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이야기
/김정복
부모님이 시골에 계실 때는 명절이면 꼭 뵈러 내려갔었다.
민족의 대이동이라 불리는 교통전쟁 때문에 힘들어도 여기저기 흩어졌던 형제들과 친척들 그리고 여러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이제 부모님이 도시에 계셔서 고생길은 피할 수 있지만 그래도 명절 때 어울려 한 잔씩 하던 개구쟁이 시절 친구들이 그립기도 하다.
시골에 도착하면 그 동안 못 봤던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 했다.
세월 탓인지 이제는 내려가더라도 일가친척 외에는 잘 어울려지지가 않지만, 옛 시골에서의 명절은 순정이 남아 있어 부르지 않아도 서로가 찾던 시절이었다.
어느 집 사랑방에서 모이더라도 명절이라서 안주와 먹을거리들이 상에 가득했고 도시에서는 의식적으로 절제했던 사투리를 섞어가며 밤 늦도록 그 동안의 삶을 이야기 했다.
특히나 고등학교나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도시에서 이른 직장생활에 들어갔던 친구들의 세련된 옷차림과 하얀 얼굴은 도시의 풍요를 가져온 것 같아 부럽기도 했었다.
명절이 끝나고 동네에서는 누 집 딸은 아버지에게 소 한 마리를 사 주고 갔고, 누구는 논을 사라고 돈을 주고 갔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일 년 후배이기도한 한 친구도 도시 생활을 일찍 시작했고, 차 정비 기술을 익혀서 자기 부모에게 꽤나 많은 농토를 사게 해 주었다.
그 당시에는 마을에 몇 대 밖에 없었던 자가용도 몰고 내려와 부럽기도 했었다.
내가 군대를 마치고 다시 학생신분으로 돌아갔던 무렵의 추석쯤으로 기억 된다.
그 집 마당엔 또 그 친구의 차가 주차해 있었고 어찌하다 친구들이 그 집에서 어울리게 됐었다.
아직은 순박했던 청년기 시절이라서 그랬던지 먼저 성공을 향해 달리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지는 않았었다.
그 시절에는 성공담 보다는 모두에게 고생담이 화두에 올랐고 더 관심이 있었던 같았다.
그러면 군대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었고, 방위 소집이 많았던 시골 선후배들은 방위병 시절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면사무소에 있던 중대본부로 출 퇴근 하면서 토끼를 키워 돈을 벌어가며 근무 했다는 친구, 후배가 선임이어서 입장 곤란했던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했었다.
자동차 정비를 하던 그 후배도 입담 좋게 유격 훈련등, 훈련병 시절에 고생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군대서 고생한 이야기를 가장 현장감 있게 하고 가장 실감나게 이야기하기에 어디에서 근무 했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안 했다.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미필이라 했다.
사실 난 그때까지 미필이라는 제도가 있는 줄도 몰랐다.
군대를 안 가던지 방위병 근무나 아니면 현역으로 입대를 하던지 하는 것만 알고 있었지 그 친구처럼 3 주인가 4 주 동안 기본 훈련만 받고 병역의무가 마감 되는 그런 제도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33개월의 근무를 마치고 만기 제대한 나는 별 말을 안 했지만, 몇 주 동안의 군 생활이 전부였던 그 친구의 무용담과 경험담이 제일 그럴싸했다.
숨 막힐 것 같았던 내무반 생활, 시가지 전투, 화생방 훈련 등등 고되고 힘들었던 훈련소 시절이 끝없이 이어졌다.
가만히 들어보니 부대생활의 경험이 없이 전역한 친구라서 훈련병 시절이 지나면 그 너머에는 보다 수월하고 안정된 자대 생활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훈련만 받다 끝나, 군 생활이란 것이 훈련소 생활처럼 3년 내내 힘들게 지속되는 줄 알고 있었다.
서울을 안 가본 사람이 가본 사람보다 더 잘 안다는 우스갯말이 떠올라 실소가 나왔다.
군 생활의 고생스럽던 기억과 무용담은 누구에게나 과장하고 싶은 맘이 생기는 것 같다.
거기에다 술이라도 한 잔 들어가게 되면 추억과 기억에 살이 붙어 거의 허풍 수준으로 격상이 된다.
사회생활과는 달리 위계질서에 의한 진행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병영 생활이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승복은 하지만 때에 따라선 엉뚱하다고 느꼈던 기억들은 각인 되어 오래 남기 마련이다.
사병 시절의 이야기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어도 전혀 지겹지가 않고 늘 재미있다.
합리와 비합리를 따질 겨를이 없이 시키는 대로 받아들여야 했던 황당함이, 이야기를 듣는 중에 카타르시스로 작용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속에는 고참병의 지시나 요구가 효율성과 적정성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집행이 되던 내무반의 분위기도 한 몫 했다는 생각이다.
묘하게도 군복만 입으면 그 시절의 혈기가 다시 찾아오는 것 같고, 그 혈기 속의 반항적인 기질도 따라오는 것 같다.
예비군 훈련 중 휴식 시간에 여기 저기 누워서 휴식을 취하곤 했는 데, 사회에서 길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쉬라고 하면 눕겠는가.
수통에 소주를 채워온 것이 큰 일을 해낸 사람처럼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사회로 복귀했을 때 수통에 든 깡소주를 건네면서 안주도 없이 마시라하면 누가 마시겠는가.
예비군복만 입으면 체면 불구하고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지던 품위는 어쩌면 다시는 채울 수 없는 그 혈기가 그리워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부풀려지는 군 생활의 고생담이 악의가 없음이 미리 파악되고 이해되는 공감의식은 청춘을 담보 잡혀야 했던 그 시절의 고난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
09/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