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항쟁의 대부 - 의암 유인석 선생
화서 이항로 학파의 대부
위정척사, 존화향이의 학문 세계를 철저히 존숭하였던 이항로를 연원으로 한 화서학파는 서세동점, 일제 침략이 연속되는 우리 근대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조 정통 성리학적 입장에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참담한 현실을 극복하려 했던 상징적 문파다. 의암 유인석(1842~1915)은 이러한 화서의 정맥을 이은 화서학파의 수장으로 거대한 문파를 이끌고 일생 동안 국권 수호와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던 인물이다.
유인석은 조선 후기 세도정치 하에 민란이 빈발하면서 왕조 체제가 와해될 조짐이 나타나던 무렵인 1842년에 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호를 의암(毅菴),자를 여성(汝聖)이라 하였으며 본관은 고흥이다.
유인석이 화서 문하에 들어간 것은 열네 살 때이다. 그 해에 먼 족숙에게 입양된 것을 계기로 양가의 증조부였던 참판 유영오가 당대의 거유 화서와 일찍이 교분을 맺고 있었던 관계로 그의 문하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화서 문하에는 임규직· 이인구· 김평묵· 유중교 등 쟁쟁한 재사들이 운집해 있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최고의 교학 분위기 속에서 학문을 연마할 수가 있었던 셈이다.
유인석은 화서 학문의 정수인 춘추대의적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위정척사·존화양이 정신을 철저히 체인하고 있었다. 1865년 대원군이 숭명존화의 상징이던 만동묘를 철폐했을 때 “아, 슬프도다. 이제 서양 오랑캐가 발호하고 사방에서 사악한 기운이 점차 늠름하게 이를 것이니, 큰 의리가 한번 흐려지면 큰 제방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라고 하여 이 조처를 강력히 비난한 사실에서도 그러한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또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으로 일어난 병인양요 때에는 유림의 대변자로서 조정에 소환된 스승 화서를 따라 한 달 가량 서울에 머물면서 혼란한 시국상과 어지러운 민심을 직시하고 위정척사 사상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 그 뒤 1868년 화서가 서거하자 중암 김평묵이 그의 적통을 승계하였다.
한편, 쇄국정책을 견지하던 대원군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1876년 일제의 강압으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제는 한국 침략의 제일보를 내디뎠다. 양국 대표들이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중에 유인석을 비롯한 47명의 화서 문인들은 연명 상소를 올려 조약 체결을 저지하려 하였다. 결국 이들의 요구는 묵살되어 조약은 체결되고 말았지만, 이 척양소는 일제를 비롯한 제국주의의 ‘침략’속성과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제천 장담으로 이거한 유인석은 이제 성재의 기반을 승계함으로써 화서-중암-성재로 연결되는 적전을 계승하여 화서학파 제4대 수장으로서의 지위와 권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성재의 학당이었던 자양서사의 강장으로서 그동안 성재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서상렬· 정화용· 안승우· 박정수· 원용정· 이춘영 등을 자신의 문하에 거느리게 되었다. 그가 향후 20년간에 걸쳐 장기 지속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동력도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인석을 정점으로 하는 화서학파의 항일 투쟁은 이 학파의 학문 요체인 춘추대의적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존화양이론을 실천, 행동으로 구현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처변삼사
이 무렵 일제는 청일전쟁을 일으켜 군사적으로 저선을 압박하는 한편 김홍집을 총재로 하는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조선의 행정, 제도 등 내정을 적극적으로 간섭함으로써 군사적, 정치적 양면에 걸쳐 전방위로 한국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갑오경장이라 불리는 이때의 여러 변혁 중에서도 전통적인 의복 제도를 서양식 복제로 변경한 변복령, 이른바 의제 개혁은 전통 수구 유생에게 큰 충격을 받고 「회복시입언」이란 글을 지어 “변복은 천지·성현·선왕·부조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여 이를 통렬히 비판 하였다.
유인석은 변복형이 내려진 직후에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이러한 ‘변란’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고자 1895년 6월 원근의 문인사우 수백 명을 모아 대규모 강습례와 향음례 등 유림 집회를 거행하였다. 한말 민족 수난기에 전통 선비들의 행동규범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한 처변삼사는 이 집회에서 논의된 결과였다.
처변삼사(處變三事)는 의병을 일으켜 일제를 축출하는 거의소청(擧義掃淸), 해외로 망명하여 대의를 지키는 거지수구(去之守舊) 의리를 간직한 채 치명하는 자정수지(自靖遂志) 등 세 가지를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행동 방안은 장차 유인석이 항일 운동을 전개해가는 데 그 준거의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근대 수구파 지식인, 선비들의 기본적인 처신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
유인석은 이러한 처변삼사을 모두 성리학적 질서를 의미하는 사도와 신체 두 가지를 의리에 일치시키는 행위로 규정함으로써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하지만 항일 투쟁 등 현실적인 여건이 변수로 등장하게 되어서는 그 논변을 달리하게 되었다. 우선 자정(自靖)의 문제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일인 만큼 그 실천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거의(擧義)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것이 비록 보편타당성을 지닌 상도를 벗어나 임기응변적인 권도에 해당되지만, 일제 침략에 직면한 특수한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선비들의 가장 적합한 행동 원칙이라고 판단하였다.
또 수의(守義)의 문제에서는 순수한 도학 지상주의적인 수의를 철저히 배척하고 거의와 표리의 관계에 놓일 수 있는, 즉 거의를 배경으로 하여 ‘토적복수’의 강력한 의지가 가미된 수의를 주창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인석은 항일운동을 전개해 가는 과정에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거의와 수의를 병행하였으며, 이러한 점이 동시에 그의 항일운동의 특징이다.
전국 의병의 선봉
유인석이 이끈 제천의병은 먼저 그의 문인들의 봉기에서 비롯되었다. 지평, 원주 일원에 거주하던 이춘영과 안승우 등 그의 문인들은 1896년 1월 김백선의 포군을 주축으로 경기도 지평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제천으로 진격하여 군수 김익진을 축출하였다. 이것이 제천의병의 발단인 것이다.
이들은 곧이어 제천에서 서상렬· 이필희 등의 호응을 얻어 이순신 장군의 후예인 이필희를 의병대장으로 삼고 서상렬을 군사로 임명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관군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영월에 모인 이필의 이하 이춘영· 서상렬· 안승우 등은 유인석에게 의병대장을 맡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유인석은 구모 민비의 원수를 갚고 신체를 보존한다는 ‘복수보형’의 기치를 높이들고 의병대장에 취임함과 동시에 의병 격문 가운데 백미로 평가되는 「격고팔도열읍」을 지어 의병 봉기의 명분을 천명하고 전 국민이 의병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제천을 근거지로 삼은 유인석 의병은 1896년 2월 충청도의 요지 충주로 진출하였다. 충주에 입성한 그는 먼저 친일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하는 한편, 개화정책을 추종하는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격고내외백관」을 발포하였다. 또한 의병의 전력을 확충하기 위해 서상렬· 원용정· 이범직 등을 영남 및 호서 각지로 소모사로 파견하여 민병을 모으게 하였다. 이때 영남으로 남하한 서상렬은 안동·예천·봉화·영천 등지의 의병과 연합하여 상주 태봉의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하였고, 호서지방으로 파견된 이범직은 단발을 심하게 강요하여 주민들의 원성을 크게 산 천안군수 김병숙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제천의병은 곧 관군의 압박을 받고 충주를 포기한 채 근거지 제천으로 회군하였다. 유인석 의병이 제천에 집결해 있는 동안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문경의 이강년, 영춘의 권호선, 원주의 한동직, 횡성의 이명로 등이 각기 휘하 의병을 거느리고 제천의병에 합류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인석의 제천의병은 이후 5월 26일 제천성이 함락될 때까지 3개월간 수안보·음성·담양 등지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격장에 임명된 이강년의 활약은 특히 두드러졌다.
한편, 유인석이 충주· 제천 등지를 전전하며 의병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동안에 중앙의 정국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을미사변 이래로 친일 내각에 포위되어 불안과 공포 속에서 전전긍긍하던 고종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군이 지방으로 출동한 틈을 타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김홍집의 친일 내각은 무너지고 이범진·이완용·윤치호 등을 중심으로 친러 내각이 조직되었다. 새 내각은 그동안 어수선해진 민심을 수습코자 단발령을 철회하는 한편, 각 지방으로 선유위원을 파견해 의병을 해산시켰다.
중앙에서 파견된 선유사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은 남한산성 의병을 격파한 뒤 그 여세를 몰아 제천의병에 압박을 가해 왔다. 단발령이 철회되고 을미사변의 원흉격인 김홍집 이하 친일파들의 축출된 지금에는 활동 명분이 없어졌으므로 의병을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인석은 정부가 망국 개화정책을 중단하지 않고 일제 침략세력이 완전히 구축되지 않는 한 투쟁을 계속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참령 장기렴이 인솔하던 관군은 마침내 5월26일 제천성을 일제히 공격하였다. 의병들은 역전 분투하였으나 전력의 열세로 결국 제천성을 내어주고 말았다.
최후의 거점이던 제천성을 상실한 유인석은 이제 황해도, 평안도를 향한 서북행을 결심하였다. 일찍부터 서북지방의 ‘강용지병’에 착안하고 있던 그는 이미 모병을 위해 유치경· 이필희· 정화용 등을 그곳에 파견해 놓고 있었다.
풍기·영춘·괴산·원주 등지를 전전하던 유인석 의병은 6월 10일 원주 강천에서 드디어 서북행의 장도에 올랐다. 그 후 영월·평창·강릉을 거치고 양구·회양·평강을 지나는 동안 소토장 서상렬이 전사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마침내 서북지방에 당도하여 양덕·맹산 등지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도처에서 관찰사, 군수가 의병을 압박하였기 때문에 당초의 계획대로 재기항쟁을 도모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유인석은 청나라의 군사적 원조를 기대하는 한편, 장기 지속적인 항일 투쟁을 계획할 목적으로 서간도 망명을 결행하였다. 그리하여 영변·운산을 거쳐 8월 23일 압록강변의 초산에 도착한 그는 다시 한 번 친일 개화파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재격백관문」을 남긴 채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회인현으로 들어갔다.
양서지방 유림계의 대부
서간도의 지방관인 회인현 현재(縣宰) 서본우는 유인석 의병이 불법으로 무기를 소지하고 들어왔기 때문에 무장을 해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유인석은 1896년 9월 28일 혼강 강변에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이곳까지 따라온 219명의 의병을 해산시키고 말았다. 이로써 유인석의 을미의병 항쟁은 종식되었고, 이후 보다 장기지속적인 형태의 항일투쟁으로 그 방향을 전환해 가게 된다.
의병 해산 후 유인석은 이주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통화현 오도구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3월에는 고종의 소명으로 일시 귀국했으나 곧 이곳으로 되돌아 왔다. 이 무렵 유인석의 문인사우 40~50호도 적당한 수의처를 물색, 대거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이에 유인석은 이들과 함께 “원한을 품고 고통을 참으며 때가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라는 ‘의체’를 약정하면서 항일 투쟁의 의지를 다져갔다.
그 뒤 유인석은 1900년 7월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귀국하였다. 중국 북부지역이 열강의 각축장으로 돌변하게 되자 그로서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황해도와 평안도 각지를 전전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주민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평산의 산두재를 비롯하여 은율의 흥도서사, 개천의 숭화재, 용천의 옥산재 등은 이 시기 유인석의 양서지방 활동 거점이었다. 이곳을 근거지로 삼고 철산. 안주. 선천. 평양. 용강. 서흥. 해주 등 양서지방 도처를 부단히 왕래하면서 강학을 통해 제자들을 기르고, 또 향음레와 강습레를 수시로 열어 존화양이에 입각한 항일 투쟁 의식을 고취시켰던 것이다.
그 결과 유인석은 양서지방 유림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수많은 인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의암 동문록』에 의하면 양서지역에서 양성된 그의 문인은 수백 명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조맹선, 우병렬, 김화식, 백삼규, 박치익 등 서북지방 유생 출신의 저명한 독립운동가는 거의 모두 유인석의 지도와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산과 덕천 지역을 비롯한 서북지방의 후기 의병을 주도한 것도 거의 문인들이었으며, 국치 전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무장독립운동 세력의 근간을 형성하였던 것 역시 그의 휘하 인물들이었다. 현금 북핵 문제로 익숙해진 영변의 약산 제1봉 정상에 유인석의 추모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해외 독립운동의 선구
1905년 을사조약 늑결 이후 일제의 대한 침략은 더욱 노골화되어 1907년 헤이그 밀사 의거를 계기로 광무황제 강제 퇴위, 정미7조약,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등이 연속되면서 국망을 향한 긴박한 위기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 이상 국내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한 유인석은 장기 지속적인 항일 투쟁을 구상하고 러시아 연해주 망명길에 올랐다. 1908년 7월 예순일곱의 노구를 이끌고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간도 망명 이후 세 번째 국외 망명이었으며, 이후 그는 생전에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연해주에 도착한 유인석은 당시 현지에서 활동하던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인 이상설·이범윤 등과 함께 국내외 각지에 분산된 무장 항일 세력을 하나의 조직체로 통합코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10년 6월 10일 연해주 재피거우에서 ‘십삼도의군’이 편성되었다. 유인석은 이때 이성설·이범윤·이남기 등의 추대로 의군의 최고 지도자인 도총재가 되었다. 그에게 심삼도의군 도총재란 직위는 1896년 항일의병에 투신한 이후 그때까지 일관된 항일 투쟁의 노선과 입장을 견지해온 결과 주어진 것으로, 그의 항일 투쟁의 대단원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의군이 미처 대일 무력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조국은 일제에게 병탄되고 말았다.
경술국치의 비보가 전해지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격분한 한인들을 한민학교에 모여 한인대회를 열고 민족 자주 의지를 결집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성명회라는 회명은 “적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는 뜻이었다. 유인석은 성명회의 ‘총대’에 추대되었고, 그 당일로 성명회 취지문을 발표하여 조국 광복의 그날까지 일제와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나아가 그는 병탄 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중국, 러시아에 산재한 주요 독립운동가가 망라된 8,624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의 서명을 받았다. 유인석이 서두에 오른 이 서명록은, 열강에게 한민족의 독립 결의를 천명하고 그 지지와 후원을 요청하는「성명회 선언서」에 첨부되어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각국 정부 및 신문사에 발송되었다.
유인석이 말년에 주도한 십삼도의군과 성명회 활동은 국망을 전후한 시기에 국권 수호를 표방한 목전의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는 1895년 을미의병 이래 집요하게 펼쳐온 항일의병의 국외 확대이며, 동시에 민족 수난의 비극적 상황에서 한민족의 의기를 규합하려는 노력의 결정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이후 연해주 등지에서 펼쳐지는 국외 민족운동의 한 연원으로 그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는 것이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1914년에 대한광복군정부가 성립될 수 있었고,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항일 무장 투쟁의 발전적 형태 전환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유인석은 노구를 이끌고 연추(크라스키노), 목화촌(마우카예프카), 운현(크레모보) 등 연해주 각지를 전전하면서 국권 회복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독립운동 근거지 구축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와중에도 그는 1912년 중화론적 화이관에 입각해 동서양의 문물제도 등을 문답체의 형식으로 논술한 유명한 『우주문답』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유인석은 최후를 1896년의 최초 망명지인 서간도에서 맞이하였다. 수구초심의 심경으로 1914년 최후의 귀착지가 된 관전현 방취구에 도착한 유인석은 74세를 일기로 이듬해에 병사하여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