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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 병무기자 스크랩 395고지 철원 대마리 백마고지를 아시나요?
호박조우옥 추천 0 조회 117 16.05.22 03: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대마리 백마고지]



철원에 주둔한 6사단에 복무중인 아들 면회를 다녀오며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가득한 백마고지전적지에 들렀습니다. 이정표를 따라 가다보니 대마리백마고지 표지석이 우리를 맞아줍니다.

'미래의 땅 청정의 고장 이 곳 철원 대마리 백마고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주민일동'




[백마고지전적비]



나즈막한 언덕길을 올라오니 가슴속까지 숙연해지게 만드는  백마고지전적비를 만나게 됩니다.

백마고지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 한 켠이 뭉클한 것이 이 땅에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실감나게 해주는군요. 이 고지를 지키기 위하여 소리없이 스러져 간 이 땅의 청춘을 추억해내고 나이어린 아들을 먼저 보내고 가슴아팠을 부모들의 마음까지 헤아려가며,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겨보지만 다리가 한짐입니다. 그저 책에서만 영화속에서만 보던 곳을 이제사 와보는 미안함으로 마음속 깊이 목놓아 울어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위로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당신덕분에 대한민국이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 오래오래 기억하고 잊지않겠습니다.



[백마고지 전적지에 전시되어 있는 M113A1 장갑차]




백마고지로 오르는 길은 자작나무가득 뻗어있는 하늘길이었습니다.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중인 1952년 10월 6일 저녁을 기하여 10월 15일 오전까지 강원도 철원 395고지(백마고지)에서 보병 제 9사단과 중공군이 벌인 전투입니다. 고지를 장악하려고 30만발의 포탄이 사용되고 24번이나 주인이 바뀌며 뺏고 뺏기는 쟁탈전을 벌인 그 곳이 백마고지전투인 것입니다.

결국 국군의 승리로 끝나지만 고지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지금 이 곳에 그들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백마고지전투   위령비]



백마고지 사수를 위해 싸우다 산화하신 육군 제 9사단 장병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습니다.

백마고지 전투는 장융후이가 지휘하는 중국 인민군이 제 38군단의 6개 연대에 지원부대병력을 합쳐 총 병력 44.056명을 이끌고 철원 서북방 395 고지를 공격하게 됩니다.  국군은 김종오 소장 지휘하에 제 9사단 예하의 제 28연대, 29연대, 30연대 병력 2만 명과 국군 제 51, 52, 53포병 대대, 국군 제 53전차중대, 미군 제 214 자주포병대대.미군 제 955 중포병대대, 미군 제 73전차대대 등의 지원을 받아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격을 격퇴하게 됩니다. 10일동안 12번의 공방전을 거친 후에 중공군은 1만여명, 국군은 약 3,500명의 사상자를 내고 10월 15일 오전 국군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고지를 쟁탈한 청춘들의 장하고 장한 승리였습니다.



[백마고지전투위령비]


백마고지전이 벌어진 현장에 올라보니 산이라기에는 나즈막하고 언덕보다는 높은 구릉처럼 생긴 것이 평야지대로 둘러싸인 철원에서 보기드물게 높은 지형인지라  철원평야 일대를 조망하고 감시하기 딱 좋은 천혜의 요새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로 군사지정학상 요충지라는 말이 실감이 나더군요.

이러한 지정학적인 위치의 장점때문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었고, 심한 포격으로 인해 나무도 풀도 사라져 하얗게 변해버린 고지의 모습이 백마와 같다고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 비문]


조국의 자유와 평화통일을 위하여 이 격전지에서 장렬히 산화하신 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충정은 명예롭고 백마혼은 무궁하리라. 장하다 임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이 고지에서 희생된 국군 844위의 영혼을 진혼키 위해 5사단 전 장병과 대마리 주민 백마고지 참전 전우회 회원의 뜻을 모아 세우다.

서기 1985년 6월6일



[백마고지 전투전적비 기념관]







[백마고지전투기념비]


[백마고지전투지에 세워진 자유의 종]


이 곳에는 아직도 포성이 들리는듯하다

참혹한 전란으로 평화롭던 이 강산이 폐허로 변했던 그 시절

용사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어

저 백마산정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전진해갔다.


세월은 모든 것을 망각하는가?

기억하는 이는 점점 세상을 등지고

젊은이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를 되묻고 있다.


이제 우리는 피흘려지킨 자유의 소중한 값을 큰 소리로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우리 조국의 영생번영을 위한 것이다.


통일을 간절히 소원하며 이 전적지를 님들과 영령들에게 바친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백마고지 전투지]



1952년 10월 국군 제 9사단이 중공군 제 38군과 6.25 전쟁 시기 가장 치열하게 고지쟁탈전을 전개하였던 곳입니다. 1952년 10월 6일 철원 서북방 395고지 [효성산 남단]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 9사단은 중공군 제 38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 때부터 10월 15일까지 열흘간 395 고지를 사이에 두고 12차례 전투가 반복되면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지만, UN군의 지원을 받은 국군 제 9사단은 마침내 고지를 장악하였습니다.

전투 과정에서 국군 제 9사단은 총 3천 4백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중공군도 1만 3천 500 명이 죽거나 다치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극심한 공중 폭격과 포격으로 민둥산이 되어버린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후부터 395고지 일대를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백마고지 해발 395M]


[백마고지 영령들이여! 고이 잠드소서]



10일동안 치열한 공방전으로 황폐화된 395고지는 민둥산이 되어버려 마치 그 모습이 백마가 누워있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여 백마고지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국군 21만 9954발, 중공군 5만 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고 하니 풀한포기도 살아남지 못하고 민둥산이 되어버린 게 당연하겠지요.

백마고지 전투는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고 전쟁은 미궁속으로 들어가던 1952년 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을 즈음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1952년도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었습니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국군 제 9사단은 '상승백마'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

백마고지전투는 철원평야의 요충지 395고지에서 벌인 전투로 지역전투로는 세계전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치열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백마부대는 중공군 1만 3,000여 명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두게 되며 한국군의 전투능력과 지휘관들의 부대지휘능력을 과시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국군 제 9사단은 1966년 5월 맹호부대에 이어 파월부대로 선정되었으며 그 해 8월 월남으로 이동, 닌호아, 투이호아, 캄란지역에서 부여된 작전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한 줌의 흙으로 남은 이 땅의 청춘을 오래오래 기억하겠습니다.


대한의 아들이여 백마고지 영령들이여!! 영면하소서!! 오래오래 잊지않고 기억하겠습니다.





<취재: 청춘예찬 어머니 기자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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