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신명기 33장 26-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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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33장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는 말씀입니다. 1절에,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라는 표현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마치고 후손들이 그 사람을 기억하기를, “그 사람은 진짜로 하나님이 귀하게 쓰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사람이었어!”라고 평가해 준다면 그보다 더 후한 평가는 없을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120세를 살다간 모세의 인생은 정확하게 3등분으로 나뉩니다. 태어나서 40년 동안은 애굽의 왕자의 신분으로 지냈고, 이후 40년은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지냈고, 마지막 40년은 이스라엘을 이끄는 지도자로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모세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지낼 정도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이스라엘 각 지파와, 이스라엘 전체 민족을 향해 축복의 말씀을 선포하는 말씀이 신명기 33장 전체에 담겨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면서 “여수룬아” 라고 부릅니다. ‘여수룬’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부를 때 시적으로 부르던 호칭입니다. 5절에서도, “여수룬에 왕이 있었다”라고 합니다. ‘여수룬’을 다스리는 왕은 오직 한분, 여호와 하나님 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을 통치(신정정치)하시면서 사랑스럽게, 혹은 엄한 어조로 말씀하실 때 , ‘여수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여수룬’은 ‘곧은’ ‘정직한’이라는 히브리어(야솨르-형용사)에서 파생한 말로 하나님 앞에서 구부러지지 않고, 거짓이 없는 정직한 백성이 되어야 하는 이상적인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의 모습이 ‘여수룬‘이라는 호칭에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 주시려 오실 때의 모습이 2절에 나타나 있는데, 엄청난 위엄과 권능으로 오시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산위에서 내려오시고 빛과 불 가운데서 많은 무리 가운데 강림하시는 왕의 모습으로 묘사 합니다. 하나님이 절대적 권위를 지닌 왕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은 축복의 말씀이 하늘에 계신 신성한 왕의 권세로 임하기 때문에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받아들이라는 강한 의미입니다. 그리고 축복의 말씀들이 허세가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이라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라는 의미도 함께 주기 위함입니다. 왕과 백성의 관계는 명령을 내리고 순종하는 관계이기도 하지만, 복을 내려주고 그 복을 받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26절 앞 부분에,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다”고 축복의 말씀을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신이라고 생각하는 이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사실은 없는 허상이지만) 하나님과 같이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많은 복을 내려 주신 분은 결단코 없습니다. 다른 신들은 전부 가짜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헛것을 믿고 지냈으며, 헛것을 받아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는데도 마치 풍족하게 받은 것처럼 세뇌당한 상태로 우상에 매여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고 모든 것을 주실 능력과 권세가 있으시기 때문에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삶의 모든 필요한 것들을 풍성하게 해 주셨습니다. 대적하는 무서운 적군을 물리쳐 주시고, 빼앗으려는 흉악한 무리들을 막아주시고, 질병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근심과 염려를 지워주셔서 늘 평안 속에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항상 선하고 인자하신 분만은 아니었습니다. 심판과 구원의 방면에서도 하나님 같은 분은 없으셨습니다. 죄와 악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셨고, 고통과 멸망에 있는 자들은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게로 돌이키는 자는 무한한 자비로 용서하고 기회의 손을 내미시지만, 끝까지 거부하고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의 채찍으로 가혹한 형벌을 내리시는 분이었습니다. “하나님 같은 분은 없도다”라는 고백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인, 사랑, 은혜, 심판, 용서, 구원...등 모든 영역에서 참 신은 오직 하나님 한분임을 높이고 또 높여 드리는 최고의 존귀를 표시하는 말입니다.
26절에 계속해서, “~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살아가면서 좋은 일이나 행운이 따르는 일이 생기면 하늘에서 도와주셔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어떤 사고를 당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되면, “천운이야, 하늘이 도왔네, 하늘이 도왔어”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리고 궂은 일이 생겨도 하늘을 말하는데, 안타깝게도 짧은 인생을 살다간 사람들의 장례식에 가보면, “인명은 재천이라더니, 하늘이 여기까지만 허락 하셨나 보네”라는 말들을 합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분이 하나님을 믿었던지, 안 믿었던지, “이제는 아픔 없고 고통 없는 하늘나라(천국)에 가서 편히 쉬시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무의식중에도 하늘 이라는 곳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신적인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은 죽어서는 하늘에 있는 나라에 갈 것이라는 심리가 남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늘은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는,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하늘(우주 만물 속에)에 영원토록 계신 분이고, 그 위대하신 분이 먼지 같은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내려오신다(강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수룬’에게 하늘로부터 영광으로 임재 하셨으니, ‘여수룬’이 받은 은혜는 말로 다 하 할 수 없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면서” 언제든지 하늘로부터 ‘여수룬’에게 내려오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여수룬’에게 내려오시려는 이유가 “보호해 주시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보호한다’는 말에는 막아주고, 마음껏 먹게 해주고, 최고의 상태로 마음을 안정 시켜 준다는 뜻이 포함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조건들을 완벽하게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오십니다. 사나운 적들과 같이 외부 환경적인 문제나, 마음의 상처등과 같이 보이지 않는 내부 근심적인 문제들을 말끔하게 처리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 높은 하늘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르면 곧바로 달려오실 하나님이 대기하고 계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모든 연약함을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이, ‘여수룬’에게 복중의 복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여수룬’의 하나님이 곧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 이십니다. 고개를 드시고, 하늘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를 보호해 주시기 위해 언제든지 달려오실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심을 믿으시고,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27절은 하나님이 우리의 외부의 적들을 물리쳐 주시는 복의 말씀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이 말씀을 읽으면 마치 거대한 거인이 두 팔을 크게 벌려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모습이 연상이 됩니다. (마치 킹콩과 미녀처럼) 아기돼지 삼형제 동화 이야기에서 밀짚과 나뭇가지로 집을 지은 돼지형제는 늑대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지만, 벽돌로 집을 지은 아기돼지는 늑대의 공격을 거뜬히 막아냈습니다. 우리가 벽돌같이 튼튼하게 지은 하나님의 처소에 머물러만 있다면 늑대와 같은 사탄, 마귀, 귀신의 어떤 공격에도 전혀 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힘으로 빼앗으려고 침입하는 흉악한 어둠의 무리들은 하나님께서 팔을 한 번 휘두르시면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날아가 버립니다. 하나님의 처소에는 권능의 팔(힘, 능력)이 보호막으로 쳐져 있기 때문에 어떤 질병도, 사고도, 재해도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팔은 잠간 있다가 사라지지 않고 영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처소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영원한 보호를 보장 받을 수 있습니다. ‘여수룬’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처소에, 그리고 하나님이 팔 아래에서 보호 받을 수 있었으니 참으로 복 받은 민족입니다.
힘이 없는 민족이 외부의 침략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것을 ‘약육강식’의 논리로 본다면 반박할 여지는 없습니다. 강자의 지배, 약자의 지배당함은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있었던 일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힘의 근원이나 통치의 영원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짧은 기간 영화를 누리는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성경속의 제국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제국 등은 광활한 영토와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계를 호령한 시절이 있었지만, 영원할 것 같은 제국의 위력이 불과 몇 백 년 사이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멸망하는데 사용되었던 바벨론 제국도,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다리오 황제의 페르시아 제국도 결국 멸망 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는 어느 나라, 어느 권세도 하나님의 권능의 팔에 휘둘려서 안개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 현재 초강대국 미국이나, 신흥 강대국 중국도 하나님 우선의 국가를 만들지 않으면 그 권세는 언제고 거두어질 것에 불과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200년 전에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고(개신교는 100년 전) 우리나라는 복음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복음이 이 땅에 자리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라도 굳건하게 세워지고 경제도 눈부시게 성장하여 왔습니다. 교회와 교인 수는 세계 교회 역사의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급속히 성장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재를 냉정하게 바라보십시오, 나라를 빼앗기고 고통을 받을 때, 전쟁으로 나라가 온통 불바다가 되었을 때, 먹을 것이 없어 구걸하다시피 이웃 국가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는 목청껏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을 넉넉하게 주셨습니다. 풍족하다 못해 너무 넘쳐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은 고사하고, “없다, 부족하다, 더 달라, 죽을 것 같다” 아우성을 칩니다. 교회들은 경건이 사라지고 점점 세속화되고 인본주의에 물들어 간다고 합니다. 잘 되면 하나님께 더 나아가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멸망의 길로 치달았던 ‘여수룬’의 모습이 아닙니까? ‘여수룬’의 멸망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안다면, 우리 민족과, 우리 교회들과 우리 가정과, 우리 자신들은 하루라도 빨리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처소로 다시 들어가려고 애써야 하고, 하나님의 권능의 팔 아래 놓여 있으려고 하나님의 팔을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처소를 떠나는 순간, 팔의 보호하심은 사라지고, 그나마 가진 것조차 하나도 남김없이 다 빼앗기고 다 잃어버릴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원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당장 보이는 재물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시간을 허비 합니다. 영원한 복을 주시면 받아야지 걷어차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처소를 떠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 아래에 머물면서 영원한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28절은 우리 현실의 풍요를 보장해 주시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야곱의 샘”이라는 표현은 샘에서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물처럼 자손이 번영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새 포도주의 땅에~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라는 것은 양식이 풍부하게 될 복을 말합니다. 자손이 많고 먹을 것이 풍족한 것은, 이 땅에서 아무 걱정 없이 누리며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제공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새겨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자에게는 재물의 풍성함과 자손의 번영으로 갚아 주시는 분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가축과 땅도 주시고, 자녀도 주셨고, 후손의 번영도 약속해 주신 것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빈궁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돈 한 푼 없어서 구걸하고 꾸어다니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하게 믿음의 정도가 곧 부의 척도와 비례하지는 않습니다. 얼마나 많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판단하는 것이 부요함의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사하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풍요를 마음껏 누리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요를 허락하신 것은 남에게 과시하라고,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을 나만 독점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찾아다니시면서 그들이 겪어야 하는 처절한 생존 현장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긍휼함으로 돌보아 주셨으며, 부자들에게는 재산을 팔아 나누어 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오순절 이후 세워진 교회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다함께 나누고 베푸는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섭니다. 바울은 교회들을 세워가면서 형편이 조금 나은 교회들이, 형편이 어렵고 힘든 교회들을 돕기 위해 자발적인 연보를 모아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바울은 연보에 대해서 고린도 후서 8장 13-14절에서,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고 말합니더. 연보를 많이 한다고 해서 가진 사람들이 힘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균등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나눔 방식임을 말합니다. 부는 가지고 혼자 욕심내서 다 쓰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나누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주시면 감사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에게 나누고, 나누면 또 채워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몸소 가르쳐 주신 나눔의 정신, 그리고 사도 바울이 가르쳐 준 나눔의 가르침을 따라서 내가 가진 조그만 풍요도 이웃과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며 더 큰 채워 주심의 복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29절 말씀이 ‘여수룬’을 향한 모세의 축복의 결론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이 말씀에는 최종적으로 구원을 얻은 이스라엘 백성이 대적자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얻게 될 것을 축복합니다.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강대국들인 이웃 나라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가난과 굶주림에 벗어나고, 질병과 근심에서 벗어나는 일이지만, 이런 것들은 육체적인 구원에 불과 합니다. 이스라엘이 궁극적으로 얻어야 하는 구원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영혼의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모세는 육체적인 구원과 영혼 구원의 승리를 얻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라고 선포 합니다.
앞의 축복의 말씀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① 세상의 모든 신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 도와주세요!” 부르기만 하면 곧바로 하늘에서 내려오시려고 구름가운데 위엄과 권능으로 대기하고 계십니다. ② 하나님이 영원한 처소를 만들어 주시고, 어마어마한 권능의 팔로 이스라엘을 감싸 안고 모든 대적들이 얼씬도 못하도록 영원토록 지켜 주십니다. ③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손의 번영과 재물의 풍성함을 채워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④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건강하고 강건한 육체로 살아가게 하시고, 죽어서는 영원한 나라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축복의 말씀이 선포되는 이스라엘 백성은 행복하고도, 행복하고도, 행복할 것입니다. 모세도 떨리고 감격에 젖어서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축복의 말씀을 선포 하였습니다. 부러운 축복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도 취해야 합니다. 가정도, 교회도, 우리 민족도 이 말씀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저도 선포하겠습니다. “00교회 모든 성도 분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아멘. 복 받는 것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우선 전제 되어야 한다는 것은 구약에서 계속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말씀 앞에 겸손함으로 나아가고, 하나님 앞에 정직함으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복들을 다 누리기를 바랍니다. 언제든지 달려와 보호해 주시는 복, 지켜 주시고 물리쳐 주시는 복, 번성하고 풍요를 누리는 복, 육체와 영혼의 구원의 복을 하나도 빠짐없이 받아 누려서,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선포 하실 때, “네 맞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화답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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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만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참으로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하나님의 복 내려 주심의 선포가 우리 교회와 가정과 우리 삶 위에 항상 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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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