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사는 객관(客館)이라고도 하는데, 한양과 각 지방에 건축하였다. 한양에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태평관(太平館), 남별궁(南別宮), 모화관(慕華館) 들이 있었고, 또한 일본의 사신을 맞이하던 동평관(東平館), 야인을 접대하던 북평관(北平館)이 있었다. 지방의 객사는 각 읍성 안 가장 중요한 위치에 관아와 나란하게 건립되었다. 중심되는 주사(主舍)는 중앙에 정청을 두고, 그 동서 좌우로 동헌과 서헌을 세우는데, 정청은 일반적으로 정면 3간으로 정면 어간에 객사의 명칭을 나타내는 편액(扁額)을 걸고, 내부의 북쪽 벽 앞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의 감(龕)을 모셔두고, 관아의 수령이 초하루 보름마다, 또 나라에 국상과 같은 큰일이 있을 때 이 전패에 절하는 향궐망배(向闕望拜)의 의식을 거행했다. 정청 좌우에 건립된 동서 두 익헌은 정청 쪽으로 온돌방을 들이고, 나머지는 대청으로 구성되는데, 동헌이 서헌보다 격이 높다. 동헌과 서헌은 각각 그 직급에 맞게 이용하였다. [수교집록(受敎輯錄)] <예전(禮典)>에는 “외방의 객사에서 순찰사와 통제사는 동헌으로 들어가고, 절도사는 서헌으로 들어가며, 도사와 우후는 낭청방으로 들어간다. 기타 명을 받아 온 관원은 이를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어 접대한다. (현종11년에 받은 전교)”라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인 지방의 객사에는 전패만이 봉안되나, 중국의 사신이 들어오면서 머물게되는 평양의 대동관(大同館), 송도의 태평관과 같은 객사의 정청에는 전패와 궐패의 두개의 감을 모셔 둔다. 전패는 조선의 국왕을 상징하고, 궐패는 중국의 천자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객사의 정청과 동서 익헌 이외에 여러 부속 시설을 세운다. 조위(曺偉, 1454~1503)의 [고령객관기(高靈客館記)]에는 “정청3간, 좌우 익랑 각5간, 익실 3간, 동헌 횡각 3간, 헌 바로 북쪽에 3간의 연기루를 세웠으며, 도랑을 끌어들여 연못과 연꽃을 심었다. 담장으로 둘러쌓고 여러 화훼를 심어 그해 가을에 다 만들었다. 무릇 집이 총50간이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라 하였다. 객사에는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 음식장만을 하는 부엌, 곳간, 온돌방으로 구성된 고직사(庫直舍)를 세웠고, 또 주변에는 연못을 조성하고, 연당(蓮堂)이나 연기루(蓮起樓)를 세워 잔치를 베풀고 휴식을 취하도록 하였으며, 내삼문, 외삼문 등을 세웠다. |
평안남도 성천의 객사이다. 넓은 대지를 둘러싼 담장의 남쪽 중앙에 선 외삼문을 통하여 중문간 행랑과 마주하게 되는 행랑 마당에 들어서게 된다. 중문 좌우로 자리한 행랑은 좌우 모두 3간이다. 중문을 통하여 객사의 중심 마당에 들어선다. 전면 중앙에 정청인 동명관이 정면3간 측면5간 크기로 자리 잡고, 그 동쪽에 동헌인 통선관(通仙館)이 있다. 동명관 서쪽으로는 서헌인 유선관(留仙館)이 있다. 서헌의 서쪽에는 남북으로 길게 십이루(十二樓)와 봉래각(蓬萊閣)이 있다. 봉래각 서북쪽으로 강선루(降仙樓)가 서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집체는 객사의 음식을 마련하는 고직사(庫直舍)로 추정된다. <관서팔경도화첩(關西八景圖畵帖)>에서의 성천 동명관에는 외삼문과 그 행랑, 중대문과 그 좌우 담장이 있어, 실제의 모습과 다르다. 객사 담장 안에는 나무나 꽃나무들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모두 흙바닥 마감의 마당으로만 이루어졌다. 그러나 강선루는 바로 버드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강변에 면하여 있어, 강선루 누마루에서 앞의 낮은 담장 너머로 강과 강 건너의 아름다운 산수를 완상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