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이곳 홍수 . 홍리 두 사람이 관징 스님에 대한 행적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등원 스님이 준 전화번호를 가지고 대만에 있는 에스페란토 지부 회원에게 부탁했더니 바로 연락이 왔다. 당사자에게 연락했으니 언제든지 오라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바로 항공 예약을 하고 대만 까오슝으로 날아갔다. 우리가 간 곳은 서방삼성이라는 곳인데 홍수 . 홍리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포교당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참 많은 자료를 입수하고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가장 큰 소득은 바로 관징 스님의 계첩과 정법안장을 입수하였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보았던 여러 가지 관징 스님에 대한 불신과 비난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관징 스님의 대만 방문을 위해 보냈던 서류들 가운데 여권, 미국 재입국 비자 같은 서류를 비롯하여 사진, 서적도 많았는데, 그 가운데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정업선원 번역 「극락세계 유람기」(한국에서 처음 번역된 책)도 있었다. 그 밖에 관징 스님의 가사와 장삼, 염주 같은 것들을 수장하고 있어 보이는 대로 모두 사진으로 기록하였다.
이 부부는 외국 제자로서는 유일하게 관징 스님 다비식에 참석하였다. 그때의 여러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 해주고 아울러 비디오도 보여주고 복사본도 만들어 주었다.
문화대혁명 때 환속한 이야기도 자세히 들었다.
대만에 갔을 때 관징 스님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문화대혁명 때 억지로 환속을 당하고 강제결혼을 시켰는데 그때 딸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나는 대만 제자들로부터 딸인 아킴의 연락처를 받아왔다. 나는 처음 이 사실을 들었을 때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완전히 이해해야 관징 스님 일대기를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당시 글쓴이는 중국에 갈 수 없는 처지였다. 2009년 8월 말 정년퇴직을 앞두고 한꺼번에 7권의 책을 내는 집필을 하고 있었고, 고구려 연구문제로 비자를 받는 일에도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킴 모녀를 한국에 초청하기로 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두 모녀를 한국에 초청하여 망경산사(등인 스님)에서 2일에 걸쳐 깊이 있는 면담을 하고, 인터넷을 통해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해서 당시 시대적인 배경을 이해한 뒤 관징 스님의 환속에 대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 때 불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가 파괴되었다. 50만~100만이 되는 스님들이 강제로 환속을 당하고 강제로 결혼을 해야하는 승려들도 많았다. 그것은 학생들로 구성된 현지 홍위병들이 결정하였다. 전국의 홍위병에 의해 쫓겨난 스님들은 모두 환속 되었고, 중국에는 단 한 명의 스님도 남지 않았다. 관징 스님도 그때 쫓겨나 강제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뒤 10년 동안 불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관징 스님은 두 달 만에 집에서 도망쳐 동굴 속에 몸을 숨기고 수행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동굴에서 관세음보살의 인도를 받아 극락을 다녀오게 된 것이다. 글쓴이는 50만 명이 환속한 것보다, 그 50만 명 가운데 유일하게 도망쳐 숨어서 수행한 스님이라는 점에 더 방점을 찍고 깊이 연구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때 아킴 모녀와 대구 파계사의 등공 스님이 만났다. 등공 스님은 관징 스님이 입적하시기 전 사가에서 투병을 하실 때 1달간 중국까지 가서 모셨기 때문에 아킴 모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때 등공 스님이 가져온 관징 스님의 노트와 복사된 원고 같은 귀중한 자료를 글쓴이에게 넘겨주어 나중에 미공개 유고를 번역해 책을 낼 수 있었다(관징 스님 저작집 「정토와 선」 참조).
<문> 머리를 기를까요, 깍을까요?
<답> (두 스님 모두) 머리를 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 그래서 머리를 깍기로 했다. 추천 이유가 ”그렇게 도인처럼 앉아만
있어도 불사는 끝난다.“였기 때문이다.
아침 2시 반에 일어나 3시부터 시작하여 저녁 10시에 잠들 때까지 나름대로 계획된 일정을 진행하였다. 가장 중요한 일정은 관징 스님이 극락에서 배워온 정토선 염불을 6~9시간씩 실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벽 예불을 마치고 3시간은 정토삼부경을 번역하였다. 정토수행을 하는 사람으로서 기본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나는 대로 우선 관징 스님의 저서들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극락세계 이야기」나 「정토선 원리」같은 책들을 미리 번역된 책들이 있기 때문에 비교 번역하여 크게 어려움이 없었지만 등공 스님에게 받은 관징 스님의 유고와 「우주적 깨달음」 같은 논문들을 쉽게 번역할 수 있는 문장들이 아니었다. 우선 손으로 쓴 원문을 판독하여 타자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일생동안 한문 자료를 활용하였지만 주로 역사자료들이었기 때문에 새로 나오는 불교용어에 대한 것은 모두 새로 공부를 해야 번역이 가능하였다. 그래서 경전과 관징 스님 자료를 번역하기 위해 산스크리트와 빨리어를 공부하여 산스크리트 사전을 찾아보며 번역작업을 하였다.
1년쯤 지나서는 내가 번역한 48원을 읽고, 아미타경을 읽으며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관징 스님의 일대기 기초 작업을 해 나갔다. 그리고 2011년 1월 31일 약 400쪽쯤 되는 1차 집필을 마쳤다. 관징 스님 일대기 「극락과 정토선」에 실린 쉬윈 화상과의 관계, 계첩과 정법안장의 분석 같은 내용은 대부분 그때 정리한 것이고, 이 책에 실린 ‘논란’의 상단 부분도 그때 이미 분석해 놓은 것이다. 다만 산속에서 전화 . 인터넷 같은 통신수단을 전혀 쓰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진전시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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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징 스님은 두 달 만에 집에서 도망쳐 동굴 속에 몸을 숨기고 수행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동굴에서 관세음보살의 인도를 받아 극락을 다녀오게 된 것이다. 글쓴이는 50만 명이 환속한 것보다, 그 50만 명 가운데 유일하게 도망쳐 숨어서 수행한 스님이라는 점에 더 방점을 찍고 깊이 연구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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