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일날이 우리 할아버지 제사날이다.
91년도에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면서
돌아가신 분이 살아 계셨던 마지막날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을 난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돌아가신 날이 기일이 아니고 돌아가신 전날이 제사날이 되는 것이다.
내 생일날이 음력으로 9월 17일인데
언제고 내 생일날이 할아버지 제사날이 된 것은
할아버지께서 욕심이 많으셔서 손자 생일날이 제삿날이 되게 한 것이라고들
어른들은 말씀하신다.
하지만 난 할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을 지금껏 가지고 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난 한 2년이상을 할아버지 꿈을 꾸곤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내 마음 속에 항상 할아버지께 죄송한 추억이 있어서는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할아버지(주식이네 할아버지도 되지..나하고 주식이하고는 사촌이니까)께서는
평생을 단 한잔의 술도 마시지 않으셨다고 한다.
1898년생이시고 1991에 돌아가셨으니
만 93년을 장수하신 셈이다.
술을 전혀 안하시다 보니까 내가 어렸을적 부터 보아온 할아버지는
말씀이 별로 없으시고 웃으시지도 않으시고
오직 일만 열심히 하시는 분이셨다.
한겨울 그 기나긴 밤이면 밤늦도록 발을 메시고(인삼밭 총대에 덮는 밀대발이나 갈대발..)
먼지가 자욱한 그 방에서 걸레질도 안하시고 주무시며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셔서 또 발을 메신다.
아침 저녁으로 소죽을 반드시 끓이시고
(하여튼 우리집 소는 할아버지께서 키우셨다)
낮에는 산에 가서 나무도 해오시고 새끼꼬는 미듭도 베어 오시곤 하셨다.
할아버지 방에서는 언제나 콜록 콜록하시는 커다란 기침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내가 보아온 할아버지 생전의 모습은 항상 그랬던 것 같다.
단 한시도 기침을 떼지 못하시고 기침을 내내 달고 사셨던 할아버지...
여름이면 이른 새벽부터 논에 나가서 일 하시고 아침 드시러 오실 때면
어김없이 소깔 한바작 짊어지시고 들어 오신다.
때론 할아버지께서 일하시다 늦어지시면 우리는 밥을 늦게 먹어 투덜거렸지만
당신이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셨기에 그 시골에 살면서도
우리 7형제들은 다른 집 아이들보다 집안일을 덜 거들면서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던 것임을 지금에사 깨닫곤 한다.
그런분이 집안에 계셨으니 우리 아버지 역시 동네에서 소문난 일벌레셨다.
덩치는 작으시지만 내가 보아온 우리 아버지는 정말 부지런하신 분이셨다.
내가 보아 온 그 어떤 사람도 우리 아버지만큼 일을 많이 하시는 것 난 보지 못 했으니까..
막내 작은아버지가 군대생활 마치며 제대할 때 가져온 완전군장에는 모포,군화,대검,판쵸우의
야전삽,수통,반합,한겨울 보초 설때 끼는 커다란 혹한기용 장갑...등등 총만 없었지
정말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많았었는데.
아버지께서 얼마나 땅을 파시면 일을 하셨는지
일반용 삽보다도 강도가 엄청 강하고 두꺼운 야전삽이 다 닳아져 없어져 버릴 정도였다.
한겨울 밤이면 다른 집들은 불도 켜 있지도 않았지만
잠실방에서는 할아버지께서 발을 엮으시고
대문앞에서는 아버지께서 이엉을 엮으시고
(바람부는 날이 많은 겨울밤...마당보다는 그래도 ㄷ자로 가려진 대문으로 닫혀진 곳에서 일하심)
어머니는 방에서 바느질하시고
난 다른 형제들을 다 자고 있었지만 그 시간에 난 항상 깨어 공부를 하곤 했다..
다른 형제들보다 내가 덩치가 워낙 작아 힘이 딸리니까 다른애들은 몰라도
너만은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펜대잡는 일을 하라곤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키도 작으시고 덩치도 작아서 힘도 부족하고 하니 농사를 지어도
다른 아저씨들 처럼 일도 잘 못하시고 고생은 고생대로 한다는 거였다.
아버지께서는 그 엄동설한에 바깥에서 일하시느라 겨울만 되면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손이 부르터서
엄지손가락 쪽에 하나 나머지 손가락에는 2개씩 한손에 반창고가 총9홉개씩
양손에 18개의 반창고를 부쳐가며 일하시며 발에는 작은아버지가 가져오신 보초용 큰 장갑을 끼시고
일을 하시곤 했는데 내게 가끔
주철아! 너는 열심히 공부해서 아빠처럼 농사꾼 되지 말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펜대 굴려가면서 살아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때로 아버지 따라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기도 했는데
내가 낫으로 손을 베어 피를 흘릴 때면 반창고를 붙여주며
공부를 열심히 하면 어른이 되어서 이런 시골에 살지 않고 도시로 나가서
편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
어쨌든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새벽닭보다 일찍 우리 가족들을 깨우시곤 하셨다.
할아버진 동네에서도 가장 연세가 많으셨지만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오직 일만 하셨던 분...
바로 우리 할아버지다.
동네 할아버지들이나 할머니들 보면 대개는 무게를 많이 잡으시고
마실이나 다니시며 때론 마을회관에 붙어있는 경로당에서
장기두시고 누워계시고들 하셨지만
난 그런 우리 할아버지를 단 한번도 뵌 적이 없다.
아버님의 말씀으로는 집안이 어려워서
할아버님이 젊으셨을 때에 옆집 머슴을 사시기도 하셨는데
그때는 짐을 지게로 짊어지시고 전주까지 걸어서 다니셨다고 한다.
지금도 고향에서 전주라면 차를 타고서도 꽤 걸리는 거리인데
그 당시에는 걸어서 다니셨기에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서면 전주에 짐을 푸시고
다음날 새벽에야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한다.
추운 겨울날에 짐을 짊어지시고 전주에 다녀 오실때 다른 짐꾼들은
주막에서 술도 하시고 주무시고 했는데..
울 할아버지는 술도 못마시고 돈을 아끼느라 주막에서 잠도 안 주무시고 꼬박 24시간이상을
걸어 다니시느라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셔서
지독한 감기에 걸리셨고 돈이 없어 제대로 약한첩 못 지어 드셨으니
감기가 쇠버려서 평생을 기침을 달고 사신다고 하셨다..
특히 어렸을 적엔 큰 상에 모든 식구가 같이 식사를 하곤 했는데
그때에 밥상배열은 직사각형으로 된 큰 교자상에 할아버지께서 아랫목 쪽 우측에 앉으시고
아버지는 위쪽 우측에 앉으시면 식사가 시작되었는데
큰형,작은형,나,동생,동생,동생,동생......밥상 하나에 총 9명이 빙 둘러서 밥을 먹곤 하였는데
밥상 모서리마다 꽉꽉 끼여서 식사를 하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노란 양은으로 된 높이가 낮은 둥근 상에 반찬 몇가지하고 국만 올려 놓으시고
식사를 하곤 하셨다.
식사를 할 때면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콜록~콜록~ 에쳐~
밥 한 수저 드시고 콜록 콜록 험험~~하시곤 기침을 하시곤 하셨다.
어떤 때는 밥상에 밥알이 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우리 형제들이 인상을 쓴다든지 투덜거리면 하면
아버지께 엄청 혼내시곤 하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럼에도 꼭 공간이 넓은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드시는 상에서 안먹고
밥알이 튕겨져 나오는 그 비좁은 할아버지 밥상에서 형제들이 식사를 하는 이유는
어머니 밥상보다 반찬이 깔끔하고 반찬가지수가 많아서 였다.
누구나가 그 시절에는 배불리 먹지 못한 시절이었던지라
우리집도 어린시절 대부분을 보리밥으로 먹곤 했었는데
어머니께서는 평소에 미리 보리쌀을 많이 삶아 놓고서
밥을 지을 때면 이미 식어버린 그 삶아 놓았던 보리밥을 가마솥에 쭈우욱 깔고
한 한공기 쯤이나 되는 쌀을 조리로 일어서 밥솥 한 가운데 놓고서 밥을 지으시곤 하셨는데..
때론 콩도 많이 넣고 감자나 고구마,때론 무우채,콩나물 등도 넣어서 같이 밥을 했다.
밥이 다 되면 가장 먼저 흰 쌀밥으로 할아버지 밥을 푸시고
그 다음에 흰 쌀밥으로 제일 어린 동생(엄마 젖떼고 이제 막 밥을 먹기 시작하는 동생)
몫으로 작은 공기에 퍼서 참깨 갈아 넣은 간장에다 비벼서 동생 밥 주고
(요거 동생 먹여 준다고 하고서 동생에게 먹여주면서 한 두 수저 몰래 먹으면 간장으로만 비볐는데도
그 맛이 진짜 맛있었다..)
이제 밥솥에는 조금밖에 안남은 휜쌀밥과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리밥을 큰 나무주걱으로
마구 뒤 섞은 뒤 차례로 아버지 밥,할머니 밥,형들 밥,내밥,동생들 밥 파 푸시고
맨 나중에 푸시는 어머니 밥은 거의 누룽지하고 섞인 다 으께진 밥을 푸신다.
어머니 밥은 대개 주걱으로 박박 긁으신 거기 때문에
주걱에서 잘 안 떨어져 스댕밥그릇 가장자리에 대고 쓰으윽 문질러 밥을 담은 거였다.
또 어떤 때는 밥이 모자라면 깜박을 긁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누룽지로 만드셔서 드시고 그나마 조금 남겨야 개밥도 주고
괜히 반찬투정하는 우리가 어머니 몫인 누룽지를 달래서 먹기도 하였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어머님은 배가 많이 고팟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할아버지께서는 노인이라 그런지 또 잠이 없으셔서 늦게 주무시고
새벽에는 거의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셔서 마당에 서성이시고
큰방(아버지 어머니,그리고 우리 형제들이 한방에서 잠자던 방)을 향하여
기수야~(울 큰형 이름)기수야~ 하고 큰소리를 치시면
어머님과 아버님이 투덜대시며 일어나시곤 하셨다..
아마 그 영향 때문인지 지금도 아버님은 그시간대에 일어나시고
나 또한 4시면 지금도 어김없이 일어난다.
또한 할아버님의 식사는 꼭 일정하셨는데
시골에서 먹던 스댕으로 큰 밥사발 한그릇을 해치우곤(?) 하셨는데..
90이 넘으셔도 동네 뒷산 정상에 있는 인삼밭에 총대를 아버님하고 똑같은
분량을 짊어지시고 다시실 정도로 정정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술을 전혀 않하셨지만
담배는 엄청 태우셨다.
동네 청년들이 담배를 피다가 어른들한테 들켜서
"야~이넘들아! 어린놈들이 담배피면 뼈삭는다 뼈삭어~"라고
혼낼때에도 '아이고 ~ 무신 말씀이세요! 기수네 할아버님 보세요 ,담배를 그렇게
많이 태우셔도 오래 사시고 건강하시기만 하잖아요?"라고 할 정도로
할아버지는 담배를 많이 태우셨었다..
(우리 큰형 이름이 김기수여 ..김기수라면 우리나라 최초의 복싱챔피언하고 동명이인이어서
어렸을 적에는 꽤 유명한 이름이었지..우리 형은 지금 대전에서 공무원하신다)
1985년3월에 나는 대학교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갈려고 휴학계를 내고
입대영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영장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안나와서
결국 고향에 내려가서 부모님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그런데 꼬불쳐 놓은 돈은 바닥이 나고
부모님한테 돈을 달라고 해도
단 한푼도 주시지 않으시는 거였다.
입대가 8월1일이었으니
약 5개월 동안 용돈 한푼도 없이 펄펄한 놈이 버티기에는 너무도
어려웠었는데..
다른 것은 다 참아 낼수 있었지만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담배였다.
꼬박꼬박 하루에 한갑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용돈이 바닥 나다보니
담배 살 돈이 어디 있겠는가?
마침 그때에 사촌인 주식이 동생인 주홍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동생이 담배를 피워 다행히 몇일간은 버틸 수 있었는데..
형이 되가지고 얻어 피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못 할 짓이었다.
또한 동생이 피우던 담배는 200원짜리 청자였는데..
꼴에 나는 500원짜리 거북선이나 솔을 피우던 때라
입맛에도 너무 쓰기까지 했다..
반대로 울 할아버지는 반대로 골연초는 너무 싱겁다고 안태우시고
봉초를 곰방대에 말아 넣으셔서 태우시곤 하셨는데 ..
가끔씩 청자보다 더 아래 단계인 새마을 정도의 골연초만을 태우셨기
때문에 할아버지 방(잠실방)에는 고급담배가 쌓여 있었다.
할아버지가 동네에서 어른이시고 하다보니
외부에서 손님이 오시면 선물로 담배를 사오시곤 했는데..
선물담배라 그 담배들은 다 고급담배 였다.
선,거북선,솔,은하수,한산도 등등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너무 싱겁다고 안태우시고
커다란 종이박스에 선물받은 담배를 모아 두시곤 하셨는데
무려 2박스(한 200갑이상) 분량이었다.
할아버지가 쓰시는 방은 잠실방(누에를 키우는 길고 엄청 큰 방)이었는데
그방은 내가 만든거나 마찬가지인 방이었다(??)
원래 우리 집은 골목길에서 큰 나무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대문을 단 행랑채 왼쪽으로 안채가 있고 다시 그 옆으로 감나무가 있고
그 감나무 뒤쪽으로 사랑방이라고 불리던
할아버지 방이 딸린 별채(?)가 있었다..
마당 동쪽으로는 긴 흙담이 있었고 그담의 한쪽에는 담을 헐어서 통로가 있었는데
그 통로를 지나면 길쭉한 마당과 텃밭과 창고로 쓰이고 있는 초가집이 한채 있었고
다시 돌담이 하나 있었는데 그 한쪽도 역시 사람이 다닐 수 있게 뚤려져 있었다
그 통로는 바로 나하고 사촌인 주식이네 그러니까 작은 아버지 댁이었다.
우리집과 작은집 사이는 자유롭게 왕래를 할 수 있도록 담 한 쪽을 터 놓았지만
완충장치라고 할까 공동으로 쓰는 창고라고 할까
난 어려서 잘은 모르지만 뭐 그런 공간이 있었다.
내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인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한 5살쯤 되었을 때
기억인데 그 창고에서 난 자주 놀곤 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삼촌이 전북대학교에 다니셨는데 (지금 익산 남성여고 국어선생님)
한달에 한 두번 정도 집에 오시곤 하셨는데 그때 어머니께서는 라면을 노란 양은냄비에
라면을 끓여 주시곤 했는데 삼촌은 꼭 나한테 라면을 먹여주시곤 하였다.
삼촌이 집에 오실 때면 책을 많이 가져 오시곤 했는데 만화책들도 맣았던 것 같다.
아무튼 그 창고에 삼촌이 가져온 책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
그 중에 내가 즐겨 본 것은 바로 만화책이었다.
오늘 날 만화책처럼 좋은 재질은 아니고
책싸이즈도 오늘날 A4싸이즈보다도 조금 더 크고
책 겉장은 비닐을 입히고 책은 철사로 묶여져 있었는데
글을 모르는 어린 시절이라 그때는 내 나름대로 엄청나게 재미있게 만화책을 보았지만
지금은 그림만 떠오르곤 한다.
복싱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만화책하고
비행기 조종사들이 비행기가 추락해서 살아 남는 이야기 들이 펼쳐지는
내용들이 그림으로만 아련하게 떠오른다..
비행복을 입은 아저씨..그리고 스포츠형으로 깍은 머리를 한 조종사 아저씨..
나에게는 정말 재미있는 보물창고 였다.
거기에는 농기구며 삼베며 배틀..각종 나무(집지을려고 장만한 송판들..)등이 즐비했었는데
그런 보물창고를 주식와 내가 불을 내는 바람에 깡그리 타 타버리고 재만 남아 버렸다.
그러니까 그때 우리는 썰매를 쓰키또라 부르며
겨울철 가장 재미난 놀이중 하나로 즐겨 타곤 했었는데
하루는 주식이와 같이 논에 가서 오전 내내 썰매를 타다가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아랫도리가 다 젖어서
집에 돌아와 그 창고 앞에 서 불을 놓고 말리기로 하였다.
창고 앞에는 장작을 팰 때 받침나무로 쓰는 커다란 통나무와
그 밑으로 장작을 패고 남아있는 작은 나무가지들이 널려져 있었고
창고로 쓰던 초가집 벽에는 겨울철에 소먹이할려고 밤나무 가지로
콩잎을 묶어 놓은 어른 키만한 커다란 콩잎묶음들이 여러 개 기대어 놓여져 있었고
때는 바야흐로 늦겨울인지라
아지랑이가 꼬무락꼬무락 피어오르는 한낮이었다.
덤불 부스러기와 콩잎을 빼내서 도끼질하는 받침나무에 올려 놓은 뒤
주식이가 나보고 성냥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난 우리집 정지(부엌)에 가서 날개달린 사자가 그려져 있는 비사표 통성냥을 주식에게
가져다 주었고 주식이가 불을 피웠다.
한참 옷을 말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그만 세워둔 콩잎기둥으로 불이 옮겨 붙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큰불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 불로 집이 세채나 탄 대형화재가
될 줄이야..아무래도 우리가 너무 어려서 뭘 몰랐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바로 불을 꺼야 하는데
우리는 소나무 가지에 물을 묻혀서 꺼야 잘 꺼진다고 생각하고
흙담을 지나 대문앞에 있는 샘터까지 달려와서 소나무가지에 물을 묻혀서
불끄러 가기를 두 세번 하다 보니 불길은 완전히 거세어져 초가지붕으로 옮겨 붙어 버린 것이었다..
그때 반대쪽 흙담 밑에서는 할아버지께서 이엉을 엮고 계셨고
어머니는 마당에서 빨래줄에 빨래를 널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른들한테 불이 났다고 알려만 주었어도 큰 불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혼이 날까봐 어른들께 알리지도 않고 두세번 왔다갔다 하다가 보니
불은 하늘로 치솟고 그냥 무서워서
아무 소리도 않고 도망을 쳐 버린 거였다.
주식이는 숨박꼭질 할 때 제일 꼼꼼하다며 잘 숨는 지들 똥독(변소)으로 숨고
난 작은 집을 지나 동훈네 집을 지나 미나리꽝을 지나 그 아래에 위치한 큰집으로
한달음에 달려 도망을 가서 보니 이미 불길을 하늘을 집어 삼킬듯이 거세게 불기둥을 세우고 있었다.
큰집 부엌으로 가니 큰엄마가 점심을 준비하느라 아궁에 불을 때고 있었는데
큰엄마한테 우리집에 불났다고 허겁지겁 말씀드린 것 밖에 기억이 없다.
다음날 아버지는 다 타버린 집에서 벽을 허물고 소시랑으로 숯덩어리로 변해버린
나무들이며 새간살이들을 마당에 널고 계셨는데
그 일로 부모님이나 형들이 불을 왜 냈냐며 나를 나무라거나 혼내시지는 않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네 사람들이 불을 끄러 왔을 때는 이미 창고로 쓰던 만화책이 만이 있었던
그 초가집은 이미 불덩이어리 변해서 불끌 엄두조차 못하고 우리집 본채로 옮긴 불과
새집(우리 어렸을 때 작은 집을 새집이라고 불렀다.작은 아버지가 결혼해서 재급나면서
새로 집을 지어서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으로 옮겨 붙은 불만 껐고
우리집은 덕석(멍석) 여러개로 지붕을 덮고 물을 뿌리고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은
새집(작은집 본채)불을 끄는데 주력했다고 한다.
그 뒤로도 용담댐으로 집이 철거 되기 전까지도 주식이네 집 처마를 바라보면
불에 타서 새카맣게 변해버린 처마들을 보곤 하였는데
그거 주식이하고 내가 부을 내서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결국 그 텃밭이 있었던 공간에는 새로 집을 짓게 되었는데
우리동네에서 제일 키가 컸던 폼뿌라(포플러나무)나무를 베어 와서
대들보를 삼아 흑벽돌로 집을 짓게 되었는데 잠실방이라고 불렀다.
잠실방은 주식이하고 내가 불낸 그 창고로 쓰던 초가집터를 포함해서
앞쪽 담장까지 길게 늘어섰던 텃밭과 마당을 전부 차지할 만큼 크게 지어졌는데
불을 때는 아궁이가 무려 6개나 될 정도 크고 긴 집이었다.
잠실방이란 친구들도 알겠지만 누에를 키우는 방을 말하는 데
어렸을 적에 우리동네에서 가장 많은 누에를 키우곤 했는데
그만큼 잠실방은 무척 큰 집이었는데 큰방과 작은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큰방은 대나무로 엮어 놓은 칸칸다락(?)들이 있었는데
그 대나무들로 엮은 것들은 누에를 키울때 쓰던 장치였지만
알다시피 누에를 키우는 것은 한철이기 때문에 봄,가을,겨울에는 어린애들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
누에를 키울 때면 뽕을 따고 누에에게 뽕잎을 주어야하는 일손들이 많이 필요했는데
그때는 동네 아줌마들이나 처녀(누나들)들이 우리집에 와서
일도하고 식사도 같이하곤 했다.
준호네 큰누나도 우리집에 오곤 했었는데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였으니 한창 말썽도 부리고
귀엽기도 할 때였는데
준호네 큰누나 이름이 명진이였는데 난 항상 명진이똥꼬 개똥꼬라고
놀리며 달아나곤 했었다.
그때는 엄마도 무척이나 바빠서 엄마는 엄마대로 애들 키울랴 집안살림하랴
일손 도울랴 일군들 밥상차리랴 정신이 없어했고
아버지는 항상 잠실방 온도 관리하느라 하루에도 몇번씩 잠실방 아궁이에 불을 지피곤 했고
특히 소낙비가 쏟아지는 여름날 새벽에 빗소리에 깨어나서 보면
언제나 일을 하고 계시든가 불을 지피고 계시곤 하였다.
산골이지만 넉넉치 않은 살림에 우리 7형제증 5형제들이 대학교까지 다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부모님의 부지런함 때문이었다.
주소득원이 쌀농사로 해서는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을 수 었음을 일찍이 아신 아버님은
누에 키우는 일과 인삼키우는 일에 몰두하셨기에 자식들 농사 짓는 것이 가능했는지 모른다.
동네에서 부모님은 언제나 돈을 꾸러 다니시는 분처럼 보일 정도로
큰형과 작은형 그리고 내가 대학을 같이 다닐 때가 있엇는데
한집에 대학생이 한명 가르키기도 어렵다는 그 시절에 같은 해에 대학생이 3명씩이나 있었으니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에사 우리 부모님이 정말로 위대하시고 또 고생을 엄청나게 하셨다는 걸
깨닫곤 한다.
난 중학교 1학년 때 안천 하보에 있는 고모님 댁에서 하숙을 했다.
고종사촌형이 정일모,동생이 정오언이었는데
주식이하고 나는 같이 고모님댁에서 하숙을 했다.
일요일이면 가끔 주식이는 고모님댁 밭에 가서 일도 도와주곤 했지만
난 공부를 한다고 한번도 일을 해드린 적은 없다.
또 일을 안하는 일요일에는 같이 일모형이 놀러 가자고 하기도 했는데
난 역시 같이 놀지도 안했던 것 같다.
2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치를 쯤 어느 일요일..
일모형이 공부하지 말고 같이 공이나 차러 가자고 꼬시는데 우리가 꿈쩍을 않자
주식이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내일이 시험일인데 형은 공부고 뭐고 없는 사람마냥
책상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나와 주식이를 꼬시고 얼르고 간지럽히고 하다가
성격이 급한 내가 결국에는 서로 치고 받는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나야 그때만 하더라도 키도 작고 덩치도 작고 해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는데 혼신의 일격을 가한다고 팔을 휘두른게
그만 약삭빠르게 형이 피하고 난 그 휘두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콰당 고꾸라져 버리고
말았는데.....그만 나도 모르게 아파서 엉엉 울다가 왼쪽 팔을 보니
팔이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돌아져 가 있는게 아닌가?
그리고 팔꿈치 아래쪽은 내마음대로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다.
팔을 삔 것이었다.
가장 열심히 공부해야 할 시험 전날 난 고모부와 함께
버스를 타고 진안읍내에 있는 구세의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는데 난생 처음 마취라는 걸 했다.
간호사 누나가 주사를 놓고 나더니 나보고 따라 하라 했다.
하나..두울..세엣..네에엤.........다...서...엇..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가는데 모든 기억도 말소리도 점점 작게 들리더니 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모든게 지워졌다.
마취에서 깨어나 보니 약간 현기증이 돌며 어질한데 내 팔에는 기브스가 되어 있었고
뭉대를 메어 고개에 걸쳐져 있었다.
다음날 시험을 어떻게 치렀는지도 몰랐지만 어쨌던 난 중간고사 성적은 전체1등이라고 했다.
담임선생님이 최방희 선생님이셨는데 팔을 삐고도 언제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냐고
칭찬을 두고두고 하셨다.
중학교 3학년 때는 동생이 중학교에 입학을 해서 같이 자취를 했는데
동생놈은 한 1주일정도 생활하더니 도자히 못하겠다고 짐을 싸서 집으로 가버리고
승신이와 학교뒤 첫집 한기윤선배 집에서 자취를 하다가
형석이하고 다시 합류하여 면사무소 앞에 있던 방앗간 집(1년 후배 심규문네 집)에서
자취를 했다.
옆방에는 무주 쪽에서 온 1년 후배들 둘이서 자취를 했는데 나나는 키가 크고 하나는 키가 작았었는데
지금은 얼굴만 어렴풋이 기억이 날뿐 이름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그 후배들 김치 넣고 청국장 자주 끓여 먹었는데 자주 얻어먹곤 했었다.
우리는 밥을 지어 먹을 때 주로 작은 가마밥솥을 사용하고 했는데
그것은 주인집이 방앗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겨를 풍구로 부쳐서 불을 때서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자취방에 아예 작은 가마솥이 걸쳐져 있었기도 했고..
3학년때는 저녁밥을 먹고 다시 야간학습을 하러 학교에 가곤 했는데
주로 학습이기보다는 자율학습이었다.
난 지금도 초저녁잠이 많고 새벽에는 잠이 없는 편이다
그때는 더 그랬는데 내 스스로 밤 9시를 넘겨서 자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대신 새벽에는 보통 4시쯤 일어나고 시험을 볼 때면 한 새벽 1시정도 일어나서 공부을 했다.
집에서 산너머 학교를 다닐 때가 2학년때 였는데
그때는 아버지께서 꼭 깨워주셨고 내가 일어나 시험공부를 하는 날이면 어머니도 어김없이
일어나셔서 찢어진 옷이나 뚫어진 양말을 꼬매시거나 바느질을 하시고 하셨는데
아마도 나 혼자 공부하면 혹시 졸지 않을 까 염려하셔서 그랬던 것 같다.
공부하다가 졸리면 밖에 나가서 찬물에 얼굴 씻고 오라고 하시고
한 새벽 4시쯤 되면 배 고프지 않냐고 물으시며 김치에다가 밥을 비벼 오시곤 했고
가끔은 내가 좋아하는 라면도 끓여주시곤 했다.
3학년에 올라와서는 그 야간자율학습이 나에게 가장 큰 적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난 어이가 없다.
만약에 담임선생님께 이런 내 사정을 이야기 했으면 아마 받아 주셨을는지는 모르지만
난 쏟아지는 졸음 속에서 밤 10시 반까지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하며
공부를 하기보다는 졸음과 싸우는 하루하루를 보냈고
가끔은 4반 담임이셨던 정창현 선생님께서 잠자는 내 머리에 라이타로 불을 지르곤
하셨는데 친구들이 왁자지껄 웃는 소리에 깨어나곤 했었다.
잠을 설치고 자취방에 돌아와서 공부를 하면 몸이 너무 피곤하고
또 새벽에 일어나서 공부하는 체질인 나는 새벽은 새벽대로 힘들어 하곤 했다.
어쩌랴!
도둑고양이마냥
난 드디어 한갑 두갑..할아버지 담배를 몰래 꺼내 피우곤 했는데..
이게 날짜가 점점 지나면서 눈에 띠게 줄기 시작했는데..
결정적인 것은 ..사촌 동생마저도
고급담배 맛을 보더니
한갑,두갑(동생집과 우리집은 붙어 있고 담사이로 길마저 나 있어서 언제든
한집처럼 왕래가 가능했음)같이 꺼내 피고 나니
결국에는 7월 쯤가서는 둘이서 두박스를 다 해치워 버리게 되 버렸다..
그래도 군대 갈때까지
부모님은 물론 주인이셨던 할아버지께서도
담배이야기는 한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드디어 1985년 8월 1일
작열하는 태양을 박박깍은 머리에 이고
나는 훈련병으로 35사에 입대하게 되었다.
보통애들은 2부나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훈련소에 입소를 하였지만
나는 내생애에 가장 반항아적 기질(지금 생각하니까 난 이때가 사춘기였나 봐)이
내 온몸을 감싸던 때라
빡빡 깍은 머리에 노란 잠바차림으로
뻣뻣하게 입영소를 통과했다..
내 기억에 날 배웅해준 사람은 어머님과
대학교때 친구 였던 것 같다.
나를 배웅해 주었던 그 친구는 고향이 고창이었는데...
군 제대후에도 대학교를 같이 졸업하고
한 4~5년 정도는 서로 소식을 주고 받았던 친구였다...
그 친구의 직장이 중소기업관리공단 이었는데
서울로 발령을 받은 후에도 종종 연락은 주고 받곤 했었다..
어느새인가 한동안 그 친구와 소식이 끊기게 되었는데..
내가 2001년 제주도로 발령받은 이듬해인 2002년
어느날 우연히 대학교 다닐 때 같이 어울렸던 다른 친구로부터 통화를
하던중 우연히 친구들 안부를 묻다가
그 친구가 죽었다는 머리 띵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내가 신입사원시절 삼성생명 전주연수소에서 근무하며
가끔 교육받으러 서울에 있는 본사에 가게 되면
으래 1박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가끔 대방역 근처에 있는 그 친구집에 묵곤 했었다.
그리고 그때 그 친구는 연애를 하고 있었고 그 여자친구의 이름은
영란이라고 했었다..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내가 전주에 기반을 두고
있었을 때는 그래도 그 친구와 편지왕래나 전화로 소식을 주고 받았지만
내가 발령을 받으며 이리저리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부터
소식이 끊기는 사이 그 친구는
비암(세상에 코에도 암이 있다는게 믿어지지 않지만)으로 투병을 했다 한다.
그것도 나도 발령을 받아서 광주에서 근무할때
나는 내생애에 가장 친했던 그친구도 마침 광주로 발령을 받았었던 때였다고 한다.
같은 광주하늘 아래서 암투병을 하고 숨을 거두고 장례를 치렀을 때도
난 전혀 모르고 광주에서 영업소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게 되었지만
어찌했든 난 군대에 입대하면서 굳은 각오를 몇개 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담배를 끊는 일이었다.
내가 담배를 처음 피우게 된것은
고딩 3학년 때 학력고사를 마치고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매우 자유롭게 풀어주던 1982년 12월 무렵..
평상시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같은반 큰 애들(쫌 불량?한 애들..한마디로
선생님 속깨나 썩이며 뒤에서 놀던 애들)하고
우연히 시내에 있는 커피숍이란 곳을 난생 처음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친구들 왈 " 야! 이런데 오면 어른스럽게 해야 하는 거여~ "
"그리고 넘들이 깔보니까 담배하나씩 꼬나 물어야 되는거여~"
엉겁결에 친구가 담배를 권했고
못 와야 할 곳에 와버린 난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
내가 담배를 피울때 처음에는
엉겹결에 피웠던 것이
이제는 대학교에 입학하고 각지에서 모여든
애들이 먼저 기선제압차원에선지
왠지 담배를 꼬나물면 좀 뭐해 보이는 것 같은 기분에
좀 깡다구가 있어 보이라고 피우게 되었다..(참말로 어린 생각이지 ㅋㅋㅋㅋ)
그러면서도
"흥! 이깟 담배...내가 끊어야 하겠다고 맘 먹으면 언제든지 끊을 수 있다!"는
자심감으로 항상 가득했다..
입학한지 한두달이 되어서 이제 친구들도 서열(?)이 어느정도 잡아갈 무렵
난 이쯤에서 이제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맘 먹고 시도해 봤지만
아뿔사~ 이게 만만치가 않았다..
억지로 한두달 피웠던 담배가
무려 23년이상이나 걸려서야 끊울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난 2003년 8월1일(입대한 날짜기념로 다시 금연시도함)에 되어서야
드디어 담배를 끊을 수 있었다.
담배를 피우던 23년의 긴 시간 동안
난 한 20번도 더 넘게 금연을 시도했었는데
20일도 끊어보고,10일,7일,3일,2일,1일,한나절등등...
잠자리에 들어서면 오늘 담배를 못끊은 나를 질책하며
내일 새날 아침이 오면 진짜로 담배를 끊어야지!라고 눈을 감곤 하였는데
아침이면 나는 또 어김없이 담배부터 피워물고
"아~ 나라는 놈은 이렇게 의지력이 없는 말인가?"
자신에 대한 수없는 자책과 좌절과 체념에다가
와이프의 잔소리는 또 어찌도 많던지...애들에 대한 미안함..
아마 담배를 안 피우는 준호(이새끼는 내가 담배필때 구박 엄청 했음)는 모르겠지만
이제 나한테 구박으며 아직도 못 끊고 담배피우는 규찬이는 맘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1985년 8월1일 군에 입대하면서
금연을 이참에 확실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건만
힘든 훈련끝에 찾아오는 짧은 휴식시간에 피우는 담배야말로
진정 꿀맛보다 더 한 담배맛이었다...
알다시피 훈련병시절에는 사제담배는 못태우고
군용담배를 배급받아 태우게 되는데
그게 한달에 15갑 정도 밖에 안되기에
보름이 지나면서 담배를 피우는 훈련병 동기들은 너도 나도
조교들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 다니곤 했다..
그것이 재미있는 냥 조교놈은 몇모금 빨고 장초를 뒤로 버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 주워 피울려고 각축을 벌이고
돌아가면서 한모금씩 나눠 피우기도 했었다.
(조교새끼~ 가끔,우릴 얼차려도 주곤 했는데 아마 그걸 즐겼나 보다)
하루는 훈련을 마치고 일석점호를 받는 과정에서 소지품 검열이 있었는데
훈련생 동기 한 녀석이 사제담배(솔)를 숨기고 피우다가 발각이 되어서
단체로 빰빠라 기합받던 기억이 새롭다.
여름날 밤에 빤스만 입고 연병장에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하는 것이 빤빠라였는데
아마 여자친구들은 그게 뭐 힘드냐고 할지 몰라도
훈련소 모기는 정말 무섭다니까..
모기에 뜯기고 있는데 꼼짝도 않고 서 있어보라고..
만약에 움직이는 날에는 조교놈들 워커발이 머리까지 날아오는 판이라
모기들만 살판 났지..참으로 당해보지 않고서는 그 힘든 기합을 이해할 순 없겠지..
차라리 매를 맞는게 낫지..
남자친구들은 아마 그 참기 어려운 고충을 이해할거야..
담배는 결국 훈련소에서도 못 끊고
자대배치 받으니 내무반 생활이 좀 힘들어
육체적으로 부디치는 것이야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겠지만
나하나 잘못해서 동료들이 단체로 기합받고
줄빠다에다가 고참들 시중들며 기분 맞출려면 그것처럼 힘든게 또 없지..
졸따구 신세타령하자니 담배 안피우던 넘들도 하나둘 담배를 시작하는 판에
또 담배를 못 끊고..
병장달고 내무반에서 서열이 좀 되었다 했을 때는
담배수령하면 쫄따구들 피라고 은하수 15갑 다 주고
(우리 군 생활할때는 일괄적으로 은하수 15갑씩 배급되었지)
하루도 못가서 한가치 두가피 얻어 피우다보면 쫄따구 넘들
아예 지것까지 다 갖다 피우라고 한다..
이래 저래 못끊던 담배..
이후 담배는 내자신에게 있어서
나를 자멸로 이끌어 가는 자학의 상징물이 되어갔다.
커피를 마시며 피우는 담배가 제일 맛있고
술한잔 하면서 피우는 줄담배는 안주보다 더 맛있고
식사후에 담배피우지 못하면 도저히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는 소화제였으며
눈뜨자 마자 피우는 담배는 신선한 아침공기보다 더 고소해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