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구인문학기행 답사기
-박수근 화백과 이해인 시인을 중심으로
김경식(시인. 기행작가)
■ 양구 인문학기행의 의미
강원도 중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양구군은 태백산맥의 분수령에 자리 잡고 있다.
양구군의 대부분 지역이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는 이유다.
양구읍의 파로호 일대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요은홀차, 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양록군이란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
양구 파로호 한반도섬
940년(고려 태조23년)에 양구현이란 현재의 이름을 얻었으니 그 지명만큼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1413년(태종13)의 군현제에 의해 중앙정부에서 현감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 이후에 양구는 휴전선이 가깝고
교통이 불편한 곳이라 사람 살기에 그리 좋은 곳으로 여기지 않았던 곳이다.
그러나 이곳이 화가 박수근과 이해인 시인의 고향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인문학적 생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박수근 화백의 미술관과 다양한 박물관이 건립 된 이후에 양구는 인문학적인 토대의 그리움이 일렁이는 파라호처럼 서정성이 펼쳐진 아름다운 곳으로 거듭나고 있다.
양구 출신의 박수근 화백은 우리나라의 가난한 민중의 삶을 소재로 사람의 착함과 진실함을 화폭에 담으면서 평생을 민족미술에 바친 화가다.
단순한 형태와 선을 활용하여 대상의 본질을 강조하면서 서양화 기법을 우리 민족적 정서가 담긴 화강암과 같은 재질감으로 표현하였다.
한국적인 미의 모범과 우리 민족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그윽한 시선으로 담아내어 최고의 작가가 되었지만 평생의 삶은 가난하였다.
2002년 10월 25일 양구에 있는 박수근 화백의 생가에 건립된 <박수근미술관>은 이런 그의 삶과 작가의 작품세계와 예술 혼을 기리는 장소다.
방문객은 이곳에서 박수근 화백이 남긴 작품을 감상하면서 가난하고 불우했던 예술가가 얼마나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삶을 숭고하게 만들 수 있는지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맑고 고운 아름다운 시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평안을 주는 이해인 시인은
수녀다. 그녀를 알고 있는 분은 많지만 고향이 강원도 양구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양구 파로호 상류에 이해인 시 문학의 공간 및
김형석. 안병욱 철학의 집으로 개관하였지만 현재는 <양구인문학박물관>으로
부르고 있다.
지상 3층 규모로 지어진 이해인 시문학관은 1층에 이해인 수녀의 시와 삶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2층에는 안병욱. 김형석 철학의 집이 함께 한다.
이해인 시인은 1945년 양구읍 동수리에서 태어났다.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비롯한 많은 시집속의 작품들은 국민 시인이 될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양구기행에서 그의 삶과 문학의 세계를 조명하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양구선사박물관>은 선사시대의 전문박물관이며, 우리나라에서 최초 개관한 선사시대의 박물관이다.
또한 상무룡리 구석기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을 양구에 건립한 전시관이며, 북한강유역 매장문화재의 중요성과 지역의 선사문화를 소개하는 중요한 박물관이다.
<양구근현대사박물관>에는 우리나라의 개항 이후 현대사회의 발전 모습을 사진으로 볼 수 있다. 제1전시관은 역사의 휘모리관과 엽서관, 우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2전시실은 추억의 영화관, 아리랑관, 창간호관으로 분류하여 흥미롭다.
바로 옆에 있는 선사박물관과 함께 양구지역이 고생대부터 근현대사에 이르는 인문학적 사료의 전시 장소로는 적격이다.
인문학기행은 역사와 문학, 자연과의 만남이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도 한다. 자신의 삶을 재인식하면서 "나는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는 특별한 여행을 지향하는 이유다.
■양구의 역사와 지리
양구군은 강원도 중북부에 있는 고을이다. 태백산맥의 분수령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지역의 대부분이 높은 산악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휴전선에 인접하여 대한민국의 국방상 중요한 요지이기 때문에 군부대가 많이 산재한다.
인구 약 24,000명과 강원도에서 가장 작은 면적을 가진 양구군은 양구읍, 남면, 동면, 방산면, 해안면 등 1개읍 4개면 60개 동리가 산골에 옹기종기 평화롭게 삶을 가꾸면서 살아간다.
양구읍의 파로호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어 아주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양구라는 지명을 얻은 것은 아득한 옛날이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요은홀차>라는 특이한 지명이였다가 <양구군>이라는 지명을 얻었으니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한 고장이 분명하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16년)에 <양록군>으로 바뀌고, 고려초 940년(태조24년)에 <양구현>이란 이름을 다시 얻는다.
1413년(태종13년)의 군현제가 실시되면서 현감이 파견되어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다가 1895년에 춘천부 양구군, 1896년에 강원도 양구군에 편입된다.
참석자들이 안병욱 선생님 묘소에 묵념을 하고 있다.
양구인문학박물관 오른쪽 옆에 있는 안병욱 선생님 묘소
자연환경으로 한반도의 허리격인 태백산맥의 경계에 위치하기 때문에 1,000m 내외의 높은 산들이 군 전역에 우뚝 솟아 있다. 가칠봉(1,242m), 도솔산(1,148m), 사명산(1,198m)등이 양구군의 외곽을 둘러싸며 높게 솟아 있다.
지혜산(1,232m)에서 흘러나온 물길이 양구군의 중서부를 휘돌아 수입천은 파로호에 자신을 섞는다. 도솔산에서 발원한 서천 역시 파로호에 몸을 섞는다. 해안면 일대에는 소양강 지류들의 차별침식으로 인해 만들어진 해안분지(亥安盆地)가 형성되었다.
해안분지는 인제군 북면 원통리에서 북쪽으로 약 22㎞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의 가칠봉(1,242m)과 대우산(1,179m), 남쪽의 대암산(1,304m),동쪽의 달산령(807m), 먼멧재(730m)등 산릉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남북의 길이가 약 7㎞, 동서의 길이가 약 3.5㎞이며, 면적은 23㎢로 광활하다. 주변 산지의 고도는 800∼1,300m, 분지의 낮은 고도는 400∼500m로 주변 산지보다 약 400∼800m 정도 낮은 것이 특징이다.
해안분지(亥安盆地)는 명칭의 유래가 흥미롭다.
옛날에 해안분지에는 습한 기운이 많았다. 여름에는 주민들이 밖에 나갈 수 없을 정도로 뱀이 많았다고 한다. 뱀을 퇴치하기 위해 어느 스님이 집집마다 돼지를 키우라고 권했다. 놀랍게도 돼지를 사육하자 뱀이 사라져 이 지역 사람들이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다. 돼지 해(亥)자와 편안할 안(安)자를 써서 이곳을 해안분지(亥安盆地)라는 지형의 이름을 얻게 된 이유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 이곳은 격전지였다. 이 지형을 볼 때, 마치 사발같이 움푹 패어 있었기에 외국 종군기자들은 펀치볼(Punch Bowl)이라 불렀다.
소양강은 해안분지 동쪽의 좁은 계곡을 통과하면서 인제군으로 흘러간다. 넓지 않지만 이곳에 평야가 분포하며, 중남부에는 강원도에서 쉽게 볼 수 없을 정도의 비교적 넓은 양구분지가 펼쳐져 농경지가 되었다.
2013년 양구군의 자료에 의하면 경지면적은 약 50㎢로 경지율이 7%에 불과하며, 약 24,000명의 인구 중에서 농업인구가 5,186명으로 전체인구의 21%를 차지하고 있다.
■ 화가 박수근과 양구
화가 박수근(1914~1965)은 양구 출신이다. 8세 때에 양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도화(미술)시간에 타고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중학교 진학을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광산 사업을 하다가 파산을 하였기 때문이다.
가난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다만 양구보통학교 담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이 위안이 될 뿐 이였다. 보통학교 졸업 무렵에 프랑스의 화가 밀레의 그림 <만종>을 칼라로 처음 감상하고 깊은 감동을 받는다.
교회에 출석하면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될 수 있도록 하여 주세요"라는 기도를 하면서 화가로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닐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그의 현실은 비참하고 곤궁했다. 6남매 중에 장남으로 태어나 소년가장 노릇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박수근 묘소 가는 길
비록 가난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였지만, 그림 그리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태어난 양구 주변의 분위기를 화폭에 담기 시작한다. 가난한 이웃들의 분위기를 스케치하기 시작하면서 미술 독학의 시기가 시작 된 것이다.
거의 매일 양구의 산과 들을 답사하면서 연필스케치와 수채화를 그렸고, 농촌에서 일하는 여인과 나물 캐는 소녀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1932년 그의 나이 만 18세에 독학으로 유명했던 공모전인 <조선미술전람회>, 일명 선전(鮮展) 서양화부에, 이른 봄의 농가를 표현했던 수채화<봄이 오다>를 출품하여 입선한다. <선전>입선은 그가 독학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1935년 그의 나이 만 21세 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집안의 경제상황은 최악으로 변해갔다. 부친은 감당할 수 없었던 빚 때문에 가출한다.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며, 그는 홀로 춘천으로 떠나야 했다. 춘천에서의 삶은 절대빈곤의 허덕임이었다.
처절한 가난 속에서도 1936년 제15회 <선전>에 <일하는 여인>이라는 수채화를 출품한다. 입선이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춘천에서 포천등지로 경제적인 삶을 찾아 떠돌며 그림을 그려야 했던 이유다.
그러나 당시 그림들은 지금도 살아서 가장 한국적인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다.
절망이 희망을 낳을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이 부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가 태어났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였으며, 10대 초반에 부친의 사업실패로 인해 감내하기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살아생전에 그는 항상 가난했다.
사후에 그의 그림 값은 한국화가 최고의 가격을 매번 경신하고 있다. 만약 그가 가난하다고 해서 그림 그리는 일을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12세에 밀레의 그림 <만종>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가난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그림 그리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사후지만 부활이 가능했을 것이다.
1939년 제18회 <선전>에 유화작품 여일(麗日)이 입선된다. 이 무렵에 아버지는 재혼을 하고, 강원도 김화에 살았는데 바로 옆집에 살던 17세의 김복순을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당시 춘천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가사일을 돕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순탄하지 못했다. 김복순 부친의 심한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박수근이 김복순에게 쓴 편지는 이를 대변한다.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당신은 모를 것입니다.
어머니 편에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답장이 오지 않아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중 일전에 큰 소리가 나서 귀를 기울여 보니 내가 보낸 편지 때문에 당신이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소리였습니다. 우리 가족은 눈 속에 발을 파묻고 잠잠해지도록 울타리 밑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서 있었습니다.
참으로 미안합니다. 나로 인해 아버지의 매를 맞는 당신에게 내가 무슨 말로 사과를 드려야 할까요? 그러나 당신 못지않게 나의 마음도 몹시 아팠습니다. 소설에서나 영화에서 실연을 당하고 자살을 한다든가 병이 난다든가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못난 사람이라고 흉을 보았습니다. 그러던 내가 당하고 보니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춘천으로 약혼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참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 했습니다. 나는 스스로 의지가 강하다고 자부했었는데 이처럼 약한 줄이야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는지요? 그 사람과 약혼을 한 당신이 내 아내가 되어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줄 알면서도 나는 하나님께 수없이 기도를 했습니다. 당신을 내게 돌려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당신을 모델로 해서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이번에 서울 가서 당신에게 줄 불란서 자수 수실을 사 가지고 와서 보내니 고운 수를 놓아 가지고 오십시오. 지면에 다 이야기할 수가 없어서 이만 씁니다. 결혼하면 두고두고 옛이야기 삼아하고 삽시다. 몸조심하십시오. 안녕히.”
-박수근 편지 인용
26세 때인 1940년 2월 10일, 금성(김화>감리교회에서 김복순과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생활이 시작된다. 그해 5월 평남도청 사회과의 서기로 취직이 되어 평양으로 떠난다.
비록 셋방살이에 가난한 삶이었지만 행복한 신혼을 보낼 수 있었다. 휴일과 퇴근 후에는 그림그리기에 열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제 20회 <선전>에 <맷돌질하는 여인>이 입선하였지만 살벌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다.
1942년, 28세 때의 봄에 첫아들 성소(成沼)가 태어났으며, 제 21회 <선전>에서 첫아들을 안고 있는 아내를 모델로 그렸던 모자(母子)가 입선되기도 했다.
이듬해 제 22회<선전>에서 자신이 아내를 모델로 하여 <실을 뽑는 여인>을 그려서 입선하였다.
1944년, 30세 때에 첫 딸 인숙(仁淑)이 태어났으며,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자 아내와 어린 남매를 김화(금성) 본가로 보내어 살게 했다. 1945년 평양에서 해방을 맞이했던 이유다. 조국이 해방이 되자 그는 평남도청 서기직을 사임하고 김화에서 금성(김화)중학교 미술교사가 되었다.
그가 머물던 북한 통치는 자유가 없는 독재의 살벌한 이념의 늪이었다. 1947년 봄에 첫아들 성소(成沼)가 태어났지만, 이듬해 뇌염으로 세상을 떠나 그를 슬프게 했고, 1949년에는 3남 성인이 태어났지만 한국전쟁 피난 때에 세상을 떠났다.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을 선택한 박수근은 군산에서 부두노동으로 목숨을 겨우 부지하면서 이별했던 가족을 찾기 시작한다. 1952년 10월, 서울 창신동의 큰 처남 김영주의 집에 머무르면서 그곳을 찾아온 아내와 극적 상봉을 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혜화동에 살던 화가 이상우가 운영하던 화방을 중심으로 헐값에 그림을 팔려고 노력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다만 1953년 이상우의 소개로 미군 CID(범죄수사대)에서 그림 그리는 일자리를 얻는다.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건물에 있던 미8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렸던 시기다.
이때의 수입으로 창신동에 조그마한 판잣집을 구입하면서 작은 마루를 제작실로 삼아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 박수근이 미군 초상화를 그리던 상황을 박완서 작가는 자신의 등단작 <나목>에서 자세하게 표현했다.
1953년 가을에 개최되었던 제2회 대한민국 미술전(國展)서양화부에 <집>이 특선으로 선정되었다. 이 무렵부터 박수근의 화법은 색감을 단순화하고 소박한 주제 전개와 굵고 명확한 검은 선의 윤곽, 흰색, 회갈색, 황갈색이 주종을 이루기 시작한다.
이 해에 막내아들 성민(成民)이 태어났다.
1956년 제 5회 <국전>에서 <나무>가 입선하지만 반도호텔(지금의 롯대호텔 자리) 안에 문을 연 반도화랑에서 외국 미술애호가 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작가로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가장 한국적인 소재와 정감을 가진 특이한 조형수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해에 둘째 딸 인애(仁愛)가 태어났지만 1967년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57년 그림이 좀 팔리고 있었지만 가난한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제 6회 <국전>을 위해 1백호 크기의 대작 <세 여인>을 출품하였으나 낙선한다. 이 낙선의 충격은 그를 비탄에 빠지게 했으며 술을 의지하게 되었다.
1958년 반도화랑이 문을 열 때 관리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수집가인 미국여성 실리아 짐머맨(Celia Zimmerman)의 수집 작품 중에서 박수근 화백의 <노변의 행상>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네스코 미국위원회 기획의 <동서미술전>에 출품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63년 50세 때에 제 12회 <국전>에 추천작가로 악(樂)을 출품하였지만,
과음으로 신장과 간에 병이 생기고, 왼쪽 눈의 백내장은 수술비용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해 고통을 인내해야 하기도 했다.
늦은 수술로 인해 시신경이 끊어져 한쪽 눈이 실명되었다. 안경을 끼게 되고 오른쪽 눈만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다.
1965년 52세 때인 1965년 5월6일 새벽 1시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유해는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동신교회 묘지에 안장하였다가 박수근미술관이 개관되면서 자신의 고향 양구로 돌아왔다.
그는 세상 떠나기 전에 곤궁했지만 열심히 그림을 그렸던 삶을 요약한 글을 남겼다.
“나는 강원도 양구군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렵지 않게 살며 보통학교엘 입학했는데 미술시간이 어찌나 좋았는지 몰라요. 제일 처음 선생님께서 크레용 그림을 보여주실 때 즐거웠던 마음은 지금껏 잊혀지지 않아요. 그러나 아버님 사업이 실패하고 어머님은 신병으로 돌아가시니 공부는 커녕 어머님을 대신해서 아버님과 동생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우물에 가서 물동이로 물을 들어와야 했고 망(맷돌)에 밀을 갈아 수제비를 끓여야 했지요. 그러나 나는 낙심하지 않고 틈틈이 그렸습니다. 혼자서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그림 그리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빚 값으로 한 채 남은 집마저 팔아버리고 온 식구가 뿔뿔이 헤어져 살 수 밖에 없게 되어 이후로 나는 춘천으로 평양으로 봉급생활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해 왔어요. 한때는 초상화를 그려 경제적 뒷받침을 하기도 했지요.”
■ 이해인 시인과 양구
이해인 시인은 1945년 6월7일 양구군 양구읍 동수리에서 태어났다.
6세 때인 1950년 6.25한국전쟁은 삶의 굴곡진 상처를 남기는데 아버지가 납북되면서 집안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문학소녀였던 이해인은 김천 성의여고에 입학해 수녀원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이 무렵에 전국 고등학생 백일장에 나가 <산맥>이란 시로 장원을 한다. 이 시로 문학을 향한 서막이 시작되었다.
이해인문학관은 현재 양구인문학박물관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해인 시인 고향 동수리 강변 풍경
아득한 하늘 너머
천년 그리운 님의 얼굴이 있어
천년을 묵묵히 기다려야 하는가
파랗게 이끼 먹도록
태양을 외면한 채
매양 너를 키워 온
검은 바위 바위를 안고
그렇게 오래도록
침묵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어야만 하는가
지나온 날들을 생각지 않겠다
모질게 아려오는 슬픔의 노랠랑
아예 부르지 않겠다
녹슨 세월을 발돋음하고
노을처럼 붉게 타오르더니
고독이 하얗게
눈으로 내려덮인 마음 기슭엔
봄을 거부하는 하늘이 미워
가슴에 가득히 별을 심어 다오
작은 꽃포기 하나라도 심어 다오
구겨진 상처를 끌어안고
뜨거운 그리움에
몸부림치더니
하늘이여
내 새봄을 맞아 한번의 푸른 웃음
웃어야 할 그때까지
천년을 또 묵묵히 기다려야 하는가
아- 마음 아픈 어젯날은 잊자
찬란한 내일만을 믿자
-이해인 시인 시 <산맥> 전문
이해인 수녀의 본명은 <이명숙>이다. 수녀원에 입교하면서 <해인>이란 필명을 지어서 가톨릭에서 발간하는 <소년>지에 시를 투고한 것이 굳어져 오늘날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언니(이인숙), 오빠(이인구) 성명에 담겨있는 어질 인(仁)자를 넣고 늘 바다를 향해 기도했기에 바다해(海)를 넣어 필명을 지었다.
1970년 <소년>에 <하늘>과 다른 세 편의 동시가 추천되면서 등단하고 시인의 이름을 얻기 시작한다. 필리핀 성루이스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 1976년 첫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출간하고, 서강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한다.
이해인 시인의 고향 동수리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太初)부터 나의 영토(領土)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쳐다보는
인정(人情)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 남은 저녁노을에
저렇게 긴 강(江)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원색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 싶은 얼굴이여
-이해인 시인의 시 <민들레의 영토> 전문
이해인 시인의 대표시 <민들레의 영토>는 첫 번째 시집 ⟪민들레의 영토⟫에 담겨 있다. 1976년에 발행되었으니 어느덧 40주년이 되었다.⟪민들레의 영토시집⟫의 제목은 수녀회에 입회한 해인 1965년, 수녀원의 담 밑에 소담하게 핀 민들레를 보고 썼다고 전한다.
1979년에는 두 번째 시집 ⟪내 영혼에 불을 놓아⟫, 세번 째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1989년 <시간의 얼굴>,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등으로 이해인 시인의 문학적 성과들은 많은 독자를 확보한다. 그의 시는 특히 절망에서 희망을 얻게 하는 마력을 지니면서 평안과 평화를 전파했다.
언제쯤 당신 앞에
꽃으로 피겠습니까.
불고 싶은 대로 부시는
노을 빛 바람이여
봉우리로 맺혀 있던
갑갑한 이 아픔이
소리 없이 터지도록
그 타는 눈길과 숨결을 주십시오.
기다림에 초조한
내 비밀스런 가슴을
열어놓고 싶습니다.
나의 가느다란 꽃술의
가느다란 슬픔을
이해하는 은총의 바람이여
당신 앞에 "네"라고
대답하는 나의 목소리는
언제나 떨리는 계절입니다.
고요히 내 혼에 불을 놓아
꽃으로 피어내는
뜨거운 바람이여!
-이해인 시인의 시⟪내 영혼에 불을 놓아⟫전문
난해시와 비판과 자학이 많은 한국시단에서 이해인 수녀의 시는 일단 편안하게 읽을 수 있어서 장벽이 없었고, 읽고 나면 마음이 평안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숭고한 절대자를 향한 간절한 기도의 언어처럼 다가와 다른 종교의 사람들에게도 거부감이 덜했다.
손 시린 나목(裸木)의 가지 끝에
홀로 앉은 바람 같은
목숨의 빛깔
그대의 빈 하늘 위에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차 오르는 빛
구름에 숨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누이처럼 부드러운 달빛이 된다
잎새 하나 남지 않은
나의 뜨락엔 바람이 자고
마음엔 불이 붙는 겨울 날
빛이 있어
혼자서도
풍요로와라
맑고 높이 사는 법을
빛으로 출렁이는
겨울 반달이여
-이해인 시인의 시 <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전문
2011년 봄부터 이해인 시인은 암 투병을 해야 했다. 암과 싸우면서 오히려 하늘을 향해 마음을 열고 충만한 삶을 지향하는 산문집을 발행하기도 했다.
산문집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가 그 책이다.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을 읽다보면 감동적인 구절이 등장한다. 정이 많이 들었던 사람들의 죽음과 절망의 아픈 시간들을 감내하면서 과거를 회상하기도 했다.
일상적인 삶의 소중함과 수녀로서의 삶이 지닌 순수하고 소박한 언어들이
물결처럼 팔랑거린다.
고독을 위한 의자
홀로 있는 시간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호수가 된다.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나 속의 나를
조용히 들여다 볼 수 있으므로,
여럿속에 있을 땐
미처 되새기지 못했던
삶의 깊이와 무게를
고독속에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내가 해야할 일
안해야 할일 분별하며
내밀한 양심의 소리에
더 깊이 귀기울일 수 있으므로,
그래,
혼자 있는 시간이야말로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
여럿 속의 삶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
고독속에
나를 길들이는 시간이다.
-이해인 시인의 시 <고독을 위한 의자> 전문
<고독을 위한 의자>는 고독의 의미에 대한 이해인 시인의 지혜가 돋보이는 시다. 고독한 시간은 결코 불행을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찾게 한다. 아울러 힘겨운 삶의 깊이와 무게를 생각하면서 해야 할 일과 안 해야 할 일을 분별하게 만드는 의미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고독의 시간이 호수와 같이 고요하고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시간이 될 수 있는 이유다. 고독의 시간을 긍정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이유는 진정한 자신과 대면하여 되돌아 볼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고독을 위한 의자를 마련하고 그 곳에 앉아서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다. 긍정의 미학을 지니고 사회적 삶을 살면서 정신적으로 충만한 감사함을 느낄 수 있도록 성찰하는 고독의 의자가 누구에게나 필요함을 일깨워 주는 시다.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깎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
어둠 속에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이해인 시인의 시 <살아 있는 날은> 전문
이 시는 1979년 발간한 시집 <내 혼에 불을 놓아>에 실린 시다.
절대자에게 순종하면서 살아야 하는 종교인으로서 고백이 담겨 있다. 성결한 구도적 삶의 자세가 엄숙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필자가 이해인 시인의 고향 마을 동수리 강변에서 <이해인 시인의 삶과 문학>을 이야기 하고 있다.
죄 없이 살면서 구도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수녀이며 시인은‘연필’로 자신의 삶을 성스럽게 하기 위해 지우고 또 지운다. 정직한 글을 쓰기 위해서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쓰고,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로 표현하고 있을 정도다.
1연에서는 구도자로서의 경건한 삶의 자세를 표현한다. ‘마른 향내’라는 시어가 이를 대변한다. 2연은 자기반성을 통해 거듭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쓰는 행위를 반복해야 하는 이유다.
3연에서는 고통 속에서 정직한 삶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다. ‘연필’은 시인 자신의 소망이 담겨진 바르고 올바른 삶의 도구가 된다.
4연에서는 절대적인 순종이다.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로 대변되는 순종적인 태도는 어둠을 밝히는 진리의 말씀을 강조한다.
5연에서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침묵으로 소멸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자기희생의 헌신적인 모습이 그대로 녹아 있다. <긴 두레박을 하늘에 대며>는 19연까지 이어진 장시이다.
1
하늘은 구름을 안고 움직이고 있다. 나는 세월을 안고 움직이고 있다. 내가 살아 있는 날엔 항상 하늘이 열려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하늘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
2
그 푸른빛이 너무 좋아 창가에서 올려다본 나의 하늘은 어제는 바다가 되고 오늘은 숲이 되고 내일은 또 무엇이 될까. 몹시 갑갑하고 울고 싶을 때 문득 쳐다본 나의 하늘이 지금은 집이 되고 호수가 되고 들판이 된다. 그 들판에서 꿈을 꾸는 내 마음. 파랗게 파랗게 부서지지 않는 빛깔.
3
아 아 하늘, 하늘에다 나를 맡기고 싶다. 구름처럼 안기고 싶다. 서러울 때는 하늘에 얼굴을 묻고 아이처럼 순하게 흑흑 느껴 울고 싶다.
4
하늘에 노을이 타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온통 피로 물들이듯 타오르는 노을. 나의 아픈 그리움도 일제히 일어서서 가슴 속에 노을로 타고 있다.
5
하늘에 노을이 지고 있다. 타다가 타다가 검붉은 재로 남은 나의 그리움이 숨어서 숨어서 노을로 지고 있다.
6
‘하늘’이란 말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하늘빛 향기. 하늘의 향기에 나는 늘 취하고 싶어 ‘하늘’, ‘하늘’ 하고 수없이 뇌어 보다가 잠이 들었다. 자면서도 또 하늘을 생각했다.
7
하늘을 생각하다 잠이 들면 나는 하늘을 나는 한 마리 새, 연두색 부리로 꿈을 쪼으며 하늘을 집으로 삼은 따뜻하고 즐거운 새.
8
하늘은 환희의 바다. 날마다 구름으로 닻을 올리고 당신과 함께 내가 떠나는 무한의 바다. 하늘은 이별의 강. 울어도 젖지 않고, 흐르지 않는 늘 푸른, 말이 없는 강.
9
하늘은 속일 수 없는 당신과 나의 거울. 당신이 하늘을 볼 때 보이는 나의 얼굴. 내가 하늘을 볼 때 보이는 당신 얼굴. 하늘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어도 흔들림이 없다. 깨어지지 않는다. 자주 들여다보기가 갈수록 두려워지는 너무 크고 투명한 나의 거울.
10
지구 위에 살다가 사라져 간 이들의 숱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하늘. 오늘을 살고 있는 이들의 모든 이야기를 또한 기억하는 하늘. 하늘은 그래서 죽음과 삶을 지켜보는 역사의 증인.
-이해인 시인의 시 <긴 두레박을 하늘에 대며> 부분 인용
이시는 종교적이며 명상적인 성격의 시다.
또한 절대자를 향한 기도의 성결한 어조가 담긴 산문적인 장시다.
주제는 절대자에 대한 사랑으로 1986년 발간한 시집 <두레박>에 실려 있는 시다. 수녀로서의 자기 자신이 가고 있고 가야할 경건한 길을 예언하듯 표현했다. 종교적인 삶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하늘(절대자)에 대한 존경과 찬양이 주제다. 이를 통해서 시인 자신의 경건하고 종교적인 삶의 태도를 표현한다. ‘하늘’은 작가 자신이 절대적 신망하는 존재로 사람에 대한 모든 사랑과 그리움을 포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절대자의 사랑을 고백한다.
19개의 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분류된다. 첫 번째 부분(1∼10연)으로 하늘은 시인 자신에게 <바다>, <숲>, <집>, <호수>, <들판>, <강>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하늘은 절대적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절대적인 존재다.
두 번째 부분(11∼18연)은 <하늘>을 향한 시인 자신의 절대적인 사랑을 담고 있다.
자신이 살아 있는 이유는 오직 하늘을 사랑하기 위함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그 속에서만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존재다.
세 번째 부분(19연)은 종교적이면서 심오한 절대적 사랑의 대상을 찾은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감이 담겨있다. 시인 자신은 하늘을 향한 절대적 사랑을 실천하고 느끼면서 하늘이 보이는 창가에서 연필 한 자루로 시를 쓰는 소박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고백하고 있다.
다음은 이해인 수녀가 펴낸 저서 목록이다.
『민들레의 영토』, 가톨릭출판사, 1976, 시집.
『내 혼에 불을 놓아』, 분도출판사, 1979,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분도출판사, 1983, 시집.
『시간의 얼굴』, 분도출판사, 1989, 시집.
『엄마와 분꽃』, 분도출판사, 1992, 시집.
『사계절의 기도』, 분도출판사, 1993, 시집.
『다시 바다에서』, 박우사, 1998, 시집.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열림원, 1999, 시집.
『꽃마음 별마음』, 샘터사, 1999, 시집.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열림원, 1999, 시집.
『여행길에서』, 박우사, 2000, 시집.
『작은 위로』, 열림원, 2002, 시집.
『다시 바다에서』, 홍익씨앤씨, 2003, 시집.
『꽃은 흩어지고 그리움은 모이고』, 분도출판사, 2004, 시집.
『눈꽃 아가』, 열림원, 2005, 시집.
[수필]
『두레박』, 분도출판사, 1986, 수필집.
『꽃삽』, 샘터사, 1994, 수필집.
『사랑할 땐 별이 되고』, 샘터사, 1997, 수필집.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샘터사, 2002, 수필집.
『꽃삽』, 샘터사, 2003, 수필집.
『기쁨이 열리는 창』, 마음산책, 2004, 수필집.
『고운 새는 어디에 숨었을까』, 샘터사, 2004, 시산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