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궁 좀 쉬었다하는게 어떤가 ?" "안됩니다.빨리 오늘 진도를 끝내셔야합니다.한림학사와 아직 하실 공부가 오후에도 한참 남았습니다." 벌써 이경도 한참 지났는데..그녀는 이마를 찌푸리며 투덜거렸다.꾀를 부리면 자신에게 기저귀라도 채우고 공부를 시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완고한 상궁이었다. 늙은 상궁이 한심한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비빈마마들도 책봉되기전 궁중예법에 대한 수업을 거치는것이 궁의 법도입니다.하물며 마마는 수업도 받지않고 입궁하셨지요.제국내 명문가들의 가계와 황족들의 관계를 비롯해 왕부의 왕비와 공주들을 다루는 예법이 끝나면 다른 상궁이 선대황제와 황후폐하의 전기를 가르칠겁니다.태후께서 언젠가 하문하실지모르지만 신분과 위신을 위해 통달하셔야합니다." 상궁의 엄한 말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궁중예법을 가르치는 시간은 가장 따분했다.무슨 법도가 이리 많고 복잡한지 입궁해서 해가 바뀌어가는데도 끝나지않는다. "마마께서는 이미 비마마로 책봉되셨으니 황후마마다음의 신분이십니다.훗날 내외명부와 황궁내 일을 통솔하시려면 서둘러 익혀두셔야합니다." "내가?황후가 있는데?" 그녀의 의아한 말에 늙은 상궁은 한숨을 쉬었다. "현비라..그래봐야 첩실인데..." 그녀의 불평섞인 자조적인 중얼거림에는 원하지도 않는 입궁을 시켰다는 원망이 배어 있었다. "황상의 뜻입니다.황후마마는 훨씬 엄격한 수업을 거치고 책봉되는만큼 마마께서는 트집잡히지않기위해서라도 수업에 힘쓰세요." "오라버니뜻이라고?" "늙은 한림학사가 조정의 일도 같이 가르치지않습니까?그는 황상의 심복입니다.아참,궁인들 있는 데서는 오라버니 라고 부르시면 안됩니다." "훗날 황후나 태후마마가 부재시거나 마마께서 황태자를 생산하시면 내명부의 수장이 되시는건데 아랫것들이나 궁인들에게 얕잡히면 안되지않습니까?" 그녀는 얼떨덜한 얼굴로 그가 보낸 상궁을 바라보았다.지난번 시장에서 난동에 휘말린 일로 한림학사와 조정에대한 공부하란게 벌인줄만 알았는데.. "저녁에 황상께서 오실터이니 불경 쓴걸 보여드리세요.마마의 조맹부체필체를 좋아하시니..." "난 난치는 게 더 좋은데.."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림은 불경을 베끼고 난 후 그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저녁법회에 가실 준비를 하시지요..." "궁에 무슨 예불이 이리 많은가?" 그녀가 물었다. "태후께서 외아들을 잃은 지 얼마안되지않으셨잖습니까?아직 상중인데..그래서 더 조심하시란 겁니다.질녀인 황후마마가 회임도 못하고 총애도 못받는데 황상께서 마마를 입궁시키라 명하셨으니.." 그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상궁들은 그녀를 치마폭의 말안듣는 아이취급하듯했다.귀하지만 엄히 가르쳐야하는 말썽꾸러기내지 개구장이로 여기는 속내가 느껴졌다. 가정교사노릇을 하는 늙은 한림학사와 예법을 가르치는 상궁들은 그녀가 수업에 꾀를 부리는 것도 문안이나 법회같은 궁중의 일과를 빼먹는 것도 용납하지않았다. 유모와 상궁들이 예복을 가져와 갈아입혔다. 하지만 대례복은 말괄량이인 어린 비빈에게는 버거운 것이었다. 유모가 입혀준 허환진에 버선과 속바지차림으로 거울앞에서자 보모상궁이 힘껏 등뒤에서 늘어진 끈들을 죄어 묶은 후 상궁들이 차례로 한벌씩 속치마를 걸쳐주는 건 고역이었다.각기 맡은 치장과 옷가지가 있어 한가지도 빼먹지도 않는다.한번 대례복을 차려입을때마다 상궁들에게 발가벗겨진 아기가 된 기분이었다. 상궁이 그녀의 가는 허리에 세번째 비단 허리띠를 조이자 그녀는 이내 낮은 비명을 질렀다. "살살 좀 묶어줘.유모.속치마가 몇 벌인가?" "궁의 법도입니다.비마마시니 천한 평민들처럼 경박한 옷차림으로 다니시면 안됩니다.." 강남에서는 속치마한벌이면 되었는데..세번째 흰명주속치마를 걸치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속치마라고해도 예복치마처럼 폭넓은데다 길고 수놓은 흰 비단으로 지은 것들을 두세벌씩 껴입자니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리부터 발목까지는 비단치맛단의 색색의 선군으로 부풀어오르고 무릎부터 발끝까지의 치마자락은 말총넣은 마미군으로 꽃처럼 펼쳐진 후에야 금박을 넣어 수놓은 대란치마를 입을 수 있다. "강남은 기후가 덥고 온화했지만 대도는 한냉하고 또 태후께서는 옷차림이 단정하지 못한걸 몹시 싫어하시니... 아기씨,아니 마마께서도 궁의 법도에 서둘러 익숙해지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의 못마땅한 얼굴에 아랑곳없이 상궁들은 궁중여인들만 걸치는 치맛단이 빳빳한 폭넓은 열두폭세번째 속치마를 입히고나서 대례복의 비단치마를 걸쳐주었다.궁중의 속치마들은 민간과 달라 별나기도했다. "자아.태후전에 가시는 것이니 얌전히 걸으셔야해요..." 편편한 바닥의 비단실내화를 굽높은 나무굽의 새신으로 갈아신으며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예복을 입고는 비단이 첩첩이니 뛸수가 없으니 비단치마에 다리가 감길까봐 조심스레 걸을 수 밖에 없다.덥고 답답하고...황궁이 열두새장이라더니 감옥이 따로 없군..강보속의 기저귀찬 아기대하듯하는군.새장속의 새도 나보다는 자유로울거야.그녀는 마음속으로 불평했다.
"법회에서 졸았다며?" 침실에서 보모상궁이 나가자 그가 물었다. "염불이 하도 따분하여.."그녀가 볼이 부어 대꾸하자 그가 충고했다 . "그러다 붕어한 선황들을 애도하는데 성의가 없다고 혼난다." "그렇지않아도 한소리들었어요." "꾸지람한자락않고 넘어갈 태후가 아니지..." "오라버니가 보낸 오학사가 아침부터 절 들볶아서 그래요.수업을 마치고나면 기운이 하나도 없어요." "지금 짐에게 불평을 하는거냐?"그녀가 투덜거리는 듯 대답하자 그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네가 꾀를 부리니 혼나는 게 네탓이지 오라버니탓이냐?네대신 회초리맞는 시녀라도 두어야겠느냐?" "아야야!" 그의 손이 품에 안고 있던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후려쳤다. "근래 공부를 열심히 하지않는다며?전에는 흥미있어하더니..가상궁과 오학사가 현아가 꾀를 부리니 수업이 진척이 되지않는다더구나?" "조정의 일인데 따분하고 지루한데다 비빈에게는 쓸모도 없잖아요." "쓸모가 없다니? 궁에서 살려면 모두 통달해야하는 일인데?" 그가 버럭 소리치더니 언성을 높였다..오늘 저녁은 육촌오라버니가 기분이 얹잖은 날이 분명했다. 결국 그녀는 늘 오냐오나하던 오라버니에게 엄한 꾸지람을 들었다. 아침부터 일진이 나쁜 날이었다. 오전수업에 꾀를 부리다 너그럽던 학림학사도 근래 수업에 태만하다고 황명이 중한줄 알라고 꾸짖더니 오후에는 훈육상궁에게 잔소리를 한식경은 들었을텐데 거기다 태후와 오라버니에게까지.. 오늘은 혼만 나는 날이군.. 하지만 등불을 끄자 젊은 황제는 육촌누이를 품에 안고 재웠다.
따뜻한 화로가 있는 거실에서 황후는 퉁소를 잘부는 환관에게 퉁소를 불게하고 곡을 듣고 있었다. "문안드립니다.밤새 평안하셨는지요?" 저 아이는 타고난 미색이야..황궁의 누구도 견줄수가 없다.걸어들어올 때마다 선녀가 하강한듯 구름을 타고 내려온 듯한 자태...황후는 인정하지않을수 없었다.거기에 총명하기까지하다.황상이 총애하지않을 수 없다.그러자 가슴한구석에서 질투가 끓어 올랐다. "청평악이군요..." "다소 슬픈 곡이지...귀양간 사람의 심정을 슬퍼하는 ..".황후는 얹잖음을 감추며 대답했다. "참..현비가 가야금을 잘탄다지?음률에 조예가 깊다니.." "별말씀을..미천한 솜씨인데요.." "태후께서도 내궁의 연회때마다 현비의 기악솜씨를 칭찬하셨네.가야금 대금 쟁까지 연주못하는 악기가 없다면서.. 황상이 적적하시니 현비가 이따금 가야금이라도 타드리게.국사에 지치신 모양이네.." "알겠나이다." "오늘 오후가 어떤가?경연이 끝나고.겨울이라 설까지는 별 유희도 없지않은가..?" "그리하겠나이다." 하지만 그녀가 거실을 나기자 황후는 미소지었다.
"현아가 음율을 연주하는 솜씨가 날로 좋아지는구나." 어서방에서 가야금연주라..그는 미소지었다.청아한 음률이 허공을 채우니 마음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 경연에서도 태후의 친족들과 격론으로 날을 지새니 머리가 아팠다. "황상폐하, 태후마마드십니다." 다과를 내오는 시녀가 먼저 들어섰다. "어인 일이십니까?" "날도 덥고 입맛도 없다하시니 ..,그런데 어서방에 귀비가 웬일인가?" "황상께서 지쳐계시다길래..어전회의후에 잠시 들렀나이다." 하지만 태후는 대뜸 그녀를 꾸짖었다. "황상이 국사를 고민하는 서재에서 가야금을 타다니..천한 청루의 기녀들과 무엇이 다른가?지엄한 황궁에서 무슨 짓인가?" "전 다만 황후께서 황상을 위로해드리라 권하셔셔.." "듣기싫다.또 윗전을 핑계대는가?" "마마 현비는 다만 짐이 기분이 좀 불편하여 가야금음율을 듣고자 연주시켰나이다."그가 끼어들어 그녀를 두둔하며 태후를 진정시키려들었다. "황상 또 현비를 감싸시는거요?이러니 저 아이가 오만방자한것 아니요?"늙은이는 되려 역정을 냈다. "아직 국상중인데 궁중에 음률이라니...종종 가무도 추느냐?궁중의 풍기가 문란해지지않느냐?" "억울하옵니다." 그녀는 자신이 황후의 간계에 빠진걸 깨달았다. "현비 태후께 말대답하다니..법도가 아니지않은가?당장처소에 돌아가 근신하거라!" 그가 곁에서 소리치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물러나지않을수 없었다.
대전의 입구에서 그는 기다리던 현비와 마주쳤다.그녀가 원망스러운듯 따지듯 물었다. "제가 억울한거 아시잖아요?" "자꾸 말대꾸해서 말썽을 만들지 말라고했잖아?"그가 핀잔처럼 나무랐다. "황후가 일부러 시킨건데.." "그걸 경계했어야지.너를 질투하는 걸 알잖아." 그가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그녀가 발끈했다. "네 ..,저는 그런 곰보에게 속을만큼 어리석어요." "이 바보,내가 그렇게 처소로 널 쫓아보내지않았으면 반나절은 태후와 황후가 널 들볶았을거다.짐이 너를 두둔하면 그 여우같은 늙은이와 그 곰보가 더 질투에 눈이 멀어서 네게 매질을 했을지 어떻게알아?."그가 버럭 화를 냈다. "네 ..,태후앞에서 쫓아내주셔셔 감읍하옵니다." 그가 순간 안색이 변했다. "오라버니에게 비꼬는 것이냐?정말 버릇없군." 태후에게 혼날까봐 꾀를 쓴것인데 감싸주지않았다고 원망하다니.. "어디 네 처소에서 며칠 혼자 생각해봐.어떤게 현명한 길인지.." 그가 획 등을 돌려 신하들이 기다리는 대전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황궁내에 아직 선황의 삼년상중인데도 현비마마 홀로 가무와 유흥을 즐긴다고 헐뜯는 풍문이 가득합니다."시위가 그에게 낮은 음성으로 보고했다. "짐이 적적하여 연주를 시킨것인데도.." "황후께서 후궁들과 칭찬하며 권하셨답니다." "마마에게 남자를 혹하게하는 재주가 있다느니 연주하는 동안 약을 피운다느니.." "쑥덕이는 수라간궁녀들을 추궁했더니 추문을 퍼뜨린 것은 윗전들이 시킨 일이라고 하옵니다." 환관이 들어와 절을 하고 보고했다. 은밀히 소문의 진원을 찾아보라 지시했던 측근이었다. "역시 황후가 후궁들과 짜고 벌인 일이군." 그는 환관과 시위의 보고를 듣고 결론내렸다. "현비를 모함하다니..짐을 능멸한 자들에게 벌을 내려 경계로 삼겠다." 그의 상기되도록 화가 난 얼굴과 격한 음성을 느끼고 측근들이 물었다. "황상 그러면 어쩌시려는지..." "궁의 법도는 어떠하냐?" "폐하를 기만한 이들은 형장을 맞고 황궁에서 내쳐지는 것이 관례입니다.관직에 있으면 파직이고.." 그는 순간 밉살맞고 극성스러운 후궁들을 직접 매질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이 가증스런 여인네들을 모두..." "황상, 정말로 비빈마마들에게 형장을 치라 명하실겁니까? 모두 명분대가출신의 후궁들아닙니까?" 환관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는 이내 빙긋 웃었다. "내명부들에게 형벌을 내릴수없으니 다른 벌을 내려야겠구나.하지만 궁안이 조용해질거다."
며칠동안 건청궁에서 밤을 새다시피한 그는 내관에게 일렀다. "현비에게 오늘 저녁에 평안궁에 간다고 일러라.."측은한만큼 얄미운 생각도 들어서 며칠 내버려두었다.하지만 그녀에 대한 그리움에 궁금증에 애가 타서 그가 더 견딜 수가 없어서 가보지 않고는 안돼었다. 사나흘동안 반성좀 했으려나 생각하는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마마께서 지난 며칠간 열이 끊이지않고 누워만 계신다합니다.상궁의 말로는 도저히 황상을 모실 수 없다고.." "뭐야?" 그는 상소를 집어던지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평안궁의 문앞에서 그는 마주친 시의를 붙잡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 현비가 어디 불편한 것이냐?" 젊은 시의가 머뭇거렸다. "중한 병인것이냐? "그의 재촉에 시의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감기보다도 ..마음의 병입니다.." "약은 썼느냐?아니면 현비가 차도가 없는 것이냐?" "본인이 마음먹기에따른 일이니만큼 약만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는가?" "마마께서 마음상하지않도록."..그는 시의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낯선 노상궁둘이 그에게 예를 올려 절했다. 그는 못본 척하고 침실로 가로질러가 침상휘장을 제쳤다. "어떻게 된 일이냐? 내가 너무 야단쳐서 얹잖은 것이냐?" 그가 그녀를 일으켜안으며 다정하게 물었다.며칠동안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내가 야단 좀 쳤다고 이리 병난거냐?그렇게 마음이 상했어?"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냥 피곤해요..황상.."그녀가 잠시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오라버니라 불러..그래, 내가 다 잘못했다.됐니?너를 그리 몰아세웠으니..."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어서 털고 일어나야지..그리 누워만 있으면 어쩌겠느냐..그대같은 말괄량이에게 황궁이 사람 살기 좋은 곳은 아니다만..왜 열이 내리지 않는거지?" 그가 그녀의 이마를 짚으며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때마침 늙은 상궁이 약을 가지고 들어와 올렸다. "짐이 먹일테니 물러가.." "황상께선 후궁의 시중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법도가 아닙니다." "말이 많군.둘만 있게 물러가 있게 "그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자 그들은 마지못해 방을 나갔다. "저이들은 못보던 상궁들인데..누구지? 네 처소에 웬 노상궁들이야?" "태후께서 보내신 사람들이에요..신첩을 잘 가르치라고요.."그녀가 불만스러운 듯 말하자 그는 한숨을 쉬었다. "마침 그녀의 침상의 베갯잇을 갈려고 월이가 들어왔다. "황상을 뵙나이다.."그런데 시녀가 일어서며 걷는게 절뚝거렸다. "무슨일이 있었느냐?"월이는 아무런 대답도 않고 있었지만 그녀가 분한듯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근신중에 후원에 나가려고 한다고 ..주인을 잘 모시지못했다면서 저이들이 월이를 회초리질했어요.월이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그는 단번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저연배의 상궁들이면 황궁내에서 상당한 세력가이고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터줏대감들이었다. 태후가 그녀를 감시하기위해 붙인 정탐꾼들내지 간섭자들인 것이다.그것도 법도를 가르친다는 명분으로 윗사람의 명을 내세워 온갖 참견을 다 할 것이다.주객이 전도되어 윗사람에게는 목석같이 법도로 압박하고 아랫사람들에게는 궁의 규울을 어겼다고 툭하면 매를 드는 궁안의 호랑이같은 이들이었다. "그대가 잘못한 거군..이틀동안 처소에만 있으라고 했는데 ...늙은 여우들이 태후에게 그대가 근신중인 걸 듣고 그대에게 무슨 트집을 잡을 게 없나 혈안이 된거지..그대에게 회초리질을 할 수 없으니 그대 시녀를 벌한 거야..그리고 분해서 몸져 누운거야?" "어제 저녁이면 근신도 끝날때인데요..마마께서 우울해하실까봐..모시려다가..마마는 누구를 때린리신 적이 없어요..그들이 저희같은 시녀들 호통치는 소리에 마마께서 깜짝 깜짝 놀라세요..걸핏하면 아랫것들단속하는 일엔 마마께서 나설 일이 아닙니다하면서.." "마당에서 물항아리이고 벌서는 시녀도 노상궁들이 처벌내린거야? " "먹갈때 먹물튀었다고 별일도 아닌걸 가지고.." "묘희인사가 처음부터 맘에 안든거죠."시녀가 투덜거리듯말했다. "평안궁은 귀비부터 시녀까지 죄다 벌받는 사람뿐이군..쯧쯧..현아 ,너같은 주인을 잘못만난 죄로 아랫것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매타작이구나."그는 한숨쉬며 말했다. 시녀는 조용히 나갔지만 그녀가 항의하듯 말했다. "제가 황상에게 그정도 혼난 걸로 된 것아니에요?" 며칠동안 그녀가 앓아누운 것만 봐도 평안궁의 공기가 썰렁해진 걸로도 알만했다.평소의 밝은 분위기가 사라졌다. "그대가 시녀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니 책잡을 거리가 많겠군.주인과 아랫사람이 경계가 분명하지 않으니.." 평소에도 그녀의 빠른 걸음걸이나 높은 웃음소리조차 못마땅해하던 태후였다.그녀의 그런 행동거지를 좋아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 그뿐이었다. "너와 나를 감시하기 위해 보낸 첩자들이군..나도 알아 , 하나는 태후의 심복이고 하나는 황후의 사가사람인 것같군.그대에게 동정할 리 없지..그대를 들볶기위해 온 건데.." 그가 그녀를 끌어안고 속삭였다.당연히 그가 그녀를 만나러 오는 걸 훼방놓을 것이다.자신의 조카인 황후는 독수공방인데 그가 소시적부터 마음에 품은 후궁하나만 총애하는 것부터가 못마땅할 것이다. "그들는 법도를 우선시하니..네가 병난 것도 당연하구나..마음이 불편하니..아니 황후나 태후가 내게 할 화풀이를 그대에게 하고 있는거지..착하지..약먹어라..몸이 좀 좋아지면 사가에 한번 보내주겠다.왕부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움직일 만하면 .."그녀가 확인하듯 물었다. "황상.."그녀가 의아한듯 물었다. "황궁보다는 네 사가가 정양하긴좋겠지..하지만 제때 궁으로 돌아와야해.." "약속하신거에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그가 순간 그녀의 이마를 손등으로 가볍게 때렸다. "그러길래 왜 몰래 출궁했어? 이 말썽꾸러기,태후한테 트집잡히면 그대만 힘들다고 했잖아.." 그는 그녀에게 언제 화냈냐는 듯이 다정했다. 그가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자 그녀는 아무대답도 없이 그에게 기대고 그가 먹이는 탕약을 받아삼켰다. "그대가 홧병이 생기지않으려면..그들을 돌려보내야겠군..걱정마라..오늘내로 쫓아낼테니.." "제게 매일 오지 않으셔도 돼요..왕미인 우미인에게는 왜 가보지 않으십니까?" "그들은 태후의 첩자들이야..내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할거야..뭐하러 내가 그들을 만나러가..?출궁시키라고 일렀는데.."그녀에게 약을 먹이며 그가 투덜거렸다. "제왕은 홀수로 비빈을 둔다고 구빈을 못채우면 삼부인이라도 두어야한답시고 태후가 강권하여 제집안 처자들을 입궁시켰다.후궁이 현아까지 셋이라지만 우미인과 왕미인은 입궁한 이래 짐의 얼굴도 못본지 오래되었다.네가 싫어할까봐 그들뿐아니라 황후처소에 발길끊은지도 오래인데 . . " "언제 제가 그렇게해달라 졸랐나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황후가 되지못한대신 다른 후궁을 들이지 않는다고 먼저 약속했는데 그것도 그의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그러나 젊은 황제의 반항적인 혈기인지 그는 강압에의한 후궁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황후조차 냉대하는데. .한편으론 그들의 처지가 딱하기도하다.황후처럼 박색은 아니었지만 그녀처럼 미색도 아닌데다 별재주도 없고 그가 그들의 가문을 극히 싫어하니 총애는 고사하고 가까이할수가 없었다. "궁에 들면 세상의 낙은 없어진다고 한다.소리내 한번 맘껏 웃지도 울지도 못하니. .그들도 짐하나 보고 살아야하니. . 새장안의 신세지.저잣거리의 즐거움하나 없이. .거기다 짐은 현아만 찾으니. . 안되었지 않느냐? " "그럼 저를 출궁시켜주지지요?그렇게 가엾게 여기시니. . 그럼 다른 비빈들도 외롭지 않을거고. . " 그녀가 약간 토라져 대답했다. "이런 말괄량이에게 자유를 준다?짐이 그간 속썩은 걸 생각하면 벌이라도 줘야하는데 . . 뭘 잘했다고 그런 상을 줘?그래서 대신 그들을 위로해야겠다." 그가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우미인과 왕미인에게 출궁을 명했다.적당한 혼처를 주선하라고 부친들에게 명을 내렸으니. ." 그녀가 잠시 멍한 얼굴로 약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황상께서 용상에 계신데 더구나 아직 무탈하신데 비빈들을 출궁시킨다니..전례가 없던 일이네요 ." "물론 황제가 죽고나면 절로 가 입적하는 일이 흔했지.늙은 비빈들도 아닌데 그들은 아직 젊으니 평생 생과부로 독수공방할 필요없잖아.잘못도 없는데 냉궁에 보낼수도 없고. . " "태후가 허락하던가요?입궁후 몇년인데 한번도 황상과 밤을 보내지 못했으니 . . "그녀는 더 말을 않고 입을 다물었다. 물론 소생이라도 있으면 출궁당하지 않았겠지만 당연히 그들은 회임하지못했다. "폐출이 아니다.내명부직첩이 있지만 하급비빈이고 짐이 처소에 든적이 없으니 처녀나 다름없다.우미인은 몸이 허약해 우울증이 심하고 왕미인은 불심이 깊어 남녀간 정사에 맞지않으니 사가로 돌려보내는게 좋겠다고 했어.근래 황후와 짜고서 후궁에 분란을 일으킨 일로 짐이 불쾌해하는걸 태후도 알고 있으니. . .황명을 내린뒤 소관자를 시켜 출궁하는대신 혼수로 쓸 재물을 후하게 실어보냈다." "태후가 얹잖게 여기지않을까요?"그녀가 차를 따라 올리며 걱정스레 물었다. "저녁에 문안차 들렀더니 몸살이 심해 아무 대답도 없었다.태후도 짐의 생각을 알거다.네가 입궁한 이래 황후도 억지로 성질을 참고 있지만 . .짐은 태후나 황후의 일가와는 몸을 썪거나 혈육을 보지않아야해." 그가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네 몸을 잘 돌보거라.황궁에 들어와 하루도 맘편한 날이 없단걸 알고 있다. 몸도 약한데 태자를 가져야하니. . 딸보다는 아들이 먼저 태어나야할텐데. . " 그가 슬며시 그녀의 침의여밈끈을 풀고는 옷을 바닥에 떨어뜨리뒤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라버니.. 신첩은 아직. ."속치마에 속적삼만 남은 그녀가 그의 품에서 하느작거렸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를 흩어 내려가더니 완만한 선의 어깨를 더듬어가며 그녀를 탐했다. "오라버니,.간지러워요."그녀가 낮은 신음처럼 말을 뱉었다. "합궁않으려고 늘상 도망칠 궁리만 하지. . 회임할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느냐? " "여인네들 배불러서 뒤뚱거리며 걷는게 보기좋아요?열달이나. . " 그녀가 그의 품안에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리 철이 없어서야. . 왜 짐이 다른 후궁들은 처소에 발걸음도 않는 줄 아느냐?황후도 보름에나 얼굴한번 보는데.. 태자를 낳아야 네 지위가 견고해져."그는 순간 말을 삼켰다.황후로 책봉하려면 그녀가 태자의 어미여야만한다.아들이 생기면 때를 보아 지금의 황후를 폐할것이다 . 하지만 지금은..그는 그녀를 가만히 놔주었다. "몸이 약하니..쉬는게 좋겠다. " 역시 남녀간의 정사를 감당하기에는 아직 어린건가...
"홍역은 좀 진정이 되는것인가?" 겨울날의 오후 대전의 볕이 좋은 창가에서 그는 상소문을 뒤적이며 좌승상에게 물었다. "이미 두달이나 지나 궐밖에서도 환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죽은 이들중 아이들이 상당수입니다." "황궁내에서도 죽은 궁인들이 있다." "전염병이니 도리가 없습니다.수그러들기를 기다릴밖에요." "어찌 하늘만 바라보겠는가?" "의원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나이다." 좌승상의 설명에 그는 한숨을 쉬었다. "황후의 용태는 어떠한지요?" "현비의 말로는 차도가 다소 있다지만 .궁안팎으로 이리 어수선하니... 다음달이 태후의 생신인데 하례를 올릴 수나 있겠나?" "시간이 좀 지나면 가라앉을겝니다." "현비가 황궁의 환자들을 성심으로 돌보는데도 쉽게 가라안지않는군.황후도 발병했으니.." "폐하,여식을 만나러 가봐야겠습니다."문득 좌승상이 불편한 음성으로 말했다. "좌승상 .감염되지않게 조심하시오."사위로서 마음에 없는 말을 해야했다.어쨌든 사사롭게는 장인이고 대외적으로 조정에서는 권신이었다. "신은 소시적 앓았나이다."좌승상이 서둘러 절을 하고 나가자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소관자 현아가 황궁에서 무탈하게 지내려면 계책을 써야겠어,.." 그는 심복환관을 불러일렀다. "어찌하면 좋겠나이까?" "일단 현아 직첩을 높여줘야해.황후다음으로 만들어야 다음 세월을 기약하기 수월해." "그야...회임만 하신다면.." "그게 당장 마음대로 안되니 하는 말이지..며칠지나면 태후의 생일인데 현아와 의논해 주도면밀하게 준비시켜.모든 경비는 내탕금에서 낼테니..." "얼마나 호화롭게 잔치를 벌이시려고...?" 검박한 것을 좋아하는 황제가 웬일인가하고 시종은 의아해 물었다. "태후를 녹여놔야겠다.현아가 황궁에서 버티려면.." "황후마마때문에 현비마마를 달가와않으시니.." "짐에게는 여인은 현아하나뿐이다." 시종은 경외에 찬눈길로 조각같은 황상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젊은 황제가 사촌누이동생이라지만 회임도 않은 나이어린 비빈에게 그토록 맹목적인 사랑을 쏟아붓는 것은 보기드문 일이었다.다른 여인들은 품는 것은 고사하고 처소에도 발길조차 않으면서...심지어 황후도 보름이 아니면 얼굴마주치지도 않는다.
"현아 ,호선무를 연습해두거라."침실에서 그가 촛불을 끄기전 그녀에게 일렀다. "네?호선무요?웬일로 춤을 추라고요?"그녀가 의아한듯 물었다. "태후의 생신에 선보여야할테니 .." "제가요?제가 춤을 춘다고 태후마마가 좋다고나할까요?" "시키는대로해.손해볼 건 없을테니까..."그가 웃으며 젊은 청년의 억센 큰 손으로 그녀의 등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상궁들과 학사와 종일 수업해야하는데 춤출 시간이나 있겠어요?"그녀가 투덜거렸다. "악공들을 보내주마.내일부턴 오후마다 연습하거라." "황상의 명이시니 따라야겠지요." 그녀가 웃으며 비꼬듯 말하자 그는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이 버릇없는 응석받이가!"그녀가 꺄르륵 웃으며 베개로 그의 주먹을 막았다. "짐은 낼 궁밖에 일이 생겨 잠시 출궁한다.태후든 황후든 문안가서 일절 말대꾸도 말고 혼자 처소밖에 나다니지 마라." " 금족령에 금구령이네요?" " 태후면전에서 입이라도 뗐다가는 상궁에게 옆에서 엉덩이를 꼬집어주라고 일러놓을거야." "심술궃으세요." "쓸데없는 곤욕치르지않으려면 조심하란거야.짐이 출타중에 말썽부리면 돌아와서 네볼기를 때려줄거야."그녀는 이마를 찡그렸으나 그는 웃으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하지만 오랫만에 하는 춤연습은 생각보다 쉽지않았다. 거의 오후마다 두식경씩 연습하면 녹초가 되었다.거기다 바쁜 일이 생겼는지 그는 며칠 궁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황상께서 긴급한 공무로 출궁하셨으니 출타하여 돌아오실 때까지 며칠은 마장에 나오시지않는 게 좋으시겠다고 전하라하셨나이다.부재시에 행여 사고라도 생길까 염려되신다더군요.." "조정에 무슨 중대사가 생긴 건가?황상께서 급히 확인하러가실 지경이면?" 환관의 전갈에 그녀가 물었다. "남쪽지방의 강둑이 터져 수해가 생겼답니다." "아직 한여름이나 우기도 아닌데...?" "그러니까 천재지변이지요.겨우내 가물다 봄비가 한꺼번에 왔다고 상류부터 불어난 물에 ...민심을 안정시키기위해 황상께서 직접 시찰나가신겁니다."
태후는 그녀가 올리는 절을 받으며 물었다. "현비,안색이 좋지않군.밤에 무슨 일이 있는건가?"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몸이 아픈것이냐?왜 말이 없느냐?" "황상께서 마마께 금구령을 내리셨나이다.그만 물러감을 허락해주시지요." 옆의 훈육상궁이 대신 대답했다. "늘 황상께서 저녁마다 함께 하셨으니 그럴만도 하구나.물러가도 좋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감사를 표하며 태후전을 물러났다.
깜빡 잠이 든 그녀는 이불을 뒤척이는 기척에 놀라 눈을 떴다. "짐만 밖에서 고생한게 아니고 현아도 궁안에서도 고생이군.." 서늘한 큰 손이 침의를 제치고 자신의 굳은 종아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오라버니..언제 오신거죠?" "지금 막.." "산도적같아요.우선 씻으셔야겠어요." "이틀동안 말을 달려왔으니 당연하지..." "수해피해는 어떤가요? "더 나빠지지는 않을거야.군사들을 동원해 경작지를 복구하고 제방을 보수했으니..." "고생하셨어요." "천하의 책임을 진 자리가 용상이니 이정도로 수고했다니?"그는 빙긋 웃었다. "다른 말썽을 부리지는 않았지?" "문안인사가 말한마디도 못하게 하셨잖아요.졸지에 벙어리가 됐는데.." 그러니 별일이 없었지..그가 웃으며 그녀의 정수리에 입맞추었다.이 예쁜 아이에게 트집잡아 매질이라도 하면 큰일이지.황후의 질투가 대단하니 마음을 놓을수 없어.. "황상 침욕 준비가 되었나이다."환관이 방밖에서 일렀다. "알았다.먼저 쉬거라." 그가 욕실로 가려하자 그녀는 일어나 손수 그의 갑주를 벗겼다. "흙먼지 투성이입니다." " 벌판을 기마로 내내 달렸으니..." "옥체를 중히 여기셔야죠." "네 손이 더러워지겠다."그녀의 하얀 손을 쥐며 그가 놀렸다.
그는 욕조의 물속에서 긴 한숨을 내쉬며 앉아 있었다. 검박한 평안궁에서 다소 사치스럽게 지어진 곳이 욕실이니만큼 그는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욕조안의 더운 물을 대리석바닥에 아낌없이 튀기며 오랫만에 목욕을 즐겼다. 그가 씻고나오자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있다가 직접 수건을 들고 그의 젖은 머리를 말려주었다. "보름인데 황후궁에 가보셔야않나요?"그의 젖은 머리를 빗질하며 말은 그렇게 물으면서도 그녀는 전에없이 가슴이 욱씬거리는 애타는 감정을 느꼈다 .아, 이게 질투인건가...참 ..잊고있었는데..오라버니가 이제 내낭군이지.. "오늘은 여기서 쉬겠다 ".그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중에 신첩이 곤욕을 치를수도 있어요.비빈이 되어서 법도를 무시하고 황상을 유혹했다고요.." "이미 늦어서 침수들었을거다.새벽이 되기전 네곁에서 눈 좀 붙여야겠다." 그가 그녀의 젖은 수건을 빼앗아 던지더니 그녀를 답삭 안아 침상위에 내려놓고는 옆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그녀와 베개위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자 코끝에 익숙한 체취가 밀려들어왔다. "제 말을 안 들으시는군요.제가 나중이라도 트집잡혀 혼나면 오라버니 책임이에요." 그녀가 새침하게 등을 돌리며 돌아눕자 길고 억센 팔이 등을 타고 너머와 큰손으로 등너머로 그녀를 안았다. "혼자라고 궁안에서 말썽부리지않았겠지 ?" "상궁들이 얼마나 극성스러운데요?오라버니가 금족령에 금구령까지내려 혼자 후원에도 한걸음나설수가 있나 윗전들에게 문안가 입이라도 벙긋 뗄수있나..." 그녀가 응석을부리듯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달콤한 감귤내섞인 그녀의 향기가 수면약인양 그는 잠에 빠져들었다.
"유모,목욕물을 .. 오후내내 춤연습을 했더니 땀투성이야." 그녀는 거울앞에서 땀에 젖은 옷을 벗으며 재촉했다. "욕실에 더운물을 채워놓았지요." 유모는 그녀의 탈의를 도와주고 정성스럽게 목욕시중을 들어주었다. "아기씨춤은 비천녀가 추는 듯해요.몸이 가냘퍼서.. 실오라기하나 걸치지않은 맨몸도 옥을 조각한 듯하니.." "놀리지마.유모." "궁에 들어온지 자꾸 마르는 듯해요." 그녀가 몸의 물기를 닦자 유모가 향유를 발라주고는 속곳과 허환진을 입혀주었다. "봄인데도 더워.그런 넓은 속치마는 안 껴입어도 돼잖아." "상궁들이 알면 꾸지람들으십니다."유모는 속바지를 입혀주며 타일렀다. "그럼 다른 속치마는 더 안 입을래." 그녀가 슬며시 속치마의 허리끈을 풀어내리자 유모는 손뼉을 쳐 상궁들을 불렀다. "자네들 들어오게." "속치마를 제대로 걸치셔야해요."짧은 속바지아래 그녀의 하얀 종아리를 보고 보모상궁은 눈살을 찌푸렸다.또 비단치마아래 속곳외에는 입지않으려고 꾀를 부렸군.. "너무 답답하잖아.덥기도하고.." "안됩니다." 의대수발을 담당하는 가상궁이 그녀의 투덜거림에도 아랑곳않고 팔폭선군과 열폭마미군을 입혀주며 잔소리했다. "한식경뒤에 침실에 들건데 꼭 그렇게 갖춰입어야하나?" "황궁법도입니다.모범이 되셔야지요."한여름에도 아무리 덥다고 불평해도 비단치마가 부풀어오르도록 서너벌의 속옷을 갖춰입히는 보모상궁이었다. 보모상궁인 우상궁이 들어와 머리손질을 시작했다 . "곧 저녁인데 왜 머리를 화려하게 꾸미지?" 영상궁이 비취로 장식한 비녀와 진주를 박은 귀걸이로 그녀를 치장시키자 다른 보모상궁인 가상궁은 훈육상궁인 육상궁과 함께 그녀에게 소례복위에 배자를 입히며 전해주었다. "황상께서 후원에서 달구경하자고 부르십니다."아 그래서 상궁들이 곱게 단장시키는거구나. 유모는 속곳,속바지와 속적삼같은 속옷을 준비하고 가상궁은 속치마와 소례복의 치마같은 하의를 우상궁은 저고리상의와 머리손질을 맡고 있어서 각기 옷매무새와 머리모양을 다듬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의대수발도 각기 맡은 상궁들이 융통성이라고는 전혀없어 무슨 의식치르듯 입힌다. "나만?" "아마 황후마마도 와있을거에요.마마 때문에 황후전을 박대한다는 소문이 돌아서는 안되니까요."유모가 속삭였다. "황상을 뵈면 무릎굽혀 절하는 인사를 잊지마십시요." 항상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잔소리하는 훈육상궁이 한마디 덧붙였다. "마마는 종종 예법을 잊으시니...사가의 오라버니시절과 다릅니다." 그녀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상궁들은 그녀를 품안의 어린애 아니면 손안의 인형취급하듯했다.맘대로 인형꾸미듯 옷부터 머리손질까지 완벽하게 치장하지않으면 놓아주지않았다. 하지만 후원의 정자에서 그녀와 마주치자 황후는 얼굴을 찡그렸다. "오라버니..아니,황상..부르셨나이까?" "마마 법도대로 ..." 상궁이 그녀의 옆구리를 쿡 지르자 그녀는 급히 무릎 굽혀 절하고 황후에게도 격식대로 안부인사를 건냈다. "황상뿐아니라 황후마마께서도 강녕무탈하시옵니까 ?" 그러나 황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만큼 아니 황후보다 화려한 물건들이 종종 그녀에게 하사되는데도 그녀는 천성이 소박한 탓인지 아니면 시비걸릴까봐 경계하는건지 의식때가 아니고는 사치스럽게 꾸미지는 않는다. 하지만 단촐하게 모양을 내도 온갖 호사스러운 패물을 줄줄이 매단 황후보다 멀리서도 눈에 띄일만큼 미색이었다. "황상께서 달구경에 불러주시다니 황공하옵니다." 황후의 다소 비꼬는 듯한 음성에 그는 싱긋 웃었다. "종종 두통도 바람을 쐬면 좋아진다오." 하지만 차한잔도 비우기전에 황후는 일어나버렸다. "황상, 송구하오나 신첩은 몸이 좋지않아 일찍 쉬었으면합니다." "그러시구료.어의를 보내드리리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그녀가 의아한 듯 몸을 그에게 기울이며 얼굴을 가린 부채뒤에서 속삭여 물었다. "질투하는거지.네가 너무 용모가 고우니.." "네?" "눈치가 없구나.너를 마주쳤을 때부터 인상쓰고 있었잖아.일부러 저녁에 이리 치장하고 모양내었느냐?" "보모상궁들이 황상께서 부르신다고해서....." "그 늙은이들이 생각이 없군.소박하게 차리고 오면 더 좋았을건데...." "황상이 부르시면 정장하고 배알하는게 황궁법도잖아요." "춤연습은 하고 있느냐?" "종아리가 굳을 정도로 연습하고 있나이다."그녀가 입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잠들기전에 침실에서 주물러주마." "유모가 해줘도 되는데.." "사내의 손아귀힘과 비교되겠어?"
"현비 태후마마의 생신축하를 기념하여 춤을 추어 올리거라." "무슨 춤이 좋겠나이까?" "호선무가 어떻겠습니까?" 황후가 놀리듯 제안했다.호선무는 서역의 춤이라 가락이 쉽지않다. "그래 어디 현비의 춤솜씨를 한번 보자꾸나." 그녀는 수줍어하며 앞으로 나섰다.하지만 봉관을 벗고 올린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니 훨씬 움직이기가 편해졌다. 악사들의 음악소리가 울려퍼졌다. 가녀린 선의 춤사위는 마치 이름그대로 나비의 날갯짓을 연상시켰다. "선녀가 하강한 듯 싶습니다." 그녀가 하늘거리며 움직일 때마다 모인 황족들의 감탄과 박수가 터졌다. "황궁에 가득한 미인들이 빛을 잃겠습니다." "후궁의 비빈들중에서도 군계일학이군요." "현비 춤은 누구에게서 배웠느냐,?" "돌아가신 조모님이 궁중의 춤을 좋아하셔셔 어릴적 직접 가리치셨습니다." 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조모는 어릴 적 궁중의 연회에 자주 초대되는 귀족의 딸이었는데 그런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무용수들의 춤과 음악을 접했을 것이다.또한 잔치자리에서 그녀의 조부와 만나 연애를 하게되었고 귀족이라해도 황족과는 신분차이도 나지만 반대를 무릅쓰고 황명을 얻어 용케 혼인했다.그때문에 낭만적인 풍문이 무성했다.
"황상..본궁의 생일준비를 주도면밀하게 하셨구료.무엇이든 원하는 걸 말해보시오." 봄날 오후 호화로운 잔치에 흡족해진 태후가 말했다. "이 잔치는 짐이 준비한게 아닙니다.현비가 준비했나이다." "현비가?" 태후가 의아한 듯 물었다. "황후가 홍역으로 며칠 앓아누웠지않나이까?현비가 간호도 하고 궁내의 환자들도 헌신적으로 돌보았으니 현비에게 상을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현비는 홍역을 치뤘나보구료?" "네 . 네살때 앓았지요.짐은 여섯살때 앓았고.." "현비가 생각이 깊고 주도면밀하구료.그럼 황상이 말해 보구료." "선황의 탈상에 태후마마의 생신이니 현비를 승급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승급이라?이미 비인데.." "현귀비로 직첩을 올려주시지요?" "회임도 않은 어린 비인데.." "현비가 부친이 출가한 이래 인척이 외롭고 가세도 넉넉치않아 방계황족인데도 종친들에게 무시당할까 걱정입니다." "귀비라..황족출신이지만 너무 어리지않은가?" 술기운으로 얼굴이 붉어진 태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상이 그리 어여쁘게여기며 총애하시니 허락하리다." "그럼 교지를 내려주시지요." "본궁은 글을 모르지않소.황상이 쓰구려." 그리고 태후는 궁녀에게 부축되어 침실로 들어갔다. 그는 소매속에서 미리 써둔 교지를 꺼내 펼쳐들었다. "태후마마..황상의 교지이옵니다."내시가 들이밀자 태후는 취기찬 눈으로 억지로 들여다보았으나 글을 알리가 없었다. "모후께서 인장을 찍어주시지요." 술에 취한 태후는 귀찮다는 듯 상아로 만든 인장을 꺼내오게해 찍어주고는 손을 저어 주위를 물리쳤다. 어리석은 늙은이가..술에 취해..실수했군.그는 내심 웃었다. 호락호락하지 않을거라 여겼는데... 향이 좋은 독한 술에 곪아떨어졌으니 깨고나면 어떨지.. 그가 올린 잔은 환관을 시켜 약을 약간 탄 술이었다.
"오늘 귀비로 책봉하는 날이니 최고로 화려하게 단장시켜.선녀처럼 보이도록..." 그가 새벽녁에 침실을 나가며 상궁들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그가 골라보낸 짙은 자줏빛비단예복을 보고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책봉례가 끝날때까지 얼마나 들볶일지..그래봐야 첩실인데.. 상궁들은 그녀의 불평과는 상관없이 유모와 시녀들을 재촉하여 그녀의 검은 머리를 빗어올려 모란계를 올리고 그녀를 대례복으로 단장시켰다.
종묘에 향을 피우며 귀비로 승급된걸 고하는 제례가 끝나고나자 어둠이 깔렸다. "받거라.귀비의 어보와 금책이다." 그녀가 경대앞에서 목욕후 젖은 머리칼을 털려고 할때 그가 들어서서 그녀에게 자수놓인 비단보에 싸인상자를 건내주었다. "황후가 홍역을 앓은 직후라 책봉례에 오기 힘들다고해서 태묘에 고하는 의식만 치른거야." 물론 속이 부글부글 끓겠지..질투로 앓아누울만큼.. "성대하고 거창한 책봉례는 필요없어요."그녀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래봐야 비빈인데.." 그녀는 말을 삼켰다. "기쁘지않은것이냐?" "태후마마에게 오라버니가 술을 권하고 조른 일이라면서요?소관자가 알려주었어요." 그는 쓰게 웃었다. "그래..그러니 눈밖에나지말고 얌전히 지내.모처럼 얻은 금책과 금보인데 강등되어 빼앗기면 안되잖아. " 그가 금보를 들어 살펴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태후가 심술이 나긴했나보다.금이나 은대신에 나무에 도금한 걸 내려 준걸보니.네게는 금가락지몇개도 아깝다는건가보다." "아무렴 상관없어요.제가 쓸일이나 있을까요?.오라버니처럼 정무를 볼일도 없는데..후궁이 금으로 만든 도장이 필요한건지.." "금보와 금책은 신분을 나타내는거야..현아가 일개 비빈은 아니란거지.." 그는 금보를 상자에 집어넣고 중얼거렸다. " 뭐 내탕금아낀다는데..황후옥새만 공들이면되니까.. 다음에 네 것은 최고의 옥으로 금으로 상감하여 만들어주마." "금책도 비단에 쓴걸 내려주다니.."그녀가 두루마기를 펼쳐보고 불만스러운 중얼거렸다. "그건 짐이 쓴거야.검약하겠다고..장인을 시켜 금보나 금책을 만드는 동안 태후가 마음이 변할까봐서 서두른거야.뭐어떠냐?어차피 그런걸 따질 현아도 아니잖아..어째든 이제 명실공히 천하에 황후다음이니 위신깎이지않게 조심해야해.회임도 않고 황태자는 고사하고 공주도 낳지못했는데 귀비로 승급한 이는 지금껏 후궁에서 현아밖에 없어.남들은 후궁에서 몇십년을 기다려 올라가는 직첩이야.겨우 약관의 나이인데...입궁한지 반년만에 초고속으로 승급한거야." "내키지않는 승급을 시켜주었으니 태후나 황후가 신첩을 얼마나 들볶을지..." 그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러니 더 조심하란거야.험한 황궁에서 지위없이는 버틸 수가 없어.그래서 직첩을 올려준거야.파격적인 승급이지..입궁하자마자 대뜸 비로 봉한데다.." "알고 있어요." 막 목욕하고 탈의한 탓에 머리가 축축히 젖어있었다. 그가 빗을 집어들고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빗겼다. "손끝에 휘감기는 감촉이 비단실같구나.." 그가 긴 머리다발을 손가락에 감으며 중얼거렸다. "상궁들과의 예법수업은 끝나가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궁하자마자 시작해서 여덟달이나 되어가는데요.그런데 오라버니, 오학사와는 언제까지 조정에대한 공부를 해야해요?" "오학사?그 수업은 이제 시작이야."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관청에 아낙들과 몰려가서 소란피우는 것보다는 백성을 다스리는 행정을 알아두는 것이 나을 게야." "신첩은 후궁이라 정사에는 전혀 관여할 수가 없는데.." "귀비로 승급시켜주었는데 그정도 정성은 들여야지.."그녀의 뾰료통한 얼굴에도 그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내실에서도 속치마바람으로 돌아다니면 안된다.명색이 귀비인데...아랫것들한테 앝잡힌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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