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시. 의미 있는 꿈과 행복한 삶
1. 우리에게 꿈이 필요한 이유
1) 평균수명 100세 시대
대한민국은 이미 초장수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2008년 통계청은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수명이 남자 76.1세, 여자 82.7세이며, 또한 수명은 10년 마다 약 5년씩 증가해왔음을 발표했다. 이러한 추세를 따른다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평균수명은 40년 후에 약 100세가 될 것이며, 80년 후에는 약 120세까지로 증가하게 될 것이다. 현재 40대 이하의 국민들은 평균적으로 100세 이상 살 것으로 예상된다.
< 한국인의 평균수명 추이, 2008 통계청 발표자료 >
직장들의 취업연령은 대략 20대 중후반이다. 그런데 직장인의 대부분은 60세 이전에 퇴직하고 있다. 평균수명이 100세를 넘어선다면, 20대 중후반에 취직해서 길게 잡아 60세에 그만둔다 할지라도 삶은 자그마치 40년 이상 남는다. 근로자들의 정년을 일괄적으로 늦춰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방안은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다. 정년을 늦출수록 젊은이들의 취직자리는 더 줄어들기 때문이다. 지금도 상당수 젊은이들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있다. ‘88만원 세대’라는 말도 비정규직 젊은이들이 받는 월급을 의미하는 서글픈 단어이다. 이러한 문제는 틀림없이 중대한 사회문제이겠지만, 그에 대비해서 정부가 해결책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정부는 최소한의 생계비를 지원하거나, 한시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정도에 머무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은 20대 중후반 취업해서 60세 이전에 퇴직하고, 그 이후 40년 이상의 세월이 남았음을 현실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바랄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각자가 대비해가야 할 것이다.
2) 내가 진정 원하는 꿈을 추구하자.
초장수 사회에서는 무엇보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꿈을 추구해야 한다. 수명이 길어진 만큼 일하는 세월도 길어질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에게 자랑할 만한 간판이나, 타인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우선적인 기준은 나 자신의 욕구를 존중하는 것이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일이라도, 본인이 만족하지 못하고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일이라면 말이다. 그러므로 남에게 보이는 간판이 아니나 겉모습이 아니라,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꿈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꿈을 향해 살아가는 인생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3)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꿈이다
반퇴시대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바로 꿈이다. 학생들에게나 꿈이 필요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직장인들에게도 꿈이 필요하다. 꿈에서 출발한 인생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인생의 방향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인 재테크나 건강관리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무엇을 위한 재테크이냐? 무엇을 위한 건강관리이냐? 재테크의 목적, 건강관리의 이유,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의미 등의 인생의 목적과 의미, 가치를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목적에 맞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 목적에 맞는 제테크, 건강관리 등이 필요하다. 목적이 없는, ‘남들이 하는 만큼’, 평균적인 인생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에게는 의미를 찾는 훈련이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남들만큼’이라는 기분으로 잘 살아왔다. 길어진 인생에서 일상적인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기를 훈련할 필요가 있다.
2. 의미 있는 꿈의 필요충분조건
1) 희망직업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다
우리가 꿈에 대해 오해하는 대표적인 사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사람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미래의 희망직업으로 답하는 경우가 많다. 의사, 변호사, 국회의원, 연예인, 외교관, 아나운서, 선생님, 경찰관 등으로 대답하는 식이다. 사람들은 꿈을 거의 희망직업과 동일시한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천편일률적이다. 집단적인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말이다. ‘꿈=희망직업’ 등식에 매일수록 희망직업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추구하기 쉽다. 희망직업을 꿈꾸는 이유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며, ‘좋아하니까’, ‘재미있으니까’ 등 단편적으로 대답하는데 고민의 깊이가 얕다. 이는 희망직업을 목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가능한 답변들이다.
희망직업을 가지면 좋겠다는 소망에서 출발하겠지만, 그 소망하는 바가 간절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목적으로 둔갑하게 된다. 희망직업이 목적으로 굳어지면, 급기야 그 직업을 가져야만 인생을 제대로 살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무가치한 삶일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누구도 어떤 직업을 가지기 위한 목적으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으며, 특정한 직업을 가져야만 삶에서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의사, 변호사, 판사, 외교관, 선생님, 공무원, 음악과, 화가 등의 희망직업을 목적으로 추구한다면, 희망직업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하면 좌절하게 되고, 희망직업을 이루면 꿈은 사라지게 된다. 직업을 이미 가지고 있는 성인들에게는 꿈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데, 이는 꿈이 학생들에게나 필요한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2) 현대는 다중직업 (Multi-job) 시대이다
내가 늘 주장하는 바인데 현대는 ‘다중직업(multi-job)시대’이다. 다중직업시대라는 말은 한 사람이 인생에서 여러 직업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녀들은 평균적으로 100세까지 살게 될 것이므로, 자녀들은 인생을 통해 다양한 직업들을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다중직업은 한 사람이 여러 직업들을 동시에 겸직할 수 있다는 뜻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의사이면서, 대학교수이면서, 책을 쓰는 작가이며, 방송인이며, 강연자이며, 정치인일 수 있다. 나에게도 직업이 자그마치 5가지나 된다. 나는 대학교수인데, 책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며, 강연자이기도 하고, 기업에 방문하면 경영컨설턴트이며, 학생들이 상담을 요청해오면 나는 상담사이기도 하다. 어떤 선생님은 시인일 수 있으며, 소설가 혹은 화가, 음악가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1차원의 삶을 살지만 다른 사람은 4차원, 5차원을 살 수도 있다. 이는 능력보다는 생각에서 오는 차이다. 직업적인 역할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스스로를 제한하는 생각의 빗장을 끊어낼 때 삶의 차원은 확장된다.
3) 희망직업을 넘어서는 목적을 추구하자
국어사전에서 소개하는 직업이란 경제적 소득을 얻거나 사회적 가치를 이루기 위해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세계적으로 직업의 수는 자그마치 10만개 이상이며 우리나라의 직업은 1만 5천 개 정도이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직업의 종류는 늘어나고, 직업들이 사라지거나 생겨나는 속도도 빨라진다. 이는 산업구조, 인구구성, 생활방식의 변화 등에서 기인한다. 어떤 미래학자들은 20년 후에는 현존하는 직업의 80%가 사라진다고 전망한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20년 후 직업들의 약 80%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어떤 미래학자는 자녀들의 세대에서는 한 사람이 평생 20~40개의 직업들을 경험하며, 한 직장에 평균 5년 정도 머무르며, 직업세계는 가속화되어 20~30년을 주기로 직업군의 대부분이 교체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한다.
취업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희망직업은 인생의 목적일 수 없으며 삶의 과정일 뿐이다. 희망하는 취업이 어려울지라도 그 자체가 인생의 목적일 수 없는 것이다. 인생에서의 목적과 수단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인데, ‘꿈=희망직업’이라는 등식에 갇혀있다면 우리는 목적과 수단을 혼돈하기가 쉽다.
희망직업을 넘어서는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만일 의사라는 직업을 수단으로서 원한다면 어떤 목적을 추구할 수 있을까? 예를 든다면 “어린이를 도와주는 삶을 살고 싶으며, 그러기 위해 의사가 되고 싶어요”와 같은 목적을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의사가 되어도 어린이를 도와줄 수 있겠지만, 다른 직업으로도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다. 어린이를 위한 작가, 화가, 음악가, 선생님, 정치가, 상담사, 사회복지사 등등 어떤 직업을 가지더라도 어린이를 도와줄 수 있으며, 기업가가 되어 어린이를 위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으며, 어린이 재단을 설립할 수도 있다. 의사가 되고 싶은 목적이 무엇인지, 의사가 되면 학생들을 어떻게 도와주고 싶은지 등을 생각해야 한다. 의사라는 직업이 수단임을 이해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 직업은 대체 가능하다. 자동차의 바퀴를 교체하듯 직업도 바꿀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4) 놀고 싶다는 꿈은 삶을 더 지겹게 만든다
항공사에 근무하는 김동수 과장의 꿈은 “직장에서 은퇴한 이후에 한적한 휴양지에서 펜션을 경영하며 편하게 쉬는 것”이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박종현 대리의 꿈은 “세계여행을 하며 즐기고 싶다”이다. 김정운 차장은 “언젠가 귀농해서 여유롭게 사는 것”을 꿈꾸고 있다. 이러한 꿈들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언젠가 쉬고 싶다”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이런 류의 꿈을 말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았으며, 대부분이 직장인들이었다. 그리고 들을 때마다 뭔가 어폐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진정 원해서라기보다는, 꽉 막힌 듯 답답한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 때문은 아닌가 말이다. 그 판단은 매우 모호하며, 사실 남이 관여할 사안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혹시라도 지금의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심정은 아닌지 말이다.
언젠가의 여유롭고 편안한 삶을 꿈꾸는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쉼’이라면 그것 또한 존중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쉬고 싶다”라는 꿈을 간절히 바랄수록 현실은 더 지겨워진다. 언젠가 마음 편히 쉬려면 젊은 시절부터 돈을 악착같이 모아야 한다. 그러한 생각을 강하게 할수록 오늘의 하루는 쓴 약을 먹듯 인고의 세월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단지 미래의 쉼을 위해서 말이다. “인생은 본디 고달픈 거야”라는 누군가의 말이 진리이기를 바라면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수명이 길어진 만큼 우리는 더 오래 일할 수 밖에 없다. 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인지는 일단 논외로 하자. 괴로움을 참으며 힘겹게 버텨왔건만 기대했던 여유는 더 멀어지는 건 아닐까? 무지개를 좇아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넜지만, 무지개는 더 멀리로 달아나고 있다. 죽음의 순간에서 “쉬고 싶다”는 꿈은 멀리 있는 무지개 같고, 사막의 신기루였음을 확인한다면 얼마나 참담할까? 보다 의미 있는 꿈을 향해 살아볼걸 하는 후회가 들지는 않을까? 쉬고 싶다는 꿈은 현실을 더 지긋지긋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우리의 발목을 잡는 꿈이 아니라, 평생을 도전하고 의미 있게 살아가게끔 힘을 주는 꿈을 만들자. 인생은 생각만큼 길지 않다. 지나고 보면 찰나의 세월이다. 의미 있는 꿈을 가지고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에도 시간은 빠듯하다.
어떤 사람들이 ‘가족의 행복’, ‘사랑하는 삶’, ‘건강’, ‘좋은 아빠’, ‘현모양처’, ‘자녀의 성공’ 등을 꿈으로 말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행복’이라고 통칭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원하는 필수적인 가치들이며 지극히 당연한 구호일 뿐이다. ‘행복’은 인생에서의 추상적인 ‘총론’에 해당된다. ‘각론’ 없는 ‘총론’은 공허한 메아리이며 뻔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에게 당연하고 공통적인 총론에 머무르는 꿈이 아니라, 세부적인 각론으로서의 꿈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꿈이 어디까지 구체적이어야 하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무 썰리듯 딱 떨어지는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체적일수록 좋다고 말할 수 있는데, 한 가지 기준은 꿈을 통해서 하루하루의 삶에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긍정적인 변화가 수반될 수 있을 만큼은 구체적이어야 할 것이다.
3. 인생의 의미 발견하기
1) 무엇이든 제대로 하려면 그것에 미쳐야 한다
어른들이 만났을 때 빈번하게 등장하는 대화의 주제는 역시 돈이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서로에게 던진다. 집을 어떻게 장만하면 좋을지, 직장을 언제까지 다니면 좋을지, 수입을 어떻게 늘릴 수 있을지, 어떤 사업을 해야 돈을 많이 벌 수 있을지, 노후자금은 어떻게 마련하면 좋을지 등이다. 누가 무슨 가게를 열어서 대박 났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유망해 보이는 업종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중국요리점, 김밥전문점, 커피전문점, 눈꽃빙수 전문점, 세탁소 체인점, 태권도학원, 편의점, 프렌차이즈 빵집 등 다양한 가능성들을 열거하기도 한다. 대학생들끼리 만나도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시시한 이야기는 이내 자취를 감춘다. 대화의 주된 내용은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에 대한 고민이다. 대기업에 취업하도록 스펙을 쌓을지, 공기업 입사를 위한 고시공부에 뛰어들지, 공무원시험을 준비할지, 창업을 하거나, 자영업의 길로 나설지 등으로 대화가 이어진다. 중·고등학생들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서로 얘기한다. 학교에서 진로교육으로 희망직업을 결정하도록 독려하므로 어린 학생들조차도 먹고 살아갈 문제를 고민한다. 그러한 대화의 종반에 누군가는 꼭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어. 남이 해놓은 것이 쉬워 보여도 막상 하려고 들면 어려워. 대충 편하게 마음먹으면 망하기 십상이야. 뭐든 제대로 해야 돈을 벌 수 있어.”
무엇이든 제대로 해내려면 그것에 미쳐야 한다. 그럴 작정으로 달려들어야 하며 그래야 전진할 수 있다. ‘편하게 돈을 벌겠다’는 심산이라면 남는 것 없이 마음고생만 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안일한 마인드로 접근하기에는 어느 분야에서든 경쟁이 치열하다. 아무리 작은 사업이라도 사장이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매장을 여는 순간부터 문을 닫는 순간까지 사장이 상주하고 있어야 서비스의 수준이 유지될 수 있다. 인생으로 치면 최소 10년 정도는 투자할 각오를 해야 한다. 1~2년 정도 노력하겠다는 심산이라면 빈손으로 빠져 나올 확률이 90퍼센트 이상이다. 사업이 잘 풀리는 경우에도 초기투자비를 회수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세월이 소요된다. 천운이 따라주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초반에 대박을 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취미도 마찬가지이다. 취미를 3년 이상 유지하기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내 경험에 비춰보면 어떤 취미라도 3년 정도 지나면 성장이 정체되는데, 이러한 속에서 취미를 지속하기는 꽤나 지루하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내 주변에는 수준급의 골프실력을 자랑하는 Y교수가 있다. 골프를 시작한지 거의 10년이 넘었다. 골프채를 차에 싣고 다니면서 한 번씩 연습한다는데 골프를 평생의 동반자라고 여기는 듯하다. Y교수는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골프를 처음 접했다. 처음이었지만 골프는 정말 재미있었다. 돈 없는 유학생인지라 레슨을 받을 수 없어서, 골프에 관한 책을 10권 정도 독파했다. ‘골프채의 내부는 어떻게 생겼길래, 골프공을 멀리까지 날려보낸단 말인가?’ 하루는 골프채의 내부구조가 궁금한 나머지 마트에서 10달러짜리 골프채 몇 개를 구매해서 집에서 분해했다고 한다.
Y교수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 분은 골프에 미쳤구나’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골프얘기가 시작되면 온종일 골프얘기만 떠들어댄다. 한마디로 골프에 미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골프약속이 있거나 지구 반대편에서 열리는 골프중계를 시청하려고 새벽 4시에 눈을 번쩍번쩍 뜨는 것이다.
정년퇴직을 앞둔 P교수는 등산 애호가이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오전이었는데 P교수는 등산모자와, 등산화, 등산복을 입고 어딘가를 다녀오는 듯 했다. 어디를 다녀오시느냐 여쭤보았더니 산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서 나는 물었다.
“비가 내려서 등산로가 미끄러운데 산에 다녀오셨습니까?”
“이런 날씨에 새벽에 산을 오르는 것이 가장 상쾌해요.”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생각했다. ‘P교수님은 산에 미쳤구나’ 미치지 않고서야 비가 내리는 데 산에 올라갈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조금이라도 비가 내리면 등산계획을 취소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그렇게 미쳐서인지 P교수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산을 오르고 있다.
무엇이든 제대로 하려면 그것에 미쳐야 한다. 미치지 않으면 오래 노력하기가 어렵다. 아무리 굳은 의지라도 제 정신으로는 3년을 넘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즐기는 취미일지라도 그러한데 운명이 걸린 인생의 도전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노력하면서도 어느 순간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뭔가에 미친 사람들은 이러한 의문에 얽매이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라는 의문이 머릿속에 맴돈다면 아직 미치지 않은 제 정신이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에 도전하느냐 자체가 절대적이지 않다. 중국요리점, 김밥전문점, 눈꽃빙수 전문점, 세탁소 체인점, 태권도학원, 프렌차이즈 빵집 등 어떤 분야에 진출하느냐 보다도 그 분야에 미칠 수 있느냐가 우선이다. 전망이 아무리 좋아도 본인이 건성이라면 성과를 얻기 어려우며, 전망이 나쁘다고 알려진 분야일지라도 미쳐서 달려들면 의외의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본인이 미쳐서 달려들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해서, 뼈를 묻을 각오로 10년 정도는 운명을 걸어야 한다. 속전속결, 인스턴트 식의 결과를 바라는 것은 요행이며 좋은 결과를 얻기도 어렵다.
어떤 분야에 진출하기로 이미 결정했다면 그 분야에서 본인이 미칠 수 있는 이유들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게 미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싶은 시도들을 과감하게 벌여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미칠 수 있을까? 미치기 위해서는 그 일이 본인에게 중요한 의미로 여겨질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가족의 생명이나, 건강, 자녀의 미래가 결부된다면 우리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어떤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과 부합해야 하며, 특히 삶의 신념과 합치되어야 한다.
‘편하고 쉽게 돈을 버는 방법은 없을까?’
돈을 많이 벌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돈에 미칠 수 있어야 한다. 돈에 미쳐서 달려들어야 얼마라도 돈을 벌 수 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그렇게까지 고생하기를 원하지는 않는 듯하다. 돈 자체를 버는 것에 인생 전체를 바치는 것을 의미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므로 쉽고 편하게 돈을 벌고 싶은 마인드라면 돈에 악착같이 달려들기 어려우며, 결과적으로 돈을 벌기도 어렵다. 의미가 부족한 어떤 일에 미치기는 쉽지 않으며 그렇게까지 최선을 다하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는 분야에라야 미칠 수 있으며 한계를 넘어서기까지 노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은 결과적으로 많이 벌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장애인들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던 고(故) 강영우 박사를 소개하고 싶다. 강영우 박사는 중학교 1학년때 날아오는 공에 맞아 실명했으며, 그 충격으로 모친과 누님을 잃고 맹인이자 고아가 되었다. 고난 속에도 헌신적인 아내를 만나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으며, 미국 유학 길에 올라 피츠버그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76년 한국인 최초 시각 장애인 박사가 되었다. 2001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역임했으며, 유엔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을 지내면서 전세계 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해 헌신하다가 2012년 2월 세상을 타계하였다.
내가 강영우 박사를 주목하는 이유는 강영우 박사의 큰 아들이 안과의사가 되었다는 사실이 각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큰 아들은 시각 장애인 아버지의 눈을 치료해주고 싶어서 안과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어린 시절부터 품었다고 한다. 어린 아들이 아버지의 시력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안과의사가 되고야 말겠다는 꿈을 키운다면, 이 꿈은 그 아들에게 어떤 의미로 여겨질까? 이러한 꿈을 추구한다면 그 아들은 어디까지 노력을 할 수 있었을까? 한계를 넘어서는 노력을 쏟아 부을 수 있지 않았을까? 바로 ‘그렇게까지’ 노력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러므로 꿈에 미치기 위해서 우리 자녀에게는 의미가 필요하며 그래서 신념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좋은 집에 살고, 잘 먹고, 잘 입을지를 고민하면서 돈에 관한 대화를 나누지만, 그러한 대화에서는 어떠한 열정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넋두리에는 가슴 뛰는 울림이 서로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열심히 살고 싶은 열정이 생기지 않은 채로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갈 뿐이다. 차갑게 굳어버린 심장을 두근두근 뛰게 만들어주는 열정, 가슴 뛰는 에너지는 자신의 신념에서 출발할 때 가능하다. 신념에 기반한 꿈을 향할 때 열정을 쏟을 수 있으며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도전도 감행할 수도 있다.
‘편하게 살고 싶다’는 신념은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나중에 편하게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오늘의 의미는 돈을 모으는 정도의 하루로 전락해버린다. 나중의 편함을 위해 오늘의 의미를 말소시키는 느낌이다. 불확실한 나중의 편함을 위해 오늘의 의미를 희생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삶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사실인데 나를 편하게 도와주는 도구들은 대부분 나를 무능하게 만든다. 노래방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노래 가사를 기억하지 못하며, 자동차 네비게이션이 일상화되면서 방향감각이 무디어졌으며, 핸드폰이 생기면서 전화번호들을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현대인의 필수품이 되면서 사람들의 생각하는 능력이 약화되는 듯하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스마트폰을 통해 즉시에 검색해볼 수 있으며, 조금이라도 한가해지면 스마트폰에서 오락거리들을 찾을 수 있다. 멋진 풍경을 보거나 사람들을 만나면 일기를 쓰면서 오늘을 기록하기 보다는 핸드폰사진으로 SNS의 게시글로 오늘을 기록한다. 나를 편하게 해주는 도구들은 나를 무능하게 만들고, 어떤 경우에는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역설적이게도 나에게 이로운 활동들은 대체로 불편한 것들이다. 규칙적으로 반복해야 하는 걷기, 수영, 헬스 등의 운동이나 영어공부 등이 대표이다. 내가 지키려는 신념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왕이면 불편하게 살자’이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이왕이면 불편하게 살 것을 다짐한다. 편하게 살고 싶은 시절도 한때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보람이 없었고 후회스럽기만 했다. 불편하게 사는 편이 지나고 보면 나를 만족스럽게 만들었다. 생활 속에서 나를 편하게 만드는 도구들을 의식적으로 거부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의 짐이 다소나마 가벼워졌다.
2)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인생의 가치 발견하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재미를 추구하고픈 마음이 있다. 이왕이면 재미있는 것이 좋다. 자녀들은 재미를 추구하는 성향이 어른보다 강한 것 같다. 철이 든다는 것, 성숙해가는 것은 어쩌면 세상 일들이 항상 재미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재미를 말한다. “그거 재미있어? 재미없어?” 판단의 기준을 재미와 연관지어 말하는 경우가 많다. 재미를 추구하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본능에 충실해지는 듯하다. 결과적으로 참을성이 약해진다. 대학에서도 강의내용이 어려워지고, 재미가 없으면 스마트폰을 꺼내 게임이나 카카오톡, 동영상 등으로 시선을 돌리는 대학생들이 있다. 비싼 등록금을 지불하면서 수업시간 뒷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대학생들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원하는 인생을 계획함에 있어서 본인에게 재미 있는 분야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의사결정이다. 그럼에도 내가 강조하고픈 말은 ‘재미’가 있어야 하겠지만 ‘의미’도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다. 재미와 의미는 비행기의 양날개와 같다. 의미는 없고 재미만 추구한다면 스마트폰 게임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반대로 의미는 있어도 재미가 도무지 없다면 이는 희생이다. 평생을 희생하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생각해야 한다. 자녀가 어떤 일에서 재미를 느끼는지, 또한 그 일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느낀다. 학생들에게 나의 경험, 지식, 생각들을 알려주고, 그들의 성장을 돕는 것에서 큰 보람을 느낀다. 나는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서 재미를 느끼지만, 그럴지라도 강의가 매일매일 재미있는 것만은 아니다.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다른 급한 일이 생긴다면 강의가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항상 재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강의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대학에서 강의하는 의미, 대학생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의미들, 가족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의미들, 지역사회와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의미들을 나는 떠올려본다. 그러한 의미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열심히 강의하려고 노력한다. 처음에는 쉽지 않지만 생각할수록 일상적인 강의에서도 다양한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일상적인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처음에는 쉽지 않겠지만 여러 번 훈련하다 보면 더 많은 의미들을 찾아낼 수 있다.
어떤 인생을 선택하든지 기본적으로 재미와 함께 의미가 있어야 한다. 강조하자면 재미와 의미는 비행기의 양날개다. 한쪽이라도 결여되어 있다면 비행기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추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재미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