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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신장군 영결식 사진과 '백골병단'의 비화
참고한 글과 사진. 감사
1. 강찬호 기자 stoncold@joongang.co.kr
2. 임영식기자 조사내용
3. 육군 브로그 아미노리 참조
4. 캐나다 서부재향군인회 카페
구성 / 제작 : 양규봉
1. 1951년 '백골병단 사령관 시절의 비화
2013. 11. 30일 오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제2 병사묘역.
지난달 25일 별세하면서 ‘장성묘역 대신 병사묘역에 묻히기 원한다’는 유언을 남긴 베트남전의
영웅 고(故) 채명신 장군의 삼우제가 치러졌다.
부인 문정인 여사와 아들·딸을 비롯한 유족들, 베트남전 참전 노병들이 추모 예배를 하며 고인을
기렸다.
이 자리에 4일장으로 치러진 채 장군의 장례 기간 내내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았던 채 장군
의 동생 채모(76)씨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흘간 밤샘하며 쌓인 피로를 걱정해 “삼우제는 직계가족만으로 치를
테니 나오지 말라”는 문정인 여사의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생 채씨는 채 장군이 60년 넘게 숨겨온 또 다른 미담의 주인공이다.
채씨는 채 장군이 1951년 초 강원도에서 생포한 조선노동당 제2 비서 겸 북한군 대남유격부대 총사
령관(중장) 길원팔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녔던 전쟁고아였다.
당시 육군 중령이던 채 장군은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이끌며 강원도 내에서 암약하던 북한군 색
출작전을 펼쳤다.
채 장군에게 생포된 길원팔은 채 장군의 전향 권유를 거부하고 채 장군이 준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러면서 “전쟁 중 부모 잃은 소년을 아들처럼 키워왔다. 저기 밖에 있
으니 그 소년을 남조선에 데려가 공부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적장(敵將)이지만 길원팔의 인간됨에 끌린 채 장군은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그 소년을 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켰다.
이름도 새로 지어주고 총각 처지에 그를 손수 돌봤다.
소년은 채 장군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대에 들어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
은 뒤 서울 유명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채 교수는 10여 년 전 은퇴했다.
두 사람은 채 장군이 숨질 때까지 우애 깊은 형제로 지내왔다고 한다.
채 장군의 자녀들은 그를 삼촌으로, 채 교수의 자녀들은 채 장군을 큰아버지라고 부른다.
문정인 여사는 지난달 29일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중앙SUNDAY 기자와 만나
“채 장군이 길원팔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채 교수를 동생으로 맞은 것”
이라며 채 장군이 생전에 길원팔 칭찬을 많이 했다고 한다.
적장이긴 하지만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문 여사는 “채 장군이 채 교수를 (아들이 아닌) 동생으로 입적한 건
채 장군의 나이(당시 25세)가 젊었고, 채 교수와의 나이 차도 11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이어 “(채 교수가) 형님이 별세하신 데 대해 크게 슬퍼했다.
나흘 내내 빈소를 지켰다”고 말했다.
채 장군은 총각 시절 본인이 손수 소년을 돌보다 그가 고교생이 됐을 무렵 문 여사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주변 사람에게 소년을 맡기고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서울대에 진학하도록 도왔
다고 한다.
채 장군은 북한군 고위 간부가 데리고 있던 고아 소년을 입적시킨 사실이 문제가 돼,
군 생활이나 진급에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채 장군에겐 친동생 명세씨가 있었다.
하지만 51년 채 장군이 연대장으로 복무하던 5사단의 다른 연대에 소대장으로 배속돼 북한군과 교
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이에 따라 채 교수는 형제자매가 없던 채 장군에게 유일한 동생이 됐다.
채 장군 본인도 지난 5월초 고인의 마지막 언론 인터뷰가 된 중앙SUNDAY의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
다’
대담 당시 비보도를 전제로 “길원팔이 자결하면서 데리고 있던 10대 남녀 아
이를 돌봐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여자아이는 전쟁통에 숨졌으나 남자아이는 아들처럼 키웠다.
사랑으로 키웠다고, 대학 교수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채 장군은 당시 “그(채 교수)의 인생이 중요하니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문 여사도 29일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절대 주변에 알리지 않고
지내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라며 기사화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본지는 적장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닌 소년을 동생으로 입적시켜 대한민국 엘리트로 키워낸
채 장군의 선행이 이념 갈등 해소와 남북 화해의 귀감이 될 것으로 판단해 기사화를 결정했다.
채명신 장군이 김일성의 오른팔로 불렸던 북한군 간부 길원팔이 맡긴 소년을 동생으로 삼은 건
채 장군과 길원팔의 짧고도 극적인 만남 때문이었다.
이사건을 좀더 구체화 한다.
51년 3월 25세 때 북한군 후방에 침투하는 한국군 최초의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지휘하던
채 장군(당시 중령)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의 군량밭이란 마을을 급습했다.
'인민군 거물 길원팔이 숨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직후였다.
채 장군은 그곳을 지키던 북한군들에게 평안도 말씨로 “중앙당에서 나왔다.
조사할 게 있으니 협조해달라”고 말해 안심시킨 뒤 그들을 전원 사살했다.
이어 세포위원장 집에 숨어있던 길원팔을 붙잡았다.
그에게선 김일성 직인이 찍힌 작전훈령과 전선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 등 특급 정보가 쏟
아져 나왔다.
채 장군은 방에서 길원팔과 단둘이 마주보고 심문에 들어갔다.
채 장군의 질문에 침묵을 지키던 길원팔은 “네 놈은 누구냐”고 되물
었다.
“대한민국 국군 유격대 사령관 채명신”이라고 답하자 “그 썩어빠진 이승만 괴뢰도당 중 이곳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
반란군 아니냐”고 쏘아붙였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길원팔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불안한 기색 없이 침착
하고 당당했다.
그는 확실히 거물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채 장군은 “당신 같은 사람은 나와 함께 남쪽으로 가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
”이라며 전향을 권유했다.
그러자 길원팔은 “썩어빠진 땅에 왜 가느냐”며 일축했다.
이어 “부탁이 있다.? 김일성 동지에게 선물받은 내 총으로 죽고 싶다”
고 말했다.
이어 소년(채 교수)을 거둬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채 장군은 길원팔의 총에 실탄을 한 발 넣어 건네주고 몸을 돌
려 방을 나왔다.
잠시 후 총소리가 났고 길원팔은 책상에 머리를 숙인 채 숨졌다.
훗날 「"혹시라도 길원팔이 뒷통수를 쏠 것이란 걱정은 안 들었나”」는 주변의 질문에
채 장군은 「"늘 하나님이 방패가 되는 걸 믿었기에 두려움이 없었다”」
고 답했다.
채 장군은 양지바른 곳에 길원팔을 묻고 font color=red>‘길원팔지묘(吉元八之墓)’란 묘
비를 세운 뒤 부하들과 함께 경례했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적장이었지만 그는 충분히 경례를 받을 만한 장군
이었다”」고 적었다.
2. 서울아산병원 고 채명신장군 영안실
월남전 전사자 사병들의 비를 보
며 눈물을 흘리는 장군
채장군의 보좌관 정재성씨는 "장군님은 평소
전우들 곁에 묻히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월남전은 장교와 사병들이 5000여명 넘게 전사했다. 이를 항상 마음아파하시고 국립현충원에
가실때 마다 ["나는 목숨을 부지했는데 이친구들은 여기에 묻혀있다.
.... 내가 죽으면 여기 전우들과 같이 묻혀야 되겠다. 이게 늘 내가 갖인 원이다."]고
말씀하셨다.
영안실을 찾아 문상하는 김관진
국방장관
(2013. 11. 27. 오후) 김 국방장관은 "채명신 장군은 군의 정신적 지주이다" 란 말을 남기고,
["국방부에서는 규정도 없고 전례도 없다는 이유로 장군의 뜻을 받아드리지 않았으나 많은 고심끝
에 청와대가 나서서 장군의 뜻을 존중하여 사병묘역 안장을 결정했다"] 한다.
유가족측은 장군의 뜻이 묵살되는 것으로 판단하여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생각했던 차였다.
국립서울현충원은 국방부 소관이고 국립대전현충원은 보훈처 소관이라 한다.
최윤희 합참의장과 커티스 스캐퍼
로티 한미연합사령관
월남 참전 사령관의 지침
* 백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일이 있더라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하라
* 6.25때 우리가 겪은 설움과아픔을 기억하며 월남 국민을 대하라
* 아무리 하찮은 일일망정 그들의 문화는 존중되어야 한다
* 전쟁에서 최후 승리는 민심을 얻는 것이다.
최윤희 합참의장과 커티스 스캐퍼로티 한미연합
사령관 서울아산병원 빈소 찾아 조문 /조선닷컴
3. 국립현충원(현충관) 고 채명신장군 연결식(28일)
故 [채명신] 장군의 장례식은 2013. 11. 28일 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육군참모총장 주관 아래 [육군장(陸軍葬)]으로 치르기로 하였다.
장례식단
장의 위원장 / 권오성(제 44대 육군참모총장)
박승훈 / 국가보훈처장, 박셰환 / 재향군인회 회장
장군의 영정과 훈장
양 력
1926. 11. 27생 ~ 2013. 11. 25졸
황해남도 곡산군 출생. / 평양사범학교 졸업.
1948년. 육군사관학교 5기 졸업(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개칭)
1951년. 백골병단(白骨兵團) 초대 지휘관
인민군으로 위장/ 적 후방침투/ 많은 전공세움
강원도 인제전투에서 인민군 69여단 및 지휘부 전원섬멸
1954년 제3군단 작전참모 육본작전기획과장
1955년 10월. 논산제2훈련소 참모장
1958년 8월준장승진. 제1군 작전참모
~ 1961년 제 38사단장, 제 5사단장 역임
1961년 5. 16군사정변에 혁명 5인 위원회 멤버
국기에 대한 경례
오전 10시에 시작된 영결식에는 장례위원장인 권오성 육군참모총장과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 등 6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인에 대한 묵념, 약력보고, 조사 및 추념사, 헌화, 조가, 조총, 운구 등의 순으로 엄숙하
게 진행됐다.
일동 묵렴
1961년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
1965년 8월 초대 주월한국군사령부 사령관 겸 맹호부대장
1969년 5월 육군 제2군사령부 사령관
1972년 유신헌법 강한 반대로 육군대장 진급누락으로 6월 전역
1972년~1977년 주 스웨덴, 그리스, 브라질. 대한민국 특명대사
고인에 올리는 유가족의 묵렴
권오성 장례 위원장의 조사
현충원에서 육군장으로 거행하는
추념사
유가족 대표 헌화
조가를 부르고 있는 패티 김씨
베트남전 당시 위문 공연에서 고인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진 원로 가수 패티 김씨는
'내 영혼이 은총 입어'를 부르며 고인의 넋을 기렸다.
현충관 앞 실외에서 조총발사 모
습
고 채명신 장군의 관을 현충관 실
내에서 밖으로 운구한다.
영결식에 참석한 조문객 모두가 일어서서 운
구되는
장군의 관을 바라보며 슬퍼하거나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현충관 밖으로 운구되는 고인
장군이 소속한 교회(순복음교회)
목사님이 앞에섰다.
한줌의 재로 변하여 사병묘지에 안장하게 된
다.
국립서울 현충원을 벗어는 운구행
열
운구행열은 화장장으로 갔다가 다시 이곳 사
병 묘지에 안장된다.
4. 국립서울현충원 서2 사병묘지의 안장식(28일)
장의 위원장이 '육군참모총장' 유
가족에 안내
국립서울현충원 제2사병묘역
故 채명신 장군께서 전우들과 함께 안장될 국립서울현충원 제2사병묘역, 고인의 묘번은 34489번이
다.
고 채명식 장군의 유골함이 안장
장소로 운반
유골함을 넣고 미망인의 첫삽으로
안치한다.
유골함 안치가 끝난 사병의 초종
소리
석양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선 시각 유골함 안
치가 끝난 사병의 조총이 울렸다.
이제 대한민국 군인들의 정신적 기둥이신 임은 가고 먼 훗날 6.25와 월남전의 영웅이신 당신의 비
화들은 영원히 남겠지요.
슬픔에 잠긴 유가족
'불멸의 군인' '영원한 지휘관'이
시여
'불멸의 군인' '영원한 지휘관'으로 불리며 한국군의 위상을 세계에 알렸던 고인의 넋을 기리는 전
우들의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고 그들은 사령관님,
사단장님등 고인을 눈물로 부르며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부하 사랑하기를 당신의 가족보다도 더 사랑하여 부하들이 목숨 걸고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신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안장식이 끝난뒤 많은 부하들은
거수경례로 아쉬워한다.
1949년 육사 5기로 졸업하고, 이듬해 6·25 전쟁에 소위로 참전한 故 채명신 장군은 1965년 주월사
령관 겸 맹호부대장에 임명돼 1969년까지
4년 가까이 베트남전에 참전 한국군을 지휘했다.
월남전 당시 故 채명신 장군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고 지시하는 등
덕장으로 군 안팎의 존경을 받아왔다.
전역후에는 스웨덴, 그리스, 브라질특명대사를 역임하여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대한 태권도협회
초대회장과 월남전참전전우회 명예회장등을 엮임했으며
유족으로는 부인 문정인씨와 1남2녀가 있다.
이렇게 故 채명신 장군은 평소 고인의 유언에 따라 월남전 전사자들과 함께 한 줌의 재가 되어 장
군묘역의 1/8 면적인 3.3㎡의 사병묘역(서울현충원 서쪽 2번)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전우들 곁에 영면하여 저승에서도 영원한 사령관으로 남을 것다.
끝까지 읽어주신 님께 감사드림니다.
작성자 / 學軒 양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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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음속에 큰 감동을 남게 합니다. 먼저 간 전우들의 묘비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군의 모습엔 더욱 목이 메이며 큰 사람의 덕망있는 마음을 보게 됩니다. 부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시는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