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의 별은 유난히도 밝고 아름답다. 흐린 날은 몰라도 아주 맑은 날의 밤하늘이라면 푹 빠져 죽고 싶은 충동마저 일으킨다. 밤하늘의 별이 하나가 있든지 아님 수십, 수백 개가 떠 있든지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우리는 어릴 적에 얼마나 많이 밤하늘을 보았던가. 하지만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지 않게 되는데 걸린 시간은 아주 짧았다. 지금의 우리들은 일주일에 한번 아니 한 달에 한번이라도 맘껏 윤동주의 별을 헤는 밤처럼 별을 세어 보는가 자문(自問)해 보아야 한다. 문태준의 시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과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기억과 상처를 이야기한다. 동시에 희망까지.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얼마나 많이 현대문명, 물질문명이라는 약탈자에게 소중한 것들을 빼앗기며 살아가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여 왔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런 의문 없이 다들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문태준은 빼앗긴 것 그리고 남은 것들과 더불어 작은 희망들을 발견하고자 한다.
문태준의 시에 등장하는 검은 이미지들은 우리가 빼앗기면서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들의 잔여물이다. 「새」,「겨울 꽃봉」,「폐광촌 肖像」,「下里 정미소」,「아슬한 피란」,「흰나비재」,「꽃뱀을 쫓아서」,「비 지나가는 저수지」,「사라진 뱀 이야기」,「한 주정꾼의 이야기」,「비겁한 상속」,「굴을 지나면서」,「묵정밭에서」,「태화리에서」,「빈집 3」,「망나니가 건넨 말」,「흙집의 우울」,「어둠이 둠벙처럼 깊어」,「포도나무들」,「쥐불을 놓는 사람」,「꽃잎이 마르는 사이」,「황도 포구」등의 시에서 보여지는 '검은 밤나무', '주검', '검은 흙', '검은 개', '개미', '까마귀', '깜깜한 구들장같은 사내', '죽은 쥐', '까만 혀', '거머리 밥'. '까만 독', '캄캄한 방칸', '쥐의 주검', '굴', '무덤', '까만 염소', '검은 콩', '검은 가죽나무', '송장', '검은 쥐', ' 옹관묘', '갈 가마귀떼', '포도알갱이', '포도나무', '폐허', '저승꽃', '검은 개펄', '검은 게' 같은 시어들은 현실에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 남겨진 비루한 것들이다. 이외에도 '그림자', '그늘' 같은 시어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이런 것들을 모두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너무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또한 일정한 맥락 속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우연이라고 보는 것은 부적당하다.
이런 수많은 검은 이미지들은「상여가 지나가는 마을의 하루」에서 전체적으로 통합되어 보여진다.
죽은 그 여자 부르튼 발을 일으켜 세우네
여인들은 널어둔 빨래를 걷고 문을 걸어잠가, 지금은
상여가 지나갈 때
산그늘이 내린 찬 저수지를 물뱀 한 마리가 건너가는 것을 보았네,
서리 찬 물길에 닿는 꽃잎을
살아 마른 길 위에 눕던 사람, 마른 쑥부쟁이처럼 떠돌라지
상여가 나간 마을에 군불 연기가 피어오르고
흙을 파먹는 우엉뿌리가 군불 연기가 피어오르고
상여꾼들이 짚가리처럼 모여 마른 떡을 구우며 저무는 하루
-「상여가 지나가는 마을의 하루」전문
죽은 사람의 곧 시체는 부패하기 마련이고 처음에는 본래 몸보다 커 보이기도 한다. 검은 그 여인은 일어서서 어디론가 가려고 한다. 동네 아낙들은 깨끗하기 그지없는 빨래들을 걷고 문틈 새로 지나가는 검은 여인을 보고 있다. 상여가 서서히 지나가고 물뱀이 그 뒤를 따라 유유히 저수지를 휘돌아 나간다. 사람들은 추억을 가득 안은 채 검은 여인을 땅속에 내려놓고 돌아온다. 그리고 짚불을 놓으며 저마다의 이야기들을 한다.
이제 죽은 것들, 검은 것들 뒤로 많은 것들이 따라오게 될 것이다. 지금 화자가 서 있는 곳은 상여가 지나가는 현재이다. 모든 것이 폐허이고 빈집처럼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쑥부쟁이같이 아련한 추억은 있다. 그 추억은 희망을 싹틔우는 불씨인 것이다. 이런 추억의 한 조각마저 잃어버린다면 이 현실은 정말 아무 것도 숨쉴 수 없는 그런 암담한 사막이 될 것이다. 하지만 화자는 거기서 머무르지 않는다. 상여가 나간 마을에는 군불이 피어오르고,‘따닥따닥’거리는 짚가리에 불을 피우고 그 주위에 상여꾼들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운다. 마른 길 위에 사람들이 누워있었고 방금 막 상여는 지나갔다. 이제 싸늘해 보이기만 하는 저수지에 물뱀 한 마리가 곡선을 그리며 지나간다.
고정관념으로 본다면 물뱀의 이미지는 차갑고 잔인하며 스산한 어둠의 자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물뱀의 곡선에 대해 묘한 신비감을 가지고 눈여겨본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S자를 그리며 아주 보드랍게 헤엄쳐 가는 물뱀을 보고 아름다움을 생각하기가 여간 쉽지 않을 것이다. 화자는 물뱀을 보고 아침이슬 맺힌 꽃잎의 한없는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리라.
현실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곳은 죽음의 이미지가 드리워져있다. 그러나 조금씩 없어져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없어지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우리가 상여 지나 간 마을에 남아 있지 않고 무작정 상여를 따라 가지 않을까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또 어둡고 검은 현실이라도 희망은 존재한다는 것, 그는 그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여타의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현실에서 한 걸음 앞서나가, 차갑고 딱딱한 구들방에 희망의 불씨를 외로이 지피고 있는 것이다. 선각자의 자리는 언제나 힘들고 어렵기에 부단한 그의 노력들이 무척이나 고달파 보이고 안스럽기까지 하다. 우리가 어디서 왔고 또 어디로 가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 죽음이라는 것 앞에 결국 우리는 복종하고, 죽음이 언제 내려앉을지 몰라 항상 검은 개펄에 사는 기분일 것이다.
2. 옛것에 대한 기억과 집착
다음은 이정록 시인의 시다. 그의 시에서 드러나는 어둠과 옛것은 문태준 시에서 드러나는 옛것과 어떻게 다를까.
삽날에 잘린 눈사람을 어루만진다
살집 속에 결을 만들어놓은 흙 부스러기
때문에, 삽날이 지나간 자리가 꽃등심처럼 곱다
아름다운 것이 이렇게 무서울 수가 있구나
등을 찍혔는데도 무늬를 보여주는 눈사람
저 흙길을 따라가면 서걱서걱 기저귀 얼어 있던 안마당
또 배가 불러오던 어머니를 만날 것 같다
마음 짠해서 어둠을 밝히는 눈송이들
왱이낫이 박힌 옹이 많은 옛길을 덮는다
아물지 않은 상처 위에 겹겹 붕대를 두른다
삽날이 지나간 눈사람, 그 흙밥의 나이테를 어루만진다
- 「눈사람의 상처」전문
이정록 시인의 시어는 향토적인 것들과 도시적인 시어들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생고구마', '무', '눈사람', '흙 부스러기', '기저귀', '꽃대궁', '모내기', '도랑도랑', '논배미', '논두렁', '호박벌', '소나기 한떼', '들판', '덩술손', '표주박', '주먹밥', '시래기', '대추알', '청국장', '밥풀', '옥수수', '된장국', '고무신' // '숟가락', '악기', '출구', '보온통', '삽날', '꽃등심', '붕대', '불법주차', '현대철공소', '아스팔트', '금지판', '이앙기', '형광등', '양철', '냉장고', '다리미', '조용필의 「한오백년」', '관절염', '바바리코트', '쇠집', '케이블', '아파트', '공사현장', '운동화', '신부', '썬팅', '십자가', '플래카드' 등등. 이런 시어들은 상당히 대비적이다.
이정록의 시에서는 향토적인 것과 도시적인 것들이 서로 상충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중간자적 위치 혹은 애매성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고루 나타난다. 이것은 시인이 도시적인 삶과 현실에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마음 구석에는 옛것에 대한 기억들을 잊어버리지 못한 미련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눈에 내리고 아이들은 '데굴데굴' 눈을 굴려 자기 만한 눈사람을 만들었다. 탄광촌에서 만들었으면 검은 흙들이 구석구석 박혔을 테고 촌에서 만들었다면 짚가리나 흙 부스러기가 묻을 수밖에 없다. 시인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눈사람을 본다. 그리고 예전의 추억들을 더듬어 본다. 시인이 어렸을 적 모습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발견한다. 그 하얗고 투박하기 만한 눈사람이 삽날이 잘려나가 있음을. 이것은 곧 그의 옛것들이 잘려나간 것이다. 눈사람은 상처를 입었고 붕대를 칭칭 감고 있다. 시인은 순간 삽날에 잘려나간 눈사람이 된다. 이정록 시인에게 있어 옛것은 단순히 추억의 대상으로 남는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서 상처가 난 자기 자신을 본다. 그가 옛것에 대한 아쉬움·미련·추억들은 그것으로 끝나버린다. 그리고 끊임없이 갈구하는 동시에 현실로 돌아온다. 시인에게 있어 '눈 사람의 상처'는 현실의 어두운 면이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현실은 '청솔 아파트 공사 현장' 같이 삭막하고 어둡다. 공사장 같은 현실이기에 이정록 시인에게 옛것이 없다면 그것은 생기가 없는 삶이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시인은 따뜻한 시선으로 대상과 옛것을 바라본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에서 비둘기가 채석장에서 막 떼어낸 돌온기에 입을 적시듯. 그러나 시인의 시선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에 반해 문태준 시에 나타나는 옛것은 그런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문태준의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의 해설을 박형준 시인이 맡았다. 거기에 문태준 시인 고향에 대한 설명이 얼마간 있다. 시인의 고향은 추풍령에서 5리 정도 떨어진 곳이고 김천시에서는 서쪽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다. 소백산맥이 휘돌아 나가고 있으며, 마을은 가난한 편이고 예전엔 논농사를 많이 지었으나, 이제는 포도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40여 가구에 80명 정도가 살고 오십의 나이가 젊은 축에 드는 그런 한적한 시골이다. 문태준 시인에게 있어 고향(옛것)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인가. 대개의 사람들에게 고향은 마음의 안식처이고 보금자리이다. 왠지 돌아가고 싶고 무언가 기댈 것이 있는 그런 곳이다.
그러나 시인에게 있어 고향은 이미 오래 전에 예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채 멈추어 버렸다. 도시에 살면서도 그는 한번도 고향에 대한 추억과 기억을 버리지 않았다. (고형렬 시인이 서울에 산지 20여 년 되었는데 아직도 서울에 닿지 못하고 있다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문태준 시인에게 고향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그 이유가 자못 궁금해진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의 시 몇 편만을 읽는다면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없다.
시인의 고향 대한 집착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화자는 철 지나 매미가 보이지 않을 법한 때에 <호도나무를 빨고 있다.> 시인이 호도나무에서 매미처럼 딱 붙어 있는 이유는 고향에 대한 아쉬움, 예전과 다를 바 없는 고향이지만 지금은 멈춰버렸고 과거의 고향인 까닭에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옛사람의 그림자가 남은> 화자의 고향, 따뜻한 숨결과 보드라운 손길이 묻어 있는 고향, 이 곳에 다시 오기 위해 그는 <누이들의 발길을 따돌려 성황당 지나 밤길의 긴 방죽을 오랜 세월 걸어>왔다. 오랜 세월을 걸어 맨 처음 발견한 것은 <이지러지는 우물 속의 사람>이었다. 먼길을 돌아왔지만 예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꽃 시절>이 있기에 다시 되돌아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 살아남은 꽃 시절에서 보드랍고 따스한 것들을 추려내 <흙손으로>그 동안 멈추어 있던 고향, 묻혀 있던 고향의 <무너진 곳 때워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이미 시인이 살던 때부터 멈추어 있던 고향은 인터넷과 IT가 새로운 통신· 언어· 경제수단이 되고 있는 현재 고향 밖의 현실과는 속도감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대개의 사람들이 태어난 곳은 어느 대학 병원의 산부인과이고 자라나는 곳 또한 콘크리트 냄새 풀풀 풍기는 어느 딱딱한 방일 것이다. 시인이 가지고 있던 고향 외부의 사람이 바로 우리인 것이다. 주변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 것에 반해 그의 고향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아이일 적 고향 모습을 갖고 있다. 이제야 그런 곳의 따뜻함을 알고 찾아 왔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의 고향, 정신의 고향은 이미 성장을 멈추어있다. 좀 변한 것이 있다면 <산에는 고사리밭이 넓어지고 고사리 그늘이 깊어>졌다는 것, 예전의 기억들이 더 깊게 내려앉았다는 것이다. 시인은 돌아온 고향에서(마음으로 돌아왔다. 아니 예전부터 함께 했었다. 실제 고향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꽃시절의 기억을 해(害)하는 어떤 것들, 앞으로의 고향에 좋지 않을 것들, <무언가 반송해야 할 우편물을 찾>듯 끄집어내어 반송하려 한다.
그는 꽃시절에 <한때 굴러다니던 저 자전거, 흙 덮어쓴 농구 곁에 멈추어> 그 시절을 찾아내려 애쓰고 있다. 신동엽 시인이「껍데기는 가라」에서 알맹이만 남고 모든 껍데기는 가라고 했던 것처럼. 진정한 고향만 남기고 모두 반송할 것이라고 부르짖고 있다. 예전의 고향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라면 바람에 실려가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시인이 돌아왔을 때 <대문에 감나무 한 그루를 세워둔 집터는 집을 버리지 않았>듯 시인은 단 한번도 고향을 버리지 않았다. 다른 것들이 시인을 버렸다. 아니 잊게 만들었다. 그는 이제 <부엌에 오금이 저리게 쪼그려 앉아> 불빛의 파닥거림, 나방의 가녀린 날개 짓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그에게 있어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선명히 다가오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그는 오래도록 그 길을 걸어오고 있다.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간에서의 삶을 간절히 구(求)하고 있다. 고향에 대한 집착은 식을 수 없는 열정 그 자체이다. 그의 소망은 그저 애착의 정도가 아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더불어 살아갈 것을 말한다.
그의 이러한 삶의 태도, 의식 세계는 시집의 끝 부분에 실린「집착에 관하여」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지주목에 쓸 요량으로 산에 올라 반나절 톱을 켰다
나무들이 지난 세월을 메치는 소리
쿵, 쿵 귀가 멍멍하다
지게에 쟁여진 나무들은 아직 맥박이 있다
아카시아 그 위에 난 길
나무의 숨통을 조르며 지나간 칡덩굴
너무 용쓰느라 죽는 줄, 썩어질 줄 몰랐겠지만
나무 피질에 웅숭깊은 골, 하늘로 올라갔구나
-「집착에 관하여」전문
지주목은 무언가를 지탱해주는 조언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시인은 삶을 단단히 버티어 줄 버팀목이 필요했다. 지금 그 지주목을 구하기 위해 삶의 반나절을 올랐고 이제 힘겨우면서도 기껍게 톱을 키고 있다. 베어진 지주목으로 새집의 기둥을 세운다. 베어진 나무는 죽은 나무가 아니다. 아직까지 생명(生命)이 '팔딱팔딱' 하는 살아있는 것이다. 그것이 새로운 집의 기둥이 되었을 때는 또 다른 모습으로 또 하나의 생명이 되는 것이다. 시인의 집은 혼자만 사는 그런 집이 아니다. 포근하고 된장국처럼 구수한 토담집을 혼자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각박한 현실의 삶인가. 그 누구와 더불어 산다면 그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집을 짓기 위해 그는 지주목을 구하기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산에 올라 반나절 톱을 켰다>.
나무들의 아득한 세월이 말한다.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귀가 멍멍하다. 그건 아마도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말들이 많아서일 것이다. 그 많은 시간들을 힘겹고 외로이 걸어 왔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차곡차곡 쌓이는 나무에는 아직도 맥박이 '쿵쿵' 뛰고 있다. <아카시아 그 위에 난 길>은 아직도 생명이 꿈틀대고 희망이 남아 있는 길이었다. 칡덩굴은 나무를 칭칭 감고 올라가고 있다. 반나절을 올라와서 켠 나무는 아직 맥박이 뛰고 있다. 더 깊은 안식을 찾기 위해 더 따스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영원한 잠을 잘 수 없었던 것이다.
3. 맺으며...
문태준의 『수런거리는 뒤란』을 전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은 죽음과 같이 어두운 면의 계속성과 옛것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으로 대변된다.
이정록 시인의 시가 옛것에 대한 추억과 현실의 어둔 상처로만 머물고 있다면 문태준의 시는 옛것에 대한 추억과 더불어 상처를 어루만지고 희망을 발견하는 지점에 가까이 가고 있다. 이정록 시인의 옛것은 말 그대로 옛것이었다. 그 옛것은 현실의 삶에서 위안의 대상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상처난 현실의 삶을 어루만지고 새로운 길의 모색과는 거리가 있다. 또한 시어의 중간자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그 목소리가 강하지 않고 얇다. 일관된 목소리는 시인의 의식을 분명하고 구체화 시켜 줄뿐만 아니라 시인의 삶까지 일관성 있게 만들어 준다. 이런 점에 있어 이정록 시인은 많이 부족했다고 본다. 「눈사람의 상처」에서 볼 수 있듯이 눈사람의 상처는 상처로 남을 뿐이다. 어떤 희망이나 아름다운 것으로 발견되지 않고 앞으로 나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문태준의「상여가 지나가는 마을의 하루」에서 화자는 상여가 지나가는 현실의 삶에 결코 만족하는 범인(凡人)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볼 줄 아는, 희망을 발견할 줄 아는, 군불을 피울 줄 아는 사람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처럼 우리가 가장 모르고 있는 것이 죽음 그 자체이다. 흐리고 캄캄한 밤하늘 그 자체에서 빛을 찾기 보다 그런 하늘일지라도 태양광선이 반짝이는 별빛이 있음을 동시에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화자이다. 보이지 않더라도 언제나 현실의 삶에 서서 군불같이 따스한 빛이 항상 곁에 존재함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는 사람, 그가 바로 문태준 시인이다. 그리고 어둠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뿐만 아니라 어두운 현실 너머에 있는 희망까지 아우르는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어둠과 동시에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 지점, 바로 그 지점 위에 화자는 서 있었다.
또 「집착에 관하여」에서는 모든 것(검은 이미지·옛것)이 결집되어 나타난다. 시인의 고향에 대한 집착은 <나무의 숨통을 조르며 지나간 칡덩굴>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간 것이다. 그전의 것들은 썩어진 것들이고 움푹 패인 깊은 골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조여오던 칡덩굴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 지향점은 희망이 있는 하늘이었다. 칡덩굴처럼 질긴 그의 집착은 결국 희망이 있는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의 집착에 대한 최절정을 보여주는 「집착에 관하여」는 그 안에 많은 목소리가 녹아있다. 평범하게 지나갔을 가벼운 집착에 대해 시인은 끊임없이 매달렸다. 그것은 결국 더욱 가벼워지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의 집착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옛것에 대한 집착, 그것은 쓸모 없는 것이 아니고 다른 희망을 발견하는 불씨요, 열쇠임을 보여준다. 멈추어 버린 고향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새로운 고향의 모습을 꿈꾸는 시인의 의지는 참으로 눈물겨운 싸움이 될 것 같다. 지금의 현실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기에 더욱 그러하다. 더 깊게 해석한다면 집착이 마냥 집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그의 詩는 어떻게 보면 철학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이런 것은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시인에게 아낌없는 독려(督勵)를 해주는 것은 궁상맞은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런 태도를 지닌 사람이라면 이미 희망을 발견했거나 어디에 희망이 있는지 어렴풋이 아는 사람이다. 또한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그 때 그 모습 이후 성장이 없었던 고향(옛것)은 이제 변화의 필요성이 다가왔음을 인식하게 해 준다. 물론 변화의 모습은 고향 안에서의 변화, 주변세계와의 동등한 속도감으로서의 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문태준의 詩는 새롭고 급속한 변화에 속수무책(束手無策) 당하기만 하는 우리들에게 따스한 언어로 다가와 조용히 어깨들 토닥이듯 그렇게 쓰다듬어 주고 있다. 그의 힘겨운 혼자만의 싸움은 그의 詩가 끝나는 날 까지 계속 될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아낌없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 주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문태준 시인의 끊임없는 노력의 성과가 꼭 이루어지길 빌어 본다.
참고문헌)
문태준, 『수런거리는 뒤란』, 창작과 비평사, 2000
이정록,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문학과 지성사, 1999
글쓴이 : 별과 詩
鄭訓敎印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