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
왕가위는 우리에게 꽤, 그것도 단순 팬수준이 아니라 열혈팬을 가지고 있는,
왕가위 마니아 군단을 거느리고 있는, 그런 홍콩 감독이다.
게다가 나도 왕가위의 극렬 팬중의 하나이다.
왕가위의 데뷔작인 <몽콕하문>즉 우리나라에서는 <열혈남아>로 알려져 있는 영화를 보고
나는 소름이 좌악 끼치는 경험을 한 바 있고 그뒤로부터는 그가 발표해 온 아비정전(1990), 동사서독(1993), 중경삼림(1994), 타락천사(1995), 해피투게더(1997), 화양연화(2000), 2046 ...이렇게 단 한편도 빠뜨리지 않고 그의 영화를 탐식해 왔으니까~
매번 그토록 사무치는 가슴으로, 내가 지니게된 그 모든 사랑와 실연의 경험을 되뇌이듯
추억하면서 보았던 왕가위의 영화들
일년중 몇번 안되는 연휴나 휴가때 마나 나는 왕가위의 영화를....비디오가게에 가서 한꺼번에 왕창 빌려다 다시 보고 또 보고 했으니까~
그건 내사랑에 대한 회고였고, 내 사랑에 대한 추억의 리싸이클링이였다
가끔 진저리치는 어떤 복합적인 심사에 봉착하게 될때
나는 왕가위 영화들을 떠올린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원인이나 사유가 없는, 파블로프적 반사작용에 가까운, 아주 즉각적이면서도 아주 사소한 개인적인 그런 연상작용과도 같은 현상이다.
언제고 나는 왕가위 영화를 몽땅 뭉그려뜨리던 아니던간에
그의 영화들 못지않는 아주 우아하면서도 근사한 그런 그의 영화에
대한 글들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나는 항상 너무 많은 계확과 너무 많은 가상의 업무에 짖눌려 살고 있다 .
그리고 나의 이런 계획들을 어느 누군가는 늘 실천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참 부끄럽고 슬픈일이다
아래 글은 이런 나를 슬프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게 만들었던
누군가의 글인데......
문득 오늘 한친구와 통화하면서
흘러나왔던 왕가위 영화 어쩌구 저쩌구 중에 ...........잠이 안와
내친김에 올려본다 (떡보면 제사지내고 싶다고 ~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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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내가 자주 들락거리던 < 영화웹진> 이라는 곳의 맴버중 하나인데
그의 아이디는 아이, 그러니까 알파벳으로 < i > 로 글을 올리곤 했다
실연을 당한다는 것은, 걸어서는 안 되는 전화번호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가로, 세로 5미터쯤 되는 식탁에 가득 차려진 슬픔과 분노, 질투와 연민. 외로움을 싫건 좋건 먹어대야 하는 것이다.
그건, 하루에 10시간씩 15년 동안쯤 조각한 조각상이 지하철 계단에서 넘어져서 산산조각 부서지는 것을 보는 것 같은 순간이다. 그 순간은 무척 길게 느껴진다. 그 몇 초는 그 15년의 10시간보다 더 길고 안타깝게 느껴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실연을 하고 자신이 한심해지는 순간은 아이러니 하게도 일상을 느낄 때이다. 온갖 궁상을 떨고, 2달이 남은 불치병 환자처럼 굴지만 어느 순간 냉장고에 음식을 다 꺼내놓고 고추장에 밥과 반찬을 넣고 비벼서 꾸역꾸역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이다. 펑펑 울다가 티비 속의 코미디를 보며 웃을 때는 또 어떤가? 인생과 영화의 차이점 중에 하나는 편집이 없다는 점이다. 시간이란, 일상이란 얼마나 잔인한가. 삶에도 편집이 있다면 얼마나 모두의 인생은 화려할 것이며 화려하게 기억될 것인가.
왕가위의 영화에는 어떤 형식, 형태이건 실연과 어긋남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어떤 영화에서는 그것이 좀 더 드러나고, 어떤 영화는 조금 덜 드러나지만, 버려지거나 버리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하긴, 그렇지 않은 영화가 어디에 있겠느냐만은.
인터넷에는 실연극복을 위한 몇 개의 웹사이트들이 있다. 그 중, 어느 웹사이트에서는 실연 극복을 위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 방법론 중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당신은 지구상의 모든 여자에게 거절당한 것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다.
사실, 영화나 음악, 소설에서 슬픔을 증대시키는 방법으로 일종의 절실함은 자주 등장하고 있다. 단 하나의 사랑이 끝났다. 내 인생의 마지막 사랑. 영원히 볼 수 없는…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세상이 끝난 것 같지만, 사실 그런 것은 아니다. 죽을 것 같이 괴로운 밤이 와도 죽지는 않는다. 최소한 이 글을 쓴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살아 있을 테니까.
안 그런 척을 하지만, 왕가위의 영화에서는 절실함과 '그것 뿐 임'을 교묘하게 구축한다. 그 교묘함은 Cool함과 Dry함으로 포장되어 있어서 어떻게 보아도, 눈물 철철에 비장미 철철로는 보여지지 않는다. 소리내어 우는 사람도 없고 술에 취해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도 '왕가위 월드'에는 없다. 술에 취한 사람은 있어도, 울지는 않는다. 그의 세계는 그런 모습을 구축되어있다. 세련됨과 평정심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왕가위의 영화들에 대해, 다시 바라보기로 한다. 그건, 내게도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왜냐면, 나도 이제 30살이 되기 때문이다.
[S#1 : 실연에 관한 첫 번째 이야기. 열혈남아.]
액션 영화? 하지만, 냉정하게 영화의 시작을 다시 생각해보자.
이 남자의 하루는 이랬다. 저녁이 될 때까지 잠들어야 할만큼 지독한 피로를 지닌 그는 생전 본적도 없는 폐렴에 걸린 여자를 맡아야 했고 일 처리를 똑바로 못한 동생 때문에 직접 일 처리를 해야 했다. 6년을 사귄 여자 친구는 자신에게 알리지도 않고 자신의 아이를 낙태시켜버렸다.
당연히, 술에 취할 수밖에 없었던 이 남자는 술에 취해 자신의 집에 들어와서는 온갖 것들을 부셔버리고 절망하고 있다. 그때, 폐렴 걸린 여자는 남자에게 말을 건다.
- 실연 당하셨어요?
- 뭐라고 했어?
그는 난폭하게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이며 말한다.
- 잘 들어. 다시는 실연이란 말을 하지마, 그럼 당장 쫓아낼 테니까.
열혈남아는 왕가위라는 역사의 시작을 의미하는 영화이다. 사실, 몇몇 컷의 편집은 길거나 짧다는 생각이 들고, 카메라는 지나치게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인 척하려고 하고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깝게 있다. 아… 어설픈 틸링과 패닝이라니. 미쟝센의 구축은 또 어떤가. 한마디로, 너무 촌스러운 영화이다.
하지만, 분명히 왕가위다운 느낌과 호흡이 존재한다. 사실, 포장마차의 격투 신은 지금 봐도 너무 멋지다. 액션은 춤을 추듯 몽환적이고 몇 개의 신은 후일 그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왕가위 영화의 복선처럼 등장하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열혈남아의 이야기는 컵 이야기이다. 폐렴 걸린 여자는 피곤한 남자를 떠나며 유리컵을 사준다. 그리고, 편지로 컵을 사놨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 깨버릴 테니 그때 전화를 하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겠다는 에피소드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근사하지 않은가. '그럴 수밖에 없는 남자'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을 표현하기엔 적당하지 않을까?
그 유명한 공중전화 키스 신이 끝나고, 격정이 끝난 후에 어색함을 느끼는 남자와 여자. 일상적인 대화가 끝나고 집으로 가려는 그녀. 그는 그녀에게 말한다. 꼭 가야해? 감정이 터져버리듯 그에게 원망하는 그녀.
- 왜, 이제야 왔어요?
- 난 나 자신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어. 그래서, 참다… 참다 온 거야.
피곤한 남자는 폐렴 걸린 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는 남자는 싸구려 호텔로 먼저 들어가고, 그녀도 따라간다.
사실, 많은 의미에서 열혈남아는 오랜 시나리오 작가로써의 왕가위와 가능성 있는 신인 감독 왕가위로서의 아이텐티티가 혼재되어 있다. 때문에, 너무 익숙한 관습을 쉽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시도들이 또 거기에 어느 부분 자리잡고 있다.
의리와 조직으로써의 성공 등. 기존의 홍콩 영화의 소재와 패러다임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부분이 많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이야기의 줄기는 청파와 소화가 토니와 벌이는 복수와 갈등이다. 남자로써, 한 명의 어엿한 조직원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청파와 그의 어리석음을 말릴 수 없는 소화의 모습은 슬프다.
열혈남아의 결말을 기억하나?
단 1분이라도 영웅이 되고 싶은 청파(장학우)는 죽음이 보장된 청부살인을 맡고 소화(유덕화)는 그를 염려해 따라간다. 보장된 죽음을 맞이하는 청파. 그의 복수를 하는 소화. 소화는 뒷머리에 총을 맞고 장애자가 되어 감옥에 갇힌다. 장애자가 된 소화에게 아화(장만옥)이 찾아간다. 귤 하나를 못 먹어내는 소화를 보며 아화는 소화를 떠나온다.
그때, 환청인지 회상인지. 알 수 없는 소화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화를 부르는….
그것은 희망이라고 볼 수도 있고, 장난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쨌건 많은 의미가 있다.
마지막 청파의 선택이야말로 왕가위의 비장미 철철의 극치인 비극적인 세계관의 반영이다. 그의 다른 영화에서 등장하는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 먼저 거절한다'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고.
'어쩔 수 없음'이란 형태의 절실함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 알면서 선택하는 불행, 그럴 수밖에는 없는 선택. 그 모든 것들이 '왕가위 월드'에 충만한 비극의 씨앗들이다. 그리고, 확실하지 않은 희망이라는 형태의 향기를 더해주는 마무리. 어쨌건, 열혈남아는 왕가위라는 작가의 탄생을 예고하는 복선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실연을 당하고 나면 담배를 끊곤 했다. 담배 생각이 너무 간절해서 그녀에 대한 생각이 희미해지곤 하니까 말이다.
[S#2 : 실연에 관한 2번째 이야기. 아비정전]
- 이 시계를 봐.
- 왜 시계를 봐요?
- 1분만.
…
- 1분 됐어요
- 오늘이 몇 일이지?
- 16일.
- 4월 16일.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우리는 1분 동안 같이 있었어. 난 잊지 않을 꺼야. 우리 둘만의 소중한 1분을. 이 1분은 지울 수 없어. 이미 과거가 되었으니까.
아비정전을 본 사람이라면, 이 대사를 잊을 수 있을까?
왕가위라는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다면, 열혈남아를 만든 감독과 같은 감독이 만든 영화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영화는 지나치게 세련되었고, 탄탄하다. 어떻게 저런 단단한 구성이 가능할 수가 있을까 싶다. 카메라 워킹은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기까지 하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1961년 4월 12일이라고 밝히고 있는, 아비가 친어머니를 찾아가는 것을 시점에서 크게 나눠진다. 이렇게 나눴을 때, 전반부는 정말 미려하기 그지없지만, 후반부는 생각의 밀도나, 감독에 의한 영화에 대한 지배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가 있다. 하지만, 그게 어딘가?
열혈남아에서, 이후의 '말하자면 왕가위적인 영상'이 20%정도였다고 한다면 아비정전은 80%정도 왕가위 같은 영상이 있다. 동사서독이나 춘광사설, 화양연화 같은 작품을 그 정도에서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중경삼림이나 타락천사도 기대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뭐, 20%이니 80%이니 하는 것은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겠지만…. 확실히 두 번째 영화에서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준다. 놀라울 정도로… 새로웠다. 분명히.
왕가위를 화려한 스타일리스트로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일테면, 중경삼림 등에서 사용된 점프셧 같은 기법으로만 새롭다고 느끼는 것들이 바로 그것인데…. 나는 많이 다른 생각을 가졌다.
사실, 왕가위 영화에서 정말 미려한 장면들은 점프셧이나 핸드핼드로 정신없이 몰아가는 장면들이 아니다. 공간과 욕망과 관계를 끊임없이 다른 시선으로 해석하는 모습. 그렇게 구축되는 영상들이야말로 정말 아름답고 왕가위다운 영상이 아닐까?
아비정전에 이르면, 열혈남아에서 눈에 거슬리던 산만한 패닝과 틸링이 많이 정제되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가 있다. 영화의 흐름만큼이나 섬세하고 절제된 속도가 무척 아름답다.
열혈남아에서도 어쩌면 지적했어야하는 사실이겠지만, 그는 대단히 독특한 시퀀스 구성을 즐겨한다. 열혈남아의 포장마차 신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소화의 눈'의 익스트림 클로즈업씬은 독특하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왜냐면, 그를 통해서 영화에서의 시선과 관객의 시선은 소화에게로 전이되고 그렇게 관심선이 형성되어 가기 때문이다.
아비정전은 비교적 호흡이 긴 영화이다. 씨퀀스들은 대개, 한 개의 신으로 구성되고 따지고 보면 롱테이크들이다. 그런데, 그 신들을 자르는 위치나 카메라가 읽어 들어가는 각도와 높이. 위치는 굉장히 독특하다는 점이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이런 독특함은 하나의 장면 안에 피사체들의 관계와 심리, 그 욕구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을 담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점이다.
이 이야기는 좀 더 하고 싶지만, 지면 관계로 줄인다.
영화는 이런 대사로 마무리를 짓는다.
- 이런 질문을 해볼까?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에 뭘 했지?
- 왜 묻지?
- 아니…. 친구 하나가 있는데 내게 그렇게 묻더군. 난 잊었어. 자넨?
- 그녀가 말했군.
- 그녀를 잊지 않았나?
- 기억해야할 건 잊지 않아.
그리고, 모호한 몇 개의 대사가 더해지고 의미 있는 몇 개의 장면들이 지나가고 나면, 이 영화를 통해 단 한 장면만 출연하는 양조위가 등장한다. 이것 역시 의도인지, 희망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많은 의미가 있다.
너무 많은 기억이 있는 탓인지…. 기억해야할 것이 어떤 것인지 잘 구분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기억될까. 아니. 기억이나 할까? 기억이나 해줄까.
[S#3 : 실연에 관한 3번째 이야기, 동사서독]
春蠶至死絲方盡, 蠟炬成灰淚始乾.
[춘잠지사사방진, 납거성회루시건]
봄누에는 죽음을 다한 연후에야 실 뽑기를 멈추고, 양초는 재가 된 연후에야 눈물 흘리기를 멈추네. 라는 뜻이다. 이 대련은 김용의 '신조협려' 가운데, 죽음을 앞둔 양과가 회상하는 것으로 동사가 도화도에 액자로 써둔 시의 일부라고 소개되고 있다. 허나, 사실은 김용이 창작한 대련으로 추정된다. 아니라도 할 수 없지만.
촛불은 재가 된 후에야, 눈물을 흘리기를 멈추네. 어쩐지, 왕가위 영화 같은 느낌이 들지 않나?
고다르에게 추리소설이 있었다면, 왕가위에게는 무협소설이 있다. 무협소설을 김용이란 작가를 지칭하는 일종의 대명사로 취급받는다고 해도 별다른 무리가 없다.
그리고, 나와 왕가위의 공통점 중에 하나는 김용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그도, 나도.
우선, 신필 김용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사족: 장 뤽 고다르가 추리 소설광 이였다는 사실은 나름대로 유명하다.]
2000년 11월 2일부터 5일까지, 북경대학에서는 '2000년 북경 김용 소설 국제 연구 토론회'가 열렸다.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토론회에 참석했었고 토론회에 참석한 어느 대학 교수는 "김용 문학은 홍루몽이후 중국 문화사의 기적"이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90년대 이후, 북경 대학 중문과에서는 '김용 소설 연구'가 정식 과목으로 채택되었고, 많은 수의 고등학교에서도 '김용 소설 연구' 과목이 열렸다고 한다.
만화방 구석에 꼽혀진 무협지쯤으로 김용 소설을 평가하고 있을 많은 사람들은 이해되지 않겠지만, 김용 소설은 통속 문학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위의 15편은 '진본 15편'이라 불리는 김용의 작품들이다. 김용의 작품은 중국의 역사를 꿰고, 유고 도교 불교의 사상, 철학,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작품들이다. 그의 필력을 신에 일컬어, 신필 김용이라는 호칭이 그냥 붙여진 것은 아니다.
이 가운데, 소호강호는 이연걸이 출연한 영화로 소호강호와 동방불패로 제작되었다. -동방불패의 경우는 조금 내용이 다르긴 하지만- 신조협려는 동명의 다른 내용의 영화화되었으며 모든 작품들은 어떤 형태로든 1번 이상 영화화되었다.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의 형태로 제작되었다. 비디오 가게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무협 비디오 시리즈의 많은 부분 중에 하나도 바로 김용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것들이다.
그러니까, 김용이라는 위대한 작가는, 누구도 도저히 갚지 못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업적을 후대에 남긴 셈이다. 무협 소설 혹은 초인 문학이라 일컬어지는 일련의 소설들의 기초를 완전히 닦아낸 인물이니 이러한 평가가 과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가 친숙한 무협 영화 속의 거의 대부분의 명사들은 김용에 의해 창조되었거나 발견되었을 정도이다.
그리고, 김용의 그 위대한 업적들은 소설, 만화, 영화, 드라마를 통해 훔쳐갔다. 김용에 의해 창조된 인물과 이야기를 바탕으로 무협영화라고 일컬어지는 일련의 장르가 탄생할 수 있었고 다른 영상물과 만화,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자, 김용의 이야기가 지루할 분들을 위해 하나의 지적을 하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많은 논의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왕가위의 대표작인 '동사서독'에서 우리는 김용이라는 위대한 작가가 왕가위의 눈으로 해석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것은 正과 邪가 완전히 뒤바꿔진 모습이고 원작을 떠난 무협소설 작가 왕가위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중요한 지적이랄 수 있다.
다시 말해. 원작을 완전히 무시한 왕가위.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버린 왕가위에 대한 지적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김용의 진본 소설은 15개가 존재한다. 불행히도, 김용은 녹정기라는 걸작 이후로 '절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김용 소설을 모작하는 수많은 가짜들이 판을 친다. 일테면, 영화 동사서독과 유사한 시기를 다룬 화산논검이나 구음진경이라는 작품도 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사조영웅전에 등장한 강남칠협만을 주인공으로 한 다른 티비 시리즈가 있었다고도 한다.
요컨대, 왕가위의 '동사서독'에서는 김용의 사조영웅전에 등장한 주인공들의 훨씬 젊었던 모습으로 가득하다. 말하자면, 아류라고 할 수 있는 작가들에 의해 씌어진 '가짜 김용 소설'들과 다를 것이 없는 설정. 이야기다.
말하자면, 왕가위는 진본인 김용 원작을 무시하고 나름의 감수로 새로운 소설을 써버린 셈이다. 일테면, 그 모습은 '화양연화'의 주인공과 동일시가 되는 모습이다. 이야기는 조금 후에 더 하도록 한다.
앞서, 동사서독은 그냥 새로 쓴 것이 아니라 正과 邪가 완전히 바꿔져 새로 쓰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동사와 서독은 김용의 진본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악당으로 나온다. 동사는 성격이 이상한 것으로 묘사되는 수준이지만…. 서독. 구양봉(장국영)은 악독한 인간이며 여색을 탐하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으로 묘사된다.
더군다나, 홍칠공의 식지가 잘려나가는 것은 그의 식탐을 경계하기 위한 것으로 김용의 진본에도 나와있으나 왕가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꿔버린다. 구양봉은 하나의 문파. 그러니까, 하나의 조직의 수장으로서 청부 살인 따위를 할 인간도 아니지만, 구양봉 즉 서독을 한 명의 킬러로 그려버리는 것이다.
일테면, 임권택이 춘향전을 다시 만들면서 변학도를 선한 인물로 그린다면? 춘향전의 주인공을 방자와 향단이로 해버린다면? 그 정도 수준의 실험적인 묘사를 왕가위는 해내는 것이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연극이 아니라 공적 매체를 통해서 말이다.
문제는 이런 창작이 일종의 실험.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웹진영화를 통해 왕가위 영화를 꺼내는 화두도 이런 것이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작은 실험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면, 김용으로 대표되는 무협소설, 초인문학은 홍콩이란 영화 시장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주춧돌이다. 무수히 많은 무협영화가 만들어졌고 영화를 만드는 왕가위의 입장에서는 누구보다 중국 문화권의 영화 산업에 있어 얼마나 김용으로 대변되는 무협소설이란 장르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지 알고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중국의 영화라는 것이 무협 영화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모습이나 장르 컨벤션 등은 도저히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중에서 왕가위는 김용의 작품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사조영웅전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이것. 좀 묘하지 않은가?
지금까지의 글을 정리하면, 왕가위는 동사서독이라는 영화를 통해 아주 유명한 작가의 소설을 자기 마음대로 개작해서 영화로 만들었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가 있겠다. -그냥 한줄로 쓰고 말 걸….- 그리고, 난 이런 태도에서 왕가위라는 코드가, 작가가 지닌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다.
왕가위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하루키나 케니지같이 어떤 일종의 모던한 느낌을 주는 소도구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바꿔 말하면, 하루키의 문학적 감상이나 케니지의 장인으로서의 완성을 즐기기보다는 어떤 기호나 코드로 인식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통조림이 저장된 외로움. 쯤으로, 왕가위 영화는 평가받고 소비되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많은 지면을 통해 왕가위와 김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나는 왕가위라는 작가가 위치한 상황을 바라보자는 맥락에서였다.
동사서독에 대한 왕가위의 태도란. 중국 문화라는 것의 최대 수혜자임을 인정하는 동시에 거부하는 몸짓이라고 볼 수 있다. 그저, 스타일리스트로, 비주얼리스트로 보여질 수도 있겠으나 그는 좀 더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왕가위는 결국 욕구불만 가득한 사춘기 소년처럼 많은 것들에 대해 부정하고 거부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기에 왕가위의 모습에서는 씨네마 데크에서 죽치고 음악만 들으면서 가방에서 김용의 무협 소설이 들어있는 모습이 연상되는 것이다. 결국, 왕가위라는 코드의 정체성은 모호함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왕가위라는 인물이 만든 영화가 주목을 받게된 것은 모호함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은 완전히 모호하고, 사람들은 부유하고,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정해진 것도 아무 것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 세계 속에, 그럴 수밖에 없음이라니….
나는 왕가위의 영화가운데, 동사서독을 최고로 본다. 그건, 아마 완전히 계산된 영화라는 나의 판단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을까? 완전히 계산된 영화.
동사서독은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아름다운 영화이다. 미려한 대사도 대사지만, 그 아름다운 장면들은 뭐라 말할 수 없다. 카메라는 그 순간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연기를 하듯 미묘한 빛의 변화와 초점의 변화로 이야기를 끊임없이 한다. 그 특유의 소프트 포커스는 공간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고, 인물의 심리 상태에 대해 관객들에게 너무나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는 백타산에서 드넓은 강(혹시 바다일까? 호수일까?)를 바라보는 자애인(장만옥)의 모습을 왕가위 영화에서 최고의 장면으로 꼽고 싶다. 한 폭의 수묵화처럼, 장만옥의 얼굴은 해석되고 정말 아름다운, 정말 영화에서의 모든 감정을 담아 거기에 둬버리는 모습.
동사서독은 어느 장면이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착각을 일으킬 만큼 수려하고 지나칠 정도로 계산되어 있다. 인물들은 몇 센티 움직여야하는지 계산된 것처럼 앵글 안에서 움직인다. 완전히 계산된 영화라는 것은 완전히 아름다운 여자처럼, 숨막히고 따분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숨막힘 때문에 왕가위는 중경삼림이나 타락천사 같은 즉흥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어졌을런지도 모르겠다.
동사서독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할 이야기는 아직 많지만, 지면 관계상 줄인다.
나중에 난 소주회사에 소송을 걸 생각이다. 술을 마시면 잊을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많이 마셨지만… 오히려 더 또렷해질 뿐이었다.
많은 것을 잊으려고 노력하다보면, 나중엔 무엇을 잊어야 하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야 한다는 것만 기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