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년에 추억이 가득한 설날의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음력 설날 연휴 배경
역사적으로 보면 1896년 1월1일부터 태양력을 수용하면서 양력 1월1일이 공식적인 "설날"이
되였으나 국민들은 여전히 음력 1월1일을 설날로 지냈으며, 일제 강점기 때는 음력 설날에
각 관청과 학교의 조퇴를 금하거나 흰 옷을 입고 세배 다니는 사람에게 검은 물이 든 물총을
쏘는 등 음력설 쇠는 것을 억압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5공화국의
전두환 대통령은 민심을 잡고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데로 돌리고자 통행금지도 해제하고
프로야구를 출범시켰으며 국풍놀이를 여의도에서 하고, 1985년에는 구정을 민속의 날로
지정하여 하루 공휴일로 하다가 1989년에 설날 이름을 되찿고 3일 연휴가 시작이 되였다
우리가 어렸을때 설날 풍경
부모님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군으로 전쟁시에 숟가락 하나없이 월남하여 6남매를
키웠으니 그 고생은 이루다 표현할수가 없었기에 설날에 세배돈을 한번 받아본일이 없고
그저 만두 떡국을 먹는 것도 감지덕지 했다, 다른애들도 환경은 비슷했는데 아버지가 월남하여
고교 선생님으로 매월 월급이 나왔기에 형편은 조금나은편이다, 설날에는 겨울내 안한 목욕을
하는 즐거움이 있고 이발은 아버지가 바리깡으로 전부 깍아주었다, 남한에는 일가친척이
없었기에 어디 갈데도 없고 세배를 다닐때도 없었으며 세배돈도 없었다, 선산도 없었기에
차례를 지낼때에는 부모님은 이북의 고향 부모님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신 기억이 난다
7080년대 시절의 설날 모습들
설날 한달전부터 고속버스와 기차 예매시에는 경찰들이 나와서 질서유지를 시켰으며 거의
모든분 들이 인맥을 동원하여 표를 구할려고 난리였으며 고속버스와 자가용으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는데는 24시간 이상이 걸렸고 고속도로 휴게소는 전쟁터를 방불했는데 이런
상황이 실시간으로 TV에 중계방송이 되였다,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여 화장실 문제로
노상방뇨가 많았으며 눈이라도 내리면 아수라장이 되였으며 먹을데가 없었기에 하루동안
먹을 도시락을 싸가지고 고향길을 향했는데 지금은 도로와 차량의 대중화로 없어졌다
누구나 젊은시절에 고향을 찿아갈데는 부모님이 원하시는 선물꾸러미를 준비를 하는데
나는 그시절에 장교로 전방에 근무를 해서 일년에 한번도 고향을 가지는 못했지만
갈데는반드시 "소고기 한근과 담배 한보루와 정종이나 양주 한병 그리고 동생들이 먹을
과자"를 가져가야 아버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리고 75년부터
군 면세품으로 보급으로 장교들에게는 2년에 한대정도 개인에게 구매를 할수있는 실링이
활당되여서 TV, 세탁기, 전축, 등을 가져가면 부모님은 동네 방네 자랑을 하고 다니셨다
앞으로는 설날문화도 바뀔 것이다
시대가 바뀌여서 그런지 코로나 이전에는 해외여행이 절정에 달했으며 전국의 콘도는
만원이고 콘도미니엄 안에는 간단하게 제사를 지낼수있도록 준비가 되여있고 제수음식도
전화 한통이면 택배로 배달되고 축문도 컴퓨터에서 출력을 하기에 조상에대한 차례개념도
느슨해질 것으로 생각한다, 더구나 2년째 코로나로 정부에서도 고향방문 자제를 권유하고
서민들의 생활도 어려워서 안간다, 속된말로 우리세대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지막 세대이고
효도를 받지못하는 첫세대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내가 생각해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생각해보면
어릴적에는 푸짐한 음식때문인지 명절을 손꼽아 기달렸지만 내가 할아버지가 되니 명절도
귀찮고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데 나만 그런지 모르겠다 ㅎ ,,, 그리고 아래사진은 다른
카페 의 서핑으로 설날의 풍경사진을 국가기록원과 조선일보 DB 동아일보등 여러군데
에서 필요한 자료를 모아서 편집을 하고 사진에 대하여 보충설명을 해서 나름대로 몇일간
정성을 기울였습니다(너무 주관적인 입장에서 사진설명을 해도 이해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주말부터 설날인데 당시에 사진을 보시면서 설날의 의미를 생각해보시고 가족의
중요성도 느끼시면서 고향에 다녀오시고 행복한 나날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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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년대의 민족최대명절인 설날의 다양한 모습들
기차를 타기 위해 이동하고 있는 구정 귀성객들의 모습으로
(1968년) 기차표를 구하기 위하여 인맥을 총동원하여
피나는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기차역에서 표를 예매하기 위하여 통상 보름전에 언론에
공개하여 그날자 하루전 자정부터 줄을 서기에 철도경찰과
일반 경찰관이 합동으로 줄을 세우고 호각을 불면서 통제를 했다
표를 구하려 대기하고 있는 구정 귀성객(1971년)
기차역에서 차표를 구입하고 있는 구성 귀성객(1972년
국가기록원 제공) 서울역에서 신정 귀성표를 구하기 위해 대기
하고 나서 기차표를 구입하려고 하는 서울역에서의 풍경
서울역 광장에 각노선별 임시매표소를 설치하여
기차표를 파는 모습, 여기서 표를 사는사람은 진짜 서민들이고
권력자들은 뒷구멍으로 편하게 기차표를 손에 쥘수있었다
구정은 가래떡이 있어야 하는데 방아간에서
바로 나오는 뜨거운 떡을 먹거나 집에와서 참기름이나
식용유를 묻혀서 먹는 맛은 천하일미라고 생각한다
1977 설날을 맞이하여 시골에 내려간 한 귀성객이
아이들 손을 잡고 시골길을 걷고 있다.
예전에 어른들은 설날에 한복에 두루마기 까지 걸치고 가까운 일가친척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리는 풍경을 볼수있었는데 요즘은 시대가
변해사 그런지는 몰라도 한복을 입으시는분들이 거의 없다
1977년 설날 연휴 동안 거리의 가게들이 문을 닫고 휴업을 하고 있는
가운데 한복을 입은 소년소녀들이 손을 잡고 걷고 있다.
당시에는 어른들뿐아니라 애들도 한복을 많이
입고 극장이나 세배를 다녔는데 요즘은 찿아보기 힘들다
1977년 설날 시골에는 귀성객들로 인해 북적북적하다.
사진은 자전거를 끌며 이동하고 있는 한 일가족의 모습.
1980년 귀성을 원하는 귀성객들이 줄지어 서있다.
당시에 고속버스표를 구하기가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직장에서도 직원들 복지차원에서 각 지역별로
버스를 임차하여서 고향에 갈수있도록 배려해주었다
1981년 설날을 맞이해 야외에 윷놀이판을 벌이고 한복을 입고
윷놀이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당시에는 별다른
놀이가 없어서 그런지 서울에도 동별로 시골에서는 친목회나
동네대항 척사대회가 열려서 어른, 어린이
할 것없이 많은사람들이 즐겼다
1981년 구정을 맞아 서울 도봉구에 불공을 드리러온 신도들의
발길이 하루종일 끊이지 않았다. 위 사진은 내생각에 도봉산에
있는 도선사를 올라가기 위하여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생각된다, 도선사에는 불교계의 큰스님인
청담 스님이 계셔서 더욱 더 유명한 절이 되였다
1981년 힘차게 윷을 던지며 윷놀이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척사대회가 열리면 옆에는 따끈한 오뎅국물과 돼지고기를
안주로 하여 술판이 벌어진다, 그리고 요즘은 윳판 하단의 가마니를
깔고 하시는데 요즘은 가마니 자체를 볼수가 없는 실정이다
1981년 힘차게 윷을 던지며 윷놀이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설빔으로 어른 어린이 할 것없이 옷을 장만했는데
위 사진을 보니 남대문시장으로 생각한다, 지금은 마트가
최대 시장이지만 당시에는 재래시장은 만물상으로
없는 것빼고는 다있는 어마어마헌 시장이였다
1983년 귀성을 위해 강원도 원주행 버스에 몸을 구겨 넣으며 겨우겨우
탑승한 승객들의 모습. 명절날 고향으로 가기위하여 만원버스는
당연한 광경으로 일반화 되였는데 문제는 화장실이 급해도 어쩔수 없었다
1984년 3월 윷놀이를 즐기기 위해 조그마한 윷놀이 판을 군데군데 벌이고
윷을 던지며 놀이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예전에는 윳놀이가
마을사람들 놀이의 구심점이였는데 지금은 거의 볼수가 없다
1986년 2월 한복을 입고 야외에서 널뛰기를 하고있는 여성들의 모습.
여성들도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가운데 가마니를 받침대로 하여
널뛰기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는데 지금은 찿아볼수가 없다
1987년 설날 거리의 모습. 한 일가족이 한복을 착용하고
어디론가 바삐 이동하고 있다. 설날에 가장큰 행사가 친척
어르신들에게 세배를 드리는 것으로서 위 사진도 인척 어르신에게
세배를 드리기 위하여 이동하는 모습으로 생각된다
1988년 버스에 가득한 입석 승객들과 좌석에 착석한 승객들의 모습.
요즈음 저런 만원버스는 모습은 찿아 볼수가 없다
부모님에게 드릴 보따리를 선반대에 올려놓고 입석으로
가지만 고향에 간다는 기쁨으로 고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1989년 설날 연휴를 고향에서 보내기 위해 많은 귀성객이
서울역에 몰리자 불법운행 버스들이 역광장을 메우고 있다.
서울역앞의 모습으로 퇴계로에서 서울역으로 내려오는 길은
철거되 도로는 박원순시장때에 일반 도로로 전환되여 관광지가
되였으며 항상 서울역앞은 혼잡스러웠는데 설날에는 고향에
가는 불법 관광버스가 주차하여 전쟁터가 되였고
여기에는 포장마차와 소매치기사건도 자주 일아났다
1989년 한복을 입고 서울 도심지를 거니는 여성들의 모습.
위 사진은 시청앞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있는 모습으로
생각하는데 돌담길은 데이트 장소로 최적이였기에
많은 선남 선녀들이 즐겨찿던 장소이다
1990년 설 연휴 몰려든 귀성차량으로 인해 차량홍수를 겪고 있는 도로의 모습.
고속도로는 왕복으로 차량이 넘처서 경상도와 전라도를 갈려면
24시간은 걸렸기에 TV 뉴스에서는 서울과 각지역간에
몇시간이 걸린다는 예보방송을 거의 매시간 뉴스로 내보냈다
1992년 시장에서 농산물 선물세트, 제수용품 등을
구매하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의 모습.
지금에는 선물용품을 인터넷이나 대형마트에서 구입하지만
예전에는 오직 재래시장뿐이 없었기애 북새통이 났다
1993년 설날 연휴기간 동안 극장가를 찾은 인파들.
명절날 빠질수없는 행사가 영화관람으로 많은분들이
어디 갈데가 없기에 영화관을 선택했는데 신문과 방송에서는
00극장에 어느 영화를 상연한다고 추천까지 하였다
1994년 열차표를 구하지 못한 한 귀성객이 서울역 광장에서 행선지를 적은
즉석 플래카드를 들고 누군가 표를 팔아주기를 호소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사문제에 의이를 제기하면 천하 패륜아 취급을
받기에 말을 하기가 어렵지만 제사문화도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인구감소와 젊은이들이
변화로 제사도 우리세대가 마지막이거나 길어야
다음세대에서는 없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강릉시 성산면 위촌1리 심학길촌장 집 앞마당에서 5백여년
전통의 도배식이 설 이튿날에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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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와 며느리와 남편 입장에서 생각하는 명절 중후군
명절 스트레스에 대한 시어머니의 변
작문을 지을래 회초리로 맞을래?
누가 이렇게 물었다면 당연히 회초리 맞는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쓴다는 것을 어렵게 아는 내가 , 진짜
편지 한 줄 쓰기도 부담스러워 하는 내가 오늘은 젖 먹던 힘까지 빌어 용기를 내었다.
이곳이 젊은 여성들, 그 중에서도 똑똑한 친구들이 있는 곳이라서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주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에 용기가 뻗친 것이다
각설하고 무식한 시어미의 말을 좀 귀담아 들어보소
설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항상 이맘때만 되면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젊은 주부들이 명절 증후군이니 스트레스니 하고 T.V에서 마저 떠들어대고 야단법석들이면
시어머니들이 뭘 많이 잘못한 것처럼 엄청 열을 받는다. 못 배워서 잘은 모르겠지만
요게 아마 스트레스라는 것이겠지.
오랜만에 보고싶은 자식들,(어떻게 키운 자식들인데,....이말은 자식을 키운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맘껏 볼 수 있는 기회, 일년에 단 두 번, 허지만 며느리들의 불어터진 마땅찮은 얼굴을 대하면 마음이
금새 쭈그렁바가지가 된다. 상처 난 골 골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 오만 가지 하고싶은
말이 얼룩진 명절 스트레스라는 것, 어쨌든 우리 여인들의 공통된 고질병임엔 틀림없나 보다
며느리들이 시집에 오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걸 뻔히 알면서도 차마 오지 말라고, 너희들끼리
즐기라고 말하지 못한다. 체면이 무엇이고 관습이 무엇인지,... 육십 년을 살아온 사고방식으로
어떻게 너희끼리 즐겨라 할 수 있겠는가, 콩가루 집안도 아니고....안방이 비좁도록 가득 들어앉아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을 보라. 먹지 않아도 얼마나 뿌듯한가 ! 이게 늙은 어미들의 사는 기쁨인데..
지금 시어머니 된 사람들 모두 진절머리나는 가난 때문에 뼈가 녹신거리도록 고생한 사람들이다.
거기다 낳으면서부터 딸이라는 아들과 차별화 된 천형의 삶, 배우지도 못하고 먹고싶은 것도
못 먹고 좋은 옷 한번 걸쳐보지 않은 쭉정이 들, 쉰 세대는 그야말로 내 맘대로는 하루도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시부모님 공경하고 남편 잘 받들고 자식들 키워서 대리만족
하는 게 고작인 가엾은 사람들 그래도 선대에는 공경 받는 시어머니 시절이 있었건만
가히 천국이라 할 만한 여인천하인 요즘은 거꾸로 시어머니가 시집살이하고 며느리 눈치나
봐야 하는 뒤집힌 세상, 그런데도 젊은것들이 스트레스를 찾고 야단이다 어째서 시어머니
시字 만 들어가면 두드러기 반응을 하고 불쌍하고 외로운 그녀들의 가슴에 팍팍 돌을
던지는지 모르겠다. 항상 애잔하게 마음 한 자락 차지하고 있는 친정의 어머니도, 그리고
미래의 나도 포함되는 명칭일뿐인데, 왜 그런 인정머리 없는 세태가 떠벌려지는지......
우리 며느님들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
도대체 얼마나 시집 일에 열심이었는가.
새털 같은 날 중에 며칠이나 할애해서 시집 일을 했는가.. 호랑이나 물어갈 같잖은
왕비 병은 아닌지, 혹은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이고 무조건적인 거부
반응을 하는 단순세포는 아닌지, 침소봉대하는 엄살은 아닌지,
아내의 눈치만 보는 설설 기는 남편의 마음을 받을 만한 자격은 있는 것인지.
세상이 다 바뀌었는데 얼음장같은 며느리들의 마음은 요지부동이다
여성운동, 어쩌면 같은 여성끼리인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개선이 시급한 것 아닌가
남편이고 자식인 남자 하나 가운데 두고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는 요런 처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실, 일이라는 것 , 마음먹기 따라선 즐거운 일 아니겠는가?
며느리들이 조금만 마음을 돌리면, 조금만 긍정적인 사고를 한다면 온 집안이 화평할 것인데.....
나의 노동으로 많은 가족들이 행복했다고 생각한다면 피곤도 몸살도 감미로울 수 있는데
웬쑤 같이 마음을 굳게 닫아걸고 좁쌀 같은 소견머리로 바늘구멍만 쑤시는 볼쌍 사나운 꼴상이
자신은 아닌지, 제발 곰곰이 생각해야 할 일이다.
여자들끼리 , 더구나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 눈감고 삼 년이란 고추같이 매운 일생을
살아낸 불쌍한 동지들인 가엾은 선배들을 위로하기는커녕 살벌한 콩가루 집안을 만들려고
작정을 한 것인지, 퍼실퍼실 하나씩 떨어져 뒹구는 모래사장을 만들어 놓고 스트레스네
몸살이네 하고 모처럼 모인 가족들에게 찬물이나 끼얹어야 직성이 풀리는 작태가 말이 되는가.
너무 너무 안타깝다
의식주라거나 대소사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 같은 것을 헌 신짝처럼 버리려 든다.
전통이 나쁜 것인가. 선조 들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모범 답안이 전통이라고 본다
터트리고 부수고 까발리고 혼자만 좋으면 그만인 위험한 개인주의가 여성주의는 아니지 않는가.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일수록 남에게 베풀고 난 후의 기쁨 같은 것은 까맣게 모른다.
자신이 그 집안의 소중한 씨앗임을 망각한다. 집안의 기쁨도 슬픔도 자신이 제조해 내는
막중한 임무를 가졌음을 모른다
시어머니들이 며느리였을 때 마음에서 우러난 정성으로 어른을 모시기 보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도리와 의무감이 앞섰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마음 고생을 할 만큼 했기에 가족제도의
모순도 많이 생각한 터라 자기주장이 강한 며느리들을 십분 이해하고 관습이나 도리에
얽매이지 않는 끈끈한 딸 같은 고부간을 원하기고 한다. 시집살이나 고부갈등 같은 단어는
사전에도 없는 말이길 원한다.
육십이 되어도 철부지 낭만파 같은 감상적인 생각으로 며느리를 맞이하는데.... 그러므로
무엇이든 다 이해하고, 그렇지 뭐, 그만하면 잘한다, 잘한다 스스로 마음을 달래기도 하는데
어째서 시짜만 들어가면 두드러기가 나고 시字만 붙으면 골치가 쑤신다고 난리들인가
우리나라 여성들의 수준이 그 따위 깍쟁이 만한 마음에 담겨야 하는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하나, 아니 시어머니의 마음 하나 어루만지지 못하고 무엇을
한다고 큰소리들 치는가
명절 (제사) 때가 되면 며느리만 죽어나네,,,,
저번제사 지나갔네 두달만에 또제사네
내눈내가 찔렀다네 어디가서 말못하네
할수없이 그냥하네 쉬바쉬바 욕나오네
지갑열어 돈냈다네 중노동도 필수라네
제일먼저 두부굽네 이것쯤은 가비얍네
이번에는 나물볶네 네가지나 볶았다네
냄비꺼내 탕끓이네 친정엄마 생각나네
이제부턴 가부좌네 다섯시간 전부치네
부추전은 쉬운거네 스물댓장 구워냈네
배추전은 만만찮네 이것역시 구웠다네
동그랑땡 차례라네 돼지고기 두근이네
김치전도 굽는다네 조카넘이 먹는다네
기름냄새 진동하네 머리카락 뻑뻑하네
허리한번 펴고싶네 한시간만 눕고싶네
그래봤자 얄짤없네 입다물고 찌짐굽네
남자들은 티비보네 뒤통수를 째려봤네
주방에다 소리치네 물떠달라 지랄떠네
속으로만 꿍얼대네 같이앉아 놀고싶네
다시한번 가부좌네 음식할게 태산이네
꼬치꿰다 손찔렸네 대일밴드 꼴랑이네
내색않고 음식하네 말했다간 구박이네
꼬치굽고 조기굽네 이게제일 비싸다네
맛대가리 하나없네 씰데없이 비싸다네
남은것은 장난이네 후다다닥 해치우네
제삿상이 펼쳐지네 상다리가 부러지네
밥떠주고 한숨쉬네 폼빨역시 안난다네
음식장만 내가했네 지네들은 놀았다네
절하는건 지들이네 이내몸은 부엌있네
제사종료 식사하네 다시한번 바쁘다네
이내손은 두개라네 지들손은 졸라많네
그래봤자 내가하네 지들끼리 먹는다네
부침개를 썰어놓네 과일까지 깎아놓네
이제서야 동서오네 낯짝보니 치고싶네
윗사람이 참는다네 안참으면 어쩔거네
손님들이 일어나네 이제서야 간다하네
바리바리 싸준다네 내가한거 다준다네
아까워도 줘야하네 그래야만 착하다네
남자들도 일한다네 병풍걷고 상접었네
무지막지 힘들겠네 에라나쁜 놈들이네
손님가고 방닦았네 기름천지 안닦이네
시계보니 열두시네 내일아침 출근이네
피곤해서 누웠다네 허리아파 잠안오네
뒤척이다 일어났네 욕할라고 일어났네
컴터켜고 글쓴다네 그래봤자 변함없네
다음제사 또온다네 그때역시 똑같다네
짐싸갖고 도망가네 어딜가도 살수있네
아들놈이 엄마찾네 그거보니 못가겠네
망할놈의 제사라네 조상들이 욕하겠네
그렇지만 힘들다네 이거정말 하기싫네
명절되면 죽고싶네 일주일만 죽고싶네
십년동안 이짓했네 사십년은 더남았네
명절 아내스트레스에 빠진 남편의 애환
여편네가 고생인데 우리는뭐 맘편하냐
동그란땡 먹어봐도 둥근송편 먹어봐도
한두개면 배부른데 마누라가 하루종일
뽀류퉁해 만든음식 뭐가그리 맛나겠냐
말이났어 한말하지 꼴랑며칠 연휴받아
들어누워 쉬어보려 뼈빠지게 일을해서
벌어준건 어디갔냐 밖에나가 눈치보며
돈버는게 힘이드냐 이런저런 수다떨며
아랫목에 주저않아 전꿉는게 힘이드냐
마누라는 안버냐고 그건나도 인정하나
목숨걸고 버는거랑 남편믿고 버는거랑
그게어디 같을소냐 힘들면은 때리치라
남편들은 못그런다 가장이란 다그렇타
가장소리 들으려면 간쓸개는 버려두고
내가아닌 내인생을 죽지못해 사는것을
꼴랑며칠 명절날에 편한사람 모여앉아
고스톱도 한판치고 맛있는거 실컷먹고
게으름좀 피는것이 식구들을 부양하려
재충전을 한다는걸 마누라는 왜모르냐
남편들도 이젠정말 명절날이 지겹고나
한달전쯤 선전포고 살벌하게 살아야고
명절쉰지 한달간은 온갖짜증 받아야고
들어누워 티비봐도 그게눈에 안들온다
남편들도 눈치있다 마누라여 이제그만
명절지랄 하지말자 고작해야 일년두번
웃으면서 해치우면 나도좋고 니도좋고
우리모두 다좋은데 일년두번 이거못해
사네마네 해버리면 살벌해서 우째사누
명절노동 하기싫타 천애고아 찾아다가
결혼하는 사람없다 모든이는 다똑같다
이틀간만 참았다가 퍼져누워 있으면은
팔다리는 물론이고 원한다면 구석구석
시원하게 주므르마 마누라여 힘을내라
우리이쁜 마누라여 사랑스런 마누라여
첫댓글 아 옛날이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학창 시절이 그립네요.
내가 방학 때면 여기 실린 사진 처럼
서울에서 남원행 열차 타려고 저랬는데~~~ ㅎㅎㅎ
아~~~
옛날이여~~~
그립구나~~~
요즘엔 세상 좋아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