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창문 너머로 지붕 밑에 길게 늘어선 고드름들을 바라보며 이 겨울에 어디선가 떨고 계실 엄마 생각을 하였다. 벌써 두 번의 계절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지내시는지 걱정이 앞선다. 그리 두껍지도 않는 코트를 걸치고 전날 밤에 들고 들어왔던 쇼핑백를 다시 들고 지하 단칸방, 현관문이라고 부르기도 무색한 작은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 집은 산비탈을 깎아 만든, 보통 달동네라고 불리는 곳 중에서도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다. 저 아래 큰길에서 어른 걸음으로 십 분 정도 올라오다 보면 내가 사는 동네가 시작된다. 거기서도 오 분 이상 좁고 가파른, 곳곳에서 지린내가 나는 골목을 오르다 보면 작고 낡은 단층집이 보인다. 옹색한 대문을 열고 손바닥만한 앞마당을 가로질러 정면으로 보이는 방 두 칸 짜리 집은 마음씨 좋은 주인 할머니 내외가 초등학교 3학년인 손자를 키우며 사는 주인집이고, 그 집을 빙 돌아 지하실로 내려가는-예전엔 연탄을 쌓아두었다가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 세를 놓으셨다는-시멘트 계단이 보인다. 그리고 내가 열고 나온 작은 철문을 열면 바로 부엌과 종이를 바른 미닫이문이 궁색해 보이는, 두 모녀의 보금자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둥지를, 지난 여름 어미가 떠나고 혼기를 넘긴 딸만 남았다.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이 새라면 시기를 맞춰 떠나는 것이 딸일 테지만, 이상하게도 어미가 먼저 떠나고 말았다.
뿌연 연탄재가 섞인 매캐한 바람이 눈을 따갑게 한다. 계단을 지나 앞마당을 가로질러 가는데 주인집 할머니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이제 나가는 겨?"
손에는 검은 비닐 봉지가 들려 있었다. 아마도 종을 딸랑거리며 파는 손두부를 사오신 모양이다.
"네. 점심은 드셨어요?"
"응, 신 김치랑 싸먹으려고 두부 사오는 길이여. 어머니 소식은 있어?"
"아니요, 이제 또 나가봐야지요."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할머니의 혀를 끌끌 차며 처자가 엄마 찾아다니느라 고생한다고 안타까워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지만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어서 그저 무덤덤했다. 엄마가 가출한 지 다섯 달이 지났다. 지난 7월 13일, 아버지의 제사가 있던 날 어머니는 장을 본다고 하시고는 그대로 사라지셨다. 저녁이 되어도 안 돌아 오시는 엄마가 걱정이 되어 온 동네를 뒤지고 다녔지만 아무 곳에도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집에 와 계신 건 아닐까 하여 밤새워 기다렸지만 멀리서 동이 터 올 때도 엄마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안되겠다 싶어서 근처 파출소로 실종 신고를 하러 갔다.
"없어지신 게 언제죠?"
"어제 점심 무렵… 어제가 저희 아버지 제사였거든요. 장 봐오신다고 했는데 안 돌아 오셨어요."
"다른 가족 없이 두 분이 사시나요?"
"네. 친척도 없는데… 어딜 가신건지……."
"일단 기다려 보세요. 여기 접수해 놓으시고, 저희도 찾아볼 테니까요. 나이가 있으신 분이라 누가 잡아가지는 않았을 거고, 자의로 집을 나가셨다고 밖에는……"
"큰 문제도 없었는걸요. 엄마랑 싸운 적 없어요.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나가실 만큼 정신이 없으신 분도 아니고요. 꼭 좀 찾아봐 주세요."
푸른 제복을 입은 김순경은 그녀의 애타는 얼굴을 심드렁하니 쳐다보며 가서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한다. 자신들 엄마가 실종되었어도 저런 얼굴을 할까 하는 생각에 욕이 목구멍까지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허리를 굽혀 '잘 좀 부탁합니다'를 연거푸 하며 파출소 문을 나섰다. 그런 후 계절이 두 번 바뀌었고, 얇은 반팔 티셔츠에 앞이 뚫린 슬리퍼를 신고 나가신 엄마는 아무런 소식도 없다. 나는 오늘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파출소 문을 열어 보았지만 역시나,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김순경을 보니 아무 소식도 없나 보다.
"이제…어쩌면 좋죠?"
"각 병원에도 그런 사람은 없다고 하고, 사망자 명단에도 없다고 하니…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별 수가 없네요. 이젠 뿌린 전단지를 보고 연락이 오던지, 아님, 양로원이나 요양시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던지……."
매일 전철역을 오가며 전단지를 나눠주고, 지난주에는 충주에 있는 양로원까지 다녀왔다. 어디서 본 적이 있다는 제보자의 말을 믿고 찾아간 그곳에서도 엄마가 없었는데 이젠 어딜 가서 엄마를 찾을까 싶어서 털썩 주저앉았다.
"보통실종의 경우 일정 기간 생사가 분명하지 않고 그 생사 불명이 일정 기간 계속 되면 5년 후 실종선고나 사망선고를 내릴 수 있어요. 아직 그렇게 시간이 흐른 게 아니니까 더 찾아봐요."
"아니에요. 우리 엄마는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고요. 얼마나 건강하셨는데……"
충주에 갔을 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을 때의 기분이 다시 느껴졌다. 이젠 어딜 가서 찾지?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열고 그 안에 있던 전단지를 한뭉치 꺼냈다.
"매일…전철역이고 길거리고 찾아다녀요. 충주로, 대전으로, 광주로, 전화가 올 때마다 달려가봐도 찾을 수가 없어요. 이제 겨울인데… 여름옷 입고 나간 사람을 왜 아직까지 못 찾고 있는 건지… 김순경님, 우리 엄마 찾아봤어요? 정말 잘 찾아본 거 맞냐구요!"
주저앉아 우는 날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김순경은 계속되는 내 넋두리를 들었는지 안들었는지 그저 시끄러워 하는 눈치이다. 매일 파출소에 한 두 번씩 들리는 게 일과여서 그도 내가 질릴 때도 되었겠지만, 그냥 저러고 모르는 척 하는 모습이 더 미워서 더욱 목놓아 울었다.
한참을 앉아 울다가 눈물이 얼룩진 얼굴을 닦지도 않고 다시 전철역으로 향했다. 정말 이 수 밖에는 없다. 전화가 오면 달려가고, 그 곳에 없으면 다시 돌아와 전단지를 나눠주는 일 밖에는. 돈이라도 많으면 사람을 사서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해 보겠지만 달동네, 그것도 지하 단칸방에 사는 처지에 함께 전단지 나눠줄 부탁을 할 형편도 못되었다.
그렇게 하루가 또 갔다. 이젠 그녀가 나눠주는 전단지를 모르는 척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 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다. 처음에는 그 무관심이 화가 나서 끝까지 쫓아가 손에 쥐어주기도 하고, 그 일로 싸우는 일까지 일어났다. 아무리 바쁜 용무가 있다지만 우리 엄마가 사라졌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하는 원망도 많이 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 아무도 그렇게 생각해 주질 않는다. 그건 엄마를 찾아주겠다고 했던 김순경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다섯 달 밖에 안 지났는데 나는 이미 지쳤다.
어느 때 보다도 무거운 발을 겨우 옮겨 산 꼭대기 어두운 땅 속 둥지를 찾아들었다. 아직 엄마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나왔다. 엄마와 함께 찍어 걸어둔 사진을 들여다보며 '엄마, 나 다녀왔어' 하고 들어오는데 액자가 조금 비뚤어져 있다. 그 동안 밖으로 돌아다니느라 집안이 어떻게 되는지 돌아볼 여유가 없어서 매일 쳐다보는 액자가 비뚤어 졌는지도 모르고 지냈나 보다.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액자를 똑바로 걸려는데 먼지가 뽀얗게 앉은 게 보인다. 청소는 항상 엄마가 했지. 내가 서점에서 일하는 동안 이 작은 방을 엄마 혼자 지켰지. 눈물이 앞을 가려 어릿해진 시야에 검은 것이 툭 떨어지는 게 보였다. 얼른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보니 손바닥만한 수첩이 떨어져 있었다. 1983이라고 음각으로 새겨진 검은 가죽으로 된 얇은 수첩엔 뿌연 얼룩이 져있었다.
나는 액자를 내려놓고 방바닥에 앉았다. 그 수첩을 주워 냄새를 맡아보니 오래된 종이 냄새가 기침이 나오게 하였다. 엄마는 이걸 왜 여기다 두었지? 1983년이면 내가 열 살 때의 수첩이다. 펴보니 엄마의 필체가 확실하다. 내려쓰는 세로획이 춤추듯이 왼쪽으로 삐친 글씨체. 여기저기 물에 번진 자국도 있고 몇 개의 전화번호도 눈에 띄었다. 얼핏 봐서는 엄마의 예전 일기 같았다.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일은 얼마나 스릴 있는 일이던가. 나는 엄마가 실종되었다는 사실도 잠시 잊은 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수첩을 넘겼다.
1983년 6월 29일
지난 화요일에 잡혀갔던 경아 아버지가 새벽녘에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다. 그 날 입던 체크무늬 셔츠와 회색 바지는 어딜 가고 이 더운 날 긴 남방에 검은 바지를 입고 왔다. 입던 옷은 어딜 갔냐고 묻고 싶었지만 옷을 벗겨본 뒤로 물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맞았던지 양 어깨와 손목, 발목의 살이 짓이겨 피가 딱지져 있었고 여기 저기 피멍이 들어 있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놈 때문에 이렇게 되다니……. 경아 아버진 얼마나 아픈지 말도 제대로 하질 못했다. 그 몸으로 집까지 걸어왔는지 그게 더 묻고 싶었다.
나도 기억이 난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친척집에 가셨다던 아버지가 집에 와계셨다. 나는 반가워서 아버지께 평소처럼 뽀뽀를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엄마는 아버지 근처에는 가지 말라며 안방 근처에도 못 가게 하였다. 많이 편찮으셔서 내가 신경쓰이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이다. 나는 매일 아버지 얼굴을 궁금해 하다가 일주일이 지나서 얼굴에 흰 천을 덮은 모습만 볼 수 있었다. 그때는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돌아가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지금까지도 말이다.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맞았다는 말은 지금 처음 알았다. 게다가 잡혀갔다니… 이게 우리 아버지 얘기가 맞는 건가 싶었다.
1983년 7월 10일
탈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더니 집주인이 와있었다. 돈을 줄테니 집을 비워달라는 거였다. 이 집에 전세를 든지 오래되어 그 돈으론 전세를 알아볼 수 없다고 하니까 그건 자기가 알 바가 아니라고 한다. 시집와서 처음으로 남편과 살았던 이 집에 정이 들대로 들었고, 얼마간의 돈이 더 모이면 살 생각이었는데 나가라고 한다. 그것도 이해가 되는게, 사람들이 빨갱이라고 말들이 많은 집 사람들을 계속 두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쫓겨나듯 집을 비워줘야 한다는게 억울하고 눈물이 나온다.
1983년 7월 23일
오늘 경아가 울고 들어왔다. 애들이 너희 아버지 간첩질 하다가 죽은 거라고 놀렸단다. 그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뭐라고 해야하나? 이 어린것에게 그런 얘기까지 해주고 싶지는 않다. 이젠 정든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온 곳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는 이사를 했다. 어머니와 둘이 살면서 가정 형편은 그야말로 '형편없어'졌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 친구들은 좋아하는 가수들을 보러 간다며 방송국 앞에서 진을 치고 라디오 프로그램에 팬레터를 보내기 바빴지만 나는 엄마를 도와 인형에 단추눈을 붙이고 부채살에 종이 붙이면서 하루 몇 백 원씩 벌기에 바빴다. 엄마가 군부대 근처 식당에서 일을 했지만 세간을 꾸리기에는 벅찼던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엄마는 남들 다하는 과외는 못하더라도 학원만은 보내주시려고 성북동의 한 졸부집에 입주가정부로 들어가셨다. 그 집 지하실 골방에 살면서 겨울에는 외풍에 떨었고 여름 장마철에는 벽에 거무튀튀한 지도를 그리는 곰팡이 냄새와 전쟁을 치뤄야 했다. 그 가난은 서른이 된 지금도 여전하지만 그땐 유난히 그게 서러웠다.
나는 수첩을 접어들고선 생각했다. 이런 오래된 물건을, 벌써 이십 년도 지난 것을 왜 가지고 계셨을까. 그리고 그 당시 내가 아버지가 간첩질을 했다고 놀리는 아이들 때문에 울면서 들어왔다는데 전혀 기억이 없다. 게다가 아버지는 손목과 발목이 짓이겨질 정도의 상처를 입을만한 일을 하셨던 분이 내 기억으론 전혀 아니다. 집배원이시던 아버지는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다. 고된 일이지만 자부심을 가지시던 분이 누구에게 맞아서 죽음에 이를 만큼의 죄를 지을 리가 없다. 다시 수첩을 뒤적여 보다가 전화번호를 몇 개 발견하였다.
'이경운 438-8929'
최초의 번호는 이 번호 였는데 두 줄로 그어져 있고 여러 개가 그 밑에 적혀있는 걸로 보아 여러 번 번호가 바뀌었나 보다. 그리고 내가 아는 엄마 친구분들 전화번호, 그리고 잊혀지지 않는 성북동 주인집 전화번호, 그리고 5년 전에 이사 들어온 지금 집의 전화번호……. 그러고 보니 이 수첩은 1983년 한 해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최근까지도 엄마가 펼쳐보셨던 모양이다. 여기 적힌 번호들로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밤이 너무 늦어서 다음날 해보기로 하고 수첩을 머리맡에 두었다. 그리고는 이불도 깔지 않은 채, 연탄불이 꺼진 방에 오그리고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다.
한기를 느껴 깨어보니 벌써 아침이다. 지난밤에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기분 나쁜 꿈을 꾼 것 같다. 나쁜 꿈을 꾸고 나면 그 날은 하루종일 기분이 안 좋다. 그리고 이불은 안 덮고 자서 감기가 걸린 모양이다. 날이 이렇게 추운데 얼어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연탄을 피우러 부엌에 가보았더니 연탄도 떨어졌다. 주머니에 돈도 없는데 큰일이다. 엄마를 찾아다니느라 서점 일을 그만둔 후로는 그동안 저축을 해두었던 돈으로 전단지를 만들고 생활도 했는데 당장 연탄이 없어 추위에 떠는 신세가 된 것이다. 당장은 어쩔 수 없이 주인집에서 연탄 한 장이라도 얻어 와야 겠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할머니, 안에 계세요?"
이 시간이면 아침은 드시고 계실 주인집 안방 문 앞에서 물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어서 다시금 큰 소리로 물었다.
"할머니, 계세요?"
"응, 난 또 누군가 했네. 왜 이리 개미 목소리인겨?"
"네… 감기가 오는 것 같네요.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추운데 들어와서 말해. 바람 들어오니까."
할머니는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였다. 식사하시는 도중에 실례가 많다고 양해를 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침식사를 드시고 계셨고, 손자는 먼저 아침을 먹었는지 꾸벅 인사를 하고는 가방을 둘러매고 학교에 간단다. 오랜만에 뵙는 할아버지께 인사를 하고는 방문 앞에 앉았다.
"뭐해? 이리 가까이 오지 않고선. 아침 안 먹었지?"
할머니는 내 손목을 잡고 상 앞으로 끌었다.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시장기를 돋운다. 전날 저녁을 못 먹은 생각이 났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정말 맛있게 먹고선 용건을 잊어버릴뻔 했는데 할머니가 상기시켜 주셨다.
"할 말이 있다믄서. 뭔데?"
"네…, 저 연탄 한 장만 빌려주세요. 마침 딱 떨어져서요."
"그 말 할라고 온겨? 에그, 그냥 저기 싸아둥 거 한 장 집어가지 그랬어."
"말씀 드리고 가져가야죠. 안그럼 도둑질인데……."
다행히도 선뜻 연탄을 내주셨다. 엄마가 사라진 후로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신 분들인데 이렇게 또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죄스러웠다. 이 분들도 넉넉치 않은 분들인데 따뜻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했다.
"이제 나갈건가?"
"네, 이제 또 나가 봐야죠."
"날도 찬데 처자가 고생이 많네. 그나저나 그래 가지고 생활이 되나?"
"추운데 밖에 있는 사람도 있는데요. 전 괜찮아요."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는 방을 나왔다. 머리 뒷꼭지로 할머니 두 내외분이 안쓰럽게 쳐다보시는걸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연탄도 얻고 아침도 해결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저녁때 들어오면 연탄을 때야 겠다고 생각하고는 부엌 한켠에 연탄을 잘 모셔두었다. 은행에 들려 남은 돈을 찾으면 꼭 갚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방에 들어와 옷을 입는데 검은 수첩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나갈까 하다가 전화를 해봐야 겠다고 다시 주저앉아 수첩을 펴들었다. 몇 개의 전화번호 중에서 우선 엄마의 친구분이라고 생각되는 몇 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래된 번호라 결번이거나 바뀐 번호도 있었지만 더러는 그 곳에 계속 사시는 분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엄마를 보거나 만났다는 분은 없었고 엄마를 기억하지 못하시는 분도 계셨다. 그리고 건 곳은 '이경운'이라는 사람의 번호였다.
두 줄로 지운 여러 개의 번호를 지나 가장 아래에 써진, 최근의 번호일 것이라고 예상되는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3892-4859. 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이 가자, 가슴이 떨렸다.
"여보세요?"
한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로 보아 중년의 아주머니 같았다.
"저… 실례지만, 이경운씨 댁인가요?"
"그런데 누구시죠?"
"네… 맞군요. 사람을 찾는데요, 이경운씨께 도움을 받았으면 해서 전화를 걸었는데요. 지금 댁에 계신가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여자는 수화기를 어딘가에 내려놓고 '여보'하며 그 남자인지를 부르러 갔다. 여자가 여보라고 부를 정도이면 그 남자도 아마 중년의 사내일 것이다. 엄마에 비해 이십 년 가까이 젊은 사람을 엄마가 안다는 사실이 좀 놀라웠다. 하긴, 젊은 부인을 둔 나이 지긋한 노인일 수도 있는 일이긴 하였다.
"네, 제가 이경운 입니다."
문제의 그 남자다. 역시 처음 예상한 대로 나이가 그렇게 들어 보이는 목소리는 아니다. 그게 더 신기해서 하마터면 몇 살이냐고 먼저 물을 뻔하였다.
"저…, 초면에 죄송합니다. 제 이름은 송경아라고 하는데, 사람을 찾는데 선생님 도움을 받을까 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했습니다."
"누구를 찾으시는데요?"
"저…, 혹시 박미숙이라는 분 아시나요?"
상대방은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다. 그래서 자초지경을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박미숙이라는 분은 엄마의 이름이고 지난 여름 갑자기 없어지신 것이며, 수첩을 발견하고 그 안에 적혀 있던 이야기, 그리고 적혀있는 상대방의 전화번호들에 대해서 말이다.
"…전화번호가 적혀 있던 게 여러 번 바뀌어 있던 걸로 봐서, 여러 해 알고 지내셨던 것 같은데…아닌가요?"
잠자코 듣고 있던 이경운이란 남자는 다짜고짜 아버지 성함이 뭐냐고 물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을 묻는 게 이상했지만 엄마의 행방을 혹시라도 알까 해서 '송만철'이라고 분명히 말해줬다. 남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그런 사람 모른다'고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다시 다른 전화번호들로 전화를 해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은 건 성북동의 그 지긋지긋한 주인집 전화번호뿐이었다. 엄마가 거기에 갔을 리는 없다. 그 곳이 엄마에게나 나에게나 얼마나 생각하기도 힘든 곳인지, 꿈에 나올까 두려워했던 곳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날은 아주 더운 여름밤이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학원까지 다녀온 후라 거의 자정이 된 무렵이었다. 엄마는 주인댁 할머니의 기일이라 제사를 치르느라 주인집에 가서 아직 오지 않았고 집안 행사를 치르는 친인척들로 인해 온 집안이 시끌벅적 하였다. 엄마는 아마도 밤을 샐 것 같으시다며 제사음식을 주인아줌마 몰래 싸서 골방으로 가져다 주셨다. 나는 이 우중충한 방에서 단 몇 시간이라도 혼자 지냄을 신나하며 부침개 하나를 우물거리며 방바닥에 벌렁 누웠다. 라디오를 틀고 아바의 'Cassandra'를 흥얼거리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면서 술이 얼큰하게 취한 중년의 아저씨가 갑자기 뛰어들었다.
"뭐…뭐예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일어나 앉을 생각도 못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남자는 내 머리채를 나꿔채고 방구석으로 끌고 가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구타했다.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가 머리맡에서 울고 계셨다. 엄마는 새벽녘이 되어서 지친 몸을 끌고 골방으로 내려왔다. 방문을 열었을 때 엄마의 눈앞에 벌어진 광경은 그녀의 남편이 죽었을 때 느꼈던 충격보다 더 컸을 것이다. 방 한가운데에는 주인집 제사를 지내면서 얼굴만 본 주인 어른의 조카라는 사람이 알몸으로 대자로 누워 자고있었고 하나밖에 없는 딸은 온 몸이 피와 분비물로 범벅이 된 채 쭈그리고 정신을 잃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후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사건을 무마해주는 대가로 자립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쥐어주었다. 딸의 인생이 망가지게 되었는데 돈 몇 푼에 딸의 인생을 맞바꿀 수는 없다고 버티던 엄마도 '못 가진 게 죄'라며 돈을 받고는 짐을 싸서 그 집을 나왔다. 기억하기 싫은 일을 생각해 내다니. 역시 지난밤에 꾼 꿈이 악몽이었나 보다.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전단지를 챙겨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차라리 수첩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나, 성북동에서의 기억 따위는 생각해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번에도 허탕이다. 파출소에서도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고, 오후에 이천이라고 전화가 온 양로원에 갔더니 엄마랑 비슷한 노인이 양로원 현관에 앉아서 하늘만 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럴 땐 가슴을 쥐어 뜯어놓고 싶다. 이렇게 아픈걸 못 느끼게 말이다. 어디서 뭘 하시는지, 끼니는 잘 챙겨 드시는지 걱정을 하는 것도 이젠 지쳤다. 그저, 살아있다는 소식만 알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득 이산가족들도 이런 고통을 겪지 않을까 싶어서 씁쓸해졌다. 국경선으로 갈라진 곳의 이산 가족만 대대적으로 찾지 말고, 국내에서 헤어진 가족들은 왜 안 찾아 줄까. 이산가족 찾기를 하는 만큼의 반만이라도 나 같이 가족을 잃어버려서 고통을 받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엄마를 금세 찾았을 거란 생각이 드니까 눈물이 더 나왔다.
하루종일 헤매고 들어왔더니 머리가 무겁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한기가 느껴지고 밭은기침이 나온다. 연탄불을 때서 몸을 녹여야겠다는 생각에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부엌에서 꼼지락거렸다. 조개탄에 불을 붙이고 연탄을 넣었다. 곧 따뜻해질 방 아랫목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불을 꺼야 잘텐데 몸이 마치 테이프로 붙여놓은 듯이 바닥에 붙어 일어나기 힘들었다. 오늘은 너무도 피곤해서 불을 켜놔도 잠이 잘 올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은 떴을 때 느껴지는 것은 밝은 불빛이었다. 우리 방 불이 이렇게 밝았던가 하고 불을 끄려고 일어서는데 어떤 남자가 내 어깨를 잡고 누워 있으란다. '누구세요?' 하고 물으려다 보니까 여긴 우리 방이 아니다. 하얀 침대며 커튼, 생전 못 보던 의료기구들을 보니 병원인가 보다.
"저…, 제가 왜 병원에 왔죠? 그리고 누구세요?"
다시 일어나려는 내게 남자는 허허 웃으며 다시 누워 있으라고 권한다.
"일어나지 말아요. 아직 어지러울 거예요. 주인할머니 말로는 연탄가스를 마신걸 발견하고는 119에 신고했다고 하더군요. 댁은 나흘만에 깨어난 거요."
"나흘이요?"
"그래요. 그러니까 좀 더 누워 있어요. 연탄가스가 아니더라도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어서 몇 가지 검사를 해봐야 하니까."
검사라는 말에 겁이 덜컥 났다. 어디가 아픈 건 아닌가를 걱정하기보다는 앞으로 들 병원비가 더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검사 꼭 해야 하나요? 깨어났으니까 집에 가면 안될까요?"
"어머니 일이라면 걱정 말아요. 이미 사람을 사서 찾으라고 시켰으니까."
"네?"
어리둥절한 내 얼굴을 보며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검사 더 받고 쉬고 있으면 용역업체 사람들이 알아서 어머니를 찾아줄 겁니다."
"누가 그런 일을 한 건가요? 댁이 그랬어요? 댁은 누구 신데요? 그렇게 해봤자 전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고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도움은 아무 이유 없이 받을 수는 없다. 목소리를 들어본 기억은 있는 듯 하여 재차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얼마 전에 전화를 건 적이 있지요. 제가 이경운입니다."
"네? 어떻게 저를 찾아내셨죠? 그 날은 그냥 전화를 끊으셨잖아요."
"사람 찾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요? 박미숙씨의 딸 송경아는 그리 많은 건 아닙니다. 돈이 좀 있다면 주소를 알아내는건 어렵지 않아요."
"그럼, 여긴 어떻게 오셨죠?"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할머니가 받으시더군요. 그래서 병원 위치를 물어봤고 이렇게 오게 된거죠."
"그래요. 어떻게 절 찾으셨는지는 궁금하지 않아요. 제가 궁금한 건 절 왜 찾아오셨는지, 그리고 왜 병원비를 대주시고 엄마를 찾는 일을 도와주시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
남자의 양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이제 마흔이 조금 넘어 보이는 그는 나이에 비해 키도 컸고 입고 있는 옷이며 구두가 돈 쓴 흔적이 있어 보였다. 금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검은 눈은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이 있었지만 약간 처진 눈썹은 그것은 반감시키는 작용을 해서 전체적으로는 순해보이게 하는 인상이었다.
"어머니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하셨나요? 아버지에 관해서 말예요."
"제가 지난번 전화로 말씀드린 수첩에 일부 적혀있는 내용 말고는 잘 몰라요. 어렸을 때는 편찮으셔서 돌아가신 걸고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말고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구요."
"그 수첩이 이건가요?"
그는 주인이 없는 방에 들어갔다 나와봤는지 집에 있을 엄마의 수첩을 손에 들고 있었다.
"아니, 그게 왜…."
"미안해요. 사람을 사서 일을 시켰더니 이런 것까지 가져왔더군요. 불쾌하다면 사과를 드리지요."
그는 엄마의 일기장을 내게 돌려주었다.
"전화를 받던 날, 그 일기장 얘기를 듣고는 혹시나 했어요. 송만철씨의 딸이 제게 전화를 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죠. 지난 세월동안 잊으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고, 이제 겨우 잊혀졌다고 생각했는데……."
"저희 아버진 어떻게 아시죠?"
"댁의 아버지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80년대 대학가는 연일 이어지는 시위로 최루탄 냄새가 가실 날이 없었습니다. 저도 역시 시위에 참가했고 화염병을 던졌지요. 그런 시위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는 그런 일들이 얼마나 실효를 거두고 있는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친구들이 모두 하니까 하는 그런 줏대 없는 형태로 머릿수만 채워주고 있었던 겁니다. 특히, 우리 학교가 있는 곳은 시립대와 고려대, 외대, 과학원이 있는, 시위의 중심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이날 정도로 대학이 밀집해 있어서 매일 시위가 끊이질 않았고 학교 수업도 제대로 이뤄지질 않았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을 친다면-지금 말로 소위 왕따가 되는 거죠. 그 날도 저는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전 날 아버지와 크게 다투고 그 반항심으로 참가하는 것이라 앞에서 뭐라고 떠드는지, 전경들이 얼마나 몰려왔는지 미처 알아채질 못했어요. 그러다가 앞에 서있던 친구의 '튀어' 소리에 나도 모르게 골목으로 피신하게 되었고 불쑥 들어간 어느 가정집이 바로 송만철씨의 집이었던 거죠."
"그, 그래서요?"
"아저씬 저와 제 친구를 숨겨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일이 끝난 줄 알았어요. 그 후로는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한 달이나 지났을까? 안기부 사람들이 절 잡으러 집까지 왔더라구요. 당시에 큰 손이라는 아버지의 아들이어서 강제로 차에 태우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에 보자기를 씌운 채 어디론가 데려갔습니다. 그 곳은 선배들로부터 말로만 듣던 안기부였습니다. 한 번 들어오면 병신이 되거나 목숨을 잃는다는…오줌을 쌀 만큼 두려웠어요. 그러던 차에 그들이 그러더군요.
'너랑 같이 있던 천민수랑 숨겨준 송만철이 다 불었어. 너희 대가리가 누구야?'
그 때 절 숨겨준 분의 이름이 송만철임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 분의 직업이 집배원이라 우리의 연락책 역할을 했을 거라고 짐작을 하더군요.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그들은 내 머리를 번개에 처박고는 물을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어서 불으라고 윽박질렀어요. 전 그저 아무 뜻 없이 친구들 따라 시위에 참여한 건데 말이지요. 전 울면서 아무 이름이나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곧 풀어주더군요."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추느라 두 손을 피가 안 통하도록 꼭 부여잡고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 이후의 얘기는 나도 짐작이 간다. 아버지는 자신이 직업을 이용해서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을 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올곧은 성격은 모진 고문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게 했을 것이고 뭔가를 캐내야 했을 형사들은 입에 담기에도 처참한 일들을 아버지에게 저질렀을 것이다. 그렇게 해도 아버지에게서 나올 것이 없자, 그 곳에서 비명횡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죽기 직전에 집에 돌려보냈을 것이다.
"아저씨가 돌아가셨다는 소문은 제가 안기부에서 나온 지 얼마 안된 후에 들었어요. 더 이상 시위에 참여하기가 두려워서 공부나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학교에만 다녔거든요. 아저씨의 죽음에 대한 소문은 그 동네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학교 학생들도 모두 알고 있었죠. 그 밀고자가 누군지는 확실하지 않은 채로 말이죠. 전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만 입을 다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그게 이십 년 넘게 절 쫓아다니더군요. 그 죄책감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이 남자가 아버지를 죽게 한 거라고 믿고 있었던 것일까?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아버지를 고문할 수밖에 없는 형사들과, 거짓을 자백한 이 남자가 처해 있던 상황만이 그 죄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형의 것들은 사람들이 말하는 죄값을 받을 수 없다.
"댁의 어머니가 어떻게 번호를 아셨는지 몇 번 전화를 하셨습니다. 저 때문에 사람이 죽은 거라고…그 죄책감에 못 이겨 죽어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더군요. 전화번호를 여러 번 바꾸었는데 그때마다 전화를 하셨어요. 그 원망에 찬 목소리는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 점점 연락이 뜸해졌고 저도 이젠 죄책감에서 벗어나겠구나 싶었는데 얼마 전부터 또 다시 전화가 왔어요. 미치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나 아이들에게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할 지……."
"엄마가 전화를 했다구요?"
"어떻게 아셨는지 바꾸는 족족 전화를 하시더라구요. 신고를 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차마 못하겠어서……. 그러던 찰나에 댁한테 전화가 온거구요."
"최근에 전화가 언제 왔나요?"
"한 이 주쯤 되었습니다."
엄마가 집을 나간 지 다섯 달이 지났다. 그동안 본의 아니게 연락을 하고 지낸 사람은 이 남자 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좀…자리를 비켜주시겠어요?"
"네?"
"긴 얘기를 들었더니 피곤하네요. 쉬고싶어요."
그제서야 핼쓱한 얼굴을 들고 황급히 병실을 빠져나간다. 그가 나감과 동시에 나도 일어났다. 조금 어지러웠지만 참을만 하였다. 침대 옆 서랍장을 뒤졌지만 내가 입고 있던 옷은 보이지 않았다. 옷을 찾길 포기하고 그냥 병실을 나섰다. 옷차림이 어떤지는 지금 내게 중요하지 않다. 또, 검사를 받는 것은 더 중요치 않다. 그것보다는 엄마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비척비척 걷는 꼴이 우습다. 1층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의사들도 만나고 간호사와도 마주쳤지만 아무도 날 붙잡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환자복 차림으로 한 푼도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선 '서울역이요' 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햇빛이 눈에 어른거려 마치 새 한 마리가 춤을 추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