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일이 있어 아침 일곱시 전에 집을 나서 군산에 다녀왔습니다.
평상시에 늘 기차로 이동하는 걸 좋아하는지라 우선 서대전역으로 버스로 이동한 후
하루에 한 번 있는 서대전>군산 직통 무궁화호(07:50발)를 타려고 했는데
서대전역 근처 버스 정류장에 내린 것이 일곱시 45분 무렵
어쩔 수 없이 우산을 들고 빗속을 약 200미터 쯤 달려야 했지만
다행히 이미 정차해 있던 열차에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어젯밤 늦게 갑자기 어느 대학원생의 학위 논문 초록 영문 번역 의뢰가 들어와서
오늘 아침까지 해달라고 하길래 투덜대며 작업해서 끝낸 것이 새벽 2시 무렵
그제서야 잠을 청하려 이불 깔고 불 끄고 누우니 신기하리만치 퍼펙트하게 잠이 안 왔습니다.
그러게 얼마전에 일본서 사온 호오지차라는 걸 저녁에 주전자로 끓여 마신 탓에 카페인이 작용한 듯 했습니다.
그래도 잠을 청해 볼 요량이었는데 이번엔 어디서 들어왔나 모기가 웽웽 귓가에서 울어대서
일어나 불을 켠 후 모기를 쫓아 죽인 후 다시 잠을 청하려 했더니 어디선가 또 한마리 모기가 웽웽
나를 미치게 합니다.
어쩔 도리없이 또 일어나 모기를 찾아내 철퍼덕 눌러 죽인 후 시계를 보니 3시 30분
그리고 나서 다시 누워 자다깨다 여섯시 반에 일어났던 터였습니다.
그래도 밀린 일이 있어서 기차에서 자지 못하고 노트북으로 일해야 했습니다.
서대전역에서 군산으로 가는 기차는 익산까지가 호남선, 익산부터 군산까지는 장항선을 탑니다.
서대전부터 이어지는 역은, 계룡, 논산, 강경, 함열, 익산, 대야 등입니다.
주변에 높은 산도 별로 없고 기찻길 따라 이어지는 풍경은 대부분이 논과 낮은 야산입니다.
날씨가 좋은 날은 그 풍경을 느긋이 감상하며 철커덩철커덩
이제는 이름도 낯선 완행 열차의 여유라는 것을 즐길만 하긴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가을비 내리는 날, 회색 하늘 아래 한적하니 텅 빈 논만이
뿌옇게 서리 낀 차창 너머로 눈에 들 뿐이었네요.
군산 법원 앞에서 친척 어른들을 뵙기로 되어 있어 버스를 타고 법원으로 향했는데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친 후 버스에서 내려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법원으로 갔지만
정작 어른들은 한참 뒤에 도착하셨습니다.
볼 일을 마치고 다시 대전으로 돌아가려 군산시외버스터미널에 들어선 것이 10시 35분
대전으로 직접 가는 시외버스가 있지만 또 기차를 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군산역에서 대전으로 직통으로 가는 열차는 저녁 일곱시 무렵 딱 한 차례가 있을 뿐
굳이 기차를 타려면 군산에서 익산까지 장항선을 타고(한두 시간에 한 대 꼴) 익산으로 가서
서대전역으로 가는 호남선 열차로 환승해야 해서 불편하고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게다가 군산역은 군산 시내에서 먼 외딴 곳에 있기도 해서
우선 군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로 익산으로 이동한 후
익산에서 호남선을 타고 서대전역으로 돌아오는 경로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익산행 버스 시간표를 보니 10시 35분에 차가 떠나는 걸로 되어 있고
탑승장을 보니 익산행 버스가 승차 출입구를 닫고 마악 출발하려는 중이었습니다.
또 후다닥 달려가서 떠나는 차를 붙잡고 올라탔습니다.
스마트폰 열차 예약 앱으로 검색을 하니 익산에서 서대전으로 가는 호남선 무궁화호는 11시 14분에 익산 발차
군산에서 익산까지 차로 대략 30분 걸리니 음 또 시간이 아슬아슬합니다.
버스가 익산역 삼거리 건너편에서 신호대기에 걸렸을 때는 11시 10분
어서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렸지만 신호는 한참 뒤에나 바뀌었고
좌회전해서 공사중인 익산역 광장 한 켠에 내려선 것은 11시 12분
14분 차를 탈 수 있을까 고민할 새도 없이 무작정 전력으로 약 200미터를 달렸고
계단을 날듯이 뛰어 올라 다시 날듯이 뛰어 내려 플랫폼에 서니 눈 앞에서 무궁화호 승강구가 닫혔습니다.
다행히 옆에 있던 역무원이 당황해 하는 나를 보고는 어디론가 무전을 쳤고
무궁화호 승강구가 다시 열린 후 나는 구원열차 올라타듯이 무궁화호에 승차한 후
턱까지 차 오른 숨을 돌리려 객차와 객차 사이 데크에서 한참 거친 숨을 몰아쉬어야 했습니다.
그 때 문득 떠오르기를
'나도 마흔이 넘었는데'
그렇게 오래 거친 숨을 내쉰 다음에야 진정되어 객실로 왔고 다시 노트북을 펼쳐 번역을 했습니다.
서대전역에 도착해 오후에 만나기로 한 사람과의 약속 시간이 조금 여유가 있어
혼자 점심을 사 먹고 느긋이 걸어서 대전역 근처까지 약 3킬로미터를 우산을 쓴 채 걸었습니다.
대전역 앞 아카데미 극장 1층 휴게 공간 같은 데 앉아서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다시 노트북을 켜고 일하려 했더니 벽에 있는 콘센트에 전원이 안 들어왔습니다.
그 한 켠에 두꺼비집이 있고 거기 중간 스위치가 내려져 있길래 올린 후 전원을 연결하니 전원이 들어옵니다.
친구를 기다리며 일하는 중에 어떤 초로의 남자가 와서 다짜고짜
'왜 남에 집 전기를 맘대로 써' 따지길래 나도 '이 극장이 어떻게 당신 집이냐'고 맞받아쳤더니
그 양반은 10층 가까운 극장 건물이 다 자기 집이라고 우겨대기 시작하고
어디서 몰려든 아줌마들인지 서너명의 아주머니들과 함께 나를 도둑놈 취급하기 시작
시간 되어 찾아온 친구는 나를 편들어 상대방 아주머니 및 초로의 남자와 언쟁을 벌이고
어느샌가 나는 그 친구와 상대편 다수 사이의 말싸움을 말리는 입장이 되어 있고
한창 말싸움에 신이 난 친구를 뜯어 말겨 나오는데 내 친구 뒷통수에 대고 그 초로의 남녀들이 하는 말이
'야 이 아줌마야! 아줌마 같으면 남이 자기 집 와서 전기 맘대로 쓰면 좋겄어?'
내 친구더러 아줌마랍니다.
글쎄, 충격이랄까 언제 내 여성 친구 동지들이 아줌마 소리를 들을만큼 늙었을까요
그러게 내가 한국을 떠나 있던 것이 13년(이미 다시 돌아온 지도 2년이 되었지만)이니
그새 아줌마가 되어있는 것이 당연할 듯 한 것도 같고
그래도 애들 얼굴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어 보이는데 노인 양반한테도 아줌마라 불리다니...
아직도 잠도 몇 시간 안 자고도 일할 수 있고
전력달리기를 아침 점심으루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데 그런 내 친구가 아줌마?
언제부터 인심이 이리 각박해져서
극장 관객 대기실에서 전기 콘센트에 노트북 꽂고 일하는 것도 금지사항이 된 건지
언제부터 내 여성 친구들이 아줌마가 된 건지
우울하고 퇴폐적이긴 하였으나 무엇을 하여도 치열하고 에너지가 넘쳐났던 20세기 말의 세상을
변함없이 나는 아직도 전력 달리기로 살고 있는 터이건만
어찌하여 세상은 늙고 각박해져 가는 것인지
그래도 굳게 믿거니와 이 가을 우리는 여전히 청춘
첫댓글 지인이 낯선 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으면 말리는 척하며 은근슬쩍 끼어들어 대판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저도 이제 아줌마가 되었나 봅니다 ...
거울을 보며, 그리고 훌쩍 커버린 딸내미를 보며 자신이 늙어버렸다고 한탄을 했었는데 인터넷 검색하다 우연히 '남은 여생을 알려주는 시계' 라는 걸 발견했네요. 요거 해보니 아직 살아야 할 날이 살아온 날보다 많구나 싶어 다시 홧팅하기로..ㅎㅎ
기차 타려고 전력으로 달리기하는 장면이 제이슨 본 시리즈를 보는 듯하네요. ㅋㅋ 대단하십니다.
제이슨 본 걔보다 제가 더 바빠요
러시아 일본 중국 한국 등에서 발급 혹은 재발급 받은 패스포트(다 한국 겁니다)가 네 개고
미국 중국 스위스 일본 한국 등에 은행 계좌(이름은 한자 한글 알파벳 등 각가지지만 다 뽀뽀뽀 본인 것)가 있습니다
책상에는 원과 달러 엔 위안 유로 등이 정리되어 있고(저가 지폐 및 동전이 대부분) 각각 구분되어 보관되고 있습니다
영어 중국어 불어 일본어 몽골어로 여자들한테 농담도 하면서
지금도 툭하면 저를 위협하거나 도와주는 각 국의 에이전트들이 있고
가끔 기억 상실증도 걸리고(술먹은 다음 날은 특히) 시내버스타듯 비행기 타고 다닙니다
거기다 맨날 숨어서 비밀 문서 번역하는 일도 하고 있어요
진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고 바쁘게 사시는 것 같아요. 글을 읽는 제가 숨이 다 차오를 지경이라는 ㅎㅎ
근데 노트북 잠깐 연결해서 쓴다해도 전기비는 몇백원도 안 나올텐데 너무 인심이 각박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