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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개벽 70호, 1926.6)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이상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 시를 실은 <개벽>은 곧 폐간(1926)되고 말았다. 1920년대의 암울한 시대에 귀중한 저항시로 남아 있다.
제1,2연과 제9,10연이 서로 대응하는 관계임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 성격 : 낭만적, 상징적, 저항적
▶ 구성 : ① 조국 상실의 현실(제1연)
② 광복이 된 조국 천지를 상상함(제2연)
③ 조국과의 일체감을 회복하고 싶은 심정(제3연)
④ 국토와의 친화감(제4연)
⑤ 풍요와 성장에의 감사(제5연)
⑥ 봄을 맞이하는 유별난 기쁨(제6연)
⑦ 동포와 일체감을 느끼고 싶음(제7연)
⑧ 국토에 대한 한없는 애착(제8연)
⑨ 현실을 재인식, 자신을 자조함(제9연)
⑩ 조국 상실의 현실 인식(제10연)
▶ 제재 : 국권 상실의 현실과 봄의 들판
▶ 주제 : 국권 상실의 울분과 회복에의 염원
<연구 문제>
1. 이 시가 나의 침실로 등 이상화의 1920년대 초기의 시적 경향과 구별되는 바를 쓰라.
☞ 관능적, 감상적, 낭만적 경향을 극복하고 국권 상실의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한 저항시로 쓴 점이 다르다.
2. 현실 인식에 기초한, 저항적인 의식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시행을 찾아 쓰라.
☞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3. ㉠이 상징하는 의미를 쓰라.
☞ 조국 해방의 아득한 지평
4. 현실과 이상의 틈바구니에서 한 지식인이 겪는 아픔을 가장 잘 표현한 두 어절의 말을 찾아 쓰라. ☞ ‘다리를 절며’
<감상의 길잡이>
이상화 시인은 삶의 가치를 부정하는 우울한 낭만주의자로서 출발한다. 3·1운동의 좌절이 가져온 결과였다. 그러나 20년대 중반부터 우리 문단은 냉정한 현실 인식을 회복하게 된다. 이 시도 그러한 흐름을 반영한다. 작품의 핵심이 되는 것은 ‘빼앗긴 들’에 과연 참다운 삶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다.
제1연에서 이 질문을 던지고 마지막 제10연에서 이에 대해 대답한다. 나머지 연들은 이러한 대답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대칭 구조로 되어 있는 이 시의 제2연과 제9연을 비교해 보면 흥미 있는 사실이 발견된다.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은 열려 있는 조국 해방의 지평을 의미한다. 그 지평을 향해 ‘한 자국도 섰지 마라’,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는 강박에 사로잡혀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꿈속을 가듯’ 화자는 걸어가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푸른 하늘 푸른 들’은 그에게 ‘푸른 웃음’이기도 하지만, ‘푸른 설움’이기도 한 것이다. 이상과 현실 속에서 그는 ‘다리를 절며’ 걷고 있다. 이상과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한 지식인이 느끼는 아픔이 ‘다리를 절며’라는 말로 표현되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그러한 아픔 속에서 발견한 것이 허황한 관념이 아니라, 고통 속에 있는 민중의 실체라는 점이다.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로 표현된 빈농(貧農)의 아내와 누이에 대한 뜨거운 눈물을 우리는 이 시에서 본다. 창백한 지식인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가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는 싱싱한 표현을 가능케 했으리라.
이상화論
민족의 봄을 갈망한 이상화
시인 이상화(1901-1943)는 1920년대 식민지 시대의 비극적인 역사 상황 속에서 문단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 그는 ‘백조’ 동인으로 문단에 참여하여 박종화, 나도향, 현진건 등과 교유하면서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통분을 격렬한 정조로 노래한다. 이상화의 저항적인 의식은 기미 독립 만세 운동에서부터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는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 학생 독립 운동에 참여하였고, 독립 운동의 주동자로서 활동한 바 있다. 그러나 만세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깊은 좌절감에 빠져들었고, 그 정신적인 좌절을 딛고 일어서면서 문학의 길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상화의 시에는 두 가지의 시적 경향이 자리잡고 있다. 하나는 퇴폐적인 정서와 병적인 관능이다. 이것은 시대적인 상황에 대한 시인의 정신적인 대응 방식의 하나다. 물론 그가 관심을 보였던 프랑스 상징파의 시적인 영향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나의 침실로」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시적 열정은 ‘마돈나’라는 시적 대상을 놓고, 오지 않는 사랑을 기다리는 시인의 애절한 심사가 잘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환상과 관능으로 휩싸여 있다. 그러나 그 관능적인 요소들이 모두 대상에 대한 신비화를 돕고 있기 때문에, 시적 열정 자체를 더욱 고양시키고 있다 할 것이다.
이상화 시의 또 다른 경향은 저항적인 의식이다. 이것은 앞의 열정이나 퇴폐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의 시적 경향 자체가 모두 민족의 비극적인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관능에 머물러 있거나 퇴영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시적 의지를 구현한다. 그의 대표작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비롯하여 「선구자의 노래」, 「역천」 등에서 이러한 특징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퇴폐적인 정서, 병적인 관능, 저항 의식 담은 시로 식민지 시대 대응
이상화는 1920년대 중반 한때 계급 문학 운동에 가담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모순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였고,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가혹해진 1930년대 중반에는 중국 일대를 방랑하면서 식민지 백성의 한을 토로하였다. 그 후 다시 귀국하여 고향인 대구에서 청년 학도들을 가르치면서 민족혼을 심어 주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조국 광복에 대한 그의 간절한 꿈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그는 병으로 1943년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1920년대 시인 김소월의 비극적 현실 인식과 한용운의 역사에 대한 신념 사이에서 이상화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상화의 현실 감각은 김소월이나 한용운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보다 더 비장하고 절망적이다. 김소월이나 한용운의 경우에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는 서정 자아가 이상화의 시에서는 파멸하는 존재로 부각되는 경우도 많다. 무자비한 고통의 현실을 이상화는 어둠의 동굴, 죽음의 공간으로 그려낸다. 시적 주체로서의 서정적 자아는 어둠의 현실을 등지고 동굴과 밀실 속으로 도피하고 격앙된 어조로 삶의 구원을 희구한다.
이상화의 시에서 시적 주체가 어둠의 현실을 뚫고 현실의 한복판에 나서는 경우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서정 자아는 강인한 의지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시대 상황 자체를 고통스러워하면서 자신을 세우고자 한다. 비록 나라를 빼앗겨 압제의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민족혼을 새롭게 불러일으켜 세울 수 있는 봄마저 빼앗길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가 담겨 있으며, 그 비장미가 곧 저항적인 정신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全文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에서 당대의 상황은 압제의 현실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어둠 속에도 봄은 찾아온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질서이다. 이 섭리를 놓고 시인은 빼앗긴 땅에 찾아올 광복의 봄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봄에 신명 잡힌 것처럼 다시 일어선다.
절망의 현실 속에서 주체를 바로 세우는 작업은 3·1운동 이후 민족사가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아를 바로 세우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언제나 오늘 보이는 사람마다 숨결이 막힌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반가움도 없이
참외꽃 같은 얼굴에 선웃음이 집을 짓더라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 맛도 없이
고사리 같은 주먹에 진땀물이 굽이치더라
저 하늘에다 등창이나 뚫어랴 숨결이 막힌다. ― 「조선병」
이상화의 현실 인식의 구체성을 앞의 시만큼 분명하게 보여 주는 예는 드물다. 닫혀 있는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답답함을 풀기 위해 시인은 ‘저 하늘에다 등창이나 뚫어랴’라고 외쳐댄다. 현실의 암울성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실 극복 위해 계급 문학 운동 가담, 중국 방랑하며 식민지의 恨 토로
이상화는 다음의 「시인에게」라는 작품을 통하여 스스로 ‘새로운 세계를 낳을 수 있기를’ 이렇게 다짐하고 있다. 이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위해 그는 스스로의 희생도 각오하고 있다. ‘새로운 세계’ 바로 그것은 시인의 영광만이 아니라, 시인이 사는 조국의 영광에 해당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 그것으로
새로운 세계 하나를 낳아야 할 줄 깨칠 그때라야
시인아 너의 존재가
비로소 우주에 없지 못할 너로 알려질 것이다.
가뭄든 논에는 청개구리의 울음이 있어야 하듯.
시인아 너의 영광은
미친 개 꼬리도 밟는 어린애의 짬없는 그 마음이 되어
밤이라도 낮이라도
새 세계를 낳으려 손댄 자국이 시가 될 때에 있다.
촛불로 날아들어 죽어도 아름다운 나비를 보아라. ― 「시인에게」의 일부
* 글쓴이 : 권영민 / 1948년생, 서울대 국문과 교수
李相和의 삶과 문학
이상화는 별호를 4개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인생 역정과 관계를 가진다. 문단에 나오기 전인 20세 이전에는 ‘무량(無量)’이라는 불교 용어로 호를 지었다. 요새 말로 하면 ‘한량없는’이라는 뜻인데 사실상 그 시절 그는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고 마음먹어 못한 일없고 남에 뒤질 것 하나 없는 ‘무량 대복’을 지닌 청년이었다.
‘상화(尙火)’는 문단에 나온 후 ‘항상 불같이’ 작품을 써낼 때 자주 사용하던 호다. 22년에서 26년, 그 기간이 ‘상화(尙火)’가 열심히 문학 활동을 했던 때고 그 후로는 도망 다니고 체포되고 감옥살이하고 중국을 방랑하면서 고초를 겪느라고 제대로 작품 활동을 못했다.
‘상화(想華)’라는 호도 사용했는데 그것은 그가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중국에 가서 지은 호라고 볼 수 있다. 지명수배자의 운명이라 활동은 활동대로 못하고 쫓기는 자의 불안 공포에 찌들린 마음을 ‘만주 독립운동을 생각’하며 위안을 얻으려 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본명과 발음이 같은 별호를 사용하다가 36년 무렵부터는 ‘백아(白啞)’라는 호를 사용한다. 말 그대로 ‘백치와 벙어리’처럼 살지 않으면 안될 시절이었다. 가산은 완전히 날아갔고 심리 상태도 백치처럼 되고 싶었고 보고 듣고 말하는 것 모두로부터 도피하고 싶던 시절의 호이다.
이 호들 중에서 지금의 문단 후배들은 ‘상화(尙火)’를 통용 호로 사용하고 있다. 가장 활발히 詩作할 때의 호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비(詩碑)에도 ‘상화시비(尙火詩碑)’라 새겼다. 그러나 그가 사망했던 43년, 해방 2년 전해에 세운 묘비에는 ‘백아(白啞)’란 호를 새겼다. ‘詩人白啞李公諱相和之墓’라고 한문으로 새겨 일제의 억압을 피했다. 해방후 48년에야 ‘상화(尙火)’라 새긴 시비로 고쳐졌다. 10세된 막내아들이 「나의 침실로」 한 구절을 써넣고 수필가 김소운(金素雲)의 글을 대구 서예계의 대가 서동균(徐東均)의 글씨로 새겨 제대로 된 시비를 세웠다.
상화(尙火) 4형제 중 오직 그 자신만 불운한 인생을 살았을 뿐 다른 형제들은 ‘신화적 존재’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쟁쟁했다. 독립운동을 해도 상화(尙火)는 국내에서 하는 바람에 그 유일한 유산인 시 원고가 압수 당하고 누가 출판하겠다고 가져가서는 분실되고, 자신은 도망 다니고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마음은 울분에 차고 몸은 고달프게 살다 죽었지만 그의 형 상정(相定)은 일찍 만주로 망명해서 중국군 사령부에서 장군도 되고 해방 후에는 시, 서화 특히 전각(篆刻) 등으로 유유자적 예술 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상화(尙火)의 동생 상백(相伯)은 서울대 교수에, 문학 박사에, 대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 등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고 막내동생 상오(相旿)는 문무겸전한 기질을 타고나서 어릴 때는 형 상화(尙火)와 함께 「백조」 동인의 일원으로 동인지 「거화(炬火)」에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커서는 사격에 재능을 발휘해 이렇다 하는 수렵인이 되기도 했다. 상화(尙火) 혼자만 죽어라 죽어라 해서 가산이나 탕진하고 어머니 속이나 태우며 살다가 병을 얻어 아까운 나이에 참담한 일생을 마감했다.
형제들에 비해 고약한 사주팔자를 타고난 상화(尙火)지만 가장 뚜렷한 이름을 세상에 남긴 형제는 바로 그여서 ‘詩人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명언이 그로 인해 생기게 되었다.
상화(尙火)는 기질적으로 순수 서정 시인이지만 시대 상황이 그로 하여금 음풍농월이나 하게 놓아두지 않았다. 22년부터 26년까지 4년간 그는 상당한 시편들을 모아 두었고 박종화(朴鐘和)와 상당량의 문학 대담 형식의 편지도 교환했는데 그 원고들이 모두 실종 상태다. 상화(尙火)를 지극히 숭앙했던 임화(林和)가 그의 시집을 출판하겠다며 가져가서 돌려주지 않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고 임화(林和)가 북한에서 제법 끗발을 잡는 듯 하다가 남로당 숙청때 같이 숙청됨으로써 그 원고들의 행방도 묘연하다. 박종화가 가지고 있던 상화(尙火)의 문학론 편지들과 시고(詩稿) 몇 편이 있어 이것을 출판하겠다고 상화(尙火)의 제자 이문지가 가져갔는데 곧 6·25가 터져 피난통에 이 원고들이 또 사라져 버렸다. 하여간 상화(尙火)는 이처럼 지지리도 복 없는 일생을 살다 갔다.
그러나 문학 복은 없어도 여자 복은 넘치게 있는 상화(尙火)여서 그것이 오히려 ‘고뇌의 재료’라고 김팔봉(金八峰)이 글에 썼다. 장안 3대 미남에 상화(尙火)가 꼽힐 정도였고 매너 좋은 신사로 정평이 나 있는 데다 문학적 재능과 지성까지 갖추었으니 미인들이 주위에 운집할 것은 자명한 이치겠는데 ‘한번도 스캔들을 만들지 않은 도덕 군자’라고 김팔봉(金八峰)이 평가 한 것은 다소 소다수가 섞인 발언일 듯하다.
그의 연시(戀詩) 「이별을 하느니」 중에서 몇 구절을 뽑아 봐도 그가 얼마나 지독한 연애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 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눠야 겠느냐.
우리 둘이 나뉘어 생각하며 사느니보다 차라리 바라보며 별이 되자…
남몰래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우리 몰래 이별이 올 줄은 몰랐어라.
우리 둘이 나뉘어 사람이 되느니 차라리 피울음 우는 두견이 되자.
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 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뉘어야 겠느냐?
우리 둘이 나뉘어 미치고 마느니 차라리 바다에 빠져 두 마리 인어로나 되어서 살까.
상화(尙火)에게 여복이 많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 부인인 서순애(徐順愛)씨에게는 죽을 맛이었다.
백부가 어거지로 붙인 혼인이라 처음부터 마음에 없었는데 공부하러 간다고 핑게대고 상화(尙火)는 서울로 튀었다.
그후 7년간 소생이 없다가 집이 북새판 터지고 쫓겨다니느라 정신없을 2?년에 겨우 장남을 낳았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그 자식이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런 아들이나마 살지를 못하고 죽어 버리니 徐여사는 결국 카톨릭에 마음을
의지해서 기구한 인생, 모진 목숨을 지탱했다.
상화(尙火)는 술과 여자에 의지해서 모진 목숨 부지하다가 35년 무렵 ‘백치와 벙어리(白啞)’로 호를 고치고부터 마음을
잡아 학교 무보수 교사 노릇도 하고 신문 총국도 하고 아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어서 그때부터 ‘내 마누라야’ 하며 끔찍이
위해 주었다. 또 늦게나마 철이 들어서 국문학사를 집필했다. 춘향전을 영역한다 하며 학문 연구에 몰두하면서 43년에
사망할 때까지 작품 활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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