 이란국영석유회사(NIOC)를 설립하자 영국은 ‘이란산 석유판매를 방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한다’고 발표했다. 국제석유자본도 영국에 화답, 이란 석유의 취급을 거부하자, 석유수입에 크게 의존해 온 이란경제는 크게 타격을 입었다. 외화가 부족해지고 수입이 감소하자 국민들 사이에는 반(反)모사덱 목소리가 높아졌다.
1946년 남북이산가족 서신교환 시작
남북이산가족이 1946년 3월 15일 분단 후 처음으로 서신을 교환했다.
이날 남한에서 보낸 서신은 30만2천2백9통이었고, 북한에서 온 서신은 1만5천7백60통이었다.
남북 사이에 서신왕래가 끊긴 것은 한반도가 38선으로 분단된 지 22일만인 1945년 9월 6일이었다.
당시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은 해주우체국에 지시, 전신과 우편물 등을 남한에 보내지 못하게 하고 남한과의 전화통화도 차단했다.
이날 남쪽에서 보낸 서신은 친인척의 안부를 묻는 사적인 내용이 대부분인데 반해 북에서 온 서신의 상당수는 남한에서의 공산혁명을 부추기는 선전물이 주종을 이뤘다. 당시 남측에서 미 군정 소속 장교 1명과 사병 2명, 우체국 직원 3명 등 모두 6명, 북측은 소련 장교 1명, 평양우체국 직원 5명 등 6명이 각각 우편물 수송을 담당했다.
이들은 기동차에 우편물을 싣고 개성역에서 만나 우편물을 교환했다.
이후 우편물 교환장소는 소련측의 요청에 따라 38도선에서 북쪽으로 1백여m 떨어진 여현역으로 바뀌었다.
북측은 6.25 이틀전에 서신교환을 일방적으로 중단함으로써 이산가족들은 2001년 3월15일 이산가족 서신교환이 이뤄질 때까지 반세기가 넘도록 생사를 모른 채 살아가야 했다
1946년 러치 미군정장관 귀속농지분할매각 발표
1945년 프랑스 소설가 피에르 드리외라로셸 자살
1941년 총독부, 학도정신대 조직
1939년 독일군, 보헤미아-모라비아 점령해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1937년 미국 시카고의 쿡 카운티 병원, 세계최초 혈액은행 설치
1932년 아폴로 12호 우주비행에 참여한 미국의 우주비행사 빈 출생
1928년 일본, 공산당원 1천여명검거
1923년 미국 WEAF국, 최초로 음악 광고방송 실시
1920년 시인 초정 김상옥 출생
1919년 일제, 호세-가옥세 부과 개시
1919년 수필가 전숙희 출생
1910년 독립운동가 오광심(김학규의 부인) 출생
1894년 아프리카에 관한 독일-프랑스 협정 성립
1887년 경과정시 실시
1874년 제2차 사이공조약 체결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됨
1869년 폴란드 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 뵈치에호프스키 출생
1854년 독일 세균학자 에림 폰 베링 출생
1830년 독일 작가 하이제 출생
1820년 메인주, 미연방 23번째 주로 편입
1815년 나폴레옹 다시 황제에 즉위
1767년 미국의 제7대 대통령(1829-37 재임) 잭슨 출생
1521년 스페인 탐험가 마젤란, 필리핀 발견
포르투갈 출신의 스페인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1521년 3월 15일 필리핀을 발견했다.
1519년 8월 10일 역사상 최초의 세계일주를 위해 스페인의 세빌랴를 출항한지 1년 6개월 만이었다. 앤티워프 출신 상인의 경제적 지원과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의 허락을 받고 시작한 탐험에는 다섯척의 선박과 270명의 승무원이 동원됐다.
1520년 11월 28일 남미 남단과 푸에고 제도 사이를 통과해 태평양에 이른 마젤란은 수개월동안 서진(西進)을 계속해 1521년 3월 초에 괌섬을 발견했고 이날 필리핀을 발견했다.
필리핀 레이테만의 즈르안섬에 도착한 마젤란은 세빌랴에서 데리고 온 수마트라 출신 노예의 통역으로 원주민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세부에서는 군주와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스페인 왕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
그러나 마젤란은 4월 27일 섣불리 막탄섬을 공격하다가 부하 12명과 함께 전사했다. 나머지 선원들이 세빌랴에 도착한 것은 1522년 9월 8일이었고 생존자는 18명이었다. 비록 마젤란 자신은 세계일주를 하지 못했지만, 그는 인류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의 지휘자였다.
1493년 콜럼버스 제1차 탐험 마치고 귀항
1437년 조선, 월식 발생
493년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족 출신의 이탈리아 왕 오도아케르 피살
351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사촌동생 갈루스를 부제로 삼아 로마 제국 동부를 다스리게 함.
221년 유비가 스스로를 정당한 한나라의 정통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스스로 촉한의 황제에 즉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