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6일 오늘의 역사
2023년 튀르기예 폭우로 엄청난 피해
지난달 초 지진으로 무려 4만 5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튀르키예.
이번에는 튀르키예 동남부 산리우르파와 아디야만 지역에 홍수가 발생해 최소 10명이 사망했다 지금까지 집계된 실종자도 10명 안팎.
지진 이후 이재민을 위해 세워진 텐트와 컨테이너 단지에 홍수가 덮치면서 피해가 커졌다
2022년 일본 후쿠시마 앞바다 진도 7.3규모 지진 발생
2022년 북한 화성17호 미사일 발사 평양상공서 폭발 파편비 쏟아져 주민피해
2021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총격 사건발생 한국계 4명 사망
2021년 3월16일 오후 5시 경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연쇄 총격 사건이 일어났다.
애틀랜타의 마사지샵 세 군데에서 총격이 잇따라 발생했는데 총격으로 지금까지 총 8명이 사망했는데, 외교부는 그 중 4명을 한국계로 확인했다.
이는 애틀랜타 북부 애크워스에 위치한 마사지샵에서 첫 총격이 일어났으며 5명의 아시아계 사람들이 총에 맞았는데 2명은 현장에서 숨졌고, 3명은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2명이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5시 50분쯤 경찰이 범행 신고를 받고 출동했는데 애틀랜타 체로키 카운티에 있는 또 다른 마사지샵에서 총에 맞은 3명이 숨진 채 발견됐으며 이 마사지샵 건너편에 있는 또 다른 마사지샵에서도 총격이 일어나서 1명이 사망했다.
2017년 필리핀 야당하원의원들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 탄핵안 발의
2008년 안양초등학생 유괴·살인사건 용의자 검거
2007년 12월 25일 실종됐던 안양초등학생 이혜진(11)양과 우예슬(9)양은 실종 당일 오후 3시30분쯤 안양시 만안구 안양8동 우양파크빌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헤어진 뒤 오후 4시10분쯤 안양8동 안양문예회관 앞 야외공연장을 지나는 모습이 CC-TV에 잡혔다. 그리고 오후 5시쯤 문예회관 인근 상가주인에게 목격됐지만 이후 실종됐다.
이 양과 우 양의 부모는 26일 오전 0시20분쯤 경찰에 미귀가 신고했다. 경찰은 범죄 피해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다음날 수사본부를 설치해 비공개 수사를 벌였지만 성과가 없어 31일 공개수사로 전환했다.
그러다 실종 77일만인 2008년 3월 11일 수원시 권선구 호매실동 과천-봉담간 고속화도로 호매실나들목 인근 야산에서 향토방위훈련 중이던 예비군에 의해 암매장된 여자 아이의 토막시신이 발견됐다. 이 양의 시신이었다.
이에 경찰은 다시 이 양의 집 주변에서 홀로 사는 남성과 우범자 등을 대상으로 탐문수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이 양의 집과 130m 떨어진 곳에 혼자사는 정성현(39.대리운전기사)씨가 실종 당일 오후 렌터카 회사에서 하루동안 차량을 빌린 사실을 주목하고 정씨가 빌렸던 차량을 조사해 트렁크에서 혈흔을 확보, 이 양과 우 양의 것으로 확인되자 바로 검거에 나섰다.
16일, 경찰은 사건 발생 82일, 이 양 시신 발견 닷새만에 충남 보령에 있는 정씨의 모친 집에서 정씨를 붙잡았다. 사건발생 82일 만이다
조사결과 2004년 7월 경기 군포에서 정모(여·당시 44세) 씨를 때려 숨지게 한 뒤 시신을 버린 추가범행이 밝혀진 정씨는 정모씨 및 이양과 우양을 유괴ㆍ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하고 버린 혐의로 구속 기소돼 2009년 2월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2003년 세계적인 평화운동가 틱낫한 스님 방한
2003년 3월 16일 모자를 벗어 왼손에 든 틱낫한 스님은 “평화를 실천하기 위해서 왔다”며 두 손을 모았다.
시인이자 평화운동가이며 불교계의 지도자인 틱낫한 스님은 한국에서의 500시간을 이렇게 시작했다.
서점가에는 ‘틱낫한 붐’이 일어 수많은 그의 저서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강연장은 그를 보려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는 특유의 ‘명상 완보(緩步)’ 로 전국을 돌며 고통받고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대구에서는 지하철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천도재에 참석해 “마음속 자비를 끌어내 슬픔에 잠긴 이곳에 퍼뜨리자”며 두 손을 모았고, 광주에서는 민주화의 성지 5·18묘역을 참배한 데 이어 ‘내 안의 평화 그리고 화해’를 주제로 강연했다.
스님은 특히 한반도 분단과 반전·평화 운동에 큰 관심을 보였다.
방한 중 이라크전 발발 소식을 접한 그는 그날 밤 숙소인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깊은 명상에 잠겼다고 한다.
북한 핵 위기와 관련해서는 “북한이 굶주린 상황에서도 핵개발에 많은 군비를 들이고 있다면,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라며 “남과 북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우리는 형제라는 씨앗이 깃들어 있으니 그 씨앗에 물을 주면 평화가 시작되고 꽃을 피울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자신의 저서를 읽고 감동받은 독자들과의 만남의 자리도 가졌다. 특히 조선일보가 주최한 서울 코엑스 강연에는 3000여명의 인파가 몰려 성황을 이뤘다. 지난 1995년 첫 방한 당시 한국불교의 오랜 전통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그는 이번에도 만사를 제치고 한국의 명찰과 고승들을 방문하고 싶어했다. 백양사와 송광사·범어사·실상사를 잇달아 방문한 그는 “한국 절에서 듣는 독경 소리가 참 아름답고 귀에 익숙하다”며 “여러 전생 가운데 한 번쯤은 한국에서 승려였던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19박20일의 긴 일정을 마치고 4월 4일 프랑스 ‘플럼 빌리지’로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2001년 박충훈 전 대통령 권한대행 별세
박충훈 전 대통령 권한대행은 1980년 5월 21일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된 뒤, 그 해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자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 전 전 대통령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8월 27일까지 12일 동안 재직했다.
5공이 출범한 이후 1981년부터 1988년까지 국정자문위원으로 5공의 ‘원로’로 예우를 받았다. 그는 제3공화국의 대표적인 경제관료 출신이었다.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추진 등을 통해 수출 및 공업화의 기반을 닦았다.
1919년 제주에서 태어나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와 일본 교토 동지사 상고를 졸업하고, 1948년 상공부 무역국장을 거쳐 1953년 군에 들어가 국방부 경리국장 등을 지낸 뒤 소장으로 예편했다. 1961년 상공부로 복귀, 1963년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상공부 장관으로 발탁돼 장관을 두 번 역임하고 1967년 10월부터 1년 8개월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냈다. 계엄군의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에서 계엄군의 입장을 대변했고, 신군부 정권 장악 과정에서 권력 이양과 국정 관리 역할을 맡았다.
2001년 이규혁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남자 1,500m에서 세계신기록 수립
스피드 스케이팅 간판 스타 이규혁 선수가 남자 1500m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2001년 시즌 들어 500m 한국타이 1개, 500m 한국신기록 2개, 1000m 한국신기록 3개에 이은 쾌거였다. 2001년 3월 16일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올림픽 오벌 피날레 국제대회 남자 1500m에서 이규혁은 1분45초20을 기록, 야코 얀 레에반그(네덜란드)의 종전 세계최고기록(1분45초56)을 0.36초나 단축하며 1위를 차지했다.
지난 1997년 월드컵 1000m에서 한국선수로는 최초로 세계신기록을 세웠던 이규혁은 이날 중장거리 전문 유스케 이마이(일본·1분45초49)와 레이스를 펼쳐 세계최고기록을 세우며 자신의 23번째 생일을 자축했다. 이규혁은 6살 때 스케이팅을 시작했다. 부모도 스피드 스케이팅과 피겨에서 나란히 국가대표 선수 및 감독을 지냈고, 동생 이규현도 피겨 국가대표인 빙상가족 출신이다
1995년 한국-체코 투자보장협정 체결
1994년 생수 시판 허용
1994년 3월 16일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가 지금까지 금지되어 온 생수의 국내 시판을 공식 허용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생수가 일반 시민들의 곁에 한발짝 더 다가서게 됐다.
보사부는 발표문을 통해 현재 전량 수출 및 주한 외국인 판매를 조건으로 생수 제조 허가를 받은 14개 업체는 허가 당시의 제조시설 및 수질 기준 적합 여부를 확인받는대로 시판할 수 있도록 하고, 무허가 또는 신규업체는 상반기 중에 새로 마련될 시설 및 수질 기준에 따라 새로 허가를 내줄 계획이라고 밝혔었다.
보사부는 생수의 대중광고를 일체 금지했으며, 제품 이름도 생수, 약수, 이온수, 생명수 등을 사용하지 못하고 광천음료수로 명기토록 했다. 보사부는 이와 함께 생수 시판에 따른 무분별한 지하수 개발 등 환경 훼손을 막기 위해 지하수 환경영향조사제도를 도입하고 생수에 수질개선부담금을 부과, 이를 수돗물 수질개선사업에 활용토록 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보사부가 함께 발표한 광천음료수 제조업 시설 기준에 따르면 수질 관리를 위해 취수정은 쓰레기매립장, 공장, 농경지 등 오염원에서 2백m 이상 떨어지도록 했다. 또 수질 기준은 잔류염소의 불검출 1백㏄당 대장균 20마리 이하(수돗물 기준 1백마리)등을 제외한 대부분을 수돗물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도록 했다.
1983년 최초의 한미합작은행인 한미은행 업무 개시
1982년 중앙청 국립박물관으로 정부청사 이동 결의
1981년 중국서 1억 6천만년전 공룡화석 발견 보도
1981년 제3세계 연극제 서울서 개막
1981년 3월 16일 제5차 제3세계 연극제 및 회의가 문예진흥원 문예회관에서 개막됐다. 개회식에는 문공부장관, 문예진흥원장, 국제극예술협회(ITI)사무총장, 제3세계분과위원장과 세계30여개국대표, 국내연극인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극동에서는 최초로 열리는 이번 연극제는 10개국 11개 단체와 각국대표 30여명이 참가했다.
1979년 중국군, 베트남에서 철군 완료
1979년 한일대륙붕운영권자 추첨
1978년 알도 모로 전 이탈리아 수상, ‘붉은여단’에 납치-피살
알도 모로 전 이탈리아 수상이 1978년 3월 16일 도시게릴라 ‘붉은여단’에 납치돼 55일 만인 5월 9일 로마중심가의 자동차 안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모로씨는 이날 아침 집에서 국회로 가는 도중 ‘붉은여단’의 공격을 받고 납치됐고, 그당시 그의 경호원 5명은 현장에서 피살됐다.
범인들은 이탈리아의 수상을 5번이나 역임하면서 나라 정계의 중심역할을 해온 모로씨를 납치 한 후 ‘붉은여단’ 소속 게릴라 15명을 석방 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부당국은 끝내 범인들과의 타협에 불응했다. 이 사건과 관련, 프란체스코 코시코 내상이 사임하는 등 이탈리아 정부는 한 때 위기에 봉착했었다.
1977년 검인정교과서 부정사건
중-고등학교 검인정교과서 발행을 둘러싸고 업자들이 문교부관계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책값을 비싸게 책정, 엄청난 폭리를 취해왔음이 치안본부 수사결과 밝혀졌다.
한국검인정교과서주식회사가 문교부와 국세청직원들에게 1974년부터 3천3백여만원을 주고 중-고등 검인정 교과서의 가격인상, 내용수정, 성실법인 지정 등 특혜를 받아 거액의 부당이득과 탈세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현직 문교부 직원 7명과 세무공무원 4명, 그리고 한국검인정교과서소속 중등교과서주식회사 대표와 고등교과서주식회사 대표 등 모두 13명을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 및 중수뢰 혐의로 구속하는 한편, 감사원과 문교부에 검인정교과서 가격 및 공급체계를 재조정토록 했다.
치안본부에 따르면 문교부 직원들은 검인정교과서 가격을 사정할 때 영업비 공급수수료 등을 터무니없이 높게 인정, 제작비 이윤 등을 합쳐 1백50원인 것을 3배나 비싼 4백원으로 책정했고, 헌책을 사용치 못하도록 하기 위해 교과서 내용을 해마다 약간씩 수정토록 하고, 교과서를 단일본화해주어 독점케하는 등의 혜택을 베풀어주고 국장급은 5백만~6백만원, 과장급은 2백~3백만원, 계장급이하는 1백만~2백만원씩 받았고, 추석이나 연말에는 조건없이 떡값으로 30만원~1백만원씩 받았다는 것이다.
1973년 외무부, 중공과 대륙붕 협의용의 표명
1969년 베네수엘라 여객기 추락 155명 사망
1969년 주문진에 무장간첩 침투
1969년 무장간첩 6명이 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읍 소재 강남여인숙에 침입, 방첩대원이라 사칭하고 투숙자 9명의 주민등록증 4매, 승선증 1매, 공무원 신분증 1매, 숙박부 1권을 탈취하여 갔다.
그 후 1시 20분경 무장간첩 중 4명이 육군대위, 중사, 병장복장과 사복차림을 하고 강남여인숙으로부터 800m 정도 떨어진 전투경찰대 주문진 선박통제소에 침입하여 당시 근무 교대 중이던 206전투경찰대 소속 순경 2명과 사환 1명을 인질로 삼았다. 그 후 간첩들은 통제소에 비치된 무전기와 라디오를 파괴한 후 책상 밑에 시한폭탄을 장치하고 전원 방파제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1시 40분경 어선통제소에 결박당해 있던 사환의 신고로 시한폭탄을 제거하였고, 무장간첩들에게 끌려가던 순경도 탈출하였다.
1969년 3월 19일 1시 40분경 무장간첩 출현 신고를 접한 주문진지서장은 경찰관과 예비군을 비상소집하여 도주로를 차단하고 주변을 수색하였다. 또한 순찰근무를 마치고 어선통제소로 돌아온 두 명의 순경이 방파제 쪽으로 출동하였다. 이와 동시에 신고를 접한 순경과 군인들이 방파제로 출격하였고, 아침 8시 30분경 주문진 앞 해상에 떠 있는 고무보트를 추격하여 집중 사격하였다.
206전투경찰대 염관수 순경이 순직하였고, 민간이 1명이 피살되었으며, 이웅재 순경과 민간이 2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전과로는 무장간첩 9명 사살, 시한폭탄·카빈·기관단총·수류탄 등을 노획하였다.
1968년 미군, 남베트남 쾅가이성 밀라이 마을에서 주민 500명 학살
1968년 3월 16일 남베트남 쾅가이성成 밀라이(My Lai)마을에서 미군이 무고한 주민 500여 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아침 미 제11보병여단 소속 찰리 중대원 60~70명은 9대의 헬리콥터를 타고 남베트남해방전선 게릴라들을 색출할 목적으로 밀라이 마을에 착륙했다.
마을에는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들만이 아침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대장 캘리 중위를 비롯한 미군들은 주민들을 마을 광장에 모은 뒤 총격을 가해 주민 500여 명을 학살했다.
4시간에 걸친 학살극은 헬리콥터 조종사가 상급부대에 보고한 뒤에야 중단됐다.
이 사건은 당초 군비밀로 베일에 가려 있었지만 1969년 3월 현장에 있던 병사에게 사실을 전해들은 한 제대군인이 워싱턴에 편지를 보내고, 이 사실을 눈치 챈 시모어 허시 기자가 11월 17일자 '뉴욕타임스'에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은폐됐던 사건은 의회와 국방부 조사에 의해 사실로 드러났으며 미국을 충격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지휘 라인에 있던 14명이 기소됐지만 캘리 중위만 재판에 회부됐다.
캘리는 미 군법회의에서 부녀자와 노인 등 22명을 살해한 혐의로 종신노동형 선고를 받았고 복역 사흘째 되는 날에는 닉슨 대통령의 석방 명령으로 풀려났다.
캘리가 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캘리 혼자서 죄를 뒤집어 쓴다는 것은 이해가 안된다는 여론이 형성됐기 때문이었다.
1966년 미국 제미니8호 발사, 궤도를 돌던 아지나 로케트와 최초 우주도킹 성공
미국의 2인승 우주선 제미니 8호와 궤도를 돌던 무인위성 아제나 로케트가 1966년 3월 16일 세계최초의 도킹에 성공했다.
역사상 두번째 도킹은 1967년 10월에 구소련의 코스모스 186호와 188호 사이에 이뤄졌고, 세번째는 1968년 4월에 역시 구소련의 코스모스 212호와 213호 사이에 이뤄졌다. 둘다 무인 자동 도킹이었다.
도킹은 2개의 우주 비행체가 서로 접근해 상대 속도가 0이 되어야하고, 서로의 도킹 장치가 결합할 수 있도록 위치와 방향이 맞아야 한다. 도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랑데뷰가 전제되어야 한다.
랑데뷰는 2개의 우주선이 우주공간에서 만나 서로 나란히 비행하는 것이다. 제미니 8호의 도킹 성공으로 우주개발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1964년부터 1966년까지 총 12회 발사된 제미니 계획은 모두 16명의 비행사가 동원됐으며 투입비용은 11억달러가 소요됐다
1963년 박정희의장, 군정4년 연장 가부 국민투표실시 선언, 정치활동 금지
1962년 수퍼 콘스터레이션기 추락, 107명 사망
1962년 정치활동정화법 공포
5.16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이 기존세력의 정치활동을 묶어놓기 위해 계엄령과 각종 포고령으로 대부분의 기존정당과 사회단체를 해산시키고 이들의 집회결사를 금지시켰다.
박 정권은 정치규제를 위해 1962년 3월 1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의거, 특별법을 제정했다. 일명 `정치활동정화법`이다. 이 특별법은 박 정권이 구 정치인 및 군부 내 반대세력의 정치활동을 막고 자신들의 정치세력을 키우기 위한 초법적인 수단이었다. 이 법에 따라 정치활동이 봉쇄된 사람은 4천3백74명. 여기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쫓겨난 전 군지도자와 군정에 비판적인 언론인을 비롯, 자유당 민주당 등 야당지도자, 전직 고위관리, 부정축재자, 남북학생회담 관련 학생지도부 등이 망라돼 있었다. 이들에게는 6년 간 공직선거 출마나 선거운동 참여, 정치집회 연설 등 일체의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윤보선 대통령은 정치정화법으로 민간정치인들의 공민권이 제한받는데 반발, 전격적으로 사임을 발표했다. 최고회의는 이를 즉각 받아들여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을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리에 앉혔다. 정치정화법 제정으로 민간정치인들의 발을 묶어놓은 가운데 군사정권은 민정참여에 대비, 김종필의 중앙정보부 주도아래 비밀리에 창당을 위한 사전조직 준비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1962년 소련, 우주차량 발사
1958년 북한내 중국군 제1진 철수
1957년 유엔군, 이집트 경찰에 가자지구 치안권 이양
1956년 한국, 세계기상기구(WMO)가입
1955년 미국, 얄타회담 비밀문서 공개
1951년 6.25전쟁 중 서울 재탈환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고 불의의 일격을 당한 우리군은 손쓸 새 없이 후퇴를 거듭하다 3일 만인 6월28일 서울을 내주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0일 만인 1950년9월28일 서울을 다시 수복했지만 파죽지세로 공격을 거듭하던 UN군은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후퇴 하였다
결국 1951년 1월4일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되는데 이 사건이 그 유명한 1.4후퇴이다
그해 2월 중공군의 4차 공세 후 UN군의 반격작전이 실시되고 3월7일 미 제1군단이 서울공격을 개시하였다
이후 한국군 1사단 정찰대가 3월14일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3월15일 미 8군사령관의 서울탈환 및 추격 명령에 따라 공격하여 3월16일 13시 시울 전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1948년 북한-중국 비밀군사협정 체결
1940년 스웨덴 여류작가 라게를리프 사망
1937년 영국의 정치가 오스틴 체임벌린 사망. 1925년 노벨평화상 수상
1935년 독일, 베르사유조약 파기 선언
1935년 3월 16일 독일의 수상겸 대통령인 아돌프 히틀러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방적으로 베르사유조약의 파기와 대규모 재군비를 선언했다.
1차대전이 끝나고 1919년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서 체결된 베르사유조약은 전승국들이 자기네 이익과 패권을 앞세워 패전국들에 일방적으로 불이익을 강요한 결과물이었다. 특히 독일에 대해서는 해외 식민지와 일부 영토의 박탈, 군비제한, 전쟁배상금 지급 등 보복성이 강한 조치가 취해졌다.
가혹한 강화 조건이 초래한 전쟁 후유증으로 결국 독일에는 나치정권 등장과, 군비증강, 팽창정책으로 이어졌다. 독일을 약화시켜 굴복시키려던 영국과 프랑스 등 열강의 지나친 견제 전략은 실패로 돌아가고 역효과만 키운 꼴이 되었다. 이같은 사태 발전은 군사적 힘의 우위에 도취한 전승국들이 국제 외교의 주도권을 잡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에 바빠 패전국들의 입장을 무시하고 무리한 의무를 강요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독일정부가 이날 징병을 재개할 것이라고 발표하자 나치의 통제하에 있던 독일 언론은 ‘베르사유는 끝나고, 독일은 다시 자유를 갖게 되었다.’ ‘독일국민들은 오로지 독일군대의 재탄생에 의해서만 군사화되어 가고 있는 유럽으로부터 보호될 것이다.’라는 내용의 기사로 나치정책을 뒷받침했다.
1931년 일본의 소설가 미우라 데쓰오 출생
1926년 로버트 고다드, 세계최초로 3단식 로케트 발사
미국 클라크대 교수인 로버트 고다드가 1926년 3월 16일 세계최초로 우주비행의 길을 여는 액체연료 로켓 발사에 성공했다.
고다드는 1925년 12월에도 5.5kg의 액체추진 로켓을 쏘아올렸지만 공식적인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이날이 세계최초의 액체 추진 로켓을 발사한 날로 기록됐다. 발사실험은 매사추세추주의 어번 농장에서 행해졌다.
이날 농장은 눈이 쌓였고 바람도 강했다.
이 때문에 발사대 주위에는 방풍용 판이 설치됐다.
비행시간 2.5초, 비행거리 56m, 최고시속 90Km를 기록한 3단식 로켓의 길이는 3m였고 아래로부터 가솔린 탱크, 액체산소 탱크, 가장 위에는 로켓 엔진이 장착됐다. 액체연료를 최초로 고안한 것은 러시아인이었지만 연구비가 부족해 이론을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에 반해 고다드는 스미소니언의 지원으로 자신의 구상을 현실화해 결국 세계최초의 영예를 얻게 됐다.
이후 고다드는 1935년 3월 28일에 처음으로 자이로스코프 제어장치를 장착한 로켓을 평균 시속 880km로 1,400m 상공에 쏘아올렸고, 10월 14일에는 길이 4.6m, 무게 39kg의 로켓을 음속보다 빠른 속도로 2,286m 상공에 쏘아올렸다.
'뉴욕타임스'는 1920년 고다드가 '로켓이 달까지 갈 수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을 때 조롱이 섞인 혹평을 내놓았지만 아폴로 11호가 달에 발을 내딛기 사흘 전인 1969년 7월 17일에는 지면을 통해 당시의 비판을 공식 사과해야했다.
1999년 '타임'은 고다드를 '20세기 최고 지성인 2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하여 그의 공로를 인정했다.
1923년 방정환 윤극영, 동경에서 색동회 조직
1921년 소설가 이병주 출생
1915년 아동문학가 강소천 출생
1911년 소설가 겸 평론가 김남천 출생
1906년 홍주서 제2차 의병운동 시작, 일본경찰과 충돌
1897년 국내우체규칙 반포
1880년 1905년 지리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한말의 의병장 문태수 출생
1839년 프랑스 시인 쉴리 프리돔 출생
1789년 `옴의 법칙`을 발견한 독일의 물리학자 게오르그 옴 출생
1751년 미국의 제4대 대통령 매디슨 출생
1660년 제1차 예송논쟁으로 남인과 서인 대립
1420년 세종대왕 집현전 설치
1406년 제생원서 동녀에게 의약 교육, 기생 명칭이 생김
37년 제2대 로마제국 황제 티베리우스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