料理는 생명체를 다루는 일… 정신 집중이 안되면 맛도 안 난다
결혼 기피 대상이었던 요리사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인기 전문직종으로 浮上하면서 해외유학파와 逆이민자들이 몰려들고 있는 실정. 잡일부터 시작해 적어도 10년 이상 고난의 과정을 거쳐야 도달할 수 있는 주방장이라는 高地. 음식문화를 가꾸는 匠人, 최고의 주방장들이 털어놓는 料理士의 세계와 料理이야기
●호텔 롯데 양식당 쉔브룬 李基燁 주방장 :『요리를 잘하려면 천성적으로 예술감각을 타고나야 한다』 大權의 꿈을 키우는 식당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분들은 아마 다 다 녀갔을 겁니다』
롯데호텔 양식당 쉔브룬에 자주 찾아오는 명사가 누구인가 물었을 때 李基燁(이기엽 ·45) 조리과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롯데호 텔 35층에 자리한 쉔브룬에서는 몇년 전 S K 건물이 가로막기 전까지만 해도 청와대의 全景(전경)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였다. 지 금도 자리만 잘 잡으면 청와대 全景이 다 보이는데 李과장은 『精氣(정기)도 받고 꿈 을 키우기 위해 자주 오는 게 아닐까』라고 추측했다. 또 야경이 아름다워 외국인에게 특히 인기 있다고 전한다.
대부분의 호텔 식당에서는 단골손님이 누구 인지 밝히길 꺼려했다. 非(비)보도를 전제 로 몇몇 식당에서 단골들의 이름을 얻어들 을 수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거론하는 인 물 중에 동일 인물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이른바 정·재계 유력 인사들. 쉔브룬은 국내 유명인사뿐만 아니라 외국 國賓(국빈)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1988년 에는 영국의 앤 공주가 음식을 먹은 뒤 극 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프랑스 미테랑 대통 령, 서독 콜 총리, 일본의 호소카와 총리도 쉔브룬을 다녀갔다.
1999년 10월23일부터 11월1일까지 열린 롯 데컵 골프대회 참가 선수 전원이 롯데호텔 에 묵었을 때 李基燁 과장은 박세리 선수를 위해 세리 주스와 세리 수프를 만들었다. 송이버섯을 갈아 만든 세리 수프는 일반인 들이 만들기 부담스럽지만 건강식인 세리 주스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과일과 야채를 갈아 만들었다. 재료는 사과, 샐러리, 당근 , 탱자, 배.
李基燁 과장은 경희호텔전문학교 조리과를 나와 1980년 초에 조리사 자격증을 따면서 바로 롯데호텔에 입사했다. 그동안 프랑스 연수를 몇 차례 다녀왔으며 1994년 서울 국제요리대회 핫(Hot) 요리 부문 금상, 단 체 세트메뉴 부문 금상을 받았다. 李과장은 경희호텔전문학교와 경주관광교육 원 출신들이 호텔에 入門(입문)하기 시작한 1970년대 말을 기점으로 요리사들을 1세대 와 2세대로 나눌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학력 이 비교적 낮은 1세대와 달리 2세대들은 적 어도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갖추고 있다. 1세대 요리사들은 대개 현역에서 은 퇴했다는데 1세대들이 전통을 중요시했다면 2세대들은 넓은 안목으로 요리의 흐름을 빨리 받아들이고 요리를 다양화했다고 定義(정의)했다. 1세대들은 밖에서 요리를 배 워 호텔로 들어왔다면 2세대들은 호텔에서 요리를 시작했다는 점이 다르다. 1980년대 말부터 호텔에 入門하기 시작한 3세대 요리사들은 전문대 이상의 학력을 갖 추고 있다. 그야말로 요리가 좋아서 入門한 사람들. 해외 유학을 다녀와 아래서부터 차곡차곡 단계를 밟는 요리사들도 많고 逆 (역)이민 온 조리학교 출신이 조리사 보조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한다.
●한정식 전문점 용수산 奉夏源 주방장 :『호텔에서 한식을 더욱 연구하고 발전시켜 외국인들에게 알려야 한다』
외국 귀빈들이 탄복하는 한정식
옛 고려 왕조 시절 개성음식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한정식 전문점 용수산은 한식이 얼마나 품위 있는 음식인지 보여주는 곳이 다. 용수산은 개성에 있는 名山(명산)의 이 름. 개성에서 서울로 시집온 최상옥(74)씨 가 개성음식을 고스란히 복원해 1980년부터 용수산이라는 이름의 한정식집을 선보였는 데 현재 서울에 네 곳, 美 로스앤젤레스에 직영점 한 곳을 운영하고 있다. 손님 중에는 한국 전통음식을 소개하기 위 해 외국 바이어들과 함께 오는 사업가들이 많다. 용수산은 최초로 요리를 코스화했는 데 음식을 차례차례 내오기 때문에 충분히 음미하면서 맛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 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점에는 특히 외국 귀빈들이 많이 찾고 있다.
용수산의 맛을 책임지고 있는 주방장 奉夏源(봉하원·42) 조리부장은 자신의 개성을 살리기보다 용수산 전통의 맛을 이어가고 있다. 한식 주방장을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 두 명의 호텔 주방장이 「엄청나게 노 력하는 사람」이라며 그를 추천했다. 애초에 그의 학력은 중학교 2학년 중퇴였으 나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 경주 관광교육원, 서울보건전문대와 한국방송통 신대를 거쳐 1998년 중앙대 식품관리대학 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경전문대 겸 임교수와 신구대 영양학과 강사를 지낸 그 는 요즘 바빠서 강의는 쉬고 있는 상태이다. 그는 경기도 평택에서 그야말로 먹고 살기 힘들어서 서울로 상경했다. 그가 16세 때 인 1974년 처음 취직한 곳은 세운상가 내에 있는 대림분식센터. 이 식당은 디스크 자 키까지 둘 정도로 규모가 컸는데 중식, 한 식, 양식을 동시에 만들었다. 그가 이 식당 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배달. 설거지도 하 고 요리사 보조역할도 하면서 요리의 기본 을 익혔다.
그때부터 학원 새벽반을 다니면서 공부를 했는데 지금까지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인터뷰를 하러 갔을 때 그는 주방에 서 읽고 있던 자신의 요리서적 교정본을 건 네주었다. 3년 넘게 씨름하고 있는 이 책을 곧 출간하기 위해 임시로 考試院(고시원) 에서 기거하면서 고시생처럼 새벽까지 교정 지와 씨름하고 있는 중이다. 대림분식센터를 그만두고 공장, 건설현장, 바느질, 집배원 등 다양한 직업을 轉轉(전 전)하다가 25세 때 한식요리사의 길을 가기 로 결심하고 공부와 요리에 매달려 1998년 요리 기능장 자격증까지 따냈다. 기능장은 각 분야에서 10년 이상 기능을 닦은 기능 인들을 시험을 거쳐 선정하는데, 각 분야에 서 1년에 4~5명 정도밖에 배출되지 않는다 . 현재 요리 기능장은 30명 정도. 요리 기 능장이 되려면 한식은 필수이며 일식, 중식 , 양식 중 한 가지에 능통해야 한다. 그는 日食 부분에 응시하여 기능장이 되었는데 日食 주방장을 초빙해 요리를 배우고 영업 이 끝난 뒤 생선을 사들고 일식집에 가서 실습을 했다.
●웨스틴 조선 호텔 프랑스 식당 나인스 게이트 李民 주방장 :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못 당한다』
●어깨 너머로 요리 배워
4대문과 4소문에 이어 서울의 아홉 번째 문 이 되자는 의미인 나인스게이트. 조선호텔 내의 간판급 식당으로 고종황제가 제사를 지내던 원구단을 내다보면서 식사를 할 수 있다.
8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 조선호텔 조 리사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전통의 호텔에 근무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두 명의 외국인 주방장에 이어 서열 3위인 李民(이민·39) 조리부 차장은 한국 총괄 주 방장. 조선호텔 내 8개 식당을 총괄하면서 간판급인 나인스게이트 주방 일에 주력하 고 있다.
그는 경주관광교육원을 졸업하고 군대에 다 녀온 뒤 1985년에 입사했다. 일류 요리사로 서의 출발은 경주에서 시작되었는데 외국어 를 익히기 위해 틈만 나면 시내로 나가 지 나가는 외국인을 잡고 회화를 했다. 그렇게 익힌 영어 실력이 나중에 큰 무기가 되어 주었다.
조선호텔에 처음 입사했을 때 그에게 주어 진 보직은 製菓(제과) 제빵이었다. 8개월간 근무하면서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하늘 같은」 외국인 총주방장에게 양식부로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이유를 묻 는 외국인 주방장에서 그가 한 말은 『당신 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 했고 그의 호기로움이 마음에 들었는지 흔 쾌히 자리를 옮겨주었다.
『당시만 해도 선배들이 요리를 잘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헬퍼 일을 빨리 끝 내고는 선배들 시중을 들어드렸죠. 처음에 는 「저리 가라」며 밀쳐냈지만 아랑곳없이 계속 옆에 붙어서 어깨 너머로 배웠죠. 6 개월간 열심히 하니까 그 뒤부터는 잘 가르 쳐 주시더군요』
李民 차장은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아 무도 당하지 못한다」는 신조로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다.
『프랑스 요리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 다. 무슨 요리든 마찬가지겠지만 야채와 고 기의 비율, 굽는 정도, 육수의 비율, 끓이 는 시간, 기름 떠내는 과정의 수칙을 하나 하나 철저히 지켜야만 맛이 제대로 나오죠』 요리를 잘하려면 우선 기본이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지고 볶고 찌고 튀기고 데치는 등의 열네 가지 기본 조리과정을 철저히 익혀야만 제대로 된 요리를 할 수 있다는 것. 요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간을 맞추는 일. 프랑스 요리는 소금 과 후추로 간을 맞추는데 첫 요리 나갈 때 손님의 반응을 보고 다음 요리부터 철저히 손님의 입맛을 맞추는 방법을 쓰고 있다. 자주 찾는 손님들의 입맛은 기록해두었다 가 활용한다.
래디슨 서울 프라자호텔 중식당 도원 周業林 주방장 : 『요리법이 전수되지 않고 死藏되는 것은 큰 낭비다. 나는 내 요리법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칼판에서 음식 써는 法 배워
프라자호텔 중식당 도원의 주방장 周業林( 주업림·49) 부장은 3년 전 텔레비전 요리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한데다 밀가루와 식용 유 CF 모델로 활약한 적이 있어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철가방」에서 특1급 호텔 주방장의 자리에 오른 立志傳(입지전 )적인 인물. 1세대 요리사 중에서 직접 주 방에서 요리를 하는 몇 안 남은 匠人(장인 )이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 산동성 출신으 로 중국이 공산화되자 1946년에 우리나라로 와서 부산에 정착했다. 그의 아버지는 대 다수의 화교와 달리 중국음식점 운영이 아 닌 농업에 종사했다.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만 졸업한 뒤 부산 서면에 있는 중화로에서 배달을 하다가 17세 때 아는 친척의 주선으로 태화 관에 入門하게 된다. 당시 서울 시내에는 태화관을 비롯하여 아서원, 대려도, 금문도 라는 4개의 대표적 중국음식점이 있었는데 이 음식점들은 중국의 전통을 그대로 살린 정통 음식점이었다.
종로 서린호텔 뒤에 자리한 태화관은 그야 말로 소림사 주방 못지않게 규율이 엄격한 정통 중국식당이었다. 그는 처음에 연탄불 붙이기와 청소, 잔심부름 등 허드렛일을 맡았다. 그렇게 1년을 보낸 뒤 麵(면) 뽑는 일류 기술자 옆에서 2년간 면을 잡아주고 면을 삶아 담는 일을 했다. 중식당 주방은 음식재료를 칼로 써는 칼판 과 화덕 앞에서 요리를 하는 수도포로 나뉘 어져 있다. 칼판에서 수도포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영원히 칼판에서 끝나는 경우도 있다. 그는 면발에서 바로 수도포로 진출하게 되 었는데 주방장이 그가 요리에 자질이 있다 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잡일을 하면서 틈틈이 칼판에서 재료 써는 연습을 해 칼판에도 자신이 있었다. 재료를 써는 각도에 따라 음식맛이 달라질 수 있는데다 재료를 절약할 수 있는 자리 가 바로 칼판인 만큼 칼판은 대단히 중요한 자리라고 강조했다.
예전 요리사들은 모두 칼을 갖고 출퇴근했 으며 다른 사람의 칼이나 화덕을 함부로 사 용할 수 없었다.
튀김 일을 배운 뒤 비로소 볶는 요리를 하 게 되었다는데 4~5년 만에 수도포 맨 아래 쪽 화덕을 차지했을 때 실로 감개무량했다 고 한다.
●호텔 인터컨티넨탈 서울 뷔페식당 백조 鄭壽植 주방장 :『제발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먹을 만큼 가져가서 깨끗이 먹자. 음식을 남기는 것은 국가적인 낭비다』
88올림픽 이후 뷔페 인기
호텔의 각 업장 중에서 아마도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뷔페식당일 것이다. 인터컨티넨탈호텔 뷔페식당 백조의 鄭壽植 (정수식·45) 조리부 차장은 호텔 뷔페식당 이 가족들이 함께 찾는 패밀리 레스토랑화 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호텔 내에서 외국인 들이 가장 적게 드나드는 장소이기도 하다 . 그런가 하면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뷔페식당 을 찾는 외국인도 있다고 한다. 뷔페는 19 80년도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88올림픽 이후 일반인들의 호텔 뷔페를 찾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그 이전에는 회사 회식이 많았는데 1990 년도 들어서면서 가족 중심 손님들이 많아 졌습니다』
1993년경부터 IMF 관리체제로 들어서기 직 전인 1997년도까지 백조는 늘 붐볐다. 특히 점심시간 손님의 90%가 주부들이었다. IM F 이후 손님이 급격히 줄었다가 요즘 차츰 늘고 있지만 그래도 IMF 이전만큼 회복되 지 않았다. 특히 주부고객이 예전의 10% 정 도밖에 되지 않는다. 요즘 주부들이 교외로 많이 진출한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그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월요일에서 목요일까 지 점심시간에 할인혜택을 주고 있다. 일반인들이 뷔페를 즐겨 찾는 이유는 아마 도 다양한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기 때 문일 것이다. 백조에는 韓食, 中食, 日食, 洋食, 스파게티 코너가 마련되어 있는데 총 1백60가지 음식을 선보이고 있다. 뷔페 주방장이 되려면 이 모든 음식을 알아야 하는데 鄭주방장은 그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는 商高(상고)를 졸업한 뒤 브라질로 이 민 가기 위해 요리사가 될 결심을 했다. 조 리사 면허증을 획득하면 그곳에 가서 직업 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 다. 1971년도에 서울 무교동에 있던 산다( Sanda)호텔에 취직해서 그가 처음 맡은 일 은 바텐더. 바텐더는 늦게 출근해도 되지만 洋食요리를 배우기 위해 새벽 6시면 주방 에 나와 불을 지피고 요리사들이 일을 편하 게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휴일에도 출근해서 요리사들을 도우면서 옆 에서 요리를 배웠다. 당시만 해도 요리사들 이 요리법을 잘 알려주지 않는 풍토였지만 열심히 하는 그에게는 특별히 잘 가르쳐 줬다. 1973년에 서울시 조리사 면허증을 획 득하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브라질 대 신 서울에 눌러앉아 요리사가 되었다.
『진정한 요리사는 우리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韓食 공부를 많이 했죠. 본초학을 공부하고 우리나라 향신료를 알 아내기 위해 동의보감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초밥전문점 南家스시 南春和 주방장 :『손님 식성에 맞게 만드는 게 秘法이다. 계절 감각을 살려 음식을 내놓는다』
한국적 초밥 일본에 알려
신송간장과 매취순의 모델로 활동한데다 두 권의 요리 전문서적과 자서전을 출간해 대 중에게 친숙한 「南家스시」 南春和(남춘화 ·48) 사장. 그가 건네준 명함에는 직함이 부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음식점을 개업하 기 전에 직함이 부장이었는데다 손님들이 부담스러울까 봐 그랬다는 설명이었다. 요 리사로서는 처음으로 金泳三(김영삼) 정부 때 신한국인으로 선정된 그에게는 초밥의 인간문화재, 맛의 예술가 등 다양한 수식 어가 붙어 있다.
그의 가게에는 메뉴판이 없다. 南家스시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단골들로 그들 모두 단 두 개밖에 없는 메뉴를 잘 알고 있어 따로 메뉴판을 제작하지 않았다. 초밥 2만 5천원, 회 한 접시 7만5천원. 매운탕은 특 별히 부탁하면 끓여준다.
회는 그렇다 치더라도 초밥 가격이 만만찮 다는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일본 본토에서 기술을 전수해 가는데다 일본 니혼 텔레비 전을 비롯한 일본 매스컴이 격찬할 정도로 대단한 집이라는 사실을 알면 비싸다는 생 각이 쑥 들어간다. 7년 전 개업 이후로 한 번도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南家스시에 메뉴판이 없는 대신 벽에 「우 리 초밥」이라는 제목을 단 초밥 사진이 걸 려 있다. 거의 예술작품 수준인 초밥 사진 은 소주업체인 진로의 협찬을 받아 南부장 이 직접 제작한 것. 3천 부를 제작해 전국 의 초밥전문점과 일식집에 무료로 배포했다 . 일식집의 경우 주방장이 업소를 직접 운 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수준 높은 손님들과 대화하면서 음식을 만들다 보니 요리사들도 수준이 저절로 높 아집니다. 손님들과 친숙하다 보니 실력 있 는 요리사들이 다른 업소로 스카우트되는 경우가 종종 생기죠. 그렇게 자리를 옮겨 가면서 경험을 쌓다보면 몇년 뒤 은행대출 을 받아 일식집을 차리게 되죠. 유명한 일 식집 중에 80%는 주방장이 주인입니다』 짧은 기간에 일식집이 급속도로 늘어난 원 인 중에는 주방장의 직접 개업이 한몫을 했 다고 한다.
南春和 부장이 자신의 업소를 갖기까지 우 여곡절이 많았다.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그 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포기 한 채 농사일과 머슴살이를 하다가 돈을 벌 기 위해 18세에 서울로 올라왔다. 식당에서 주방보조로 일하다가 사촌형의 소개로 종 로의 일식집에 들어가면서 일식요리사의 길 을 걷게 되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연 탄을 갈고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日食을 배웠는데 그때부터 일본어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항상 위생복 주머니에다 메모 지를 꽂고 다니면서 요리법과 일본어를 메 모했다. 열심히 하는 그에게 주방장과 선배 들은 귀찮아 하지 않고 열심히 요리를 가르 쳐 주었는데 배운 것을 실습하다가 손등에 기름을 붓기도 하고 장화 안으로 뜨거운 국물을 쏟기도 했다. 칼질을 잘못해 생긴 흉터도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서울 힐튼 호텔 이탈리아 레스토랑 일폰데 鄭燦大 副주방장 :『잘 모를 때는 무조건 물어본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쳐 하나하나 요리를 익혔다』
손님과 대화하면서 요리솜씨 늘어
서울 힐튼호텔 개관 첫해인 1983년에 문을 연 전문 이탈리아 식당 일폰테는 순수 이 탈리안 레스토랑으로서는 국내 1호점. 현재 시중에서 팔고 있는 스파게티와 피자는 아 메리칸 스타일에 가깝다. 힐튼 호텔은 초창 기부터 이탈리아 현지에서 주방장을 초빙해 와 정통 이탈리안 파스타, 피자, 스테이크 , 양고기 요리, 각종 해산물 요리 등 다양 한 이탈리아 요리를 현지의 맛 그대로 재현했다. 지금도 외국인 주방장이 일폰테를 담당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業長(업장)은 鄭燦大(정 찬대·36) 副(부)주방장. 그는 일폰테가 길 러낸 한국인 이탈리아 음식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鄭燦大 부주방장은 해전전문대 관광과를 졸 업한 후 웨이터로 출발했다. 요리를 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1987년에 사보이호텔 아메리칸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1년8개월간 근무했다. 그는 남자만 4형제여서 어릴 때 부터 스스로 라면을 끓여먹었는데 그런 습 관이 요리사를 열망하게 만들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사보이호텔에서는 감자 깎는 일 부터 시작했는데 누가 가르쳐주기보다는 알 아서 해야 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사보이호텔은 철판요리, 일명 데빵야키가 유명하다는데 그는 그곳에서 철판요리에 대 해서는 제대로 배웠다고 자신했다. 1988년도에 힐튼호텔 공채에 합격해서 처음 에는 다른 부서에서 일하다가 1990년도부터 이탈리아 식당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요리사 생활을 몇년 했지만, 생소한 이탈 리아 식당에 오자 깜깜한 거예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다 고 생각하고 차근차근 배웠죠』
///신문사에서 조합해서 올립니다..
저도한문은 잘모르지만 조리사로써 많이느낌니다.
본론에서 나왔듯이 저희는 생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조리사로서 이렇게 호텔조리사로서의 최고인지..
아니면 서민들의 입맛을 즐겁게 해주는 조리사인지 생각해 볼수있었습니다///
첫댓글 그래도 내가 아는 사람이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