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주
올해는 예년과 달리 중부지방에 장마전선이 걸쳐 언제 남으로 기습할지 모른다는 일기예보가 연일 계속되는 속에 1박2일 답사를 떠나려니, 혹시 비라도 만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하룻밤 자고 오는데, 준비할 것은 왜 그리 많은지 비옷을 들었다 놨다 몇 번이나 반복하다 ‘에라 모르겠다. 오면 오는 대로 무슨 수가 나겠지’ 하는 심정으로 우산 하나만 넣어 왔다. 어디 가려면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아 귀찮기도 하지만 빠뜨리고 돌아오는 경우가 하도 많아 언제인가부터 아예 짐을 단출하게 줄이는 버릇이 생겼다.
어린이 회관 앞 출발지,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예식장 가는 버스만 몇 대 보일 뿐 엄청 조용하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싱글벙글 마음이 들떠 있어 나누는 인사말에 기름기가 좔좔 흐른다. 일상에서의 탈출이 그렇게도 좋은 모양이다.
쏜살같이 달리는 차창너머로 모내기를 하려고 물을 잡은 논들이 서해안 갯벌의 염전처럼 펼쳐진다. 창을 열면 비릿한 갯내음이 금방이라도 풍겨올 것만 같다. 논에 물을 잡아놓으면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울어 제치는 개구리, 맹공이, 두꺼비들의 울음에 밤잠을 설쳤던 그 시절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달리는 차속, 당일치기 답사와는 달리 자기소개를 하란다. 서울과 일산에서 온 네 분 회원이 이 번 답사에 참여하기 위해 어제 밤차로 내려왔다고 하니까 환영의 박수가 크게 터져 나왔다. 그 분들에게는 이번 답사가 1박2일이 아니라 2박3일의 여행이 되는 것이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가슴이 콩닥거리는데, 누군가가 옆에서 ‘순천 답사에 참여하기 위해 일산보다 더 먼 미국에서 왔다.’고 너스레를 떨어줘서 가볍게 넘어갔다.
잠시 뒤에는 고모, 라일락님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10살 바기 조카가 아버지의 나라를 찾아 그저께 미국서 왔는데 아직 시차적응이 안된 상태라면서 서툰 우리말에 영어를 섞어서 소개한다. 혼자 태평양을 날아왔다는 사실에 놀라는 표정으로 박수를 보내고 나니, 엄마랑 함께 온 초등학교 5학년 연정이는 중국말로 자기소개를 한다, 2년 전 <석굴암의 원류를 찾아서> 2차 답사 때 대동, 운강, 오대산을 둘러보고 자극을 받아 중국말을 배우기 시작했다는데 누가 들어도 감탄할 정도로 유창하다. 우리 영남불교문화연구원 삼국유사유적답사회 가족들의 수준이 남다르다는 소문은 이미 널리 퍼진 사실이지만, 정말 다양하고 이채롭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첫 순례 지는 현대 한국불교사의 아픔을 가장 상징적으로 안고 있다는 선암사다. 사찰의 재산권은 대한불교조계종이 갖고 있고, 사찰 점유권은 한국불교태고종이 소유하게 된 내력을 원장님이 설명해 주셨다.
자유당 정권이 3선 개헌을 획책하던 1954년 왜색불교를 타파하고, 일본 잔재를 몰아내야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교시로 시작된 불교정화운동은 폭력배를 동원, 뺏고 빼앗기는 난타전 속에서 잡다한 난제들이 얽히고설키면서 한국 불교는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던 것이다. 정신세계를 세속의 가시적인 물리력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달려든 편의주의의 발상 속에 이미 비극의 맹아는 싹트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전에 사찰측과 교섭이 잘된 덕분에 주차장에서 내리지 않고 매표소를 그대로 통과, 더 이상 대형 버스가 갈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갔다. 특권을 부리는 것 같아 걸어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매표소를 무사통과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썩 좋아졌다.
부도밭 못 미쳐 광장에서 차를 내리니 초여름의 싱그러움이 물씬물씬 풍겨온다. 부도밭을 지나 흙길을 조금 오르니 한국 다리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승선교 다리가 나왔다. 가장 멋진 풍경이 연출된다는 지점을 찾아 길 밑으로 내려가 너럭바위에 올랐다. 허연 포말을 일으키면서 세차게 흐르는 물살이 차가운 물방울을 튕겨낼 때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물 가까이로 다가갔다.
개울 양쪽 암반을 이어주는 무지개다리 밑을 통해서 상류 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강선루의 고운 자태가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그야말로 선경이다. 어째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른다.’는 <승선>과 ‘신선이 이 내려와 노닌다.’는 <강선>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알만하다.
숙종 임금 때 호암대사가 축조했다는데 그 솜씨도 놀랍지만, 이런 절경에 무지개다리를 배치한 심미안에 감탄을 금할 길 없다.
다리는 중생들의 세계인 차안에서 부처님의 세계인 피안으로 건너가는 의미 깊은 상징물이다. 옛 사람들이 했던 대로 다리 아래를 흐르는 계곡물에 손을 씻어 세속의 번뇌를 계곡물에 흘려보내고, 산뜻한 마음으로 다리를 건넜다.
‘승선교, 강선루를 거쳐야 나타나는 선암사, 모두가 ’선‘자 항렬로 족보가 신선과 닿아 있는 것 같아 ’오늘은 신선을 만나봐야지‘하는 욕심이 생긴다.
크고 굵은 나무 밑에 나지막하게 가꿔 놓은 차밭이 남녘땅임을 일깨워준다. 삼인당 연못을 지나 일주문 앞에 서니 나 역시 신선이 다 된 것 같은, 건방진 착각에 빠져들었는지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과 6.25를 거치면서 많은 전각과 시설이 소실되고, 파괴되어 새로 짓고 고친 것이 한둘이 아니건만 하나같이 옛 것 그대로 복원한 것 같아 환희심이 절로 솟는다. ‘절집의 참맛을 알기 위해서는 선암사로 가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 말이 아님을 실감하겠다.
경내를 배관하다가 11시 40분 공양간으로 갔다. 정갈하기로 소문난 선암사 점심공양 시간에 맞추기 위해 일정을 서둘렀었는데, 과연 허사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물로만 차려진 밥상이 어쩜 이렇게 소담스럽고, 맛깔스러울 수 있을까.
줄지어선 사람들의 등쌀에 부아도 치밀고, 짜증도 나겠건만 음식을 장만하고 배식을 하는 행자스님들의 표정은 조금도 이지러짐이 없이 미소가 만발한다. 하찮은 일 하나에도 소홀함이 없이 정성을 다하면서 깨달음을 향해 자신을 담금질해 나아가는 행자스님들의 자세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너른 공양간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저마다의 느낌을 주고받느라 왁자지껄하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자 노스님 한 분이 ‘공양간의 기본은 묵언’이라면서 점잖게 핀잔 섞인 교훈을 준다. 들뜬 분위기에 도취되어 사찰의 기본법도조차 망각해버린 미욱한 중생심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모두들 겸연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공양간을 나섰다.
선암사 가람배치에서 두드러진 점은 경사진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점진적으로 전각들을 밀도 있게 배치했다는 점이다. 1828년에 작성된 <순천부조계산선암사제육창건기>에는 신라법흥왕 때 사문 아도화상이 선산에서 기도하다가 꿈에 수기를 받고 이곳으로 와서 절을 지었다고 하나 여러 정황으로 봐서 이 설은 믿을 수 없고, 신라 말 도선국사가 비보사찰로 지었다는 설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고 한다. 대웅전 앞의 3층 석탑이 바로 그 시대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초창기의 형태는 알 수가 없고, 1823년(순조 23)에 일어난 불로 1천1백여 칸의 건물이 소실되고 나서 새로 지을 때 현재의 형태를 견지하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고 원장님이 설명 하셨다.
대웅전을 지나 뒤쪽으로 들어가니 팔상전 뒷길과 흙담으로 경계를 짓고 있는 무우전과 원통전을 가르는 길이 십자로 만난다.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무우전은 태고종 종정의 처소이다. 홍매 백매가 줄지어 선 아래로 봉숭아, 맨드라미, 채송화, 옥잠화가 심어져 있고, 파란 이끼가 돋아난 것이 마치 어느 민속촌의 고샅 같이만 느껴진다. 십여 년 전에 왔을 때나 지금이나 변화된 것이 하나도 없어 그때가 어제인 듯 기억이 생생하다. 이렇게 세월은 기억 속에서 항상 멈추어 있는가 보다.
경내를 벗어나 개울건너 사적비를 보고 원통전으로 갔다. 원통전 들입의 매화, 이게 진짜배기 천연기념물 488호 선암매다. 전해오는 말로는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선암사를 중건할 때 손수 심었다고 한다. 매화나무의 수명을 생각한다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겠지만, 굵은 줄기와 펑퍼짐한 가지가 주는 안정감과 위용은 이 절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것 같다. 이렇게 잘 생긴 매화가 어디에 또 있을까?
매화나무에 반해서 씨를 받아 자손나무를 길러볼 양으로 열매를 쳐다보니 아직 알갱이가 새파랗게 어리다. 열흘 쯤 뒤에나 익을 것 같다.
원통전, 원장님이 열린 어칸의 문을 닫으면서 문살을 보라고 하신다. 아! 세상에 이런 꽃살문이 다 있다니.
오래 묵은 긁은 모란을 줄기와 가치 채로 문 가득히 새겨 놓고, 따로 문살을 두지 않았다. 위로 이리저리 얽히면서 뻗어 오른 몸매에 활짝 핀 붉은 꽃이 탐스럽다. 왼짝에 두루미 같이 다리가 긴 새가, 오른짝엔 다리가 짧은 새가 깃들어있다. 궁판에는 방아 찧는 토끼를 품고 있는 보름달과 소나무와 새가 들어 있는 보름달을 돋을새김으로 맞춰놓았다. 선암사를 찾은 것이 몇 번 되지만 여기까지 올라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선암사 와서 원통전 꽃살문을 보지 못하고 가면 안 온 거나 같다는 원장님의 말에 수긍이 간다.
원통전 안의 관세음보살상 역시 신심이 절로 우러나는 성보다. 오똑한 코에 갸름한 얼굴, 살포시 내려 뜬 눈에 탄력 있는 몸매가 참배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원통전에 서린 일화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 원통전은 침굉 현변(枕肱 懸辯 1664~1684)선사로부터 선암사를 보호하라는 뜻으로 당호를 호암으로 지어 받은 호암선사가 약관 35세에 정자각 형태의 원통전을 짓고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모신 것이 1698년(숙종 24)이었다고 한다. 스승 침굉 선사로부터 중창의 당부를 받은 호암은 가람 중창의 원력을 세우고 대장군봉에 있는 배바위에 올라 백일기도를 드렸으나 효험이 없어 바위에서 투신을 했는데, 관세음보살께서 받아 안아 구해 놓고 사라지셨다는 것이다. 그 때 친견한 관세음보살상의 모습을 불모에게 설명해서 그대로 조성해서 모셔 놓은 것이 지금의 원통전 안에 봉안된 관세음보살상이라고 한다.
이런 조성 인연으로 이 관세음보살은 영험이 많이 나타낸 것으로 유명하다. 아들이 없어 애태우던 정조대왕이 이곳에서 후사를 빌어 얻은 아드님이 바로 순조 임금이라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순조가 12살 나던 해(1801)에 ‘대복전(大福田)’이란 어필 현판을 내려 주었는데, 그것이 지금도 창방에 높이 걸려 있다. 이런 인연은 대웅전으로 이어진다. 사위(순조)를 태어나게 한 선암사를 장인인 안동 김씨 김조순이 그냥 있을 리 있겠는가. 많은 보시를 해서 가람을 새롭게 하고 대웅전 현판 글씨를 써서 걸었다. 장중하고 힘 있는 명필의 필적이다. 정조 임금이 세자의 장인으로 맞아들일 만한 학식과 덕망을 갖추었던 사실을 이 현판 글씨에서 알아 볼 수 있다.
원통전을 나와 길게 누운 멋진 소나무를 배경으로 ‘찰칵찰칵’ 몇 번 하고 버드나무 옆 샘물을 모두들 한 모금씩 마셨다. 뱃속까지 시원해지는 것 같다.
대각암 가는 길 조무래기들이 <깐뒤>가 뭐냐고 난리들이다. 선암사만의 독특한 뒷간이다. ‘ᄁ’을 쓰지 않고 ‘ᄭ’을 써서 낯이 선데다 책 읽듯이 왼쪽에서 읽으니 깐뒤가 되어 버린 거다. 옛날의 화장실이라고 하니까 ‘깐뒤, 깐뒤’를 외쳐대며 우루루 뒷간으로 몰려간다. 구경도 하고 싶고, 실제로 이용도 해 보고 싶은 모양들이다. 크고, 깊고, 바람 잘 통하고, 깔끔해서 냄새 없는 친환경적 시설인데다 ‘丁’자 형의 아름다움까지 겸비했으니 과히 선암사의 고풍스런 분위기를 고스란히 대변해주고 있다 하겠다.
편백과 삼나무가 내품는 피톤치드를 온 몸으로 맞으면서 가파른 오솔길을 숨이 차오를 정도 쯤 오르니, 마애여래상이 나타났다. 선각으로 된 거대한 마애상인데 커다란 나발이 고사리처럼 뭉쳐있고, 매부리코에, 목이 길어 이국적인 인상을 풍긴다. 대부분의 선각 마애불이 그러하듯이 고려 중기나 후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마애불께 참배하고 10분 쯤 더 올라가니 대각암이 나왔다. 대각국사가 선암사를 중창할 때 머물렀다는 대각암, 중턱의 완만한 경사지에 자리 잡아 시야가 탁 트여 시원한 맛이 풍긴다.
암자로 들어가는 누각 앞 방지원도(方池圓島, 네모진 연못에 둥근 섬)에는 창포가 싱싱한 힘을 자랑하고 있다. 연못 중앙으로 널판이나 통나무를 걸쳐, 외나무다리를 건너 누각 밑으로 들어가게 한다면 수십 배로 의미가 깊고 운치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경내로 들어가 대각국사 의천 부도탑에 예배를 올렸다. 손상된 곳 하나 없이 온전히 보존된 팔각원당형의 부도가 아담하면서도 범치 못할 위엄을 풍기는데, 그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또한 천하 명당이라고 한다.
승선교 다리부터 운치 있게 열리는 선암사의 유기적인 공간이 대각암에 이르기까지 사뭇 감동을 자아내서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를 한껏 돋워낸다. 내심으로 한국 최고의 고풍스런 사찰이라는 평가를 내리면서 다음 목적지 낙안으로 향했다.
선암사에서 낙안 가는 길은 그야말로 신작로다, 금전산 열두 모롱이를 감돌고 휘돌아 오르는 외길은 한적하다 못해 적막하다. 대부분의 차량들이 새로 난 외곽도로를 이용하고 불편한 옛길은 피하기 때문이다.
갈수록 깊어지는 산길, 찻소리에 놀란 고라니가 도로를 가로질러 달아날 뿐 마주 오는 차 한 대 만나지 못한 채 한 시간을 달려 금전산 마루를 넘어서니 눈앞에 신천지가 펼쳐진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낙안 들녘이 예사롭지 않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낙안평야 안쪽, 금전산에 기대어 다소곳이 모여 앉은 낙안마을은 영락없는 50년 전의 시골 풍경 그대로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순천과 낙안의 풍광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풍광이 다르듯이 실제로 낙안은 독립된 고을이었는데 일제가 시작되면서 낙안군의 7 면이 순천군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낙안읍성을 서남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금둔사는 이름은 낯설어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올라 있을 정도로 낙안의 대표적 사찰이었던 같다. 기단에 팔부 신장상이 새겨지고, 초층 탑신에 사방불이 돋을새김 된 삼층석탑은 경주에 갖다놔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작품이다. 설명판을 들어다보니 보물 495호란다.
석탑 위쪽에 봉안된 석불비상은 처음 보는 형식의 불상이다. 연화대좌 위에 비석을 세우고 그 앞면에 불상을 새기고, 위에 여느 비석과 같이 기와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얹어 놓았다. 외형으로만 보면 완전한 비석 형태다.
불상은 둥글고 온화한 얼굴에 코와 입술이 아주 곱다. 속살이 비칠 것 같은 얇은 법의에 가슴 앞에 모은 하품중생인의 손가락 묘사가 놀랍도록 섬세하다. 비 뒷면에 무엇이 새겨져 있는지 알아내는 퀴즈가 나오자 모두들 다투어서 불상 뒤쪽으로 몰려갔다. 먼저 탐색에 나선 남자들을 대표해서 용모 단정한 김용모 이사님이 가에 선만 처져 있을 뿐 아무 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원장님의 입에서 ‘마음이 바르지 못한 사람 눈에는 띄지 않는 법’이라는 말에 모두들 박장대소를 하는데, 갑자기 “코끼리다.”하는 소프라노의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천수백 년 세월을 견뎌오면서 바람에 닳고, 눈비에 무디어져 육안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았지만 손가락으로 더듬으니 코와 귀와 꼬리가 감지되더란다. 역시 옛 것을 알아내는데도 여자들의 정밀하고 세심한 감각이 큰 몫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안읍성, 마치 추석이나 설 전날처럼 어수선하게 붐빈다. 수문장 교대식이다. 북소리, 날라리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벙거지에 창을 비껴든 포졸들이 보무당당히 행진한다. 먼데서 볼 때는 그럴 듯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까, 영 아니올시다. 마지못해 끌려 나온듯한 인상에 진정성마저 떨어지는 것 같아 보여주기 위한 날치기라는 것이 단박에 표시가 난다. 이왕 하는 행사라면 지자체가 보다 더 신경을 써서 세련되고, 품위 있게 연출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쉽다.
낙안읍성 동문 앞 내를 건너는 평석교 다리 위에는 개 모양을 한 석상이 동쪽을 노려보고 있다. 원래 세 마리였는데 누군가가 한 마리를 훔쳐갔던 것을 최근에 새로 한 마리 더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낙안 읍성이 서쪽은 백이산, 북족은 금전산 이 높이 솟아 안정적이나 동쪽의 오봉산이 낮고 빈약하기 때문에 인공으로 보강하기 위해 배치한 비보물이라 한다.
조선시대 읍성으로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고창읍성과 해미읍성과 낙안 읍성이 전부인데 특히 낙안읍성은 주민들이 실제로 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가치가 있다고 한다.
객사와 동헌을 지나 서문에서 성벽 위로 올라 남문에서 내려오는 길을 택했다. 감나무, 가죽나무, 석류나무의 짙은 녹음 사이사이에 반쯤 탈색된 초가지붕이 무한한 향수를 자아낸다. 옹성으로 쌓은 남문을 돌아 동.서 마을을 나누는 대로를 따라 시장터 주막에서 새참으로 막걸리 사발을 기울였다. 빈대를 듬뿍 넣어 달라는 주문에 웃음보를 터뜨리면서 마음껏 마신 새참은 김태엽 고문님이 쏘셨다. 맛은 별로였으나 추억거리는 되겠다 싶다.
이사천과 동천 두 하천이 바다로 유입되는 순천만, 끝없이 펼쳐지는 갈대밭 사이를 요리조리 누비도록 나무다리 길을 가설해 놨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오가는 길이 부딪치지 않도록 배려한 멋진 설계다.
갈대를 베어 낸 다리 주위에는 게란 놈이 거품을 버글버글 물면서 기어 나오고, 갯지렁이가 물방울을 일으키며 구멍 속으로 빠져들고, 장뚱어가 점프를 한다. 생태계 체험으로서는 멋진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꽉 찬 일정을 다 소화 하려니 다리가 아파온다. 용산 전망대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되돌아 나와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호젓한 바닷가 멋진 펜션이다. 배정된 방에 짐을 던져놓고 갯가로 나왔다. 썰물이어서 바닷물은 10리 밖에서 넘실거린다. 아이들은 조개 캐고 게 잡느라고 부산스럽게 갯벌을 누빈다.
낙조를 보려고 서둘러서 왔는데, 서쪽 하늘은 짙은 구름에 싸여 해님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 숙소 주인은 해변 가의 여름 날씨는 금방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 기다려 보라고 위로의 말을 했지만 해넘이 보기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어 일찌감치 방으로 돌아와 다리쉼을 했다.
배가 고파 올 즈음 식당으로 내려가니 완전 진수성찬이다. 먹고, 먹고 또 먹어도 생선회가 남는다. 신장개업이라 특별히 신경 좀 썼다는 주인의 말에 박수를 보내고 캠프 파이어장으로 갔다. 모닥불 피워놓고 영양가 없는 담소로 시간만 보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손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사람 수 맞추기부터 각종 게임에다 동요, 가요, 가곡에 곁들인 율동이 끝없이 이어진다. 아, 몇 년 만이던가. 금방 세상 시름 다 내려놓고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이 시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목청껏 노래 불렀다. 우리들의 놀이에 넋이 빠진 듯 하늘의 초이레 상현달도 생긋 웃으면서 멈춰서 있는 것 같다. 우리들의 노랫소리에 바다 건너 섬마을의 불빛도 흥겨운지 연신 깜박이며 신호를 보내온다.
장작불이 시들어갈 무렵 느닷없이 박경훈 총무님 부인이 작은 아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중요 행사관계로 아침에 같이 출발하지 못하고, 행사가 끝난 저녁 7시 반에 순천행 고속버스를 타고 막 도착한 것이다. 몇 시간의 이별이 그렇게도 안타까웠던지 저녁 식사도 거른 채 한걸음에 달려왔단다. 모두들 21세기의 순애보라면서 숙덕거린다. 요즘 젊은이들 정말 놀랍고 부럽다.
불꽃이 사그라지고, 북두성이 기울어서야 각자 방을 향해 헤어졌다. 달빛어린 순천만에 추억을 심은 오늘밤은 꿈속에서나마 옛 친구들을 만나 쌓인 회포를 풀리라 마음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끝 >
* 첫날 일들을 끼적거려 봤습니다. 이튿날 것은 누군가가 이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서선생님 답사기를 잘 읽었습니다. 첫 날 일정을 치밀하게 잘 기록하셨는데, 이튿날도 마저 기록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계속 수고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