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귀를 찾다가 우연히 만난 선지자
사울의 아버지는 기스이고 그는 유력한 사람이었다. (유력한 사람: 힘센 용사였고 재물과 권력이 있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울은 이스라엘 중에 가장 준수한 자였다.(준수한: 선하고 잘생기고 편안하고 쾌활한 성품)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 몇마리를 잃어버리고 사울에게 찾아오라고 하였다. 나귀를 찾다가 사무엘 선지자를 찾아가게 되고 우연히 왕으로 세워졌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연이라는 필연을 통해 일하셨다.(삼상9:1~3 17~21)
2 왕이 되도록 기름을 부으셨다.
사무엘이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으나 사무엘이 한 것이 아니었다. 여호와께서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우게 하셨다. 만약 왕으로 세운 사람이 있다면 왕보다 그 사람이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일 것이다. 왕으로 만든 사람이 있다면 분명한 목적이 있지 않겠는가? 심지어 창조주이시겠는가? 이처럼 여호와께서 사울을 왕으로 만드셨다. 왕으로 세우셨으니 왕으로서 그분의 말씀에 청종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사명의 자리에 기름부어 세우셨다면 그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여호와께서 세우신 것을 인정한다면 말이다(삼상15:1)
3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블레셋과 싸우려고 모였을 모래처럼 많은 블레셋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이스라엘은 두려워서 흩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쟁을 위해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려 하는데 기다리라고 하던 7일이 지나도 사무엘 선지자가 오지 않았다. 이에 오직 제사장만 드릴 수 있는 희생 제사를 왕이 직접 여호와께 드렸고 그때 사무엘이 도착하여 "이게 무슨 짓이냐"고 꾸짓었다. 사울은 이 위급한 상황에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자 부득이하게 번제를 드렸다고 말했다. 과연 우린 이런 상황에 어떻게 했을까?(삼상13:5-12) 우리도 똑같이 행했을까? 그럼 이런 질문을 해보자.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려고 불법을 저지르는 것은 괜찮은가? 아니, 쉽게 말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려고 죄를 지었다. 그러면 은혜를 얻는가? 법을 어기는 것은 죄인데 말이다(요일3:4).
4 단 한번의 실수였는가?
이에 대해 사무엘은 망령되이(어리석게, 미련하게) 행동했다고 책망하였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심지어 전쟁 상황에서도 불법을 행하는 것은 어리석고 바보같은 짓이다. 불법으로 은혜를 구한다는 생각은 미련하기 짝이없다. 사울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왕위를 지킬 수 없었고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지도자로 삼으셨다. 만약 여호와의 명령을 준행했다면 영원히 그 왕위가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단 한번의 잘못으로 왕위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을까? 그것도 기름부어 세운 왕인데 말이다. 불순종으로 은혜를 얻는다는 생각은 '하나님을 정말 모르는 것'이다. 선지자의 책망에도 사울은 상황이 어쩔 수 없었고 "선지자인 당신이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고 원망하고 있다. 과연 전쟁의 승리가 예배(제사)에 있는가? 심지어 불법을 행해서라고 예배하면 승리하는가? 사울의 신앙은 이미 왜곡되어 있었다. 한번의 실수가 아니라 이 실수가 사울이 어떠했음을 말해준다.(삼상13:13,14)
5 정말 어쩔 수 없었는가?
요나단은 사울과 똑같이 모래와 같은 불레셋 군대를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말했다. "구원은 사람의 수에 있지 않다." 그리고 다른 소년과 함께 블레셋 수비대에 올라가 그들을 쳤으며 블레셋 사람들이 서로 쳐 죽여 수많은 자들이 쓰러졌다. 이처럼 적은 수로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었다. 사울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서 불법을 행했다면 요나단은 믿음으로 전진했다. 우리의 승리는 환경과 사람이 아니다. 그게 믿음이다. 그러므로 사울이 말하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사울의 믿음이 어떠함을 말해준다.(삼상14:6-20)
6 어리석어서 죄를 짓게 만든 왕
이스라엘은 전쟁중에 너무나도 피곤하고 힘겨웠다. 그것은 리더인 왕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사울이 전쟁중에 금식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 명령을 듣지 못한 요나단은 전쟁후 칼 끝에 꿀을 찍어 먹었고 눈이 바로 밝아졌다. 이때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금식을 명령한 것을 알고 너무나도 안타까워하며 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만 있었어도 더 큰 승리를 가져왔을 텐데라며 한탄하였다. 이때 너무 피곤하고 죽을 만큼 기진한 백성들은 고기를 가져와 굽지도 못하고 피째 먹기 시작했다. 눈이 침침할 정도로 기진해 있던 백성들은 사울의 말도 안돼는 명령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된 것이다. 이를 보고 사울은 백성에게 믿음이 없다고 책망했다. 왜 사울이 백성에게 금식을 시켰을까? 금식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서? 예배와 금식이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가? 이런 자들 때문에 사도바울이 그토록 (율법의) 행위를 책망한 것이다.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서 행위로 뭔가를 얻어내려는 자세 말이다. 이렇게 어리석은 왕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시겠는가? 산너무 산이다. 이뿐인가? 요나단이 그 명령을 듣지 못해 꿀을 먹었다고 사울은 죽이겠다고 했다. 그러자 백성이 이 위대한 구원을 이끈 요나단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해서 간신히 말렸다. 지금도 이러한 어리석은 리더자들의 명령으로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게 되고 더럽혀지고 고통을 당하는가? 우린 사람의 명령과 하나님의 명령을 구분해야 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리더들이 세워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게 공동체와 교회에 복이다.(삼상14:24-33)
7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하심
여호와께서는 출애굽 때 약한자들을 뒤에서 쳐 죽인 아말렉을 심판하기 원하셨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행위를 기억하시고 아말렉을 쳐서 남녀노소, 어린 아기와 젖먹이와 가축들까지 모두 전멸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명령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하겠는가? 만약 그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왕의 자격이 없는 것이며 지도자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는가?라는 생각은 여러분이 그분을 믿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 믿음은 상대방을 신뢰하는 마음이다. 그게 없다면 당신은 믿지 않는 것이다. (삼상15:2,3)
8 하찮고 저렴한 모든 것을 진멸한 사울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을 칼로 진멸하고 왕을 사로잡았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가장 좋은 것들, 통통하고 좋은 모든 것은 살려두었고 하찮고 가치 없는 모든 것은 진멸했다. 사람들 중에 최고인 아각 왕도 살려두었다. 여기서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어디까지 동의하고 어디에 동의하지 않는지 볼 수 있다. 즉, 자신에게 유익한 대로 순종한 것이다. 자신에게 손해가 될 거 같으면 순종하지 않고 자신에게 손해가 되지 않으면 순종하는 철저히 자기식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모습이다. 우리는 어떠할까? 사울처럼 행동했을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배를 섬기는 것이고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삼상15:7-9)
9 여호와께 예배하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을 남긴 사울
사울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자신을 칭찬하며 말한다. "당신에게 복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준행하였나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불순종하고도 순종했다고 여길 수 있다. 이때 사무엘이 지적한다. "이 소리는 무슨 소리입니까? 분명 불순종의 소리가 들리는데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이때 사울은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최고의 것들을 남겼고 그 외의 것들은 진멸했다고 변명한다. 자신이 순종했다고 말하는 사울에게 우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여호와의 명령의 일부를 순종한 것은 순종이 아니다. 그저 그만큼만 동의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불순종한 것이다. 그 만큼 동의하지 않은 것이다. 결과는 불순종이다. 심지어 불순종한 이유가 '예배'라고 말한다. 여호와께 예배하기 위해서는 불순종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자에게 무엇을 말하겠는가?! 불순종한 이유가 예배라고, 하나님이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자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우린 어떠한가? 우리의 불순종을 마치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변명하지 않는가? 이건 자신이 하나님앞에 불법한 자로서 자격없는 사람임을 증거할 뿐이다.(삼상15:13-15)
10 대비되는 사울과 하나님의 마음
여호와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다. 왜냐하면 사울이 여호와의 명령을 온전히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사무엘은 밤새도록 슬퍼하며 부르짓어 기도했다. 그러나 사울은 그때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우린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름 부어 세우셨으나 그것을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자신 때문에 밤새 우는지도 모르고 자신의 성공을 자축하며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있을 수 있다. 얼마나 하나님과 자신의 생각이 멀리 떨어져 있는 지 얼마나 마음이 다른지 볼 수 있고, 안타까운 것은 이 사실을 자신은 전혀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과 얼마나 마음이 다른 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내가 그분의 명령들을 온전히 좇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분의 길에서 멀리 있는 것이다. 일부만 지키고 있어도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로 돌이킨 것이다. (삼상15:10-12)
11 여호와의 영원한 원수 아말렉
아말렉이 르비딤에서 이스라엘과 전쟁했다. 이때 모세는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여호와께 기도했으며 아론과 훌이 양 옆에서 붙들어 주었다. 기도에 힘입어 같은 시간에 여호수아는 아멜렉과 전쟁하여 승리하였다. 즉, 하나님께서 함께 싸워 주셨다. 이때 여호와께서 이것을 책에 기록하고 기억하되 외울 정도록 마음에 새기라고 하셨다. 여기서 유명한 그분의 이름 '여호와 닛시'라고 자신을 칭하시고 영원히 아말렉과 싸우리라고 맹세하셨다. 공의로운 여호와, 사랑이 많으신 여호와께서 왜 이렇게까지 분노하시고 저주로 맹세하셨을까? 우리는 그 때 상황을 알 지 못할 뿐 아니라 사람이므로 하나님을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이해가 안된다고 여호와를 나쁜 하나님, 잔인한 하나님으로 만든다면 사울이 한 것과 같은 죄를 짓는 것이다. 즉,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 안된다. 우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아말렉이 어떻게 했길래 공의로운 여호와께서 그리하실까? 도대체 어떠한 불의가 그들로 하여금 대대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일까? 이것은 문제를 하나님께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을 만났을 때 여전히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가 가져야할 마음이다. 문제는 언제나 사람에게 있지 하나님께 있지 않다!(출17:8-16)
12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하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사울이 기름부으심을 받고 세워지기 전에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교만해졌고 돈에 눈이 멀어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다. 명령을 준행하지 않는 것은 여호와께 악한 것이다. 기억할 것은 사울은 명령의 일부만 준행했다. 일부만 준행한 것은 불순종했다는 말과 같다.(삼상15:16-19)
13 청종하여 진멸했다고 말하는 사울
사울은 사무엘의 지적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자신은 여호와의 명령을 청종했고 아각을 끌고 왔으며 아말렉을 진멸했다는 것이다. 다만, 마땅히 멸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그중에 최고들을 남겨 예배하려고 쓰려고 했다고 말한다. 이런 변명을 들을 때 사무엘은 어떤 기분일까? 참 답답했을 거 같다. 사울이 말귀를 못알아듣는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불법을 행한다는 말도 안되는 변명을 하는 것이다. 이때 사울은 한가지는 알고있다. 마땅히 자신이 멸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찌 청종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실 원어에는 '실로'가 없다. 그저 사울이 자신은 청종했다. 다만 예외가 있을 뿐이고 그 예외는 예배를 위한 거라고 변명을 할 뿐이다. 왜 우린 사울의 말에 답답함을 느끼는가? 그 이유는 사울이 자신의 불순종의 이유를 여호와께 두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진멸하라고 명하셨지만 여호와를 예배하기 위해 진멸하지 않았다?' 스스로 가증함을 보여주는 대답이거나 여호와의 명령을 멸시하는 대답이다(삼상15:20-21).
14 점치는 믿음을 가진 사울
사울이 전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자 사무엘은 사울의 죄를 지적한다. (당시 제사로 예배를 드렸으므로 예배로 말하겠다.) "당신은 여호와께서 불순종하는 자의 예배를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까? 순종하는 자의 예배를 받으심을 알지 못했습니까? 예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번제가 그리도 급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쟁에 승리하고 잘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불순종하면서도 잘되기 위해 드리는 예배은 점치는 죄와 같습니다. 예배가 우리를 복주는 것이 아니라 순종이 우리를 복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순종하지 않으면서 복받으려고 하는 자들은 자신의 운수 대통을 바라기만 하는 점치는 자들과 같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완고하여(고집이 세고 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죄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즉, 사울은 우상 숭배하며 점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명령에 적당히 순종하면서 좋은 예언을 듣기 원하는 예배자라면 점치며 우상숭배 죄를 범하는 사울과 같다. (삼상15:22,23)
15 사울을 버리셨는가?
사울이 말씀을 거역하고 완고하여 여호와께서 사울을 버리셨을까? 사울을 버리셔서 사무엘은 왕과 함께 예배(제사)드리는 것을 거절했을까? 우리가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는가?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여기서 '버렸다'고 번역된 히브리어의 뜻은 '업신여기다, 멸시하다, 경멸하다, 비난하다, 거절하다' 등이다. 사울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경멸하고 비난하고 거절했다. 여호와를 멸시한 것이 아니라 분명 말씀을 멸시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사울을 거절하거나 멸시한 것이 아니다. 사울이 불순종으로 감당하고 있는 사역에서 하차시키신 것이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종으로 쓰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위가 다른 자에게 간 것이지 사울 자체를 거절하거나 버린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라도 회개하고 죽지 않기를 원하신다. 사무엘이 말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렸다는 말도,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촛대를 옮기실 수 있다. 사명을 감당하지 못해 여러 사람을 죄짓게 하고 힘들게 하기 때문에 직책을 더 나은 다른 사람에게 주실 수 있다. 이게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한 길이다. 그래야 많은 사람을 죄짓게 만드는 큰 죄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 그러니 촛대를 옮기시는 것 조차 얼마나 큰 은혜이고 사랑인가? 그러나 우리를 끝까지 버리시는 분은 아니다. 잘못된 번역과 해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버려진 것이 아닌지 두려워하게 했는가? 그러나 말씀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다. 혹시 우리의 직위가 해재되었을 지라도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이킬 수 있는 소망이 언제나 있다.(삼상15:23,26)
16 백성을 핑계 하는 사울
사울은 그제서야 자신이 범죄했음을 시인하는 줄 알았는데 또 다시 백성에게 탓을 돌리고 있다. 백성들이 두려워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왕이 되어서도 백성이 두려워 불순종할 수 밖에 없다면 그럼 누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킬 수 있겠는가! 인간은 어쩔 수 없다. 백성일때는 왕이 두렵고 왕일 때는 백성이 두렵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사무엘은 사울과 함께 제사(예배)를 드리지 않고 떠나려고 했다. 그때 사울은 사무엘의 옷이 찟어질 정도로 붙잡는 무례함을 범했다. 이로인해 사울의 나라는 더 나은 이웃에게 바로 그날 주어졌다. (삼상15:24-28)
17 영광을 구하는 사울
함께 예배도 드리지 않겠다고 말하고 왕위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재앙의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에게 구한 것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높여 영광스럽게 대우해달라고 것이었다. 여호와께 함께 경배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달라고 청하였다. 이것이 진정 자신의 죄를 뉘우친 사람의 모습인가? 사울은 끝까지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만 신경쓰고 있다. 사울의 됨됨이가 보인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철저히 사람의 종이다.(삼상15:30,31)
18 여호와께서 왜 후회하셨는가?
발람은 이스라엘을 축복하며 이렇게 선포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셔서 후회하지 않으신다고(민23:18,19), 그리고 사무엘도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변개함이없으시다고 말했다. (여기서 '변개하다'의 뜻은 '한숨쉬다, 후회하다'이다.) 분명 후회하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왜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신걸까? 왜 두 말씀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까?(삼상15:29,35)
19 여호와께서 사람 지으심을 후회하셨다.
사람이 악한 것만을 계획하는 것을 보고 사람 지으심을 한탄(후회)하고 슬퍼하셨다. (여기서 '한탄하다'는 앞에서 나온 '후회하다'와 같은 단어이다.) 그래서 온 세상에 홍수 심판을 행하셨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노아를 창조하신 것은 후회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바로 후회를 하게 만든 것이 인간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후회하게 하는 분이 아니시고 완전하신 분이다. 다만 인간이 후회스럽게 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후회가 없으시고 변개하지도 않으시고 언제나 완전하시다. 그러나 사람의 어떠함으로 인해 그분을 후회하게 할 뿐이다. 사람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후회하지 않으시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창6:5-8)
20 스스로 의롭다 여기지 말라
사무엘이 아각왕을 죽이며 이런 말을 한다 "너의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너의 어미도 자신이 없으리라" 이것을 통해 많은 아이들을 아말렉이 죽였음을 또한 볼 수 있고 또한 남녀노소, 짐승들까지 모두 죽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이유없이... 그래서 공의이신 여호와께서 억울한 피를 값기 원해셨을 것이고 그렇게 해야 땅이 피에 대한 원한에서 위로를 얻고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피는 피로만 갚을 수 있다. 여호와께서 땅에 매인 것을 풀기 원하시고 땅의 회복을 계획했을 때 그 계획을 사울이 망쳤다. 바로 사울이 스스로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하나님은 불의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삼상15:33). 우리는 사람인지라 하나님을 헤아릴 수 없다. 우린 하나님을 판단할 권한도 자격도 없다. 다만 인간의 본본이자 의무는 오직 그분의 명령을 행하는 데 있다.(전12:13)
21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중요치 않았다. 그에게는 사람들이 알아주는 거였고 높임을 받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인정을 원했다. 예슈아께서 이런 자들에게 말한다. "그런 너희들이 어떻게 나를 믿겠느냐? 믿는게 가능하겠느냐?"(요5:44)
이 말씀처럼 수많은 바리새인들이 예슈아를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했다. 즉, 예슈아를 믿노라고 시인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출교를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들도 사람을 두려워했다. 이런 그들에게 다시 예슈아께서 물으신다. "그러면서 어찌 나를 믿는다고 하겠느냐?" (요12:42,43)
지금은 예슈아께서 우리에게 물으신다.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토라가 옳다고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한다면 어찌 여호와를 믿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교단에서 나가라고 할까봐 두려운가? 사람들이 욕할까봐 두려운가? 이단이니 뭐니 손가락질 할까봐 여호와의 말씀을 시인하지 못하겠는가? 사람의 영광을 구하면서 어찌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건 불가능하며 사울의 가증한 믿음일 뿐이다. 사람의 영광을 구하면서 자신이 잘되기를 바라던 믿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배만 위하던 점치는 우상숭배의 믿음에서 회개하고 오직 여호와의 영광을 구하던 예슈아의 믿음으로 돌이켜야 할 것이다.
샤밧 예배: 토요일 10시 30분
헌금 계좌: 농협 301 0293 8190 01 레올람토라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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