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➊ ‘역사 저널리즘’의 개척자- 박종인
“사료(史料)를 저널리스트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이 내 역할”
글·사진: 주성원 - 편집위원 서울인 379호
신문기자로서 박종인 동문(36회·조선일보 선임기자)의 작업은 독보적이다. 당장 ‘오늘’ 발생한 사건을 글로 적는 것이 아니라, 먼 ‘옛날’의 이야기를 오늘에 대비시켜 재현해낸다. 주로 조선일보에 연재중인 <박종인의 땅의 역사>가 그 결과물이지만, 같은 이름의 유튜브 채널과 TV프로그램 등에서도 역사 속에서 현실을 직시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만날 수 있다.
<매국노 고종>, <대한민국 징비록> 같은 저서에서도 그의 역사관이 드러난다. 저서의 저자 소개 글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잊히고 은폐된 역사를 발굴해 바로잡아 온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서재필 언론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겨울바람이 유난히 차가웠던 1월 중순, 서울 중구 그의 사무실에서 박종인 동문을 만났다.
필자도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인근 동아일보 등에서 기자생활을 해 온 터라, 따지고 보면 광화문 네거리를 사이에 두고 20 년 넘게 서로 같은 업종에 종사해온 사이. 그러나 개인적인 대면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언론계 선후배를 떠나, 동문 선후배로 만나는 자리여서인지 대화는 매끄럽고 살갑게 이어졌다.
다음은 박종인 동문과 1문 1답
<땅의 역사>는 역사와 지리, 여행을 접목시킨 독특한 연재물입니다. 기자로서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박종인 “처음 기자 생활 시작한 게 1992년입니다. 1994년까지는 사회 부 등등을 거치다가, 1995년 스포츠레저부로 옮기면서 여행 담당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는 여가활동을 넓혀가는 사회 분위기가 퍼져나갈 때였어요. 여행 기사에 재미를 붙이면서 오래 하다 보니 어느새 주변에서 여행 전문기자로 인정해줬습니다. 2003년부터 2년 동안은 사진공부를 위해 뉴질랜드 유학을 떠나기도 했어요. 그렇게 여행기자로 일하다 종합편성채널인 TV조선 개국 즈음에 몇 년 방송국 파견을 나갔습니다. 2013년 여행기자로 신문사로 돌아와 보니 이제는 신문이 제공하는 ‘여행 정보’가 소용없는 시대가 됐더라고요. 이미 여행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 얻는 세상이 된 거죠. 그 때부터 여행과 다른 주제를 접목하는 기사를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역사물을 쓰게 된 건가요.
박종인 “처음에는 지역과 인물을 연결시키는 기사를 썼어요. 그러다 2015년, 광복 70주년 기사를 계기로 여행과 역사를 주제로 한 기사를 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여행을 다니다 보면 그 지역의 역사에 대해 잘못 전해지는 사례가 많아요. 기자로서 그런 걸 바로잡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대표적인 오해가 북촌 한옥마을입니다. 흔히 ‘조선왕조 500년의 산물’로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로 북촌에 한옥마을이 형성된 것은 1920년대입니다. 정세권이라는 부동산 개발업자가 만든 근대 한옥 주택가인 겁니다. 이 정세권이라는 인물은 택지 개발로 번 돈으로 조선어학회를 후원하고 독립운동자금도 댔던 사람이에요. 이렇게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잊혀진 사실(史實)을 독자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역사 기획 기사를 쓰는데 어려움은 없는 지요.
박종인 “기자의 업무 관행이라는 게 대부분 전문가들에게 물어보고, 그 의견을 받아 적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전문가 의견을 물어보기보다는 그 전문가가 쓴 논문을 찾아보고, 또 그 논문에 나오는 1차 사료(史料)를 찾아보는 방법으로 기사를 씁니다. 다행인 것은 대부분의 사료가 국문으로 번역돼 있고, 또 대부분 온라인에 공개돼 있다는 겁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앞선 사람들의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이런 기획을 하지 못했을 거예요.”
주제는 어떻게 정하나요?
박종인 “매회 고민입니다. 그래도 정치, 사회 같은 시사에 초점을 맞추려고 해요. 대한민국의 정치는 굉장히 요동치는 분야입니다. 그런데 그 요동치는 패턴이 과거와 비슷한 점이 있어요. 지금과 비슷한 역사적 사실을 찾아가면서 주제가 바뀌기도 하고 분량이 늘어나기도 합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역사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박종인 “국사와 세계사는 100점이었어요. 특히 세계사를 너무 재미있어 했어요. 당시 세계사를 가르치셨던 이순권 선생님의 수업 방법이 좋았어요. 이 선생님은 서울고 25회 선배였는데, 수업 방법이 무조건 외우라는 게 아니라, 사건과 사건을 연결지어 설명해주셨거든요. 그런 방법이 마음에 들어서 재미있게 공부했어요. 그런데 수학은 못했어요. 허허.”
서울고에 대해 갖고 계신 생각이 있다면요.
박종인 “입학하기 전까지는 서울고에 대해 잘 몰랐어요. 오히려 학교를 다니면서 대단한 학교라는 것을 알게 됐죠. 나는 고 3때 교복 자율화가 된 세대인데, 이전까지는 바지 주머니가 없는 교복을 입었어요. 초대 교장이신 김원규 선생님께서 ‘어떻게 학생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겠느냐’며 만든 교복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만 봐도 우리 학교의 학풍은 공부만 강조하는 학풍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선생님들이 공동체와 개인의 역할에 대해 가르쳐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교훈만 봐도 그래요. ‘깨끗하자, 부지런하자, 책임지키자’. 여기에 모든 것이 다 포함돼 있는 거예요. 짧지만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내가 배울 걸 다 배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땐 몰랐지만요.”
앞으로의 계획이나 희망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박종인 “내가 하는 작업에 대해 굳이 장르를 붙이자면 ‘역사 저널리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학자로서 역사를 연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터뷰나 현장 탐방만을 통해서 기사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고. 사료를 저널리스트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이 내 역할입니다. 이런 작업을 나 말고 다른 미디어에서도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우선 역사가 재미있다는 점을 알리고, 다음으로 재미있을 뿐 아니라 교훈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알릴 수 있게 될 거에요.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교훈, 그게 바로 서애 유성룡이 쓴 ‘징비록(懲毖錄)’의 ‘징비’입니다. ‘과거를 징계하고 미래를 경계한다’는 겁니다. 이걸 역사 저널리스트들이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 희망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은퇴 이후에도 <매국노 고종>이나 <대한민국 징비록>처럼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콘텐츠를 더 많이 만들어 냈으면 하고요.
<프로필>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교를 다닌 소위 386세대 신문 기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 뉴질랜드 UNITEC School of Design에서 현대사진학을 전공했다.
‘직시(直視)하는 사실의 역사만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으로 <조선일보>에 ‘박종인의 땅의 역사’를 연재 중이다.
〈TV 조선〉에 같은 제목의 역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잊히고 은폐된 역사를 발굴해 바로잡아 온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서재필 언론문화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매국노 고종』, 『대한민국 징비록』, 『땅의 역사』 1·2, 『여행의 품격』, 『기자의 글쓰기』, 『한국의 고집쟁이들』, 『행복한 고집쟁이들』, 『내가 만난 노자』, 『나마스떼』, 『우리는 천사의 눈물을 보았다』(공저), 『다섯 가지 지독한 여행 이야기』가 있고, 『뉴욕 에스키모, 미닉의 일생』, 『마하바라타』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