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명문가 = 평산신씨(平山申氏) | |||||
그후 927년 태조(太祖) 10년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甄萱) 군사(軍師)와의 싸움에 태조(太祖)와 함께 출정(出征)하여 포위(包圍)로 전세(戰勢)가 위급(危急)해지자 태조(太祖)와 용모(容貌)가 흡사(恰似)한 신숭겸(申崇謙)이 태조(太祖)를 피신(避身)시키고 대신 어차(代身 魚?)를 타고 출전(出戰)하여 전사(戰死)하였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태조(太祖)는 시신(屍身)을 잘 보살펴 춘천(春川)에 예장(禮裝)하고 벽상호기위태사 개국공삼중대광의경대광위이보지절저정공신 (壁上虎騎衛太師開國公三重大匡毅景戴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에 추봉(追封)하였으며, 신숭겸(申崇謙)의 아들 신보장(申甫藏)을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 경북 달성군 공산면 지묘동(慶北 達成郡 公山面 智妙洞)를 세워 그의 명복(冥福)을 빌었다. 평산(平山)은 황해도(黃海道) 남동(南東)쪽에 위치(位置)한 지명(地名)으로 본래(本來)고구려(高句麗) 때 대곡군(大谷郡) 또는 다화실(多和悉)이었던 것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영풍(永豊)으로 고쳤으며, 고려초(高麗初)에 평주(平州)로 하였고 1272년 원종(元宗) 13년 부흥군(復興郡)에 합쳤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다시(多時) 복구(復舊)하였다. 1413년 태종(太宗) 13년에 평산(平山)으로 바꾸고 도호부(都護府)로 승격(昇格)하였으며, 고종(高宗) 때 군(郡)이 되었다. 1120년 예종(睿宗) 15년 왕이 서경(西京: 평양(平壤)에 행차(行次)하여 <팔관회(八關會)>가 열렸을 때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김낙(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의 공(公)을 추도(追悼)하였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代表的)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始祖) 신숭겸(申崇謙)의 11세손 신연(申衍)의 아들 신중명(申仲明: 도관(都官)을 지내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 신자명(申自明: 봉익대부(奉翊大夫)로 춘천부사(春川府使)를 역임(歷任), 신헌주(申憲周: 상호군(上護軍)을 역임(歷任) 3형제(三兄弟)대에서 가세(家世)가 크게 융성(隆盛)하여 명문(名門)의 기틀을 마련했다. 도관(都官) 신중명(申仲明)의 아들 신즙은 고려조(高麗朝)에서 전리판서(典理判事)와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신군평(申君平)은 공민왕(恭愍王) 때 좌대언(左代言)과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올라 당세(當歲)에 대학자(大學者)로 추앙(推仰)되었던 막내 신현(申賢)과 함께 명성(名聲)을 떨쳤다. 한편 대제학(大提學) 집의 셋째 아들인 신안(申晏)은 고려말(高麗末)에 봉선고판관(奉先庫判官)을 거쳐 종부시령(宗簿寺令)에 이르렀으나 고려(高麗)가 망하자 평산(平山)의 황의산(黃衣山)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켰으며, 그의 아들 신개(申槪)가 뛰어났다. 국초(國初)이래 명간관(名諫官)이라고 태종(太宗)이 극찬(極讚)했던 신개(申槪)는 태조(太祖) 때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검열(檢閱)을 지내고 태종(太宗) 때 이조정랑(吏曹正郎), 참의(參議),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등을 거친 후 세종(世宗) 때는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어 북변(北邊)을 자주 침입(侵入)한 야인 토벌(討伐)에 공헌(公憲)했다. 그후 우참찬(右參贊)으로 『고려사(高麗史)』수찬(修撰)에 참여(參與)했으며, 좌찬성(左贊成)과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궤장(?杖)을 하사(賀使) 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447년 세종(世宗) 29년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본래(本來) 왕조(王祖)의 기록(記錄)인 실록(實錄)은 그 객관성(客觀性)이 흐려지고 당왕(唐王)의 세력(勢力)에 좌우(左右)되지 않게 하기 위해 왕(王)이 보는 것을 도의적(道義的)으로 금하게끔 되어 있었는데, 어느날 태조(太祖)가 자신(自身)에 관한 기록(記錄)이 궁금(宮禁)하여 실록(實錄)을 보여 줄 것을 하명(下命)하자 이에 신개(申槪)는 완강(頑剛)히 거부(拒否)하여, 그 후에도 자주(自主) 실록(實錄) 열람(閱覽)을 원하는 임금들에게 간(諫)하는 신하(臣下)들의 좋은 구실(口實)이 되었다. 그는 신자준(申自準: 관찰사(觀察使)를 역임(歷任), 신자승(申自繩: 대사성(大司成)을 역임(歷任), 신자형(申自衡: 집의(執義)를 역임(歷任) 세 아들을 불러놓고 대대로 물려내릴 가훈(家訓)을 다음과 같이 정하여 가르쳤다. <언충신, 행독경, 소심익익, 대월상제(言忠信, 行篤敬, 小心翼翼, 對越上帝)>의 유훈(遺勳)을 받은 3형제(三兄弟)는 모두 벼슬길에 나가 관직(官職)을 지내며 후대(後代)에서 훌륭한 인재(人才)를 많이 배출(輩出)시켜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중추적(中樞的)인 인물(人物)이 되었다. 신개(申槪)의 아우로 태종(太宗) 때 문과급제(文科及第)한 신효(申曉)는 우정언(右正言)을 거쳐 세종(世宗) 때 교수관(敎授官)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신영(申瑛)이 김식(金湜)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우고 중종(中宗) 때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百姓)들의 추앙(推仰)을 받았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신군평(申君平)의 손자(孫子)로 공양왕(恭讓王) 때 지신사(知申事)를 역임(歷任)한 신호(申浩: 한림(翰林) 신혼(申琿)의 아들)는 고려(高麗)의 국운(國運)이 기울(氣鬱)자 옥세(玉璽)를 부둥켜 안고 이성계(李成桂) 일당(一堂)에 항거(抗拒)했으나 역부족(力不足)으로 실패(失敗)하자 고향(故鄕)인 평산(平山)으로 내려가 은거(隱居)하였고, 전리판사(典理判事)의 벼슬을 내려 수차(數次)에 걸친 태조(太祖)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성균관유생(成均館儒生) 1천여명(一千餘名)을 이끌고 대궐(大闕)에 들어가 조광조(趙光祖)의 구명(救命)을 상소(上疏)했던 명인(名人)은 항상(恒常) 울분(鬱憤)을 품고(稟告) <풍류광객(風流狂客)>이라 자칭(自稱)하며 전국(全國)을 방랑(放浪)하다가, 거창(居昌)에 은거(隱居)하던 스승 김식(金湜)이 자결(自決)했다는 소식(消息)을 듣고 달려가 시신(屍身)을 거두어 충주(忠州)에 장사(葬事)지냈다. 당시(當時) 김식(金湜)이란 이름만 입에만 담아도 역적(逆賊)시 당했던 때인데, 그 시체(屍體)를 운반(運搬)했던 명인(名人)의 용기(容器)에 세상람들은 극찬(極讚)을 아끼지 않았으며, 장송도중(葬送道中) <조송옥사(弔宋玉辭)>라는 애도시(哀悼詩)를 지어 자기의 뜻을 밝히고, 다시(多時)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시주(施主)로 일생(一生)을 마쳤다. 명인(名人)의 아들 신익(申翌)은 명종(明宗) 때 무과급제(武科及第)하여 함평현감(咸平縣監)으로 나가 치적(治積)을 쌓았고, 선조(宣祖) 때 제주목사(濟州牧使),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 순천 부사(順天府使)등을 역임(歷任)하였다. 그는 본래(本來) 남대문(南大門) 밖 청파의 배다리 근처(近處)에 살았다. 하루는 집 근처(近處)에서 길건너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당시(當時) 병조판서(兵曹判書) 류전(柳琠)의 행차(行次)를 범하여 전도(前導)하는 하인(下人)에게 끌려가 욕을 당했다. 신익(申翌)은 모르고 범한 것인데 너무 지나치게 욕을 보였다 하여 이 하인(下人)을 번쩍 들어 도랑에 내던져 버렸다. 이 소란(騷亂)을 보고 있던 류전(柳琠)은 신익(申翌)을 장하게 보고 임금에게 대장부(大丈夫) 하나를 발견(發展)했다고 아뢰어 선전관(宣傳官)에 특채(特採)되었으며, 명종(明宗)이 서교(西敎)에 나갔을 때 거센 돌풍(突風)에 어막(魚幕)의 끈이 끊겼는데 신익(申翌)은 그 끈을 붙잡고 어막(魚幕)이 넘어지지 않도록 혼자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신개(申槪)의 증손(曾孫) 신상은 어려서 부터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여 조광조(趙光祖), 이자(李 )와 더불어 뜻과 지론(持論)을 같이했으나 그들의 혁신정치(革新政治)에 저항(抵抗)을 느껴 중도사상(中道思想)을 지녔으며, 중후(重厚)한 인격(人格)으로 추앙(推仰)을 받았다. 일찍이 평안감사(平安監司)가 되어 평산부(平山府)의 아관(衙官)을 지날 때 본관(本貫) 마을이라 하여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지나갔다고 한다. 선조(宣祖) 때 명장(明匠)으로 유명(有名)했던 신입(申砬: 신상의 손자(孫子)은 1583년 선조(宣祖) 16년 온성부사(穩城府使)가 되어 북면(北面)에 침입(侵入)해 온 니탕개(尼湯介)를 격퇴(擊退)시키고 두만강(두만강)을 건너가 야인(野人)들의 소굴(巢窟)을 소탕(素湯)하고 개선(改善)하자 선조(宣祖) 임금은 교외(敎外)에까지 직접(直接) 마중을 나가 전포에 핏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보고 어의(御醫)를 벗어주었으며 장군(將軍)에게 혼기(婚期)에 닥친 딸이 있는 것을 알고는 신성군(信城君: 선조(宣祖)의 넷째 아들)의 아내로 삼아주는 등 극진(極盡)히 대해(大害)주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선조(宣祖)는 손수 불러 보검(寶劍)을 내리며 왜군토벌(倭軍討伐)을 부탁(付託)했으나 빈약(貧弱)한 병력(兵力)으로 출전(出戰)하여 충주(忠州)의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적군(赤軍)과 대결(對決)하다 참패(慘敗)하자 부하장(部下長) 김여물(金汝 )과 함께 강물에 투신(投身) 자결(自決)했다. 신입(申砬)의 아들 3형제(三兄弟) 중 장남(長男) 신경진(辛慶晉)은 혼탁(混濁)한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을 개탄(慨歎)하여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모자(主謀者)로 선두(先頭)에서 공을 세우고 정사일등공신(靖社一等功臣)에 책록(冊錄)되어 공조참의(工曹參議)와 병조참판(兵曹參判)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라 훈련(訓鍊), 호위(扈衛), 포도(捕盜)의 3대장(三大長)을 겸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남한산성(南漢山城) 수비(守備)를 담당(擔當)했다. 특히 그는 아버지가 투신(投身)해서 죽은 강의 물고기를 어찌 먹을 수 있겠느냐 하며 평생(平生) 동안(同案) 물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封)해지고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러, 정사이등공신(靖社二等功臣)에 봉(封)해진 아우 신경우(申景裕), 동성군(東城君) 신경인(申景?)과 함께 의절(儀節)의 무맥(無脈)을 이었다. 개성도사(開城都事) 신승서(申承緖)의 아들 신흠(申欽)은 인조(仁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정주학자(程朱學者)로 문명(問名)을 떨쳤으며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더불어 조선중기(朝鮮中期) 한문학(漢文學)의 태두(太豆)로 일컬어졌고,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아우 신감(申鑑)과 함께 가문(家門)을 빛냈다. 인조(仁祖)로 부터 "신하(臣下)가 모두 이같으면 걱정이 없겠다"고 칭찬(稱讚)을 받았던 감은 용양위부사직(龍蚊衛副司直) 겸 춘추관기주관(春秋官記注官)이 되어 앞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불타 없어진 『왕조실록(王朝實錄)』의 재간(再刊)에 참여(參與)했고, 남원부사(南原府使)와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를 역임(歷任)했다. 신흠(申欽)의 아들 신익성(申翊聖)은 선조(宣祖)의 딸 정숙옹주(靜淑翁主)와 혼인(婚姻)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封)해지고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을 반대(反對)하다가 전리(田里)에 방축(放逐)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재등용(再登用)되어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왕을 호종(護從)하여 청군(淸軍)과 계속(繫屬) 싸울 것을 강력(强力)하게 주장(主張)했고, 화의(和議)가 성립(成立)된 후에도 계속척화(繫屬斥和)를 주장(主張)한 <척화오신(斥和五臣)>중의 한 사람으로 심양에 붙잡혀 갔다. 영의정(領議政) 신흠(申欽)의 손자(孫子) 신최(申最: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의 아들)는 효종(孝宗) 때 봉교(奉敎)로 춘추관기사관(春秋官記事官)을 겸하여 『인조실록(仁祖實錄)』편찬(編纂)에 참여(參與)했으며 문장(文章)에 능해 『해동사부(海東辭賦)』에 시부(詩部)가 전한다. 참판(參判) 신익전(申翊全: 신흠(申欽)의 아들)의 아들 신정(申晸)은 현종(顯宗) 때 춘당대분과에 급제(及第)하여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을 역임(歷任)했고, 숙종(肅宗) 때 좌우참찬(左右參贊)과 예조판서(禮曹判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으며 시문(詩文)에 능하고 글씨에 뛰어났다. 영의정(領議政) 신흠(申欽)의 증손(曾孫) 신만(申曼)은 17세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부모(父母)와 처(妻)를 데리고 강화(江華)에 피난(避難)갔다가 그 곳에서 어머니와 처홍씨(妻洪氏)가 해를 입고 죽자 그 울분(鬱憤)과 치욕(恥辱)을 가눌 길이 없어 죽으려 하였으나 아버지가 살아있어 못죽고 있다가 난(亂)이 평정(平靜)되었다. 그는 그 치욕(恥辱)을 몸에 입고 한양(漢陽)의 성문(城門) 안에 들어설 수 없다고 하여 회덕(懷德)의 송촌(宋村)에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 학업(學業)을 닦고 부안(扶安) 백연동(白連洞)과 진잠(鎭岑) 구봉산(九峰山) 등지(等地)에서 야인생활(野人生活)을 지속(紙屬)하였다. 그 후 송시열(宋時烈)이 입조(立朝)하여 나라의 중요(重要)한 기획(企劃)에 만의(滿意) 지혜(知慧)를 참작(參酌)하고자 여러번 불렀으나 성안(城案)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며 서신(書信)으로서 정사(正史)에 참여(參與)했고, 전국(全國 각처(各處)에 흩어진 명학자(明學者)들을 찾아 방랑(放浪)하고 명소(名所)마다 찾아가 놀면서도 국정(國政)에 참여(參與)했으므로 <야인판서(野人判書)>로 불리웠다. 그는 임종 때도 왜놈(倭?)과 한 하늘에 살다 죽으니 지하(地下)에 가서 선친(先親)에게 고할 말이 없다고 원통(寃痛)해하며 숨져 갔다고 한다. 철저(徹底)한 배청숭명주의자인 신민일(申敏一)의 아들 신상(申尙)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족(王族)의 호위직(護衛職)을 맡아 강화도(江華島)에 피난(避難)갔는데 적이 임박(臨迫)해오자 호의(豪毅)의 신들이 모두 도망(逃亡)가고 혼자 세자빈(世子嬪)을 지키고 있었다. 이 때 청병(淸兵)이 세자빈(世子嬪)에게 접근(接近)하여 그들의 장신(將臣)에게 배례(拜禮)시킴으로써 굴복(屈伏)의 예를 갖추도록 강요(强要)하자, 표정(表情)하나 흐트리지 않고 서있던 그는 빈(嬪)의 시종(始終)에게 화구(火具)를 달구어 오라시키고 그것을 빈(嬪)이 협박(狹薄)받고 있는 연(筵: 임금이 타는 가마의 하나) 속에 넣어주며 자결(自決)을 권하였다. 그리고 빈(嬪)의 죽음을 확인(確認)한 다음 자기(自己)도 따라 자결(自決)할 작정(作定)이었다. 많은 부녀자(婦女子)들의 자결(自決)을 보아온 청병(淸兵)은 이에 겁을 먹고 그 굴욕배례(屈辱拜禮)를 단념(斷念)하고는 그저 신변(身邊)만을 보호(保護)토록시켰다. 이렇게 세자빈(世子嬪)을 구제(救濟)해낸 신상(申尙)에게, 세자빈(世子嬪)에게 죽음(竹陰)을 강요(强慂)했다는 모략(謀略)까지 곁들여 죄목(罪目)을 씌우려 하자 스스로 유배(流配)길을 택하여 원주(原州)로 내려가 초가 두 칸을 짓고 사람의 내완(來往)을 사절(死節)했다고 한다. 그는 그 곳에서 『부음록(缶音錄)』3권(三權)과『휘언(彙言)』두편두편을 저술(著述)하여 후손(後孫)에게 전했다고 하며, 신상(申尙)의 아들 직간(直諫)으로 당대(當代)에 백성(百姓)들의 속을 후련하게 했던 신명규(申命圭: 현종(顯宗) 때 집의(執義)를 역임(歷任)이다. 당대(當代)의 유종(儒宗)으로 예학(禮學)의 거두(巨頭)였던 석학(碩學) 박세채(朴世采)에게 학문(學問)을 연마(硏磨)하여 서인(西人)으로서 숙종(肅宗) 때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던 신완(申玩: 신여정의 아들)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처벌(處罰)을 주장(主張)했고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조(築造)를 건의(建議)하여 왕의 승낙(承諾)을 받았으나 일부(一部)의 반대(反對)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평천군(平川君)에 봉(封)해졌다. 영조(英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及第)했던 신만(申晩)은 정자(亭子)를 거쳐 실록청 도청낭청(實錄廳都廳郎廳)이 되었다가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小論)이 득세(得勢)하자 파직당(把直當)했으나 다시 등용(登用)되어 이조(吏曹)와 호조(戶曹)의 판서(判書)를 역임(歷任)하고 편수당상으로 『천의소감(闡義昭鑑)』을 편찬(編纂)했으며,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에 이르러, 역시(亦是) 영의정(領議政)을 역임(歷任)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아우 신회(申晦)와 함께 가문(家門)을 대표(代表)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숙종(肅宗) 때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을 지내고 문장(文章)과 시문(詩文)에 탁월(卓越)했던 신유한(申維翰)과 영조(英祖) 때 대사헌(大司憲)을 역임(歷任)한 신위(申暐)가 유명(有名)했고, 어영대장(御榮大將)을 거쳐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낸 신대겸(申大謙)과 청안(靑眼)한 문장(文章)과 서예(書藝)로 명망(名望)이 높았던 신작(申綽)은 시서화(詩書畵)에 능하여 삼절(三絶)로 이름났던 신위(申緯: 참판(參判) 신연승의 아들)와 함께 이름을 떨쳤으며, 판관(判官) 신광온(申光蘊)의 아들 신재식(申在植)은 헌종(憲宗) 때 대제학(大提學)을 역임(歷任)하여, 고종(高宗) 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使)에 오른 신명순(申命淳), 좌의정(左議政) 신응조(申應祖: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 신상현(申常顯)의 아들), 판삼군부사(判三軍府使) 신헌(申櫶), 판소리 대가 신재효(申在孝), 임오군란(壬午軍亂)의 책임(責任)을 지고 임자도(荏子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던 신정희(申正熙), 비서원승(秘書院丞)과 동지돈령원사(同知敦零院事)를 지낸 신두선(申斗善), 대동학회장(大東學會長)과 수학원장(修學院長)을 역임(歷任)한 신기선(申箕善), 영남지방(嶺南地方)의 의병장(義兵長)으로 활약(活躍)한 신돌석(申乭錫), 경북 의용단장(慶北 義勇團長) 신태식(申泰植)등과 함께 명문(名門)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한말(韓末)에 와서 특히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독립군(獨立軍) 양성(養成)에 전력(全力)했던 신팔균(申八均)이 토비(討匪)의 습격(襲擊)을 받고 순절(殉節)했으며, 3·1절 기념방송사건(3·1節 紀念放送事件)과 반동비밀결사(反動秘密結辭)의 고문(顧問)으로 추대(推戴)되었다는 혐의(嫌疑)로 체포(逮捕)되어 복역중(僕役中 )6·25 때 총살(銃殺)당한 신석구(申錫九)는 곡성(曲城) 출신(出身)의 의병(義兵) 신정백(申正栢), 내장사(內藏寺)에서 재기(再起)를 도모(桃摸)하다가 사형(死刑)당한 신덕균(申德均), 광복회(光復會) 초대회장(初代會長) 신덕영(申德永),『심경』이란 잡지(雜誌)를 발간(發刊)하여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앞장섰던 신현구(申鉉九), 광복군(光復軍) 참리부(參里部) 내무사랑(內務舍廊) 신우현(申禹鉉)이 대표적(代表的)이며,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에 당선(當選)되어 초대부의장(初代副議長)을 지내고 민주국민당최고위원(民主國民黨最高委員)과 민주당대표최고위원(民主黨代表最高委員)으로 야당(野黨)을 영도(領導)했던 신익희(申翼熙: 장례원경(掌禮院卿) 신단(申檀)의 아들)는 자유당(自由黨) 독제정권치하(纛祭政權治下)에 민주당(民主黨) 공천(公薦)으로 대통령(大統領)에 출마(出馬)하여 명문(名門) 평산신씨(平山申氏)의 가맥(家脈)을 더욱 빛냈다. 평산신씨(平山申氏)는 25파로 나뉘어져 있으나 본군(本郡)에는 본파(本派)로 개성(開城)서 예천(醴泉) 은풍(殷豊)으로 내려온 후손(後孫)들이 살게되어 혹시(或是) 이르기를 은풍신씨(殷豊申氏)라고도 한다. 신온(申蘊)의 셋째아들 신계숙(申繼叔)은 예천신당(醴泉新黨)서 물야수식(物野水息)으로 외손본사(外孫奉祀)하기 위하여 1550년 경때 입향(入鄕)하였다. 신윤안(申允安) 관찰사(觀察使) 신중전(申重全)의 아들인데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판서(判書) 벼슬을 하였다. 신온(申蘊) 호(號)는 타괴헌(打乖軒)이고 참봉(參奉)을 지냈다. 신계숙(申繼叔) 호(號)는 수은당(水隱堂)으로 신온(申蘊)의 아들이며 관직(官職)은 어해장군(禦侮將軍)이다. 천성(天性)이 인자(仁者)하고 재질(才質) 또한 영특(英特)하여 학문(學問)에 부지런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 제자백가( 諸子百家)를 두루 섭렵(涉獵)하여 당대(當代)의 문장가(文章家)였으며 글씨 또한 뒤어나 사림(士林)의 추앙(推仰)을 크게 받았다. 겸(兼)하여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부모(父母)가 원하는것 이라면 때와 장소(葬所)를 가리지 않고 기필(起筆)코 구해(救解)다 드렸다. 이렇듯 지성(至誠)으로 하니 어버이 병환(病患)에 약(藥)구하려 한 밤중에 갈때는 호랑이 눈으로 불을 밝혀 인도(仁道)하였다. 상사(喪事)에 임하여 한치도 어긋남이 없이 집상(執喪)에 일상통곡(日商慟哭)으로 기나긴 3년세월(三年歲月)을 보내여 세인(世人)들이 출천지효(出天至孝)라고 칭송(稱誦)하였다. 외조부(外祖父) 박자범(朴自範) : 영덕인(靈德人) 신라충신(新羅忠臣) 박제상(朴提上)의 후손(後孫) 관직(官職)은 부산첨사(釜山僉使))이 아들이 없어, 외손(外孫) 봉사(奉祠)하기 위하여 예천군호명면신당에서 봉화군 물야면 수식으로 옮겨앉아 친부모(親父母) 이상(以上)으로 보살핌이 지극(至極)하였다. 현재(現在)도 후손(後孫)들이 외조상(外祖上)부터 묘사(墓祀)를 지내고 친조상(親祖上)은 그뒤에 지내고 있다. 평산신씨(平山申氏) 물야 수식(物野 水息)의 입향조(入鄕祖)이다. 신곤(申坤) 1524년 중종(中宗) 19년 ~ ? 자(字)는 후재(厚載) 사복시 주부(司僕寺 注簿)를 지냈다. 신석번(申石蕃) 1524년 선조(宣祖) 29년 ~ 1675년 숙종(肅宗) 원년(元年) 자(字)는 중연(仲衍)이며 호(號)는 백원(百源)으로 신응지(申應之) 후예(後裔)로서 인조(仁祖) 11년 생원(生員)하고 세자사부 자의사업 장령(世子師傅 諮議司業 掌令)을 임명(任命)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學問)에 잠심(潛心)하여 증(贈)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고 상주(尙州) 운계서원(雲溪書院)에 배향(背向)되었으며 저서(著書)로는 백원집(百源集) 3권이 전한다. 신경명(申敬命) 1594년 ~ 1660년 자(字)는 사긍(士兢)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냈다 신균(申均) 1628년 인조(仁祖) 6년 ~ 1708년 숙종(肅宗) 34년 자(字)는 평중(平仲) 호군 첨추(護軍 僉樞)를 지냈다 신의명(申義命) 1654년 효종(孝宗) 5년 ~ 1716년 숙종(肅宗)42년 자(字)는 안수(安?)이며 호(號)는 외암(畏岩) 진사(進士) 신유(申維)의 후손(後孫)으로 1684년 숙종(肅宗) 10년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예조좌랑(禮曹佐郞) 강익현감(康翊縣監)응 역임(歷任)뒤에 고을 사람들이 영정사(影禎寺)를 세웠다. 저서(著書)로는 이기심성지변(理氣心性之辯)과 고금치난(古今治亂) 역대인물(歷代人物)을 모아 성질(成秩)하였다. 완산(完山) 유필영(柳必永)이 찬묘갈명(撰墓碣銘)하였고 문집(文集)이 간행(刊行)되었다. 신응지(申應之) 자(字)는 자흠(子欽)이며 호(號)는 경체당(景?堂)으로 시남(市南) 신분(申賁)의 아들로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사간(司諫), 의흥현감(義興縣監)을 지냈다. 신모(申模) 1749년 영조(英祖) 25년 ~ 1798년 정조(正祖) 22년 자(字)는 문칙(文則)이며 호(號)는 몽희와(夢羲窩)로 문사(文師)와 필법(筆法)이 뛰어나 사림(士林)의 추앙(推仰)이 높았다. 신분(申賁) 호(號)는 시남(市南)이고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교리(校理)를 역임(歷任)하였다. 신대응(申大膺) 1749년 정조(正祖) 13년 ~ 1863년 철종(哲宗) 14년 자(字)는 대유(大猷)이며 호(號)는 화석(華石)으로 경체당(景?堂) 신응지(申應之)의 후손(後孫) 첨지중추(僉知中樞) 신영눌(申永訥)의 아들로 1819년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고성현감(固城縣監), 남양도호부사(南陽都護府使), 병조참판(兵曹參判), 경전특진관(經?特進官), 도승지(都承旨), 도총관(都摠管)등 역임(歷任)하였다. 저서(著書)로 화석집(華石集)이 전한다. 신재하(申在夏) 1793년 정조(正祖) 17년 ~ 1857년 철종(哲宗) 8년 자(字)는 시성(時聖)이며 호(號)는 수양(水陽)으로 참봉(參奉) 타괴헌(打乖軒) 신온(申蘊)의 후(後)이다. 문행(文行)이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을 받았으며 상예절요(喪禮節要)를 저술(著述)하였고 저서(著書)로 수양집(水陽集)이 전한다. 신석정(申錫鼎) 1822년 순조(純祖) 22년 ~ 1900년 광무(光武) 4년 자(字)는 형오(亨吾)이며 호(號)는 백사(白史)으로 수양(水陽) 신재하(申在夏) 장자(長子)이다. 효성(孝誠)과 우애(友愛)가 극진(極盡)하였으며 경학(經學)에 조예(造詣)가 깊어 영남유림(嶺南儒林)에서 예장(禮葬)하였다. 저서(著書)로 백사집(白史集)이 전하며 진사(進士) 김석(金 土奭)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신석이(申錫履) 1824년 순조(純祖) 24년 ~ 1913년 륭희(隆熙) 7년 자(字)는 정오(定吾)이며 호(號)는 태소재(太小齋) 수양(水陽) 신재하(申在夏) 차자(次子)이다. 형제간우애(兄弟間友愛)가 지극(至極)히 두터워 공피공흠(共被共欽)을 80년간(年間) 하루같이 하였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하였고 저서(著書)로 태소재집(太小齋集)이 전한다. 신태운(申泰雲) 1843년 헌종(憲宗) 11년 ~ 1896년 고종(高宗) 33년 자(字)는 일여(日汝)이며 호(號)는 회산(晦山)으로 몽희와(夢羲窩) 신모(申模)의 현손(玄孫)이다. 학문(學問)에 전념(專念)하여 갑오경장이후(甲午更張以後) 쇠망일로(衰亡一路)에 있는 국운(國運)을 우려(憂慮)하여 고종(高宗) 병신(丙申)에 우국동지(憂國同志)를 규합(叫合)하여 의거입산(義擧入山)하였으나 여의(如意)치 못하여 분사(憤死하였다. 저서(著書)로 문집(文集이 있고 만산(晩山) 신태일(申泰一)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신하규(申夏圭) 1845년 헌종(憲宗) 11년 ~ ? 자(字)는 문칙(乃玄)이며 호(號)는 노암(鷺巖)으로 수은당(水隱堂)의 후로 효행(孝行)과 우애(友愛)가 깊음은 물론(勿論) 학문연구(學問硏究)에도 많은 노력(勞力)을 하여 유고(遺稿)가 있다. 신태일(申泰一) 1852년 철종(哲宗) 3년 ~ 1938년 자(字)는 계봉(季峰)이며 호(號)는 희암(希庵)으로 학문연구(學問硏究)에도 많은 노력(勞力)을 하여 문집(文集)가 있다. 신영규(申永圭) 1857년 철종(哲宗) 8년 ~ 1916년 자(字)는 석윤(錫胤)이며 호(號)는 관수(觀?)으로 학문연구(學問硏究)에도 많은 노력(勞力)을 하여 유고(遺稿)가 있다. 신재기(申在驥) 1865년 고종(高宗) 2년 ~ 1944년 자(字)는 덕일(德一)이며 호(號)는 송조(松 土鳥)으로 학문연구(學問硏究)에도 많은 노력(勞力)을 하여 유고(遺稿)가 있다. 신재형(申在衡) 1873년 고종(高宗) 10년 ~ ? 자(字)는 순일(舜一)이며 호(號)는 학암(鶴岩)으로 궁내부주사(宮內府主使)신정규(申鼎圭)의 아들이다. 문학(文學)과 행의(行誼)로 부자(夫子)의 풍도(風度)가 있어 사림의 중망(重望)이 두터웠다. 유고(遺稿)가 있다. 신상(申商) 자(字)는 득지(得志)로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내다. 시호(諡號)는 공도공(恭度公)이다 신태로(申泰魯) 조선(朝鮮) 고종(高宗) 때 진사(進士)를 하였다. 신박(申珀) 자(字)는 중옥(仲玉)로 사의(司議)를 지냈다. 신공헌(申公獻) 자(字)는 헌지(獻之)로 사용(司勇)을 지냈다. 신운(申雲) 자(字)는 대규(大奎)이며 호(號)는 청수당(淸粹堂)으로 주부(注簿)를 하였고 이조참의(吏曹參議)로 贈職)되었다. 신재달(申再達) 자(字)는 덕수(德?)로 사복시정( 司僕寺正)을 지냈다. 신정생(申鼎生) 자(字)는 내구(乃九)로 주사(主辭)를 지냈다 신언집(申彦潗) 1878년 고종(高宗) 15년 ~ 1909년 자(字)는 해응(海應)이며 호(號)는 초당(蕉堂)으로 회산(晦山) 신태운(申泰雲)의 아들로 영민박식(潁敏博識)하고 효성(孝誠이 지극(至極) 하였다. 고종(高宗) 때 탁지부기사(度支部技士)로 발탁(拔擢)되어 법학(法學)을 공부(公簿)하여 국가외유고시(國家外遊高試)에 합격(合格)하였다. 신재도(申在道) 1881년 고종(高宗) 18년 ~ ? 자(字)는 관일(貫一)이며 호(號)는 괴헌(槐軒)으로 주사(主辭)를 하였으며 학행(學行)이 있었다. 유고(遺稿)가 전한다. 신규(申逵) 사직(司直)을 하였다. 신언직(申彦稷) 1884년 고종(高宗) 21년 ~ 1961년 자(字)는 순좌(舜佐)이며 호(號)는 취주(翠洲) 회산(晦山) 신태운(申泰雲)의 차자(次子)로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의 문인(文人) 신구문학(新舊文學)을 섭렵(涉獵)하여 아체음(我體吟) 배야론(排夜論) 화해사전변무록(華海師全辨誣錄)등(等) 70여권 문집(文集)을 남겼다. 신언구(申彦?) 1886년 고종(高宗) 23년 ~ 1974년 자(字)는 원극(圓極)이며 호(號)는 만사(萬思)로 희암(希庵) 신태일(申泰一)의 아들이다. 의표(儀表)가 중위(重偉)하고 도량(度量)이 활달(?闊 達)하여 매사(每事)에 처리(處理)를 현하척결(懸河剔抉)하니 사림(士林)에서 추중(推重)하였다. 신석건(申錫建) 1888년 고종(高宗) 25년 ~ 1971년 자(字)는 건부(建夫)이며 호(號)는 효산(曉山)으로 학행(學行)이 있었다. 유고(遺稿)가 전한다. 신도순(申道淳) 1902년 광무(光武) 6년 ~ 1986년 자(字)는 치원(致遠)이며 호(號)는 신재(愼齋)로 초당(蕉堂) 신언집(申彦潗)의 아들이다. 경성법전(京城法專)을 졸업(卒業)하여 법원장(法院長) 변호사(辯護士)를 역임(歷任)하였다. 신광엽(申光燁) 진사(進士)를 하였다. 신규(申逵) 사직(司直)을 하였다. 현대인물(現大人物)로는 신명순(申明淳) 1919년생(年生)으로 물야수식(物野水息)에서 출생(出生)하여 경성사범연수과(京城師範演修科)를 졸업(卒業)하고 봉화군교육청교육장(奉化郡敎育廳敎育長)를 역임(歷任)하였다. 신석용(申錫龍) 1923년생(年生)으로 물야수식(物野水息)에서 출생(出生)하여 안동농림고등학교(安東農林高等學校)를 졸업(卒業)하고 봉화군농촌지도소장(奉化郡農村指導所長)를 역임(歷任)하였다. 신태인(申泰仁) 1923년생(年生)으로 물야수식(物野水息)에서 출생(出生)하여 서울공업고등학교(工業高等學校)를 졸업(卒業)하고 한전안동변전소장(韓電安東變電所長)를 역임(歷任)하고 서예가(書藝家)로 활동(活動)을 했다. 신효순(申孝淳) 1923년생(年生)으로 물야수식(物野水息)에서 출생(出生)하여 대구상업고등학교(大邱商業高等學校)를 졸업(卒業)하고 시대극장(時代劇場)사장(社長), 재경봉화향우회장(在京奉化鄕友會長)를 역임(歷任)하였다. 신태형(申泰亨) 1924년생(年生)으로 물야수식(物野水息)에서 출생(出生)하여 영주농업고등학교(榮州農業高等學校)를 졸업(卒業)하고 내성초등학교장(乃城初等學校長)를 역임(歷任)하였다. 신만순(申萬淳) 1925년생(年生)으로 물야수식(物野水息)에서 출생(出生)하여 전주사범학교(全州師範學校)를 졸업(卒業)하고 물야초등학교장(物野初等學校長)를 역임(歷任)하였다. 신언번(申彦樊) 1927년생(年生)으로 물야수식(物野水息)에서 출생(出生)하여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를 졸업(卒業)하고 소천초등학교장(小川初等學校長)를 역임(歷任)하고 서예가(書藝家)로 활동(活動)을 했다. 신태정(申泰貞) 1928년생(年生)으로 물야수식(物野水息)에서 출생(出生)하여 영주농업고등학교(榮州農業高等學校)를 졸업(卒業)하고 내성(乃城),도촌(都村)초등학교(初等學校)교감(校監), 선산(善山)초등학교장(初等學校長)를 역임(歷任)하였다. 신태훈(申泰勳) 1931년생(年生)으로 물야수식(物野水息)에서 출생(出生)하여 영주농업고등학교(榮州農業高等學校)를 졸업(卒業)하고 김천초등학교장(金泉初等學校長)를 역임(歷任)하였다. 신동식(申東植) 1932년생(年生)으로 물야수식(物野水息)에서 출생(出生)하여 서울공대(工大)영국(英國)DURHAM대학원(大學院)를 졸업(卒業)하고 공학박사(工學博士), 대통령경제담당수석비서관(大統領經濟擔當首席秘書官),한국조선학회장(韓國造船學會長)를 역임(歷任)하였다. 신태원(申泰元) 1932년생(年生)으로 물야수식(物野水息)에서 출생(出生)하여 장학사(?學事)를 역임(歷任)하였다. 심부일(申富一)1943년생(年生)으로 물야수식(物野水息)에서 출생(出生)하여 안동농업초급대학(安東農業初級大學)를 졸업(卒業)하고 문경군청사회과장(聞慶郡廳社會科長)를 역임(歷任)하였다. 신우순(申祐淳) 1944년생(年生)으로 물야수식(物野水息)에서 출생(出生)하여 중앙대(中央大)영화과(映畵科)를 졸업(卒業)하고 봉화기업사장(奉化企業社長)를 역임(歷任)하였다. 신태길(申泰吉) 1954년생(年生)으로 물야수식(物野水息)에서 출생(出生)하여 서울법대(法大)를 졸업(卒業)하고 사법고시(司法考試), 판사(判事)를 역임(歷任)하였다. 신형철(申亨澈) 1955년생(年生)으로 물야수식(物野水息)에서 출생(出生)하여 서울대(大)를 졸업(卒業)하고 미국유학(美國留學)하여 유전공학(遺傳工學)박사(博士)로 활동(活動)하고 있다. 신태시(申泰時) 1959년생(年生)으로 물야수식(物野水息)에서 출생(出生)하여 경북대(慶北大)법대(法大)를 졸업(卒業)하고 사법고시합격(司法考試合格)하여 활동(活動)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