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2일 부활 제5주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4,1-12)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If you know me, then you will also know my 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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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초대 교회 공동체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공동체 안에 불평등과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열두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의 봉사에 전념하고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명을 뽑아 식탁 봉사자의 직무를 맡긴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모퉁이의 머릿돌이시다. 머릿돌을 중심으로 신자들은 살아 있는 돌이 되어 거룩한 영적 성전을 이룬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우리 삶의 목적이신 그분 안에서만이 우리는 삶의 탄식도 허무함도 괴로움도 이겨 낼 수 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딸한테 같은 말을 묻고 또 묻고 계속 물었습니다. 딸이 참다가 화가 나서 아버지께 큰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버지가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딸한테 말합니다. “딸아, 나는 네가 어릴 적에 ‘아빠, 이게 뭐야?’ 하고 백 번을 물으면, 백 번을 대답해 주면서도 매우 행복했단다. 그런데 내가 고작 몇 번 물었는데 그렇게도 화를 내야만 하니?”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마치 아버지가 어린아이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씀을 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그저 동문서답만 하는 답답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시지도 포기하시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에게 먼저 이런 인내로운 당신의 사랑과 관심을 행동으로 가르치시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똑같이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도 되풀이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귀를 닫고 있어서 답답하기만 한 우리에게 어린아이를 가르치시듯 당신께서 누구신지를 수없이 일러 주십니다. 예수님의 인내와 배려, 이런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사랑은 이렇게 기다려 주고 배려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린 딸을 키울 때처럼, 예수님의 이런 모습부터 먼저 배워야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도 알 것 같습니다.
★★★
올바르게 살고 싶은 것은 인류의 염원입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사람이 나타나 진리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엉뚱한 길이 더 많았습니다. 역사에는 가짜 이야기가 수두룩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예수님의 발언은 이러한 상황에 종지부를 찍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머뭇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진리와 생명이 예수님 안에 있으니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님과 함께 길을 걷듯이 믿음의 길을 당당히 걸으면 됩니다. 단순한 이 행위를 우리는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하느님을 보여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하느님은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분은 세상의 중심입니다. 삶이 허전하고 무의미해진다면 그분께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깨달음의 은총을 주십사고 청해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주시지 않을 리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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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고, 배운 게 없어도 행복한 집
-박용식 신부-
어버이날인 8일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경기 용인시에서 지병을 앓던 60대 노부부가 자식에게 짐이 되는 걸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매 숨졌습니다. 병수발을 해온 아들 부부에게 '미안하다. 고마웠다'는 유서를 남긴걸 보면 그 동안 삶이 편치 않았나 봅니다.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이 세계 최고라니 노인들 불행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 됩니다. 노인뿐 아니라 어린이들도 불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5일 어린이날 어느 신문에 실린 글을 보니 우리나라 어린이들 행복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23곳 중 꼴찌였습니다. 그 꼴찌가 조금 뒤떨어진 꼴찌가 아니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꼴찌로 조사됐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행복하게 뛰어놀며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마땅치 않습니다. 청소년들도 불행합니다. 그들은 갈 곳이 없다고 말합니다. 어디를 가도 잔소리와 감독의 눈초리뿐 설 땅이 많지 않습니다. 공부를 가장 잘하는 학생들만 모아 놓은 최고 대학인 카이스트 학생들이 줄줄이 자살을 합니다. 하물며 공부를 못 하는 학생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인간적 관계를 포기하고 살인적 성적 경쟁에 내몰린 잘못된 교육의 결과일 것입니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 배우지 못한 사람들, 똑똑하지 못한 사람들, 능력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배우지 못하고 많이 갖지 못하고 힘이 없다고 무시당합니다. 그들이 편안히 거처할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많이 배운 사람들, 많이 가진 사람들, 힘이 있는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은 행복할까요? 그들은 어딜 가나 사랑받고 존경받고 대접받아 마음이 편할까요?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지상 최고 권력을 누렸던 전직 대통령도 불행의 극치인 자살을 선택했고 재벌, 시장, 군수, 잘 나가는 정치인, 청소년들 우상인 연예인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잘났건 못났건, 많이 가졌건 못 가졌건 편안한 곳에서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지만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는 그런 자리가 많지 않습니다. 이런 불행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 세상에는 편안히 있을 곳이 없어 불행하지만 하느님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니 정말로 큰 힘이 됩니다. 세상에서는 돈이 많아도 행복하지 못하고, 아는 게 많아도 행복하지 못하고, 똑똑해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집에만 가면 돈이 적어도, 아는 게 적어도, 똑똑하지 못해도 편안하게 거처할 곳이 많다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 집에 거처할 곳이 많음을 여러 번 보여주셨습니다. 가진 것 많고 아는 것 많은, 똑똑하고 잘 난 사람들이나 예의바르고 신앙심 깊은 사람들만 예수님께 나아 간 것이 아닙니다. 가지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 죄인이나 못난 사람, 남에게 피해나 주는 사람,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도 예수님께 나아가서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처럼 모든 사람에게 편히 거처할 곳을 마련해주기 위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가톨릭교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 집에 거처할 곳이 많음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이셨듯이, 가톨릭교회는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이는 교회, 모든 사람에게 편안히 있을 곳을 만들어주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사회에서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도 이곳에만 오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성당이어야 합니다. 사회에서는 가진 게 적고 아는 게 적고 힘이 없다고 무시당하지만 성당에 오면 존경받고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성당에 와서까지 상처받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위로받고 치유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성당이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편안하게 설 자리가 없지만 성당에는 편안히 거처할 자리가 많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바로 그런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14,2).
마음이 산란할 때의 기도
-최인각신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성모성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을 보내며 행복을 느껴야 하는데, 가끔 마음이 산란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 둘 곳조차 없어 가슴이 답답하고, 앞길이 캄캄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고 살맛나지 않는 ‘산란한 마음’ 말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산란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헤쳐 나가며 자유로움을 얻으십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잠시 떠남, 못 봄)을 당하더라도 당황하거나 혼란스러워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달래주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라고 표현하십니다. 당신의 떠남은 우리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함이요, 당신의 다시 오심은 우리를 그 자리에 앉혀주기 위해 데리러 오심이기 때문에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보면, 당신의 떠나심과 다시 오심은 우리를 아버지 집에 있게 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확인시켜주기 위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토마스는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토록 자세히 설명했는데, 못 알아듣고 다른 이야기를 하다니…. 하지만 예수님은 이에 개의치 않으시고 토마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뵌 것이라는 말씀으로,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밝히시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에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음이 드러나는 표현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라고 말씀하시며, 당신께서 바로 하느님으로서, ‘당신을 보았으면 하느님을 뵌 것이다’라고 자연스럽게 당신을 소개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와 당신은 분명히 다른 존재이지만, 하나이심을 밝히시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어떤 관계이며,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어떤 일을 하시는지 명확히 설명해 주시면서, 당신을 믿으라고 하소연하시는 듯합니다. 하느님이신 당신께서 무엇이 아쉬워서, 이해하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며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달래가며 말씀하시는지, 그 모습을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에 마음이 답답하고 산란하셨겠지만, 당신의 이런 마음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자들이 당신의 떠남에 불안해할까 봐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열고 다가간다면, 예수님은 감동하실 것입니다.
저는 요즘,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기도를 하면, 예수님께서 금방 도와주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예를 들면, ‘길이요 진리이시며 생명이신 예수님, ∼에 대한 부담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상처가 치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를 용서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기도를 하면, 산란했던 마음이 정리되고 편안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아주 간단하고 짧은 기도이지만, 그 효과가 참으로 좋습니다.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고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해도 한없는 인내로 도와주시는 분께서는, 우리가 희망과 믿음을 갖고 기도하면 응답하시기 위해 즉시 달려와서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용기를 내어 기도해 보십시오. 산란한 마음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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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허영엽신부-
초등학교 때 집 근처 인적이 뜸한 곳에 작은 움막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방물장수 할아버지와 장애를 가진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무표정한 얼굴에 말수도 적은 할아버지를 무서워했고 함께 산다는 딸을 아무도 본적이 없어 여러 가지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움막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근처에 가지도 않았지요.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다가 막 움막에서 나오시는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엄마, 여긴 웬일이야?”
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지만 빨랫거리를 손에 든 어머니는 빙그레 웃기만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자주 그 움막에 들러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의 딸을 목욕시켜주고 빨래도 해주셨던 것입니다. 얼마 후 움막집 딸이 세상을 떠나게 됐습니다. 어머니는 차분하게 임종대세를 주신 후 시신을 씻기고 수의를 입혀 장례를 치르도록 하셨습니다. 성당 신자들이 와서 연도도 바쳤습니다. 며칠 뒤 장례가 끝나고 할아버지가 우리 집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딸이 몹쓸 병에 걸려 수십 년을 방안에서만 지냈는데 아주머니 덕택에 마지막 가는 길에 호강했습니다.”
어머니는 별말 없이 그냥 미소만 지으셨습니다. 나중에 할아버지도 세례를 받고 주변 사람들도 성당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네의 친구들도 더 이상 할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당신께서 스스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참된 삶인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기쁨과 자유, 평화와 행복을 한껏 누리면서 사는 삶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을 성실히 걸어갈 때 우리는 진리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지에 잘 도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올바르고 안전한 길을 알아야 합니다. 그 길을 안다면 이미 성공적인 삶을 시작한 셈이지요.
“나는 길이다.” 다행히 예수님께서 스스로 길이라고 하시며 그 길을 자세하게 알려주십니다. 주님의 길은 한마디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길을 열심히 가면 자연히 진리와 생명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주님을 알게 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보고 알 수 있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길을 충실히 가는 신앙인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은 바로 주님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올바른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이 우리를 통해 주님의 진리와 생명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그 ‘길’을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절 지나가는 걸인이라도 끼니를 챙겨주셨던 어머니에게서 주님의 사랑을 배우고 소중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지금도 가만히 눈을 감으면 고단한 일상 속에서도 항상 묵주를 손에 쥐고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기도하셨던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__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반명순 수녀-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오시는 주님을 알아뵙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부활체험을 통해서만 아니라 세상에서의 시련과 고통의 시간을 함께하며 키워온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 제5주간을 지내는 오늘 말씀은 고별담화의 일부를 전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보이시지만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는 주님의 말씀 (13장) 에 제자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14, 1) 하며 제자들에게 충실한 믿음을 당부하십니다. 오직 믿음만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굳건한 신뢰와 내적 평화를 줄 수 있으며, 부활하여 오실 예수님을 알아뵐 수 있는 터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집에 거처할 곳이 많다 …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 같이 있게 하겠다.” 는 약속으로 새로운 시작을 나타냅니다. (2 – 3절)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는 곳이 곧 아버지의 집이 되는 것일까요 ?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4절) 고 확신하는 예수님께 토마스 사도만이 아니라 우리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 (5ㄴ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6절) 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우리가 길을 알 때 목적지를 쉽게 찾을 수 있으며 길의 끝이 어디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께 가는 유일무이한 길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 이라고 하시며 그런 만큼 “이제부터 그분을 아는 것이며 이미 그분을 뵌 것” (7절) 이라고, 길과 목적지가 하나임을 알려주십니다. ‘안다’ 는 것과 ‘본다’ 는 것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안다’ 는 것은 전인적인 만남입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 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상호 내재적인 완전한 일치와 친교를 이루십니다. (10절) 또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 (11절)으로써 예수님의 모든 언행은 하느님을 계시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됩니다. (10, 14 – 15 참조) 이처럼 예수님은 하느님을 알려주시고(1, 18; 12, 45; 14, 9 참조),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가르치시기 때문에(1, 17; 4, 23 – 24; 8, 31 – 32; 17, 3 참조),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14, 6)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믿음이 부족한 것은 비단 그 시대의 제자들만이 아닐 것입니다. (8절) 필립보의 요청 앞에 예수님은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 (9절) 하시며 너무나 간절하게 믿음을 촉구하십니다.“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10절),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1절; 5, 36 참조)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을 굳건한 믿음으로 확고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믿음만이 예수님 안에서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을 볼 수 있게 하며, 길의 목적지인 ‘아버지’ 와 ‘아버지의 집’ 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14, 2. 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기 위해 “나를 믿는 사람” 은 “내가 하는 일” 과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 이라고 약속합니다. (12절) 예수님의 “일” 은 (11절) 생명을 주는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는 표징이며, 아버지께 가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제자들 안에서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더 큰 일’ 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 안에서 제자들과 그들의 공동체가 맺어갈 믿음의 열매이며 (12, 32; 15, 5; 20, 21 – 23 참조), 그 일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더 큰 일이 됩니다. 이런 확신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며 활동하신다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4, 3; 마태 28, 20 참조)
묵상 (Meditatio)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 (14, 9ㄱ) 네, 예수님을 압니다. 어떻게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이성과 지성으로만 알고 있다면, ‘안다’ 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그리고 그것을 참으로 ‘안다’ 고 할 수 있겠습니까 ? 토마스와 필립보 사도가 그 ‘길’ 을 모르니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라고 청한 것이 어찌 그들만의 나약한 믿음이겠습니까 ? 길을 알면서도 가지 못하는 까닭은 ‘길’ 에 서서 ‘진리’ 로 이끄는 당신을 바라보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몰입된 탓은 아닌지요 ? ‘생명’ 으로 이끄는 길을 따라가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참으로 이 아침에 고요로 떠오르는 주님의 얼굴을 뵈오며, ‘나’ 라는 우상을 치우고 싶습니다. 부활하시어 풋풋한 새 아침의 얼굴로 오시어 제 영혼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생명의 하느님, 진리의 하느님을 알아뵙도록 저의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기도 (Oratio) 당신 얼굴을 저희에게 비추소서. 그리하여 세상에 당신의 길이, 만민에게 당신의 구원이 알려지게 하소서. (시편 67, 2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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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풍처럼 다가오시는 하느님
-양승국신부-
윤해영 수녀님이 쓰신 「기도바구니」(성바오로 출판사)란 책을 읽다가 참으로 공감이 가는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어느날 문득 성가 한 소절에 눈물이 핑 돌고 성서 한 구절에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살면서 아주 소중한 체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체험은 경우에 따라 평생 잊지 못하는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기도 하지요."
참으로 지당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섭리는 오묘하기만 합니다. "내가 이 나이에 변해봐야 뭐하겠어?" "제발 절 그냥 내버려 두세요. 이렇게 살다가 죽게요" 하는 우리 삶에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하느님은 미풍처럼 다가오십니다. 때로 우연히 발견한 상본 한 장, 거기에 적힌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성서 한 구절이 우리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답니다.
마음이 열린 사람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의 순결을 지닌 사람들, 부단히 어제와 결별하고 거듭 길 떠나는 사람들은 아주 쉽게 진리를 터득하며, 진리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동시, 동요 분야의 탁월한 작사 작곡자께서 이런 글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산을 오르시다가 길섶에 핀 아주 작은 풀꽃, 보일락말락한 노란 풀꽃 한 송이를 발견하셨는데, 그 꽃이 너무 예쁜 나머지 땅바닥에 엎드려서 자세히 바라보니, 그 작은 풀꽃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그 작은 풀꽃 안에 우주의 모든 이치가 다 들어있더라는 말씀. 워낙 영적으로 사시고, 또 맑은 정신과 티 없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분이다보니 그런 체험을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란 것은 때로 이렇게도 다가온답니다. 아주 작은 사건을 통해, 스쳐지나가는 말 한마디, 시 한 구절과 만남을 계기로 깨달음은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필요한 노력이 보다 단순해지려는 노력, 맑은 정신과 깨끗한 마음을 지니려는 노력, 작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인 것입니다.
영혼이 담긴 시선으로, 마음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볼 때, 십자가의 원천이던 형제는 어느새 사라지고, 행복의 원천, 기쁨의 원천, 은총과 축복의 원천인 형제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진리를 깨달음에서 오는 결실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마음은 마치 절벽 앞에 선 듯한 느낌이셨으리라 여겨집니다. 그토록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고 또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또 다시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누가 메시아인지, 누구를 따라가야 하는지, 어디에 목숨을 바쳐야하는지 그렇게도 열심히 교육시키셨건만 아직도 분위기 파악이 덜된 제자들이었습니다.
아직도 신앙의 눈을 뜨지 못해 갈 길이 멀었던 제자들, 그래서 인간적 잣대로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이었기에 구세주를 바로 눈앞에 두고도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너무도 안타까웠던 예수님은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내가 이토록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이제 때가 다 되어 곧 떠나가실 주님이셨기에, 아직 '덜 떨어진' 제자들 모습에 아쉬움을 감추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강조하고 설득해도 영적 눈을 뜨지 못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아직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너무도 서글프셨던 예수님 마음을 느껴봅니다.
어떻게 해서든 제자들과 백성들을 죽음의 길에서 생명과 진리의 길로 돌아서게 하시려는 예수님 마음, 어떻게 해서든 깨닫게 해서 죽음에서 돌아서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시는 예수님의 애타는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이번 한 주간 보다 단순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어린이 마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우리 시선이 조금씩 정화되겠지요. 인간적 눈, 세속적 눈을 조금씩 감게 될 때, 영적 눈, 순수하고 맑은 눈, 신앙인의 눈, 관상가로서의 눈, 예수 그리스도의 눈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화된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보다 쉽게 발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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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평화신문-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마치 철부지 어린애와 같았습니다. 스승의 뜻이 무엇인지를 끝까지 몰랐고 또한 구원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천덕꾸러기들이었습니다. 그저 세 속적인 야심만 가지고 눈치만 보는 소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믿으셨고 그들에게 당신의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미래를 내다볼 때 주님은 사실 걱정스러웠습니다. 당신이 그들을 떠나셨을 때 그 못난이들이 어떻게 될지는 너무도 뻔했습니다. 더구나 박해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마지막 설교를 하십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14,1). 최후만찬 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 면서 특히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라고도 하셨습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걱정할 것 이 없고 세상의 어떤 세력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이 그분의 가르침이 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믿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길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길이 많아도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예수님뿐이고, 세상에 진리가 많아도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진리는 예수님뿐이며, 세상에 생명이 많아도 썩지 않는 생명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이제 결론은 간단합니다. 그분만 믿으면 됩니다. 그것이 최고의 삶의 지혜이며 또한 걱정에서 해방되는 길입니다.
어떤 자매가 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 참으로 많습니다. 남편도 성실하고 자녀들도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부인은 괜한 걱정 속에 눌려서 삽니다. 묵주를 들고 매일 미사에 나오면서도 걱정으로 자기를 묶어 놓고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하루는 평일 미사가 끝난 뒤에 조용히 저를 만나자고 하더니, 자기가 죽으면 남편이 다른 여자를 얻을 것이며 그러면 그 여자가 재산을 빼돌리게 될 것이라며 한숨을 길게 쉬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걱정이었습니다.
제가 그때 그랬습니다. 자매님은 건강하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젊으시고 더구나 남편이 굉장히 사랑해 주시니까 아무 걱정 마시고 기쁘게 사시라고 해도 그 자매님은, 신부님은 모르는 소리 말라면서 사람의 인생이 어찌될지 누가 아느냐고 했습니다. 걱정도 팔자였습니다!
물론 사람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미래가 활짝 열려져 있지만 그 속 내용은 캄캄하게 닫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겁도 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겐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문제 되지 않습니다. 자녀가 아빠와 함께 있는데 미래의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냥 믿으면 됩니다. 그분 뜻만 따르면 세상에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가 믿는 것은 실상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살얼음판을 걷게 됩니다. 믿으면 안전한 것을 맨땅을 까치발로 걷고 있으니 보는 사람도 불안합니다.
베드로는 오늘 2독서에서 좋은 말을 했습니다. "주님께로 가까이 오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입니다." 예수님이 일찍이 베드로를 반석이라 부르시면서 그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마태16,18참조).
베드로는 실로 우리의 반석입니다. 우리 교회는 베드로 위에 서 있습니다. 이것이 천주교와 개신교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그 러나 베드로는 예수님만이 진정한 반석이라고 증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아니시라면 자기는 달걀 껍질보다 더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는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반석의 재목이 아니었습니다. 변덕이 심하고 충동적이었으며 학식이나 인품도 없었고 그 잘난 신앙도 들쭉날쭉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실패해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머무르려 했고 또한 그분의 길을 가려 했기 때문에 위대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와 베드로와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걱정이 많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이 반석인 줄을 모르니 두려워하며 또한 진리 안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헛된 진리에 정신을 팔고 있으니 불안하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모순이요 아픔입니다.
주님께로 가까이 오십시오. 그분이 바로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며 또한 살아 있는 반석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우리 또한 반석이 됩니다. 괜한 걱정 속에 인생을 썩히지 말고 참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도록 합시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입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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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만 할 길
-안병철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떠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동시에 오랫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이 당혹해하고 당황할 것을 염려하시며 그들을 위로해 주십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이 말씀은 지상에서의 그분의 현존보다 더 강력한 새로운 형태의 현존이 시작될 것임을 알려 주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토마스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갈 수 있습니까?”(요한 14,5)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고 단호한 어조로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야말로 희망과 위로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이미 걸어오셨고 그 길이 어떤 길인지를 보여 주셨기에 그분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곧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보는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가장 원초적이고도 간절한 인간적인 욕구를 토해 냅니다. 그 욕구가 충족되어야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간적인 기대감을 숨기지 않고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온전한 친교 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곧 아버지의 말씀들인 것이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업적들 또한 아버지의 업적들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자들 역시 그들이 하는 일들이 예수님의 일들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십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은 아버지 하느님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고 우리를 진리와 생명에로 이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을 뵐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세상에 전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무릇 세상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계속 행하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통해 우리에 대한 당신의 깊은 사랑을 표명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야 할 사람들이 이제는 당신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여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그렇다면 믿는 이들은 어떤 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를 알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길이 있다고 해서 다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다 가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인지하고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어떤 길을 가는 것이 행복의 길인지를 제시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가 실현해야 할 예언자적인 소명이 구체적으로 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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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바로 당신 곁에 계십니다
-배광하신부-
뵙게 해 주십시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자이쿠마르’ 교수는 하버드 대학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소중한 인생 체험담을 들려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40년 전 나는 히말라야 산을 등반한 뒤 하산하는 길에 발을 헛디뎌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울퉁불퉁한 경사면을 따라 약 2.4Km 정도의 거리를 미끄지며 온몸은 찢어졌고 엉덩이뼈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히말라야의 산간마을 한 여인의 도움으로 나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응급처치를 마친 여인은 나를 업고 걷기를 3일 간 계속해 병원이 있는 마을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 여인의 지극히 관대한 사랑은 나를 완전히 바뀌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행운 속에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살아오면서 소유하고 누린 크고 작은 것 모두가 행운이고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산을 오르는 열정은 나를 어느 특별한 봉우리로 오르도록 이끌어 주었지만, 추락은 내가 보다 높은 곳에 닿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학생 여러분, 부디 여러분은 세상에서 얼마나 행복한 위치에 있는지, 헌신적인 스승이나 나를 사랑하시는 부모님을 만남으로써 내게 얼마나 커다란 행운이 찾아 왔는지 깨닫기 위해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지나온 자신의 생을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자이쿠마르 교수보다도 더 큰 은총의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은총의 체험을 체험으로 머물게 할 때에 그곳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은총의 체험이 말할 수 없는 감사로 이어질 때, 그 체험의 내면 깊은 곳에 사랑의 미소로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을 만나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우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우연 뒤에는 사건 하나하나에 하느님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그분 섭리의 손길이 아닌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인생에서 행운이라고 불렀던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의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그 같은 은총을 체험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저 오르려고만 하였던 세상의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세상 일에 마음을 빼앗겨 주님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지, 주님께선 늘 내 곁에 나와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 하는 청을 드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와 함께 지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뵙게 해 달라고 청하는 필립보에게 아주 단호히 당신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요한 14,9)
물고기가 물 속에 살면서도 물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헤엄을 치면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사도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일은 제쳐 놓고 식량 배급에만 마음을 쏟았습니다.
육신을 배불리 먹일 음식에만 마음을 쏟았지 영혼을 살찌울 말씀을 소홀히 하였던 것입니다. 그 같은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해’졌다고 일깨워 주시고 계십니다.
사도들이 식량 배급에서 손을 떼고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마음의 안정과 주님의 평온 속에 그분의 현존을 느끼게 됩니다. 신도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커다란 권력이자, 힘이 될 수 있는 식량배급의 유혹에서 벗어나자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길 때, 우리는 곁에 계신 주님의 현존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주 고요한 침묵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주님께서 내 인생 여정에 함께 하심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의 불안은 사라지고 든든한 동반자이신 주님 때문에 인생이 기쁨과 환희로 가득찰 것입니다.
그 같은 기쁨을 체험한 이들이 자신의 영적 제물을 주님께 바치며, 신령한 하느님의 집을 짓는데 쓰일 산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추기경 시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기본 요소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삶과 함께 하며 그러한 삶조차도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기쁨입니다.”
고통의 인생 여정에서도 주님께서는 늘 우리 곁에 계셨습니다. 그분의 동행은 고통을 이길 힘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
-허영업신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오늘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수난을 앞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머지않아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당신 자신보다도 제자들 걱정으로 가득합니다. 당신이 잠시 자리를 비우시는 동안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려 걸려 넘어지지나 않을까 염려해서입니다. 어린 자식들을 남겨 두고 멀리 떠나야 하는 부모의 애틋한 사랑이 엿보입니다.
구약의 하느님 백성은 모세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담긴 율법(토라)을 받았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말씀을 문자화한 것이므로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율법 준수는 약속의 땅에서 생명을 누리며 하느님과 함께 살게 하는 필수적인 길이었습니다. 율법에 하느님의 지혜가 담겨 있었으므로 예수님도 율법을 폐지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마태 5,17 참조).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지혜를 추구하는 대신 인간적인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법보다 사랑을 앞세우지만, 인간적인 지혜는 사랑과 연민보다 법과 보복을 내세웠습니다. 결국 연약한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하고 생명의 땅에서 쫓겨나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고 하느님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이 되어 오시어 하느님과 함께 사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생명이 있는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통해야 합니다. 죄를 뉘우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이끄는 길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생명의 빵이며 당신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당신을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요한 6,35 참조).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당신의 뜻을 고집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신(요한 5,30 참조) 예수께는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요한 1,14 참조).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구약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살기 위한 조건으로 율법을 받았지만, 신약의 백성은 하늘나라에서 살기 위한 조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를 믿어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을 믿는 이들은 아드님을 본받아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어야”(1베드 2,5) 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산 돌은 식량 배급을 받아야 하는 가난한 과부들을 푸대접하지 않고 고아들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며 모든 이를 생명으로 이끄는 사랑의 봉사자가 됩니다. 산 돌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일이 있더라도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1베드 2,9)이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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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유영봉신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시고, 스스로 철저히 사신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바로 생명의 원천이시며, 그 가르치심이 진리임을 증명한 사건이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단순히 뛰어나신 성현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신앙, 그것이 참된 신앙이다.
1. 예수 그분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필립보의 가리사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태16,15)하고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이 질문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역사상의 여러 성현(聖賢)들 중의 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요한1,18)고 하는 필립보에게, 예수님은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요한14,9-10)고 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명백히 선언하셨다. 이 말씀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4,6) 하신 말씀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이며, 그분 안에 참 생명이,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고 그 믿음으로 삶을 꾸려 가는 것을 말한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진정 어떤 분이신가?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2.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증명한 사건이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22,37-40)고 가르치시고, 스스로 이 사랑을 철저히 사셨다. 십자가의 죽음은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명이며 인간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내 놓으신 사랑의 절정이었다.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철저한 사랑을 사신 예수님은 죽음을 넘어 부활에 이르셨다. 참으로 사랑은 죽음보다 강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단순히 뛰어난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심을 증명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경천애인(敬天愛人)'의 가르침이, 인간을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진리임을 드러낸 사건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사랑의 계명을 철저히 사는 것, 예수님을 철저히 추종하는 것이 바로 부활에 이르는 길임을 확신시키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과 삶과 부활을 통해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하신 말씀을 우리는 믿지 않을 수 없다.
3. 매일 그리스도를 살아야 한다.
일찍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의 백성이 바로 교회이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렇다.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 서간에서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2,9) 고 말씀하신다.
세례를 받아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인 것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백성들은 '신령한 집을 짓는데 쓰일 산 돌'(1베드2,5)이며, 이 살아있는 돌들이 모여 이룩한 공동체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교회인 우리들은 예수님만이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온 세상에 선포해야 한다. 참 믿음은 단순한 지적(知的) 동의가 아니라, 믿는 바를 사는 삶이어야 한다.
"교회는 많은데 그리스도는 볼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의 문제이다. 그것은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가 제대로 그리스도를 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예수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6,56)고 말씀하신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 우리도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살아야 한다. 성당 문밖을 나서자마자 예수님이 나에게 오셨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 살지는 않는가? 매사에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께 여쭙고, 주님과 의논하며 사는 삶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의 삶에 동참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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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과 진리와 생명
-허성신부-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신의 아버지의 집에로 돌아가서 제자들이 있을 곳을 마련해 놓고 그들을 데리러 올터이니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당신을 믿으라고 당부하신 다음 아버지를 뵈옵게 해달라는 제자에게 당신을 뵈옵는 것이 곧 아버지를 뵈옵는 것이라고 대답하신 것이 오늘의 복음내용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전인 유신 군사독재 시대에 어떤 젊은이가 민권운동을 하다가 붙잡혀가서 매도 많이 맞고 옥살이도 오래 하면서 고생을 많이 하다가 광복절 특사로 풀려 나왔다. 하지만 계속되는 감시와 당국의 간섭 때문에 국내에서는 인권운동은 커녕 직장생활도 할 수 없게 되어, 하는 수 없이 뉴질랜드에 일찍 이민을 가서 사슴농장으로 기반을 닦고 생활하시는 아버지께로 가 농장일을 거들어 드리면서 살기로 아버지와 합의를 했다.
그리고 이민수속을 밟으면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에게 아빠는 『뉴질랜드에서 큰 농장을 경영하시는 할아버지께로 먼저 가서 우리가 살 집도 마련해 놓고 가구도 새로 들여놓고 너희들을 데리러 올터이니 그동안 형인 네가 어린 동생들을 잘 돌보면서 학교에도 결석하지 말고 잘 다니고 있어라. 여기 약간의 예금되어 있는 통장과 도장이 있으니 낭비하지 말고 필요할 때 조금씩 찾아 써라. 그리고 이웃에 사시는 이모님에게도 당부해 놓았으니 무슨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든 이모님에게 말씀드려서 해결하도록 해라』하고 초등학교 5학년인 큰 아들에게 당부했다. 그러자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 아이가 할아버지를 한번도 못봐서 어떤 분인지 궁금한데 아빠가 좀 이야기 해달라며 조르자 아빠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빠는 할아버지를 빼닮았단다. 외모도 같고 키도 같고 목소리도 같고 걸음걸이도 같고 체격도 같고 성격도 같고 식성도 같고 취미까지도 같으니까 나를 보면 할아버지를 뵙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는 온갖 죄악과 고통과 가치관의 혼돈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어 고군분투를 하셨건만 기득권자들로부터 엄청난 저항과 박해를 받으시고 마침내는 십자가행을 받고 죽으시기까지 하셨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죽음보다도 더 강했기에 부활하셔서 당신의 아버지에게로 올라가시기 전에 사랑하시던 당신 제자들에게는 아버지의 집에 그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는대로 그들을 데리러 오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그동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께 희망을 걸고 잘 살라고 당부하셨다. 그러시면서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7성사를 제정해 주셨고 협조자 성령을 즉시 보내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당신의 어머니까지 우리의 어머니로 받들도록 주셨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를 빼닮으셔서 당신을 뵈옵는 것이 곧 아버지를 뵈옵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되지 않을까? 비신자들이 우리를 보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그분의 아버지 모습까지도 연상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인도의 마하트만 간디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크리스챤들에게 『나는 그리스도를 좋아하는데 크리스챤들은 싫어합니다. 왜 당신네들 크리스챤들은 당신네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습니까?』라고 비난했다.
예수께서는 당시 우리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라고 우쭐거리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과 같이 살라고 하셨다.
『나보고 주님 주님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이행하는 사람이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버지의 뜻만을 따라서 철저히 사시다가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호소를 한번도 외면하신 적이 없으실뿐 아니라 모든이에게 모든 것이 되셨다.
아무도 관심조차 갖지 않는 하찮은 사람들을 당신처럼 대하라고까지 하셨다. 그렇기에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최후심판의 기준을 미소한 한사람 한사람에게 당신을 대하듯 사랑을 베풀었느냐 아니냐로 삼겠다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아 어디를 가든지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도록 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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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공석신부-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신의 아버지의 집에로 돌아가서 제자들이 있을 곳을 마련해 놓고 그들을 데리러 올터이니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당신을 믿으라고 당부하신 다음 아버지를 뵈옵게 해달라는 제자에게 당신을 뵈옵는 것이 곧 아버지를 뵈옵는 것이라고 대답하신 것이 오늘의 복음내용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전인 유신 군사독재 시대에 어떤 젊은이가 민권운동을 하다가 붙잡혀가서 매도 많이 맞고 옥살이도 오래 하면서 고생을 많이 하다가 광복절 특사로 풀려 나왔다. 하지만 계속되는 감시와 당국의 간섭 때문에 국내에서는 인권운동은 커녕 직장생활도 할 수 없게 되어, 하는 수 없이 뉴질랜드에 일찍 이민을 가서 사슴농장으로 기반을 닦고 생활하시는 아버지께로 가 농장일을 거들어 드리면서 살기로 아버지와 합의를 했다.
그리고 이민수속을 밟으면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에게 아빠는 『뉴질랜드에서 큰 농장을 경영하시는 할아버지께로 먼저 가서 우리가 살 집도 마련해 놓고 가구도 새로 들여놓고 너희들을 데리러 올터이니 그동안 형인 네가 어린 동생들을 잘 돌보면서 학교에도 결석하지 말고 잘 다니고 있어라. 여기 약간의 예금되어 있는 통장과 도장이 있으니 낭비하지 말고 필요할 때 조금씩 찾아 써라. 그리고 이웃에 사시는 이모님에게도 당부해 놓았으니 무슨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든 이모님에게 말씀드려서 해결하도록 해라』하고 초등학교 5학년인 큰 아들에게 당부했다. 그러자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 아이가 할아버지를 한번도 못봐서 어떤 분인지 궁금한데 아빠가 좀 이야기 해달라며 조르자 아빠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빠는 할아버지를 빼닮았단다. 외모도 같고 키도 같고 목소리도 같고 걸음걸이도 같고 체격도 같고 성격도 같고 식성도 같고 취미까지도 같으니까 나를 보면 할아버지를 뵙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는 온갖 죄악과 고통과 가치관의 혼돈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어 고군분투를 하셨건만 기득권자들로부터 엄청난 저항과 박해를 받으시고 마침내는 십자가행을 받고 죽으시기까지 하셨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죽음보다도 더 강했기에 부활하셔서 당신의 아버지에게로 올라가시기 전에 사랑하시던 당신 제자들에게는 아버지의 집에 그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는대로 그들을 데리러 오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그동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께 희망을 걸고 잘 살라고 당부하셨다. 그러시면서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7성사를 제정해 주셨고 협조자 성령을 즉시 보내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당신의 어머니까지 우리의 어머니로 받들도록 주셨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를 빼닮으셔서 당신을 뵈옵는 것이 곧 아버지를 뵈옵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되지 않을까? 비신자들이 우리를 보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그분의 아버지 모습까지도 연상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인도의 마하트만 간디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크리스챤들에게 『나는 그리스도를 좋아하는데 크리스챤들은 싫어합니다. 왜 당신네들 크리스챤들은 당신네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습니까?』라고 비난했다.
예수께서는 당시 우리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라고 우쭐거리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과 같이 살라고 하셨다.
『나보고 주님 주님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이행하는 사람이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버지의 뜻만을 따라서 철저히 사시다가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호소를 한번도 외면하신 적이 없으실뿐 아니라 모든이에게 모든 것이 되셨다.
아무도 관심조차 갖지 않는 하찮은 사람들을 당신처럼 대하라고까지 하셨다. 그렇기에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최후심판의 기준을 미소한 한사람 한사람에게 당신을 대하듯 사랑을 베풀었느냐 아니냐로 삼겠다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아 어디를 가든지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도록 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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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듣게 되기까지
-노성호신부-
얼마 전 MP3 플레이어 한 대를 구입했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운동도 하고, 어학용으로 하나 있으면 좋겠다 싶어 구입했는데, 출시된 지 얼마 안 된 신제품이어서 그랬던지 인지도가 타사 제품에 비해 월등히 높았습니다. 하지만 이에 상응하여 높은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용법의 난이도였습니다. 플레이어에 어떻게 음악이며 동영상 파일을 전송시키는지에 대한 제품 설명도 부실했고, 디자인의 단순화는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까지 줘서 좋았으나 너무 단순화 하다 보니 무엇을 어떻게 조작해 작동시켜야 하는지 조차 난해했습니다. 신제품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만지작거리기를 수삼일, 그러나 결과는 방황(?)의 연속이었습니다. MP3를 작동시켜야 한다는 목적으로 길을 떠났으나 그 방향을 뚜렷하게 잡지 못해 여기저기로 헤매고 다닌 시간이었지요.
그렇게 며칠을 인터넷에 들어가 사용법을 배우려고 애를 쓰기도 하며 같은 제품의 사용자들이 올려놓은 글들도 보고 했는데, MP3 한 대에만 매여 있을 수는 없었기에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다 보니 어느새 새로 구입한 MP3는 책상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더군요. 저도 제 할 일 바빠서 MP3에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다시 언젠가는 시간을 내서 천천히 사용법을 익히고 말리라는 안일한 속셈이 그 귀한 신제품을 홀대하여 구석으로 밀어 넣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일종의 안주였을까요? 술 한 잔 기울일 때 곁들여 먹는 안주는 맛이라도 있지, 이번의 안주는 맛은커녕 귀한 것을 귀하게 느끼지 못하게 했고, 새로이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했던 의지를 꺾어놓았으며, 심지어 그 필요성까지 망각하게 하면서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MP3를 작동시키기 위한 방향뿐만 아니라 그것을 작동시켜야 한다는 목적까지 모두 없어진 그 상태는 분명 안주였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작동시켜 보고, 안내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MP3를 향한 순례(?)의 여정을 계속 떠나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순례의 끝에서 좋은 제품을 통해 들려오는 좋은 음악들을 만나고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적만 있고 방향은 잡지 못하고 헤맸던 방황의 시간도, 그 어떤 목적이나 방향도 뚜렷하지 않았던 안주의 시간도 모두 지난 다음에 뚜렷한 목적의식과 방향을 설정하고 열심히 마음을 가다듬고 앞으로 나아가자 얻게 된 쾌거였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이 제품에 대해서 열광하는지 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가는 길도 방황과 안주, 순례의 길이 아닐까요? 가긴 가야겠는데 갈피를 못 잡고 헤매며 방황하기도 하고, 잘 가고 있는 것 같아서 안주를 할 때도 있으며,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또 다시 순례를 떠나기도 하지요. 아마도 그 길은 우리가 하느님 품 안에 안기기까지 끊임없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 끝을 알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야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느껴지지만, MP3로 음악을 듣게 되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노력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하물며 하느님을 만나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런지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힘입어 또 다시 힘을 내어 아버지께로 가는 순례의 길에 용감하게 나서봅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예수님과 함께 걷는 그 길 위에서 어느새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집에 있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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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대구대교구 주보-
‘네비게이션’ 가지고 계시나요? 자동 운반 시스템 혹은 행성탐사 로봇 등에 이용되는 이동 로봇이 스스로 주행 경로를 결정하여 목적지로 이동함을 의미하는 ‘네비게이션’ 이라는 단어를 따서 만들어진 자동차 장착용 기계가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단어의 뜻처럼 네비게이션은 차량 운전자에게 목적지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을 안내해 주는 기계입니다. 가고자하는 곳을 입력하기만 하면 출발하는 곳에서부터 도착하는 곳까지의 경로가 자동으로 검색되기 때문에 운전자는 난생 처음 가보는 곳이라도 잘못된 길로 가거나, 길을 잃고 헤맬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혹여 운전자가 실수로 경로를 이탈하면 네비게이션은 금방 새로운 경로를 검색하여 다시 안내해줍니다.
토마스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인도해주시는 분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입으로 하시는 말씀과 가르치는 계명들을 따라 살기만 하면 우리는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잃지도, 잘못된 길로 빠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리와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친히 데리고 가실 주님이 내어주신 길을 따라가야겠습니다. 또한 바른 길을 먼저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라 살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다른 길을 가는 일이 없도록 주님의 돌보심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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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강지숙-
이 본문은 고별식(13-17장)에 속하는 고별사(14-16장)의 시작 부분입니다. 당신이 곧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게 되셨음을 분명하게 알리시면서 동시에 위로와 안심과 당부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난데없는 예수님의 고별 선언(33절)에 제자들은 혼란스러워합니다. 베드로는 저승까지도 따라가겠다고 큰소리치지만 현실이 생각처럼 수월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1절) 침착하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임박한 이별을 앞두고 발표하신 새 계명(13,31-35)을 실천하려면 무엇보다도 자기 마음 다스리는 일이 첫째인가 봅니다. 혼란은 믿음에 방해가 됩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믿음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과의 이별은 잠시입니다. 제자들을 고독하게 버려두지 않으시고 더욱 친밀하게 함께하실 것입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성숙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어라, 안심해라.’ 오로지 믿음으로만 예수님의 부재를 견뎌내고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2절)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에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듯 그런 공간적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더라도 제자들과 함께 있겠다는 위로의 약속입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곧 하느님과도 함께라는 뜻이겠지요. 아버지 곁에 있는 영원한 집에서 말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2절) 제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한결같이 성실하신 스승의 모습입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3절)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에는 승리하신다는 예언의 말씀과도 같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주 드문 재림에 관한 언급입니다. 예수님이 가실 곳은 아버지가 계신 곳이고, 그곳으로 가는 길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길의 목적지는 아버지이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6절) 짤막하게 자신의 존재를 계시하십니다. “나는 문이다.”(10,9)와 같은 맥락입니다. 제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셨지만 스스로 진리 자체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지만 스스로 생명 자체이십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예수님은 전권을 갖고 계십니다. 요한 공동체의 예수께 대한 넘치는 사랑과 존경의 신앙고백입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7절) 예수님과 아버지가 불가분의 관계이듯 예수님과 제자들도 끈끈한 결속 관계에 있음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과 하느님을 아는 것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그분만이 아버지께 대한 지식의 원천이십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8절) 일찍이 모세도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시오.”(탈출 33,18)라고 청한 적이 있습니다만, 주님을 뵙지는 못했습니다.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탈출 33,20) 필립보의 요청은 하느님을 뵙고 싶어하는 우리 모두의 바람을 대변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아주 깁니다(9-14절).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9절)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갈망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곧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신비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10절)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일치를 뜻합니다. 보는 것 말고 확고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이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십니다(10절).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빛납니다. 하느님을 갈망하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유대와 친교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직 믿음만이 그 초대에 답하는 길입니다.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11절)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표정을 읽으신 듯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12절) 제자들에게 능력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일’일 것입니다. ‘더 큰 일’이란 예수님을 능가하는 일을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으로 제자들이 펼칠 활발한 전도 활동과 풍성한 결실을 내다보셨겠지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3절) 믿음과 더불어 기도의 중요성을 또한 강조하십니다.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을 굳건한 믿음으로 무장시키시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을 축복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13절) 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기도할 수 있고 아울러 기도함으로써 더욱 굳건한 믿음에 이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절대적 일치를 믿고 청한다면 더 큰 예수님의 일,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이 계신 곳에 거처하고 있습니다. 토마스처럼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여(5절) 참된 삶에 이르는 길을 되묻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가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교에서 멀어질 수 없다는 진리를 일깨워 줍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이신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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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靈眼) -김찬선신부-
인도에 가면 많은 인도 여성들의 미간에 붉은 점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절에 가면 모든 부처상의 미간에 보석이 박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이 여인의 화장이요 부처의 치장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눈을 인도 사람들은 제 3의 눈(the third eye), 지혜의 눈(the eye of wisdom)이라고 하고 불자들도 慧眼, 즉 지혜의 눈이라고 합니다. 이 혜안은 육신의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그런 것들과 그런 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이 혜안이 없으면 사람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것밖에 볼 수 없고, 눈에 보이는 세계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제자들, 토마와 필리보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이렇게 주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되고, 보게 되었음을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전혀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고 대답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믿어야 알 수 있고 믿어야 볼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만이 靈眼이 열리고 영안을 가진 사람만이 보이는 것 너머의 존재와 세계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 영안을 가진 사람은 그저 예수만을 보지 않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아 뵙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아 뵙고 성자께서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성자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아 뵙습니다.
뛰어난 영안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가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어느 날 길을 가던 프란치스코가 길에 떨어져 있는 종이쪼가리를 정성껏 줍는 것을 보고는 같이 가던 제자가 프란치스코에게 물었습니다. “왜 아무짝에도 쓸 모 없는 종이쪼가리를 그렇게 정성껏 주웁니까?” 이에 프란치스코는 이 종이쪼가리에도 하느님, “하”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고 이 종이쪼가리가 설사 이단의 사상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 뵐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영안의 소유자입니까! 이런 영안의 소유자였기에 그는 구더기를 보고 구더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위를 보고 바위이신 하느님을 알아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없는 사람에게는 종이쪼가리는 쓰레기일 뿐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걸리적거리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일 뿐입니다.
주님마저도 이러하니 우리는 서로간에 더 그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버리는 버림받은 돌, 서로가 서로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영안이 있으면 우리는 주님 성전에 요긴한 모퉁이 돌, 서로를 딛고 하느님께로 올라가게 하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나의 참 가치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나는 주님 성전을 이루는 귀한 돌입니다. 나를 스스로 쓸모없는 돌멩이, 그래서 사람들의 발에 차이고 걸리적거리는 돌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참 가치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그 또한 주님 성전을 이루는 귀한 돌이요 성전이고, 주님께로 나아가는데 걸리적거리는 걸림돌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오르게 하는 디딤돌, 받침돌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말씀을 귀담아들읍시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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