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검도인을 위한
검도 웹진 <검도한국>
[제6호]
'캡틴' 이강호 선수를 만나다
<제1부>
우리나라 검도인을 위한 검도 웹진 <검도한국>은 2013년 9월 '제6호'로 구미시청 소속 이강호 선수와의 인터뷰를 기획하였다. 아직 무더운 여름의 열기가 남아있던 지난 8월 17일 오전 9시 40분, 서울발-구미행 새마을호에 오른 편집부가 구미역에 도착한 때는 오후 1시께. 편집부를 마중나온 이강호 선수와 함께 근처의 한 음식점에 들러 푸짐한 점심식사를 한 후 구미시청 검도팀의 훈련장이자 구미시 검도회 사무실이기도 한 박정희체육관 내 사무실에서 3시간 가량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이후 선수의 집에 초대를 받은 우리는 한 여성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면모도 살짝이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아래는 이날의 대화를 흐름에 맞게 편집, 정리한 것이다.
검도한국_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검도한국> 편집을 맡고 있는 신상호라고 하고요, 이쪽은 디자인을 담당하는 심현서입니다. 반갑습니다.
이강호 선수(이하, 이강호)_ 무슨 인사를 또. 방금 식사도 같이 했는데. (웃음) 아무튼 반갑습니다.
검도한국_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제대로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웃음) 점심, 정말 맛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강호_ 아이고, 아닙니다. 더 맛있는 걸 대접했어야 하는데... 어쨌든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제가 종종 입맛이 없거나 할 때 가는 곳이거든요. 그나저나 지금 제 복장이 좀... 예의가 아닌 걸 알면서도 너무 더워서 반바지를 입었습니다. 양해를 좀 구합니다.
검도한국_ 괜찮습니다. 그런데 좀 야한 걸요? (웃음)
이강호_ 아, 그렇습니까? 그럼, 도복으로 갈아입고 올까요?
검도한국_ 아닙니다. 농담입니다. 괜찮습니다.
이강호_ 그런데, 이건 뭔가요? 캠코더인가요? 영상도 올립니까?
검도한국_ 모델이 워낙 출중하셔서요. (웃음) 그림이 좋으면 좀 올려볼까 합니다만.
이강호_ 아이고, 그러지는 마십시오.
검도한국_ 알겠습니다. 녹취를 하거나 할 때 도움을 좀 받으려고 영상도 같이 찍으려 합니다. 괜찮으시죠? (웃음) 그나저나 아까 체육관 앞에서 고등학생들이 이강호 선수 차를 알아보는 것 같더군요. 내리지도 않았는데 차에 인사를 하던 걸요.
이강호_ 그랬습니까? 제 차를 아마 알 겁니다. 여기 박정희체육관이 저희 구미시청팀만 쓰는 게 아니거든요. 근처 구미 형곡고등학교 검도부 학생들도 같이 훈련을 하는 곳이라서, 그래서 이놈들이 아는 척을 한 것 같습니다. (웃음)
검도한국_ 사시는 곳은 여기서 먼가요?
이강호_ 아니요. 바로 옆입니다. 결혼하면서 가급적 체육관하고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하려고 했어요. 무슨 일이라도 생겨서 급히 가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운동하기도 좋고 해서요. 너무 멀면 좀 그렇잖습니다. 그렇다고 구미가 엄청 크고 그런 건 아니고. 한 바퀴 도는 데 20~30분이면 되거든요.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게 좋을 것 같아서 훈련장 근처에 집을 구했습니다.
검도한국_ 그럼 출퇴근을 걸어서 하시겠습니다?
이강호_ 아니요. 아무리 가까워도 차 타고 출퇴근합니다. (웃음) 거리로는 한 1km 정도나 될까요? 차로 2~3분 정도 걸리는데 이걸 걸어서 다니는 건 좀 힘들더라고요. (웃음)
검도한국_ 저희가 인터뷰에 응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작은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저희 로고를 새긴 갑 장식 스티커입니다.
이강호_ 뭘 이런 걸 다. 감사합니다. 웹진에서 본 것 같습니다. 지금 뜯어봐도 되죠?
검도한국_ 물론입니다. 지금 사용하고 계신 갑에 붙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고요. (웃음) 지인분들 나눠드리세요. 많이는 준비하지 못했습니다만. 더 필요하면 말씀해 주시고요.
이강호_ 이야, 이거 좋은데요. 갑에 붙이면 멋있겠는데요. 잘 쓰겠습니다.
검도한국_ 저희 웹진은 언제 처음 보셨습니까?
이강호_ 이번 인터뷰 건으로 편집장께서 연락을 주시기 전에 '상태' - 인천시청 김태현 선수가 상단을 취하는 까닭에 '상태'라는 애칭으로 부른단다. 참고로 창원시청의 김태현 선수의 애칭은 '중태'이다. - 하고 병훈이 통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들어가봤죠.
검도한국_ 그렇다면 저희 웹진을 보셨으니까 아마 읽으셨을 것 같긴 한데요, 그래도 간단히 저희 웹진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저희 웹진은 저를 포함, 검도를 좋아하는 아마추어들이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 실력에 비해 소개가 덜된 우리나라 선수들을 우리나라 선수들에게 알리고자 창간한 웹진입니다. 어느새 1년이 되었네요. 이번 이강호 선수와의 인터뷰가 6번째가 됩니다.
이강호_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더 멀리도 가셔야 할 것인데, 구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웃음) 그리고 다음에 지방에 가실 때는 1박 2일 정도로 일정을 잡으세요. 이렇게 더운 날 힘들게 오셨는데 인터뷰만 하고 보내자니 아쉽네요. 다음에는 호구도 싸서 오셔서 운동도 하고 가족과 같이 여행도 하고 그러시면 좋지 않겠습니다. 또 우리 검도하는 사람들은 몇 시간 이야기하는 것보다 같이 칼을 맞대고 땀을 흘려야 금방 친해지고 그러는 거니까요. (웃음) 아무튼 이렇게 우리나라 검도 발전을 사비 털어서 멀리 인터뷰도 하러 오시고, 공개는 무료지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사실 저희 선수들도 남는 시간에는 인터넷도 자주 하고 동영상도 보고 또 검도 카페 같은 데 들어가서 글도 읽고 하는데요, 막상 글을 쓰기에는 어색한 게 없지 않아 있어요. 신비주의 그런 건 아니지만, (웃음) 선수들도 온ㆍ오프라인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교류도 자주 하고 하면서 팬도 확보하고 그래야 하는데 말이죠. 저부터도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게 죄송하고 안타깝고, 그렇습니다. 한때는 매스컴이라던가 유명 연예인들을 통해서 홍보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경기 불황 탓인지 검도계가 많이 위축된 게 사실이에요. 이런 때에 <검도한국>이 노력해 주시고 계셔서 선수로서도 물론이고 한 명의 검도인으로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검도한국_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무척 뿌듯하네요. 감사합니다. 저희가 지금과 같은 인터뷰와 함께 앞으로 했으면 하고 기획하고 있는 몇 가지 사업들이 있는데요. 아직은 여력이 부족해서 실행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만. 우선은 저희 웹진에 '실업팀 서포터즈'라는 제목으로 각 실업팀별 응원 게시판을 만들어 두었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팀이나 선수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많이들 궁금해 하시는데 대한검도회 홈페이지나 한국실업검도연맹 홈페이지에서 그런 정보가 공개되고 있지는 않아서요.
이강호_ 아, 저도 최근에 가입하면서 봤습니다.
검도한국_ 네. 알고 있습니다. '열혈강호'라는 닉네임으로 가입하셨죠? (웃음)
이강호_ 네. 맞습니다. (웃음) 가입하고서 죽 둘러봤는데, 제 팬이라는 분들께서 글을 올리셨더라고요. 아휴, 어찌나 부끄럽던지. (웃음) 사실 심판 보러나 경기 하러 시합장에 갈 때면 팬이라면서 같이 사진 한 장 찍자는 분들이 종종 계세요. 모른 척하고 가실 수도 있을 텐데 오셔서 말도 걸어주시고 하면 그게 그렇게 감사하더라고요.
검도한국_ 자주 오셔서 글도 좀 남겨주세요. 또, 요즘은 동영상 촬영이나 인터넷 스트리밍이 워낙 손쉬운 시대라서요. 독자들이 자신들의 수련 영상을 올려서 선생님이나 선수들이 덧글이나 답글 형태로 원-포인트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또 세미나도 개최하려고 하고요. 그날이 오면 연락드릴테니 꼭 협조해 주셔야 합니다.
이강호_ 당연하죠. 연락만 주십시오. 대회 때가 아니면 그렇게 바쁜 것도 아니니까요. 훌륭한 선생님들 모셔서 세미나를 여시면 선수들도 저절로 많이 모일 겁니다. 또 지역별로 실업팀이 한두 개씩 있으니 그들이 주축이 되서 연무를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검도한국_ 그것도 좋은 의견이네요. 아무쪼록 그런 날이 빨리 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강호_ 저도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검도한국_ 본격적인 질문에 앞서, 일단 이번 2013년 9월 '제6호'의 제목을 '캡틴 이강호'로 할까 합니다.
이강호_ 어휴, 좀 민망한데요. 다른 거 없어요? (웃음)
검도한국_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분이시니까요. 지난 세계대회 때 주장이기도 했고요. 또,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외모나 풍기는 이미지가 딱 '주장'의 느낌이세요.
이강호_ 나이가 많아서 그럴 겁니다, 나이가 많아서. (웃음)
개인 정보
검도한국_ 개인 정보부터 좀 여쭤볼게요.
이강호_ 생일은 1978년 4월 27일이고요, 띠는 말띠입니다. 결혼은 했고요. 지금 집사람과 4살짜리 아들녀석과 같이 살고 있습니다. 혈액형은 O형이고요. 별자리는 쌍둥이자리인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아마 그럴 겁니다.
검도한국_ 별자리 같은 걸 믿으세요?
이강호_ 아니요. 그런 거 안 믿습니다. 요즘 별자리 믿는 사람은 잘 없지 않아요? (웃음) 무교이기도 없고요.
검도한국_ 사모님과 아드님도 O형이신가요?
이강호_ 사모님요? (웃음) 집사람은 B형이고 아들은 O형입니다.
검도한국_ 아이가 아주 귀여울 때네요. 둘째 계획은요?
이강호_ 네. 지금 무척 활달하죠. 흔히들 미운 4살이라고 하잖아요. 지금이 딱 그때죠. (웃음) 둘째는 계획은 하고 있는데, 계획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웃음) 제가 5형제 중에 넷째거든요. 딸-아들-딸-아들-딸, 이렇게. 다 두 살 터울로. 저희 아버지께서 자식 농사에 타고난 기술을 가진 분이세요. (웃음) 형제가 많다보니 조카도 10명이 넘고요. 그런데 조카 대부분이 사내녀석들이에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는 딸을 하나 낳았으면 하시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아내는 4자매라서 그런지, 아들을 좋아하는 것 같고 그렇습니다.
검도한국_ 아드님과 잘 놀아주는 편이세요?
이강호_ 그럼요. 잘 놀아주죠. 아들이 집사람과 같이 있는 시간이 저에 비해 많이 때문에, 교육이라든지, 아이와 관련되어 결정해야 할 것들 대부분은 집사람 의견에 따르는 편입니다. 대신 저는 엄마한테 혼나면 달래주고 목마도 태워주고 하면서, 착한 아빠, 천사 아빠 역할만. (웃음) 페이스북 보니까 편집장께서도 그렇게 지내시는 것 같던데요. 딸 하나 있으시죠?
검도한국_ 네. 그런데 저는 혼도 제가 내는데. (웃음) 아드님도 앞으로 검도를 시킬 계획이세요?
이강호_ 뭐, 하고 싶다면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종종 체육관에 데리고 와요. 이놈도 싫지는 않은지 아기 죽도 들고 머리야 머리야 하고 다니기도 하고요. 운동신경도 좀 있는 것 같아요. 키도 큰 편이고 나서는 것도 좋아하고 활달하기도 해서. 까불기도 많이 까불지만요. 그렇지만 어린이는 어린이다워야죠. 아무튼 검도를 하고 싶어한다면야 말리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검도한국_ 키와 체중은 어떻게 되십니까?
이강호_ 키는 187cm입니다. 몸무게는 84kg이고요.
검도한국_ 김태현 선수와 비슷하시겠네요.
이강호_ 상태요? 네, 비슷할 겁니다, 아마.
검도한국_ 지난 번 인터뷰 차 김태현 선수를 만났는데, 하, 정말 크더라고요. 뒤에서 따라가는데 전봇대 같은 느낌이랄까.
이강호_ 맞아요. 태현이는 키도 큰데다가 덩치도 좋거든요. 키는 저하고 태현이가 실업팀 선수들 중에 제일 클 겁니다. 그렇지만 다른 선수들도 다들 커요. 보통 180cm 전후일 겁니다.
검도한국_ 운동량이 대단하실 텐데 체중을 유지하시는 비결이 따로 있나요? 보양식을 먹는다거나, 아니면 체질적으로 살이 잘 안찌는 편이라던가.
이강호_ 따로 보양식을 챙겨 먹지는 않고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체질적으로 잘 안찌는 편인 것 같아요. 무릎을 다쳐서 수술했을 때는 거의 90kg까지 찐 적도 있지만요. 그리고 체중 관리를 좀 하는 편입니다. 저는 2~3kg만 불어도 운동할 때 느낌이 완전히 달라요. 스피드도 잘 안나오고요, 힘도 들고,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바로 옵니다.
검도한국_ 성격이 다소 예민하신 편인가요?
이강호_ 그런 말을 종종 듣습니다. 저희 코치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스스로도 좀 예민한 편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검도한국_ 그렇다면 시합에서 긴장을 많이 하시나요?
이강호_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시합에서 초조해 하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저는 저 스스로를 믿어요. 시합 결과는 그 전까지 제가 해온 만큼 나온다고 생각해요. 뿌린 만큼 거둔다고, 결과는 팀 훈련이나 개인 훈련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에 비례해서 따라온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분명히 열심히 준비한 것 같은데 성적이 좋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만, 그럴 때는 더 열심히 하겠다고 각오를 하고 빨리 털어내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긴장감은 필요하죠. 상대가 누구든 만만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런 긴장감이나 지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은 선수에게는 필수적이죠.
검도한국_ 다른 개인 정보에 대해서도 답해주세요.
이강호_ 티셔츠는 105를 입습니다. 허리는 34 정도, 발 크기는 280mm입니다. 여기 적힌 머리 둘레랑 손 둘레는 호구 사이즈 말씀이시죠? 머리는 70-58인 걸로 기억하는데, 손 둘레는 기억이 안나네요. 확인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집 주소는 경상북도 구미시 송정동 동양한신아파트고요, 팀 주소는 경상북도 구미시 광평동 277번지 구미시 검도회입니다. 이 주소는 저희 팀 주소기도 해요. 시청팀 훈련장이고 동시에 구미시 검도회의 중앙도장 같은 곳이거든요. 아까 본 형곡고 검도부 학생들도 훈련하고요. 페이스북 주소는 www.facebook.com/kangho.lee, 메일 주소는 97391025@hanmail.net 입니다. 휴대폰 번호 빼고는 다 공개하셔도 됩니다.
검도한국_ 혹시 좌우명이나 신조가 있으세요?
이강호_ 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검도를 해오면서 얻은 진리입니다. 언젠가 개인 훈련에 몰두하는 중에 이렇게 노력한 것에 대한 성과가 있겠지, 하면서 스스로 주문을 외웠던 기억이 나네요.
검도한국_ 취미는요?
이강호_ 제가 꽃 기르는 걸 좋아해요.
검도한국_ 네? (웃음)
이강호_ 그렇게 안 보이죠? (웃음) 제 주변에 골프나 낚시, 야구, 등산, 뭐 이런 걸 좋아하는 분들이 많이 계습니다. 그런데 저는 꽃이나 나무 기르는 게 좋아요. 그냥, 그런 것들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웃음) 이곳 사무실에도 원래 꽃 같은 건 없었는데, 제가 다 구해서 물도 주고 분도 갈아주고 해서 저렇게 있는 거예요. 집사람이 장난으로 질투할 정도니까요. (웃음) 그런데 지금 사무실에 있는 꽃들이 죽어가고 있어요. 에어컨을 틀면 안되는 건데, 딱해요, 아주. (웃음)
검도한국_ 특별히 좋아하시는 종류가 있다면요.
이강호_ 그런 건 없고요, 꽃이면 다 좋아요. 풀꽃도 좋고요. 꽃 좋아하는 건 어머니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어머니께서 늘 꽃을 키우셨어요. 지금도 순천 집은 꽃 때문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니까요. 저도 시간 날 때면 인터넷 꽃 카페 같은 데 들어가서 구경하고 그래요. (웃음)
검도한국_ 좀 뜻밖입니다. (웃음) 다른 취미가 있다면요?
이강호_ 운동 다 좋아하고요. 물에서 노는 걸 특히 좋아해요. 집 근처에 바다가 있어서, 또 아버지께서 배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바다에 자주 나갔거든요.
검도한국_ 구분이 애매하긴 하지만, 특기가 있다면요? 꽃 키우기를 특기로 쓸까요?
이강호_ 아이 참, 특기는 아니고요. (웃음) 그냥 취미로만 해 주세요. 특기라면 만들기나 고치기 정도? 공고를 나와서 그런지 손재주가 좀 있는 것 같아요. (웃음)
검도한국_ 주로 어떤 걸 만드시는데요?
이강호_ 여기 사무실에 걸린 액자랑 그 밑에 받침대, 이런 것들 다 저랑 노만우 코치(구미시청 검도팀 코치)가 만든 것들이에요. 사진 사이즈에 맞게 틀도 짜고 드릴로 구멍 뚫고 액자 달고 이런 거 전부요. 배선 정리나 간단한 전기 공사 같은 것도 직접 해요.
검도한국_ 이야, 대단하시네요. 그럼, 전자제품 수리도 가능하세요?
이강호_ 냉장고든 핸드폰이든 일단 좀 이상하다 싶으면 뜯어는 봐요. 가끔 감전될 때도 있긴 한데, (웃음) 일단 뜯기는 합니다.
검도한국_ 못 고치면 어쩌시려고.
이강호_ 그럴 때는 사람 부르면 되니까요. (웃음) 좀전까지 쓰던 핸드폰도 집에서 다 뜯어봤어요. 이상이 좀 있어서 대리점도 가고 A/S 센터에도 가봤는데 다들 자기들 잘못이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알겠습니다, 하고는 집에 와서 다 뜯었죠. 그런데, 이건 진짜 모르겠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집사람 화장용 솔로 청소만 살살 해놓고 그냥 처분해 버렸죠. 그래도 잘 고치는 편이에요. 후배들도 제가 김병만 같다고 한다니까요. 생활력도 강한 편이고, 아무튼 그렇습니다. (웃음)
검도한국_ 아까 저희를 태워주신 차가 소렌토였나요?
이강호_ 네. 소렌토 맞고요. 한 11년쯤 탔나, 꽤 됐죠.
검도한국_ 이야, 정말 오래 되었네요. 전국을 누비실 텐데.
이강호_ 지금까지 23만km 정도 탔어요. 보통 1년에 3만km 정도 탑니다. 사실 바꿀 때도 됐고 주변 사람들과 가족들도 전부 차 좀 바꾸라고 하는데. 제게 자동차란 운송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서. (웃음)
검도한국_ 다음 차는 외제차로?
이강호_ 아뇨. 생각한 적 없습니다. 지금 제게는 수입차는 좀 과한 것 같아요. 물론 저도 좋은 차가 싫은 건 아닌데요, 제게는 아직 맞지 않는 옷 같아서요. 또 드라이브를 좋아한다거나 그런 편도 아니거든요. 저 차는 제 소유이긴 하지만, 사실 우리 팀 렌터카로 쓰이는 것 같아요. (웃음)
검도한국_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바꾸라는 것 같군요. (웃음)
이강호_ 아, 그런 건가요? (웃음)
검도한국_ 실례되는 질문이겠습니다만, 실업팀 선수로서 받는 급여에 만족하십니까?
이강호_ 네. 저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직장운동경기부라고 해서 일종의 공무원 신분이면서 동시에 세미-프로잖습니까. 정해진 급여 외에 계약금이나 실적에 따른 보너스도 있고 해서요. 연봉 조정도 되고. 검도 선수로서 검도에 최선을 다한다면 그에 부응하는 보상도 따르는 편이라서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다.
검도한국_ 실업팀 선수 급여 말고, 학생들 지도라던가 사설도장 사범과 같은 부수입은 없으세요?
이강호_ 저는 없습니다.
검도한국_ 팀과 계약할 때 조건 사항이라던가, 일종의 제재가 있습니까?
이강호_ 아니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만, 저는 팀 운동을 최우선에 두고 있기 때문에 되도록 많은 시간을 팀에서 보내려고 합니다.
검도한국_ 퇴근 후나 주말에 사설 도장에서 사범 생활을 하는 선수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강호_ 그건 온전히 개인의 문제이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돈을 벌고 대인 관계를 넓혀가는 것을 팀 소속이라고 막는 건 말이 안되죠. 그리고 아시겠지만 저희 같은 선수들은 은퇴 후의 진로가 막막한 편입니다. 그때 도장을 운영할 계획이 있는 선수라면 미리 경험을 쌓아두는 것이 필요하죠. 하지만 동시에 실업팀 선수는 소속 팀에 봉사를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대회에서 입상하고 시합에서 우승하는 것은 선수 본인에게도 좋은 것인 동시에,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소속 팀과 시, 도의 명예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한 것이죠. 그래서 시, 도에서 선수에게 월급을 주고 팀에 투자를 하는 것일 테고요. 그런 측면에서 실업팀 선수라면 최소한 투자를 받은 만큼의 결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외 활동이 주가 되어서 팀 운동에 집중을 못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둘 모두 안정적으로 하기는 정말 어렵죠. 그래서 저는 실업팀 선수라면 가급적 팀 운동에 전념하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검도만 잘 해도 금전적인 보상이 뒤따르니까요. 예전과 많이 달라져서 선수 처우에 관한 제도적인 장치도 많이 개선되었거든요. 결론은, 실업팀 선수라면 팀을 우선시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검도한국_ 실업팀 선수로는 거의 최고참이신데요.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 있으신가요?
이강호_ 실업팀 선수가 된다는 것은 검도 선수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환경, 최선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시간 동안 반복되는 연습과 경기 경험이 헛되지 않았는지 검증을 받은 검도인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죠. 이러한 실업팀 선수 생활을 얼마나 오래 할 수 있는지는 각자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습니다. 강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주었으면 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때 후회가 남지 않았으면 합니다.
검도인 이강호
충무초등학교 졸업 (91년)
승평중학교 졸업 (94년)
순천공업고등학교 졸업 (97년)
목포대학교 졸업 (2001년)
검도한국_ 이제 검도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입문 시기와 그 계기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이강호_ 입문 시기는 중학교에 입학한 91년입니다. 초등학교는 충무초등학교를 나왔고요. 제 고향 순천은 지금은 많이 발전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깡촌'이었어요, '깡촌.' (웃음) 논밭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 곳에서 김태일 선수와 김완수 선수, 저까지 이렇게 나름 유명해졌으니까요. 저희 스스로도 개천에서 용 났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웃음) 무안군청팀 소속인 김태일 선수는 제 1년 후배고요, 김완수 선수 같은 경우 초, 중, 고, 대학교까지 후배예요, 3년 후배. 아무튼 그런 곳에서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우연히 검도를 시작하게 되었죠.
검도한국_ 우연히라뇨?
이강호_ 승평중학교에 입학을 했는데요, 그전까지 검도부가 없는 학교였어요. 그런데 제가 입학한 해에 체육 선생님으로 박종현 선생님께서 부임해 오셨어요. 전공은 배구셨지만 검도를 하시던 분이셨지요. 박종현 선생님께서 저희 승평중학교에 검도부를 만드신 거죠. 덕분에 제가 지금까지 검도를 할 수 있게 되었고요. 지금 박종현 선생님께서는 순천의 연향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고요, 동시에 전라남도검도회 자문위원이십니다.
검도한국_ 이강호 선수를 발탁하신 까닭은 운동을 잘 하셔서겠죠?
이강호_ 그런 것도 있지만 공부를 못해서 뽑으셨어요. (웃음) 제가 어릴 때도 키가 큰 편이었고 신체 조건도 좋고 하니까 권유를 받았어요. 왜, 교실 뒤에는 키 큰 애들이 앉아 있잖습니까? 체육 시간에 그 애들을 달리기도 시켜보고 운동신경이 있는지도 확인해서는 좀 소질이 있어 보이는 애들을 뽑는거죠. 그 중에 공부를 잘 한다 싶은 애들은 빼고. (웃음) 공부를 잘 하는 애들은 공부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게 낫잖아요. 운동은 두뇌회전만 빠르면 되니까요. (웃음) 그렇게 한 30~40명 정도 뽑혔죠. 하지만 이 애들 중에도 못견디는 애들이 있을 거잖습니까. 다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데 자기는 남아서 운동해야 하고, 그런게 힘든 아이들은 '엄마가 하지 말래요,' '공부해야 되요,' 뭐, 이런 식으로 한두 명씩 빠지다보니 저까지 동기는 딱 7명 남았어요. 2학년 선배는 2명인가 있었고요. 3학년은 곧 졸업하니까 처음부터 안뽑았고. 제가 그때 3학년이었거나 하면 지금 검도를 안하고 있었겠죠.
검도한국_ 지금도 승평중학교에는 검도부가 있습니까?
이강호_ 아니요, 제가 졸업하고 2년 후에 해체되었어요. 검도부만 해체된 건 아니고 학교가 워낙 작다 보니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학교가) 없어지면서 검도부도 저절로. 그래서 중학교 후배는 밑으로 5년까지만 있어요.
검도한국_ 같이 시작한 동기분들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이강호_ 지금까지 검도를 하는 사람은 저 혼자뿐이네요. 계속 검도를 하던 친구들도 도장도 운영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다들 다른 분야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검도한국_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나요?
이강호_ 반대는 없었지만 평범하게 학교 생활을 했으면 하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이왕 운동을 할 거면 씨름을 하길 바라신 것 같고요. 아버지께서 씨름을 워낙 좋아라 하셨고 게다가 당시 씨름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거든요. 이만기 선수나 강호동, 백승일 선수, 아시죠? 이 백승일 선수가 저희 순천 출신이기도 해서 그런지, 아버지는 제가 씨름을 했으면 하셨어요. 그렇지만 검도부가 정식으로 창단되면서 '저, 검도할게요'라고 말씀드렸을 때 그렇게 하라고. 그리고 그때 어머니께서 지금까지도 참 감사한 말씀을 해주셨어요. 남자는 모름지기 그게 공부든 도둑질이든 최고가 되면 된다. 이왕 검도를 시작한 거, 너가 우리나라에서 최고가는 선수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지금도 종종 이때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르곤 합니다. 제게 큰 힘이 되었거든요.
검도한국_ 형제 중에 검도하시는 분들은 없으시고요?
이강호_ 네. 저만 검도를 했어요. 만약 저희 첫째 형님이 검도를 하셨으면 저보다 잘 하셨을 텐데. 운동 신경이 대단하시거든요.
검도한국_ 가족들이 응원도 자주 오시고 그런가요?
이강호_ 지금은 가까운 데서 시합 하고 그러면 오시라고 말씀을 드리는 편인데요. 학생 때는 응원 오는 게 좀 싫더라고요. 부담도 되고 지기라도 하면 창피할 것 같고 해서요. 실업팀에 와서도 결혼하기 전까지는 말씀을 잘 안드렸어요. 그런데 이제는 응원 와주는 게 참 좋더라고요. 아들이 '아빠, 힘내!' 하고 응원하면 시합 중에 계속 떠올라서 힘도 나고. (웃음) 부모가 되고 나니 부모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웃음)
검도한국_ 예전에 <청년, 검을 들다>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노영훈 선수가 시합을 하는데, 응원 오신 어머니께서는 막상 노영훈 선수가 시합하는 장면을 못보시던 게 생각나네요.
이강호_ 대개 그렇죠. 검도가 UFC 같은 격투기마냥 처절하고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자기 자식이 맞고 하는 걸 보면서 기뻐하실 부모님은 없죠. 그런데 요즘은 제가 어릴 때와는 많이 달라졌어요. 가족들의 응원이 그 어떤 것보다 큰 힘이 되는 건 사실이거든요. 저희 때는 그런 경우가 잘 없었는데, 요즘 시합장에 가 보면 학부모나 가족 모두 따라와서 응원하고 같이 밥도 먹고, 어떤 부모님께서는 훈련도 같이 따라가시고 그러더라고요. 그런 게 참 좋은 것 같아요. 지금 밖에서 학생들 지도하시는 분도 학부형이세요.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무실 옆 훈련장에서 형곡고등학교 검도부 학생 5~6명을 지도하시는 분을 말한다.)
검도한국_ 중학교 때 전적은 어떠셨어요?
이강호_ 아,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요. (웃음) 1학년 때 도내 대회에서 입상한 게 전부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당연한 것이죠. 학생 검도에서는 선배 역할이 크거든요. 검도라는 운동은 눈으로 보고 배우는 부분이 큰 역할을 차지하는데 선배 없는 초짜들이 모여서 박종현 선생님께 발동작과 기본기 배우는 게 전부였으니까요. 선생님께서 고생 많이 하셨죠. 그런데 선생님 열정이 정말 대단하셨어요. 아마도 저희의 실력이 조금이라도 빨리 향상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멀리 광주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계신 사범들을 1주일에 한두 번씩 초빙하셨어요.
검도한국_ 대단하시네요. 그때 오셨던 사범님들은 기억하세요?
이강호_ 그럼요. 박영우 사범님(전라남도검도회 부회장, 연사 7단, 순천검도관 관장), 손양남 사범님(동회 부회장, 여수검도관 관장), 오재영 사범님, 황인구 사범님(동회 부회장), 임인택 사범님, 이렇게 오셨어요. 이분들 중에 박영우 사범님이 가장 오래 지도해 주셨고요. 박영우 사범님은 이후에 미르치과 검도팀 감독을 역임하셨던 분이세요.
검도한국_ 지금까지 연락을 드리고 계세요?
이강호_ 그럼요. 특히 박종현 선생님과 박영우 사범님께는 자주 연락드리죠. 순천에 가게 되면 찾아 뵙고 인사도 드리고요. 다른 사범님 모두 너무나 감사한 분들이시지만, 특히 박종현 선생님은 제가 검도를 할 수 있게 해주신 분이고, 박영우 사범님은 중학생이던 저에게 검도의 맛이랄까 멋을 보여주신 분이시거든요.
검도한국_ 다시 생각해 봐도 박종현 선생님과의 만남은 천운이네요.
이강호_ 그런 셈이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검도의 검자도 들어보기 힘든 깡촌 출신이 이렇게 검도 선수로 살아가는 건 정말 기적같은 일이죠. 교사 생활만으로도 충분히 힘드셨을 텐데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멀리서 사범을 초빙하고 그러기가 지금도 어려운 일이지 않습니까.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검도한국_ 창단 멤버이시니 훈련하기에 좋은 시설은 없었겠습니다.
이강호_ 네. 시설이 뭡니까. 운동장에서 운동화 신고 훈련했습니다. 훈련 한 번 하고 나면 도복이 흙먼지 때문에 하얗게 되고 그랬어요. (웃음) 교실 두 개 터서 실내에서 하다가 시끄럽다고 배구 코트나 강당으로 쫓겨가기도 했고요. 타격대도 없었어요. 타격대가 뭔지도 몰랐고요. 한 번은 전주 서석고에 훈련차 갔는데요, 아마 그때가 호구 쓴 지 3개월이 좀 지나서였나 그럴 겁니다. 그런데 서석고 형들이 타이어가 매달린 것 팡 하고 치고는 엄청 빨리 달려 나가는 거예요. 우와, 무슨 신처럼 보이더라고요. 그때, 와, 이런 게 검도구나 하는 경외감 같은 걸 느꼈죠. 그러다 제가 3학년이던 93년에 소년체전에서 준우승을 하고, 94년에는 우승을 했지요. 그 후에 학교에서 체육관과 합숙소를 지어주었습니다.
검도한국_ 훌륭한 선배 덕분에 후배들이 편하게 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군요.
검도한국_ 이후 진학한 순천공업고등학교에서의 생활은 어떠셨습니까?
이강호_ 그게요, 순천공고에도 제가 입학할 때까지 검도부가 없었어요. 여기서도 창단멤버예요. (웃음) 순천공고에는 운동부가 꽤 있었고 다들 잘 했어요. 럭비, 태권도, 사이클, 복싱, 아마 이렇게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들어가면서 검도부가 만들어진 거죠. 하지만 정식 운동부로 인정은 못받았어요. 그게 좀 서럽더라고요. 운동할 공간이 없어서 중학교 가서 중학교 후배들하고 같이 훈련 받고 그랬습니다.
검도한국_ 검도부가 있는 학교가 없었나요?
이강호_ 전남 나주 금성고와 광주 서석고가 있었습니다만, 두 학교 모두 다니기에는 너무 멀었어요.
검도한국_ 중학교 선배와 동기들은요?
이강호_ 선배 중 한 분은 중학교 졸업하면서 검도를 그만뒀고요. 다른 한 분이 나주 금성고에 갔어요. 검도로 유학을 간 건데, 하지만 나중에 그만 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검도한국_ 그럼 다른 동기 6분은요?
이강호_ 일단 한 명은 그만뒀어요.
검도한국_ 왜요?
이강호_ 공부를 잘 했거든요. (웃음) 검도도 참 잘한 친구였는데 공부까지 잘해서 대학 간다고 인문계에 진학했어요. (웃음) 지금은 직장인이고요. 나머지 동기들은 다 같이 순천공고로 왔고요.
검도한국_ 그럼 승평중학교 검도부 창단 멤버가, 전부는 아니지만, 순천공고 검도부 창단멤버로 이어지는군요. 고등학교 지도 선생님은 누구셨나요?
이강호_ 없었어요. 그래서 고2 때까지 계속 박종현 선생님께 지도를 받았지요. 그러다가 제가 고2가 되던 해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시면서 그 후임으로 김지천 선생님께서 졸업 때까지 지도해 주셨고요. 물론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범님들께서 계속 와서 지도해 주셨고요.
검도한국_ 훈련 강도는 역시 고교 시절이 가장 세죠?
이강호_ 아무래도 그렇죠. 그래도 그런 시기를 보냈기 때문에 대학교나 실업팀에 와서도 일정이나 훈련을 버텨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실업팀 선수에게는 무척 소중한 시간이죠.
검도한국_ 고교 시절의 추억이 있으시다면요?
이강호_ 뭐, 힘들었던 게 추억이죠. (웃음)
검도한국_ 고교 시절 전적은 어떠셨습니까?
이강호_ 전국체전에서 입상은 못했고요. 전국체전이 대회 중에 가장 규모가 큰 대회인데, 사실 입상은 생각지도 않았어요. 전주상고나 광명고 같은 기라성 같은 학교들이 버티고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운이 좀 따랐던지, 고교생 국가대표 상비군으로도 뽑혔고 춘계던가 추계대회에서 단체전 준우승도 하고 그랬어요. 덕분에 대학교도 갈 수 있었고요. 선배도 없고 전통도 없는 학교에서 좋은 선생님, 사범님 덕분에 이렇게 국가대표까지 된 것이니까, 어떨 때는 제 자신이 좀 대견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웃음)
검도한국_ 선배가 없었으니 구타도 없었겠어요. (웃음)
이강호_ 그렇죠. 선생님께 혼나는 것 말고는 없었죠. 그렇지만 솔직히 제도 후배를 안 때렸다고는 말씀은 못드리겠네요. (웃음) 그래도 다른 학교처럼 전통에 따라 체계적으로 때리거나 기합 주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후배들도 좀 편했을 겁니다. (웃음)
검도한국_ 제대로 된 시설에서 훈련을 받지는 못했지만, 많은 선생님들께 지도를 받으신 것이 큰 도움이 되었겠습니다. 하지만 한 분 밑에서 오랫동안 깊이 있게 지도를 받은 선수에 비해 단점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강호_ 맞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자세가 좋다거나 칼이 깨끗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스스로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고요. 흔히 말하는 '정칼'은 아닌 거죠. (웃음) 그렇지만 이건 정말 많은 선생님들께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2년 동안 배웠기 때문일 겁니다. 여러 사범님들로부터 각자의 특기를 중심으로 배웠으니까요. 사범님 스타일이 모두 다 다르셨어요. 어떤 분은 머리치기를 강조하시고 또 어떤 분은 손목이나 허리치기를 집중적으로 가르치시고, 또 키가 큰 분, 작은 분, 빠른 분, 강한 분, 그렇게 다 달랐죠. 이렇게 6년 동안 적어도 7~8명의 사범님을 사사한 덕분에 정해진 주특기는 없지만 여러 기술을 다양하게 구사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검도한국_ 그렇군요. 그렇지 않아도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이강호 선수의 시합 영상들을 여럿 보았는데요, 시합 중에 상대에게 검도의 거의 모든 기술을 시도하시더군요.
이강호_ 네. 그런 부분이 단점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제게는 큰 무기가 되고 있어요.
검도한국_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이 누구냐는 질문은 우문이겠군요.
이강호_ 좀 그렇죠. 정말 많은 선생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니까요. 그래도 박종현 선생님, 김지천 선생님 밑에서 박영우 사범님, 남경남 사범님, 그외 여러 훌륭한 사범님께 배울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 은사시죠. 그중 박종현, 김지천, 박영우 선생님께는 특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검도한국_ 이제 대학교 시절 이야기를 듣기로 하죠. 목포대학교 97학번이신데요, 검도 특기자로 입학하셨을 테고요. 학과는?
이강호_ 체육학과입니다.
검도한국_ 목포대 검도부는 어떤 곳입니까?
이강호_ 역사나 전통이 상당한 곳이죠. 지도 교수님들도 쟁쟁하셨고요. 박동철 교수님, 전호문 교수님, 정동진 교수님이 계시는 곳이니까요. 제가 2학년 될 때까지는 박동철 교수님께 배우다가, 박 교수님께서 일본에 교환 교수로 가시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후로는 전호문 교수님께 배웠고요. 선후배 중에 국가대표도 꽤 많이 있어요. 집과 그리 가까운 건 아니지만 같은 지역이니까 별 다른 고민 없이 입학을 결정했습니다.
검도한국_ 입학 때는 이미 전국적으로 유명하셨겠죠?
이강호_ 아니요, 전혀요. 고3 때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뽑힌 것 덕분에 조금 알려지긴 했지만, 다른 선수들이 정말 잘했거든요. 김용대, 남태윤, 박상석, 조국현, 김동진, 김영호 선수가 워낙 잘하고 유명하고 해서 저는 그냥 열심히는 하는 고만고만한 선수, 딱 '고만고만한 선수' 정도였어요.
검도한국_ 그럼 결국 지금 언급하신 상비군 출신 선수들과 대학 시절 동안 라이벌 관계셨겠군요?
이강호_ 라이벌은 말도 안 되고요, 다들 정말 기가 막히게 잘 했어요. 그냥 다 저보다 훨씬 잘하는, 진짜 초일류 선수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에 비해서는 정말 초라할 정도였죠. 그들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할 정도로 실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검도한국_ 다소 뜻밖이네요. 목포대는 그래도 검도 명문이지 않습니까?
이강호_ 꼭 그렇지는 않아요. 그때만 해도 저희 목포대 검도부 레벨이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었어요. 대구대나 용인대, 조선대가 최상위 클래스였고 그 밑으로 저희 목포대나 국민대, 성균관대 정도가 있었고요. 제가 있을 때 전국체전에서 2번 준우승을 거둔 적이 있기는 하지만, 우승 후보로 거론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검도한국_ 우승 경험이 없으시다고요? 최근 6단부 대회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시던데요.
이강호_ 아이고, 과찬이십니다. (웃음) 실업 초까지만 해도 제 별명이 '만년 2인자'였어요. 대학 때 친구 중에 농구하던 녀석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늘 저만 보면 '너는 2등만 하냐, 이 만년 2인자야,' 그런 말을 하곤 했어요.
검도한국_ 넘지 못할 1인자가 있었던 건가요?
이강호_ 아뇨. 그렇다기 보다는, 이상하게 꼭 결승에서 잡혔어요. 실업팀 초반에도 입상을 했다 하면 준우승이지 우승을 못했고요. 집에 있는 메달이 죄다 은빛이라니까요. (웃음)
검도한국_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강호_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요. 결승에만 오르면 마음을 놓아버린다고 할까요. 이 정도면 됐다, 입상만으로도 충분하다, 뭐, 그런 안도감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어려서 그랬는지, 그때만 해도 내가 최고가 되겠다는 패기는 없었어요. 목포대가 국립대학교긴 하지만 규모도 워낙 작고 시골에 있고 해서 그런지, 입상한 것만으로도 잘했다, 수고했다 칭찬해 주는 분위기였거든요. 그렇지만 실업팀은 다르더군요. 초반에 고생 좀 했습니다.
검도한국_ 당시 1위를 하던 선수들은 역시 상비군 선수들이었겠죠?
이강호_ 대부분 그랬죠. 다들 참 잘했어요. 조국현, 김용대, 강상훈, 박상석, 김동진, 남태윤, 이승준, 이렇게 저희 동기들이 모두 정말 잘했어요.
검도한국_ 팀내 역할은 어떠셨습니까?
이강호_ 오더 말씀이시죠? 1, 2학년 때는 주로 선봉을 맡았고요, 3, 4학년 돼서는 부장이나 주장으로 뛰었죠.
검도한국_ 목포대 검도부의 전통이 있다면?
이강호_ 전통이라 하기는 좀 그렇지만, 목포대는 운동을 핑계로 수업을 빠지는 게 불가능했어요. 지금도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웃음) 그때는 그랬어요. 지도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검도 선수는 검도 말고 공부라든가 다른 뭔가 잘 하는 게 하나 정도는 있어야 진짜 검도를 잘 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큰 대회를 앞두었을 때 말고는 수업에 다 참석해야 했어요. 수업 끝나고 운동해야 하니까 좀 힘들었죠.
검도한국_ 대학 시절의 학교 성적, 학점은 어떠셨어요?
이강호_ 잘 했어요. (웃음) 학점이 3.5던가, 그 정도로 졸업했습니다. 조금만 더 잘 했으면 교직도 받았을 텐데, 그걸 못받은 게 좀 아깝더라고요. 저희 학교는 성적순으로 교직을 줬는데, 제가 1학년 때는 40명 중에 7등인가를 했어요. 그런데 2학년 돼서 전국체전 준비하느라 수업을 못들어 갔단 말이죠. 그랬더니 10등 밖으로 떨어졌어요. 교직을 8등까지 주는데 제가 9등인가 10등인가 해서 못받았어요. 그렇지만 출석도 열심히 하고 레포트 잘 내고 시험도 잘 본 친구들보다 좋은 성적을 받는 건 말이 안되니까.
검도한국_ 훈련이 힘들어서 도망간 적은 없으세요?
이강호_ 네. 도망 간 애들을 데리러는 간 적은 있어요. 3학년 때 군대 문제로 보름 정도 운동을 빠진 적이 있긴 한데, 도망간 적은 없습니다.
검도한국_ 목포대에서 이강호 선수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이강호_ 그냥 일반 선수였죠, 뭐. 저 때문에 팀이 강해지고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검도한국_ 대학교에는 체육관과 합숙소가 있었죠?
이강호_ 네. 다행히 있었어요. (웃음)
검도한국_ 어릴 때부터 엘리트 과정을 밟아오셨는데 검도를 하게 된 것을 후회하신 적은 없나요?
이강호_ 네. 후회는 한 적 없습니다. 힘들다고 생각은 했어도, 뭔가 다른 것을 하면 좋았을 걸 하는, 그런 후회를 한 적은 없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무엇이든 최고가 되라는 어머니 말씀이 늘 마음에 남더라고요. 모두가 최고가 될 수는 없지만, 최고로 노력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요. 열심히 하면 할수록 즐거움도 커지는 것 같습니다.
세계검도선수권대회
검도한국_ 국가대표로 발탁된 게 대학생 때죠? 2000년에 열린 제11회 산타 클라라(SantaClara) 대회가 첫 출전이시고요.
이강호_ 네. 학생 때, 맞습니다. 다 아시네요! (웃음) 그런데 대회는 못나갔어요. 잘렸거든요, 3개월 남겨두고.
검도한국_ 네? 잘리다뇨? 명단에는 이름이...
이강호_ 그게 사연이 있어요. 그때 생각만 하면 눈물이 찔끔 나려고 그래요. (웃음)
[출처] [제6호] '캡틴' 이강호 선수를 만나다 <제1부> (검도한국) |작성자 검도한국
|
첫댓글 오잉...사진이 한개도 안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