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 가요무대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어느 시대 어떤 배경으로 창작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한국 가요 중에서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곡이라 합니다. 이 곡은 정상의 가수 조용필 님의 첫번 째 히트곡으로도 유명하지요. 이 노래는 세계적인 명성의 폴모리아 악단이 연주곡으로 취입하기도 했고, 한국 가수는 물론 일본, 대만 가수들도 리메이크한 아시아의 명곡으로 평가받고 있지요. 국민가요로 불리는 이 노래가 히트하기까지는 파란만장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이 노래는 처음 발표한지 6년 만에 비로소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지요. 이 노래의 탄생부터 히트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기원은 가요 <돌아와요 충 무항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돌아와요 충무항에>는 1970년 발매된 가요였습니다. <돌아와요 충무항에>는 통영 출신의 작사가 분이 가사를 쓰고 직접 노래까지 불렀다고 합니다. 통영시는 과거 충무시로 불렸지요. 충무할매김밥으로 유명한 바로 그 충무이지요.
이 곡의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꽃피는 미륵산에 봄이 왔건만
님 떠난 충무항은 갈매기만 슬피우네
세병관 둥근 기둥 기대여 서서
목메어 불러 봐도 소식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충무항에 야속한 내 님아
2. 무학새 슬피 우는 한산도 달밤에
통통배 줄을 지어 웃음꽃에 잘도 가네
무정한 부산 배는 님 실어 가고
소리쳐 불러 봐도 간 곳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충무항에 야속한 내 님아
<돌아와요 충무항에> 속에 나오는 충무는 통영의 옛 지명이지요. 1955년 통영읍이 승격되어 충무시라고 호칭되기 시작했습니다. 충무시라는 지명은 40년간 사용되다가 1995년 지금의 통영시로 개칭이 됩니다.
<돌아와요 충무항에>는 떠난 연인이 다시 돌아오기를 갈구하는 내용이지요. 그러나 이 노래는 크게 빛을 보지 못합니다. 이후 이곡을 원래 만든 부산 출신의 작곡가 분이 1972년 직접 가사를 수정하고 제목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바꿉니다. 조용필 님은 통기타 반주에 맞춰 트로트 창법으로 이 곡을 취입합니다. 조용필 님은 1968년 미8군 무대에서 가수 생활을 시작했고, 이 곡을 취입할 무렵은 무명가수였지요.
개사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님 떠난 부산항 은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말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님아
2. 해저문 해운대에 달은 떴는데
백사장 해변가에 파도만 밀려오네
쌍고동 울어주는 연락선마다
소리쳐 불러봐도 말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부산항에 보고픈 내 님아
조용필 님의 1972년<돌아와요 부산항에>앨범
원곡 가사는 미륵산은 동백섬, 충무항은 부산항, 세병관은 오륙도, 한산도는 해운대로 바뀝니다. 지명도 충무에서 부산으로 교체됩니다. 충무를 노래한 가요가 부산을 노래한 가요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지요.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개사를 했건만 이 노래 역시 히트하지 못했지요.
그러던 중 3년 뒤 1975년 9월 추석 때 조총련 재일교포들이 30년 만에 모국을 방문합니다. 장충동 국립극장에서는 재일교포를 따뜻하게 맞이하는 서울시민 환영대회가 열리지요. 이후 재일교포는 그리운 고향을 방문하고 친지를 해후합니다. 가히 오늘날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방불케 했지요. 언론들은 대대적으로 재일교포의 고향 방문을 보도하여 전국민의 시선을 끌어 모았습니다.
이같은 시대 분위기를 감지한 것인지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1976년 봄 리메이크되어 새 음반에 수록됩니다. 이 때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부분적인 개사가 이루어집니다. 이 음반에는 타이틀 곡인 <너무 짧아요>를 비롯하여 다른 가수의 곡인 <긴머리 소녀> 등이 수록되지요. 이 무렵 조용필 님은 인기 가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앨범 곡수를 채우고자 다른 가수의 곡을 리바이벌하여 수록한 것이지요. 조용필 님은 1976년 초까지 부산 밤무대를 전전한 무명가수였습니다.
개사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2.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해매이던 긴긴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딪쳐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주로 2절이 많이 바뀌었지만 개사된 부분의 핵심은 <그리운 내 님아>가 <그리운 내 형제야>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형제는 재일교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이 됐습니다. 그 결과 재차 개사 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남녀간의 평범한 사랑 이야기가 민족의 상봉을 그리는 노래로 변신합니다. 통속적인 노래가 민족의 노래로 격상했다고 볼 수 있지요.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부산의 다방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다방에서 손님들이 박스에 있는 입담좋은 DJ에게 좋아하는 곡을 쪽지에 적어 신청하곤 했지요. 조용필 님은 타이틀 곡 <너무 짧아요>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신청이 자꾸 들어와 서둘러 연습에 들어갔다고 회고한 바 있지요. 몇 개월 뒤에 발매된 재판 음반은 100만장 이상이 판매되는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됩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히트를 친 것은 당연히 조용필 님의 뛰어난 가창력에 힘입은 것이 크다고 할 수 있지요. 한편으로는 재일교포의 모국 방문이라는 시대 분위기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측면도 무시할 수 없지요. 재일 교포는 일제 시기 징병, 징용으로 끌려갔었고, 해방 이후에는 귀국을 못하고 일본에 잔류했던 분들입니다. 재일 교포의 95%는 남한 출신이고, 70%는 경상도 출신이었습니다. 이후 재일 교포들은 재일거류민단(민단)과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으로 분열했고, 남북대결을 반영하듯 오랫동안 반목했지요.
그 무렵 남북한은 극심한 체제대결을 벌이던 중 1971년 남북적십자 회담, 1972년 남북공동성명으로 화해 무드에 들어가지요. 남한은 북한에 경제적 우위를 과시하고자 조총련 계열의 재일교포들의 귀국을 허가하지요. 그 결과 1975년 9월 추석 때 조총련 재일교포들이 30년 만에 모국을 방문합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무명 가수였던 조용필 님을 일약 인기 가수로 등극시켰지요. 재미있는 것은 조용필 님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지요. 조용필 님은 사실 1976년 발매 당시부터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다시는 부르지 않으려 했다고 회고합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곡임에는 분명합니다. 다른 가수들은 이 노래를 리바이벌 하고 싶어하는데 정작 노래를 부른 가수는 기피했다는게 흥미롭지요.
https://youtu.be/r3r7LU7Qmbo
조용필 님은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히트하고 인기가 급상승할 1977년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수년간 가요계를 떠납니다. 조용필 님은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는 등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유명 가수가 대거 연루된 사건이었지요. 사실 이 노래가 뜨지 않았더라면 무명 가수였던 조용필 님은 고초를 겪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지요. 이후 조용필 님은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의식적으로 부르지 않으려 했다고 합니다. 조용필 님은 은퇴 이후 전국 명산을 다니며 깊은 내공을 쌓습니다. 그리고 1980년 <창밖의 여자>의 폭발적인 인기를 기점으로 조용필 시대를 열어제치지요.
조용필 님은 지금도 매년 성대한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그 무대에서 화려한 히트곡들을 선사하지요. 가왕은 그 자리에서 영광과 시련을 동시에 안겨주었던 히트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들려주고 있는지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