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는 말: 우리 이조경 회장님과 김정수 전 수석 부회장님은 모든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갖추신 분들인데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성과 미모를 겸비했고 가까이 가면 더욱 더 겸손함이 묻어나고 등등
그런데 이 분들이 이상스런 단점도 똑같답니다. 그 중 하나가 이 카페에 들어오는 길을 잘 못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댓글을 못 단다고 안타까워 하시고 카페에 중요한 사항이 있으면 제가 별도로 알려드려야
할 정도랍니다. 다음 포럼 주제 발표자로 김정수 선생님이 지정되었는데 발표도 두렵지만
자료를 올릴 줄 모른다고 지금부터 걱정이셨습니다. 하여 제가 원고와 사진을 메일로 받아
대신 올려드리기로 했습니다.
1. 아바나의 불빛
김 정 수
지난해 팔월 첫 수필집을 냈다. 처음엔 그동안 내가 쓴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는 기쁨과 뿌듯함이 적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헛헛함이 밀려왔다. 정작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쓰지 못했고 그나마 실린 글들도 내 스스로 치부를 드러낸 꼴이 되고만 것 같아 부끄러웠다. 잠시 모든 것 다 접어두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떠오른 게 쿠바였다.
헤밍웨이를 만나고 싶었다. 그가 <노인과 바다>를 집필했다는 핀카 비지아 (전망 좋은 농장)와 아바나 해변을 둘러보고 싶었다. 그의 작품은 영화로도 여러 편이 제작되어 내겐 어떤 작가보다 친숙하다. 그는 <노인과 바다>에서 희망을 얘기했다. 주인공인 노인은 혼자서 작은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가 오랜만에 엄청나게 큰 청새치를 잡았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상어 떼가 몰려들어 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살을 다 뜯기고 머리와 꼬리와 앙상한 뼈만 싣고 돌아와야 했다. 청새치를 지키기 위해 상어 떼와 며칠 동안 싸우며 자신의 집이 있는 곳, 아바나의 불빛이 보이기를 고대하며 고통을 견뎌낸 노인은 기어이 아바나 항구로 돌아온다. 절망스런 상황에 맞닥뜨렸음에 아바나의 불빛이라는 상징적 희망을 응시했던 것은 헤밍웨이 자신이었을 것이다. 기실 나는 그 아바나의 불빛이 그리웠다.
아바나에 도착해 곧바로 아바나 동쪽의 코히마르 해변으로 갔다. 헤밍웨이의 마지막 작품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된 작은 어촌이다. 마을에 들어서자 네모반듯한 이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그곳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카페 라테라싸였다.
아래층에 있는 카페 초입의 벽에는 헤밍웨이의 초상화와 <노인과 바다>의 노인의 실제 주인공인 그레고리오 후엔떼스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탁 트인 카페 창으로 카리브 해가 시원스레 들어왔다.
카페 한 쪽 코너의 테이블! 초록색 식탁보 위에 세팅까지 해놓았고 옆에는 자그마한 헤밍웨이의 흉상이 놓여있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 자리가 헤밍웨이가 즐겨 앉았던 자리였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젠 헤밍웨이의 자리로 기리기 위해 그 테이블 전체를 붉은 끈으로 둘러쳐놓았다.
헤밍웨이는 자기의 농장 핀카 비지아에서 멀지않은 코히마르 해변으로 낚시를 다니곤 했다. 이곳을 오가며 마을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며 격의 없이 어울렸다고 한다. 쿠바로 가기 전에 다소 집필에 태만했던 그는 아바나의 소박한 생활을 통해 소설의 다른 차원을 열었다. 이 마을의 한 노인에 대한 소문을 들은 헤밍웨이는 그 노인을 찾아가 얘기를 들으면서 <노인과 바다>를 썼다. 작은 해변마을 이름 없는 한 노인의 경험담이 그에게 영감을 불러 넣은 것이다. 결국 <노인과 바다>로 그는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세기의 대문호 반열에 올랐다. 바닷가의 보잘 것 없는 늙은 어부에 지나지 않았던 그레고리오 후엔떼스 또한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104살로 숨을 거둘 때까지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고 한다.
카페에서 멀지 않은 해변에는 카페에 있는 흉상보다 훨씬 큰 흉상이 세워져 있었다. ‘어니스트헤밍웨이 1898-1961년’이라고 새겨진 석대 위의 흉상은 드넓은 카리브해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더없이 만족한 표정이었다. 사진으로든 흉상으로든 내가 본 그의 모습 중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이었다.
헤밍웨이는 마흔 한 살에 쿠바로 들어와 칠년을 암보스 문도스 호텔에서 살았다. 그 뒤 아바나의 외곽 코히마르 해변의 저택 (핀카 비지아)을 일 년간 임대해 살다가 다음해에 아예 사버렸다. 그 집에서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세 번째 부인 네 번째 부인과 이십년을 살며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등 많은 작품을 썼다. 헤밍웨이와 마지막까지 함께 살았던 네 번째 부인은 헤밍웨이 사망 후에 그 집을 쿠바정부에 기부했고, 지금은 헤밍웨이박물관이 되었다.
저택에 들어서면 하얀 별채가 있다. 가족들이나 손님들이 묵고간 곳이라고 한다. 의사였던 헤밍웨이의 아버지에겐 고등학교 출신인 아들이 자랑거리가 되지 못했다. 자기를 부끄럽게 여긴 것에 불만이 쌓였던 헤밍웨이는 아버지가 자신의 집에 머물 때면 본채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손님용 침실이 없기도 했지만 그의 친구들이 어쩌다 본채에서 지낸 것과 비교하면 아버지 대접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헤밍웨이의 저택 들머리 외벽에는 종이 매달려 있다. 기다리던 손님이나 친구가 찾아오면 그가 직접 나가 반기며 종을 쳤다고 한다. 집안에 바를 만들어 놓을 정도로 술을 좋아한 그는 작가와 지식인들과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토론하며 술을 즐겼다.
저택의 문은 잠겨 있었다. 집주인이 외출하느라 잠시 문을 잠가놓은 것처럼. 지금도 그가 살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집을 한 바퀴 돌아가며 유리창을 통해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집안의 벽마다에 놓인 책장엔 빈틈없이 책이 꽂혀있었고 심지어 화장실에도 책이 있었다. 눈에 띈 것은 사슴과 들소 같은 뿔 달린 동물들의 머리를 박제해 벽마다 두세 개씩 걸어 놓았는데 모두 그가 사냥해서 잡은 것들이라고 한다.
본채에서 아래로 몇 걸음 내려가니 삼층 높이의 부속건물이 있었다. 삼층 방에는 커다란 천체망원경이 세워져있었다. 낚시를 좋아하던 그가 낚시를 떠나기 전날 밤하늘을 관측하기 위한 망원경이라고 한다. 삼층 건물을 굳이 따로 짓고 망원경까지 설치한 헤밍웨이의 낚시에 대한 유별난 열정을 느끼게 했다. 삼층 건물 옆에는 수영장이 있고 수영장 한켠에는 헤밍웨이가 바다낚시를 다니던 요트가 놓여있다. 헤밍웨이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 <노인과 바다>의 실제 주인공이고 친구였으며, 그 요트의 선장이기도 했던 그레고리오 후엔떼스에게 그 요트를 넘겨주었다. 그레고리오 후엔떼스가 그 요트를 쿠바정부에 기부해 헤밍웨이박물관에 전시하게 된 것이다.
헤밍웨이의 발자취를 따라 이곳저곳을 다녀보니 곳곳마다 헤밍웨이를 찾아온 사람들로 넘쳐났다. 헤밍웨이의 쿠바인가, 쿠바의 헤밍웨인가 할 정도로 쿠바에서의 헤밍웨이의 존재는 대단했다. 헤밍웨이가 살았거나 드나들었던 곳에는 어김없이 그의 사진이 많다 싶을 만치 걸려있었다. 저명한 작가였기에 당연히 조명을 받았겠지만 그가 사진 찍히기를 좋아하는 탤런트 적 기질이 있었다는 말이 과히 헛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사진 속의 헤밍웨이는 지적이고 냉철한 작가적 이미지가 아니었다. 위풍당당한 체격에 낚시와 사냥을 즐겼던 만큼 야성미가 흐르는 사냥꾼이나 어부에 가까워보였다. 젊은 시절 열정적으로 전장에도 나가고 정치에도 참여했었던 것도 그의 격렬한 기질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랬던 그가 왜 이렇게 쓸쓸하기까지 한 쿠바의 작은 어촌으로 스며들었을까. 자유의 갈구였을까. 실제로 그는 이곳에서 글을 쓰며, 낚시하고 사냥하고 술을 마시고 시가를 피우고 또한 여자를 사랑했다. 지극히 원시적이고 자연적인 삶이라 할 것이다.
쿠바에서의 말년의 생활이 그의 생애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더구나 그곳에서 쓴 작품으로 퓰리처상과 노벨상까지 받았으니. 노벨상 수상식장에서 ‘최초의 입양쿠바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쿠바를 사랑했던 그가 쿠바혁명 후 미국인들을 내쫓지만 않았더라면 쿠바를 떠났을 리 만무하다.
헤밍웨이가 최고의 삶으로 추구해온 유일한 희망이 되어준 쿠바. 그의 유토피아가 실현된 낙원에서 더 이상 살수 없게 된 그는 결국 미국으로 돌아온 이듬해에 엽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그의 소설속의 주인공 산티아고처럼 망망대해에서 거대한 물고기를 잡았음에도 살은 모두 상어 떼에게 빼앗기고 뼈대만 들고 돌아와야 했던 노인의 허망함이 헤밍웨이의 처지와 오버랩 된다. <노인과 바다>에서 “희망 없이 산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심지어 그것은 죄악이다.” 라며 굽히지 않는 인내와 용기와 희망을 심어준 그가 그런 끔찍한 종말을 맞이해야 했던 것은 왜일까. 아마도 쿠바가 그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쿠바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과연 또 어떤 작품을 남겼을까 또 그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헤밍웨이가 미국으로 돌아간 지 56년이 지난 지금, 다시 많은 미국관광객들이 미국의 대문호 헤밍웨이를 그리워하며 쿠바로 찾아들고 있었다. 죽지 않은 헤밍웨이, 야성적 기질로 펄펄 살아있던 헤밍웨이를 만나러 오는 것이다. 삶이 삶을 부르기에 이끌려온 사람들일 것이다. 작가는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의 불빛을 응시하는 자가 작가라는 것을 곰곰 되새겼다.
그런데 나는 왜 이곳에 마치 이끌리듯 온 것인가?
2. 쿠바에서
어느새 또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났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원했으나 미뤘던 일, 지금 바로 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급해졌다. 쿠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래어 가보고 싶었지만 너무 멀어 엄두도 못 내던 그곳을 먼저 가기로 했다. 사실 나는 쿠바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떠나기 전에 쿠바에 대해 알고 가야할 것 같아 서점에 갔으나 막상 문 앞에 서니 뭘 꼭 알고 가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어 발길을 돌렸다. 그냥 가는 게 더 새로울 것 같아서였다.
서울에서 아바나까지 오랜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가서 곧바로 여행을 하기에는 내 체력으로는 무리다. 뉴욕으로 가 그곳에서 며칠 쉬었다 아바나로 가기로 했다. 뉴욕에서 쿠바로 떠나는 날 설레는 마음으로 공항으로 갔다. 쿠바비자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아 한참을 서서 기다렸다. 쿠바비자는 탑승수속을 하며 신청한다. 드디어 내 차례다. 공항직원이 여권을 살펴본 후 쿠바입국이유를 묻기에 주저 없이 ‘여행’이라고 했다. 그는 냉랭한 얼굴로 여행목적만으로는 비자발급이 안된다며 여권을 되돌려줬다. 뜻밖의 상황에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나왔지만 얼마 안가 이해가 되었다. 그곳은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다. 주위사람들이 왜 혼자서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를 가려하느냐며 염려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 같아 갑자기 겁이 났다. 쿠바여행을 알선해준 뉴욕여행사에 그 사실을 알리고 여행도 포기하고 싶다고 했다. 여행사직원은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줄 테니 그걸 공항직원에게 보여주면 통과할 수 있다며 걱정 말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안해서 가야할지 말아야할지 혼란스러웠으나 그곳을 가기 위해 먼 곳까지 가서 그냥 돌아올 수는 없었다. 여행사직원의 말처럼 문자를 본 공항직원은 말없이 비자를 내줬다.
뉴욕에서 네 시간 만에 아바나에 도착했다. 불과 네 시간을 날아간 그곳은 비행기를 타고 간 것이 아니라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50년대 시절로 되돌아 간 것 같았다. 시가지에는 쿠바혁명 이후 미국인들이 버리고 간 오래된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폐차직전의 자동차도 많았지만, 빨강 파랑 노랑 등의 화려하고 우아한 자동차들은 세계최고의 정비기술이 될 정도로 닦고 기름 치고 고치고 또 고쳐서 새 차 못지않게 반짝거렸다. 그들은 그 자동차들을 보고 50년대의 향수를 느끼며 신기해하는 외국인관광객들 상대로 ‘올드 카’ 관광 상품을 개발해 많은 수입을 얻고 있었다.
향수를 불러일으킨 것은 올드 카뿐이 아니었다. 저 깊숙한 곳에서 잠자고 있는 내 어릴 적 기억의 아련한 풍경들과 영화 속에서 볼 수 있었던 그 옛날의 정겨운 풍경들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농부가 소를 몰고 밭을 갈고 있었으며 마차에 어린 아들을 태우고 하교시키는 아버지의 다정한 모습도 보였고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낡은 트럭을 타고 앉지도 못한 채 빼곡이 서서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 정경들은 오래전 고향을 떠올리게 해 동심으로 돌아가게 했다. 60여 년 전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봄날, 사업을 하는 고모부가 우리가족이 봄나들이 간다는 소식을 듣고 새로 산 커다란 트럭과 운전수를 보내주셨다. 우리들은 트럭이 달리며 뽀얗게 흙먼지를 일으켜도 아랑곳 않고 멍석을 깔은 트럭바닥에 앉아 손뼉치고 노래 부르며 수덕사로 놀러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역시 지나간 것은 낯설지 않아 정겹고 편안했다. 어느새 익숙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 나는, 아직도 컴퓨터나 핸드폰에 적응하지 못해 그런 기기들이 보편화 되지 않은 그곳이 불편하기보다는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다. 더구나 앞으로는 4차 산업혁명인 정보통신 융합으로 인공지능 로봇기술 생명공학 등이 중심이 되는 산업시대가 도래한다 하니 나 같은 구시대 사람은 상상조차 어려워 낙오되기 십상일 것이라는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사회주의국가를 생각할 때 사생활이 통제되고 억압된 국민들이 힘겹게 살아간다는 선입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쿠바는 음악과 춤과 술과 시가를 사랑하는 나라로, 그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자유로웠고 흥이 넘쳐보였고 당당했으며 조국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다만 그들의 평균 월급은 20달러 정도라고 한다. 전 국민에게 의료와 교육을 무상으로 혜택을 주다보니 그런 게 아닐까. 외국 업체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선망하고 의사와 교수의 보수가 운전수나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보다 낮다고 한다. 더 나은 대우를 원하는 그들이 다른 나라로 나가려해도 비행기 표 살 돈이 없어 나가지 못한다는 말도 들었다. 도심에서조차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도 50년대 이후 아직까지 복구되지 않은 건물들로 폐허와 같은 곳이 많았고 생필품이나 과일 과자 등을 파는 가게도 찾기 어려웠다.
어여쁘고 공손한 쿠바아가씨가이드 아이마라와 쿠바의 명소들을 둘러보았다. 그중에서 잊을 수 없는 곳은 바라데로의 카리브 해변이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온통 바다이며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서부터 바다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카리브해, 저 멀리 까마득한 곳에 보일 듯 말듯 아스라이 점이 된 배한척이 가물거렸다. 그 작은 배가 겨우 하늘과 바다를 구분해주었다. 차마 그곳을 떨치고 일어서지지 않아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일 때까지 바다만 바라보았다. 물론 노벨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최초의 쿠바입양인’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쿠바를 사랑했던 헤밍웨이의 발자취도 따라가 보았다.
아! 그리고 쿠바사람들이 연신 피워대는 - 헤밍웨이와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즐겨 피웠던 세계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시가농장에도 갔다. 시가의 종류는 길고 짧고 굵고 가는 모양으로 무려 스무 종류가 넘었다. 손으로 직접 마는 것을 보여준 시가장인은 그렇게 말아진 시가는 일정한 틀에 끼워 일주일을 숙성시킨 다음에야 피울 수 있다고 설명해줬다. 장인이 말아놓은 시가가 하도 구수해보여 여태껏 담배를 피워본 적 없는 나도 한 대 입에 물고 뻐끔~ 뻐끔~피워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내 대신, 애연가인 문우들이 영화 ‘황야의 무법자’에서 근사하게 시가를 물고 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피워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장인이 말아놓은 시가를 조금 사갖고 나왔다.
아쉬움이 남는 것은 쿠바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마을로 그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트리니나드를 가지 못한 것과 올드 카를 타지 못한 것이다. 여행사일정에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쿠바에서는 왠지 서두르며 다니고 싶지 않아 그리 되었다. 그보다 더 큰 아쉬움도 있다. 쿠바에 도착해서부터 쿠바를 떠날 때까지 하필 카스트로의 장례기간이었다. 물론 쿠바의 전설이었던 카스트로의 국장기간이라는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도 의미가 있긴 하다. 그러나 음주가무가 금지되어 쿠바문화의 진수라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에 가지 못했고 전통공연도 못 보았으며 럼주도 모히토도 맛 볼 수 없었으니 그 먼 곳까지 찾아간 이방인으로서는 여간 애석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나 아쉬움은 남게 마련이고 그 아쉬움은 또 다른 희망으로 새로운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언젠가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재즈공연을 보며 럼주와 모히토를 마셔보고 싶어 기어이 다시 쿠바로 떠날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첫댓글 김정수 선생님은 우리의 보배입니다. 헤밍웨이의 족적을 찾아 다닐 만큼 쿠바를 알고 헤밍웨이를 아시고 글도 잘 쓰시고...
사실 내 경우, 솔직히 헤밍웨이의 작품 중에서 다 읽은 것은 전무. 책 제목은 많이 알고 줄거리도 많이 알고 헤밍웨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지만...
헤밍웨이가 말년에 인터뷰한 책을 최근에 읽은 것으로 부끄러움이 조금 경감되려나...
마치 저도 쿠바를 함께여행한 느낌입니다
사진과 함께 읽으니까 내용이 쉽게
이해가 되어요. 헤밍웨이도 쿠바도 더욱
좋아하게 되었어요.
김정수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아바나. 잘 읽었습니다만, 김정수샘이 카페 못들오시는 컴맹이시라니 꼬리말도 안달고 싶음.ㅋㅋ
김정수선생님 덕분에 쿠바를 여행한듯 합니다. 훌륭한기행문 고맙습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장소인 쿠바의 해변 저도 가고 싶어요.
멋지세요^^~
저도 헤밍웨이가 머무르며 집필했던 미국 마이애미에 갔을때 감회가 새로웠는데...
선생님도 저와 같은 감정이었을까요?
헤밍웨이가 우리나라에 왔다가 돌아가는 비행기 트랩에 올라 손을 흔들면서 한 한마디~.
"묵이여 잘 있거라!"
강원도에 가서 메밀묵과 도토리 묵을 그렇게 맛있게 먹고 잊지 못한채 떠났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서 쓴 책이 바로 "묵이여 잘 있거라"
포럼 때 한마디 덧 붙여 주시길. 이거 웬만한 사람들은 모르는 극비 입니다. ㅎ.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