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차시 인터뷰 과제: 지금이 가장 행복한 연지씨>
백리향
리향이 기억하는 연지는 억척같은 엄마였다. 연지의 첫딸이 2세가 될 때부터 놀음(화투)에 빠진, 중등교사였던 남편 영수는 제대로 된 월급을 가져다준 적이 없었다. 29세이던 연지는 경주에서 넷째를 임신한 만삭으로 여인숙을 시작했고 그 막내를 업고 다시 여관에 이어 목욕탕을 열었다. 그러나 리향이 중학교 입학을 앞 둔 즈음, 결국 다 망하고 도망치듯 이사 온 포항에서는 족발을 삶느라 연지 손은 적갈색이 되었다. 울산 기사 식당의 천장에 쥐가 들끓던 쪽방에서, 오락실의 반 평 남짓한 유리 철창을 견디다, 다시 쟁반을 머리에 이고 배달까지 하며 꾸렸던 식당 그리고 지하의 레스토랑까지, 네 남매를 먹여 살리고 공부시키기 위해 연지는 종횡무진 발버둥 쳤었다.
연지는, 약 13년 전(65세에 정년퇴직 후 1년이 지난 시점) 정식으로 놀음을 끊고 지금은 몰라보게 달라진 남편 영수와 가끔 말다툼을 했다. 그럴 때면 영수와 시어머니가 자신을 힘들게 했던 과거 기억이 떠올라선지 ’뭐 처먹고 저런 아들 낳았노?‘ 하며 악에 받치듯 소리를 질렀다. 리향은 그런 연지의 반응이 과하다고 느꼈고 많이 변한 영수를 두둔했었다. 억울해진 연지가 딸에게 하소연이라도 할라치면, 리향은 들어주는 시늉은커녕 피하기 바빴다.
영수는 분명 놀음과 폭력으로 연지와 자식들에게 상처를 준 장본인이었다. 리향은 혼란스러웠다. 그런 자신의 태도가 의아했다. 아마도 연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늦었지만 연지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인터뷰를 위해 대구에 있는 연지에게 전화를 했다.
1947년 음력 3월 29일 강원도 옥계면 음촌에서 4녀 2남의 셋째로 태어난 연지는, 오빠는 폐렴으로 100일 만에, 언니는 6세 경 열경련 후 죽은 탓에 졸지에 장녀가 되었다. 중학교 동창회를 다녀온 연지를 막상 때리고 나면 죽을까 봐 사과를 사준 농사짓던 엄마, 맞은 연지에게 직접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도 불러주고 5원짜리 빨간 지폐도 줬던, 옥계면사무소를 다니던 아버지. 그 슬하에 쌀밥만 먹고 5일에 한 번은 생선도 실컷 먹어 ’시골 부자‘였다는 연지.
엄마가 아프면 집에서 막걸리를 한 주전자 들고 5리가 넘는 산길을 달려 철학관 할아버지를 찾아갔던 9살의 연지는 ‘엄마가 죽지는 않겠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좋아하며 돌아왔었다. 엄마가 밭에 안 나가도 되는,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이 연지는 지금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단다.
중학교 때 수학이 평균 99점에다 암기력도 좋았던 연지는 학교 가기 전에 20분 거리의 냇물을 받아 집에 있는 큰 독을 채워놔야 했고 해 질 녘 돌아오면 (밭에 있는 엄마를 대신해) 밥은 물론 소죽도 끓여야 했다. ‘그래야 엄마가 일을 덜 하니까.’ 연지가 말했다.
동생들과 엄마 생각에 중학교를 졸업 후 편물을 배워 시장에서 장사하기도 했던 연지가 19세가 되자, 강릉고등학교를 가게 된 남동생을 위해 강릉으로 이사 갔고 연지의 부모님은 시장 안에 세를 얻어 참기름 장사를 시작했다. 어느 날 연지의 아버지가 모임 후 집으로 데리고 온 손님이 참기름 가게의 집 주인이었고 그날 본 연지를 며느릿감으로 점찍었단다. 참기름 가게 옆 쌀장사 아저씨의 중매로 (당시 친구들과 설악산에 놀러 왔다가 갑자기 선을 보게 된) 서울 모 대학 4학년생이던 영수를 처음 본 날 연지의 소감은 ‘손이 제일 예쁘더라.’ 였다.
4세경 아버지가 죽고 몇 년을 친척한테 돌아가며 맡겨진 끝에 재혼한 엄마를 따라가 새아버지 눈치를 보며 자란 영수는, 어릴 때 앓은 천연두로 얼굴이 심하게 얽어있었다. 그런 영수를 만나고 집에 돌아온 연지는 ‘내가 이런 사람에게 가야 하나?’며 엉엉 울었단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싫다고 말해야지.’ 하면서도 ‘참기름 집은 가게도 잘 안 주는데. 혹시나 가게를 빼라고 하면 어쩌나.’ ,‘만약 영수랑 결혼하면 가겟세는 안 받겠지.’ 하는 생각들로 갈등했던 연지. 다시 연락 온 영수를 만나 결국엔 싫다는 말을 못하고 맞선 일주일 만에 약혼식을, 그리고 넉 달만인 1968년 10월 19일, 22세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당시에 무직이던 영수와 강릉 시댁에서 시작한 연지의 신혼생활은 고달팠다. 구두쇠에다 심술궂은 시어머니는 입덧하는 연지의 끼니를 챙겨주기는커녕 첫 딸이 태어나도 옷 한 벌 사주지 않았다. 결국 첫딸의 백일을 앞두고 영수가 일주일간 새벽 5시에 나가 막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실을 사고 그 실로 연지가 짠 옷을 첫 딸에게 입혔다. (이 대목을 말하며 연지는 목이 메이기 시작했다.)
’그때 너무 힘들어서 큰 애를 업고 강둑으로 올라갔어. 거기서 외갓집이 보이거든. 한참을 서서 얼마나 울었던지 몰라. 도망가고 싶지만 도망갈 수도 없고..‘(한동안 흐느끼는 연지)
그즈음 대구에서 4개월간의 교사 교육을 끝낸 영수는 드디어 1970년 9월 10일 입실의 모 중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그때 입실에 방 한 칸 달린 점포를 얻어 지낸 1년이 결혼 후 가장 행복했다는 연지. 그러나 그 1년이 끝날 무렵 놀음하던 영어 교사와 어울리며 영수도 놀음에 빠지기 시작했다. 셋째인 리향을 낳고도 월급 타는 날이면 들어오지 않는 영수를 기다리느라 둘째 날까지 속이 타던 연지는, 3일째가 되면 ’아비 없는 자식을 어찌 키우겠노.‘ 하며 ’제발 죽지만 말고 들어와라.‘는 심정이었단다. 그런 영수에게 잔소리라도 할라치면 적반하장으로 고함치며 살림을 모조리 밖으로 메어치기에 부끄러워서라도 연지는 잠자코 있었고, 가끔 대꾸라도 하는 날이면 맞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이웃집으로 도망쳐야 했다.
‘정말로..느그 자식들 아니었으면 난 정말 갔다..자식 아니면 난 안 살았다..’(울먹이는 연지씨)
명절 때도 레스토랑을 열면 연지 혼자, 손님 요리부터 서빙까지 하며 틈틈이 제사 음식을 만드느라 밤늦도록 놀음하며 오지 않는 남편을 원망할 틈도 없었다고 한다.
같은 여자로 숨이 막혀 ‘다시 도망가고 싶은 적이 없었냐?’는 질문에 자신이 가면 자식들이 다 거지 될 것 같아 차마 갈 수가 없었단다. 그런 연지도 50대 초반 ‘영수가 이렇게 속 썩이는데 나도 춤이나 춰볼까?’ 하며 대구의 D 나이트클럽을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엔 ‘내가 혹시나 나쁜 인간한테 물려 우리 아이들이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리향의 수능 시험 직전에도 한쪽 발을 깁스한 채, 쌀 한 되를 등에 지고 갓바위에 올랐던 연지가 3년 내내 성전암 사리암 갓바위를 번갈아서 매일 기도한 정성 덕분인지, 막내아들까지 사법 시험에 합격하자 어딜 가면 연지는 은근히 자랑삼아 말했다. ‘우리 집에 의사 가운 셋에다 판사 가운이 하나예요.’ 그럴 때마다 그런 연지를 리향은 겸연쩍게 느꼈었다.
‘정말,고마워요.엄마!’ 하며 해도 해도 모자랄 인사를 겨우 건네고 현재의 연지는 어떤지 물었다. ‘나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 그래서 지금이 가장 행복해.’하고 말하는 연지에게 연이어 영수자랑을 주문했다. ‘’내가 이거 못해요.‘하면 영수가 다 해준다.’며 지금은 영수가 연지의 가장 가까운 도반이고 그런 영수가 죽지 않고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단다.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냐는 리향의 질문에 ‘나는 지금 이대로 건강하게 살다가.. 니가 짝이나 한 명 만나 살면 걱정이 없지 뭐. 그게 제일 걱정이지..’라고 말하는 연지.
‘그럼 엄마가 지금 바라는 소망은 뭐예요?’(‘희망’을 물었는데 ‘걱정’을 답한 연지룰 위해 리향은 재빨리 ‘소망’으로 옮겨갔다.)
‘니가 좋은 짝은 만나는 게 내 바람이고..’ 연지의 한결같은 대답에 웃음이 났다. 리향도 안다. 30대 초반에 이혼 후 여전히 혼자인 40대 후반의 셋째딸이 연지에게 유난히 아픈 손가락이라는 걸.
인터뷰한 다음 날 리향에게 연지로부터 문자가 왔다. 셋째딸 나무로 정하고 연지가 길러온 ‘행운목’에 꽃이 가득 핀 사진과 함께. ‘꽃 핀 나무처럼 앞으로도 좋은 일만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딸 파이팅!‘
리향은 작정하고 속으로 동문서답을 한다. 연지를 향한 리향의 마음도 활짝 피었다고. 그래서 이제는 연지의 이야기를 맘껏 들어줄 수 있고 그만큼 연지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고.
덧붙임) 글이 너무 많이 늦었습니다..그만큼 힘들었습니다..ㅜㅜ^^: 이따 뵐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