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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菩提達磨) 대사 이야기>
<달마(菩提達磨, skt. Bodhi Dharma, ?~536?) 대사>
보리달마(菩提達磨) 대사는 보통 약칭으로 ‘달마’라 한다.
남인도 향지국(香至國-팔라바스/Pallavas 제국)
셋째 왕자로 태어나 출가해서 부처님 이후 제27대
직계 조사인 반야다라 존자에게 40년 동안 가르침을 받고
선(禪)에 통달한바 제28대 조사(祖師)가 됐다.
일설에는 페르시아 출신이라는 말도 있다.
당시 인도에서 불교는 밀교(密敎) 일색이었으나
그마저도 힌두교화 해서 더 이상 불교의 설자리가 없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달마의 스승 반야다라 존자에게는 혜안이 있었다.
그리하여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짓고,
달마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올바른 불법)을 부촉한 후
달마로 하여금 동쪽[중국]으로 가서 불법을 전하라고 당부했다.
마음 땅이 숱한 종자를 키우고 -
심지생자종(心地生者種)
일이 생기면 다시 이치도 생기네 -
인사복생리(因事復生理)
수행의 열매가 무르익으면 깨달음이 원만해지니 -
과만보리원(果滿普釐圓)
꽃이 피듯 한 세계가 열릴 것이네. -
화개세계기(華開世界起)
그리고 반야다라 존자는 말했다,
“그대가 지금 나의 법을 받았으니 너무 멀리 교화하러 가지 말고
내가 열반에 든 후에 동쪽 나라[중국]에 가서 법을 크게 베풀라.
그대는 너무 빨리 가지 말라. (빨리 가면) 재난이 일어나서
백일 아래 쇠퇴하게 되리라.”
이에 보리달마가 여쭈었다.
“제가 그 나라에 가서 교화하면 그곳에 보살이 있겠습니까?”
불교 수행자가 많겠느냐 하는 물음이다.
“그 나라에는 도를 얻고자 하는 이가 많아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느니라. 내가 열반에 든 뒤에
제각기 친했던 사람들과 이별하라.
그 나라에서 재난이 있을 터이니,
수중문포(水中文布)를 잘 항복시키라.”
※수중문포(水中文布)---물속에 물결이 퍼져 나간다는 말인데,
뒷날 보리류지(菩提流支, ?~725)에게 모함을 받게 되는데,
그 유지(流支-물결)를 비유해 동토(東土-중국)에서
달마를 해칠 사람은 보리류지 임을 예언한 것이다.
“그대가 그 나라에 가거든 남쪽에는 오래 머무르지 말라.
그 나라 왕은 불법의 참 이치는 모르고 유위법(有爲法)의
인연 짓기를 즐기어 공덕을 좋아하니,
그대가 그 나라에 가거든 오래 머물지 말고 바로 떠나라.
나의 참언(충고)을 들어라.
길을 가던 중에 물을 건너서 다시 양(羊)을 만나리라.”
여기서 물을 건넌다 함은 바다를 건넌다는 뜻이요,
다시 양을 만난다 함은 낙양(洛陽)에 이른다는 말이다.
※유위법(有爲法)---유위법은 형성된 법을 말하며,
이에 반대되는 형성되지 않은 법을 무위법(無爲法)이라 하는데,
곧 열반(涅槃)이 무위법이다.
그리고 유위법은 「무상ㆍ고ㆍ무아」라는
세 가지 성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心), 마음작용(心所)과
물질(色,) 등이 해당된다. 유위(有爲)라 하는 것은
위작(爲作), 조작(造作)의 뜻으로 일부러 ‘만들어 진 것’이라는 의미다.
바로 ‘연기(緣起)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것,
어떤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모두가 유위법이다.
즉,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해탈, 열반과 같이
깨댤음의 경지가 무위법이고,
사람의 손때가 묻은 것은 모두 유위법이다.
그리하여 달마는 반야다라가 죽은 뒤에
그의 조카 이견왕(異見王)을 교화한 후,
남천축국(남인도)을 출발해서 해로로 중국으로 향했으며,
배를 타고 3년이 걸려 AD 520년 경
중국의 광주(廣州) 남해군에 이르게 됐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시대로서 남조는
양(梁)나라로 강성했던 때인데, 양의 무제(武帝)를 만났다.
달마 대사가 만난 양 무제는 비록 절실한 불교신자라고 하지만
황제의 권위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무제와 달마 간에 묻고 답하는 내용을 보면
달마 대사의 생사를 초월한 의연한 모습이 생생히 부각돼 있다.
달마 대사를 만난 무제가 말했다.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 많은 절을 짓고, 경전을 소개하고,
스님들에게 도첩을 내린 것이 셀 수 없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되겠소?”
이에 달마는 조금도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그런 일엔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
무제가 했다고 자랑하는 일들은 모두가 유위법들이었다.
유위법은 깨달음(見性)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소” 황제는 불쾌했다.
“그러한 공덕들은 윤회 속에 흩어지고
말 그림자같이 형태가 없는 공덕이기 때문입니다”
달마는 신행(信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유위(有爲)의 공덕은 소용없음을 말했다.
선한 일을 하면 좋은 과보를 받는다는 선인선과(善因善果)의
이치는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기본이다.
황제의 신분으로 불교의 선양에 대단한 기여를 했던 무제,
그는 당연히 큰 공덕이 있다는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날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무공덕(無功德)’, 곧 공덕이 없다는 벽력같은 일갈이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다.
그 순간 무제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으로
'아니, 내가 잘못 들었나? 공덕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어지는 문답에서도 달마 대사의 대답은
무제에게는 완전히 동문서답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천하를 통치하는 불심천자(佛心天子)를 자처한
양무제와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 대사와의
역사적인 문답의 결말은 양무제가 완패를 당한 것으로 돼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이요.”
“청정한 지혜는 미묘하고 온전해서 그 자체는 공적합니다.
이 같은 공덕은 세간에서 구해도 구할 수 없습니다.” -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공덕이라야 한다는 말이다.
절 열 채를 짓기보다 독실한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무엇이 불교의 근본이 되는 진리라는 것이요?”
“텅 비어 있으니 성스럽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짐을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요?”
“불식(不識)-모릅니다.-
나는 폐하께서 분별(생각)하고 계신 그런 존재는 아닙니다.”
※이때 달마 대사가 “불식(不識)”이라 대답한 것에 대한 논의이다.
양 무제는 달마 대사의 법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중생심으로 “짐을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요?” 라고
힐책하듯이 물었다.
여기서 양 무제는 자기와 달마라는
주객(主客) 혹은 상하(上下)라는
상대적인 대립과 차별심이 있었고,
또한 달마 대사 당신은 성스러운 성자가 아닙니까? 라는
고정관념과 분별심으로 질문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객과 상대적인 분별심을 가진 양 무제의 질문에 대해
달마는 “불식(不識)”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불식(不識)’을 ‘모르겠습니다’라고
번역하면 분별심이 된다. 즉, 주객(主客)과 상하(上下),
임금과 신하라는 상대적인 분별의식에 떨어진 대답이 된다.
달마는 ‘나는 황제인 당신과 주객(主客), 상하 관계가 아니다,
상대적인 차별심이 없다.’는 입장이다.
<열반경>에 “법의 의거하고 사람에 의거하지 말며,
지혜에 의거하지 분별의식(識)에 의거하지 말라”고
설한 불법의 정신을 알아야 한다.
‘식(識)’은 중생심의 분별작용이며 ‘불식(不識)’은 분별이 아닌
불심의 지혜작용이다.
즉, 달마는 주객(主客)과 상하(上下)라는 상대적인 차별심으로
질문하는 양 무제를 불심의 지혜로 정법을 설한 것이다.
그러나 중생심으로 접근한 양 무제는 달마가
불심의 지혜로 제시한 정법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법의 참된 정신(大意)를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양나라에서 쫓겨나듯이) 달마는 양자강을 건너
당시 북위(北魏)나라의 숭산 소림사에 들어가서 면벽 수행에 들어가게 된다.
<방광반야경>을 강의할 정도로 불교 이론에 정통해 있던
양 무제가 어째서 달마 대사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을까?
그것은 선(禪)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무제에게
달마 대사가 자신의 선적(禪的) 경계에서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달(진리)을 가리키는 손가락(교리)에만 묶여 있던
무제로서는 달마 대사가 보여주는 달 그 자체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고 영문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왕법(王法)이 불법(佛法) 위에 군림하던 시대에
달마 대사가 무제에게 큰 실망을 안겨줬으면서도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불심천자라 자칭하는
양 무제의 자비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문답이 사실이든 아니든
달마와 그 당시 중국 불교관과의 충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불교에 대한 이론적 연구나 외형적 불사에 치우치는
중국불교와 달마의 선불교(禪佛敎)는 전혀 흐름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일화인 것이다.
그리고 이 문답은 양 무제가 이룬 모든 불사의 업적이
무공덕(無功德)이 되는 그런 새로운 불교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달마가 중국에 온 목적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왔을 것이다.
또한 달마는 적어도 당시의 최고 불교인을 대했고,
또한 황제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할 말을 한
강직한 사람이었음을 드러냈음을 알려준다.
후에 양 무제는 달마 대사와의 대화를
지공(誌公, 418~514) 화상에게 말하자, 지공 화상이 말했다.
“폐하! 달마 대사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무제는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지공 화상이 말했다.
“그는 관음대사이며, 부처님의 정법을 계승한 사람입니다.”
후에 공(空)과 무아(無我)의 대의를 일러준
달마 대사의 법을 뒤 늦게 깨달은 무제는 깊이 후회하고
달마 대사를 다시 만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추모하는 심정을 달랜다.
「봐도 보지 못하고, 만나도 만나지 못하니(見之不見 逢之不逢)
옛날이나 지금이나, 후회스럽고 한스럽구나(古之今之 悔之根之)」
이렇게 양 무제를 자극한 달마는 비밀리에
북위(北魏, 386~534) 땅으로 가서, 낙양(洛陽) 동쪽
숭산(嵩山) 소림사(小林寺)로 숨어들어
9년간 면벽수행(面壁修行)을 한다.
당시 북위의 황제 효명제(孝明帝, 515~528 재위) 역시
양 무제 못지않은 독실한 불자였다.
효명제는 인도의 고승이 온 것을 기뻐하고
소림사로 사람을 보내어 황궁으로 초청했다.
<전등록(傳燈錄)>에 의하면,
무려 세 번이나 초청했으나 대사는 가지 않았다.
달마가 중국에 와서 조사선(祖師禪)을 전하고자 했지만,
당시 중국엔 교학이 성한 터에다가 불교를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복(祈福)의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심해서
도저히 선(禪)을 받아들일 풍토가 못 됐다.
양 무제를 통해 선을 이해시키려고 했지만
무제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달마는 ‘아직 때가 아니구나,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아니구나!’ 해서,
소림굴로 들어가서 9년 동안 면벽을 하며 기다리게 된다.
그런데 6세기부터 7세기에 걸친 당시 중국은 급격한 사회변혁
시대였기 때문에 지각 있는 지식인들은
새로운 불교의 이상을 달마에게 구하고자 했다.
달마 대사는 수행하다 졸리면 눈썹을 뽑아 던졌고
눈썹이 던져진 자리에는 차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추후 중국 선종의 상징이 되는 차(茶)와 선(禪)이
인연을 맺게 되는 사연이 이에서 시작됐다.
달마상의 특징은 부리부리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모습이다.
소림굴 면벽 9년 수행을 하면서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기 위해
결국 눈꺼풀을 잘라냈다고 한다.
그래서 달마는 눈꺼풀이 없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달마가 면벽(面壁)수행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벽을 보고 수행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실질적인 벽은 정신적인 벽을 말한다.
모든 번뇌 망상, 잡념을 여의고 선에 몰입했음을 말한다.
달마의 벽관(壁觀)으로 일컬어지는 독자적인 선법과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4구절에
그의 교의가 집약돼 있었다.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는 문자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지만,
여기서 설 ‘입(立)’ 자는 선다는 말이 아니라 ‘활용하지 않는다’,
‘쓰지 않는다’ 하는 말이다. 따라서 문자를 활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선불교에서는 불립문자를 강조한다. 문자를 쓰지 말라는 말이다.
교(敎)에 너무 빠지지 말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불법을 말 밖에 전한다[교외별전(敎外別傳)]고 한다.
문자로 불법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진수가
문자나 말이 아닌 은밀한 방법으로 따로 전해졌다는 말이다.
진리는 언어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
‘직지인심(直指人心)’은 교리를 생각하거나 모든 계행을 떠나서
직접 사람의 마음을 교화하고 수행으로 인해 궁극에 이르러
부처님의 지위를 성취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은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
즉 모든 중생에게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씨앗이 있으므로
미혹함이나 의심을 없애버리고 자기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달마 대사가 면벽하고 9년 동안 기다린
시절인연이란 무엇인가?
바로 당신과 소통할 수 있는 진정한 발심 구도자를 기다린 것이다.
그때 신광(神光, 487~593)이라는 나이 지긋한 납자가 찾아왔다.
신광은 명문가 자제로 어려서부터 총명해 유교와 노장을 섭렵해
학식이 뛰어났다. 하지만, 유가와 도가의 경전을 통달해도
마음이 늘 초조하고 불안했다.
어느 날 불교 경전을 보고 마음이 와 닿아 출가했다.
그러나 경전을 읽을 때는 감동이 오고 환희심이 났으나,
일상생활을 하면 다시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했다.
신광은 부처님처럼 이 마음을 영원히 편안케 하는 길이 없을까 하고
간절히 찾았다.
그러던 차에,
마침 인도에서 온 대선지식이 소림사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이미 40대였던 신광은 도를 구함에 주저하지 않고
소림사로 달마 대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대사는 설법도 하지 않았고 만나주지도 않았다.
신광은 기다리고 기다렸으나 만날 수조차 없었다.
이에 신광은 어떻게 하면 조사를 만날 수 있을까?
궁리 끝에 단호한 결심을 하고 조사당 앞으로 가서 뵙기를 청했다.
여전히 조사당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래도 신광은 물러서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차가운 기운에 눈이 내렸다.
눈은 쌓여 새벽에는 신광의 무릎까지 차올랐다.
아침이 되자 눈은 그쳤으나
신광은 그 자리에서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눈사람이 돼있었다.
달마 대사가 아침에야 내다보니 어제 찾아온
신광이 눈 속에 꼼짝 않고 그대로 서 있으므로 말했다.
“네가 눈 속에서 그토록 오래 서 있으니,
무엇을 구하고자 함이냐?”
“바라건대 스님께서는 감로(甘露)의 문을 여시어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해 주소서.”
“부처님의 위없는 도는 오랜 겁 동안을 부지런히 정진하며,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아야 얻을 수 있다.
그러하거늘 너는 아주 작은 공덕과 하잘 것 없는 지혜와
경솔하고 교만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서 참다운 법을 바라는가?
모두 헛수고일 뿐이다. 네 마음을 가져오너라!” 하고 호통을 쳤다.
신광은 달마 대사의 이 말씀을 듣더니
홀연히 지니고 있던 칼을 뽑아 자기의 왼쪽 팔을 잘랐다.
이에 눈밭에 선혈이 낭자한데, 때 아닌 파초가 피어나
잘린 팔을 고이 받쳤다고 한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혜가의 ‘입설단비(立雪斷臂)’ 일화이다.
신광의 구도심이 이처럼 열렬함을 본 달마 대사는
마침내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신광을 불러 달마는 스스로
자기 옷을 찢어 신광의 상처를 싸매며 말했다.
“모든 부처님들이 처음에 도를 구할 때에는
법을 위해 자신의 몸을 잊었다.
네가 지금 팔을 잘라 내 앞에 내놓으니 이제 구함을 얻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사는 비로소 그가 법기(法器)임을 알고
이름을 바꾸어 혜가(慧可)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후 혜가는 달마 대사 아래에서 수행을 거듭하게 되는데,
그러던 어느 날 대사 앞에 나아가 여쭈었다.
“부처님의 법인(法印: 진리의 요체)을 들려주소서.”
“부처님의 법인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니라.”
“아무리 공부를 해도 진전이 없고, 제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스님께서 편안케 해주소서.”
“편치 않은 네 마음을 여기에 가져오너라.
그러면 편안하게 해 주리라.”
혜가는 그 불안한 마음이 어디에 있나 생각해 보고는
그것이 없음을 깨닫게 됐다.
지금까지 불안한 마음이 있는 것인 줄 알고
고통 받으며 공부를 해 왔었는데,
깨닫고 보니 가져 오라고 해도 가져갈 것이 없던 것이다.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가지고 올 마음이 없습니다.”
“내 이미 너를 편안케 했느니라.”
이 말 끝에 혜가는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혜가는 6년 간 스승을 모시며 수행 끝에 스승의 선법(禪法)을 계승했다.
이가 바로 선종 제29대 조사이자, 중국 선종 제2조이다.
후에 오조 홍인(弘忍) 대사에게서 육조 혜능(慧能) 대사가 나오고
이로부터 중국 선종이 발양돼나갔다.
달마 대사의 저서 <달마어록>은
달마 대사의 법문을 기록한 선어록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중국 간쑤성(甘肅省)
돈황석굴(敦煌石窟, 둔황석굴)에서 새롭게 많은 불교 자료들이 발굴됐다.
그 돈황의 문헌 가운데 <달마어록>이 있었다.
달마의 말씀을 전해주는 최고(最古)의 문헌이다. 이 돈황에서 출토된
<달마어록>에 달마의 근본사상인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혈맥론(血脈論)>, <안심론(安心論)> 등이 들어있었다.
이 외에 <관심론> 등이 있었으나 이들은 후학들의 창작이라고 한다.
그리고 달마는 <능가경(楞伽經)>을 중시하고,
마지막에 혜가에게 <능가경>을 전해주면서
이것이 ‘석가모니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했다는데,
실제로 이 이후 오늘날까지
선종에서는 <능가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다.
2조 혜가로부터 5조 홍인에 이르기까지
선은 <능가경>을 중심으로 했으며,
이들은 모두 <능가경>의 해설서를 저술했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이 해서 중국에 선불교(禪佛敎)를 전하게 됨으로써
달마는 중국 선종 초조(初祖)가 됐다.
이후 중국불교는 그 발생지인 인도에서보다
중국을 중심으로 선(禪)불교로 찬란하게 번성하게 됐고,
밀교는 티베트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됐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선(禪)불교
역시 바로 이때 중국화 된 선불교전통을 따르고 있다.
당시 교학 중심의 가람불교(伽藍佛敎)나 강설불교(講說佛敎)와는
정반대인 좌선을 통해 그 사상을 실천하는
새로운 조사선(祖師禪)을 강조했다.
달마 대사의 이치와 행으로 도에 들어가는 요점을 설한
<이입사행론>과 참선공부 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지침을 설한 <혈맥론>, 마음의 안정을 지향하는
<안심법문>은 불조(佛祖)의 심지(心地)에 즉입(卽入)하는 골수법문으로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중심사상이라 일컬어진다.
헌데 같은 인도출신으로 북위에서 활약한
보리유지(菩提流支, Bodhiruci, 5세기 말~6세기 초)는
달마 대사의 명성을 시기한 나머지 광통 율사(光統律師, 468-537)와
더불어 AD 528년 달마를 독살했다는 말이 전한다.
이에 하남성 웅이산(熊耳山, 해발 912m)에 장사를 지냈는데,
독살 당한 달마 대사는 관속에 신발 한 짝만 남기고
서천(인도)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달마 대사의 사구게(四句偈)>
외식제연(外息諸緣) 내심무천(內心無喘)
심여장벽(心如墻壁) 가이입도(可以入道)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으며,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
※송운(宋雲)---송운은 중국, 남북조시대 승려로 돈황 사람이다.
북위(北魏) 효명제의 사절로 중앙아시아제국을 순방했다(6세기).
낙양을 출발, 서역남도를 거쳐서 간다라 각국을 역방하고,
각각 국서를 봉정했으며, 대승불전 170부를 얻어 가지고 귀국했다.
그의 여행기는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수록돼 있는데,
당시 여러 나라 사정 및 불교신앙 상태와 불적(佛跡) 등에 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서역 사정을 아는데
귀중한 자료이지만 문헌학적으로는 다소 문제가 있다.
그런데 서역에 사신으로 갔던 송운(宋雲)이 돌아오는 길에
파미르고원에서 달마 대사를 만났다고 한다.
대사는 주장자에 신발 한 짝을 꿰어 들고 유유히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송운이 “대사는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자,
“서천으로 가노라. 너의 임금은 이미 돌아가셨느니라.”라고 했단다.
송운이 달마 대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작별하고 귀국해보니
과연 임금이 이미 승하하고 다음 임금이 즉위해 있었다.
그리하여 송운이 돌아오다가 겪은 일을 임금에게 보고하니
무덤을 파보도록 지시했다.
그랬더니 관속에는 신발 한 짝만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이 같은 신기한 전설이 전한다.
[출처] amisan |작성자 아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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