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 제19장 風雲天下 -3 ━━━━━━━━━━━━━━━━━━━━━━━━━━━━━━━━━━━
양춘가절(陽春佳節)이라 했던가. 저녁 하늘가로 붉은 낙조가 짙어가는 석양무렵. 지난 겨울(冬) 내내 하늘을 우중충하게 덮고 있던 잿빛구름이 맑 게 걷히고 옷깃을 스치는 훈풍이 따사롭게 느껴지는 초춘(初春)의 어느 봄날이었다. 무수히 갈라져 뻗어 내린 천목산(天目山) 능선 한 줄기가 뿌리를 담그고 있는 짙푸른 호수(湖水) 남기호(南奇湖)변에 작은 성시(城 市)가 하나 있다. 낭계현(浪溪縣). 지금 선홍색으로 짙어가는 황혼(黃昏)을 등지고 한 사나이가 스물 스물 번져가는 땅거미를 밟으며 남계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가벼운 몸 동작이 대기(大氣)를 압도하고 칠흑같은 머리를 순백색 의 영웅건(英雄巾)으로 질끈 동여맨 사나이. 백색 장삼을 입은 그 사나이는 객점(客店)의 커다란 현관 밑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경춘루(慶春樓). 거의 동시에 객점의 문이 활짝 열리며 삼십대 중반의 점소이가 달 려 나왔다. "헤헤…… 손님, 어서 오십시오." 점소이는 습관처럼 헤픈 웃음을 흘리며 사나이를 위 아래로 훑어 보다가 문득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토록 잘 생긴 사내가 있었다니……) 백색 장삼의 사나이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빼어난 용모를 지닌 미장부였다. 바람에 휘날리는 임풍옥수(臨風玉樹)인가? 아니면 바위를 뚫고 힘차게 피어나는 한떨기 흑란인가? 백옥처럼 성결하게 느껴지는 희디흰 피부, 독수리 날개처럼 곧게 뻗은 검은 눈썹 아래 보는 사람의 영혼(靈魂)을 압도하는 듯 깊고 그윽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 우뚝 솟은 콧날에는 드높은 영웅(英雄)의 기상(氣像)이 서려 있고 주사빛 붉고 윤곽이 뚜렷한 입술은 철벽이 맞물린 듯 굳게 닫혀 있어 사나이의 강인한 성격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앙금처럼 차분히 가라앉은 담담한 가운데서도 도도하게 피 어오르는 무상(無常)의 위엄. 백포 사나이의 전신을 휘감아 도는 고고하면서도 단아한 기품(氣 品)이 그를 잔인하다거나, 냉막하게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이토록 하늘(天)과 땅(地)마저 복배케 할 신비스러운 기도(氣度) 를 풍기는 이 인물은 누구인가? 점소이가 넋을 놓고 있을 때 물처럼 담담한 표정의 백포 사나이 입에서 바윗덩이가 구르듯 묵직한 음성이 흘렀다. "조용한 자리로 안내해 주게." 점소이의 안내를 받으며 사나이는 객점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그때였다. "오……" "저…… 저기를 봐!" 주루 안 여기 저기서 감탄의 침음성이 흘렀다. 저녁 무렵인지라 많은 사람들로 붐비며 요란스러웠던 경춘루 내부 는 삽시간에 쥐죽은 듯 고요한 정적 속에 파묻혔다. 음식을 집으러 가던 젓가락이 허공에 뜬 자세 그대로, 수저로 떠 먹던 내장탕 국물이 입가에 흐르거나 말거나 턱 뼈가 빠진 듯모든 사람들이 입을 떡 벌린 채 주시하는 곳에 한 사나이가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쏠리는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 없이 백포 사나이는 점 소이의 안내를 받으며 느릿하게 삼층으로 올라갔다. 삼 층. 다소 호화롭게 꾸며진 삼 층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기는 마찬 가지였다. 식사를 마친 백포 사나이는 창가 탁자에 홀로 앉아 향기(香氣)가 천하제일로 손꼽히는 경춘루 특유의 백화주(百花酒) 한 병을 홀로 자작하고 있었다. "그분은 유독 술(酒)을 좋아 했었지……" 독백처럼 나직한 음성과 함께 백포 사나이는 지나간 과거를 회상 하고 있는 듯 무심한 시선을 창 밖에 던지고 있었다. 은하수가 내려 앉은 듯 무수한 불빛들이 깜박이는 남지호변의 야 경은 춘색(春色)에 물들어 더욱 아름다왔다. 쪼르륵…… 사나이가 다시 한 잔을 채웠을 때였다. 삼 층 계단으로 올라서는 한 인영이 있었다. 여인(女人), 그녀의 모습이 나타나는 순간 완벽하다 못해 눈이 시 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로 인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빛을 잃었다. 대략 이십 세 전후일까? 우윳빛 희고 부드러운 살결, 붓으로 그린 듯 고운 아미(蛾眉)와 서글서글하게 빛나는 한쌍의 봉목(鳳目), 오똑한 코와 발그레한 두 뺨은 정녕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오오…… 저 여인은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는군!" "어쩌면…… 인형(人形)…… 같다…… 인형……" 사내라면 너나할 것 없이 너무나 아름다운 그녀의 용모를 보는 순 간 심장이 균열되는 듯 짜릿짜릿한 전율을 느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녹의여인이 옆머리에 꽂고 있는 빨간 작약꽃이 그녀의 청순한 아 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헌데, 무엇 때문일까? 녹의여인은 창가에 앉은 백포 사나이를 발견하는 순간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그녀의 길다란 속눈썹이 경련을 일으켰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그녀의 서글서글한 눈망울에 가득히 고 였다. "……" 일순 그녀의 붉은 장미잎을 문 듯한 입술이 미미하게 달싹였다. 입 벌려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은 것 같았으나 걷잡을 수 없이 솟 구치는 격정으로 인해 그것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했다. 허나, 백포 사나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창 밖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저…… 저쪽에 빈자리가 있습니다." 점소이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녹의여인은 점소이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백포 사나이를 향해 걸 음을 옮기고 있었다. "저어…… 환소협 아니세요?" 여인의 음성은 긴장으로 인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 문득 백포 사나이는 술잔을 채우려다 말고 곁에 다가선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녹의여인과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 백포 사나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반갑게 웃었다. "북경일미 여소저…… 실로 오랜만에 다시 만났구려." "정말…… 당신께선 백혈군마성의 대연회에서 뵈었던…… 환소협 이 틀림없나요?" 본인이 수긍했음에도 불구하고 녹의미녀가 재차 물어보는 것은 전 율처럼 치달리는 반가움 때문이었다. "그렇소. 본인이 바로 여소저와 삼 년 전에 만났던 환우령이오." -환우령(環宇翎)! 그렇다. 백색 장삼의 사나이는 환상비궁에서 무공을 대성한 후 삼 년 만에 다시 강호로 나온 환우령이었다. "……" 북경일미 여백선의 서글서글한 눈망울에는 금시라도 눈물이 주르 륵 흘러내릴 듯이 뿌옇게 물안개가 서렸다. 그녀는 아름다운 옥용 (玉容)을 귓뿌리까지 붉히며 고개를 떨군 채 괜스레 옷깃만 만지 작거리고 있었다. 환우령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여소저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 구려. 자…… 어서 자리에 앉읍시다." "예……" 만개한 꽃망울처럼 다소곳이 앉는 그녀는 북경일미였다. -북경일미(北京一美) 여백선(呂白善)! 신주팔군 중에 속해 있는 세 명의 미인 가운데 한 여인. 삼 년 전 백혈군마성에서 환우령에게 별호를 지어주자고 할 때 용 혈신군(龍血信君)이란 별호를 지어주었던 바로 그녀였다. 지난 삼 년 간 북경일미 여백선은 더욱 아름답고 완숙한 여인으로 변모해 있었으나 눈가에는 왠지모를 우수(憂愁)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여소저, 중병을 앓고난 사람처럼 얼굴이 많이 여위었구려. 그동 안 무슨 일이 있었소?" 환우령의 근심어린 음성이 흐르는 순간 여백선은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활짝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단지 지난 삼 년 동안 별다른 이유도 없이 중원의 각처를 방황하다보니 다소 지치고 피곤할 뿐이예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으나 그녀의 웃음자락 끝에 묻어나는 슬픈 표정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허나, 환우령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뭔가 석연치 않은 일이 있는 것은 분명했으나 그녀 스스로 말해줄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 이 여백선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허허…… 내가 삼 년 만에 강호로 돌아와서 처음 만난 사람이 천 하에 손꼽히는 미녀(美女)인 것을 보니 앞길이 순탄할 것 같은 예 감이 드는구려." 환우령의 격의 없는 웃음 탓일까…… 여백선의 우울했던 표정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환소협께서는 그 동안 어디에 계셨기에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 죠?" 바로 그때였다. 우당탕! 주루 전체가 무너져 내릴 듯 요란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몇 명의 우락부락하게 생긴 장한(長漢)들이 계단을 밟으며 삼층으로 올라 섰다. 오 인의 흑의인(黑衣人)들이 들어서자 마자 주루 안은 갑자 기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환우령은 여백선에게 나직이 물었다. "여소저, 저 흑의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소?" 북경일미 여백선은 박 속같은 치아를 가지런히 드러내며 잔잔히 웃었다. "모든 사람들의 눈가에 은은히 공포의 빛이 드리워지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백혈군마성의 휘하 백팔지부 연합 중에 한 곳인 남 기지부(南奇支部)의 인물들인 것 같군요." "……" 환우령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명의 흑의인은 거만한 눈길로 주위를 쓸어보며 중앙 탁자에 앉았다. 그리고 돌연 그들 중 쥐눈에 세모꼴 얼굴의 흑의인이 발 을 구르며 고함쳤다. "주인장, 본 어르신네들이 왔는데 어디 처박혀서 코빼기도 안보이 는 거야!" 쾅…… 쾅…… 탁자 위의 식기들이 들썩거릴 정도로 소란스러웠으나 식사를 하고 있던 백여 명의 인물들 중에 어느 누구도 감히 입 벌려 항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순 육십 세 가량의 뚱뚱한 노인이 허겁지겁 올라왔다. 노인은 코가 탁자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굽신거렸다. "나리들, 어서 오십시오. 소인이 연락을 늦게 받는 바람에 그만… …"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의 음성은 가늘게 떨려나오고 있었다. 노인 은 이미 흑의인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에 익숙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굼벵이 같은 늙은이, 어서 최고급으로 한 상 차려와야 할 것 아니야?" 역겨운 호통소리와 함께 흑의인 중 하나가 노인의 펑퍼짐한 둔부 를 발로 걷어찼다. "에구구……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요, 나리……" 객점의 주인인 듯한 그 노인은 이마에 맺힌 굵은 땀방울을 닦을 사이도 없이 허둥지둥 아래로 내려갔다. 흑의인들은 문득 환우령과 함께 앉아 있는 북경일미 여백선의 눈 부신 자태를 발견하고는 저마다 음탕한 웃음을 흘렸다. "고것 참! 귀엽구나……" "흐흐…… 그림 좋다." 돌연 세모꼴 얼굴의 흑의인이 메마른 낙엽처럼 칙칙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리게들. 내가 저쪽에 자리를 마련하겠네." "좋지." "자신 있나?" 등에 비스듬히 장검(長劍)을 메고 있는 흑의인들은 저마다 음탕한 생각을 떠올리며 한 마디씩 내뱉았다. "클클…… 일만 잘 성사시키면 첫 번째 뱃사공은 자네가 될걸세." 나직한 귀뜀에 더욱 기고만장했는지 세모꼴 얼굴의 흑의인은 환우 령이 앉아 있는 탁자 곁으로 다가와 우뚝 섰다. "이봐, 책벌레!" "……" "자리 좀 비켜주겠나?" 흑의인은 환우령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어린아이 타이르듯 말했 다. 이때 주루 안에 있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며 썰물처럼 빠져 나갔고 삼층은 순식간에 텅 비어 썰렁했다. 환우령이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묵묵히 술잔을 채우자 흑의 인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책벌레! 내 말이 안들려?" 쾅! 흑의인은 이마에 퍼런 힘줄을 돋구며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간단하게 무력 시위로 엄포를 놔서 쫓아 버리자는 수작이다. 그러나 환우령은 웬 집 개가 짖느냐는 듯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 다. 환우령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주먹은 다시 환우령의 턱을 향 해 날아들었다. "죽어버려라!" 헌데, 바로 그때였다.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는 환우령과 시선이 마주치자 흑의인의 주먹 이 왠지 허공에서 거짓말처럼 멈추고 말았다. (이놈이……?)
■ 黑風令 제2권 제19장 風雲天下 -4 ━━━━━━━━━━━━━━━━━━━━━━━━━━━━━━━━━━━
환우령의 눈빛은 빛나지도 사악하지도 않은데 이토록 가슴 서늘한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깊고 그윽한 눈동자는 그저 물처럼 고요할 뿐이었다. 허나, 흑의인은 이 순간 거대한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을 짓눌러 오는 착각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오금이 저려서 더 이상 환우령을 마주보고 서 있을 수가 없 었다. "친구, 내게 볼 일이 있소?" 환우령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흑의인은 이 순간 자신이 동료들의 대표로 나선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아, 아닙니다…… 즐겁게 술 드시라는 말씀만 드리고 싶었던 것 입니다…… 예! 정말입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동료들이 들을 수 없게 나직이 웅얼거 린 후 그는 돌아섰다. 그리고는 자신의 의자로 돌아가 힘없이 주 저 앉으며 옆에 앉은 동료의 옆구리를 찔렀다. "난…… 못하겠다. 자네가 가서 해봐" "왜?" 세모꼴 얼굴의 흑의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 흑골수(黑骨手) 두광(斗光)의 손에 저런 책벌레 서생(書生) 의 피를 묻힌다는 것이 수치스럽다." 환우령 앞에서의 태도와는 달리 세모꼴 얼굴의 장한은 엉뚱한 변 명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켰다. 문득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덥석부리 중년인이 일어섰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개를 잡는 방법이 있지." 혼탁한 음성을 흘리며 중년인은 탁자의 다리를 잡았다. 우지끈! 그는 탁자 다리 하나를 우악스럽게 분질러서 움켜쥐고는 환우령을 향해 다가갔다. 그 광경에 세모꼴 흑의인은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 친구 오래 못살 것 같아……" "그건 또 무슨 소리지?" "개(犬)와 호랑이를 구별 못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나머지 삼 인은 그 뜻을 몰라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일순 덥석부리 흑의인은 다짜고짜 몽둥이로 환우령의 어깻죽지를 내리쳤다. "이놈아, 좋게 말할 때 꽁지가 빠지게 도망갈 것이지 버티면 살 줄 알았느냐!" 헌데, 바로 그 순간이다. 철썩! 느닷없이 흑의인의 좌측 뺨에 불똥이 튀며 몸이 저절로 허공에 붕 뜨는 것이 아닌가? 덥석부리 흑의인의 신형은 삼 장이나 뒤로 날아서 동료들이 앉아 있는 탁자 위로 콰다당 널브러졌다. 그는 몽롱한 의식 속에 입가 에 흐르는 선혈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왜 여기에 누워있지?" "글쎄?" 흑의인들은 도무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덥석부리 흑의인의 뺨은 붉고 선명한 손바닥 자국과 함께 퉁퉁 부 어 오르고 있었다. 돌연 그들은 일제히 장검을 뽑아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창! 창! "죽일 년 놈들!" 바로 그때, 북경일미 여백선을 향해 차가운 음성이 흘렀다. "바로 네 년이 본인의 뺨을 때렸단 말이냐?" 덥석부리 흑의인은 여인에게 뺨을 맞았다는 사실에 분기탱천하여 콧구멍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여백선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이어졌다. "무림에서는 상대의 무공 수준을 정확히 판단한 후 검(劍)을 뽑는 것이 오래 사는 비결이지." "이런 우라질……" 말을 하다 말고 무엇을 보았는지 덥석부리 흑의인의 안면근육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빠…… 빨간 작약꽃……" 떠듬거리는 시선이 일제히 여백선의 옆머리에 꽂힌 붉은 꽃을 발 견하는 순간 한꺼번에 안색이 밀랍처럼 하얗게 질렸다. "북경일미…… 여백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흑의인들은 거의 동시에 비실비실 뒷걸음 질을 치기 시작했다. 신주팔군 중에 한 명인 북경일미 여백선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 바 로 머리에 꽂은 붉은 작약이 아니던가. 그렇다. 그녀를 상대로 검을 뽑는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였다. "썩 물러가지 못할까." 그녀의 싸늘한 음성이 흐르는 순간 기겁을 한 흑의인들은 구르듯 이 계단을 달려내려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환우령이 그녀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과연, 신주팔군의 위명은 명불허전이구려." 그녀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지난 삼 년 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신주팔군이 한꺼번에 환대협을 공격한다 해도 패배하는 것은 신주 팔군 쪽이 될거예요. 제 말이 틀렸나요?" "……" 빙긋이 웃을 뿐 환우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탁자 곁 창 밖으로 검은 그림 자 하나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휘익- 그 움직임은 너무나도 빠르고 신비하여 북경일미 여백선조차 그 형체를 분간할 수 없었다. 여백선이 뭔가 말하려고 할 때 환우령 의 입술이 무겁게 떨어졌다. "십대봉공은 왔으면 들어 오시오." "명(命)을 받습니다." 지극히 공손한 대답과 함께 옷자락 스치는 소리조차 없이 아홉 개 의 그림자가 환우령의 등 뒤로 유령처럼 나타났다. 동안처럼 불그 레한 혈색(血色), 한결같이 나이를 추측할 수 없는 신태비범(身態 非凡)한 백발노인들이었다. 여백선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노인들이 누구인가를 알 수 없었다. (이상하다. 중원무림에 아무리 기인이사(奇人異士)가 많다지만, 반노환동의 경지에 이른 기인들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는 데…… 그것도 아홉 분씩이나……) 그러다가 문득 환우령의 입에서 단아한 음성이 흘렀다. "탈혼봉공(脫魂奉公)이 쓸 데 없는 일을 하고 있군." 여백선이 그 말 뜻을 몰라 의아해 하고 있을 때다. 멀리 낭계현 북쪽 십여 리 밖에서 들려오는 다섯 마디의 희미한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악-!" "커흐흑!" 여백선의 머리에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다섯 명! 아까 객점에서 소란을 피우던 백혈군마성의 흑의인들이 란 말인가?) 헌데, 여백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스스슥…… 어느새 붉은 장삼을 걸친 노인 한 사람이 나타나 환우령의 뒤에 시립한 노인들과 나란히 섰다. "탈혼봉공, 공연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구려." 환우령의 나직한 질책이 흐르는 순간 방금 나타난 탈혼봉공이 깊 숙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주군께 무례한 자(者)는 죽습니다. 그것이 설사 하늘(天)이라 할 지라도……" 음성은 나직했으나 여백선에게 던져주는 충격은 컸다. (그렇다면…… 저 노인이 다섯 명의 흑의인을 제거하고 십여 리 밖에서 울린 비명의 여운도 끝나기 전에 이곳에 당도한 것이란 말 인가?) 여백선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닌 바 무공(武功)이 아무리 고절하기로서니 십여 리의 거리를 숨 한번 들이마실 짧은 시간 내에 단축하여 되돌아왔다는 말이 되 니 어찌 믿을 수 있으랴? 최소한 그녀가 여태까지 알고 있는 인간의 능력 한계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우령과 탈혼봉공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환대협의 무공 성취는 과연 어느 정도란 말인가!) 뭔가 찾아 내려는 듯 여백선은 환우령의 전신을 세밀히 관찰했으 나, 그의 무공 성취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는 신주팔군에 속하 는 북경일미 여백선의 안목으로도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없었다. 마치 손바닥 만한 쪽박으로 바닷물의 양(量)을 측정하려는 듯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한순간 환우령의 음성이 나직이 흘렀다. "그 동안 수소문한 일은 어찌 됐소?" 수석가신(首席家臣)인 장백봉공이 공손히 입을 열었다. "금강신묘정이 없어진 이후 지난 삼 년 간 혼란에 혼란을 거듭해 오던 무림의 정세에는 특이할 만한 사건은 없었습니다." "……" "백혈군마성이나 정도연합인 대정천부, 그리고 변황무림 등 천하 를 삼분하고 있는 세력들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폭풍전야의 고요함 같은 팽팽한 긴장이 대륙을 침묵 시키고 있습니다." "폭풍전야의 고요라……" "그렇습니다. 주군…… 현재로서는 그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기이한 암류(暗流)가 중원의 하늘(天)을 뒤덮어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환우령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금철무련에 관한 것은?" "속하들이 지난 열흘 동안 중원 전역에 걸쳐 면밀하게 수소문해 보았으나 금철무련의 존재여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 었습니다." 문득 환우령의 눈빛이 깊숙이 침잠되고 있었다. (어쩌면…… 백혈군마성이 바로 금철무련의 변형된 모습일지도 모 른다!) 그러나 현 단계로서는 그저 막연한 추측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우령이 백혈군마성과 금철무련을 연관시켜보 는 이유는 백 년이라는 시공(時空)을 사이에 두고 양측 모두가 천 하제패의 야욕을 품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일순 환우령의 음성이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천풍자(天風子), 비검신군(飛劍神君)…… 두 고인(高人)의 행방 을 찾아 냈소?" "송구스럽게도 아직은……" 진천봉공은 더욱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본인에게 사죄할 필요는 없소. 이미 무림에서 종적을 감춘 지 백 년이 넘은 기인(奇人)들을 찾아낸다는 것은…… 바닷물에 빠진 모 래알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테니까." "허나, 시조이신 무도천제께서 무림에 출도하는 즉시 천풍자와 비 검신군 두 분이나 혹은 그들의 후예(後裔)라도 찾아서 금철무련에 대한 것을 상의하라는 유시를 남길 정도라면 뭔가 깊은 뜻이 있을 것이오." 순간, 십대봉공은 일제히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반드시 찾아 내겠습니다, 주군." 이때였다. 곁에서 듣고만 있던 여백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천풍자와 비검신군이라면…… 백 년 전, 금철무련의 대겁난(大劫 亂)이 있었을 당시 고금제일의 무신인 무도천제를 도와 혁혁한 공 (功)을 세웠던…… 두 명의 젊은 영웅(英雄)들의 외호가 아닌지 요?" "그렇소. 헌데, 소저는 그 두 분을 알고 있소?" "아니예요. 그저 어렸을 때부터 사부님의 입을 통해 천풍자와 비 검신군의 신화적인 무공담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뿐이예요." "……?" "당시 그 두 분은 이십 세도 안되는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 도천제의 좌우 측근이 되어 금철무련의 겁난을 종식시키는데 지대 한 공헌을 했다더군요." 일순 환우령은 눈빛을 현요롭게 빛냈다. "천풍자와 비검신군, 그 두 분에 대해서 아는대로 말씀해 주시겠 소?" "소녀도 더 이상은 아는 것이 없어요. 겁난이 끝난 이후 무도천제 께서 은거에 들어가자 그 두 분도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죠. 헌데, 두 분이 무림정의를 위해 젊음을 불태울 당시 자신들의 본 모습을 감추기 위해 이상한 모습으로 변장했을 뿐만 아니라……" "변장?" "세속적인 명예나 권세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 들의 이름조차 끝내 밝히지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무림인들이 알 고 있는 것은 천풍자와 비검신군이라는 외호 뿐이죠." "그랬었군." 환우령은 독백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여백선은 수줍게 말을 이었다. "사부님의 설명에 의하면 천풍자와 비검신군, 두 분은 무림에 모 습을 나타내기 이전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해요." "말씀 고맙소, 여소저." 환우령의 눈길을 의식했음인가. 여백서는 양볼에 홍조를 띄우며 살포시 고개를 떨구었다. 환우령은 십대봉공을 돌아보며 말했다. "본인은 내일 아침 백혈군마성 휘하 천마구중련 중에 하나인 생사 무벌(生死武閥)의 총단을 방문할 계획이오." "……" "내일 아침까지 생사무벌의 정확한 위치를 수소문하여 본인에게 알려주기 바라오." "명(命)을 받습니다." 대답과 함께 십대봉공들의 신형은 나타날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 다. 스스슥…… 나타날 때도 그러더니만 사라질 때도 가히 연기였다. 여백선은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생사무벌에는 무슨 이유 때문에 방문하시려는 거죠?" 일순, 환우령의 표정이 서리 내린 화강암(花崗岩)처럼 냉랭하게 굳어졌다. "나는 그들에게 받아내야할 혈채(血債)가 있소." "무슨……" "생사무벌, 그들은 힘없고 나약한 토민가의 사람들을 짓밟은 대가 가 얼마나 큰지를 곧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오." 아픈 기억들이 떠오르는 듯 환우령의 두 눈이 서서히 핏빛으로 충 혈되고 있었다. 그는 삼 년 전 수란누이의 죽음 앞에서 굳게 맹세했었다. 잡초의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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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어 봅니다
고은 하루 보내세요*~*
소설 감사 드립니다
즐거운 시간으로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