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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문학관.한국시낭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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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문학 스크랩 경남 함양의 한시자료 모음
지리산문학관.한국문학문화재협회 추천 0 조회 570 18.11.13 05: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98년 11월
   함 양 군 수

후면

          차 밭(茶園)

                        점필재 김종직 시

신령한 차 받들어 임금님 장수케 하고자 하나
신라때부터 전해지는 씨앗을 찾지 못하였다
이제야 두류산 아래에서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또한 기쁘다.

대숲 밖 거친 동산 1백여 평의 언덕
자영차 조취차 언제쯤 자랑할 수 있을까
다만 백성들의 근본 고통 덜게 함이지
무이차같은 명다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欲奉靈苗壽聖君
新羅遺種久無聞
如今
得頭流下 힐才+吉+頁
且喜吾民寬一分

竹外荒園數畝坡
紫英鳥嘴幾時誇
但令民療心頭肉
不要籠加粟粒芽

後學 金侖秀 譯
後學 李昌九 書

함양문화원
한국차문화협회
가천문화재단
일선김씨대종회

 엄천사(嚴川寺)와 헌강대왕 99.6.4.

             <해동 강우 천령군 지리산 엄천사 흥폐 사적> (含山抄譯)

 천령군 지리산 엄천사는 신라의 결언선사(決言禪師)가 창건한 것이다. 당나라 건부(乾符) 10년(건부는 6년에 그치고 이때는 中和 3년임) 계묘(신라 헌강왕9년,883) 봄에 헌강대왕이 화암사(華岩寺:화엄사)에 사신을 보내어 결언선사를 초빙하였다. 선사가 이르자 왕이 예로써 대우하고 분부하였다.
"궁궐에 선사를 초청한 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불도로써 나라를 다스렸지요. 법흥왕의 도리사, 진흥왕의 황룡사, 무열왕의 감은사, 애장왕의 해인사, 경문왕의 숭복사는 다 선왕을 위해 지은 것입니다. 때때로 그 절에 불공을 드려 선왕의 명복을 빌고 국운의 연장을 기원했으니 이것은 대대로 계승하는 대업입니다. 내가 그 일을 잇지 못한다면 선왕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선사를 번거롭게 이곳에 오게 한 것은 선사를 통해 그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듣건대 해동의 명산이 많지만 지리산이 가장 높고 깊다고 하니 선사가 그곳에 가서 터를 잡고 절을 지어 영원히 우리 선고왕(先考王)을 위해 명복을 비는 원찰로 만들어준다면 그 자비와 보시가 클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사가 명을 받들어 지리산에 와서 산을 따라 맥을 점치고 시내를 따라 거슬러올라가다 마침내 이 땅을 얻었다. 보고를 받은 왕은 백성을 동원하고 조세를 돌려 쓰게 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같이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절이 지어지자 왕은 엄천사라 하사하였다. 그뜻은 엄히 계율을 지켜 한량없는 복을 받는 것이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낙성식의 법회를 열 때 왕도 친히 행차하여 선고왕을 위하여 불공을 드렸다. 드디어 결언대사를 보정사(輔政師)로 삼고 사라국사(娑羅國師)라고 칭하였고 이 절의 주지로 삼았다.
 왕비 김씨가 곡식 천 섬을 희사하여 죽은 아우를 위해 명복을 빌고 최치원(885년 귀국)에게 명하여 발원문을 짓게 하였다.
 고려 시대에 절이 퇴락했으나 보수하지 못하였다. 남송 건염(建炎) 2년 무신, 고려 인종대왕 즉위 6년(1128)에 고승 성선(性宣) 대사가 강을 건너 서유(西遊)하다가 이 절에 유숙하고는 절의 퇴락상을 보고 발분하여 중수할 것을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시주자를 구하여 중수하니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성선대사는 강법사(講法師)가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절은 다 불에 소실되었다. 강희(康熙) 25년 정묘 우리 임금님 즉위 14년(숙종13,1687)에 안양사(安養寺:지금의 문정리 법화사) 승려 인욱(印旭)과 혜문(惠文) 등이 안양사가 험고한 데 있어 왕래가 어렵다며 평탄한 엄천사 터로 절을 옮기자고 대중에게 동의를 얻고 군수와 관찰사에게 진정하여 승낙을 받아 수백 명의 승려들이 재물을 모으고 공역을 담당하여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 땅은  향교의 수세지(收稅地)로 편입되어 있어 절을 지을 수 없는 형편이라 세월이 천연되었다.
 경오년(숙종16,1690) 봄에 동의를 얻어 절을 중창하게 되었다. 벽암 각성(碧巖 覺性:1575-1660)의 손자인 침허(枕虛)의 아들 죽계당(竹溪堂) 승현(僧絢) 대사가 지휘하여 중건하였다. 옛 주초를 인하여 18동(棟) 100간의 건물을 지었다. 임신년(1692) 봄에 왕명이 내려 4결(結)이 면세전으로 되었다.
 승민(勝敏)이 사적을 지어달라고 청하여 강희 32년 계유(1693,숙종19) 2월 5일에 무가암(無可菴)의 탄부(坦夫)가 사적기를 지었다. 이후 48년 기축(1709,숙종35) 6월 2일에 시와 서문을 지었다. (시서 생략)

 *엄천사는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절터 마을에 있던 큰절이었는데 조선 후기에 폐사되었다. 신라 시대에 하동, 구례, 함양 등지에 김대렴이 중국에서 가져온 차나무를 심어 전래되는 것을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선생이 함양군수(1471-1476)로 부임한 뒤 새로 차밭(茶園)을 조성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것을 기념하는 사적비가 마을 앞에 서 있다.  

*결언선사(決言禪師) : 865년(신라 경문왕 5년): 화엄대덕(華嚴大德) 결언(決言)이 해인사에서 5일간 경을 강의. 大嵩福寺碑銘: 遽命有司。虔修法會。華嚴大德釋決言承旨於當寺。講經五日。所以申孝思而薦冥福也。 

해인사는 서기 802년(신라 애장왕 3년) 10월16일 의상 스님의 법손인 순응(順應)과 이정(利貞) 스님이 지은 화엄 도량이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牛頭山: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들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願堂)을 짓고 정사(政事)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決言大德)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아 해동(海東) 제일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였다. *한편,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던 해인사 비로자나불좌상의 제작연대가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83년으로 밝혀져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목조 불상으로 판명됐다.

고운 최치원의 친형인 현준대덕(賢俊大德)은 정강왕 1년(886년)에 화엄경사(華嚴經社)를 지리산 화엄사에 결성하고 경전의 글을 베껴 썼으며, 현준과 함께 결언대덕(決言大德)도 화엄의 종장(宗匠)들이라 할 연기(緣起), 지엄(智儼), 의상(義湘), 원측(圓測)을 위해 남악(南岳)인 화엄사와 북악(北岳)인 부석사에서 제를 올리는 것을 일상적인 일로 삼았다.

해인사 주지를 지내고 화엄사에 있던 결언선사가 엄천사를 창건하였으니 엄천사는 화엄사, 해인사와 함께 화엄종의 중요 사찰이 된 것이다.

결언선사는 883년(헌강왕9)에 엄천사 창건이라 했는데 낭원대사 개청은 이미 859년(헌안왕 3)에 엄천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창건 연대가 오히려 올라가야 할 것이다. 연대 기술에 착오가 있은 것이다.

중창기창건 이후 해인사의 중창에 관한 기록은 최치원이 쓴 「신라 가야산 해인사 결계장기(結界場記)」에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해인사는 창건 당시 터가 험하고 규모가 작았는데 약 100년이 지난 효공왕 1년(897) 가을 다시 중창할 것을 합의하고 90일 동안 참선한 뒤에 3겹의 집을 세우고 4급의 누(樓)를 올려서 사역을 확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해인사 중수에 관한 기록은 창건으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고려 건국 초기의 『균여전』에 보인다. 이곳 기록에 의하면 해인사의 희랑(希朗)대사는 신라말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었다.

*낭원대사(朗圓大師) 개청 (開淸, 835~930)

대사의 호는 개청(開淸)이었고 속성은 김씨이며 진한(辰韓)의 계림인으로 흥덕왕 10년(835) 4월에 태어났는데, 그 모습이 남보다 뛰어나 어려서부터 입도(入道)하기를 간구하여 부친의 허락을 받고 화엄사로 출가하여 정행법사를 스승으로 섬기며 화엄학을 익혔다.
강주(康州)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오대산의 통요대사(通堯大師, 범일 [梵日, 810~889])를 뵙고 수행을 했다. 경문왕도 그의 덕행이 높음을 듣고 왕도(王道)가 위급할 때 돕도록 국사의 예(禮)로 대우했으며, 보현산사에서 입적하니 속년(俗年) 96세, 승납 72세였다. 후에 낭원대사라 시호(諡號)하고 탑명(塔名)은 오진(悟眞)이라 했다.

*정행법사(正行法師) : 화엄사 사적에 의하면 경문왕 10년(870)에 잡화(雜花:화엄)의 묘지(妙旨)를 전하고 낭원(郞圓)이 청강(聽講)하였다고 하였다.

*범일(梵日 810~889) : 성은 김(金). 시호 통효(通曉). 품일(品日)이라고도 한다. 15세에 출가하여 829년(흥덕왕 4) 경주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김의종(金義宗)을 따라 당(唐)나라에 가 제안(濟安)에게 6년간 사사하였다. 844년(문성왕 6년) 탄압으로 승려를 도태하고 절을 파괴하는 법난(法難)을 만나 상산(商山)에 피신, 선정(禪定)하다가 847년(문성왕 9) 귀국, 백달산(白達山)에서 좌선하고 굴산사(崛山寺)에서 40년을 보내면서 경문(景文)·헌강(憲康)·정강(定康)의 3왕으로부터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되어 주기를 권유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수도와 불경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엄천사는 나말여초의 관단(官壇)이 설치된 계단사원(戒壇寺院)으로서 화엄사, 해인사와 함께 화엄종의 중요 사찰이었다.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공증 수계 장소인 계단사원에서 구족계를 받아야 했는데 남방의 계단사원은 강주(서부경남지방)에선 엄천사가 유일하였다. 계단사원은 신라의 통일후에 冥州 福泉寺, 康州 嚴川寺, 全州 華嚴寺, 全州 金山寺, 漢州 莊義寺, 白城郡 長谷寺, 熊州 普願寺 등이 그 기능을 하면서 승단의 형성에 계율을 강조하였다. 여기에는 선종에서 출발한 승려들도 수계함으로서 신라에서 공적인 역할을 한 사원이었다. 특히 福泉寺, 嚴川寺, 華嚴寺는 官壇이라 명시되어 나머지 수계 기능을 한 사원도 관단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 사원은 대체로 9州에 망라되어 성립되었다. 주: 韓基汶, 「新羅末 高麗初의 戒壇 寺院과 그 機能」, ꡔ歷史敎育論集ꡕ12, 1988.

*성선(性宣) 대사 : 고려 인종대왕 즉위 6년(1128)에 엄천사 중수, 강법사가 되다.

고려 인종 시대 진억(津億)이 지리산 오대사(하동군 옥종면 궁항리) 절터에 수정사(水精社)란 절을 지었다. 송(宋)의 선화(宣和) 5년(1123, 고려 인종 1) 계묘(癸卯) 7월에 짓기 시작하여 건염(建炎) 3년(1129, 고려 인종 7) 기유(癸酉) 10월에 준공하여 낙성법회(落成法會)를 3일간 베풀었다. 엄천사(嚴川寺)의 수좌(首座)인 성선(性宣)을 청하여 경문을 강설하게 하였다. 임금께서는 동남해안찰부사 기거사인 지제고(東南海按察副使起居舍人知制誥)인 윤언이(尹彦頤)에게 명하여 분향을 행하고, 인하여 은 2백냥을 내리시어 이를 칭찬하였다. <지리산수정사기>

오대사는 조선 시대에도 절이 건재하였으니 남명 조식 선생이 오대사를 읊은 시도 있다. 지금은 국선도에 팔려 백궁선원이란 수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법우화상(法祐和尙)-

무당이 굿을 할 때 한 손에 금방울을 흔들고 한 손에 채색 부채를 들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고 너울너울 춤추며 부처님 이름을 부르고 또한 법우화상을 부른다. 이것은 대개 유래가 있다.

지리산의 엄천사(嚴川寺)에 법우화상이 있었는데 매우 도가 높았다. 어느날 한가로이 있을 때 갑자기 보니 산골짝의 냇물이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불어났다. 그 근원을 찾다가 천왕봉 꼭대기에 이르러 키크고 힘센 한 여인을 보았다. 스스로 말하기를, "성모천왕(聖母天王)으로서 <성모천왕은 곧 지리산신이다. 고려 때 박전지(朴全之)가 지은 용암사(龍巖寺) 중창기에 보인다.> 인간계에 귀양 내려왔는데 그대와 인연이 있어 마침 물로 도술을 부려 스스로 중매한 것이다." 고 하였다.

드디어 부부가 되어 집을 짓고 살았다. 딸 8명을 낳아 자손이 번성하였고, 무술(巫術)을 가르쳤다. <지금 산 아래에 백무촌(百巫村)이 있다고 한다.> 금방울을 흔들고 채색 부채로 춤추며 아미타불을 부르고 법우화상을 부르면서 동네방네를 다니며 무업(巫業)을 일삼았다. 그러므로 세상의 큰 무당은 반드시 한 번 지리산 꼭대기에 이르러 성모천왕에게 기도하여 접신(接神)한다고 한다.《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제15장》이능화(李能和 1869~1944) 지음.

*백무촌은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백무동으로 현재는 백무동(白霧洞 또는 百武洞)이라 표기한다. 고전 판소리 전집의 변강쇠가에 보이는 변강쇠가 나무한 백모촌(百母村)이 바로 이곳이다. 변강쇠가는 함양을 배경으로 하는 고전판소리문학이다.

*마적도사에 관한 첫번째 전설

지금의 경남 함양군 휴천면 용유당소 근처에 마적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마적도사라는 법우화상이 살았다.
하루는 천왕봉에서 흘러내리는 엄천강에 구름 한 점 없는 청천 맑은 날인데도
붉은 황톳물이 홍수져 내려가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강을 따라 올라가 보니
지리산 천왕봉의 천태산 마고할멈이 앉아 오줌을 누더란다.
화상은 이 여자가 바로 천생배필임을 알고 부부의 인연을 맺고 결혼을 하였다.
부부는 딸을 아흔 아흡이나 낳았는데 모두가 무당이 되었다.
즉 마고할멈인 어머니까지 합쳐 백명의 무당이 되어 백무동이 생겨났고
그들이 조선 팔도에 흩어져 팔도 무당의 씨가 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무열왕때 실존 인물이라는 설이 있는 마적도사가 마적사를 창건하였다 하니
마적사의 역사가 통일신라시대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휴천면 문정리 도정정사

고려처사 성산이공의 묘


고려왕조는 중기 이후 권력자가 발호하고 외적이 침입하여 종묘 사직이 위태하고 백성이 어육이 되었다. 이때에 기미를 알고 은둔하여 물들지 않은 사람으론 녹사 한유한①과 요산공 이억년②이 유일할 것이다. 녹사는 고려 신종 시기에 최충헌(1149~1219)이 집권하고 몽고가 국토를 잠식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 서쪽으로 은둔하였다. 뒤에 나라의 초빙을 받게 되자 시를 지어 뜻을 나타내었다. 그 시에,

“한 편의 조서가 산골짝에 날아 들어오니

비로소 이름이 인간 세계에 알려진 것을 알게 되었네”

고 하였다. 요산공은 충렬왕(재위 1274∼1308) 때에 원나라가 송나라(960∼1279)를 멸하고 나라의 기강이 해이된 것을 보고 새로 문과 급제자의 신분으로 떠나 지리산 북쪽에 숨어 은거하는 집을 한 채 짓고 도정정사라고 이름붙였다.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10년의 속세 일은 꿈 밖의 일인데

청산 어느 곳에서 홀로 대문을 닫아걸고 있는가?”

하였으니 이 한가지 일로도 공의 고상한 뜻이 김이상(1232~1303), 허겸(김이상의 제자, 다 송말원초의 은사임)③과 상통함을 상상할 수 있는데 그들은 드러나고 요산공은 묻힌 것이 이와 같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더군다나 한 녹사는 남명의 평가를 얻어 산봉우리에 옥을 얹어놓고 수면에 달빛이 생긴 듯 백세에 빛나지만④ 요산공은 일두(정여창)선생과 탁영(김일손)선생의 평가를 얻지 못하고 그 <두류록>에 누락되었고 또 자손이 영락하여 우리 대동보에도 빠졌으니 거듭 비탄할 만하다.

공은 곧 우리 선조 농서공(이장경)의 제4자이고 매운당 문열공 이조년(1269~1343)⑤의 넷째 형이다. 묘소는 함양군 엄천(휴천면 문정리 문하마을) 임좌병향의 언덕에 있다. 사람들이 지금도 그 마을을 가리켜 억년동⑥이라고 한다. 사림이 안산서원⑦(경북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성주이씨 22현을 합사)에 배향하였다.

부인은  경주 이씨로 이용간의 딸이다. 쌍분으로 장례지냈다. 아들 태성은 밀직사사이고 태문은 낭중이다. 사위는 광평군 이능⑧(이호성의 5세조)이다. 손자는 일방으로 장남 소생이고 함방은 차남 소생이다. 증손, 현손은 다 기록치 않는다.

후손 이교연 등이 비석을 다듬어 언덕에 세우고자 하여 내게 기록을 청하였다. 우선 그 가문 전승의 기록을 토대로 그 글을 부연하여 이렇게 적는다.

을축년(1925) 3월 방손 이도복⑨(1862~1935) 삼가 지음

후학 청송 심상복⑩(1876~1951) 삼가 씀

후학 언양 김윤수 삼가 옮김

시조시인 김용규 탁본


李億年墓碑文 


高麗處士星山李公之墓

配慶州李氏祔左

勝國自中葉以降 權臣跋扈 外寇陸梁 宗社綴旒 生靈魚肉 當是時 能見幾而

作 隱遯不汚 其惟韓錄事惟韓 李樂山諱億年乎 錄事當神宗時 見崔忠獻用

事 蒙古蠶食 棄官隱遯于方丈之西 後蒙旌招 而以詩示志曰 一片絲綸飛入

洞 始知名字落人間 樂山公則 當忠烈王時 見胡元簒宋 王綱解紐 以新榜文

科 去隱于方丈之北 築一巖栖之室 牓曰道正精舍 嘗有詩云 十載紅塵夢外

事 靑山何處獨掩扉 祗此一事 可想公志尙 與金仁山許白雲同調而其顯晦

之相遜 如彼者何哉 且况錄事得南冥而峯頭冠玉 水面生月 有光於百世 若

吾樂山公 不得於一蠹濯纓 而見漏其頭流錄 又因子姓之零替 漏我大同譜

重可悲也 公卽我先祖隴西公之第四子 而梅雲堂文烈公諱兆年之叔兄 墓

在咸陽郡嚴川負壬之阡 時人至今指點其里曰億年洞 士林從享安山書院

夫人慶州李氏龍幹女 葬用魯人禮 子男台成密直司事 台文郎中 女壻廣平

君稜 孫男日芳長房出 涵芳次房出 曾玄不盡錄 後孫敎然等 將伐石以竪

陘 請余以記之 姑據其家傳所錄 抽演其說 如此云爾

旃蒙赤奮若淸明節傍裔孫道復謹撰

後學靑松沈相福謹書


① 한유한-<고려사 열전>

한유한은 역사에 그 계보 기록이 없다. 대대로 개성에 살았고,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최충헌이 독재하고 벼슬을 파는 것을 보고 난리가 날 것이라고 하고는 처자식을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굳은 절개로 깨끗하게 살며 외부인과 교유하지 않으니, 세상에서 그 풍취를 고상하게 여겼다. 조정에서 불러 서대비원 녹사로 삼았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고 깊은 골짝으로 이거한 채 종신토록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거란 병의 침략이 있었고 몽고 병이 연이어 침입하였다.

韓惟漢. 

韓惟漢史失其系世居京都不樂仕進見崔忠獻擅政賣官曰難將至矣. 挈妻子入智異山淸修苦節不與外人交世高其風致. 徵爲西大悲院錄事終不就乃移居深谷終身不返未幾果有契丹之難蒙古兵繼至.

 

② 이억년(李億年) : 자는 인여(仁汝), 호는 요산재(樂山齋), 1285년(충렬왕11년) 문과에 급제하여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당시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정이 문란해지자 <천재홍진몽외사(千載紅塵夢外事) 청산하처독엄비(靑山何處獨掩扉)>라는 시를 남기고 치사(致仕), 위성(渭城: 함양) 엄천리嚴川里)로 들어가 도정정사(道正精舍)를 짓고 공맹의 도를 강론하였다. 성주의 안산서원, 금릉의 상친사에 제향.

《성주이씨세보》에 “또 다른 이름은 영(永)이요 호는 요산재이다. 을유년(1285, 충렬왕11)에 문과에 올라 개성유수를 역임하고 무술년(1298, 충렬왕24)에 위성으로 이거하여 도정정사를 짓고 십재홍진몽외사하니 청산하처독엄비란 시를 지었다. 묘는 함양 남쪽 휴천면 문정촌 장항촌내 임좌다. 영정은 안산사에 봉안하다. 부인은 경주이씨 용간의 딸이요 묘는 쌍분이다.” 하였으니 묘비문과 족보 행적이 상이하다. 묘비문은 문과급제하자마자 은거한 것으로 되어 있고 족보는 개성유수를 역임한 뒤로 서술하고 있다. “10년의 홍진을” 하는 시구를 보면 10여 년 벼슬살이를 한 듯하다. 다만 개성유수는 조선 세종 20년(1438)에 처음 설치되었다.

<연려실기술>을 지은 이긍익(李肯翊, 1736~1806) 시대까지는 이억년의 문과급제 사실만 알려지고 개성유수 벼슬 사적이 밝혀지지 않았을 수 있다. 고려 충렬왕 24년(1298) 충선왕이 1월부터 8월까지 왕위에 올라 재임중 여러 사람을 중경유수나 개성부윤을 시켰는데 이억년의 이름은 없지만 그전에라도 역임했을 수 있다. 이억년은 충선왕파로서 충렬왕이 다시 왕위에 복귀하자 산간오지 함양 지리산 도정동으로 피신하여 은거하고 충렬왕 34년(1308)에 충선왕이 다시 복위했을 때는 이미 별세하여 복권되지 못한 듯하다.

<연려실기술>(1776, 영조 52년)의 성주 서원조

“충현사(忠賢祠) 만력 임인년(1602,선조35)에 세웠다. : 이조년(李兆年)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 ㆍ이인복(李仁復)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고,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초은(樵隱),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ㆍ이숭인(李崇仁)호는 도은(陶隱),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다. 태조조에 들어 있다. ㆍ정곤수(鄭崑壽)선조조의 명신.

안봉영당(安峯影堂) 숭정 을해년(1635,인조13)에 세웠다. : 이장경(李長庚)고려조 사람. 농서군공(隴西郡公)ㆍ광산부원군(廣山府院君)에 봉해졌다. ㆍ이백년(李百年)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다. ㆍ이천년(李千年)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ㆍ이만년(李萬年)시중(侍中)에 추봉되었다. ㆍ이억년(李億年)문과에 합격하였다. ㆍ이조년(李兆年)위에 보라. ㆍ이인기(李麟起)평양 부윤을 지냈다. ㆍ이승경(李承慶)평장사를 지냈다. ㆍ이포(李褒)문하시중을 지냈다. ㆍ이원구(李元具)호는 가정(稼亭), 성산군(星山君)을 봉했다. ㆍ이인복(李仁復)위에 보라. ㆍ이인임(李仁任)출향(黜享)되었다. ㆍ이인민(李仁敏)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이다. ㆍ이숭인(李崇仁)앞에 있다. ㆍ이직(李稷)태조조의 정승 ㆍ이제(李濟)태조조의 명신 ㆍ이사후(李師厚)한성윤(漢城尹)이다. ㆍ이육(李稢)호는 지강(芝江), 감사를 지냈다. ㆍ이광적(李光廸)공조 판서를 지냈다.”

 

이억년과 이조년 형제우애 이야기- 투금탄(投金灘)

서울시 강서구 가양2동 앞 한강여울(지금은 )을 투금탄이라 한다. 『성주이씨가승』에 적혀있는 내용을 보면 고려 말기의 명사인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젊었을 때에 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덩이를 주워 둘이 나눠가졌다. 형제는 공암나루를 건너고자 나룻배를 탔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한강 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형이 깜짝 놀라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이에 동생은 “제가 어찌 황금 귀한 줄을 모르겠습니까. 평소에 두터웠던 우리 형제의 우애가 아닙니까? 그런데 황금을 주운 뒤에 만약 형이 없었던들 나 혼자서 금덩이 두개를 다 가질 수 있었을 텐데......하는 사악한 마음이 들어 형제의 우애에 금이 가려고 해서 액물인 황금을 강물에 던져 버린 것입니다” 했다. 이에 형님도 네 말이 옳다고 하면서 자신이 가졌던 금덩이마저 물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③ 김인산 [金仁山 1232~1303] 

중국 송말(宋末) ·원초(元初)의 유학자.

본명  김이상(金履祥)

별칭  자 길보(吉甫) ·길부(吉父), 인산선생

국적  중국 송(宋)ㆍ원(元)

활동분야  철학

출생지  중국 저장성[浙江省] 란치[蘭谿]

주요저서  《통감전편(通鑑前編)》 《대학장구소의(大學章句疏義)》

자 길보(吉甫) ·길부(吉父). 이름 이상(履祥). 저장성[浙江省] 란치[蘭谿] 출생. 인산선생(仁山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군서(群書)에 통달하였다. 장년이 되면서 정주학(程朱學)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왕노재(王魯齋) ·하북산(何北山)에게 사사하고, 주자(朱子) ·황면재(黃勉齋)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아, 절학(浙學)을 중흥하였다. 송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 기책(奇策)을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으며, 송나라가 멸망하자 진화산[金華山]에 숨어 살았다. 문집에 《인산집(仁山集)》, 주요저서에 《통감전편(通鑑前編)》 《대학장구소의(大學章句疏義)》 등이 있다.


허백운(許白雲) 허겸(許謙)

절강성 금화 사람이다. 자는 익지요 어려서 고아 되고 학문에 힘썼다. 인산 김이상에게 수업하여 그 비오를 다 전수받았다. 책은 읽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마을 밖을 나가지 않은 지 40여 년이었다. 공경대부들이 여러 번 천거했지만 초치하지 못하였다. 만년에 강학하여 정성을 다하니 종유한 제자가 1천여 인이었다. 사방의 선비들이 문하에 오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사대부들이 그 고을을 지날 때는 반드시 그 집에 들러 안부를 물었고 간혹 예법과 정무를 묻기도 하였는데 듣고서는 모두 만족해하였다. 늦게 백운산인이라 자호하니 세상에서 백운선생이라고 불렀다. 졸하자 문의공이라고 하였다. 저서에 《독서총설》, 《시집전명물초》, 《백운집》 등이 있다. 성리학자로 원초에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금원사대가로 불리는 명의 단계 주진형의 스승이다.


④ 산봉우리에 옥을 얹고: 남명(조식)선생의 <유두류록>에서 인용한 것이다.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 세 군자를 높은 산과 큰 내에 비교한다면, 십층이나 되는 높은 봉우리 꼭대기에 옥을 하나 더 올려놓고, 천 이랑이나 되는 넓은 수면에 달이 하나 비치는 격이다.

而比韓鄭趙三君子於高山大川, 更於十層峯頭冠一玉也, 千頃水面生一月也.


⑤ 이조년 [李兆年 1269~1343]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성주(星州)

호  매운당(梅雲堂) ·백화헌(百花軒)

별칭  자 원로(元老), 시호 문열(文烈), 성산군(星山君)

본관 성주(星州). 자 원로(元老). 호 매운당(梅雲堂) ·백화헌(百花軒). 시호 문열(文烈). 1294년(충렬왕 20) 진사로 문과에 급제, 안남서기(安南書記)가 되고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 ·비서랑(書郞)을 역임하였다. 1306년 비서승(書丞) 때 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瑞興侯) 전(琠)을 충렬왕의 후계로 삼으려 하자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충렬왕을 보필하였으나 이에 연루되어 귀양갔다. 그 후 풀려나와 1313년간 고향에서 은거했고, 심양왕(瀋陽王) 고(暠)의 왕위찬탈 음모를 원나라에 상소하였다.

1230년 충숙왕 귀국 후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郞)을 거쳐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승진, 수차 원나라에 다녀왔다. 1240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왕의 음탕함을 간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이듬해 사직, 후에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이 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l수가 전한다.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 충혜왕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⑥ 억년동: 억년동은 미상이다.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백련동은 이억년의 백형인 이백년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문정리는 일두(문헌공 정여창)선생이 살만하다고 하여 붙여진 문헌동과 이억년의 도정정사가 있던 도정동을 합하여 명칭한 것이다.


⑦ 안산서원: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안산촌(星州郡 碧珍面 紫山里 安山村)에 역대(歷代) 성주이씨(星州李氏) 중에서 도덕(道德), 경술(經術), 문장(文章), 관직(官職)이 뛰어나 국가에 공헌도(貢獻度)가 높은 현조(顯祖) 영정(影幀) 22位를 모시고 제향(祭享)하는 서원(書院)이다.

서원(書院)의 제도는 당나라 현종 때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 등을 설치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원래는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인재를 양성하는 사설학습기관 이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조 중기부터 보급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는 신라 불교의 유풍(遺風)을 그대로 계승하였던 까닭에 지방마다 국법으로 건립한 사찰이 있어서 국가에 공로가 현저한 분은 사후(死後)에 반드시 출생지 소속 사찰에 사당(祠堂)을 따로 설립하도록 하고 현인군자(賢人君子)들은 초상화(肖像畵)를 만들어 후세에까지 그 위업(偉業)을 전하도록 하였으니 서원(書院)과 비슷한 제도라 하겠다. 이 고장 토성인 성주이씨는 고려말에 현창(顯彰)한 분이 많아서

중시조 농서군공 이장경(中始祖 西郡公 李長庚),

매운당 이조년(梅雲堂 李兆年),

경원공 이포(敬元公 李褒),

초은공 이인복(憔隱公 李仁復),

도은공 이숭인(陶隱公 李崇仁),

형재공 이직(亨齋公 李稷)

여섯 분의 영정(影幀)을 국가의 숭봉(崇奉)으로 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인촌에 위치한 이장경(李長庚)의 묘소 옆 선석사(禪石寺)에 사당(祠堂)을 세우게 하고 배향(配享)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세종25년(1443년) 적서(嫡庶) 18王子의 태실을 만들게 됨으로서 산소는 오현(梧峴)으로 이장하고 사당은 이곳 안산사(安山寺)로 옮겼으나 그 연대는 미상이다.

그후 선조(宣祖) 14년(1581) 후손 이현배(李玄培)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영당(影堂)을 중수(重修)하고 제기(祭器) 등을 새로 비치하였으며, 11년후인 임진왜란때 왜적(倭敵)이 침공하여 영정(影幀) 일부를 훔쳐 갔으나 승(僧) 경종(敬宗)이 나머지 영정(影幀)을 잘 수습하여 땅속에 묻어 보관하므로서 정유재란의 병화(兵火)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선조(宣祖) 39년(1606) 외손(外孫) 이덕온(李德溫)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사림(士林)과 더불어 영당(影堂)을 세 번째로 중수(重修)하였으며,광해(光海) 9년 후손 이욱(李稶)이 경향각지의 친족들과 더불어 네 번째로 중수하고 현종(顯宗) 6년(1665) 6칸 신주(神廚)와 4칸 재실(齋室)을 완성 하였다.

인조(仁祖) 10年(1632)경상감사(慶尙監司)의 허가를 얻어 재실(齋室) 동편에 새터를 잡아 유림(儒林)에서 이문환(李文煥), 곽천우(郭天佑) 등이 도감이 되어 영당(影堂)을 새로 짓고 열세분을 추배(追配)하였으니,

밀직사사이백년(密直司事 李百年),

참지정사 이천년(參知政事 李千年),

문하시중 이만년(門下侍中 李萬年),

개성유수 이억년(開城留守 李億年),

평양윤 이인기(平壤尹 李麟起),

요양성참지정사 이승경(遼壤省參知政事 李承慶),

대호군 이원구(大護軍 李元具),

문하시중 이인임(門下侍中 李仁任),

대제학 이인민(大提學 李仁敏),

경무공 이제(敬武公 李濟),

한성판윤 이사후(漢城判尹 李師厚)등이고

이조판서 이욱(吏曹判書 李稶),

정헌공 이광적(靖憲公 李光迪)이 추배된 것은 그 뒤의일이다.

숙종(肅宗) 6년(1680)에 다시 문정공 이지활(文靖公 李智活),문경공 이항(文敬公 李恒),

사헌부 전중어사 이조(司憲府 殿中御史 李晁) 등 세분을 추배(追配)하고 춘추(春秋)로 인근 유림(儒林)에서 모여 제사 지냈으나 고종(高宗) 8년(1871) 서원(書院) 철폐령(撤廢令)에 따라 안산영당(安山影堂)으로 이름을 바꾸는 수난(受難)을 겪었다. 그후 병진년(1916) 다시 중수하고 영정(影幀)의 감실(龕室)을 구비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매년 한식일(寒食日)에 제향(祭享)한다.

서원(書院) 앞에는 농서군공(농西郡公)의 신도비(神道碑)는 철종 6년(1855) 경향 각지의 자손들이 뜻을 모우고 후손 종영(鍾英)이 주관하여 세웠는데 좨주 매산 홍직필(祭酒 梅山 洪直弼)이 비명(碑銘)을 짓고 판서 응와 이원조(判書 凝窩 李源祚)가 글씨를 썼다.

영정(影幀) 10종 13폭은 경상북도 유형(有形) 문화재 제245호로, 영당(影堂)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지방(地方) 문화재(文化財) 제217호로 각각 지정 되었다. 진영(眞影)은 별도 봉안(奉安)하고 있고 현재 봉안된 영정은 100여 년 전에 개모(改摹)한 것이다.


⑧ 이능 5세손- 이호성(李好誠)

  이호성은 조선 초기 무신으로 본관은 성주이고 호는 동산이며, 삼중대광 광평군 이능의 5세손으로 경남 함안에서 1397(태조6)에 태어나  금산에서 1467년(세조13)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정무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고 달리는 말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에 출중하였으며 병법에 능통하였다.

  세종 9년(1427년) 무과에 급제, 사복시직장이 되고 군기시부정 등을 역임하였다. 1459년 첨지중추원사 겸 경상좌도도 절제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동지중추원사가 되었으나 연로한 아버지의 봉양을 위하여 사직을 요청하였으며 세조는 이를 불쌍히 여겨 경상우도처치사에 임명하였다. 만년에 고향에 돌아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1449년 거제 현감에 임명되어 읍을 옮기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새로 쌓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한편, 국방을 튼튼히 했다. 그 후 보성, 경산 고을을 맡아 청백명관으로 알려져 이듬해 문종이 즉위하자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공조참의 거쳐 국정이 불안해지자 노모의 봉양을 애걸하여 경주 부윤으로 나갔다가 단종 1년(1453년) 경상우도처지사가 되고 144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세조 3년(1457)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거치면서 왜인의 변란에 대한 대비책으로 연변제읍의 제색군인을 동서양계의 예와 같이 각기 본 읍에 소속, 수비하게 하고 영진군을 내지 군사로 소속시켜 불의의 일에 임하도록 하며, 아울러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는 방책과 야인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으로 지형적으로 유리한 곳에 큰 성을 쌓아 후환을 미리 제거하자고 건의하였다.

  일찍이 최윤덕의 북정 때 편비로 이름을 떨쳐 비장군 이라 불렀으며, 20년 동안이나 북방을 수비하여 산천의 형세를 환히 알기 때문에 공격과 수비를 함에 실수가 없었다.


⑨ 이도복(李道復) (1862~1935, 철종13~)

성주인 경무공파 19세 수(壽)77세

14세 강촌(江村) 여공(如珙)의 5세손이다.

자(字) 양래(陽來), 호(號) 후산(厚山), 거(居) 단성(丹城) 신안(新安)

철종(哲宗) 13년 임술(壬戌) 1862년 5월 28일생이며 1938년 무인(戊寅) 윤(閏) 7월 8일 졸(卒)했다.

졸(卒) 36후 계사(癸巳)에 사림(士林)에서 진안군 영곡사(靈谷祠) 배향(配享) 하였다.

동곡(桐谷) 조(晁)의 후손, 동범(東範)의 자(子)로 천자(天資)가 강의(剛毅)하고 기우(器宇)가 준정(峻整)하여 박만성(朴晩醒), 송연재(宋淵齋)에게 의기(李氣)와 학문을 전수 받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곽종석(郭鍾錫)과 조약무효와 오적을 참형할 것을 상소(上疏)하였으며 최면암(崔勉庵)에게 ?수신사명(修身俟命)?이란 글을 받아 후일을 기약했다. 스승 문집간행에 성실히 하고 한유(韓愉)와 깊은 학문을 토론하다 경술국치이후 전라도 마이산(馬耳山)으로 입산, 그곳 호남선비와 상교하며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는데 서어절요(書語節要), 중용도(中庸圖), 이학통변(理學統辨), 기정동감(紀政宗鑑), 심현기년(三賢紀年), 치종록(致宗錄), 존화록(尊華錄), 동감절요(東鑑節要) 등과 문집 22권 11책이 전한다.


⑩ 심상복(沈相福: 1876~1951)

목판본 古書 탄생과정 '한눈에' 2004-07-14

한말 이후 서부 경남 유학자 집안 목활자 인쇄문화의 전 과정을 복원할 수 있는 목활자 일괄 유물이 박물관에 기증돼 일반에 공개 됐다.

특히 전시되는 6만5천여 개의 목활자는 유일하게 제작자가 알려진 개인 제작 활자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국립진주박물관(관장 고경희)은 지난 13일부터 8월31일까지 '목활자로 보는 옛 인쇄문화-심재온 기증유물전'을 열고 있다.

특별전 에 나온 유물들은 지난해 3월 심재온(79·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 계리)옹이 기증한 목활자와 인쇄용 소도구, 고서적들. 여기에는 활자새김에서부터 책으로 간행되기까지 전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포함돼 있다.

목활자 6만5천186개, 활자를 분류해 보관하는 상자 21판, 활자 식자판 4개, 새기는 칼 등 활자 관련도구 들이 그 것. 또 활자 집게용 젓가락, 식자용 송곳 등 판짜기 도구, 책 표지 장식 그림인 능화판(菱花板)과 밀돌 등 제본용 도구, 활자를 처음 새기기 위해 쓴 활자초인자본(活字初印字本),교정지 등도 포함돼 있다.

또 1880년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215종 551책의 서적도 기증목록에 올라와 있다.

기증자 심재온의 조부인 심상복(1876~1951)의 문집 '치당집(恥堂集)'을 비롯, 한말 이후 일제시대 이 지역 유학자인 김복한의 '지산집(志山集)', 이택환의 '회산집(晦山集)' 등이 대표적이다.

이 서적들의 60% 가량은 기증 목활자로 찍은 것이어서 결국 목활자 새기기에서 책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의 유물이 망라된 셈이다.

한편 지방의 목활자들은 만든 시기와 글씨를 쓴 사람, 활자로 간행 한 책들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번에 기증된 활자의 경우 심상복이 자본(字本)을 쓰고, 각수 김명곤이 하루에 1천개 가량의 글자를 새겼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제작자가 분명하다.

또 심상복은 단순한 인쇄업자가 아니라 최익현, 이도복의 가르침을 받은 노론계열의 유학자라는 점에서 그의 서적 들을 통해 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서부 경남지역 유학자들의 교육활동과 학문세계도 유추할 수 있다.

기증 유물의 학술적 의미를 고찰하기 위해 29일 오후 2시 남권희 경북대 교수가 '산청 화계리 목활자와 경남 지역의 목활자 인쇄문화', 이상필 경상대 교수가 '산청 화계리 청송심씨 가장(家藏) 고서적의 성격'을 주제로 특강을 열었다.

 

진극인 만장 진은 본래 천령 사람인데 김해에 장가들어 살았다

 

 

천령미미수로허 天嶺迷迷首露墟   천령에서는 수로왕의 터전이 아득하니

부증생식유신어 不曾生識有神魚   태어났을 땐 신어산이 있는지 몰랐겠지

부운무계창창면 浮雲無繫蒼蒼面   뜬구름은 푸른 하늘에 매이지 않으니

수도군금환불여 誰道君今還不如   그대가 지금 도리어 못하다고 누가 말하는가

역주: 전구에서 뜬구름은 허무의 존재가 아니고 자유로운 존재로 묘사된 것이다. 결구에서 작자는 진극인의 요절을 남들처럼 불행하다고 본 것이 아니라 뜬구름보다 더 자유로운 것으로 본 것이다. 이 시를 지을 때 남명의 심정은 뭔가에 매여 답답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가야의 고도 김해에 신어산이 있는데 신어산 자락에 남명이 처가에서 살 때 지어 거처한 산해정이 있고 산해정을 중심으로 남명을 모시는 신산서원이 있다. 진극인은 여흥진씨로 묘소는 함양군 유림면 대궁리에 있다.

 

                     지리산 천왕봉

 

    請看千石鍾   천 섬짜리 종을 보게나        

    非大扣無聲   크게 치면 소리가 나나니      

    萬古天王峯   만고에 유유한 천왕봉은       

    天鳴猶不鳴   하늘이 울려도 울지 않나니    

 

이 시는 지리산을 좋아하여 12번 이상 답사한 남명 조식 선생이 천왕봉을 읊은 것이다.

아무리 큰 종이라 해도 큰 당목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만 천왕봉은 하늘이 벼락을 치고 별짓 다하며 울게 해도 미성도 내지 않는다는 뜻이니 천왕봉처럼 큰 무게를 지녀야 함을 묘사한 것이다.

남명선생은 벼슬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어진이로 천거되어 바로 6품 벼슬에 임명되었다. 6품 벼슬은 지금 일반인을 바로 사무관에 임명한 것처럼 파격적인 등용이다.

그러나 남명선생이 사양하며 벼슬하지 않자 시비꾼들이 벼슬자리가 보잘것없어 사양한 것이 아니냐, 보다 높은 벼슬을 주었다면 아마 벼슬했을 것이라고 입방아찧자 남명선생이 이 비유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밝힌 것이다.

비록 천 석짜리 큰 종같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 자리를 주더라도 받는다면 결국 벼슬 욕심에 동한 것이다. 하늘이 울려도 울지 않는 천왕봉같이 벼슬자리에 미동도 하지 않는 태상은자로 살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이번에 함양에서는 인산의학재단의 후원으로 제2회 지리산문학제(위원장 김윤수)가 열렸다. 함양 출신 허영자, 오인태, 산청 출신 강희근, 섬진강 시인 김용택, 접시꽃당신의 도종환 등 전국의 유명 시인이 모여 문학의 밤을 전개하였다. 이때 지리산문학상과 최치원신인문학상도 시상하였다.

천왕봉은 지리산의 최고봉이다. 해발 1915m의 천왕봉은 행정구역상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100번지이고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208번지이다. 지금 지리산 북쪽의 함양군과 동쪽의 산청군이 양쪽에 걸친 천왕봉을 갖고 서로 자기 관내라고 공방을 벌이고 있다. 과학적 측량도 좋지만 함양군과 산청군이 공유하면 안되는가.

지리산문학제에서 시상하는 지리산문학상과 최치원신인문학상은 전국에 공모하여 지역에 상관없이 선정한다. 그래서 시상주체인 지역 시인들이 오히려 소외감을 느낀다. 한가지 제언을 한다면 지리산문학제에 천왕봉문학상을 신설하여 천왕봉이 자리한 함양이나 산청 출신의 지역 시인을, 산청은 원래 산음이었으니 함양과는 음양이 조화된 이웃사촌 고을인바, 홀수 해에는 함양 시인을, 짝수 해에는 산청 시인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시상한다면 함양군과 산청군이  천왕봉을 인연하여 분쟁이 아니라 화합을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한걸음 더 나아가 지리산을 중심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진주시, 하동군, 구례군, 곡성군, 남원시, 장수군, 거창군, 함양군, 산청군이 지리산특별자치도나 지리산광역시를 설립하여 지역공동체를 형성한다면 영호남정서의 완충지대로서 남북과 함께 동서의 민족화합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2007.10.11 경남일보 경일춘추, 2007.12.26 함양문학 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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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산초당

 

김윤수 작, 역

 

인산초당

지산심곡행화정   智山深谷杏花亭   지리산 깊은 골짝에 행정마을 있는데

정유행단행수청   庭有杏壇杏樹靑   뜰에는 행단이 있고 행림이 푸르네

신은훈몽착목기   新隱訓蒙鑿木器   은둔하여 동몽을 가르치고 함지박 파며

일구천문야관성   日究丹藥夜觀星   날마다 단약 연구, 밤에 별을 관찰하네

 

인산초당  함양군 휴천면 월평리 죽염골 살구징이 행정마을 인산선생은거처, 삼남출생지, 죽염실험지,  인산선생부인묘소, 인산죽염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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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 애송시

 

백의관음무설설   白衣觀音無說說

남순동자불문문   南巡童子不問問

병상녹양삼제하   甁上綠楊三際夏

암전취죽시방춘   巖前翠竹十方春

 

인산 김일훈 선생 해설

 백의관음 무설설이라, 백의 관세음 보살은 꼭 말씀할 듯하고 안 하신다. 무설설이야. 말씀을 할 듯한데 말씀은 안 해. 남순동자불문문이라. 남순동자는 묻고 싶은데 묻지를 못해. 말씀 안 하니까. 그런데 병상녹양삼제하하고. 병에다가 심어놓은 버들은 삼제 여름인데, 암전취죽은 시방춘이라 암전취죽은 언제고 푸르러 있어. 항시 봄이야. 시방에 늘 봄이야. <활인구세>

 

백의관음무설설   白衣觀音無說說

남순동자불문문   南巡童子不聞聞

병상녹양삼제하   甁上綠楊三際夏

암전취죽시방춘   巖前翠竹十方春

 

백의관음은 말씀없이 말씀하시고

남순동자는 들음없이 들으시네

꽃병 위의 푸른 버들은 삼세 여름이고

바위 앞의 파란 대는 시방에 봄이네

 

불초삼남 김윤수 근역

 

                           오도재 죽염골

 

    雲峰坂道並溪傍   운봉 가는 비탈길 시냇가에 나란히     

    穩跨征驢一嘯長   나귀에 걸터앉아 휘파람 길게 불고

    無賴西山高萬丈   아득한 서쪽 산은 높이가 만 길        

    客來投舘未斜陽   길손은 해지기 전 객관에 투숙하네     

 

이 시는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쌍매당 이첨이 제한역을 읊은 것이다. 비탈길 옆 시내는 구룡천(점필재 명명 서계)이고 서쪽 산은 팔령재(팔량치)로 제한역에서 바라볼 때 너무나 아득히 높아 해도 지기 전에 지레 겁나 등정을 포기하고 객관에 투숙한다는 뜻이다.

제한역은 지금의 함양읍 구룡리 조동마을에 있던 조선시대 역마의 역이다. 제한역은 함양 사근도 찰방이 관할하던  14개 속역의 하나로 지금 하동의 토지문학제가 열리는 평사리도 본래 사근도의 속역인 평사역이었다.

제한역 남쪽 고개 제한재 현 지안재를 넘어 한 구비 돌면 옛 월평분교에  사단법인 인산의철학이 자리잡고 있다. 인산의철학은 대학이나 박물관 하나 없어 학술문화의 소외지라 할 수 있는 함양에서 유일한 학술연구기관으로 2007년도에 한국동양철학회와 함께 '동양철학과 한의학'이란 주제로 동계학술대회를 열어 최은아 인산한방암센터 대표이사가 '인산의학의 암원리'를, '동양철학과 정신건강'이란 주제로 하계학술대회를 개최하여 김윤수 인산의철학 이사장(자연치유학 명예박사)이 '인산의철학과 정신건강'을 발표하였다.

지리산 가는길 오도재 정상에 지리산제일문이 우뚝 서있고 남쪽에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는 지리산조망공원이, 북쪽에 변강쇠타령의 발원지 변강쇠장승공원이 있고, 못미처에 하늘아래 첫동네 살구징이란 마을이 있는데 길 건너편에 인산초당 터가 있다.

인산 김일훈 선생이 한국전쟁 후에 남하하여 이곳에 은거하며 한문과 의학을 가르치고 죽염을 실험 제조하여 죽염 굽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죽염골로 불렸다. 인산초당을 복원하여 중국 성도의 두보초당, 강진의 다산초당과 함께 세계 3대 초당으로 정립할 계획이다.

금년에 인산선생의 손녀가 함양여자중학교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고 손자가 함양중학교 학생으로 민족사관고등학교에 합격하였다. 팔불출의 셋째가 자식 자랑이라고 한다. 자랑이 팔불출이 아니라 덕보려는 짓이 팔불출인 것이다.

자랑스럽다 이 말은 얼마나 좋은가. 공해독의 암병에 대응하여 활인핵 암약 오핵단, 사리장, 죽염을 발명하여 보급하고 한방암의학 인산의학을 정립하고 유황오리, 다슬기, 홍화씨 등 수많은 개발 식약을 대가없이 공개한 성인의 어진 마음을 자랑스러워한다.

다만 부친인 인산선생에게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또한 자녀에게 자랑스러운 부친이 되지 못한 것이 미안할 뿐이다. 한편으론 자녀가 남들 놀 때 공부 열심히 해서 일류대와 일류고를 들어간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왜 팔불출이라는 말로 자랑스러움을 부도덕시해야 하는가.

자랑스러워하자.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자.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게 하자. 부친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기 위해, 자녀에게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기 위해, 나아가 자랑스러운 함양인, 경남인, 한국인, 세계인이 되기 위해 노력할 일이다. 서로 노력하고 격려하자.

 (2007.10.18 경남일보 경일춘추, 2007.12.26 함양문학 16호)

 

                2007 三祝 紀念詩

 

                                          김윤수 작, 역

 

法治人民秩序明   법으로 인민을 다스려야 질서가 밝고

史觀定立國魂榮   사관이 정립되어야 국혼이 영화로우리

博施濟衆仁山訓   널리 베풀고 중생 구제 인산의 가르침

韓族率先天下平   한민족이 솔선하면 천하가 태평해지리

 

法은 장녀 김예정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입학 축하 기념자

史는 차남 김정근 민족사관고등학교 합격 축하 기념자

博은 본인 김윤수 자연치유학 명예박사 취득 축하 기념자

 (2007.12.26 함양문학 16호)

 

3. 상림

 

사운정思雲亭

 

                                                            인산仁山 김일훈金一勳(1909~1992) 作

  

 

천강유선수식림   天降儒仙手植林

위성시백읍상심   渭城詩伯揖相尋

대황대야금파동   大黃大野金波動

장벽장공옥로심   長碧長空玉露深

지락고금신성지   志樂古今神聖志

심통역대준웅심   心通歷代俊雄心

사중현사치평일   社中賢士治平日

거세효친송덕음   擧世孝親頌德音

 

 

하늘이 내린 선비신선 심은 상림에서

위성음사의 시인들 서로 읍하며 찾네

크게 누런 큰 들에 황금 물결 움직이고

길게 푸른 긴 하늘에 옥같은 이슬 짙네

뜻은 고금 성현의 뜻을 즐거워하고

마음은 역대 영웅의 마음을 통하네

위성음사의 어진 회원들 태평 시대에

온 세상이 효도스런 덕성을 칭송하네

  

   불초삼남 김윤수 근역

  (2006.12.26 함양문학 15호)

 

 김윤수 작, 역

 

  신약당

신의망재삼남당   神醫忙在三男堂   신의는 삼남의 가택에서 바쁘게 살며

일대백인수신방   日處百名神藥方   날마다 수백 명의 환자에게 처방하네

불출호지천하병   不出戶知天下病   문밖을 안 나가도 천하가 병든 것 알아

활인구세심창황   活人救世心倉皇   활인 구세의 마음이 급하기만 하다네

 

신약당 함양군 함양읍 용평리 사리장산업발상지 인산선생삼남가택, 인산죽염촌(주), 인산주식회사, 인산의철학, 인산한의원, 인산한방암센터(주)

                         가곡상림

 

    激激淸뢰郭外音   성밖에는 콸콸 흐르는 맑은 뇌계의 물소리     

    獨吟騷句爽煩襟   홀로 시구 읊조리니 답답한 가슴 시원하다     

    有時柱杖攔歸鶴   때로는 지팡이로 돌아오는 학을 막는데        

    落日霜飛大館林   해 저문 대관림에는 서리가 날리는구나        

 

이 시는 함양군수 시절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함양 관아를 보호하는 방수림인 대관림(현 상림)을 읊은 것이다. 상림은 천연기념물이고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이다.

아름다운 것은 가치 있다. 고운 햇살 아래 미풍에 한들거리는 분홍빛 꽃잎이 투명하게 아롱지는 모습을 보면, 맑디맑은 냇물이 연한 초록 잎사귀와 푸른 하늘을 담고 가을과 꽃둔덕을 따라 졸졸 흐르는 냇가를 거니노라면 누구도 자기 영혼이 미소짓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을 살다보면 사람에게는 에너지가 있고 기운이 있고 운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마음이 평온하고 웬지 기분이 좋으면 나쁜 일이 잘 안 생긴다. 신경질 나고 답답하고 짜증이 나면 하루종일 기분 나쁠 일만 생기는 것 같고 매사가 다 불만스러워진다. 마음이 참으로 중요한 열쇠이다.

아름다운 것을 느끼고 아름다운 것에 감동하는 순간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평온하게 가라앉혀 주고 좋은 기분으로 만들어주고 그래서 운도 열어주는 것은 아닐까. 어릴 때부터 좋은 그림, 좋은 음악, 좋은 미담을 들려주는 교육을 하는 이유도 아이들의 정서를 순화시켜 마음을 긍정적인 에너지 상태로 만들어주는데 있다. 그것이  단순히 지식을 주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식인으로 육성시키는데 유효하다. 아름다운 음악으로 순화된 상태에서 과학과 수학을 공부하면 훨씬 더 고도의 과학적 발명과 수학적 사고를 익힐 수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 경남에는 특히 함양같은 산골에서는 격조높은 예술을 접할 기회가 적다. 서울이나 부산같은 대도시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유명 음악회나 미술전이 열리지만 지방 군읍단위에는 아예 없다. 이번에 인산죽염촌이 메서나사업의 일환으로 죽염의 발명가 인산 김일훈 선생을 기리고 죽염문화를 예술로 승화하는 제2회 함양죽염축제(위원장 최은아) 가곡의 밤을 개최하여 국내 정상급 성악가들을 초청하여 아름다운 천년의 숲 상림에서 가곡상림을 선보였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가곡을 좋아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가을맞이 가곡의 밤도 자주 참석했는데 그 때의 감흥도 감흥이지만 노을이 지고 별이 뜨는 가을 하늘 아래 숲으로 둘러싸인 함양 상림 다볕당 잔디마당 자연 무대에서 인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의 반주로 테너 엄정행 등 유명 성악가들이 청아한 육성으로 부르는 천상의 선율이 대자연과 합주하는 신비감은 그 어느 것에도 비할 바 없었다. 맑은 숲내음을 맡으며 자연을 배경으로 가곡을 듣노라니 온몸이 음악을 호흡하는 느낌이었다.

이날 운집한 관중이 2천여 명 정도 되는데 남녀노소 숨을 죽이고 하늘과 바람과 숲과 음악에 몰입하는 광경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였다. 어린 학생들이 수많은 어른들 틈에서 좌석이 모자라 잔디밭에 비닐봉지를 깔고 앉아 장장 1시간 반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너무도 진지하게 음악에 빠져드는 모습은 더욱 감격적이었다. 우리나라 가곡이 이토록 자연과 숲과 어울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대자연의 상림  숲은 그 자체로 독일의 발트뷔네처럼 세종문화회관 부럽지 않은 문화예술의 전당이었다. 가곡상림은 음악과 자연과 청중이 어우러진 하나의 예술작품이고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2007.10.04 경남일보 경일춘추, 2007.12.26 함양문학 16호)

 

 學士樓 柱聯

 

작자 미상

 

七月蟬聲滿一樓 칠월선성만일루

칠월의 매미소리 누에 가득한데

登臨回顧叉傷秋 등림회고차상추

누에 올라 회고하니 감회가 깊구나

長林上下高城出 장림상하고성출

긴숲 위아래로 높은 성이 우뚝하고

大野東南二水流 대야동남이수류

한들의 동남에 두 냇물이 흐르네

學士已乘黃鶴去 학사이승황학거

학사는 이미 황학을 타고 가버렸는데

行人空見白雲留 행인공견백운류

행인은 부질없이 흰구름만 바라보네

可憐風物今猶昔 가련풍물금유석

가련타 풍물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常有詩篇揭軒頭 상유시편게헌두

언제나 추녀끝에는 시편이 걸려있네

글씨: 진주출신 야천 임재동 <천령의 맥>

 

 

       덕봉사에서


   제덕봉사 題德峰寺

 

불향소진불등미 佛香消盡佛燈微   향불도 사그라들고 등불도 어렴풋한데
장실소연진사희 丈室蕭然塵事稀   주지 방은 적막하니 속된 일도 드무네
투득소한성신숙 偸得小閒成信宿   잠시 틈을 내어 이틀 밤이나 묵고서
효종명후하산귀 曉鐘鳴後下山歸   새벽 종이 친 뒤 산을 내려 돌아가네

기암집 畸庵集 정홍명 鄭弘溟 1592-1650 함양군수 1643-1646

※ 덕봉사는 함양군 병곡면 광평리 덕봉에 있었다. 인조 21년 경에도 건재했었는데 이후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미상이다. 지금 축대와 추월당 학훈대사 秋月堂 學訓大師 등의 부도가 남아 있다.

  (2006.12.26 함양문학 15호)

 

 함양군수(咸陽郡守)를 지낸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가 간행한  『구소수간초선 歐蘇手柬抄選』

 

     1. 남몽뢰(1620-1681)가 지은 『구소수간초선』의 발문

 

  이상은 구양공(歐陽公:歐陽修)과 소동파(蘇東坡:蘇軾)의 서간집이다. 누가 뽑아 엮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뽑은 것을 보면 가장 그 요체를 얻었다고 하겠다. 대개 그 작은 편지의 간요하면서도 또 간요한 것을 취한 것이다.

  내가 옛날 서울에 있으면서 이 책을 친구 집에서 빌려 보다 다 읽지 못한 상태에서 책 주인이 독촉해 돌려주었으므로 늘 한스러워하였다.

  신해년(1671,현종12) 가을에 나의 벗 진사 정홍현(鄭弘鉉 1621-?)이 나를 함양 임소로 찾아와 이 책을 소매 속에서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완연히 옛 상태 그대로여서 완상하여 마지 않았고 책 상자 속에 간직하며 관심을 놓지 못하였다. 동호인들과 함께 하고 싶어 널리 전할 길을 도모하였지만 또 그 힘이 미치지 못함을 한할 수밖에 없었다.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부임하였는데 마침 『양촌문집 陽村文集』 중간 역사가 있었으므로 인하여 각수에게 부탁하여 간행하였다.

  구양공 편지는 모두 47 편(문집 9;21에는 49편이라 함)이고 소동파 편지는 모두 95 편이니 합계 142 편(문집에는 144편이라 함)이다. 어떤이가 그것이 너무 적다고 탓하므로 내가 응수하기를 "어찌 많은 것을 추구하겠는가. 절조(折俎:조각구이)가 비록 체천(體薦:통구이)에 미치지 못하나 사금도 반드시 모래를 이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이 또한 문단의 .일례이니 어찌 많은 것을 추구하겠는가." 하니 어떤이가 내 말을 그렇다고 여기며 나로 하여금 그 전말을 기록하게 하였다. 그 사이에 감히 평론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갑인년(1674,현종15) 3 월 초하루 영양(英陽) 남몽뢰는 적다.

 

     2. 남몽뢰의 생애와 저술

 

  이계(伊溪) 남몽뢰는 자는 중준(仲遵), 호는 이계, 본관은 영양으로 저서에 『이계집 伊溪集』과 『이계속집 伊溪續集』이 있다. 광해군 12 년(1620)에 의성군에서 태어나 숙종 7 년 (1681)에 별세하였다. 이계는 23 세 때인 인조 20 년(164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32 세 때인 효종 2 년(1651)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학유 등을 거쳐 52 세 때인 현종 12 년(1671) 4 월에 함양군수로 부임하고 흉년으로 아사하는 유민들을 진휼하여 이듬해 봄에 구황 치적 제일로 준직(準職)의 명을 받았다. 준직이란 품계에 해당하는 직책을 가리킨다. 54 세 때인 현종 14 년(1673) 2 월에 진주목사로 승진하고 이듬해에 『구소수간초선』을 간행하고 발문을 지었다. 숙종 1 년(1675) 겨울에 병을 이유로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남인이 몰락한 경신환국(1680,숙종6) 3 월 61 세 때 의금부에 하옥되고 이듬해 겨울에 전남 고흥군에 귀양갔다가 열흘 만에 다시 압송되어 11 월 15 일에 남원시에 이르러 별세하였다. 관이 함양을 지날 때 선정비를 세웠던 함양 주민들이 남녀노소 없이 통곡하였고 상여 줄을 잡는 이도 있고 제사를 지내는 이도 있었다.

  이계가 함양군수로 있을 때 『구소수간초선』을 전해준 정홍현(1621-?)은 『사마방목 司馬榜目』에 보면 인조 26 년(164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자는 원길(元吉), 본관은 동래, 성주군에 살았다. 이계는 함양에 있으며 흉년을 구제하느라 이 책을 간행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이계는 함양군수로 부임한 뒤 그 1 년전(1670,현종11)에 안음현감으로 부임한, 대전시 동구 중리동의 유형문화재 송애당(松崖堂) 주인으로 우암 송시열(1607-1689)과 동문인 송애(松崖) 김경여(金慶餘 1596-1653)의 아들인 김진수(金震粹 자는 晦叔)와 초면으로 친해져 자주 왕래하였다. 현종 13 년(1672) 5 월에 안음현 관아 밖 대숲 속에 관덕정(觀德亭)을 짓자 같이 활쏘기도 하며 그 기문을 짓기도 하였다. 그해 9 월에는 자기의 외삼촌인 권창업(權昌業 1600-1663)의 묘표를 우암선생에게 부탁하여 짓게 (송자대전 198권 번곡처사樊谷處士 권공창업묘표, 이계집 5권 처사권공묘광명墓壙銘) 하였고, 함양의 선비 양석번(梁錫蕃)이 춘와(春窩)란 서실을 짓자 그 기문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이계집』은 6권 3책, 목판본으로 증손 남성천(南聖天) 등에 의하여 정조 2 년(1778)에 간행되었고, 『이계속집』은 3권 2책, 목판본으로 10세손 남우룡(南佑龍) 등에 의하여 1937 년에 경북 의성군 점곡면 윤암동에 있는 이계의 유적지인 이계당(伊溪堂)에서 간행되었다. 다만 이 문집에는 서인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과 교류한 사적은 기재하지 않았다.

 

     3. 함양군수 남몽뢰에게 보낸 우암선생의 답신 --임자(1672,현종13) 9월 10일

 

  권처사(權處士 명은 昌業)의 묘표는 당시에 매우 참람한 짓인 줄 알면서도 또한 감히 부탁하신 정중한 뜻을 저버리지 못하여 억지로 초하여 바쳐서 취사 선택을 기다렸습니다. 이에 하교하신 뜻을 받드니 칭찬이 실제에 지나치고 표현이 너무도 겸손하기에 내 자신 부끄럽고 송구함이 더욱 더하여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인하여 잘못을 지적하며 새로 고치도록 하시니 또 어진 군자의 두터운 마음씀을 볼 수 있었는바 일자지사(一字之師)일 뿐만이 아닙니다. 깊이 명심하여 다시 더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삼가 분부에 따라 개정하겠습니다. 그밖에 고친 것도 여러곳입니다.

  대개 당시에 바쁘고 어지러워 전혀 자세히 못하였습니다. 『소학 小學』 선행편(善行篇)에서 장관(張觀)이 말한 "바삐 하면 그릇된다"는 경계를 가슴에 새기지 않아서입니다. 송구합니다. 묘표의 초본은 행장과 함께 반납합니다. 그 초본은 뒤에 안음현감 편에 도로 보내주시거나 따로 한 본을 베끼어 돌려주셔도 좋겠습니다. 대개 집에 초고를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집 애들이 구하고자 해서입니다.

 

      4. 『구소수간』에 얽힌 이야기

 

  『구소수간 歐蘇手簡』은 세종대왕이 세자 시절에 많이 읽은 책이다. 세종이 책을 좋아해서 몸이 쇠약해질 정도로 책을 열심히 읽자 태종은 명을 내려 책을 전부 치워버리게 했다. 그런데 『구소수간』이 우연히 책상 옆에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한 세종은 이 책을 1천 번이나 읽었다는 것이다. 『명종실록』에 이 일화가 실려 있다. 이 『구소수간』은 임진왜란 이전에 청주, 홍주, 곡산, 예천 등지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서울대 등에 남아 있는데 4 권 1 책이고 분량은 78 장이다. 그런데 남몽뢰가 간행한 책은 같은 목판본이라도 불분권이고 50 장이며 간(簡)자도 간(柬)으로 되어 있고 초선(抄選)한 것이니 원본에서 뽑아 엮은 것인데 남몽뢰도 초선자를 알지 못하였다. 산기 이겸로 저 『통문관책방비화』 참조. 산기선생은 임란 이전본과 현종 진주간본을 언급했는데 이 외에도 다른 판본이 있다.

  무신년(1908?)에 활인된 『구소수간초선 歐蘇手柬抄選』은 부계 예씨(芮氏)들이 간행한 것이다. 옥주(沃州:옥천)에서 『구소수간』 사본을 예병기(芮丙基)가 구해오자 예대훈(芮大塤)이 인행하고 예대희(芮大僖)가 발문을 지었다. 이 발문에선 세종대왕이 이 책을 만 번을 읽었다고 하였다. 예대훈이 약간 편집을 가하였다. 일본에서도 『구소수간 歐蘇手簡』이 간행되었다. 1780 년의 축상(竺常) 서문본은 4 권 1 책으로  두인걸(杜仁傑)의 원서가 있다. 1797 년에는 일본의 송본유헌(松本幼憲)이 후편을 엮어 경조(京兆)의 방각본 서사(書肆)인 임권병위(林權兵衛)가 간행하였는데 또 축상이 서문을 지었다. 이 2 책이 한 질이 된다. 한국에서 임란 이후에 유행한 『구소수간초선』은 함양군수 시절에 구해놓고 간행하려다 못한 남몽뢰가 진주목사로 전임한 뒤 간행한 것이니, 함양과 인연이 깊은 책이라고 하겠다.

 

4. 남계서원

 

溪書院 咸陽

 

원작 퇴계 이황

 

堂堂天嶺鄭公鄕   당당한 천령 고을 정선생의 고장

百世風傳永慕芳   백세 청풍 전하니 길이 사모하네

廟院尊崇眞不忝   서원에서 존숭함은 참으로 알맞으니

豈無豪傑應文王   어찌 문왕에 호응하는 호걸이 없으리

 

 

 

       강참봉만사 姜參奉挽詞 명 익(翼) 자 중보(仲輔)


 

   원작 남명 조식

 

의례삼천록 儀禮三千錄   십삼경 중의 <의례>를

심구오십년 尋究五十年   50년 동안 연구했네

극신간훼중 棘薪看훼重   부친은 돌아가셨고  (훼=火+毁)

훤초우상전 萱草又霜顚   모친은 연로하시네

야진제상조 夜盡啼商鳥   밤새도록 부엉이 울고

춘심규두견 春深叫杜鵑   봄 깊도록 두견새 우네

상천호부득 上天呼不得   하느님께 울부짖을 수도 없는데

군자과하건 君子果何愆   군자가 과연 무슨 허물이 있는가

* 개암(介庵) 강익(姜翼 1523-1567)은 남명의 문인으로 별세 1년전에 남명을 모시고 안의삼동을 유람한 적이 있다. 일찍이 일두 정여창 선생을 모시는 남계서원을 주창하여 창건하였다. 남명보다 먼저 별세하여 선생이 제자의 만사를 쓰게 된 것인데 군자로 표현하며 극도의 슬픔을 표출한 것으로 보아 선생의 사랑을 깊이 받은 것이다. 묘소는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에 그 조부 금재(琴齋) 강한(姜漢)과 한곳에 있다.

 내암 정인홍

 

정인홍(1535~1623)은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효리에 살던 구졸재 양희의 사위로 와서 살다가 합천 고향으로 돌아갔다. 처남인 서계 양홍주(1550~1610)와는 원수지간이 되어  같은 남명의 제자인 양홍주는 서인으로 귀순하여 함양을 떠났고(내암의 제자들이 집을 헐고 쫓아냈다) 선조 말년 상소하여 서로 비방전을 펼쳤다.

 

 

       산해정(山海亭)에 있으며 대학팔조가(大學八條歌) 뒤어 써서 정군인홍에게 주다

 

 원작 남명 조식

 

일생우락양번원 一生憂樂兩煩寃   일생 동안 근심과 즐거움이 답답하게 하나

뇌유전현위수번 賴有前賢爲竪幡   앞 현인들이 표준을 세운 것에 힘입어 사네

참각저서무학술 慙却著書無學術   책 쓰기는 학술이 없는 것이 부끄러워

강장금포우장언 强將襟抱寓長言   애오라지 회포를 엮어 시조에 부치네

원주: 병인년(명종21,1566) 가을에 선생이 김해 산해정에 계셨다. 인홍이 가서 모시고 반달을 머물렀다. 인홍이 북으로 귀환할 때 선생이 손수 격치성정가(格致誠正歌)를 짓고 또 이 절구 1수를 지어 그 뒤에 써서 주었다.

 

1546년(명종1) 해인사에서 공부할 때 지은 「영송(詠松)」


    *소나무는 만11살인 ‘정인홍’ 자신을, 탑은 판결사(判決使)인 ‘양희(梁喜)’를 비유하여 지은 한시(漢詩). 그 후 정인홍은 ‘양희’의 사위가 됨.


一尺孤松在塔西   한 그루 작은 외솔이 탑 서쪽에 서 있으니
塔高松短不相齊   탑은 높고 소나무는 낮아서 가지런하지 않네
莫言此日松低塔   오늘날 외솔이 탑보다 작다고 말하지 마오
松長他時塔反低   소나무가 자란 뒤에는 탑이 도리어 작으리

고대(孤臺) 정경운(鄭慶雲)

 

 

        부음정(孚飮亭)에서 헌수하다

 

추만계산모경농 秋滿溪山暮景濃   가을은 산천에 가득 풍경 멋들어진데

암암앙기엄추용 巖巖仰企儼秋容   고고하고 고결한 존안을 우러러 뵈네

일배경축천년수 一盃更祝千年壽   한 잔 술로써 천년 장수 축수하오니

여해여송우화숭 如海如松又華嵩   바다 같고 소나무 같고 오악 같으시라 <내암집>

역주: 부음정은 내암 정인홍(남명의 수제자)의 정자이다.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에 있다. 고대 정경운은 옥계 노진의 향선생 당곡 정희보의 손자로서 내암의 함양 출신 수제자이다. 그의 임진왜란 전후의 일기인 <고대일록>은 당대사의 중요한 사료이다.

 

춘수당 정수민의 천령지 天嶺誌 서문

 

 *邑之有志古也 고을에 읍지가 있는 것은 옛날부터이다. 嘗觀人事之强弱民風之淳요水+堯 일찍이 인간사의 강약과 민풍의 순수,투박함을 보건대 係於水土之淺深厚薄 수토의 천심과 후박에 매였더라. 俊乂之挺生 준걸이 태어나거나 財寶之興産 재물이 생산되는 것은 由乎地靈之亭植胚胎 땅 영기의 심거나 기름에 말미암는다. 至於館宇以待賓 관사로써 손을 대접하고 城池以禦侮 성으로써 침입을 막고 藪澤以利用 연못으로써 이용하고 關防以設固 요새로써 견고하게 지키니 邦家所永賴者 국가가 길이 의지하는 것이다. 而皆不可以不記 그러므로 다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則志之作夫豈得已乎 그렇다면 읍지의 찬술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國家輿地勝覽規模 나라의 여지승람의 규모는 一倣大明一統志爲之 한결같이 대명일통지를 본떠서 만들었다. 則三韓之鼎峙 그래서 삼국의 대치한 형세와 八路之碁布 팔도가 펼쳐진 형국과 百城之魚鱗 백여 개의 성벽이 줄지어 늘어선 형편을 可一閱而盡者 한번 보고서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今世家頗有之 지금 대갓집에는 상당히 가지고 있다. 而부衣+臼輯一邑之山川風土人傑物華 한 고을의 산천과 풍토와 인물과 물자 자료를 수집하여 別爲一帙 따로 한 질을 엮어 以便觀覽 관람에 편케 한 것으로는 若范石湖所纂吳郡志外 범석호가 엮은 오군지 외에는 鮮有作者焉 지은이가 드물다.

*從祖竊慨於斯而作天嶺志 종조가 이에 대해 은연히 개탄하고 천령지를 지었다. 天嶺吾鄕也 천령은 우리 고향이다. 以言乎名宦 명관을 말한다면 崔學士之偃仰風敎 최학사가 한거하며 풍교를 편 것이나 金점人+占畢之興學遺愛 김점필재가 학교를 일으키고 사랑을 끼친 것이 있고 以言乎形勝 형승을 말한다면 頭流磅박於前 지리산이 앞에서 웅장하고 뇌람經緯乎中 뇌계천과 남계천이 가운데에 종횡으로 흐르는 것이 있다. 禮俗之篤 예의 풍속이 독실한 것이나 土地之유月+臾 토지가 비옥한 것이나 物産之豊 물산이 풍부한 것이나 人材之富 인재가 많은 것이나 불冕之盛 벼슬아치가 풍성한 것은 在古蓋甲于嶺右矣 옛날에 있어 영남에서 으뜸이었다.

*自我先祖一두先生闡明性理爲斯文倡 우리 선조 일두선생께서 성리학을 천명하여 유교의 선구자가 되신 뒤로부터 繼而道德儒雅文章鉅公 이어서 도덕의 선비와 문장의 대가가 蔚然輩出 성대히 배출되었으니 則以文獻之邦 문헌의 고장으로 見推於一道 한 도에 추앙받은 것이 而尤莫有比肩者 더욱 비견할 곳이 없었다. 然而變亂之屢經 그러나 변란을 여러번 겪고 風氣之寢薄 풍기가 점점 박해져 陵夷至于今 점점 지금의 형세에 이르렀고 彷彿乎古昔者 옛날에 비슷한 것은 什無二三焉 열에 한둘도 없다. 所可徵者 고증할 수 있는 것은 山水之周遭 산수가 둘러 있는 것과 基址之流傳 터가 전해지는 것과 題詠之稱誦而已 시가 읊조려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從祖旣已涉其流而溯其源 종조가 이미 그 원류를 추구하고 參之古而驗之今 고금을 참고하여 網羅舊聞 옛 견문을 망라하고 搜剔遺事 빠진 일을 수집하였다. 其建置沿革標榜名目 그 건치 연혁과 표제 항목은 則不出勝覽大要 여지승람의 대요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而於人物軌탁足+蜀 그러나 인물 자취에 대해서는 獨加詳焉 유독 더욱 상세히 하였다. 孝悌忠烈隱遁高趣 효제와 충렬과 은둔자의 고상한 취향에 대해서는 尤致謹而備錄之 더욱 삼가고 갖추 기록하였다. 以至一言一行一才一藝之在人耳目者 말 한 마디 행적 한 편, 재주와 기술 한 가지라도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 있는 것은 未不具載 다 기재하지 않은 법이 없었다. 盖非猝然朝夕之工夫 대개 갑작스런 하루아침의 공부가 아니니 而其用心亦勤矣 그 마음씀이 또한 부지런하였다.

*書始成 책이 비로소 이루어지매 藏之협사竹+司 상자 속에 간직하고 不欲以示人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지 않았다. 旣久不能隱 이미 오래되자 숨길 수 없어 稍爲人所取觀 점점 사람들이 빌려보게 되었다. 則終不敢自私 끝내 감히 스스로 사장하지 못하고 屬余序以弁其首 내게 서문을 부탁하여 그 첫머리에 놓게 하였다. 余謂志非待序以傳者 나는 천령지는 서문을 기다려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若夫從祖好古懷土之天性 종조의 옛날을 좋아하고 고향을 생각하는 천성과 尙賢嗜善之至誠 현인을 숭상하고 선행을 좋아하는 지성은 當於志觀 천령지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而非余序亦莫之發也 그러나 나의 서문이 아니라면 또한 밝힐 수 없을 것이다.

*從祖名秀民字子賓 종조의 이름은 수민, 자는 자빈이다. 旣老自謂東里居士云 이미 늙자 스스로 동리거사라고 하였다.

*時龍集丁酉 효종 8년 1657 仲秋旣望 8월 16일 河東後人鄭光淵 하동후인 정광연(호는 滄洲창주 1600-?) 書于羅村之百용心+庸軒 나촌(수동면 효리)의 백용헌에서 쓰다.

 

※ 천령지의 저자인 춘수당 春睡堂 정수민 鄭秀民 1577-1658 의 유적지로는 지금 수동면 우명리 일두선생묘소 입구에 춘수정 春睡亭과 경내에 벽사 이우성 교수가 지은 유적비가 있고 일두묘소 위쪽에 춘수당 산소와 묘비가 있다. 서문을 지은 창주 정광연은 일두선생의 현손인 송탄 정홍서 松灘 鄭弘緖 1571-1648 의 차남으로 그의 유적지로는 효리 입구에 구남정사 龜南精舍가 있는데 동실은 동봉재 東峰齋, 서실은 창주재 滄洲齋이다. 동봉은 창주의 손자인 충신 정희운 鄭熙運이다. 유림면 대궁리 감모재 앞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지은 창주의 묘비가 있다.

 

사근역 수수정       沙驛雜述。次金元博韻寄贈

      

    凌壺 李麟祥

 

沙城春酒醉無醒   사근산성 봄술에 곤드레 되어

午夢偏長數樹亭   수수정에서 낮잠을 실컷 자네

多愧微官難報國   미관말직으로 충성 못함이 부끄러우니

三年不解馬醫經   삼년 지나도 마의경을 터득하지 못했네

 

                            <월명총>

금석정심마불린 金石貞心磨不磷   금석같이 곧은 마음 갈아도 닳지 않고

곡수이척사동분 穀雖貽戚死同墳   낭군이 근심 끼쳤으나 무덤은 같이 썼네

능교만고부윤기 能敎萬古扶倫紀   능히 만세에 윤리를 세우게 하였고

우향삼농작우운 又向三農作雨雲   농사철에는 비가 되어 내리기도 했네

 

태촌 원주 : "월명은 사근역 여인이다. 남편을 생각하다 병사하여 산꼭대기에 장사하였다. 가뭄이 드는 해에는 그 무덤의

흙을 무너뜨리면 비가 내린다."

 

 연민 이가원 선생이《조선문학사》에서 원문을 소개한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1553~1623)의 시를 살펴본다.《태촌집》

제 1권에 칠언 절구 <월명총>과 <만덕총>이 실려 있는데 상호 반대되는 소재를 대비하여 지은 작품이다. <만덕총>은 뒤

에 고찰하기로 하고 먼저 <월명총>을 본다.

 

이 시의 뜻을 살펴보면 월명의 정심貞心을 단단한 금석에 비유하고 승구承句는 살아 헤어졌지만 죽어서 한 무덤에 있게 된

사연을 묘사하고 전구轉句는 월명의 정열貞烈이 만고에 윤리의 귀감이 됨을 강조하였고 결구結句는 함양지역의 우신雨神

이 된 새로운 양상을 표현하였다.

결구結句는 함양의 기우제 민속에 월명이 자리한, 새로운 사실을 증언하는 역사 자료이다. 월명을 읖은 최초의 시인 점필

재는 가뭄이 들면 함양군 휴천면에 있는 용유담龍游潭의 성모묘聖母廟에서 기우제를 지내곤 하였는데 조선 후기 태촌 시

대에는 월명이 영험 있는 비의 신이 되어 있었으니, 전승 과정에서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무덤의 흙을 훼손

해야 비가 내리니, 계속 훼손하면 무덤은 사라질 것인바 어떻게 기우제를 지낼 수 있겠는가. 훼손하기 위해선 복구해야 하

리니, 무덤에 대한 계속적인 관심과 보수 유지를 위한 영적 작용일 것이리라.

태촌은 선조 34년(1601)에서 37년(1604)까지 함양군수를 역임하여 보고 듣고 체험하고 관심을 기울여 시로 읊고 수필로

기록을 남겼다.《태촌집》제 5권에 있는《효빈잡록 效嚬雜錄》하〈여화餘話〉에 더 자세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옛사람이 망부석을 읊은 시에 '산머리에 날마다 바람 불고 비 내리니 행인이 돌아오면 돌이 응당 말을 하리.' 라고 하였다.

풀이하는 자가 '망부석에는 저녁마다 바람 불지 않으면 비가 온다. 시의 뜻은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나는 처

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천령天嶺(함양의 고호)에 부임하고서 두 번씩이나 월명총을 무너뜨리고 비를 얻은 뒤

에야 비로소 옛사람의 시는 대개 허경虛境이 없음을 알았다. 월명은 사근역 여인이다. 서울 장사치에게 시집가기로 하고

혼례를 치렀다. 오래지 않아 장사치는 이익을 위해 상경하였다. 여인은 남편을 생각하여 마지않았고 식음을 전폐하였다.

병이 이미 위중해진 뒤 그 남편에게 편지하니 남편이 듣고서 배를 품고 천리길을 달려 내려왔다. 도착되기 전에 여인은 병

이 위독해졌다. 임종시에 그 부모에게 부탁하기를 '서산의 꼭대기에 나를 묻어 주세요. 죽어서도 의식이 있다면 남편이 돌

아오는 길을 바라볼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부모가 불쌍히 여겨서 그 말대로 장사하였다. 장사지내는 날에 장사치가 비로

소 왔는데 또한 애달파하더니 죽었다. 같은 무덤에 장사하였다. 장사지낸 뒤에 배나무가 무덤위에 생겨났으니 곧 가슴에

품고 온 배였다. 세월이 오래되어 나무는 늙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함양군에 있은 지 모두 4년이었는데 두 번이

나 가뭄이 들었다. 원로들이 월명총을 파면 비가 온다고 하였다. 이른 바 판다는 것도 다 파는 것이 아니라 그 흙덩이 10여

개를 무너뜨리는 정도이다. 두 해에 흙을 팠더니 다 단비가 내렸다. 그렇다면 망부석의 비바람도 괴이한 것이 없겠다. 어떤

이가 묻기를 '그렇다면 월명총은 어찌 날마다 비바람이 없는가.' 고 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망부산의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월명의 남편은 죽어서 무덤을 같이 하였으니 원한에 있어서도 깊얕이가 있다. 비바람이 어찌 항상 있겠는가' 고 하

였다. 어떤이가 위하여 시 한 구절을 읊었다." (이하 칠언절구 1수는 같은 것이므로 생략함.)

  선조 36년(1603) 경의 함양군수 태촌 시대와 성종 4년(1473) 경의 함양군수 점필재 시대는 140년의 격차가 나는데 설화

는 더욱 다양해지고 상세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점필재가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신증동국여지승람》의 월명총 기사와

비교하여 현저히 다르고 새로이 첨가된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동경상인東京商人이 경상京商으로 단순화되었고 둘째, 단

순히 좋아하고 머문 것에서 정식 혼례를 치른 것으로 변모되었고 셋째, 장사치가 제발로 온 것에서 편지를 받고 온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넷째, 월명이 죽으면서 부탁한 유언이 기록되었고 다섯째, 남편이 돌아올 때 배를 갖고 왔고 그것이 묻히어

무덤에 배나무가 자라났으며 여섯째, 월명총의 흙을 조금 훼손하면 비가 내린다는 전설과 영험이 생긴 것이다.

기록이란 시대가 흘러갈수록 증가되는 경우도 있고 사라지는 경우도 있는데 월명 이야기의 기록이 증가된다는 것은 그만

큼 사람들의 심정에 부합되는 점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원한 주제 남녀간의 애정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김윤수.월명총과 만덕총.1998.12.01 함양문학 7호.

 

5. 일두고택

 

우담 정시한의 지리산과 덕유산 유람 - <산중일기>

 9월 9일 정일두선생과 노옥계 집터를 참관, 안음현을 지나 화림동 동구에 도착, 향교 앞 긴 다리를 건너 점풍루에 등람, 심진동과 화림동의 큰 내가 합쳐지는 경계에 반하여 이사와 살고 싶어 함. 일두선생 유람처인 군자대(군자정) 도착, 신평 전좌수촌에서 말 먹이고 옥산창촌(玉山倉村) 김진추 집에 숙박. 10일 덕유산 영각사 도착, 저녁 후 절 뒤 2리 은경대암(隱鏡臺菴) 등람, 천순 수좌 방문, 아들 정항도 와서 같이 숙박, 암승은 일천(一天)과 선찬(善贊: 영각사 표석비<숙종10년,1684>에 보이는 선찬임)이다. 12일 강선암에 내려가다. 영각사 문을 지나 남현(남령)을 넘어 월성촌(月城村)에서 말 먹이고  농소막에 도착, 긴다리 건너 마정현 지나 옛 안음현 관창촌를 바라보고, 강남불촌의 가섭암에 숙박. 13일 3좌 가섭상을 참관. 14일 고현을 지나 올라가 수송대 유람, 다시 고현을 지나 거창읍에서 말 먹이고 가조현 문좌수 남로(文南老) 집에서 숙박. 이하 생략(1997년 9월 23일 화요일 우담전집에서 함산 초록)

 

옥계 노진(1518~1578)

 

        남명이 옥계에게 회답한 서신

 

모는 여러 번 왕명을 받았으니 예의상 한번 궁궐에 나아가 사은해야 할 것이지만 도성에서 어정거린들 다시 무엇을 하겠습니까. 명공은 조만간 조정에 들어갈 것인데 만약에 도를 행하는 일이 없이 오래 머무르며 물러나지 않는다면 또한 구차히 녹봉을 탐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원주: 남명이 [명종 21년(1566) 10월에 상경하여 왕을 배알하고] 남쪽으로 돌아온 뒤 당시 함양 집에 물러나 있던 옥계가 서신을 보내 남명이 갑자기 돌아온 일에 대해 물으니 남명이 이리 답한 것이다.

 

 

        옥계의 남명 만장

 

의기횡성두 義氣橫星斗   의기는 북두성까지 뻗치고

심기도사요 心期到사姚   마음은 요순 시절을 기약했네 (사=女+以)

잠영원폐사 簪纓元弊사   높은 벼슬은 원래 헌 신짝처럼 여기고 (사는 산발 사)

등대위청조 登對爲淸朝   임금을 배알한 것은 맑은 조정을 위해서네

사업당년몰 事業當年沒   업적은 당대에 사라졌으나

풍성백세요 風聲百歲遙   명성은 백대에 멀리 전해지리

옥전방장재 屋前方丈在   집 앞에 지리산이 있어

의구용운소 依舊聳雲   의구히 구름에 솟아 있네 (소=雨+肖)

 

신세원구학 身世元丘壑 일신은 원래 전원 취향이고

청풍일대흠 淸風一代欽 맑은 기풍은 한 시대에 존경받았네

상심경목가 傷心驚木稼 상고대 내린 것을 상심하고

합곡동유림 合哭動儒林 유림이 모여 애도하네

곡리수운월 谷裏愁雲月 골짝에는 구름과 달도 근심하고

상두위검금 床頭委劍琴 책상 머리에는 칼과 거문고만 남았네

종금살수로 從今薩水路 이제부터 덕천강 강변길

인거갱수심 人去更誰尋 사람은 떠났으니 다시 누구를 찾으리

 

題大孤臺族會      대고대 친족 모임

 

원작 송탄 정홍서

 

百尺孤臺一望通   백척 높이 대고대 한눈에 트이니

登臨景像浩無窮   올라 바라보는 경치 아득하구나

半天霞鶩夕陽外   저녁 노을에 나는 따오기 떼

十里湖山秋影中   가을 그림자 속 산천의 풍경

酒席歡情兄及弟   술자리 즐거운 정 나누는 형과 아우

門欄勝事畵難工   집안의 좋은 일 그림 그리기 어렵지

逢場莫浪催歸騎   만남에서부질없이 돌아가길 재촉치 말게

直待更深月出東   야반삼경 달이 동쪽에 뜨기를 기리리겠네

송탄집 松灘集 1:26 정홍서 鄭弘緖 1571-1648

 

6. 연암실학촌

 

 연암실학촌

 

김윤수 작, 역

 

北學熱河日記成   북학파의 고전 열하일기 완성에

革新思想刮人睛   혁신사상이 사람들 안목을 새롭게 했네

荷風竹露四堂    하풍죽로당 등 네 칸의 벽돌 건축

利用厚生安義名   이용후생의 실학 안의현이 유명하였네

 

박지원의 해인사창수시서(海印寺唱酬詩序)  <연암집>

 

경상도관찰사 겸 순찰사 이공 태영 사앙(李公 泰永 士昻)의 행차가 가야산에 들어 해인사에서 묵었다. 선산부사 이채 계량(李采 季良), 거창현령 김유 맹강(金유金+柔 孟剛) 및 지원이 영접하였다. (중략) 지원이 공에게 아뢰었다. 옛날 조남명이 지리산으로 돌아갈 때 보은으로 성대곡을 역방하였는데 그때에 성동주가 고을 수령으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남명과는 초면이었는데 남명이 놀리기를 형은 '내구력 있는 관리라고 할 만합니다.' 하자 동주가 대곡을 가리키면서 웃으며 변명하기를 '바로 이 늙은이에게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금년 8월 15일에 해인사에서 보름달을 기다릴 것인데 형은 올 수 있겠습니까.' 하자 남명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기일이 되어 남명이 소를 타고 약속에 맞춰 갔습니다. 도중에 큰비가 내려 가까스로 앞 시내를 건너 절 문에 들어가니 동주가 이미 누각 위에서 바야흐로 도롱이(띠로 엮은 비옷)를 벗고 있었습니다. 아, 남명은 처사이고 동주는 이미 벼슬을 떠난 처지였는데 밤새도록 나눈 이야기는 민생의 질고이었습니다. 절의 중들이 지금까지 산중의 고사로 이야기합니다.

지원은 해마다 감사를 맞이하여 이 절에 들어왔는데 이미 세 분 관찰사를 겪었으니 또한 내구력 있는 관리라고 할 만하다. 달맞이 해후의 약속이 없으면서도 감히 심한 비바람을 피하지 못했고 매양 절 문에 들어올 때마다 약속하지 않고 모인 수령들이 늘 7~8 고을이었다. 절은 여관 같고 승려는 관기 같고 자리에 임해 시를 지으라 책하는 것은 장기판에서 독촉하는 것 같고 장막 친 것은 구름 같고 퉁소와 북은 새때소리처럼 울린다. 비록 단풍과 국화가 찬란하고 산천이 기이해도 또한 생민의 질고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한번 누각에 오를 때마다 미상불 서글피 옛 현인들의 도롱이를 멀리 생각하게 된다. 아울러 이 것을 써서 산 절의 고사로 삼게 한다.

을묘년(1795, 정조 19) 9월 20일 안의현감 박지원 서.

 

7. 농월정

 

남명선생 안의 화림동(농월정 계곡) 유람 시

 

       유안음옥산동 遊安陰玉山洞

백석운천면 白石雲千面   흰 바위 흰 구름 천 가지 모양

청라직만기 靑蘿織萬機   푸른 덩굴 만 개의 베틀로 짠 듯

막교모사진 莫敎摸寫盡   다는 묘사하지 말게나

내세채미귀 來歲採薇歸   내년에 은거하러 올지니.

 

        유안음옥산동 遊安陰玉山洞

벽봉고삽수여람 碧峰高揷水如藍   푸른 봉우리 깍아세운 듯 물빛은 쪽빛인 듯

다취다장불시탐 多取多藏不是貪   많이 가지고 많이 간직해도 탐욕이 아니네

문슬하수담세사 문蝨何須談世事   이를 잡으면서 하필 세상사 이야기하나 (문 才+門)

담산담수역다담 談山談水亦多談   산 이야기 물 이야기 또한 이야기 거리가 많나니

         又

춘풍삼월무릉환 春風三月武陵還   봄바람 삼짇달에 무릉도원 돌아오니

제색중류수면관 霽色中流水面寬   비 개인 날 냇물 수면도 너르구나

불시일유비분사 不是一遊非分事   한번 노니는 것 분수밖의 일이 아니지만

일유인세역응난 一遊人世亦應難   한번 노니는 것도 인간 세상에 어렵구나

 

* 남명 66세(1566) 3월에 옥계 노진 댁(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을 거쳐 갈천 임훈 댁(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을 예방하고 함께 안의 삼동(원학동,장수동(심진동),옥산동(화림동)) 유람. 옥계 노진, 개암 강익, 각재 하항, 대소헌 조종도, 하응도, 유종지, 이정이 수행하다.

  (2006.12.26 함양문학 15호)

 

                          안의삼동과 대전거제철도선

 

    春風三月武陵還   봄바람 삼짇달에 무릉도원 돌아오니    

    霽色中流水面寬   비 개인 날 냇물 수면도 너르구나           

    不是一遊非分事   한번 노니는 것 분수밖의 일이 아니지만     

    一遊人世亦應難   한번 노니는 것도 인간 세상에 어렵구나     

 

이 시는 남명 조식 선생이 안의 삼동을 유람하며 화림동을 읊은 것이다. 화림동의 수려한 풍경을 무릉도원으로 인식하고 무릉도원에 한번 노니는 것이 분수 밖의 일이 아니지만 한번 이렇게 노니는 것도 인간세상에서 쉬운 일이 아님을 토로한 것이다. 인간세상에 한번 노닌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릉도원이란 표현과 맞지 않다. 무릉도원은 인간세상이 아니니 인간세상에서 무릉도원을 노니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화림동을 인간세상이 아닌 신선의 세계 무릉도원으로 극찬하고 한번 노니는 것을 일대쾌사로 간주한 것이 핵심이다.

조선시대 안의현 지역으로 함양의 심진동, 화림동, 거창의 원학동 계곡을 통칭하여 안의삼동이라 하였다. 고금에 걸쳐 명승지로 유명하여 남명 등의 현자와 금릉 남공철 등의 문인들이 끊임없이 유람을 다녀갔다.

안의삼동 중 심진동 역사를 보면 일두 정여창 선생은 용추폭포 위에 처음으로 물고기를 방류하여 번식시켜 주민들의 식량으로 삼게 한 애민정신을 발휘하였다. 옥계 노진 선생은 용추폭포 위에 있던 장수사를 유람하고 유장수사기를 남겨 심진동 용추계곡의 역사와 풍경을 소상히 전해주었다. 돈암 정지영 선생은 명종시대 심진동에 은거하며 심진동 유일의 역사적 정자인 심원정을 짓고 유유자적하였다.

각연조사는 천년고찰 장수사를 창건하였고 무학왕사는 상류에 은둔하여 은신암을 창건하였다. 일두, 옥계, 돈암, 각연, 무학을 심진동오현으로 통칭한다. 인산죽염도시와 인산한의원의 후원으로 제3회 용추국제자연예술제(위원장 김윤수)를 개최할 때 심진동오현에 대하여 심진동을 빛낸 공덕을 기리고 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헌다례를 기획하였다.

원학동은 동계 정온 선생, 갈천 임훈 선생 등 명현을 배출한 고장이다. 지금은 거창군으로 일제가 1914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양군으로 분할한 것을 광복후 혼란기에 복원시키지 않고 준수한 것은 잘못이다. 거창은 고려말(1271) 왜구 때문에 거제현이 가조 지역으로 옮겨와 150여년을 살며 거창현과 거창에 옮겨온 거제현과 합쳐 제창현이라고도 하였다.

거창은 함양과는 이웃사촌 고을이나 함양울산간고속도로 노선으로 대립하고 지금 대전거제간 철도 노선으로 또 대립하고 있다. 어차피 함양 철도역이 개설되면 대진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안의 지역에 들어설 가능성이 많으니 안의에서 함양읍도 10분, 거창읍도 10분이다.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 서로 타협하고 상생해야 한다. 거창군도 대승적 차원에서, 역사적으로 제창현의 우호를 살려, 안의를 매개로 대전거제간 철도 노선 개설에 적극 동참해야 할 것이다. 대거선 11개 시군에 합류하여 12개 시군이 합력하여 이명박 후보에게도 대선공약으로 꼭 채택되게 해야 할 것이다.

 (2007.10.25 경남일보 경일춘추, 2007.12.26 함양문학 16호)

 

 안음 노천에 동춘선생이 심은 큰 고목이 있는데 보고 느끼어 짓다

 

                     돈재 유상대(1864-1935)

 

아래로 푸른 들판 덮고 위로 하늘에 닿은 채

온갖 풍상을 겪으며 수백 년 세월을 지냈네

지금까지 나무꾼과 목동들이 서로 보호하니

모르겠어라 이 마음 누가 그리 하게 하는가

 

안음노천 유일대고목 내동춘선생수식야 감부일절

安陰蘆川 有一大古木 乃同春先生手植也 感賦一絶

 

돈재 유상대 敦齎 柳相大

 

하부청교상접천

下覆靑郊上接天

풍상열진포경년

風霜閱盡飽經年

지금초목근상호

至今樵牧勤相護

불식자심숙사연

不識玆心孰使然

 

돈재 유상대는 진주 유씨로 합천군 용주면 가호리에서 태어나 노백헌 정재규와 경승재 유종원 및 연재 송병선과 면암 최익현 등에게 수학하였다. 화림동과 원학동을 유람하며 이 시와 함께 영각사, 월성초당, 모리, 수승대 시를 지은 것이다.

동춘당 송준길은 인조 14년(1636) 6월23일에 김상용(金尙容)의 천거로 예산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인조실록》. 그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안음으로 피병(避兵)하고 그곳의 산이 높고 물이 맑은 것을 사랑하여 1년을 살다가 비로소 향리로 귀환하여 학도들을 가르쳤다.  "丙子…是冬 避兵至安陰 愛其山高水淸 居一年 始還鄕里 學徒日衆" 《同春堂集 송시열이 지은 墓誌文》. 안음의 어디에서 살았을까? 『안의현읍지』 방리(坊里) 조에 보면 북상면(北上面)이 있고 그 소속 촌에 "월성(月星);문정공 송준길이 일찍이 우거하였다."라고 하였고 서상면(西上面)이 있는데 그 소속 촌에 "노천(蘆川);문정공 송준길이 잠시 우거하였다."라고 하였다. 월성은 현재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이고 그곳 내계마을에는 송준길이 은거했던 송여산기(宋礪山基)에 다시 세운 월성초당이 남아 있고, 월성리 월성마을에서 황점(黃店)마을 가는 중간 월성1교 옆 길가에는 사선대(四仙臺)가 있는데  바위 위에 소나무가 있어서 송대(松臺)라 하기도 한 송준길의 유적이다. 노천은 현재 함양군 서상면 대남리(大南里) 대로(大蘆)마을(구명 노천동蘆川洞)이다. 거기에 모은정(慕隱亭)이 있다. 모은정 아래 반석에는 반암(磻岩)이라 새겨져 있고 그 옆에

동춘장구소 同春杖所   동춘선생이 산책하던 곳

노천화석정 蘆川花石亭   노천의 화석정이라네

영사구초엄 永思舊草广   영사선생의 옛 초가집

가포대은병 稼圃大隱屛   농촌의 대은병이라네

이란 절구가 새겨져 있어 이곳이 예전 동춘당이 소요하던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화석정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임진강가에 있는 정자로 율곡선생이 여생을 보낸 곳이다. 대은병은 중국 주자가 은거한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있는 무이산(武夷山)의 봉우리 이름이다. 율곡선생은 은거한 황해도 해주의 석담구곡이 그와 비슷하여 은병이라 이름하고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지었다. 영사선생은 효자 서준(徐儁)의 호이고 동시에 그의 묘각의 이름이다. 영사재는 대로마을 아래 마을인 오산에 있다. 동춘당은 이곳에서 두 달 정도 살다가 북쪽의 월봉산을 넘어 거창 북상의 월성으로 옮겨가 초당을 짓고 8개월 정도 기거하다가 귀향하였다.

동춘당이 이곳 노천과 월성에 산 것을 기념하여 안음현감 정중만(鄭重萬)이 안음 유림과 함께 숙종 29년(1703)에 화림동 계곡의 하류인 함양군 안의면 후암리에 성천서원(星川書院)을 건립하고 동춘당 송준길을 제향하였다. 헌종 10년(1844) 경에 거창군 북상면 월성으로 이건되었다가 고종 9년(1872)에 서원 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1977년에 초당계에서 서원 터에 동춘송선생월성초당유허비(同春宋先生月星草堂遺墟碑)를 추연 권용현이 비문을 짓고 강암 송성용이 글씨를 써서 세웠는데 여기에서 영조 18년(1742)에 서원을 월성으로 옮겼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동춘당은 현종 6년(1665)에 고려대장군 여림청(呂林淸)의 묘표음기를 지었는데 그 비석은 현재 함양군 휴천면 호산리 임호마을의 여장군 묘소 앞에 서 있다.

 (2006.12.26 함양문학 15호)

 

8. 용추폭포

 

入洞門     용추계곡 초입

 

원작  심육

 

兩岸幽花重疊明   양쪽 언덕 그윽한 꽃 겹겹이 피고

中間流水有深聲   중간에 흐르는 물 깊은 소리 있네

行行且近龍湫下   걸음걸음 점점 용추에 가까운데

世外烟霞分外淸   세상밖 안개 노을 분수밖 맑구나

 

              은신암에서

 

                                      경암 응윤 작

                                    함산 김윤수 역

 

1

有緣携一鉢   인연 따라 바리때 하나 들고

信錫步還迷   석장 날리며 걷다 길 잃었네

路入無人處   길은 사람없는 곳으로 향하고

山高隱者棲   산은 높아라 은자가 사는구나

晩風松檜暗   늦바람에 소나무 어둡고

新月杜鵑啼   새달에 두견새 우는구나

此處眞安樂   이곳이 참으로 안락세계니

何須更往西   하필 다시 서방정토 갈거나

2

不須尋友往城南   벗을 찾아 성 남쪽에 갈일 없지

栢樹環山鎖翠嵐   잣나무 산 두르고 아지랑이 감싸네

從此便爲深隱計   이로부터 깊숙이 은거할 계획이니

吾師無學有斯庵   우리 스님 무학대사의 이 암자에서

3

禁足銀山下   은빛 산 아래 내려가지 않고

觀心玉府開   마음 공부 옥빛 세계 열리네

虛窓飛絮舞   빈 창문에 솜털 날리고

斷壑積鹽頹   골짝에 쌓인 소금 무너지네

戴白松應老   흰머리 소나무는 늙었겠지

埋靑竹未胎   죽순은 아직 솟아나지 않았네

乾坤多造化   하느님은 조화가 대단해

枯木放花來   마른나무에 흰꽃피게 했구나

4

一番逢處一番別   한번 만난 곳에서 한번 이별

五載逢三別亦三   5년 동안 3번 만남과 이별

我與浮雲無定住   나는 뜬구름과 함께 정처가 없으니

留君看護古仙庵   그대에게 옛 암자를 지키라 하이

 (2007.12.26 함양문학 16호)

 

          無眞頌

                

                           김윤수 작, 역

 

尋眞洞裏尋眞人   심진동에서 참을 찾는 사람들

千古幾何求得眞   천고에 얼마나 참을 찾아냈나

初入龍湫有國手   용추계곡 초입에 국수가 있어

無眞眞畵實傳神   무진의 참그림 실로 신필이네

 

             무진송

   -무진미술관 건립을 기원하며-

 

심진동

찾을 심, 참 진, 골짜기 동

참을 찾아드는 골짜기

참은 무엇인가

참이치인가, 참경치인가

참이치를 찾는 이는 종교인이나 구도인

참경치를 찾는 이는 유람객이나 탐승객

그들은 참을 찾았는가?

찾은 사람은 말이 없을 테고

아직도 찾지 못한 사람이

계속 찾아드는 것인가

참이 있는가, 없는가?

참은 어디에 있는가?

심진동에 있긴 있는가?

참경치는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참이치는 어찌하면 볼 수 있는가

참을 찾으나 참은 없다

참은 없으나 참없음이 있다

참없음이 거기 있다

참없음이 참인가

거기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참이치도 참경치도 아니고

참없음이다

참없음은 무엇인가

참이치도 참경치도 아니고

참예술이다

참을 찾아 심진동에 오니

참없음이 있다

참없음의 참예술이 있다

심진동에서

참예술의 참을 찾았다.

참없음의 무진 정룡 화백

파민 정덕상 부자 한국화가

무진미술관이 건립된다면

수려한 자연풍광

수월한 예술세계

자연과 예술이 조화된

심진동 용추계곡

용추국제자연예술제도 열릴

자연예술의 전당

금상첨화의 현장

심진동 용추계곡 무진미술관

 (2007.12.11 지리산문학 45집)

 

 文谷大師影贊  문곡대사 진영찬

 

 원작    채제공

 

口學勞   입으로 하는 학문은 수고롭고

心學高   마음으로 하는 학문은 고상하네

頓悟之言   갑자기 깨닫게 되는 말씀

妙不在多   신묘함은 많을 필요 없네

惟口是騖   입으로만 달리는 일

衆生則那   중생들이 그러하네

升者其氣   기운은 올라가고

蛻者其影   진영만 남아 있네

因依有所   의지할 데가 있으니

盍禮以頂   어찌 예배하지 않으리

 

장수사 문곡지탑

문곡대사비명 文谷大師碑銘

  대사의 법휘는 영회(永晦)이다. 13세에 출가하여 장수사(長水寺)에 들어가 묘언(妙彦) 스님에게 투신하였다. 이미 몇 해가 지나가자 묘언이 그 총명하고 지혜로움을 기이하게 여겨 타이르기를 "나는 너를 가르칠 수 없다. 너는 회당(悔堂)을 귀의처로 삼아라."고 하였다. 회당은 곧 정혜대사(定慧大師 1685~1741 원호는 회암晦庵이다)니 화엄종주로 유명하였다. 스님은 힘써 귀의하였다. 배운 지 몇 년 되어 바야흐로 불경에 통달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입으로 하는 학문은 수고롭고 마음의 학문은 고상하다."고 하였다. 드디어 소매를 떨치고 금강산과 묘항산에 들어가서 정신을 오로지하여 안으로 참구하고 삼매(三昧)가 아니면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 우리 유가는 불가를 비난하여 이단이라고 한다. 비난하는 자가 자격이 있은 뒤에야 비난당하는 자가 그 그름을 안다, 지금의 학자는 어찌 일찍이 마음으로 하고 입으로 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배운 바가 참으로 성리학의 책 몇 권만 섭렵하면 피곤할 정도로 그 입에 올리는 것은 성명(性命)이니 이기(理氣)니 하는 것이다. 명성이 여기에 있고 영화로움과 이익이 여기에 있다. 그 마음을 돌아보면 이미 황폐해졌다. 그런 자들은 남들을 바로 잡을 겨를이 없이 남들에게 바로잡히느라 겨를이 없을 것이다. 스님의 기풍을 들으면 경계할 줄을 알 것이다.
  스님은 만년에 덕유산 향적봉 아래 구천동(九千洞) 백련사(白蓮社)에 머물며《화엄경》, 《원각경》, 《능엄경》 등 책으로 사방에서 오는 이들을 교수하였다. 71세에 기쁜 표정으로 열반에 들었다. 법랍(승려가 된 햇수)은 55세이다. 다비(승려의 화장식)하는 날에 기이한 징조가 많았다고 한다. 스님의 속성은 이씨로 농서군공(농서군공:이장경李長庚 성주이씨의 중시조)의 11세손이다. 문곡은 그 호이다. 그 제자 이성(貽成)이 풍신(豊信: 산청 율곡사의 봉암대사의 제자로 채제공에게 봉암대사 비명을 받으러 간 스님)으로 하여금 편지를 갖고 천리 길을 달려 나에게 비명을 청하게 하였다. 그 의리가 가상하여 명(銘)한다.

나는 우리 유가를 옳게 여기니
부처에게 어찌 아첨하리오
명을 지어 후세에 보이나니
한마디 말이 뜻에 맞으리.
  《번암집樊巖集 제57권》

<역주>: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영조 때에 판서를 역임하고 정조 4년(1780) 이후 8년간 서울 근교 명덕산(明德山)에서 은거한 뒤 정조 12년(1788)에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조선 후기 남인 정승으로 명재상이었다. 어릴 때 단성현감인 부친을 따라 산청에서 6년을 살아 그 인연으로 율곡사 승려 봉암대사(鳳巖大師의) 찬영문(讚影文)과 비명을 짓기도 하였다. 1772년 영조 48년에 문곡(文谷)대사가 백화(白花), 환암(喚庵) 대사와 함께 영원암(靈源庵 마천면 삼정리)에서 만일회(萬日會) 개최. 문곡은 이 몇 년 뒤에 서거하고, 환암은 영원암에서 10년 살다 서거함.경암집.1778년 정조 2년에 문곡(文谷)대사의 제자 이성(貽成)이 풍신(豊信)으로 하여금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에게 찾아가 문곡대사의 비명(碑銘)을 받아오게 함. 풍신은 봉암(鳳巖)대사의 제자로 임색(任臣+責)의 편지를 가지고 번암을 찾아가 봉암대사의 비명을 받아오기도 하였다.번암집. 문곡대사는 함양군 안의면의 장수사 출신이라서 장수사 터 용추폭포 위쪽 기슭에 부도가 있다. 석종형 부도로 문곡지탑(文谷之塔)이라 새겨져 있다. 문곡대사의 스승 묘언은 번암 채제공이 영찬을 지은 취은대사로 추정된다. 취은대사의 영정은 장수사 육사탱(1788년 정조 12년 은신암 산신탱과 일괄 그림)으로 남아 있다.

 

樊巖先生集卷之五十七
 
文谷大師碑銘


大師法諱永誨。十三。出家入長水寺。投玅彦師。旣數年。玅彦異其聰慧。諭之曰。吾不敢闍梨爾。爾其以晦堂爲歸。晦堂卽定慧大師。以華嚴宗主名。師俛焉歸依學幾年。方且見星於法海三藏。一日忽曰。口學勞心學高。遂拂袖入楓嶽竗香。專精內究。非三昧不屑焉。嗚呼。吾儒詆佛氏以爲異端。詆之者有諸己而後見詆者知其非。今之學者曷嘗有以心而不以口者乎。所學苟能涉程朱書數卷。敝敝焉尙厥口。曰性命也。曰理氣也。聲名焉在是。榮利焉在是。顧其心茅已塞矣。若然者。吾恐其未暇正人而見正於人之不暇也。聞師之風。庶可以知所警矣。師晩住德裕香積之下九千洞白蓮社。以華嚴圓覺楞嚴書。敎授四方來者。七十一怡然示寂。法臘五十五。闍維之夕。多異徵云。師俗姓李。隴西公十一世孫也。文谷其號。其徒貽成。使豐信賫書走千里。乞銘於余。其義足尙。銘曰。
吾是吾儒。佛何足媚。銘以示後。唯是一言契意。

 용추사 부도군(龍湫寺 浮屠群)  

용추사(龍湫寺) 건너편 용추폭포 위쪽 기슭에 석종형 부도 3기가 있는데 1기는 둥근 대형 좌대석 위에 있다. 그것은 청심당(淸心堂)의 것이고 나머지 2기는 "문곡지탑(文谷之塔)", "연우당축훈대사탑(煙藕堂竺訓大師塔)"이란 명문이 있으나 문곡대사 외는 모두 시대와 사적을 알 수 없다.

참고문헌 : 함양군,『문화재도록』, 1996

 

9. 덕유산영각사

 

 到靈覺寺                     영각사에 이르러

 

원작 심육

 

難如蜀道解凋顔   촉도보다 더 험한 길 넘어

爲借禪樓半日閑   절의 누각에서 반나절 쉬네

忽聽風塵多少語   속세의 말소리 갑자기 들려오니

還敎寶界落人間   정토세계가 인간세계로 변했나

 

부록

    시선 이태백의 시

   
                               김윤수 번역
 

     月下獨酌      달빛 아래 홀로 음주

 

三月咸陽城   삼월 달 함양성에

千花晝如錦   온갖 꽃 만발한데

誰能春獨愁   뉘 홀로 시름겹나

對此徑須飮   그러니 마셔댈밖에

 

    送趙雲卿      조운경과 작별

 

白玉一杯酒   백옥 잔으로 술 한 잔

綠楊三月時   버들 푸른 삼월 달에

春風餘幾日   봄바람 남은 날 얼마일까

兩鬢各成絲   양쪽 귀밑머리 다 하얗네

秉燭唯須飮   촛불 밝혀두고 마셔댈지니

投竿也未遲   낚싯대 드리움도 늦지 않으이

如逢渭川獵   위천에서 문왕을 만난다면

猶可帝王師   제왕의 스승도 됨직하이

 

    上皇西巡南京歌      당명황의 남경 피난

 

濯錦淸江萬里流   맑은 금강은 만리에 흐르는데

雲帆龍舸下揚州   임금님의 배 양주로 내려갔네

北地雖誇上林苑   북쪽 땅에선 상림원을 자랑하지만

南京還有散花樓   남경에는 오히려 산화루가 있구나

 

    奔亡道中      피난길에

 

函谷如玉關   함곡관은 옥문관 같으니

幾時可生還   언제쯤 살아 돌아올꺼나

洛陽爲易水   낙수는 역수로 변하고

嵩嶽是燕山   숭산은 연산이 되었네

俗變羌胡語   세속에는 오랑캐 말씨

人多沙塞顔   사람들은 변방의 몰골

申包惟慟哭   신포서의 구원병 요청 통곡

七日鬢毛斑   이레만에 귀밑머리 하얘졌네

 

     集句中譯詩(李殷相, 金素月 詩句: 金首侖 集譯)

 

    歡樂谷                            환락곡                  

 

懷之懷之 尋而來之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懷中之汝 未有見之   그리운 그녀는 아니 뵈네

丈夫之胸 宜其忘之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三年之情 不能忘之   15년 정분을 못 잊겠네

汝之胸中 旣有我矣   너의 가슴엔 내가

我之胸中 旣有汝矣   내 가슴속엔 네가 있어

只持此矣 宜其回去   그것만 지니고 가자꾸나

胸中一言 終不盡之   심중에 남아있는 말한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天地之間 廣漠無邊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歲月旣流 不用揆之   흘러간 세월 부질없이 헤아리지 말자

心無所住 望遠天邊   마음은 어디로 붙일 곳 없어 먼 하늘만 바라본다네

懷之懷之 尋而來之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서

歡樂谷上 共步路邊   함께 걷던 언덕길을

終日徘徊 彷徨而去   진종일 헤매다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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