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전차차고 터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279, 종로6가 289-3)
동대문역 9번출구를 나가면 'JW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서울'이 보인다
이곳은 바로 전차차고 터였다
1899년부터 1968년까지 무려 69년 동안이나 종점이었으며, 종로나 청량리방향 갈아타는 곳 (그러니깐 요즘말로 환승역)이었다
♤ 전차(電車)
1898년 2월 19일 고종의 명에 따라 육군총장 이학균 (李學均)은 콜브란(Collbran,H.), 보스트윅 (Bostwick H. R)과 교섭하여 전문 25조의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계약에 따라 1898년 10월 18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2월 25일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1단계가 완공되었다
1899년 4월 초파일(양력 5월17일)에 전차 개통식이 열렸다
노선은 같은 해에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졌고, 1900년 1월에는 구 용산(지금의 원효로 4가)까지 다시 연장되었다
1901년 7월에 전차 노선은 남대문에서 서소문을 거쳐 서대문에 이르는 의주로에도 가설되었으나 예상과 달리 이 노선만은 별로 사용되지 않아 몇 년 뒤 폐지하였다
8·15해방 후 자동차의 보급으로 버스가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면서 도로 한가운데를 지나는 전차가 오히려 폭주하는 교통수요에 장애가 된다고 하여 1969년 철거되었다
1968년에 서울전차의 운행이 중단되면서, 전차 차고지 부지가 유휴지로 변하게 되었다
그러다 1970년 전차 차고지에 동대문종합시장이 건립되면서 그 중 한 동으로 고속버스터미널이 건립되었다
실제 고속버스터미널 건립은 동대문종합시장이 건립되고 난 후인 1972년에 이루어졌다
1972년 건립 당시 터미널은 도로를 두고 서쪽은 군산, 이리(익산), 연무대, 전주 방면 호남선이 운행하였으며,
건너편 동쪽은 김천, 경주, 포항, 울산 방면 경부선이 운행하였다
그러다 5월 11일에 광주고속, 천일고속, 한남고속, 한일고속으로 이루어진 벤츠고속이 서쪽 터미널 옆으로 이전하여 부산, 대구, 대전 방면 노선도 운행하기 시작하였다
1973년 7월 1일에는 종로구 관철동에 위치했던 삼화고속버스터미널과 중구 을지로3가에 위치했던 속리산고속버스터미널, 중구 충무로3가에 위치했던 유신고속버스터미널을 이 터미널로 통합하였다
통합 당시 이 터미널에는 한일고속, 한남고속, 광주고속, 천일고속, 동부고속, 중앙고속 6개 회사가 운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버스터미널이 서울 강북 지역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교통부에서는 1977년 4월 21일부터 운행 구간이 서울에서 200km 이상 되는 고속버스 노선을 모두 강남으로 옮기게 하면서 서울시에서는 이를 따라 서울 도심지에 있던 6곳의 고속버스터미널 중 가장 먼저 이 터미널 부지에 대해 정류장 시설에서 주차장 시설로 바꾸어 고시해버렸다
(이는 도시계획법상 정류장 시설을 폐쇄하면 더이상 매표 업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강제로 터미널을 옮기고자 하는 조치였다)
사실 서울시에서 기존 터미널 부지를 주차장 시설로 고시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서울시에서 강북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버스 터미널들을 모두 강남으로 이전하려고 하자 터미널 소유주들이 이 자리에 빌딩이나 종합시장을 개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새롭게 빌딩이나 시장이 들어설 경우 안그래도 교통 혼잡과 인구 집중 문제 때문에 강남 지역으로 터미널을 옮기려는 서울시의 목적과 어긋났기 때문에 이 부지들을 주차장 지역으로 고시하여 당시 부족했던 서울시 내 주차 공간을 확보하여 주차장 이외의 용도로는 활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로서 각 운수 회사에서 운행 노선을 강남 서울고속 버스터미널로 옮기기 시작하여 1977년 8월 20일에 남은 잔여 노선 서울고속버스터미널로 모두 이전하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터미널이 이전하고 남은 부지는 서울시에서 주차장 시설로 고시하였기 때문에 인접한 동대문종합시장의 주차장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2011년 JW메리어트호텔에서 이 부지에 호텔을 짓기 시작하여 2014년 2월 4일에 'JW메리어트 동대문스퀘어서울' 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 동대문 발전소
전기가 점등된 지 13년 만인 1900년 4월 10일 민간에서도 첫 전깃불이 밝혀졌다
이 민간 점등은 서울 시내 전차의 야간 운행을 위한 것이었다
한성전기회사는 전등 사업을 본격화하여 동대문 발전소에 200 KW 발전 설비를 설치, 전차와 전등에 전력을 공급하였다
흥인지문 (서울시 종로구 종로 288, 종로6가 69)
한양도성의 동쪽 문으로 일명 동대문이다
숭례문과 함께 한양도성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며, 2008년 숭례문이 불타면서, 흥인지문은 사대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에 지어진 그대로 남아있는 문이 되었다
1396년(태조 5)에 처음 지어졌으며(일대의 지반이 낮아 땅을 돋운 뒤 건설하여야 해서) 1396년 9월 다른 성문을 건립할 때에도 공사중이었으며, 1397년(태조 7)에야 비로소 완성되었고 이 때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
이후 1453년(단종 1)과 1869년(고종 6)에 고쳐 지어서 현재의 모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중층 우진각지붕 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안 숭례문과는 다르게 흥인지문의 누각은 조선 후기의 양식이다
석축 역시 숭례문에 비하면 보다 실전적으로, 반달형의 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이유인 즉, 흥인지문이 경복궁에서 볼 때 좌청룡으로 동쪽에 있는데, 경복궁을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주산 현무봉인 북악산과 우백호인 인왕산, 그리고 안산인 남산이 높고 큰 것에 비하여 좌청룡인 낙산은 낮고 약하기 때문에 한양은 동쪽이 약해 동쪽 방향에 있는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는다고 보았다
(이 약한 기를 보충해주기 위해서 군사적 목적이 아닌 풍수적 목적에 의해서 옹성을 쌓은 것이다)
또한, 대문과 소문을 막론하고 한양도성에 존재하는 다른 문의 명칭은 세 글자로 되어 있지만(숭례문, 돈의문, 숙정문, 홍지문, 동소문, 소의문 등) 흥인지문만 유일하게 네 글자와 정사각형 현판으로 되어있다
이는 한양 동쪽이 다른 삼면에 비해 물이 흘러나가므 로 전체적으로 토대가 우묵하게 낮아 지기가 약하다는 이유로 그 기운을 북돋는다는 의미에서 1868년(고종 5) 이름을 네 글자로 지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고종실록> 및 <승정원일기>에는 동대문을 고종 6년에 고쳐 지은 사실은 등장하나, 이때 '흥인지문' 이라는 4글자 현판으로써 비보(裨補)했다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흥인지문'이란 말은 <세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며 <중종실록>에도 나온다
(시기적으로 이쯤에서 등장하는 것이 맞는 듯하니, 조선왕조 500년 동안 낙산을 비보하지 않다가 1868년에 느닷없이 '흥인지문'으로 현판을 갈아치운다는 게 상식적으로도 이해되지 않는다)
흥인지문의 현판 글씨는 중국 당나라의 유명 서법가인 안진경의 서체로 쓰여있으나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동서 쪽에 돌계단을 만들어서 1,2층 문루로 오르내릴 수 있게 만들어 장수가 머물며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 역할을 하며 전쟁에 대비하였다
1907년(고종44) 3월에는 흥인지문과 숭례문 좌우측 성벽을 8칸씩 헐어 전차 선로를 부설하였다
1999년에는 옹성이 붕괴되어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3억여원을 들여 보수하였으나, 옹성 아랫부분이 튀어나오는 '배부름 현상'이 일어나 재시공을 결정하였다.
지하철이 개통된 이후 지하수위가 낮아지고 지반이 침하되었으며, 2002년 12월부터 2007년 8월까지 옹성을 해체하여 지반 보강 후 복원하였다
2015년에는 도로를 내면서 끊어진 문 북쪽의 도성 자리에 석재를 포장하는 공사가 이루어졌다
♤ 1925 경성운동장 건립을 위하여 흥인지문 ~ 광희문 간 성벽을 훼철하였다
♡ 1975년 동대문구 관할이었던 숭인동.창신동(흥인지문 바깥 지역) 일대가 종로구에 편입되면서 동대문 역시 종로구 관할로 바뀌어 현재는 동대문구가 아닌 종로구에 있다
♤ 2018년 3월 9일 새벽 1시 49분경 40대 남성이 흥인지문의 누각에 몰래 침입하여 미리 준비한 종이박스에 불을 붙였으나, 다행히 흥인지문은 담장 일부가 그을리는 데에 그치고 방화범은 당일 체포되었다
경성궤도회사 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 286, 창신동 444-4)
경성궤도회사는 동대문에서 출발하여 뚝섬과 광장리 (현재의 광나루)까지 운행한 협궤열차(일명 기동차)를 운영하던 회사이다
(개통 당시에는 전철화가 되지 않아 가솔린 동차가 운행되었으며, 이는 서울 전차와 구별되는 특성이기에 이용객들은 '전차'가 아닌 '기동차'라고 불렀다)
1930년 11월에 경성교외궤도주식회사는 경성궤도의 노선을 부설하였고 이것이 경성궤도의 시초가 되었다
그러나 경성교외궤도주식회사는 경영상의 문제로 해당 노선을 경성궤도주식회사에 이관하였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으로 경성궤도회사의 경영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이 닥치자 결국 1953년에 서울시가 경성궤도를 인수, 시영체제로 운영하게 되었다
경성궤도는 1961년에 폐지가 결정되었으며, 1963년경에 완전히 운행이 중지되었다
경성궤도 동대문역 아래로 동대문(흥인지문)이 보이는데, 경성궤도 동대문역은 오늘날 동대문 관광호텔 자리에 있었다
동대문 관광호텔 옆으로 뚝섬으로 가던 전동차길 흔적이 남아 있다
오간수교 ( 서울시 종로구 종로6가)
종로6가와 을지로6가를 잇는 (청계광장을 기준으로) 청계천의 14번 째 다리이다
원래는 한양도성 성곽의 일부로, 청계천이 도성을 빠져나가게 만든 수문(水門)이었다
5개의 무지개 모양으로 된 홍예문이었으며 이름도 본래는 ‘오간수문(五間水門)’이었다
1396년(태조 5년)에 한양도성을 지을 때 창건한 듯 하나 정확한 건 모른다
처음에는 수문이 3개였으나 1421년(세종 3년)에 장마로 개천이 범람하자 1년 뒤에 추가로 2개를 더 만들어 5개가 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에 수리하였으며, 1760년(영조 36)에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다시 보수했다
1907년(융희 원년) 일제가 청계천 물줄기가 원활하게 흘러가게 한다는 명분으로 오간수문을 헐었고 1년 뒤에는 근처의 성벽마저 철거했다
이후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새 다리를 짓고 이름을 ‘오간수교(五間水橋)’라 했다
일제강점기에 오간수교은 시내 전차의 주요통로였다
1921년 6월 흥인지문에서 광희문간 전차 노선이 신설되면서 오간수교 위에 전차가 다닐 수 있는 철로가 놓이게 되었다
더욱이 오간수교 바로 옆(현 JW메리어트 동대문스퀘어서울 자리)에 '전차 차고'가 자리하고 있어서 오간수교는 다른 어떤 곳보다 전차 왕래가 많았다
1926년 6월 오간수교는 다시 한 번 확장되었다
순종의 장례행렬이 장지인 유릉(裕陵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갈 때 이 오간수교를 건너가게 되었다
따라서 장례행렬이 건널 수 있도록 두간 반(약 4.5m)이던 다리를 네간 반(약 8.2m)으로 확장하였다
첫댓글 예전 학창시절 동대문의 전차길이 어렴푸시 생각나네요. 그 때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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