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악산 봉선사 산문
운악산 봉선사 산문
운악산 봉선사 일주문
3.1운동 만세 시위지였던
봉선사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사찰] 남양주 봉선사
[불교신문 3741호/2022년11월8일자]
기자명 권중서/조계종 전문포교사
깊어가는 가을 더 늦기 전에 춘원과 봉선사를 …
“님에게는 아까운 것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를 배웠노라 … 이제
알았노라 님은 이 몸께 바라밀을 가르치려고
짐짓 애인의 몸을 나투신 부처님이시라고”
춘원의 ‘애인-육바라밀’은 너무나 유명한 시이다.
이처럼 쉽게 육바라밀을 시로 표현하여
보살도를 일러 주었다. 또 불자들이
법회 때 부르는 ‘청법가’의 작사도 춘원이 했다.
봉선사는 고려 광종20년(969)에 법인국사 탄문스님이 창건하여 운악사라 하였다. 이후 조선 세조가 예종에게 “선조를 받들고 효도하기를 생각할 것(奉先思孝)”을 유언으로 남겼다. 예종은 1469년에 ‘봉선사(奉先寺)’란 사액을 내려 절 이름이 바뀌었고 광릉의 능침사찰이 되었다. 세조는 왕권 강화와 토지제도 정비, 불교서적 간행 등 백성을 위한 많은 업적을 남긴 호불 군주로 ‘조선의 아쇼카왕’이라 말할 수 있다.
‘삼해탈’ 일주문
봉선사 일주문을 바라보면 ‘어! 한글이네’ 하는 반가운 마음으로 앞의 ‘운악산 봉선사’ 한글 편액과 뒤에 ‘교종본찰 봉선사’란 한자 편액을 볼 수 있다. 일주문만 보아도 봉선사는 불경의 한글 역경사업의 중심도량임을 알 수 있다. 봉선사는 조선 명종6년(1551) 허응당 보우스님의 목숨을 건 선교양종의 승과 부활로 교종의 으뜸사찰이 되었다. 일주문은 삼문(三門)으로 4개의 돌기둥을 일렬로 세운 것은 흔들림 없는 수행으로 삼독심을 버려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삼해탈문(三解脫門)을 표현했다. 대웅전에 걸린 특이한 한글 편액 ‘큰법당’에서는 불경의 한글화에 크게 이바지한 운허·월운스님의 한글 사랑이 느껴진다. 내부에는 한글 <화엄경>과 한문 <법화경>을 동판에 새겨 벽을 이루었다. 6·25전쟁으로 타버린 법당은 철근 콘크리트를 구조이지만 전각의 전통성을 잘 표현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범종을 치는 이유
범종각에는 예종의 지극한 효심이 느껴지는 보물 범종이 있다. 범종에는 1469년 조선 시문서화의 4절로 꼽히는 최고의 문장가 강희맹의 글이 새겨져 있다. “범종이란 불도 수행 기구의 가장 으뜸이 되는 것으로서 그 소리가 웅장하여 위로는 하늘 꼭대기에, 아래로는 지옥까지 미쳐 육도에 들린다. 색계 18천의 하늘 아가니타왕까지 이 범종이 크게 울려 불법(佛法)이 크게 일어나니 지금 이 범종으로 하루 여섯 번 경책하면 악도에 윤회하는 것을 그칠 뿐이겠는가. 반드시 광릉에 크게 울려 문득 부처님의 지혜를 더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산이 평지가 되고 바다가 마를지언정 이 공덕은 끝내 없어지지 않는다”하여 봉선사 중창의 공덕을 찬탄하였다. 또 이 범종 소리로 세조대왕이 깨달음을 이루고 28중생세계(지옥, 아귀 축생, 인간, 욕계6천, 색계18천)가 윤회를 그쳐 극락에 이르길 발원하였다. 이처럼 새벽에 28번 범종을 치는 것은 28중생세계에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주기 위한 것이다.
범종은 높이 238㎝, 입지름 168㎝의 큰 동종(銅鐘)으로 조선 범종의 특징인 음통이 없고 용뉴에는 위엄이 넘치는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지며 여의주를 잡고 있다. 사방 4곳의 연못에는 각 9개씩 36개의 연꽃봉오리가 도드라져 있어 밀교의 37존불을 형상화했다. 연못 사이에는 4명의 보살이 서 있고 그 밑에는 육자대명왕진언, 파지옥진언을 범어(梵語)로 새겼다. 아래 중첩된 물결무늬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 피안으로 가는 것을 나타냈다.
북두칠성은 7여래로 변하여…
큰 법당 서쪽 언덕에는 1926년에 건립된 삼성각이 있다. 6·25전쟁을 견뎌낸 산령각, 북두각, 독성각은 한 지붕 밑에 세 가족처럼 한 전각에 산신, 칠성, 독성을 모셨다. 가난했던 시절 초가삼간에 부모님 모시고, 처자와 함께 살았던 정이 묻어난다. 처마 끝 풍판(風板) 안쪽에는 청룡이 힘차게 날고 운악산 백호가 긴 꼬리를 흔들거리며 늠름하게 봉선사를 지키고 있다. 북두각에는 결가부좌한 치성광여래가 금륜을 왼손에 들고 인간의 수명과 복락을 관장한다. 북두칠성은 칠여래로 변하여 중생을 살피고, 치성광여래 좌우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연꽃 위에 해와 달을 들고 있다. 원유관 위에 흰 점으로 별을 표시한 칠원성군이 있다.
그 옆의 독성각에는 빈도라발라타사 즉, 나반존자 불화가 있다. 독성의 모습은 오른손에는 불로초를, 왼손에는 긴 석장(錫杖)을 들고 반석 위에 앉아 있다. 탈속의 자유와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배경으로 붉은 태양과 상서로운 구름, 천태산의 소나무, 학, 모란꽃과 호랑나비, 새, 황룡, 거북, 동자, 동녀, 신선 등이 등장한다. 그런데 동녀가 안은 학과 바다 속 거북이가 흰 기운을 뿜으며 서로 입을 벌려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재미있다. 그 옆에는 오랜만에 동자의 호리병 속에서 나온 황룡이 검은 구름을 일으키며 신나 한다.
봉선사에는 음식 이야기가 전한다.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보면 박술은 구걸하기 위해 봉선사를 들렀다. 때마침 경기감사가 오니 봉선사는 진수성찬을 올렸는데 거지 박술이 절 뜰에 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남산도 더는 높지 말고, 한강도 더는 깊지 말며, 감사께서도 더는 배부르지 말고, 걸인도 더는 배곯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공이 먹다 남긴 것이라도 얻었으면 합니다” 그러자 감사는 웃으면서 음식을 내주었다고 한다. 부족하지도 말고 넘치지도 않는 행복한 세상은 ‘보시’에 있음을 말해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춘원 이광수가 봉선사로 간 이유는?
봉선사 입구에는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서 있다. 감성적 천재 춘원 이광수(1892~1950)는 일제강점기에 불교문학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1922년 석왕사에서 <화엄경>, 1923년 금강산에서 <법화경>, <금강경>, <원각경> 등 불경을 읽고 더욱 불교에 심취하여 <이차돈의 死>(1935), <꿈>(1938), <무명>(1939), <사랑>(1939), <원효대사>(1942) 등 많은 불교관련 소설을 집필했다. 해방이 되자 춘원은 팔촌인 봉선사 운허스님에게 의지하여 머물며 지난날의 친일협력에 대한 번민의 돌베개를 베었다. 춘원은 <돌베개>의 서문에서 “나는 오랫동안 세상을 떠나서 수도생활을 할 작정으로 꽤 크고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봉선사로 갔다”고 했다.
춘원의 시 ‘애인-육바라밀’은 너무나 유명한 시이다. “님에게는 아까운 것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를 배웠노라 … 이제 알았노라 님은 이 몸께 바라밀을 가르치려고 짐짓 애인의 몸을 나투신 부처님이시라고” 이처럼 쉽게 육바라밀을 시로 표현하여 보살도를 일러 주었다. 또 불자들이 법회 때 부르는 ‘청법가’의 작사도 춘원이 했다. 아쉽게 북으로 끌려간 후 1950년에 생을 마감했다. 깊어가는 가을, 세조대왕, 춘원이광수와 함께 봉선사를 걸어 봄직도 하다.
뒤돌아본
봉선사 일주문
활짝 피어난 수련·희망 품은 꽃등… 화답하듯 꽃비 내리다
중부일보 기사 입력 : 2024.05.16. 19:52 수정 2024.05.17 13:29
글·사진=여행작가 유승혜]
부처님 오신 날 남양주 봉선사
◆부처님 오신 날 깨운 봉선사 아침 수련
산달에 다다른 마야부인은 친정으로 가던 중 아름다운 숲 룸비니 동산을 지났다. 그는 가마에서 내려 꽃을 구경하다가 가장 탐스럽게 꽃이 핀 아소카 나무(무우수)를 향해 다가갔다. 팔을 들어 꽃가지를 잡는 순간 산기를 느낀 마야부인은 곧 아이를 출산했다. 태어난 아기는 일곱 걸음을 걸었는데 그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났다. 아기는 한 손으로는 하늘을,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를 외쳤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며 삼계가 고통이니 내가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 말씀하신 그분이 바로 싯다르타 왕자,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불기 2568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찾은 운악산 봉선사는 온 사위가 울울창창한 초록으로 물들어 있었다. 필자는 부처님의 탄생지인 네팔 남동부의 룸비니 동산을 가본 적이 없어 꽃이 만발한다는 그곳과 봉선사의 연꽃 정원을 견주기는 어렵다. 그런데 세상 모든 어린이의 집을 도는 성탄 전야의 산타처럼, 부처님도 탄신을 맞아 세상 모든 절집에 찰나의 발자국을 남기신다면 봉선사 산문을 드실 때 퍽 즐거우실 것 같다. 일주문을 지나 법당에 이르기까지 너르게 펼쳐진 봉선사 연못 정원은 부처님이 오신 이 계절, 물에 띄운 연등처럼 주변을 밝히는 수련으로 더욱 아름답다. 밤이면 웅크린 채 잠드는 수련의 꽃봉오리는 아침 해가 들면 활짝 꽃잎을 펼친다. 봉선사 수련은 부처님 오신 날을 알고 이른 아침부터 만개했다.
◆석가모니 낳은 마야부인 오셨네!
부처님 일곱 걸음을 생각하며 한 발 한 발 경내로 향하는 길, 새삼 자신의 존재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고 선언한 부처님 가르침을 되새긴다. 올해 부처님 오신 날은 스승의 날과 맞물렸다. 부처라 하면 세상의 숱한 스승 중에서도 최고 존엄의 자리에 계신 스승이 아닌가. ‘빨간 날’이라고 절집 최대 축제를 고대하며 한껏 달떴던 마음은 수련, 꽃창포, 붓꽃 등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낱낱의 얼굴들을 보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 꽃 같은 얼굴들에서 부처를 본다. 부처님의 낙토 안에서 모두가 스승이고 부처다.
수련의 그윽함에 빠져있다가 신명 나는 사물놀이 소리에 이끌려 경내로 들어섰다. 태평소를 선두로 덩실덩실 춤추며 앞장서는 사물놀이패 뒤로 커다란 황산(黃傘)이 보였다. 필시 귀하신 분이 행차하는 것이리라. 가까이 가보니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봉선사 마야부인’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해 신도가 마야부인으로 분해 석가모니불을 모신 큰법당까지 행차하는 행사다. 꽃나무 아래에서 옆구리로 싯다르타 왕자를 낳았다는 부처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주변의 환호를 받으며 큰법당으로 들어섰다.
◆아기부처 탄생 봉축하는 이들로 붐빈 큰법당
큰법당 마당은 지붕처럼 드리운 연등 아래 수많은 대중을 품었다. 수백 개 연등이 큰법당과 하늘 사이에 융단처럼 깔렸다. 헌화할 장미꽃을 들고 부처님 탄생을 봉축하러 온 불자들은 법당 앞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법당 중앙 문 앞에선 아기부처상을 물로 씻기는 관불식이 치러졌다. 한 사람, 한 사람 탄생불을 정성껏 씻기며 부처님 오심을 축하하고 제 번뇌를 정화한다. 그 갸륵한 마음들이 한데 모여서인지 큰법당에 모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얼굴이 다른 날보다도 더욱 온화해 보였다.
‘온 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 큰 바다 물을 모두 마시고/ 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 부처님 공덕 다 말 못하고’
큰법당 주련의 한글 게송이 석가 탄신 축가의 노랫말처럼 읽힌다. 편액도 주련도 한자가 아닌 한글로 쓰인 큰법당은 이야깃거리가 많은 봉선사 주불전이다. 1970년, 당시 주지였던 운허스님이 중건했는데 익히 알려졌듯 스님은 불교대중화에 힘쓴 독립운동가로 한문에 까막눈인 나 같은 중생을 위해 부처님 말씀을 한글로 풀어 설파했다. 봉선사를 처음 방문한 이라면 일찍이 절에 들어설 때 운악산 봉선사라고 한글로 세로쓰기 한 일주문 편액에 눈길이 갔을 것이다. 조선 최초로 한글로 번역, 편찬된 불교서적인 '석보상절'을 간행한 조선 7대 임금 세조의 위패를 모셨던 절이 봉선사라서 한글과는 참 각별한 인연이구나 싶다. 지은 지 반세기를 넘긴 큰법당은 근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전통 목조양식을 정교하게 재현해 완성도와 조형미를 인정받아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꽃처럼 화사한 비로자나삼신괘불도, 찬불가 은은하게 퍼져
하나하나 짚어보자면 할 말 많은 큰법당이지만 부처님 오신 날 가장 눈길을 끄는 성보는 봉선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다. 괘불도는 부처님 오신 날이나 큰 법회 때 만날 수 있는 대형 불화다. 괘불도가 큰법당 앞에 걸리자 절마당은 꽃이 군락을 이룬 듯 화사해졌다.
봉선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는 1735년(영조 11)에 상궁 이 씨가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 씨의 명복을 빌며 시주해 제작한 것으로 화면 위쪽 가운데에 비로자나불을, 좌우에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을 그려 넣었고 6구의 보살과 범천, 제석천, 10대 제자, 주악천인 등이 화면 아래를 가득 채우고 있다. 시원시원한 필선에 화사한 색채, 역동적인 짜임새로 작품성을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된 이 괘불도는 천이 아닌 30장의 종이를 붙여 제작되었다는 점이 특별하다. 크기는 세로 877㎝, 가로 458㎝로, 진품은 2015년 보존 처리를 마치고 봉안했으며 부처님 오신 날 걸린 괘불도는 행사용으로 마련한 모사본이다.
봉축법요식 전, 괘불도 부처님 앞에는 육법공양이라 해서 등, 향, 꽃, 과일, 차, 쌀 등 여섯 가지 공양물이 올려졌다. 이후 삼귀의례를 시작으로 봉선사 교구장 호산스님의 봉축사와 내빈 축사, 봉축 법어, 봉축발원문, 사홍서원, 관불 및 헌화 등의 순서로 봉축법요식이 치러졌다. 축가는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수미산합창단, 연꽃미소합창단, 상월결사 청년합창단이 맡았다. 청아한 찬불가가 봄바람처럼 오소소 퍼져나갔고 큰법당 아래 모든 중생의 마음은 모자람 없이 충만해 보였다.
◆소찬에도 맛있다 연발, 잔칫날 공양간 풍경
봉축법요식은 경건하게 진행되었지만 사찰 안팎은 제법 성대한 잔치 분위기가 났다. 청풍루 앞마당에는 연등, 합장주, 풍경 등을 만들고 꾸미는 체험 부스가 어린아이들의 관심을 끌었고 크고 작은 생활용품을 사고파는 나눔장터도 열렸다. 고적했던 산사도 오늘만큼은 야단법석한 축제장이라 아이들이 놀이터처럼 뛰고 놀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1년 중 단 하루, 오늘 오신 부처님도 외람되지만 귀여운 아기부처다.
점심공양을 기다리는 어른들의 표정은 아이들보다 더 설레어 보인다. 잔치에 음식이 빠질 수 없으니, 부처님 오신 날 절밥은 그 자체로 복이고 덕이다. 공양은 청풍루에서 150m쯤 떨어진 육화당에서 온종일 행해졌는데 공양을 기다리는 줄이 청풍루 앞 찻집 봉향당까지 길게 늘어서 ‘웨이팅’만 기본 1시간이었다. 긴 기다림 끝에 받은 점심공양은 식사를 수행으로 여길 수 없을 만큼 성찬이었다. 공양주 보살들이 열무김치와 상추, 콩나물무침에 고추장을 더한 비빔밥에 미역국, 그리고 절편을 내줬다. 꿀맛이다. 허겁지겁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야 끝없이 밀려드는 봉축 인파의 배를 불리는 보살들의 노고를 헤아린다. 아니, 헤아릴 길이 없다. 그들의 공덕은 무량하고 부처님의 축복은 끝이 없다.
◆한 자리 한 자리 이야기 깃든 봉선사 볼거리
봉향당도 오늘은 빈자리가 나지 않는다. 봉향당은 평소에도 필자와 같은 객들이 몰려드는, 연못 전망 근사한 절간 찻집이다. 봉선사 아메리카노 한 잔은 다음으로 미루고 부처님 오신 날에도 그냥 지나치기 아쉬운 봉선사 관람포인트들을 여여하게 둘러본다.
봉향당 앞에 서면 절을 수호하는 550살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보인다. 정희왕후가 심은 나무라고 한다. 노거수지만 푸르고 강건하다. 봉선사는 969년 고려 광종 때 운악사로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세조가 광릉에 묻힌 후 정희왕후가 능침사찰로 중창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덕분에 봉선사를 둘러싼 숲은 왕실림으로 500여 년의 세월 동안 자연의 질서로 일구어지며 보존될 수 있었다. 다만 봉선사의 옛 전각들은 전쟁의 화마로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재의 모습은 1960년대부터 재건된 결과이다.
느티나무 우측 청평루 앞마당 가장자리에는 범종루가 있다. 봉선사 동종은 흥천사종, 보신각종과 함께 조선 초기 3대 대형 동종으로 꼽히며 보물로 지정되었다. 세조의 아들 예종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주조를 명했으며 동종에는 세조의 덕과 공로를 찬탄한 내용이 적혀있다.
범종루와 청풍루를 지나면 성모마리아를 닮은 길고 가는 선의 관세음보살상을 만난다. ‘마리아 관음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서울 길상사 관세음보살상을 만든 조각가 최종태 교수의 작품이다. 부드럽고 청묘한 이 관세음보살상은 봉선사의 다정하고 개방적인 성격을 표상한다. 왕실림이기에 엄숙함과 폐쇄성이 있는 광릉숲에서 봉선사는 여러 모로 너른 품을 가진 다정한 절이다. 6·25전쟁 때 유일하게 살아남아 봉선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된 1926년생 산신각까지 둘러보고 나면 경내 산책은 충분히 한 셈이다.
마야부인을 알현하느라 서둘러 나왔던 연못가를 다시 돌아보는데 물 위로 한 방울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졌다. 필시 부처님이 내린 꽃비였으리라.
디딜방아
대연지
춘원 이광수 기념비의
정면 모습
춘원 이광수 기념비(春園 李光洙 記念碑)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봉선사길 30[부평리 255]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춘원 이광수를 기념하여 세운 비.
[개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는 1944년 3월부터 1948년 8월까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의 광릉 지역과 사릉에서 머물며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1946년 9월 2일 광동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신용철의 연구에 따르면 “일과 후 숲속을 거닐며 초목과 대화하고 죽은 새도 묻어 주었다. 염불하고 경전 읽으며 좌선하는 불제자로 충실하려고 노력하였다.”라고 한다. 춘원 이광수 기념비(春園 李光洙 記念碑)는 1976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이광수를 위하여 세운 기념비이다.
[건립 경위]
춘원 이광수 기념비는 이광수가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사릉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은거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친 광동중·고등학교에 기념비 건립이 추진되었다. 근처의 봉선사는 이광수가 4개월 정도 수도 생활을 한 곳으로, 기념비 제막 당시 봉선사 주지 승려 운허는 이광수의 팔촌 동생이다. 춘원 이광수 기념비는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 등 유족에 의하여 건립이 계획되었고, 허영숙이 1975년 미국에서 귀국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9월 7일 사망하였다. 그 후 아들 이영근, 딸 이정난·이정화 등 남은 유족에 의하여 완공되었다. 제막식은 1976년 5월 29일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의 봉선사 구내에서 개최되었으며 150여 명의 인사가 참석하였다.
[위치]
춘원 이광수 기념비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5번지 봉선사 경내에 있다.
[형태]
춘원 이광수 기념비의 재질은 화강석으로, 건립 당시에는 용의 무늬를 새겨 넣은 이수가 비석의 머리로 장식되었으나 현재는 이수가 망실되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정면에는 한글로 ‘춘원이광수기념비’라고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주요한의 글이 김기승의 글씨로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좌우 측면에는 이광수가 남긴 글들이 김기승의 글씨로 음각되어 있다.
[금석문]
춘원 이광수 기념비에는 「졸업하는 형제여, 자매여」[『동광』31, 1932. 3.] 등 이광수의 작품 및 추모 글이 총 1,371자로 새겨져 있다.
[의의와 평가]
춘원 이광수 기념비는 광복 직후 은거하던 이광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유적이다.
친일 이력 때문에 해방 무렵 갈 곳이 없었던 이광수를 거둬준 이가 운허였는데 그는 이광수가 인근 사릉 근처에 터를 잡고 살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이광수는 사릉에서 1944~1948년까지 살았는데 해방 직후인 1946년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운허의 도움으로 봉선사에 들어가 은거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사릉과 봉선사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광수가 쓴 작품이 <도산 안창호>, <나의 고백>, <돌베개>이다.
기념비는 이광수의 전처인 허영숙이 세운 것으로 그녀는 홀로 자녀들을 키우고 말년인 1971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였는데 납북된 이광수의 생사를 알기 어렵게 되자 추모비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1975년 5월 귀국하였는데 갑자기 여러 병을 얻어 기념비를 세우기 직전인 9월에 사망하였다. 사실 이런 기념비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잘 알기 어려운데 경기도에서 친일 문화 잔재 청산을 위한 조사를 하고 있고 이 기념비가 경기도에 소재한 대표적인 친일 잔재물로 꼽히고 있어 향후 청산 대상이 될 지, 보존 대상이 될 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춘원 이광수 기념비의
측면 모습
[이광수의 글을 새겨 놓았다.]
춘원 이광수 기념비의
반대편 측면 모습
[여기에도 이광수의 글을 새겨 놓았다.]
춘원 이광수 기념비의
뒷면 모습
[주요한의 글이 김기승의 글씨로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소연지 옆의 불상
소연지
소연지 앞에서 바라본
대연지
소연지 앞에서 바라본
봉선사
'큰법당' 한글 현판, 1천6백년 불교사 파격… 남양주 봉선사
기자명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
중부일보 기사 입력 : 2022.04.25. 17:51 수정 2022.04.25. 22:07
◇봉선, 선왕의 덕업을 받들어 모시다.
봉선사는 고려 969년(광종 20)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창건해 운악사(雲岳寺)라 불렸고, 세조가 승하하고 광릉(光陵)이 조성되면서 원찰로 중창되며 봉선사(奉先寺)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나라를 대표하는 국찰의 기능과 역할을 해왔다. 세조의 영정을 봉안한 숭은전(뒤에 봉선전)으로 홍살문과 하마비가 세워지고, 예종과 성종의 각별한 지원과 관심을 받았다. 특히 1551년(명종 6)에 선종(禪宗)의 봉은사(奉恩寺)와 더불어 교종(敎宗)의 수사찰(首寺刹)로 승격되면서 봉선사는 교종 본찰(本刹)의 위상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불탔지만 다시 중창되어 사격(寺格)을 유지할 수 있었고, 1790년(정조 14)에는 전국 사찰을 총괄하는 5규정소(糾正所)의 하나가 되어 함경도 지역의 사찰을 관장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특히 1902년(광무 6) 원흥사(元興寺)를 대법산(大法山)으로 하고 전국 16개 사찰을 중법산(中法山)으로 정할 때 경기좌도(京畿左道)의 수사찰이 되었고, 1911년 일제에 의한 사찰령(寺刹令)으로 전국의 사찰이 30본산로 구역될 때 봉선사는 경기 북부 일원의 사찰을 관장하는 본사(本寺)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전소되어 본사로서의 사격을 잃었다가 1968년 대한불교 조계종의 마지막 제25교구 본사가 되어 한강 이북의 사찰들을 관장하는 교종의 으뜸사찰이다.
◇‘큰법당’ 한글 현판이 준 문화적 충격
봉선사가 보통의 절집과 다른 것은 절집 중심에 ‘大雄殿’ 현판이 아닌 ‘큰법당’이라 큼지막하게 써 붙인 한글 현판이었다. 1980년대 초 이를 처음 보고 느낀 신선한 문화적 충격은 분명 봉선사를 매력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개 절집의 가장 큰 중심법당을 큰법당이라 부르지만 ‘큰법당’이라 한글 현판을 저렇게 당당하게 써서 붙인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천600년 동안 그 당연한 일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충격이었다. 이러한 당연함을 당당히 실천한 사람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독립운동가이자 역경사업에 헌신한 운허(耘虛, 1892~1980) 스님이다. 속명이 이학수(李學洙)로 춘원 이광수(李光洙, 1892~1950)와 같은 마을에서 자라 함께 공부한 8촌 형이다. 운허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이자, 불경의 한글번역과 강원교육을 통해 후학을 양성한 큰스님으로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의 중흥조라 할 수 있다.
운허스님은 1970년 큰법당을 세우며 서예가 운봉 금인석(琴仁錫, 1921~1992) 교수에게 한글 편액과 한글 주련을 부탁하였다. 큰법당은 겉에서 보면 영락없는 목조건축물인데, 실상은 철근 콘크리트로 정교하게 만든 건물이라 또 한번 놀라게 된다. 큰법당은 근대건축 재료와 구조로 전통성을 표현하고자 한 60~70년대 기술을 대표하는 사례로 근대건축사적, 불교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봉선사가 근대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첫 자리는 역경사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그 빛나는 자부심은 한글로 된 ‘큰법당’과 한글 주련들 그리고 운허스님이 한글로 쓴 일주문의 ‘운악산 봉선사’ 큰 글씨로 당당히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한문 독경이 아닌 우리말 아침예불이 봉선사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는 불경의 한글번역을 넘어 의례의 한글화, 대중화를 선도하는 봉선사라는 사실이다.
◇봉선사의 보물들
봉선사는 국난을 온전히 겪은 절집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불타고 1950년 6.25전쟁으로 불타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봉선사가 한반도 북쪽에서 서울로 오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봉선사 보물은 이런 국난에도 살아남은 500년이 넘은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봉선사 동종, 삼성각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범종은 그리 많지 않다. 1469년(예종 원년)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제작된 높이 238㎝의 커다란 봉선사 동종은 음통은 없지만 두 마리 용이 고리 구실을 하는 전형적인 한국 범종의 모습이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절터에 동종 하나 덩그러이 놓여진 사진은 국난과 함께 한 봉선사를 상징하였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탓에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전각인 삼성각은 1926년 월초 스님이 건립한 것으로 현재 봉선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셈이다. 이곳의 독성도와 칠성도는 2011년 경기도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1902년에 건립된 흥인지문 밖 원흥사가 폐지되고 창신공립보통학교가 되면서 월초 스님이 봉선사로 옮겨온 것이다.
봉선사에는 범종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비로자나 삼신괘불도가 있다. 1735년(영조 11) 상궁 이성애(李性愛)가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1669~1735)의 명복을 빌며 제작한 괘불이다. 밝고 화사한 색채와 굵고 대담한 묵선으로 묘사된 인물들의 움직임과 옷자락의 자연스러움은 왕실발원 불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보물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보물이 봉선사에는 있다. 그것은 올곧은 정진과 교학의 가풍이다.
◇봉선사의 가풍을 만들 사람들
봉선사 가풍을 만든 이는 조선 말기 이래 봉선사를 대표하는 홍월초(洪月初, 1858~1934) 스님을 꼽을 수 있다. 근대불교사에서 가장 모범적인 승려의 삶을 살았다 할 수 있다. 남·북한총섭을 역임하였고, 불교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명진학교(明進學校)의 설립자였다. 전통 조선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새롭게 부는 일본불교의 바람을 맞으며 불교의 발전을 모색했던 인물이었다. 월초스님의 업적 가운데 특기할 것은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 1927)’의 편찬을 꼽을 수 있다.
본사 봉선사를 비롯하여 회암사·흥국사·불암사 등 24개 사찰의 사지였다. 당시 봉선사 강사였던 안진호(安震湖 1880~1965)에게 명하여 편찬케 하였다. 이후 안진호는 많은 사지를 편찬하였다. ‘봉선본말사지’는 이듬해 만해 한용운의 ‘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事蹟 1928)’으로 이어졌다. 6.25전쟁으로 봉선사와 강원도 건봉사가 불타고 난 뒤 이들의 사지 편찬은 역사적 혜명으로 일컬을 만큼 위대한 업적이 되었다. 또한 1934년 월초 스님은 열반하기 직전 자신의 소유토지 2만6천여 평을 모두 봉선사에 기증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봉선사에 홍법강원(弘法講院)이 설립되었고, 손상좌 운허 스님이 그 뒤를 이어 봉선사를 이끌었다.
◇월초 스님의 또 다른 손상좌로 운암 김성숙(金星淑, 1898~1969)이 있다.
대학시절 가장 감명 깊게 있은 책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김산의 일대기를 쓴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었다. 본명이 장지락(1905~1938)으로 알려진 파란만장한 김산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 김충창이었다. 김충창은 김성숙의 다른 이름이다. 성숙이라는 법명을 스승 홍월초가 주었다. 그렇게 봉선사는 홍월초, 이운허, 김성숙으로 이어지는 독립운동 정신과 교학의 가풍을 이어왔다.
특히 역경원장을 역임한 운허 스님은 대장경의 한글 번역을 봉선사에서 이끌었고, 그 원력을 이어 받은 제자 월운(月運) 스님은 1965~2002년까지 37년에 걸쳐 해인사 소장 고려대장경을 총 318권의 한글대장경으로 완간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렇게 봉선사는 역경사업을 통한 불교대중화와 서당운영을 통해 젊은 인재들을 배출하며 교학불교에 뛰어난 봉선사의 전통을 만들어 가고 있다. 또한 승려들의 보편적 복지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등 불교의 현대화에도 모범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광릉의 봉선사는 광릉숲과 더불어 더욱 빛나는 가풍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소연지
봉선사 미륵불
공양간인
육화당
공양간인
육화당
봉선사 느티나무
유래
봉선사 느티나무
카페인 봉향당
봉선사 느티나무
봉선사 청풍루
봉선사 범종각
봉선사 범종각
높이 238㎝, 입지름 168㎝의
큰 동종(銅鐘)으로
대한민국의 보물 제397호(1963년 9월 2일 지정)인
봉선사 동종
남양주 봉선사 동종(南陽州 奉先寺 銅鍾)
대한민국의 보물 제397호(1963년 9월 2일 지정)
수량 1구
시대 조선시대
관리 봉선사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5 봉선사
좌표 북위 37° 44′ 47″ 동경 127° 11′ 00″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남양주 봉선사 동종(楊州 奉先寺 銅鍾)은 조선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봉선사를 다시 지을 때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한반도에 많이 남아있지 않은 조선 초기의 동종으로, 1963년 9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었다.
남양주 봉선사 동종(南陽州 奉先寺 銅鍾)은 왕실의 발원으로 만들어진 조선전기 대형 범종의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예종원년(1469)년에 제작되었다. 높이 238cm, 입지름 168cm, 두께 23cm로 꼭대기에는 용통이 없고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지고 종의 고리 구실을 하는 전형적인 조선종의 모습이다. 종의 어깨에는 이중의 가로줄을 돌려 몸통 부분과 구분 짓고 있으며, 종 가운데는 굵고 가는 3중의 가로줄을 그어 몸통 부분을 상·하로 나누고 있다.
줄 윗부분에는 사각형의 연곽과 보살입상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가로 줄 아랫부분에는 강희맹이 짓고 정난종이 글씨를 쓴 장문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는 종을 만들게 된 연유와 만드는데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어서, 국가적인 감독으로 이루어진 범종임을 알 수 있다. 또 종의 입구 위쪽으로 넓은 띠가 있는데 그 안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파도 치는 모양이 사실적으로 잘 표현되었다.
고려시대에 비해 종 입구가 넓어진 형태나 몸통에 있는 가로 띠와 보살입상 그리고 육자광명진언(六字光明眞言)이라는 조선시대 종의 새로운 요소가 등장한 점에서 조선시대 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397호(1963년 9월 2일 지정)인
봉선사 동종에 관한
안내문
대의왕전
봉선사 청풍루의 뒷 모습
봉선사 큰법당과
비로자나 삼신 괘불도에 관한
안내문
봉선사 큰법당과 그 앞의 석탑
봉선사(奉先寺)
봉선사는 크낙새와 수목원으로 널리 알려진 광릉에서 아주 가깝다. 광릉 매표소에서 광릉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전나무 숲길 따라 남동쪽으로 1.5km쯤 내려가면 수십 채의 식당이 영업 중인 동네가 나타난다. 여기서 오른쪽 길로 300m 가량 들어간 곳에 봉선사가 있다. 봉선사의 역사는 고려 시대부터 시작된다. 원래 봉선사 자리에는 고려 광종 20년(969년) 법인 국사가 창건한 운악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여러 차례 난리를 겪으며 폐허가 된 것을 1469년(조선왕조 8대 임금 예종 원년) 정희왕후 윤 씨(7대 세조의 왕비)가 세조의 영혼을 봉안코자 다시 일으켜 세운 뒤 봉선사라 개칭했다.
이후 봉선사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소실과 중건을 7차례 했다. 절에서 100m 떨어진 곳에 큰 비석 여러 개가 눈길을 끈다. 그중 하나가 춘원 이광수 선생 기념비다. 그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기 전 4년 동안 남양주 사능 부근 작은 집에서 산 적이 있는데 그때 한 해 겨울을 봉선사에서 지낸 인연이 있다. 당시 주지 스님이 운허라 그런 인연을 맺은 것이다. 기념비 정면에는 한글로 ‘춘원이광수기념비’라고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주요한의 글이 서예가 원곡 김기승의 글씨로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좌우 측면에는 이광수가 남긴 글들이 김기승의 글씨로 음각되어 있다. 기념비의 제막식은 1976년 5월 29일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의 봉선사 구내에서 개최되었다.
봉선사에 가면 가장 먼저 찾아볼 것이 대웅전 처마 밑에 걸린 현판이다.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큰 법당이라고 한글로 쓴 것이 이채롭다. 1970년 운허 선사(춘원 이광수 팔촌 동생)가 대웅전을 세우면서 써서 달았다. 또한, 경내에 봉선사 대종(보물)이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 만든 동종 중에서 몇 개 남지 않은 것으로 예종 원년(1469)에 왕실의 명령에 따라 만들었다. 조선왕조 전기 동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봉선사는 가수 유현상이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 장소로도 유명하며 가왕 조용필 역시 첫 번째 결혼식을 올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큰법당의 내부 모습
1926년 월초 스님이 건립한 것으로
현재 봉선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삼성각
삼성각의
내부 모습
개건당
조사전
지장전
지장전의
내부 모습
다경실
템플 스테이 공간
주지 스님 처소인
판사 관무헌
운허당
다시 돌아온
청풍루
다시 돌아온
소연지
소연지 옆의 불상
대연지 옆의 해치
대연지 옆의 산신상
대연지 옆의 불탑
대연지 옆의 불상
대연지 옆의 다른 불상
대연지의 연꽃들
대연지의 연꽃
대연지
대연지 주변의
노랑 창포
대연지 주변의 왜가리
다시 돌아온
운악산 봉선사 산문
2024년05월23일(목요일) [남양주시 (광릉&봉선사) & 포천시 국립수목원] 탐방기 탐방지 : 남양주시 (광릉&봉선사) & 포천시 국립수목원 탐방코스: [포천 국립수목원 버스 정류장~(0.2km)~포천 국립수목원 방문자센터~포천 국립수목원 탐방(국립수목원 안에서의 탐방 거리 : 약 6km)~포천 국립수목원 방문자센터~(0.9km)~광릉 매표소~광릉 탐방(광릉 안에서의 탐방 거리 : 약 1.7km)~광릉 매표소~(2.0km)~봉선사 일주문~봉선사 탐방(봉선사 경내 탐방 거리 : 약 1.6km)~봉선사 일주문~(0.1km)~봉선사 입구 버스 정류장] (총 탐방거리 : 12.5km) 탐방일 : 2024년 05월 23일(목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남양주시 진접읍 최저기온 14도C, 최고기온 28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5시간31분 소요) 07:13~08:31 연신내역에서 3호선을 타고 충무로역으로 가서 4호선으로 환승하여 진접역으로 간 후 진접역 1번 출구로 나옴 [1시간18분 소요] 08:31~08:33 신도브래뉴아파트.진접역 정류장까지 도보로 이동 [4분, 199m 이동] 08:33~09:00 신도브래뉴아파트.진접역 정류장 근방에 있는 GS25 진접예당점에서 인스턴트 우동으로 간식 09:00~09:28 진접신도브래뉴아파트 맞은편에 있는 신도브래뉴아파트.진접역 정류장에서 포천 국립수목원 정류장으로 가는 21번 버스 승차 대기 09:28~09:55 21번 버스를 타고 신도브래뉴아파트.진접역 정류장에서 포천 국립수목원 정류장으로 이동 [27분, 22개 정류장 이동] 09:55~09:57 포천 국립수목원 버스 정류장에서 탐방 출발하여 경기 포천시 소흘읍 직동리 산 50 번지에 있는 포천 국립수목원 방문자센터까지 도보로 이동 [2분, 155m 이동] [꽃, 너의 이름 부르러 국립수목원으로 간다 [김선미의 시크릿 가든] 동아일보 기사 업데이트 : 2024년 5월 4일 01시 40분 김선미 기자 콘텐츠기획본부 햇빛에 반짝이는 나무 잎사귀들이 초록의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 낸다. 눈이 시원해지니 허파까지 상쾌해진다. 얼마 전까지 노란색 황매화와 분홍색 진달래가 기세를 뽐냈다면 오월의 꽃은 흰색이 대세다. 은근한 자태가 보고 있어도 그리운 가침박달, 청순한 병아리꽃나무, 흰양귀비…. 큰줄흰나비는 순백의 민백미꽃이나 미나리냉이 위에 내려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이번 주말 가족 나들이를 계획한다면 경기 포천 국립수목원을 추천하고 싶다. 오월의 신록이 아름다운 곳, 우리나라의 대표적 희귀 야생난초인 광릉요강꽃이 지금 만개한 곳, 지나온 날들을 나무들이 말해주는 곳, 그래서 지속 가능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곳, 바로 국립수목원이다. ● 희귀한 광릉요강꽃과 복주머니란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봉선사천(川)을 가로지르는 수목원교(橋)를 건넌다. 초록색 하트 잎을 품은 계수나무가 반긴다. 수목원 여행의 시작이다. 가만 보니 대형 렌즈를 끼운 카메라를 든 관람객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광릉요강꽃과 복주머니란이 꽃을 피운 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1990년대 박신양 최진실 주연 영화 ‘편지’를 봤던 독자라면 기억할 것이다. 수목원 연구사인 남자 주인공이 여자 친구를 새벽에 전화로 깨워 수목원으로 데려간 장면을. 남자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오늘 아침 귀한 꽃이 피어났다고, 그 꽃을 자신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고…. 여자가 꽃 이름을 묻자 남자는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개불알꽃요.” 당시 영화 주요 촬영지가 국립수목원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관람객들은 이 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찾아온다. 개불알꽃은 가운데가 길게 늘어지는 꽃잎 모양을 보고 민간에서 익살스럽게 불렀던 이름이다. 하지만 국가수목유전자원목록위원회는 입에 올리기 민망했던 이 꽃의 이름 대신 ‘복주머니란’을 선택해 2007년 펴낸 국가표준식물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고로 개불알꽃은 이제 복주머니란으로 불러야 한다. 복주머니란속(屬) 식물은 세계적으로 멸종 위험에 처해 있다. 한국에는 복주머니란, 털복주머니란, 광릉요강꽃 등 이렇게 3개 종(種)이 자생한다. 특히 광릉요강꽃은 동아시아에만 분포하는 희귀식물로 국내에서도 경기, 강원, 전북 등에서 매우 제한적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1931년 광릉숲 죽엽산 자락에서 처음 발견됐다. 입술 모양 꽃잎이 요강처럼 생겼다고 해서 광릉요강꽃으로 불린다. 서양 이름은 ‘Korean lady’s slipper’(한국 숙녀의 슬리퍼). 무분별하게 채취돼 자생지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이 희귀식물을 국립수목원이 2021년 세계 최초로 기내(시험관이나 배양기 안) 종자 발아에 성공했다. 대량 증식의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많은 이들이 광릉요강꽃과 복주머니란(개불알꽃)이 같은 꽃인 줄로 잘못 알고 있다. 하지만 둘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 복주머니란은 분홍빛을 띠고 통통한 형태인 데 비해 광릉요강꽃은 중앙의 붉은 부분을 미색 꽃잎이 갸름하게 감싼다. 특히 광릉요강꽃은 잎이 360도 퍼지는 여성의 풀(full) 스커트 형태라 ‘치마난초’로도 불린다. 치마를 확 펼쳐 춤 추는 무용수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동양적 느낌이 물씬 난다. 국립수목원 희귀특산식물보존원 부근 나무 장벽 구역에서는 광릉요강꽃과 복주머니란을, 약용식물원 가는 방면 복주머니란속 전시원에서는 교잡종인 ‘얼치기복주머니란’을 볼 수 있다. 빛이 들 때마다 카메라 셔터들이 찰칵찰칵. 이번 주말을 넘기지 않고 방문하면 좋겠다. 지금 놓치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한다. ● 수목원에서 생각하는 과거와 미래 국립수목원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국가가 운영하는 수목원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1984년 조성공사를 시작해 1987년 문을 열었다. 조선 세조 능(陵)인 광릉의 부속림이어서 500년 넘게 잘 관리된 땅에 전국 임업시험장에서 가져온 나무들을 심었다. 수목원 명칭은 처음 광릉수목원에서 1999년 국립수목원으로 바뀌었다. 개원 당시 수목원 입구에 세웠던 ‘광릉수목원’ 표석은 수목원 산림박물관 앞으로 옮겨졌다. 전시 공간이 102ha 규모인 국립수목원에는 7개 테마 숲길이 총연장 20km에 걸쳐 조성돼 있다. 숲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숲생태관찰로(길이 460m)를 걸은 뒤 커피 한 잔을 즐기며 육림호를 바라보는 코스가 가장 사랑받는다. 호숫가 벤치에 앉아 새 소리를 들으며 ‘물멍’(물을 멍하니 바라보기)을 하면 감각은 열리고 마음은 내려놓게 된다. 어른 팔 만한 물고기들도 보인다. 40여 년 전 경기 청평 내수면연구소에서 기르던 물고기 5000여 마리를 옮겨왔는데 그중 잉어와 비단잉어가 살아남았다고 한다. 물, 나무, 산, 숲이 어우러지는 육림호는 국립수목원 대표 명소다. 특히 봄에는 물가에 핀 연분홍 철쭉이 청순한 경관을 이룬다. 그런데 산철쭉과 철쭉도 사람들이 자주 이름을 틀리게 부르는 예다. 흔히 철쭉으로 불리는 진분홍 꽃 이름은 산철쭉이고, 물철쭉으로 잘못 불리는 연분홍 꽃 이름은 철쭉(연달래)이다. 사랑은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아닐까. 이젠 철쭉을 철쭉으로 불러야 한다. 국립수목원은 역대 대통령 기념 식수들이 자리 잡고 있어 ‘국가대표’ 수목원의 차별점을 보여준다. 대대로 심은 전나무 숲길도 유명하다. 국토 녹화와 임업 발전에 공을 세운 인물들을 헌정한 ‘숲의 명예전당’도 들러 보면 좋겠다. 세계적 육종학자 고 현신규 박사, 임업에 열정을 지녔던 고 최종현 SK 창업회장을 비롯해 8명이 헌정돼 있다. 개원 25주년을 맞은 국립수목원은 어린이날을 맞아 ‘알숲놀숲’이라는 산림 새싹 키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알파 친구들아, 숲에서 놀자, 놀면서 숲을 즐기자’라는 뜻으로 식물학자와 정원사 같이 수목원을 둘러싼 다양한 직업군을 아이들이 체험하도록 준비했다. 미래 세대가 디지털 기기를 잠시 내려놓고 숲과 친해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 국립수목원 속 나만의 시크릿가든 국립수목원은 25개 전문 전시원에 식물 4854종(19만9212본)이 심어져 있다. 광릉요강꽃 같은 희귀식물 23종, 장수하늘소를 비롯한 천연기념물 20종이 산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꽃’에서). 드넓은 국립수목원에서는 누구든 ‘나만의 식물’ ‘나만의 시크릿가든’을 삼을 수 있다. 누군가는 봄을 일찍 알리는 풍년화에, 누군가는 바람에 쓰러지고도 새잎을 돋아내는 휴게 광장의 121세 오리나무에 마음이 끌릴 것이다. 누군가는 키 작은 나무언덕에 올라 헝클어진 마음을 정돈할 것이다. 기자는 우리 자생식물의 검박한 아름다움에 빠져 있다. 그래서 국립수목원 희귀특산식물보존원이 나만의 시크릿가든이다. 보존원 울릉도본원에는 만병초가 피어 있다. ‘만 가지 병을 치유하는 풀’이라고 했던가. 정자(퍼걸러)에 올라 울릉도 희귀특산식물 두메부추와 섬시호 등을 바라본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고 했던 풀. 오월 국립수목원은 삶의 의지를 일깨운다.] [국립수목원 산림박물관(國立樹木園 山林博物館) 경기도 포천시 소흘면 광릉수목원로(직동리) 국립수목원 내에 있는 산림박물관. 산림과 임업에 관한 자료의 수집과 보존, 전시, 산림에 대한 홍보와 현장 교육을 목적으로 1987년 4월 5일에 개관하였으며, 우리 산림자원을 배우고 그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박물관 총 면적은 4,268㎡로, 건물 외부는 우리나라에서 많이 분포하는 화강암을 사용하였고, 내부는 모두 국산 잣나무와 낙엽송을 사용하였다. 또한 산림박물관 외부 전면 벽은 백제시대 벽화인 산수문전을 현대감각으로 디자인하여 음각한 돌 벽화로서 산, 나무, 물, 바위, 구름 등 자연의 조화를 표현하고 있다. 산림박물관은 총 2개 층으로 구성되며, 1층은 1개의 상설 전시실과 연구실 그리고 특별전시실이, 2층은 4개의 상설전시실과 시청각실이 위치한다. 이 중 전시실은 주제별로 5개의 전시실로 나뉘며, 각 주제에 따라 박물관에 소장된 산림관련 유물 8,000종 11,000여 점 중 1,6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제1전시실은 “살아 있는 숲”을 주제로 하고 있다. 전시실 중앙의 느티나무는 안동 임하댐 수몰 지구에서 옮겨온 나무로서 자연환경을 상징하며, 느티나무 아래 8개 영상모니터를 설치하여 숲의 생태계 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전시실 좌측에는 소나무과 대표수종 5종 및 우리나라 주요 조림수종 21종이 전시되어 있다. 아울러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 모형과 더불어 꽃누르미(압화)가 품종 별로 전시되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난간 좌우에는 국내외 목재판재 재감이 전시되어 있어 서로를 비교 관찰할 수 있다. 제2전시실은 산림문화관으로서 “산림과 인간”을 주제로 하고 있다. 산림의 발달 및 인간의 산림자원 활용 변천을 알 수 있도록 “산림의 역사”와 “목재의 가공과 이용”이라는 2개의 작은 주제로 전시공간을 구성하였다. “산림의 역사”는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나무, 숲, 숲의 관리 등의 산림역사에 관한 자료를 각 시대별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목재의 가공과 이용”에서는 목재의 성질, 특성, 가공에 대해 표본샘플 등을 전시하여 누구나 쉽게 목재를 이해할 수 있게 하였고 우리 선조들의 벌채, 운반, 가공, 이용 등 숲으로부터 나오는 목재, 임산부산물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전통 목가구와 현악기의 제작에 관한 영상물과 1/3로 축소된 전통한옥을 통해 조선시대 선조들의 생활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제3전시실은 ‘다면영상관’인데, 생명의 다양성과 산림의 중요성, 생물보전의 중요성 등의 내용이 담겨 있는 ‘광릉숲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다. 제4전시실은 ‘산림생명관’으로서 다양한 주제로 산림을 전시하고 있다. “인간과 식물의 진화”에서는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의 식물화석이 전시되어 있다. “생태숲 디오라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참나무림을 디오라마로 표현된 전시코너로 이곳에는 짐승과 조류들이 함께 설치되어 있다. “인간과 식물”, “인간과 곤충”, “인간과 버섯”에서는 약용으로 쓰이는 식물 등 자원으로서의 이용되는 식물과 곤충을 전시하고 있다. “위협받는 지구”, “국제협력을 통한 다양한 위협에 대한 방지노력” 코너를 통해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감소, 사막화로 인한 3대 지구환경 위기에 대해 실제사례와 3대 지구환경 위기를 타파할 국제협력과 산림청의 국제적인 노력이 설명되어 있다. “광릉숲 코너”는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등재된 540년 이상 잘 보존되어온 광릉숲의 역사, 광릉숲의 현재 모습이 디오라마와 상호작용식 검색시스템을 통해 재미있게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제5전시실은 ‘만남의 장소’로 봄·여름·가을·겨울 등 철 따라 피는 아름다운 야생화 및 식물사진과 함께 “틀린그림 맞추기” 등 누구나 재미있게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 밖에도 옛날의 기중기인 녹로와 30여 종의 지역별 암석표본, 절구 등이 전시되어 자연과 산림에 관한 훌륭한 학습관·홍보관의 구실을 다하고 있다.] [국립수목원 개원 25주년 맞아...용을 통한 산림문화 재조명 기자명 이미숙 기자 한국강사신문 기사 입력 : 2024.05.04. 21:00 [한국강사신문 이미숙 기자] 산림청 국립수목원(원장 임영석)은 5월 3일부터 6월 16일까지 갑진년甲辰年 청룡의 해이자 국립수목원 개원 25주년을 맞아 기획전시《푸릇푸릇 신비 숲 용을 찾아서》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예부터 우리 삶 속에서 상서로운 동물로 함께 해온 ‘용’을 통해 유무형의 산림문화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고 그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전시는 550년 광릉숲을 휘감고 있는 용을 표현한 포토존을 시작으로 ▲숲속 신비의 용(龍)(우리나라 산(숲), 산림생물에 얽힌 용과 관련된 이야기), ▲아홉 가지 모습의 용(우리가 몰랐던 용의 모습 바로 알기), ▲옛 사람들의 생활 속 용(유물 속 다양한 용의 상징성과 의미), ▲탐구해용(용에 관한 국가산림문화자산, 지도, 영상, 그림책으로 만나는 이야기) 등 총 8개 영역으로 구성되어 진행된다. 아울러 전시회를 찾은 모든 관람객을 위해 ▲찾아 보아용, ▲상상해용, ▲승천해용 등 여러 공간에서 스스로 해보며 산림문화자산에 대한 흥미와 관심도를 높일 수 있는 체험 및 놀이 활동이 함께 구성되었다. 특별전시 연계 교육프로그램은 전시회 기간 주말(토&일요일)에 수목원을 찾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진행되며, 교육프로그램 참여는 산림박물관 현장 신청을 통해 최대 8인, 일 2회(오전 10:30, 오후 2:00, 약 90분 소요) 운영한다. 임영석 국립수목원장은 “앞으로 산림문화에 대한 국민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어낼 수 있도록 지켜야 할 산림문화자산과 연계한 특색 있는 전시 콘텐츠를 지속해서 선보일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최태원표 ‘ESG 경영’ 산실…“선대 회장 꿈 꽃 피웠죠” 대한경제 기사입력 : 2022-06-16 06:51:16 글 : 이종무기자 ‘SK그룹 창업의 효시’ 충주 인등산 가보니 故 최종현 회장, 조림 사업 앞장 한국 전쟁 후 황량했던 인등산 50년 후 울창한 숲으로 탈바꿈 SK 수펙스센터 내 디지털 전시관 그린 포레스트 파빌리온 문 열어 넷 제로 경영ㆍ실천 방안 가속화 [e대한경제=이종무 기자] 한국 전쟁 후 격랑의 시간을 보낸 아이들이 그린 한반도의 산하는 온통 황톳빛이었다. 산은 푸르다는 생각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모두가 고개를 저을 때 故 최종현 SK그룹 선대 회장은 숲을 통해 미래를 내다봤다. 이익도 나지 않는 조림 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시작하면서다. 1972년 최 회장이 손수 나무를 식재한 충주 인등산은 50년이 흐른 지금 푸른 빛의 울창한 숲으로 탈바꿈했고, SK그룹이 최근 속도를 높이고 있는 ESG(환경ㆍ사회ㆍ지배구조) 경영의 씨앗이 됐다. 지난 15일 찾은 인등산은 이날 추적추적 내린 비로 녹음이 더욱 우거져 있었다. SK는 최근 이곳 SK 수펙스센터에 전시관 ‘그린 포레스트 파빌리온’을 열었다. 오는 2030년까지 추진하기로 한 넷 제로(탄소 중립ㆍ배출 탄소량과 제거 탄소량을 더했을 때 순배출량이 제로(0)가 되는 시점) 경영 계획과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디지털화한 곳이다. SK는 지난해 글로벌 탄소 중립 목표 시점(2050년)을 조기에 달성하자고 결의했다. 2030년 기준 전 세계 탄소 감축 목표량(210억t)의 1%(약 2억t)를 줄여 넷 제로 경영에 속도를 높인다는 계획이다. 전시관은 흡사 인등산에 심은 자작나무 숲을 그대로 옮겨온 것처럼 느껴졌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상징하는 ‘생명의 나무’를 중심으로 SK의 ‘9개 넷 제로 여정’이 담긴 키오스크가 설치됐다. 키오스크에 스마트폰을 갖다 대자 SK가 구축한 9개 분야의 친환경 생태계와 탄소 절감 효과를 AR(증강 현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인등산은 SK그룹 창업의 효시로 평가된다. 사람을 키우듯 나무를 길러 거대한 숲을 이루고, 숲을 가꾸듯 미래를 가꿔가자 했던 선대 회장의 인재 양성과 사회공헌에 대한 의지가 담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 회장은 일제 수탈과 한국전쟁에 이어 1970년대 산업 개발 명목 아래 무분별한 벌목으로 민둥산이 돼버린 국토를 안타깝게 여겼다. 눈앞의 이익에만 매몰되던 시기에 4500ha(핵타르) 규모의 황무지를 사들이며 국내 최초로 기업형 조림 사업에 착수했다. 그는 충주 인등산을 시작으로 수도권에서 거리가 먼 충남 천안 광덕산, 충북 영동 시항산 등 임지를 매입해 나무를 심었다. 당시 임야 매입을 부동산 투자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던 탓이다. 최 회장은 조림 사업에 대한 진정성과 집념으로 항간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이러한 노력에 50년 전 민둥산은 현재 400만그루, 서울 남산의 약 40배 크기의 울창한 숲으로 변모했다. 조림 사업으로 발생한 수익금도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우수 인재를 양성하는 장학금으로 사용했다. 1973년 장학 퀴즈와 1974년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한국고등교육재단이 대표적이다. 인등산은 현재 SK가 강력하게 추진 중인 ESG 경영의 ‘심장’으로도 인식된다. 환경을 보전하고 인재를 양성해 사회에 기여했다는 측면에서다. 선대 회장의 먼 미래를 내다본 기업가적 안목과 국가관이 대를 이어 최태원 SK그룹 회장으로 내려오며 오늘날의 ESG 경영으로 진화해오고 있다는 평가다. 최 회장도 인등산을 종종 찾아 ESG 경영의 의지를 다졌다는 게 SK 관계자의 설명이다. 최 회장은 2012년 SK임업을 지주회사인 SK㈜에 편입하고 탄소 배출권 확보와 글로벌 조림 사업을 시행하는 등 글로벌 기업으로 변신시켰다. 2018년 산림청에서 연간 약 1조 300억원의 공익적 가치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재까지 SK임업이 조림한 숲 전체의 이산화탄소 흡수량은 약 4만t으로 분석된다. 자동차 1만 5400대가 내뿜는 탄소를 빨아들일 수 있는 규모다. SK는 또 탄소 중립 사업을 통해 향후 30년간 매년 4만 3000t의 탄소가 흡수될 것으로 내다봤다. SK그룹 관계자는 “ESG 경영 출발점이 된 인등산에서 넷 제로 경영에 대한 굳은 의지를 다지고 있다”며 “그룹의 탄소 중립 경영을 더욱 가속하는 계기로 삼겠다”고 말했다.] ["산림자원이 곧 국부의 척도다"…민둥산을 숲으로 바꾼 현신규 한경 기사 입력 : 2016.07.17 19:47 글 : 유하늘 기자] 한국과학창의재단 공동기획 국민이 뽑은 과학자 육종학자 현신규 일제 수탈과 6·25전쟁으로 황폐해진 산을 보며 다짐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기적의 소나무' 품종 등 개발 "산림자원이 곧 국부의 척도다"…민둥산을 숲으로 바꾼 현신규“평생을 나무하고만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나무는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됐고 내가 나무 속에 있는지 나무가 내 속에 있는지조차 모를 느낌이 들 때가 많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임목육종학자 고(故) 현신규 박사(1911~1986)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그는 일본의 수탈과 6·25전쟁을 거치며 황폐해진 조국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이에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리기테다소나무’, 한국 토양에 잘 맞는 포플러나무인 ‘은수원사시나무’를 육종해 산림을 다시 푸르게 하는 데 기여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9년 국토 녹화에 공헌한 현 박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은수원사시나무에 그의 성을 따서 ‘현사시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11년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태어난 현 박사는 철학이나 문학을 전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서울대 농과대학 전신인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입학시켰다. 이후 일본 규슈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에서 연구직으로 일했다. 산림조사에 나갈 때마다 헐벗은 숲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 그는 다시 규슈대 박사과정에 들어갔지만 1945년 전쟁 막바지 한국인으로서 신변에 위협을 느껴 귀국해야 했다. 이후 수원농업전문학교에서 조교수로 교편을 잡으며 연구자료를 정돈해 규슈대로 보냈고, 1949년 한국인 최초로 임업 분야 박사학위를 받았다. 6·25전쟁 중인 1951년, 현 박사는 미국 정부의 한국 재건 계획에 따라 2년간 미국 캘리포니아대 산림유전연구소에 유학했다. 그는 세계 각국에서 온 품종을 교배해 만든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는 모습을 보고 “이것이 내가 귀국해 할 일이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1952년 ‘기적의 소나무’로 불리는 ‘리기테다 소나무’를 개발해냈다.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지만 성장 속도가 느린 리기다소나무와 성장이 빠른 테다소나무를 교배해 장점만을 살린 품종이다. 리기테다 소나무는 1962년 미국 학회지에도 소개됐다. 현 박사는 성장 속도가 빨라 산림녹화에 적합한 품종인 포플러 개량 연구에도 힘썼다. 1953년 유럽산 은백양과 한국의 수원사시나무를 교배해 평지뿐만 아니라 산지에서도 잘 자라는 ‘은수원사시나무’를 만들었다. 그의 노력 덕분에 헐벗었던 산림이 빠른 속도로 녹색으로 물들었다. 1982년 식량농업기구(FAO)는 한국을 “2차 세계대전 이후 산림 복구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라고 평가했다. 현 박사의 제자인 이경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선생님은 산림이 바로 국부의 척도라는 ‘산림부국론’을 거듭 강조하셨다”고 회상했다.] [복주머니란 (Big-flower lady’s slipper) 학명 : Cypripedium macranthum Sw. 생물학적 분류 계 : 식물계(Plantae) 문 : 피자식물문(Angiospermae) 강 : 외떡잎식물강(Monocotyledoneae) 과 : 난초과 크기 : 30~50cm 멸종위기등급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생물 II급, IUCN Red List 위기(EN) 용도 : 관상용 개화시기 : 5월~6월 분포지 : 한국 생육특성 복주머니란은 우리나라 각처의 산지에서 자라는 다년생 초본이다. 생육환경은 숲 속의 반그늘이나 양지쪽의 낙엽수 아래에서 자란다. 키는 30~50㎝가량이고, 잎은 3~4장이 나며 길이는 15~27㎝, 폭은 11~17㎝이다. 꽃은 붉은색 또는 백두산에는 흰색으로 피며 항아리와 같은 모양으로 달리고, 위에는 1개의 잎과 옆에는 2개의 잎이 있다. 열매는 7~8월경에 달린다. 처음에는 “개불알란”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는데, 이는 자생지 근처에 가면 마치 소변냄새와 같은 것이 진동을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로 관상용으로 쓰인다. 번식 및 관리법 번식법 : 7~8월에 결실되는 종자로 번식하지만 종자 발아율이 낮기 때문에 포기나누기로 주로 한다. 최근에는 씨를 조직배양하여 이를 대량으로 번식시키기도 한다. 관리법 : 물 빠짐이 좋은 화단을 이용하고 물을 많이 주게 되면 구근이 썩게 된다. 봄에는 2일에 한 번 정도 관수해 준다.] [털복주머니난(털복주머니란) [Spotted lady’s slipper] 요약 :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강원도 이북의 높은 산지에 분포하며 양지바르고 배수가 좋은 관목림과 풀밭에 무리 지어 자란다. 동유럽, 러시아, 중국, 몽골, 일본, 알래스카, 캐나다 북부에 분포한다. 주머니 모양의 꽃이 피는 복주머니속 중에서 털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남획으로 멸종 위기다. 높이는 30cm 정도며 5~7월에 피는 꽃은 매우 크고 백색 바탕에 홍자색 반점이 있다. 순판은 백색 바탕에 홍자색의 무늬가 있어 다른 복주머니난과 구별된다. 주머니 모양의 꽃이 특징적인 털복주머니난 분류군 식물 학명 : Cypripedium guttatum Sw. 생물학적 분류 문 : 피자식물문(Magnoliophyta) 강 : 백합강(Liliopsida) 목 : 난초목(Orchidales) 과 : 난초과(Orchidaceae) 속 : 복주머니난속(Cypripedium) 지위 :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생물 I급, 한국 적색목록 위급(CR) 목차 서식 특징과 국내 분포도 털이 많은 복주머니난 [글상자 1] 털개불알꽃? 털복주머니란? 털복주머니난? 점박이 무늬의 주머니를 닮은 꽃이 특징 곰팡이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식물 [글상자 2] 털복주머니난이 한국 고유종? 서식 특징과 국내 분포도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생물 II급의 식물로서 동유럽, 러시아, 중국, 몽골, 일본, 알래스카(알류샨열도 포함), 캐나다 북부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원도 이북의 높은 산지에 분포한다. 양지 바르고 배수가 좋은 숲 주변 관목림 및 풀밭에서 무리 지어 서식한다. 꽃은 5~7월에 개화한다. 털이 많은 복주머니난 털복주머니난은 난초과(Orchidaceae)의 복주머니난속(Cypripedium)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 복주머니난 무리 중에서 몸에 털이 많아 털복주머니난으로 불린다. 털개불알꽃, 털주머니꽃, 조선요강꽃, 애기작란화 등으로도 불린다. 복주머니난 무리는 주머니 모양의 크고 아름다운 꽃이 달리는데 관상용으로 가치가 높아 무분별하게 채취하는 사람들 때문에 개체 수가 급속히 줄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번식률이 낮아 우리나라에서는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복주머니난속 식물은 털복주머니난 외에도 복주머니란(C. macranthum), 노랑복주머니란(C. calceolus), 광릉요강꽃(C. japonicum) 등이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 털복주머니난과 광릉요강꽃은 멸종위기 야생생물 I급, 복주머니난은 II급으로 지정되어 있다. [글상자 1] 털개불알꽃? 털복주머니란? 털복주머니난? 복주머니난 종류를 흔히 개불알꽃이라고 부른데, 꽃의 모양이 여름에 축 쳐진 개의 불알과 닮아서다. 1949년 원로 식물학자 정태현(鄭台鉉, 1882~1971) 선생을 주축으로 조선생물학회 펴낸 『조선식물명집』에서 주머니난(C. macranthum)을 ‘개불알꽃’이란 이름으로 처음 발표했다. 학계에서는 우리말 이름도 학명처럼 가장 먼저 발표한 이름을 따른다는 선취권을 관례적으로 인정하고 있어서, 개불알꽃이란 이름이 한동안 널리 쓰였다. 그래서 털복주머니난도 털개불알꽃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화여대 이영노(李永魯, 1920~2008)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이 이름이 저속하다는 이유로 ‘털복주머니란’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바뀐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개불알꽃’이란 이름을 끝까지 고집하시던 서울대학교 이창복(李昌福, 1919~2013) 교수도 유작인 『원색대한식물도감』(2003)에서 ‘털주머니꽃(털개불알꽃)’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개불알꽃이 더 정겹다는 사람들도 있어 어떤 이름으로 부를지 논쟁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난초를 뜻하는 한자인 난(蘭)을 표기할 때 ‘난’ 또는 ‘란’으로 표기하는데, 개정된 한글맞춤법 규정에 따르면 순수한 우리말과 외래어 뒤에는 ‘난’을 붙이고, 한자어 뒤에는 ‘란’을 붙이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영노 교수가 사용하던 ‘털복주머니란’이 아닌 ‘털복주머니난’으로 표기한다. 점박이 무늬의 주머니를 닮은 꽃이 특징 털복주머니난은 높이가 30cm에 이르며 줄기는 곧추선다. 뿌리줄기가 옆으로 벋고 마디에서 뿌리가 내린다. 원줄기는 밑에 2~3장의 초상엽(鞘狀葉, sheathing leaf)이 나며, 그 위에 큰 잎 2장이 줄기를 감싸면서 마주 난다. 잎은 넓은 타원형이며 끝이 뾰족하고 뒷면 맥 위에 털이 있다. 원줄기에 연결되어 잎의 위쪽으로 꽃줄기(花莖, 꽃이 달리는 줄기)가 나오며 1개의 잎 같은 포(苞)가 달리고 그 위에 1개의 꽃이 핀다. 꽃은 5~7월에 피며 지름은 3~5cm로 매우 커서 밑으로 숙여지며, 백색 바탕에 홍자색 반점이 있다. 열매는 삭과(蒴果)로 6~7월에 익는다. 난초과(Orchidaceae) 식물은 꽃이 3장의 내화피조각(內花被片)과 3장의 외화피조각(外花被片)으로 이뤄졌으며, 내화피조각 중에서 양쪽의 두 장은 날개처럼 펼쳐지고 아래쪽의 한 장은 입술 모양의 독특한 형태를 띠는 것이 큰 특징이다. 입술 모양의 이 꽃잎을 입술꽃잎 또는 순판(脣瓣, labellum)이라고 부르는데, 복주머니난속은 순판이 주머니 모양이다. 복주머니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바로 이 순판의 모양에서 비롯했다. 그런데 복주머니난속 식물은 양쪽 옆의 외화피조각이 하나로 합쳐져 외화피조각이 2장처럼 보인다. 합쳐진 외화피조각은 꽃의 아래쪽에 달리고 끝은 두 갈래로 약간 갈라진다. 털복주머니난의 위 외화피조각은 끝이 뾰족한 넓은 난형으로 길이가 2.0~2.5cm이다. 두 장이 합쳐진 아래 외화피조각은 이보다 작다. 털복주머니난의 순판은 백색 바탕에 홍자색의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어 다른 복주머니난속 식물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순판 안쪽의 밑 부분에는 가는 털이 있어 꽃가루를 옮겨주는 곤충들이 꽃에 머무는 동안에 꽃가루를 효과적으로 옮길 수 있도록 진화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 수정된 씨앗의 발아율은 매우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난초과 식물의 씨앗은 매우 작고 배젖이 거의 없는 마른 씨앗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곰팡이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식물 난초과 식물은 뿌리에 특정한 곰팡이가 공생하는데, 이 공생체를 난균근(orchid mycorrhiza)이라고 한다. 난초과 식물의 씨앗에는 싹을 틔울 때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는 배젖이 없고, 대신에 특정한 곰팡이로부터 영양분을 얻어 싹을 틔운다. 곰팡이의 도움으로 자란 난초는 자라서는 곰팡이에게 필요한 환경과 영양분을 제공하면서 공생 관계를 이어간다. 난초와 곰팡이의 공생관계는 서로의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고 절대적이다. 그래서 털복주머니난을 비롯한 많은 난초과 식물은 원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심으면 얼마 못가서 죽는다. 야생란을 함부로 채취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처럼 난과 식물의 경우는 이러한 사실을 널리 알려서 대중들이 스스로 보전에 앞장설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글상자 2] 털복주머니난이 한국 고유종? 털복주머니난은 1800년에 스웨덴 식물학자 올로프 스바르츠(Olof P. Swartz, 1760~1818)가 신종(C. guttatum)으로 처음 발표했으나 1952년에 일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1882~1952)이 우리나라에서 발견한 털복주머니난이 꽃이 황백색 바탕에 자주색 반점이 있어 원종과 차이가 있다고 보아 코레아눔(C. guttatum var. koreanum)이라는 한국 특산의 새로운 변종으로 발표했다. 이후 많은 우리나라의 학자들이 나카이를 따라서 털복주머니난을 우리나라 특산식물로 취급해 왔지만 최근 학계에서는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참고자료 국립생물자원관 (2012) 『한국의 멸종위기 야생동 · 식물 적색자료집(관속식물)』 국립생물자원관 국립생물자원관 (2014) 『한눈에 보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국립생물자원관 이영노 (1996) 『원색 한국식물도감』 교학사 이창복 (1969) 「우리나라의 식물자원」 서울대학교논문집(농생계) 20: 89-228 이창복 (1980) 『대한식물도감』 향문사 이창복 (2003) 『원색 대한식물도감』 향문사 정태현, 도봉섭, 이덕봉, 이휘재 (1937) 『조선식물향명집』 조선박물연구회 정태현, 도봉섭, 심학진 (1949) 『조선식물명집』 조선생물학회 정태현 (1965) 『한국동식물도감, 제5권 식물편(목 · 초본류)』 문교부 Nakai, T. (1932) 『光陵試驗林の一班』 朝鮮總督府 林業試驗場 한국의 멸종위기종(국립생물자원관)] [광릉요강꽃(Korean lady's slipper) : 숲속에서 5월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멸종위기 난초이다. 우리나라 자생식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꽃을 가진 식물로 일컬어질 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여러해살이 난초이다. 곰팡이가 뿌리에 공생하여 난균근을 형성해야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이식과 재배가 매우 어렵다.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등지에 매우 드물게 자라며, 세계적으로는 일본과 중국에 분포한다. 무분별한 채취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멸종위기에 놓여 있고,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의 세계적색목록에도 위기(EN, endangered) 범주에 등재되어 있다. 영문명은 Korean lady's slipper(국립수목원 (2015) 한반도 자생식물 영어이름 목록집, 39)이며, 학명은 Cypripedium japonicum Thunb.이다. 목차 1.분류 2.이름 3.분포 4.형태 5.생태 6.보호 현황 7.인공 증식 및 재배 8.참고문헌 1.분류 난초과(Orchidaceae) 복주머니난속(Cypripedium)에 속한다. 일본 식물을 연구했던 스웨덴 식물학자 툰베르그(C. P. Thunberg)가 1784년에 신종으로 발표하였다. 2.이름 우리나라에서는 1932년 경기도 광릉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현진오 (2010) 사라져가는 우리꽃. 자연과 생태, 46-55) 꽃의 입술꽃잎(순판)이 요강을 닮아서 광릉요강꽃이라 부른다. 주름진 커다란 잎 2장이 마치 치마 모양으로 늘어서므로 치마난초(정태현, 1970)라고도 한다. 입술꽃잎이 복주머니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광릉복주머니란(이영노, 2006)이라는 이름도 있지만 ‘난’이 아니라 ‘란’으로 씀으로써 한글맞춤법에 맞지 않는다. 그 밖에 광능요강꽃(이창복, 1969), 큰복주머니(이영노), 부채잎작란화(북한) 등의 우리말이름이 있다.(이우철 (1996) 우리나라 식물명고 I. 아카데미서적, 1544) 광릉에서 처음 발견되었고, 입술꽃잎이 요강을 닮아서 광릉요강꽃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출처:현진오) 3.분포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일부 지역에 매우 드물게 자란다. 세계적으로 일본과 중국에 분포하는데, 일본에는 홋카이도, 혼슈, 규슈, 시코쿠에 자생한다. 중국에는 간쑤성(Gansu), 구이저우성(Guizhou), 산시성(Shaanxi), 쓰촨성(Sichuan), 안후이성(Anhui), 장시성(Jiangxi), 저장성(Zhejiang), 후난성(Hunan), 후베이성(Hubei) 등지에 분포한다.(Flora of China. retrieved 10. Jan. 2019. from http://www.efloras.org , "Cypripedium japonicum") 4.형태 높이 20-40 cm이다. 땅속을 기는 가는 뿌리줄기가 있다. 줄기는 곧추서고, 겉에 갈색 털이 많다. 잎은 줄기 위쪽에 2장이 붙어서 달리며, 부채꼴로 지름 10-20 cm이다. 잎 양면에 털이 난다. 꽃은 줄기 끝에서 1개씩 달리며, 밑을 향하고, 지름 8 cm쯤이다. 꽃대는 높이 15 cm쯤이며, 털이 많고, 위쪽에 포엽이 1장 있다. 포엽은 난상 피침형으로 길이 2-5 cm, 너비 1-2 cm이다. 꽃자루는 씨방을 포함해서 길이 2-3 cm이고, 털이 많다. 꽃받침잎과 곁꽃잎은 길이 4-5 cm, 너비 1-2 cm, 연한 녹색, 밑쪽에 붉은 반점과 털이 있다. 입술꽃잎은 주머니 모양, 길이 4-5 cm, 너비 3.0-3.5 cm, 흰색 바탕에 붉은 줄무늬가 있다. 열매는 삭과이며, 길이 4-7 cm이다. 5.생태 숲속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꽃은 5월에 피며, 열매는 7-8월에 익지만 결실이 잘 되지 않는다. 씨가 만들어지지 않거나 자손을 퍼뜨리기가 쉽지 않고, 더욱이 씨가 생겼다 하더라도 씨 속에 배젖이 없기 때문에 싹이 잘 트지 않는다. 싹을 틔울 양분인 배젖이 없으므로, 곰팡이와 한 덩어리리가 되어 땅속에서 몇 년 동안 지내다가 뿌리와 싹을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 이처럼 씨가 발아하는 경우는 거의 관찰되지 않는다.(현진오 (2013) 한국의 멸종위기식물 1. 자생지를 고집하는 아름다운 난초. 사이언스 타임즈. retrieved 10. Jan. 2019. from https://www.sciencetimes.co.kr) 씨에 공생하여 난균근(蘭菌根, orchid mycorrhiza)을 형성해야만 비로소 싹을 틔울 뿐만 아니라 긴밀한 공생 관계는 발아 후에도 계속 이어져야 한다. 성체가 되어 광합성을 통해 스스로 양분을 만들 수 있을 때가 되어도 곰팡이와의 공생 관계가 깨지면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죽고 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게 없다. 산속의 자생지에서 집으로 옮겨 심었을 때 몇 년 안에 죽게 되는 원인은 바로 이런 공생 관계가 깨지기 때문이다.(현진오 (2013) 한국의 멸종위기식물 1. 자생지를 고집하는 아름다운 난초. 사이언스 타임즈. retrieved 10. Jan. 2019. from https://www.sciencetimes.co.kr) 6.보호 현황 세계적으로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이 세계적색목록 위기(EN) 범주로 평가한 멸종위협에 놓인 식물이며, 우리나라 환경부는 한국적색목록 위급(CR, critically endangered) 범주로 평가했다. 환경부가 1989년부터 특정야생동식물로 지정해 보호하기 시작했고, 1998년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2005년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I급을 거쳐 2012년부터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I급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국립생물자원관 (2018) 한눈에 보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388-389) 이식할 경우 수 년 내에 죽을 뿐만 아니라 대량 증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종을 보전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생지의 개체들이 더 이상 불법으로 채취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국립공원공단, 금강유역환경청, 국립수목원이 각각 광릉요강꽃 자생지에 보호 펜스를 설치해 인위적인 훼손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있다. 이식이 불가능하고, 증식법도 개발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자생지 개체들을 보호하는 게 최선의 보전법이다. (출처:현진오) 7.인공 증식 및 재배 이식할 경우에는 난균근균과의 공생 관계가 깨져서 대부분 수 년 내에 죽는다.(이우철 (1996) 우리나라 식물명고 I. 아카데미서적, 1544) 이 때문에 이식 재배가 매우 어렵다. 자생지 내에서는 뿌리줄기를 잘라줌으로써 새로운 개체가 더욱 많이 발생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씨를 무균 배양하는 방법 등으로 인공적인 대량 증식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현재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8.참고문헌 1. 국립수목원 (2015) 한반도 자생식물 영어이름 목록집, 39 2. 현진오 (2010) 사라져가는 우리꽃. 자연과 생태, 46-55 3. 이우철 (1996) 우리나라 식물명고 I. 아카데미서적, 1544 4. Flora of China. retrieved 10. Jan. 2019. from http://www.efloras.org , "Cypripedium japonicum" 5. 현진오 (2013) 한국의 멸종위기식물 1. 자생지를 고집하는 아름다운 난초. 사이언스 타임즈. retrieved 10. Jan. 2019. from https://www.sciencetimes.co.kr 6. 국립생물자원관 (2018) 한눈에 보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388-389] [만병초 학명 : Rhododendron brachycarpum 생물학적 분류 계 : 식물계(Plantae) 크기 : 4m 원산지 : 한국 분포지 : 한국, 중국 만병초는 고무나무와 닮았고 꽃이 철쭉과 비슷한데, 천상초(天上草), 뚝갈나무, 만년초, 풍엽, 석암엽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꽃에서 좋은 향기가 나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칠리향(七里香) 또는 향수(香樹)라는 예쁜 이름으로 부른다. 우리나라에는 태백산, 울릉도, 지리산, 설악산, 백두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고산지대에 천연 분포하는데, 대부분 하얀 꽃이 피지만 백두산에는 노란 꽃이 피는 노랑만병초가, 울릉도에는 붉은 꽃이 피는 홍만병초가 있다. 내장산에 많이 분포하는 굴거리나무와 상록성인 것은 같지만 길쭉한 잎이 아래로 처져서 구별되는데 가끔 만병초로 오인받기도 한다. 구하기가 수월하지 않은 것이 흠인데 말 그대로 만병에 효과가 있는 약용수종으로 민간에서는 고혈압, 저혈압, 당뇨병, 신경통, 양기부족 등 쓰이는 곳이 너무 많다. 만병초 잎 5~10개를 물 두 되에 넣고 물이 반으로 줄어들 때까지 끓여서 한번에 소주잔으로 한 잔씩 식후에 먹으면 정신이 맑아지고 피가 깨끗해지며, 정력이 좋아진다. 또한 여성들이 장복하면 불감증을 치료할 수도 있고 특히 습관성이 없기 때문에 오래 복용해도 문제가 없으나 ‘안드로메도톡신’이라는 독성분이 있어서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절대로 안 된다. 백납이라 하여 피부에 흰 반점이 생겨 차츰 번져가는 병이 있는데 여간해서는 치료가 힘들고, 치료된다 해도 치료기간이 2~3년 걸리는 고약한 이 병을 만병초 잎으로 다스릴 수 있다고 한다. 환부에 침을 빽빽하게 찌른 다음 만병초 달인 물을 면봉에 적셔서 하루에 3~4회 발라 주면, 2~3개월이면 심한 백납도 대부분 없어진다고 한다. 그 외 말기 암 환자들의 통증을 크게 덜어 주며, 무좀, 습진같은 피부병 치료에도 효험이 있고 진딧물 같은 농작물 해충을 없애는 천연농약으로도 쓸 수 있다. 내음성이 강해서 다른 나무 밑에서도 잘 견디는데, 공중 습도가 높은 곳을 좋아하여 집에서 기르려면 분무기로 잎을 자주 씻어 주는 것이 좋다. 9월경에 열매가 갈색으로 익는데 열매에 들어 있는 종자가 워낙 작아서 이끼 위에 파종해서 옮겨 심는다. 비록 다 자라도 키가 4m밖에 안 되는 작은 관목이지만 이름에 걸맞게 여러 가지 질병 치료에 두루 쓰이는 만병초야말로 우리 생활에 요긴한 약용수종이라고 할 수 있다.] [두메부추 과명 : 백합과(Liliaceae) 학명 : Allium senescens L. 지방명 : 두메달래, 설병파 한약명 : 산구(山韭) 서식처 : 숲속 분포 : 한국(북부), 만주, 아무르, 우수리, 몽골,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유럽 두메부추(Allium senescens)는 백합과 초본풀로 깊은 산골이나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곳에 자라난다 하여 두메부추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두메부추는 산구(山韭) 또는 메부추라고도 불린다. 말 그대로 두메산골에서 자라는 두메부추는 속씨식물 외떡잎식물이며, 길이가 20에서 30cm 미터까지 자라며 비늘줄기이다. 이 줄기는 얇고 잎사귀는 뿌리에서 나오며 잎의 길이는 20에서 30cm, 나비 2에서 9mm이다. 꽃은 연한 홍자색으로 열매는 9월에서 10월에 열린다. 이 열매는 여러 개의 씨방으로 된 열매인데, 열매가 익으면 과피가 말라서 쪼개진다. 분포 지역 두메부추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도, 함경북도 백두산, 관모봉, 중부 이북지방 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자란다. 쓰임새 두메부추의 어린 잎은 식용 가능하며 줄기는 이뇨제 또는 강장제 등의 약제로 쓰인다. 재배 및 관리 배수가 잘 되고 햇빛이 잘 드는 양지에 심는다. 전문적으로 대량 생산할 때는 유기질 비료를 충분히 주고, 필요하다면 복합비료를 추비로 준다. 이른 봄에 직접 씨를 뿌린다. 종자의 수명은 짧으나, 바로 수확한 종자는 발아율이 좋고 이듬해에 바로 꽃을 볼 수 있다. 새로운 뿌리가 계속 나오기 때문에 산파와 달리 포기나누기로 증식하기가 수월하다.] [섬시호 경상북도 울릉군에 서식하고 있는 쌍떡잎식물 층층나무목 산형과의 여러해살이풀. 환경부 멸종위기야생동식물 Ⅱ급에 해당하는 식물로 한때 멸종된 것으로 추정되어 표본만 전해지다가 최근에 자생지가 여러군데에서 발견되었다. 일본인인 나카이(Nakai)가 처음 발견하여 일본의 학회에 보고하였으며, 그 후 계속된 연구를 통하여 우리나라 울릉도에만 살고 있는 특산식물로 밝혀졌다. [형태] 높이 60㎝까지 자라는 여러해살이 식물로 뿌리와 줄기는 굵고 갈라지며 털이 없고, 세로로 능선이 있다. 잎은 표면이 녹색이고 뒷면이 회청색이며, 거의 두 줄로 배열된다. 넓은 달걀모양인 잎은 11맥이 있고, 밑부분이 심장저로 갑자기 좁아지며, 길이 6~13㎝ 정도이다. 아래쪽 잎은 잎자루에 날개가 있고 원줄기를 감싸며 위부분의 잎은 날개가 없다. 꽃은 7~8월에 피고 황색이다. 소화경(小花梗)과 씨방에 털이 없고, 포엽(苞葉)[꽃의 아래에서 봉오리를 싸는 잎]과 소포엽은 난형이며, 각각 5개이다. [생태] 울릉도의 바닷가의 숲속에서 자생하는 식물로 현재 자생지가 많이 파괴되어서 절벽 부근만 남아있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표리의 화해퇴열, 소간해울, 승양 등에 효능이 있으며, 한열왕래, 흉만협통, 목현, 하리탈항, 월경불순, 자궁하수 등을 치료하는데 사용하였다.] [풍년화(豊年花) 쌍떡잎식물 장미목 조록나무과의 낙엽관목 또는 소교목. 학명 : Hamamelis japonica 계 : 식물 문 : 속씨식물 강 : 쌍떡잎식물 목 : 장미목 원산지 : 일본 크기 : 높이 6m 일본 원산이다. 밑에서 줄기가 많이 올라와 큰 포기를 이루며 높이 6m이다. 수피는 회색빛을 띤 갈색으로 매끄럽고 작은가지는 노란빛을 띤 갈색 또는 어두운 갈색이다. 잎은 어긋나고 네모진 원형 또는 달걀을 거꾸로 세운 듯한 모양이며 털이 없다. 또한 잎 끝이 둔하고 밑은 찌그러져서 좌우가 같지 않으며 윗부분에 둔한 톱니가 있다. 잎 표면에 주름이 조금 있고 잎자루에 털이 있다. 꽃은 4월에 잎보다 먼저 피고 노란색이다. 꽃잎은 4개이고 줄 모양 바소꼴이며 길이 2cm 정도로 다소 쭈글쭈글하다. 수술은 4개, 암술은 1개이며 암술대는 2개이다. 열매는 삭과로서 10월에 익는데, 달걀 모양 구형이고 짧은 솜털이 빽빽이 나며 2개로 갈라진다. 종자는 검고 탄력으로 튀어나온다. 만발한 꽃 모양을 풍년같이 보고 지은 이름이다. 중부 이남에서 관상용으로 심고 있다.] 09:57~13:32 포천 국립수목원을 [국립수목원 방문자센터~육림호~습지식물원~침엽수원~전나무 숲~회귀식물 및 특산식물 보전원~백두산(고산) 및 고층 습원~석회암 및 저층 습원~열대식물 전시원~아열대식물 전시원~라일락원~양치식물원~산림박물관~소리정원~난대온실~돌나물과 전시원~비비추원~원추리원~키 작은 나무 언덕~식물 진화 속을 걷는 정원~수생식물원~겨울정원~국립수목원 방문자센터]의 동선으로 탐방 [국립수목원(광릉숲) 위치 : 경기도 포천시 광릉수목원로 415 공지사항 : 개인, 단체 모두 사전예약제(당일 예약 불가) 국립수목원은 광릉시험림의 천연림을 이용하여 수목원을 조성하였다. 수목원 내에는 산림에 관한 모든 자료를 전시한 산림박물관이 있다. 수목원과 박물관 공사는 1985년 10월 25일에 착수하여 1987년 4월 5일 개장하였고, 뒤를 이어 1989년 삼림욕장을 개장하였고, 1991년에는 산림동물원을 개원하여 산림에 대한 대국민 홍보에 지대한 역할을 하여왔다. 그러나 숲의 보존이 무엇보다 큰 문제로 대두되면서 1997년부터 삼림욕장을 폐쇄하였으며, 주말과 공휴일 입장을 제한하고 5일 전 예약제를 도입하여 1일 입장객을 5,000명 이하로 제한하였다. 또한, 식물 자원화를 위한 다양한 식물종의 확보가 세계적인 관심사로 대두되면서,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1999년 5월 24일에는 임업연구원 중부임업시험장 수목원과에서 산림청 수목원으로 신설 개원되었다. 국립수목원은 면적이 1,157㏊이며 침엽수원 관상수원 맹인식물원 등 15개의 전문수목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목의 종류는 목본류 1,660종, 초본류 1,323종 등 총계 2,983종이 있으며 이 중 도입종이 963종이다. 산림박물관은 동양 최대의 규모로서 면적이 1,400평이며 자연에 순응한 한국의 전통 양식으로 설계하고, 내부와 외부를 모두 국산의 목재와 석재로 마감하였다. 수목원 시설은 1전시실(살아있는 숲과 자원식물), 제2전시실(산림과 인간), 제3전시실(세계의 임업), 제4전시실(한국의 임업), 제5전시실(한국의 자연, 싸이버수목원) 표본실, 특별전시실, 시청각실로 구성되어 있다. * 주요 야생화 - 피나물, 벌깨덩굴, 꽃범의 꼬리, 광릉요강꽃 이용안내 개장일 : 1999년 05월 24일 이용시간 4~10월 (하절기) 09:00~18:00 (입장마감 17:00) 11~3월 (동절기) 09:00~17:00 (입장마감 16:00) ※ 사전예약자에 한하여 입장 가능 사전 예약 없이 현장 입장 가능한 경우 : 주차장 이용차량 없이 대중교통ㆍ자전거ㆍ보행으로 입장하는 경우, 예약 없이 현장 입장 가능 (1일 입장인원은 4,500명 이하) ※ 일일 제한인원이 초과될 경우 입장 불가 쉬는날 : 매주 월요일, 월요일, 1월 1일, 설 · 추석 연휴 주차시설 : 주차 가능 (소형기준 최대 250대) 수용인원 : [화~금] 5000명, [토요일 및 개원일과 겹친 공휴일] 3500명 신용카드가능여부 : 가능 애완동물가능여부 : 불가 체험안내 개인신청 프로그램 - 수목원 해설, 숲이오래 키즈아카데미(주말), 산림교육전문가양성 실습 기관신청 프로그램 - 숲이오래 키즈아카데미(5세-7세), 숲이오래 키즈아카데미(8세-9세), 산림생물학교(10-11세), 산림생물학교(12세-13세), 산림생물학교(14세-19세) 전문가용 프로그램 - 교원연수 프로그램 문의및안내 : 031-540-2000 관련 홈페이지 : https://kna.forest.go.kr/kfsweb/kfs/subIdx/Index.do?mn=UKNA 상세정보 주차요금 주차료 (1일 정액제) - 대형 5,000원 / 소형 3,000원 / 경차·저공해자동차 1,500원 / 이륜차 1,000원 ※ 장애인이 탑승한 장애인 등록차량 및 국가유공자증 소지자의 차량은 주차료 무료 화장실 : 있음 이용가능시설 전문전시원 - 어린이정원, 덩굴식물원, 관상수원, 비밀의 뜰, 백합원, 난대식물 온실, 마을정원, 무궁화원, 소리정원, 만병초원, 수생식물원, 식·약용식물원, 침엽수원, 습지식물원, 화목원, 관목원, 작약원, 양치식물원, 약용식물원, 손으로 보는 식물원, 돌나물과 식물보전원, 희귀·특산식물 보존원 수목원 명소 -전나무숲, 육림호, 숲생태관찰로, 산림헌장기념비, 숲의 명예의전당,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등재 기념조형물, 아름다운 숲 선정 기념비, 국토녹화기념탑, 대통령 기념식수 수목원 쉼터 & 기타 시설 - 방문자센터, 육림호 휴게소, 우리나무 알림터 (휴게광장 휴게소), 산림 박물관, 산림동물보전원 입 장 료 어른 1,000원 / 청소년 및 군인(만 13세~만 19세) 700원 / 초등학생(만 7세~만 12세) 500원 ※ 무료 : 만 6세 이하, 만 65세 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 3자녀 이상 가족 등 ※ 단체할인 없음(3자녀 이상 가족은 건강보험증이나 주민등록등본 지참) ※ 무료입장은 증명서(장애인증, 주민등록등본, 건강보험증 등)를 제시한 경우만 가능 ※ 장애등급 제3급 이상인 경우에만 보호자 1인 무료 ※ 3자녀 이상 가족 : 자녀수가 3인 이상 가족으로서 막내자녀가 만12세 이하인 경우 부모 및 동반자녀 무료 내국인 예약안내 ※ 국립수목원은 사전예약한 사람에 한하여 화~금요일 1일 5,000명, 토요일 및 개원일과 겹친 공휴일 1일 3,000명까지 입장 가능하며, 국립수목원 휴원일 (일요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연휴)에는 사전 예약이 불가능 하다. 무료 입장 인원도 반드시 예약 해야하며, 예약 취소는 당일 관람 마감시간전까지 가능하다. 한국어 안내서비스 수목원 해설 - 수목원의 역할을 알리고, 산림생물 전반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고자 이루어지는 해설 프로그램 - 운영기간: 3월~11월 / 화요일 ~ 토요일 - 운영일시 : 하절기(4~10월) 10:00 ~ 17:00 / 동절기(11, 3월) 10:00 ~ 16:00 - 매시 정각 출발 (15~20명 정도의 단체일 경우 수시 출발 가능) 열대식물자원연구센터(열대온실) 해설 -운영기간 : 3월~11월 / 화요일 ~ 토요일, 매 정각 -운영일시 : 하절기(4~10월) - 10시, 11시, 13시, 14시, 15시, 16시, 17시(총7회) / 동절기(11,3월) - 10시, 11시, 13시, 14시, 15시, 16시(총6회) ※ 수목원 자동 안내해설기 대여 (수목원 내 방문자센터에서 대여 가능)] [오백 년 아름드리 광릉숲에서 '초록빛' 산책, 포천 국립수목원 조선시대 조성돼 2010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 지정…산림박물관 관람 후 '걷고 싶은 길' 걷기 비즈한국 기사 등록 : 2023.04.25(화) 16:55:35 글 : 구완회 여행작가 [비즈한국] 누구나 알고 있지만 모두가 가보지는 않은 곳. 경기도 포천의 국립수목원이 그런 곳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단 하나뿐인 ‘국립수목원’이니 좋은 줄이야 누구나 알지만, 인터넷을 통해 사전 예약을 해야 하니 아차 하면 기회를 놓치기 쉽다. 그래도 조금만 신경 쓰고 부지런을 떨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산림박물관에서 우리 나무 예습하기 국립수목원이 자리한 광릉숲은 조선 초부터 지금까지 550여 년 동안이나 잘 보호된 우리나라 산림생태계의 보고다. 광릉숲의 역사는 조선 제7대 국왕인 세조가 묻힌 광릉과 함께 시작한다. 조선왕실에서는 광릉을 중심으로 사방 15리의 숲을 광릉 부속림으로 지정해 조선 말까지 철저하게 보호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산림과 임업 연구를 위한 학술보호림으로 지정되었고, 한국전쟁 때도 피해를 입지 않고 잘 유지되었다. 1987년 광릉수목원으로 만들어진 뒤 1999년 국립수목원으로 격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0년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인터넷 예매에 성공해 국립박물관에 도착했다면 우선 산림박물관부터 둘러보는 것이 좋다. 이곳에서 우리 나무와 숲의 모든 것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이와 함께라면 여기서 미리 예습을 하고 수목원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산림박물관은 5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살아 있는 숲’을 주제로 한 제1전시실 중앙에는 거대한 느티나무 그루터기가 관람객들을 맞는다. 이는 안동 임하댐 수몰지구에서 옮겨온 것으로 나무 아래 8개의 영상 모니터를 통해서 숲의 다양한 생태계를 감상할 수 있다. 제2전시실은 ‘산림과 인간’을 테마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산림 관리의 역사를 시대별로 나누어 전시하며, 제3전시실에서는 산림과 생물보전의 중요성을 다룬 ‘광릉숲 영상물’을 상영한다. 이어지는 제4전시실은 ‘산림생명관’으로 다양한 주제의 산림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이곳의 ‘광릉숲 코너’에서는 550여 년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광릉숲의 역사와 현재 모습을 디오라마 등을 통해 실감나게 볼 수 있다. 마지막 제5전시실에서는 철 따라 피어나는 아름다운 야생화들을 살펴볼 수 있다. #취향 따라 골라 걷는 수목원 숲길 코스 산림박물관에서 풀과 나무 공부를 마쳤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국립수목원을 둘러볼 시간이다. 총 102ha 면적에 330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 국립수목원은 수생식물원, 약용식물원 등 24개의 전문수목원이 조성되어 있다. 하루에 이 모두를 둘러보는 건 불가능하니, 미리 홈페이지나 안내도를 확인해서 관심이 가는 곳 위주로 보는 것이 좋다. 국립수목원을 둘러보는 또 하나의 방법은 수목원 측에서 관람객들의 필요에 맞게 미리 짜놓은 코스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걷고 싶은 길’이란 이름으로 조성된 코스는 모두 7가지. 국립수목원 안에는 ‘힐링 전나무 숲길’을 비롯해 7가지 산책 코스가 ‘걷고 싶은 길’로 조성돼 있다. ‘식물진화 탐구길’은 아이와 함께 온 방문객을 위한 코스다. ‘생물의 최초 발생 장소’를 시작으로 풀과 나무를 구분해보고 ‘식물 진화속을 걷는 정원’을 둘러본다. 연인과 부부에게 추천하는 ‘러빙 연리목길’은 이름처럼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연리목을 지나는 코스다. 평이한 길에 어린이정원과 수생식물원, 포토존 등을 지나니 아이와 함께 걸어도 좋다. 건강을 위한 ‘힐링 전나무 숲길’에는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전나무길과 약용식물원 등이 포함되어 있다. ‘희귀·약용길’은 산림생물 사진 촬영이나 식물 공부를 하고 싶은 방문객을 위한 코스다. 멸종위기종인 광릉요강꽃을 비롯해서 희귀·특산식물보존원과 양치식물원 등을 지나면서 다른 곳에선 보기 힘든 풀과 꽃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국립수목원을 처음 찾은 방문객을 위한 ‘느티나무·박물관길’, 도시락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맛있는 도시락길’, 새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혼자 걷기 좋은 ‘소소한 행복길’ 등이 있다. <여행정보> 국립수목원 △위치: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광릉수목원로 509 △문의: 031-540-2000 △운영시간: 4~10월 09:00~18:00, 11~3월 09:00~17:00, 월요일·1월1일·명절 연휴 휴무 필자 구완회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여성중앙’, ‘프라이데이’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랜덤하우스코리아 여행출판팀장으로 ‘세계를 간다’, ‘100배 즐기기’ 등의 여행 가이드북 시리즈를 총괄했다.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역사와 여행 이야기를 쓰고 있다.] 13:32~13:45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 번지에 있는 광릉 매표소로 이동 [0.9km] 13:45~14:13 조선 제7대 왕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가 묻힌 능인 남양주 광릉(光陵)을 탐방 [남양주 광릉(南楊州 光陵) 조선 제7대 왕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무덤. 1970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광릉수목원로 354 (진접읍, 광릉) 크기 : 면적 1,059,289㎡ 조선 제7대 왕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와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1418∼1483)의 무덤이다. 1970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조선 왕릉 최초로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을 취하였고, 두 능의 중간지역에 하나의 정자각(丁字閣)을 세웠다. 세조의 유언에 따라 봉분 내부에 돌방을 만들지 않고 회격(灰隔;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으로 처리하였다.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이전에 병풍석에 새겼던 12지신상은 난간석에 새겼다. 능역 아래쪽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길인 참도(參道)가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간소하게 능을 조성함으로써 부역인원과 조성비용을 감축하였는데 이는 조선 초기 능제(陵制)에 변혁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고, 이런 상설제도는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능 주위에는 문인석·무인석·상석·망주석·석호(石虎)·석양(石羊)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99-2번지에 위치한다.] [세조(世祖) 조선 최고의 묘호를 쓴 왕 출생 – 사망 : 1417 ~ 1468 “나는 너희들을 강요하지 않겠다. 따르지 않을 자들은 가라.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 죽는다면 사직(社稷)에서 죽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라도 가겠다. 계속 만류하는 자가 있다면 먼저 그부터 목을 베겠다. ([연려실기술] 세조, 정난조) 피의 군주와 치적군주라는 양면성을 가진 수양대군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더 많이 알려진 조선왕조 7대왕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단편적으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어린 조카인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하고 수많은 신하들을 죽인 피의 군주이면서, 부친인 세종의 위업을 계승한 치적군주의 이미지도 아울러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은 1417년(태종 17년) 9월 29일 세종과 세종 비 심씨와의 사이에서 문종에 이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차남이 아닌 장남으로 태어났다면 조선왕조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킨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문(文)에 몰두한 장남 문종,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던 안평대군과 달리 거침없고 욕망이 강한 인물이었다. 세종은 일찍이 병약한 문종과 어린 단종을 보면서 수양대군의 존재를 걱정했다. 원래 수양대군은 진양대군이었다. 수양대군으로 이름을 고친 사람은 부친인 세종이다. 세종이 수양대군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아마도 수양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처럼 절개를 지키라는 의미였을지 모른다. 세종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성왕을 성군으로 만든 주나라의 주공(周公)처럼 되기 바랐지만, 수양대군의 속마음은 달랐다.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다 쿠데타의 최대 희생자인 단종은 1452년 5월 18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39세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문종은 어린아들을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 원로대신에게 부탁했고, 이러한 구도는 당장 수양대군∙안평대군 등 종친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단종 즉위 이후 정국은 수양대군파와 문종의 고명을 받든 황보인·김종서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러한 대결구도는 1453년(단종 1)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 불리는 기습 공격을 앞세운 수양대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수양대군은 무방비 상태의 김종서와 황보인을 철퇴로 격살하였고 문인들의 신망을 받았던 라이벌 안평대군을 강화로 귀양 보내 버렸다. 당시 수양대군의 핵심참모였던 한명회(韓明澮)는 쿠데타에 대비하여 살생부를 작성했는데, 입궐하는 대신들을 향해 죽이라는 신호를 보내면 모조리 죽이는 식이었다. 쿠데타의 명분은 약했고, 어린 단종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영의정 자리에 오른 수양대군은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에, 한확(韓確)을 우의정으로 삼고 군권을 장악하였다. 수양대군은 자신이 세운 공을 주공(周公)에 비유하기 위해 집현전 학사들에게 교서를 작성하게 했다. 집현전 학사들은 모두 도망가고, 유성원(柳誠源)만이 남아 있다가 협박 속에 초안을 작성했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고 다시 아버지마저 잃은 어린 단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인 1455년 윤 6월 11일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형식적으로는 양위였지만, 숙부의 위세에 눌려 왕위를 빼앗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왕의 옥새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이가 성삼문(成三問)이었다. 양위식을 담당한 성삼문이 옥새를 부여안고 대성통곡을 하자 세조가 성삼문을 한참 동안이나 노려보았다고 전한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단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금성대군집에 살게 했다. 말이 좋아 상왕이지 가택연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단종의 거처에는 군사 10명을 거느린 삼군진무 2명을 배치하여 주야로 경계와 감시를 하도록 했다. 불발로 끝난 단종 복위 운동, 그리고 사육신과 생육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재위기간 중에도 수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사건을 비롯하여 금성대군이 주동한 단종 복위운동과 이시애(李施愛)의 난 등 즉위 초반에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난관들은 대체로 그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일어난 것들이었다. 왕위찬탈자라는 명분상의 약점은 언제든지 단종의 복위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특히 집현전 출신의 젊은 학자들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들은 혈기왕성한 유학자들답게 명분을 중히 여겼다. 게다가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정국주도권이 세조의 측근공신들에게 넘어가면서 소외되었다.이런 상황에서 집현전 출신의 젊은 관료들과 단종 및 문종 처가 식구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중심인물은 성삼문과 박팽년이었다. 승정원에 근무했던 성삼문은 나름대로 세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고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1456년 6월 1일에 거사를 이루기로 했다. “성삼문과 박팽년이 말하기를 6월 1일 연회장의 운검(雲劒)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임명되었다. 이날 연회가 시작되면 바로 거사하자. 우선 성문을 닫고 세조와 그 우익들을 죽이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다.”([연려실기술] 단종조 고사본말)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채 이루기도 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던 김질이 단종 복위음모 사실을 누설해 버린 것이다. 세조는 김질과 성삼문을 불러 들였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옛 임금을 복위하려 함이라,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 성삼문이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라.” 인두질에 성삼문은 도모하던 동지들의 이름을 대었다. 이에 따라 성삼문을 비롯한 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김문기 등 이른바 사육신들이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자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지지고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나으리’라 부르며 왕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당했다. 박팽년·유응부·이개는 작형(灼刑:단근질)을 당하였고, 후에 거열형을 당하였다. 하위지는 참살 당하였으며,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이에 앞서 세조는 성삼문과 거사를 도모한 박팽년을 평소 총애하고 있었다. 조용히 사람을 보내 “네가 내게 항복하고 같이 역모를 안 했다고 하면 살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박팽년이 웃고 대답하지 않으며, 세조를 부를 때는 반드시 ‘나으리’라고 하였다. 세조가 화를 내며 그 입을 마구 때리게 하고 말하기를, “네가 이미 신이라 일컬었고 내게서 녹을 먹었으니, 지금 비록 신이라 일컫지 않더라도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박팽년은 “내가 상왕의 신하로 충청 감사가 되었고, 장계에도 나으리에게 한 번도 신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녹도 먹지 않았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 장계를 대조하여 보니, 과연 신(臣)자는 하나도 없었고 신자 대신에 거(巨)자로 썼으며 녹은 받아서 먹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두었다고 한다. 불발로 끝난 단종 복위사건은 단종에게는 오히려 악재로 작용했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상왕에서 쫒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또한 문종의 비였던 현덕왕후 권씨는 사후에 폐비되고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었다. 사육신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죽었고 처나 딸들은 공신들의 여종으로 주어졌다. 성삼문의 아내 차산은 박종우에게 주어졌고, 박팽년의 아내 옥금은 정인지에게 주어졌다. 사육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생육신(生六臣)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육신은 이미 죽었지만 살아남은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이 [사육신전]을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이들의 이름이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은둔으로써 항거했던 여섯 명의 선비가 있었는데 이들은 목숨을 내놓고 저항했던 사육신과 대비된다는 의미에서 생육신이라 하였다.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이 그들인데 이들은 한평생 벼슬하지 않고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키다 세상을 떠났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은 자신과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가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형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공공연하게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다. 불온분자로 낙인 찍힌 이후 경상북도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인 순흥에는 부사로 있는 이보흠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금성대군은 이보흠을 포섭하여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다. 그러나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기도는 허무하게 좌절되었다. 금성대군에게는 금연이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이 여종이 이보흠의 종인 이동과 눈이 맞았다. 이동은 상전인 이보흠과 금성대군이 심상치 않은 일을 꾸민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이 기회로 출세해 보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 이에 금성대군이 작성해 놓은 격문을 훔쳐 달아나 안동부사에게 이 일을 고해바쳤고, 뒤에 이를 안 이보흠도 후환이 두려워 금성대군의 역모 사실을 알렸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은 금성대군뿐만 아니라 단종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세조는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렸고 노산군에게도 사약을 내렸다. 순흥부는 이후로 반역의 고을이 되었다. 순흥부의 토박이 향리들은 거의가 죽임을 면치 못했다. 순흥부는 단종의 신원이 복위되는 숙종 때까지 쑥밭으로 남아 있었다. 세조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정적들을 제거하면서 정치를 안정시켰다. 그 과정에서 신권을 축소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다 보니 문치(文治)보다는 패도(覇道) 정치로 변모해 갔다. 그 결과 유교 대신 불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펴서 불경 간행 등 공적도 남겼으나, 독단적인 정치에 따른 폐해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세조는 자신의 골육인 단종과 금성대군 등을 죽이면서 자신을 왕으로 옹립한 한명회·신숙주 등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혼인을 통해 연결되어 이들의 권세를 더욱 심화시켰다. 게다가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던 도중 이시애의 난을 만나자 오히려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세조도 죽음을 예감하고 1468년(세조 14년) 음력 9월 7일 아들인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최고의 묘호를 받은 세조, 그 묘호에 담긴 뜻은 왕이 죽으면 왕가의 사당인 종묘(宗廟)에 신주(神主)를 모시게 된다. 신주가 종묘에 들어갈 때 그 공적을 기리며 이름을 짓는데 그것이 이른바 묘호(廟號)이다. 태조∙태종∙세종 등 역대 왕들의 묘호에서 보듯이 조선시대 국왕의 묘호는 두 글자로 지어졌다. 첫 글자는 임금의 업적을, 두 번째 글자는 종법상의 지위를 나타낸다. 예컨대 나라의 창업자는 태조(太祖)라는 묘호를 쓴다. 조(祖)는 주로 창업 개국자에게 주어지는 묘호이고 나머지 후대 왕들은 ‘종(宗)’자를 쓴다. 그런 이유로 중국의 역대 황제 가운데 창업자나 그 4대조 외에 ‘조’자를 쓴 예는 거의 없었다. 세조의 경우도 원래 묘호로 거론된 것은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이었다. 그러나 세조라는 묘호는 후대 왕인 예종이 고집하여 결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세조는 개국자가 아닌 계승자이므로 ‘조’가 아닌 ‘종’을 쓰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계승한 왕이라는 ‘세(世)’자와 나라를 세운 왕이라는‘조(祖)’자를 모두 가진 왕이 되었다. 이런 경우는 세조 외에도 선조나 인조가 있는데 대체로 후대에 무리하게 묘호를 붙인 결과라 볼 수 있다. 비록 세조라는 묘호는 세조 자신이 작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평범치 않은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조의 특별함은 묘호만이 아니다. 세조와 그와 함께한 공신들은 국가 재건의 공로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세조는 종묘에서 아무리 대수가 달라져도 결코 신주가 옮겨지지 않는 불천위(不遷位)의 지위를 가졌다.] [정희왕후 세조의 왕비, 조선 전기 정치사에 족적을 남기다 조선 7대왕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1418~1483)는 세종부터 성종까지 조선이 개국 이후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고, 또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한 여인이다. 처음 왕자의 아내로 조선 왕실과 인연을 맺은 그녀는 이후 왕비가 되었고, 왕을 고를 수 있는 권리를 놓쳐버리지 않았으며, 수렴청정을 통해 7년간 국가정책 최고결정권자의 자리에 있기도 하였다. 정희왕후의 65여 년 간의 인생은 격동의 조선 전기 정치사 어느 한 부분에서도 빠진 적이 없었다. 언니를 제치고 세종의 둘째 아들과 결혼하다 정희왕후는 고려시대부터 명문가를 자랑하던 파평윤씨 가문의 딸로 1418년에 태어났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고려 말 판도판서를 지낸 윤승례이고 아버지 윤번은 음보로 관직에 나가 신천 현감을 거쳐 정희왕후 10여세 무렵에는 군기시 판관 자리에 있었다. 정희왕후는 윤번의 둘째 딸이었다. 야사에 의하면 원래 왕실과 혼담이 오가던 것은 그녀의 언니였다고 한다. 당시 세종은 자녀들의 결혼에 각별한 관심이 있었고, 대군과 공주의 결혼에도 정식 간택 절차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관여하여 훌륭한 배필을 맞아주려고 노력했다. 윤번의 집 큰 딸을 둘째 아들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의 배필로 점찍고 궁중의 보모상궁과 감찰상궁을 파견한 세종은, 큰딸보다 둘째 딸의 자태가 더 비범하고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둘째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그녀가 바로 훗날 조선 7대왕이 되는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이다. 정희왕후는 1428년 11세의 나이에 한 살 연상의 수양대군과 혼례를 올리고 왕실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는 문종이 이미 세자의 자리를 탄탄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군 즉, 왕자의 아내였던 그녀에게 왕비는 거의 생각할 수도 없는 자리였다. 그녀는 수양대군의 아내가 되면서 낙랑대부인에 봉해졌다. 수양대군과는 슬하에 2남 1녀(장남 의경세자. 차남 예종. 딸 의숙공주)를 두었다. 수양대군은 왕자시절 정희왕후 외에 딱 한명의 첩을 들였는데 그녀는 훗날 근빈 박씨가 된다. 근빈 박씨가 사육신 박팽년의 누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당시 조선의 상류층 남자라면 당연시되었던 축첩(蓄妾)행위를 그다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수양대군과 정희왕후의 사이는 꽤 좋았던 것 같다.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수양대군은 뛰어난 학자였지만 병약했던 형 문종에 비해 문무를 모두 겸비한데다 야망도 큰 인물이었기에, 아버지 세종은 둘째 아들이 훗날 왕권에 도전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까 매우 염려하였다고 한다. ‘수양대군’이란 이름도 수양산에서 충절을 지킨 백이와 숙제의 고사를 생각해서 임금에 대한 충성을 변치 말라는 뜻에서 세종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둘째 아들의 야심을 꿰뚫어본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세손(훗날의 단종)을 보필해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계유정난, 수양대군에게 직접 갑옷을 입히다 왕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될 수 없는 운명을 한탄하던 수양대군이 30대로 접어들면서 조선의 정치사는 앞날을 예상 할 수 없는 파란 속으로 접어들었다. 몸이 약했던 문종이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 뿐 아니라 어머니도 없고, 외척도 변변치 않은 나이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조선의 왕위는 백척간두에 선 듯 위태로워졌다. 단종은 그가 어른으로 성장할 때까지 왕을 보호하고 정사를 대신해줄 왕실의 어른도 없는 상황에서 어린 나이에 성급하게 일선 정치무대로 내몰렸다. 신하들과 종친들은 모두 어린 왕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각자의 충성심을 과시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사리사욕에 타락할 위험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채 권력의 시험대 위에 올랐다. 신하들은 왕권보다 더 큰 신권을 꿈꾸었고, 종친들은 어린 단종을 내몰고 자신이 왕위에 오를 기회를 노렸다. 먼저 칼을 빼든 것은 결국 세종의 예상대로 그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었다. 수양대군은 세종과 문종의 유지로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 와 황보인을 비롯한 신하들이 어린 왕을 함부로 휘두르며 왕권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동생이지만 라이벌이기도 했던 안평대군의 왕권경쟁에 참여한 듯한 애매한 태도도 수양대군의 마음을 급하게 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등과 세력을 형성하여 안평대군과 손잡은 재상들(김종서 황보인 등)과 맞섰다. 수양대군은 단종 1년(1453년 계유년) 10월 10일 자신의 쿠데타를 ‘나라가 처한 위태로운 재난을 평정한다’는 의미인 정난(靖難)으로 미화시켜 거병했다. 그러나 이 계유정난은 정희왕후의 결단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일지도 몰랐다. 정희왕후는 남편의 왕권에 대한 야심을 늘 걱정하고 이를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남편의 결심이 굳어진 상태에서 쿠데타를 일으킬 날짜가 정해지자 그녀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심지어는 정난을 일으키기로 한 아침, 정보가 안평대군 쪽으로 넘어가 거병할 것을 망설이는 수양대군을 독려하여 손수 갑옷을 입혀 말 위에 오르게 한 것이 바로 정희왕후였다. 계유정난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급습하여 죽이고 안평대군을 유배보내 죽임으로써 수양대군의 승리로 끝났다. 적이 사라진 중앙 정치무대에서 거칠 것이 없어진 수양대군은 바로 왕이 되는 일에 착수했다. 정난에 성공한지 2년 만에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를 상왕으로 올리고 왕위를 꿰차 조선의 7대 임금 세조가 되었다. 그의 부인 정희왕후도 왕비자리에 올랐다. 이후 상왕으로 올렸던 단종을 사육신이 일으킨 복위 운동을 빌미 삼아 1457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하고 영월로 유배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1457년 서인으로 강등된 단종이 영월에서 자살하도록 만듦으로써 세조는 자신이 찬탈한 왕위를 지켜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세조를 격려하고 조언하며 그를 도운 사람이 바로 정희왕후였다. 왕비, 그러나 두 아들을 앞세워야 했던 비운의 어머니 명분이 취약한 자가 권력을 잡으면 그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공포정치를 하기 마련이다. 세조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카와 남동생, 젊은 시절을 함께 했던 벗들의 피를 손에 묻힌 세조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오른 왕위에 겨우 14년간 머물렀다. 그동안 그는 다음 왕위를 이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큰아들 의경세자가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극심한 죄의식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정희왕후도 마찬가지였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침을 뱉는 꿈을 꾼 뒤 피부병에 시달리게 된 세조를 간호하면서 정희왕후 또한 큰아들 의경세자의 죽음이 예사 죽음이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죄값을 치르는 것이라 여겼고, 죄의식을 털어버리기 위해 불교에 매달렸다. 그러나 정희왕후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남편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지 못하고 끝내 숨을 거둔 뒤 다음 왕위를 이은 둘째 아들 예종마저 재위 1년 2개월 만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죽여가며 차지했던 왕권이 허무하게 사라져가는 것을 정희왕후는 그대로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다. 왕위 계승자를 선택하고 수렴청정을 하다 야심가 세조의 곁에서 그의 정치적 행보를 지켜보았고 또 함께 했던 정희왕후는 이때 아들을 잃은 지독한 슬픔 속에서도 재빠르게 현재의 정치상황을 분석했다. 왕실의 가장 어른자리에 남은 자신의 선택에 남편 세조의 유지와 왕실의 성쇠가 달려있었다. 법대로 하자면 왕위는 예종의 아들인 원자(후일의 제안대군)가 이어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는 이제 불과 4살. 정희왕후 자신이 나서 수렴청정을 한다 하여도 아이가 다 자라기 전에 정희왕후 본인이 죽어 다시금 혼란이 야기될지도 모를 일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정희왕후는 50대를 넘어서고 있어서 환갑을 넘기기 어렵던 조선시대 평균 수명을 감안할 때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원자는 왕위계승권에서 제외되었다. 두번째 후보는 죽은 의경세자의 첫째 아들 월산대군이었다. 당시 월산대군은 16세로, 지금 당장 왕위에 올라도 별다른 무리없이 정치에 임할만한 나이였다. 그는 어머니 수빈(의경세자의 빈, 훗날 소혜왕후)에게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 그다지 흠잡을 데 없는 품성과 교양을 가진 인물이었다. 누가 봐도 그가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자였다. 그런데, 정희왕후는 망설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월산군이 병약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월산군에게는 그를 뒷받침해줄 세력이 미약했다. 월산군은 병조판서 박중선의 딸과 결혼했다. 명문가문이긴 했지만 권세가는 아니었다. 세조가 왕위에 있을 때 직접 골라준 혼처였다. 세조가 월산군에게 이런 혼처를 마련해준 것은 왕위를 이을 둘째 아들 예종을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손자보다는 아들이 가까웠던 아버지 세조는 월산군이 권세가의 딸과 결혼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예종과 몇 살 차이나지 않는 손자 월산군이 세력을 키워 아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일찌감치 막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세조는 예종이 1년 만에 북망으로 자신을 따라오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기에 이러한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인명은 재천이고 보니 스무살 예종의 죽음 이후 정희왕후는 처가가 뒷받침이 되어주지 못할 것 같은 월산군을 선뜻 다음 왕으로 선택하지 못했다. 정희왕후는 월산군의 동생 자산군을 주목했다. 세조를 도와 계유정난을 일으킨 뒤 조선 최고의 권세가가 된 한명회를 장인으로 둔 자산군은 이제 13세였다. 자산군이 한명회의 딸과 결혼한 것은 그의 어머니 수빈 한씨 (훗날의 소혜왕후)의 의지 덕분이었다. 첫째 아들의 혼처를 정해준 세조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있던 수빈 한씨는 내심 시아버지의 그러한 결정이 섭섭했던지 세조가 병으로 정신이 혼미한 때를 틈 타 한명회와 사돈을 맺었다. 부질없는 희망이라고 해도 남편 의경세자가 요절하지만 않았다면 왕비가 될 뻔 했던 수빈 한씨로서는 아들에게 처가나마 제대로 선택해 힘을 실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수빈 한씨의 이러한 욕심이 결국 자산군에게 큰 보탬이 되었다. 정희왕후는 자산군의 장인 한명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가도 처가도 변변치 않았던 단종이 수렴청정을 해줄 할머니마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남편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정희왕후는 왕에게 있어서 배후가 될 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뒷받침할 세력이 미약한 월산군이 왕이 될 경우, 자산군을 사위로 둔 한명회가 가만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정희왕후는 골육간의 또 다른 피바람을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정희왕후에게는 또 하나의 욕망도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미 성인에 가까운 월산군이 왕이 되어 바로 정치 일선에 나서면 자신은 그야말로 궁궐의 뒷방에 머무는 대왕대비자리에만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만약 나이 어린 자산군이 왕위에 오른다면 자신에게 기회가 있었다. 왕실의 가장 어른인 정희왕후가 어린 왕을 끼고 수렴청정이라는 공식적인 정치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렴청정으로 정국을 직접 운영하게 되면 그야말로 조선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것이다. 정희왕후는 마침내 자산군을 다음 왕으로 선택했다. 일단 자산군을 다음 왕으로 선택하자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자산군을 왕으로 지목하기 전에 이미 자산군은 궁궐에 들어와 있었다. 정희왕후가 공식발표 전에 자산군을 은밀히 불러 들여놓고 여타의 잡음이 일기 전에 즉위식을 재빨리 거행할 계획을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희왕후의 부름을 받고 들어온 자산군은 그대로 즉위식을 올리고 조선 9대 왕 성종이 되었다. 그리고 그 성종의 뒤에 발을 치고 정희왕후가 국가 최고의 자리에 앉았다.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 시작된 것이다. 신숙주 등이 굳이 이를 청하고, 이내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전략) 사왕(嗣王)이 나이가 어리니 온 나라 신민은 허둥지둥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자성왕대비전하(정희왕후)께서는 슬픈 정리를 조금 억제하시고, 종사의 소중함을 깊이 생각하시어 (중략) 모든 군국의 기무를 함께 들어 재단하여 사군(성종을 이름)이 능히 스스로 정사를 총람하기를 기다려 환정(還政)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대비(大妃)가 이를 허락하였다. -[성종실록] 1권, 즉위년(1469 기축) 11월 28일(무신) 정희왕후는 1469년부터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며 조선의 최고정책결정권자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종친 정리작업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키고 종친의 관리 등용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비록 단종은 복권하지 않았지만 그의 비 정순왕후 송씨를 신원하여 단종에 대한 죄의식을 어느 정도는 상쇄하려 하였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신봉하였지만, 정책면에서는 조선의 국시인 숭유억불을 강화시켰다. 불교의 화장 풍습을 없애고 도성 내에 사찰을 폐지하였으며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했다. 또한 왕실의 고리대금업을 엄단하고 농업과 잠업을 육성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일련의 정치를 도운 것은 세조의 근신이던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었다. 이들은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엄청나게 큰 정치, 경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때문에 이들은 훗날 새롭게 정계에 들어오게 되는 사림들의 주요한 비판 대상이 되어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단성있고 노련했던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조선의 왕권은 안정을 되찾았고 사회는 정돈되어 갔다. 이것은 이후 성종의 친정기에 문물제도가 완성되는 주춧돌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20세가 되던 해에 수렴청정을 거두고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녀는 세조가 거동(擧動)하던 온양온천에 자주 내려가 있었고 죽음도 온양에서 맞이하였다.] 14:13~14:41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7 번지에 있는 봉선사 일주문으로 이동 [2.0km] 14:41~15:24 봉선사(奉先寺)를 탐방 후 봉선사 일주문으로 회귀 [봉선사(奉先寺)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榛接邑)에 있는 절. 종파 : 대한불교 조계종 창건시기 : 969년 창건자 : 법인국사 탄문 소재지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5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이다. 969년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창건하여 운악사라 하였다. 그 후 1469년(예종 1) 정희왕후(貞熙王后) 윤씨가 광릉(光陵)의 세조를 추모하여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라고 하였다. 1551년(명종 6)에는, 교종(敎宗)의 수사찰(首寺刹)로 지정되어 여기서 승과시(僧科試)를 치르기도 하고, 전국 승려와 신도에 대한 교학(敎學)진흥의 중추적 기관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여러 번 수축했으나, 1951년 6 ·25전쟁 때 다시 법당과 함께 14동 150칸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화엄(華嚴)이 56년 범종각을, 1961~1963년에 운하당(雲霞堂)을 세우고, 1969년에는 주지 운허(耘虛)가 법당을 중건하고, 1977년에는 월운(月雲)이 영각(靈閣)을 세웠다. 절 종각에 보존되어 있는 동종(銅鐘)은 조선 전기의 것으로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선사(奉先寺) 봉선사는 크낙새와 수목원으로 널리 알려진 광릉에서 아주 가깝다. 광릉 매표소에서 광릉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전나무 숲길 따라 남동쪽으로 1.5km쯤 내려가면 수십 채의 식당이 영업 중인 동네가 나타난다. 여기서 오른쪽 길로 300m 가량 들어간 곳에 봉선사가 있다. 봉선사의 역사는 고려 시대부터 시작된다. 원래 봉선사 자리에는 고려 광종 20년(969년) 법인 국사가 창건한 운악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여러 차례 난리를 겪으며 폐허가 된 것을 1469년(조선왕조 8대 임금 예종 원년) 정희왕후 윤 씨(7대 세조의 왕비)가 세조의 영혼을 봉안코자 다시 일으켜 세운 뒤 봉선사라 개칭했다. 이후 봉선사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소실과 중건을 7차례 했다. 절에서 100m 떨어진 곳에 큰 비석 여러 개가 눈길을 끈다. 그중 하나가 춘원 이광수 선생 기념비다. 그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기 전 4년 동안 남양주 사능 부근 작은 집에서 산 적이 있는데 그때 한 해 겨울을 봉선사에서 지낸 인연이 있다. 당시 주지 스님이 운허라 그런 인연을 맺은 것이다. 기념비 정면에는 한글로 ‘춘원이광수기념비’라고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주요한의 글이 서예가 원곡 김기승의 글씨로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좌우 측면에는 이광수가 남긴 글들이 김기승의 글씨로 음각되어 있다. 기념비의 제막식은 1976년 5월 29일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의 봉선사 구내에서 개최되었다. 봉선사에 가면 가장 먼저 찾아볼 것이 대웅전 처마 밑에 걸린 현판이다.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큰 법당이라고 한글로 쓴 것이 이채롭다. 1970년 운허 선사(춘원 이광수 팔촌 동생)가 대웅전을 세우면서 써서 달았다. 또한, 경내에 봉선사 대종(보물)이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 만든 동종 중에서 몇 개 남지 않은 것으로 예종 원년(1469)에 왕실의 명령에 따라 만들었다. 조선왕조 전기 동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봉선사는 가수 유현상이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 장소로도 유명하며 가왕 조용필 역시 첫 번째 결혼식을 올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큰법당' 한글 현판, 1천6백년 불교사 파격… 남양주 봉선사 기자명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 중부일보 기사 입력 : 2022.04.25. 17:51 수정 2022.04.25. 22:07 ◇봉선, 선왕의 덕업을 받들어 모시다. 봉선사는 고려 969년(광종 20)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창건해 운악사(雲岳寺)라 불렸고, 세조가 승하하고 광릉(光陵)이 조성되면서 원찰로 중창되며 봉선사(奉先寺)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나라를 대표하는 국찰의 기능과 역할을 해왔다. 세조의 영정을 봉안한 숭은전(뒤에 봉선전)으로 홍살문과 하마비가 세워지고, 예종과 성종의 각별한 지원과 관심을 받았다. 특히 1551년(명종 6)에 선종(禪宗)의 봉은사(奉恩寺)와 더불어 교종(敎宗)의 수사찰(首寺刹)로 승격되면서 봉선사는 교종 본찰(本刹)의 위상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불탔지만 다시 중창되어 사격(寺格)을 유지할 수 있었고, 1790년(정조 14)에는 전국 사찰을 총괄하는 5규정소(糾正所)의 하나가 되어 함경도 지역의 사찰을 관장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특히 1902년(광무 6) 원흥사(元興寺)를 대법산(大法山)으로 하고 전국 16개 사찰을 중법산(中法山)으로 정할 때 경기좌도(京畿左道)의 수사찰이 되었고, 1911년 일제에 의한 사찰령(寺刹令)으로 전국의 사찰이 30본산로 구역될 때 봉선사는 경기 북부 일원의 사찰을 관장하는 본사(本寺)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전소되어 본사로서의 사격을 잃었다가 1968년 대한불교 조계종의 마지막 제25교구 본사가 되어 한강 이북의 사찰들을 관장하는 교종의 으뜸사찰이다. ◇‘큰법당’ 한글 현판이 준 문화적 충격 봉선사가 보통의 절집과 다른 것은 절집 중심에 ‘大雄殿’ 현판이 아닌 ‘큰법당’이라 큼지막하게 써 붙인 한글 현판이었다. 1980년대 초 이를 처음 보고 느낀 신선한 문화적 충격은 분명 봉선사를 매력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개 절집의 가장 큰 중심법당을 큰법당이라 부르지만 ‘큰법당’이라 한글 현판을 저렇게 당당하게 써서 붙인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천600년 동안 그 당연한 일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충격이었다. 이러한 당연함을 당당히 실천한 사람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독립운동가이자 역경사업에 헌신한 운허(耘虛, 1892~1980) 스님이다. 속명이 이학수(李學洙)로 춘원 이광수(李光洙, 1892~1950)와 같은 마을에서 자라 함께 공부한 8촌 형이다. 운허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이자, 불경의 한글번역과 강원교육을 통해 후학을 양성한 큰스님으로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의 중흥조라 할 수 있다. 운허스님은 1970년 큰법당을 세우며 서예가 운봉 금인석(琴仁錫, 1921~1992) 교수에게 한글 편액과 한글 주련을 부탁하였다. 큰법당은 겉에서 보면 영락없는 목조건축물인데, 실상은 철근 콘크리트로 정교하게 만든 건물이라 또 한번 놀라게 된다. 큰법당은 근대건축 재료와 구조로 전통성을 표현하고자 한 60~70년대 기술을 대표하는 사례로 근대건축사적, 불교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봉선사가 근대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첫 자리는 역경사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그 빛나는 자부심은 한글로 된 ‘큰법당’과 한글 주련들 그리고 운허스님이 한글로 쓴 일주문의 ‘운악산 봉선사’ 큰 글씨로 당당히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한문 독경이 아닌 우리말 아침예불이 봉선사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는 불경의 한글번역을 넘어 의례의 한글화, 대중화를 선도하는 봉선사라는 사실이다. ◇봉선사의 보물들 봉선사는 국난을 온전히 겪은 절집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불타고 1950년 6.25전쟁으로 불타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봉선사가 한반도 북쪽에서 서울로 오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봉선사 보물은 이런 국난에도 살아남은 500년이 넘은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봉선사 동종, 삼성각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범종은 그리 많지 않다. 1469년(예종 원년)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제작된 높이 238㎝의 커다란 봉선사 동종은 음통은 없지만 두 마리 용이 고리 구실을 하는 전형적인 한국 범종의 모습이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절터에 동종 하나 덩그러이 놓여진 사진은 국난과 함께 한 봉선사를 상징하였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탓에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전각인 삼성각은 1926년 월초 스님이 건립한 것으로 현재 봉선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셈이다. 이곳의 독성도와 칠성도는 2011년 경기도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1902년에 건립된 흥인지문 밖 원흥사가 폐지되고 창신공립보통학교가 되면서 월초 스님이 봉선사로 옮겨온 것이다. 봉선사에는 범종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비로자나 삼신괘불도가 있다. 1735년(영조 11) 상궁 이성애(李性愛)가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1669~1735)의 명복을 빌며 제작한 괘불이다. 밝고 화사한 색채와 굵고 대담한 묵선으로 묘사된 인물들의 움직임과 옷자락의 자연스러움은 왕실발원 불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보물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보물이 봉선사에는 있다. 그것은 올곧은 정진과 교학의 가풍이다. ◇봉선사의 가풍을 만들 사람들 봉선사 가풍을 만든 이는 조선 말기 이래 봉선사를 대표하는 홍월초(洪月初, 1858~1934) 스님을 꼽을 수 있다. 근대불교사에서 가장 모범적인 승려의 삶을 살았다 할 수 있다. 남·북한총섭을 역임하였고, 불교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명진학교(明進學校)의 설립자였다. 전통 조선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새롭게 부는 일본불교의 바람을 맞으며 불교의 발전을 모색했던 인물이었다. 월초스님의 업적 가운데 특기할 것은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 1927)’의 편찬을 꼽을 수 있다. 본사 봉선사를 비롯하여 회암사·흥국사·불암사 등 24개 사찰의 사지였다. 당시 봉선사 강사였던 안진호(安震湖 1880~1965)에게 명하여 편찬케 하였다. 이후 안진호는 많은 사지를 편찬하였다. ‘봉선본말사지’는 이듬해 만해 한용운의 ‘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事蹟 1928)’으로 이어졌다. 6.25전쟁으로 봉선사와 강원도 건봉사가 불타고 난 뒤 이들의 사지 편찬은 역사적 혜명으로 일컬을 만큼 위대한 업적이 되었다. 또한 1934년 월초 스님은 열반하기 직전 자신의 소유토지 2만6천여 평을 모두 봉선사에 기증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봉선사에 홍법강원(弘法講院)이 설립되었고, 손상좌 운허 스님이 그 뒤를 이어 봉선사를 이끌었다. ◇월초 스님의 또 다른 손상좌로 운암 김성숙(金星淑, 1898~1969)이 있다. 대학시절 가장 감명 깊게 있은 책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김산의 일대기를 쓴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었다. 본명이 장지락(1905~1938)으로 알려진 파란만장한 김산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 김충창이었다. 김충창은 김성숙의 다른 이름이다. 성숙이라는 법명을 스승 홍월초가 주었다. 그렇게 봉선사는 홍월초, 이운허, 김성숙으로 이어지는 독립운동 정신과 교학의 가풍을 이어왔다. 특히 역경원장을 역임한 운허 스님은 대장경의 한글 번역을 봉선사에서 이끌었고, 그 원력을 이어 받은 제자 월운(月運) 스님은 1965~2002년까지 37년에 걸쳐 해인사 소장 고려대장경을 총 318권의 한글대장경으로 완간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렇게 봉선사는 역경사업을 통한 불교대중화와 서당운영을 통해 젊은 인재들을 배출하며 교학불교에 뛰어난 봉선사의 전통을 만들어 가고 있다. 또한 승려들의 보편적 복지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등 불교의 현대화에도 모범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광릉의 봉선사는 광릉숲과 더불어 더욱 빛나는 가풍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사찰] 남양주 봉선사 [불교신문 3741호/2022년11월8일자] 기자명 권중서/조계종 전문포교사 깊어가는 가을 더 늦기 전에 춘원과 봉선사를 … “님에게는 아까운 것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를 배웠노라 … 이제 알았노라 님은 이 몸께 바라밀을 가르치려고 짐짓 애인의 몸을 나투신 부처님이시라고” 춘원의 ‘애인-육바라밀’은 너무나 유명한 시이다. 이처럼 쉽게 육바라밀을 시로 표현하여 보살도를 일러 주었다. 또 불자들이 법회 때 부르는 ‘청법가’의 작사도 춘원이 했다. 봉선사는 고려 광종20년(969)에 법인국사 탄문스님이 창건하여 운악사라 하였다. 이후 조선 세조가 예종에게 “선조를 받들고 효도하기를 생각할 것(奉先思孝)”을 유언으로 남겼다. 예종은 1469년에 ‘봉선사(奉先寺)’란 사액을 내려 절 이름이 바뀌었고 광릉의 능침사찰이 되었다. 세조는 왕권 강화와 토지제도 정비, 불교서적 간행 등 백성을 위한 많은 업적을 남긴 호불 군주로 ‘조선의 아쇼카왕’이라 말할 수 있다. ‘삼해탈’ 일주문 봉선사 일주문을 바라보면 ‘어! 한글이네’ 하는 반가운 마음으로 앞의 ‘운악산 봉선사’ 한글 편액과 뒤에 ‘교종본찰 봉선사’란 한자 편액을 볼 수 있다. 일주문만 보아도 봉선사는 불경의 한글 역경사업의 중심도량임을 알 수 있다. 봉선사는 조선 명종6년(1551) 허응당 보우스님의 목숨을 건 선교양종의 승과 부활로 교종의 으뜸사찰이 되었다. 일주문은 삼문(三門)으로 4개의 돌기둥을 일렬로 세운 것은 흔들림 없는 수행으로 삼독심을 버려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삼해탈문(三解脫門)을 표현했다. 대웅전에 걸린 특이한 한글 편액 ‘큰법당’에서는 불경의 한글화에 크게 이바지한 운허·월운스님의 한글 사랑이 느껴진다. 내부에는 한글 <화엄경>과 한문 <법화경>을 동판에 새겨 벽을 이루었다. 6·25전쟁으로 타버린 법당은 철근 콘크리트를 구조이지만 전각의 전통성을 잘 표현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범종을 치는 이유 범종각에는 예종의 지극한 효심이 느껴지는 보물 범종이 있다. 범종에는 1469년 조선 시문서화의 4절로 꼽히는 최고의 문장가 강희맹의 글이 새겨져 있다. “범종이란 불도 수행 기구의 가장 으뜸이 되는 것으로서 그 소리가 웅장하여 위로는 하늘 꼭대기에, 아래로는 지옥까지 미쳐 육도에 들린다. 색계 18천의 하늘 아가니타왕까지 이 범종이 크게 울려 불법(佛法)이 크게 일어나니 지금 이 범종으로 하루 여섯 번 경책하면 악도에 윤회하는 것을 그칠 뿐이겠는가. 반드시 광릉에 크게 울려 문득 부처님의 지혜를 더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산이 평지가 되고 바다가 마를지언정 이 공덕은 끝내 없어지지 않는다”하여 봉선사 중창의 공덕을 찬탄하였다. 또 이 범종 소리로 세조대왕이 깨달음을 이루고 28중생세계(지옥, 아귀 축생, 인간, 욕계6천, 색계18천)가 윤회를 그쳐 극락에 이르길 발원하였다. 이처럼 새벽에 28번 범종을 치는 것은 28중생세계에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주기 위한 것이다. 범종은 높이 238㎝, 입지름 168㎝의 큰 동종(銅鐘)으로 조선 범종의 특징인 음통이 없고 용뉴에는 위엄이 넘치는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지며 여의주를 잡고 있다. 사방 4곳의 연못에는 각 9개씩 36개의 연꽃봉오리가 도드라져 있어 밀교의 37존불을 형상화했다. 연못 사이에는 4명의 보살이 서 있고 그 밑에는 육자대명왕진언, 파지옥진언을 범어(梵語)로 새겼다. 아래 중첩된 물결무늬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 피안으로 가는 것을 나타냈다. 북두칠성은 7여래로 변하여… 큰 법당 서쪽 언덕에는 1926년에 건립된 삼성각이 있다. 6·25전쟁을 견뎌낸 산령각, 북두각, 독성각은 한 지붕 밑에 세 가족처럼 한 전각에 산신, 칠성, 독성을 모셨다. 가난했던 시절 초가삼간에 부모님 모시고, 처자와 함께 살았던 정이 묻어난다. 처마 끝 풍판(風板) 안쪽에는 청룡이 힘차게 날고 운악산 백호가 긴 꼬리를 흔들거리며 늠름하게 봉선사를 지키고 있다. 북두각에는 결가부좌한 치성광여래가 금륜을 왼손에 들고 인간의 수명과 복락을 관장한다. 북두칠성은 칠여래로 변하여 중생을 살피고, 치성광여래 좌우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연꽃 위에 해와 달을 들고 있다. 원유관 위에 흰 점으로 별을 표시한 칠원성군이 있다. 그 옆의 독성각에는 빈도라발라타사 즉, 나반존자 불화가 있다. 독성의 모습은 오른손에는 불로초를, 왼손에는 긴 석장(錫杖)을 들고 반석 위에 앉아 있다. 탈속의 자유와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배경으로 붉은 태양과 상서로운 구름, 천태산의 소나무, 학, 모란꽃과 호랑나비, 새, 황룡, 거북, 동자, 동녀, 신선 등이 등장한다. 그런데 동녀가 안은 학과 바다 속 거북이가 흰 기운을 뿜으며 서로 입을 벌려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재미있다. 그 옆에는 오랜만에 동자의 호리병 속에서 나온 황룡이 검은 구름을 일으키며 신나 한다. 봉선사에는 음식 이야기가 전한다.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보면 박술은 구걸하기 위해 봉선사를 들렀다. 때마침 경기감사가 오니 봉선사는 진수성찬을 올렸는데 거지 박술이 절 뜰에 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남산도 더는 높지 말고, 한강도 더는 깊지 말며, 감사께서도 더는 배부르지 말고, 걸인도 더는 배곯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공이 먹다 남긴 것이라도 얻었으면 합니다” 그러자 감사는 웃으면서 음식을 내주었다고 한다. 부족하지도 말고 넘치지도 않는 행복한 세상은 ‘보시’에 있음을 말해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춘원 이광수가 봉선사로 간 이유는? 봉선사 입구에는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서 있다. 감성적 천재 춘원 이광수(1892~1950)는 일제강점기에 불교문학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1922년 석왕사에서 <화엄경>, 1923년 금강산에서 <법화경>, <금강경>, <원각경> 등 불경을 읽고 더욱 불교에 심취하여 <이차돈의 死>(1935), <꿈>(1938), <무명>(1939), <사랑>(1939), <원효대사>(1942) 등 많은 불교관련 소설을 집필했다. 해방이 되자 춘원은 팔촌인 봉선사 운허스님에게 의지하여 머물며 지난날의 친일협력에 대한 번민의 돌베개를 베었다. 춘원은 <돌베개>의 서문에서 “나는 오랫동안 세상을 떠나서 수도생활을 할 작정으로 꽤 크고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봉선사로 갔다”고 했다. 춘원의 시 ‘애인-육바라밀’은 너무나 유명한 시이다. “님에게는 아까운 것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를 배웠노라 … 이제 알았노라 님은 이 몸께 바라밀을 가르치려고 짐짓 애인의 몸을 나투신 부처님이시라고” 이처럼 쉽게 육바라밀을 시로 표현하여 보살도를 일러 주었다. 또 불자들이 법회 때 부르는 ‘청법가’의 작사도 춘원이 했다. 아쉽게 북으로 끌려간 후 1950년에 생을 마감했다. 깊어가는 가을, 세조대왕, 춘원이광수와 함께 봉선사를 걸어 봄직도 하다.] [남양주 봉선사 동종(南陽州 奉先寺 銅鍾) 대한민국의 보물 제397호(1963년 9월 2일 지정) 수량 1구 시대 조선시대 관리 봉선사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5 봉선사 좌표 북위 37° 44′ 47″ 동경 127° 11′ 00″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남양주 봉선사 동종(楊州 奉先寺 銅鍾)은 조선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봉선사를 다시 지을 때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한반도에 많이 남아있지 않은 조선 초기의 동종으로, 1963년 9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었다. 남양주 봉선사 동종(南陽州 奉先寺 銅鍾)은 왕실의 발원으로 만들어진 조선전기 대형 범종의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예종원년(1469)년에 제작되었다. 높이 238cm, 입지름 168cm, 두께 23cm로 꼭대기에는 용통이 없고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지고 종의 고리 구실을 하는 전형적인 조선종의 모습이다. 종의 어깨에는 이중의 가로줄을 돌려 몸통 부분과 구분 짓고 있으며, 종 가운데는 굵고 가는 3중의 가로줄을 그어 몸통 부분을 상·하로 나누고 있다. 줄 윗부분에는 사각형의 연곽과 보살입상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가로 줄 아랫부분에는 강희맹이 짓고 정난종이 글씨를 쓴 장문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는 종을 만들게 된 연유와 만드는데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어서, 국가적인 감독으로 이루어진 범종임을 알 수 있다. 또 종의 입구 위쪽으로 넓은 띠가 있는데 그 안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파도 치는 모양이 사실적으로 잘 표현되었다. 고려시대에 비해 종 입구가 넓어진 형태나 몸통에 있는 가로 띠와 보살입상 그리고 육자광명진언(六字光明眞言)이라는 조선시대 종의 새로운 요소가 등장한 점에서 조선시대 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춘원 이광수 기념비(春園 李光洙 記念碑)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봉선사길 30[부평리 255]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춘원 이광수를 기념하여 세운 비. [개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는 1944년 3월부터 1948년 8월까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의 광릉 지역과 사릉에서 머물며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1946년 9월 2일 광동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신용철의 연구에 따르면 “일과 후 숲속을 거닐며 초목과 대화하고 죽은 새도 묻어 주었다. 염불하고 경전 읽으며 좌선하는 불제자로 충실하려고 노력하였다.”라고 한다. 춘원 이광수 기념비(春園 李光洙 記念碑)는 1976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이광수를 위하여 세운 기념비이다. [건립 경위] 춘원 이광수 기념비는 이광수가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사릉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은거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친 광동중·고등학교에 기념비 건립이 추진되었다. 근처의 봉선사는 이광수가 4개월 정도 수도 생활을 한 곳으로, 기념비 제막 당시 봉선사 주지 승려 운허는 이광수의 팔촌 동생이다. 춘원 이광수 기념비는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 등 유족에 의하여 건립이 계획되었고, 허영숙이 1975년 미국에서 귀국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9월 7일 사망하였다. 그 후 아들 이영근, 딸 이정난·이정화 등 남은 유족에 의하여 완공되었다. 제막식은 1976년 5월 29일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의 봉선사 구내에서 개최되었으며 150여 명의 인사가 참석하였다. [위치] 춘원 이광수 기념비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5번지 봉선사 경내에 있다. [형태] 춘원 이광수 기념비의 재질은 화강석으로, 건립 당시에는 용의 무늬를 새겨 넣은 이수가 비석의 머리로 장식되었으나 현재는 이수가 망실되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정면에는 한글로 ‘춘원이광수기념비’라고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주요한의 글이 김기승의 글씨로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좌우 측면에는 이광수가 남긴 글들이 김기승의 글씨로 음각되어 있다. [금석문] 춘원 이광수 기념비에는 「졸업하는 형제여, 자매여」[『동광』31, 1932. 3.] 등 이광수의 작품 및 추모 글이 총 1,371자로 새겨져 있다. [의의와 평가] 춘원 이광수 기념비는 광복 직후 은거하던 이광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유적이다. 친일 이력 때문에 해방 무렵 갈 곳이 없었던 이광수를 거둬준 이가 운허였는데 그는 이광수가 인근 사릉 근처에 터를 잡고 살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이광수는 사릉에서 1944~1948년까지 살았는데 해방 직후인 1946년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운허의 도움으로 봉선사에 들어가 은거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사릉과 봉선사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광수가 쓴 작품이 <도산 안창호>, <나의 고백>, <돌베개>이다. 기념비는 이광수의 전처인 허영숙이 세운 것으로 그녀는 홀로 자녀들을 키우고 말년인 1971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였는데 납북된 이광수의 생사를 알기 어렵게 되자 추모비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1975년 5월 귀국하였는데 갑자기 여러 병을 얻어 기념비를 세우기 직전인 9월에 사망하였다. 사실 이런 기념비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잘 알기 어려운데 경기도에서 친일 문화 잔재 청산을 위한 조사를 하고 있고 이 기념비가 경기도에 소재한 대표적인 친일 잔재물로 꼽히고 있어 향후 청산 대상이 될 지, 보존 대상이 될 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15:24~15:26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봉선사 입구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5:26~15:30 봉선사 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오남역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2번 버스 승차 대기 15:30~16:00 2번 버스를 타고 봉선사 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오남역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30분 소요] 16:00~16:10 오남역으로 이동하여 충무로역으로 가는 4호선 전철 승차 대기 16:10~17:27 4호선 전철을 타고 오남역에서 충무로역으로 가서 3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연신내역으로 이동한 후 6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구산역으로 이동 [1시간17분 소요] 포천시 국립수목원 안내도 [포천시 국립수목원&남양주시 광릉] 지도 광릉 지도 [봉선사 입구~국립수목원 입구] 구간 광릉 숲길 안내도 봉선사 안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