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부두
박해성
버스정거장 벤치에 한 여자 누워있습니다
물고기처럼 뻐끔뻐끔 담배연기 희롱하는
두둥실 솟은 만삭이 무연고 무덤 같습니다
노래인지 울음인지 그녀 흥얼거립니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가 낑낑 일어납니다 나는 얼른 부축합니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 깊이 묻어버리고 오오* …그녀의 몸
에서는 까나리액젓 냄새가 확 풍깁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고맙다는 인사 대신 그녀 목청을 높입니다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도도한 고음에서 약간 바이브레이션이 갈라지는 그녀
허스키는 도발적입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자통차가 밀리고 노선버스는 설 자리
를 잃고 …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앙코르 앙코르 박수갈채에 그녀 신들
린듯 레퍼토리가 풀려나오고 기어이 순찰차가 출동하고 엄마야~ 그녀 내 팔에
매달리고 …아 미친,
발해행 버스를 놓친 나는 동동 발 구르고
*전인권 곡, <걱정 말아요, 그대> 가사 인용
-엔솔러지 현대사설시조포럼 『게 누구냐?』2017
新공무도하가
박해성
강바닥 물풀같이 흔들리며 살던 사람
그까짓 파도 몇 잎 잠재울 줄 왜 몰라서
끊어진 그물코 사이 등 푸른 날 다 놓치고
주거부정 지천명에 비틀대던 아수라도
가슴속 천둥 번개 훌훌 털어 버렸는가
동지에 언 발을 끌고 살얼음 강 건너시네
가지마오 공무도하, 머리 풀고 우는 바람
타는 놀빛 만다라를 수평선에 걸어 놓고
어디로 흘러 갔을까, 비명을 삼킨 강물은
지친 새 추락하듯 쭉정별 지는 이 밤
그 누가 추운 강변 아직도 서성이는지
손톱을 잘근거린다, 빈처 같은 조각달이
- 『열린시학』2015, 겨울호
보길도
박해성
달이 떠, 내 안에 잠 못 드는 달이 떠
은빛 활이 휘도록 바다를 탄주합니다.밀물도 썰물도 아닌 적막이 밀려드는 밤
월하정인* 호롱불 흔들리던 그날처럼
384,000km 떨어진 달에 홀려 파도는 대책 없이 너울너울
달려왔다 아차차, 각성한 듯 몽돌밭을 돌아섭니다. 오늘도 밀
고 당기는 달과 바다 사이, 그대의 인력을 벗어나지 못한
나도 새도록 일렁입니다. 그렇게 수세기가 흐르고 또 누천년
이 흘러서 망월봉 신선이다가 세연정 연꽃이다가 달이 떠,
으늑한 어느 길목 흘릿 스치는 그림자에 이녘의 몸내 같은
해초 냄새 뭉클 번지는 선잠 속 사랑을 쫓다 생시처럼 넘어
지고 화들짝 나를 엎지르고
바람을 건너시는가, 푸른 고래 울음소리
* 조선시대 풍속화가 신윤복의 그림.
-엔솔러지 현대사설시조포럼 2017. 『게 누구냐?』에 수록
뿔
박해성
그대가 떠난 이후 구백 아홉 번째 봄입니다
가령, 내 가슴 진공장치에 통증분자를 추출하여 미래학적
빈 사상태로 유지 할 수 있다는 과학적 가설은 참일까, 거짓
일까? 묻는다면 이별은 그 등위에 개념이 차지하는 정신적
질량을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없으므로 발해보다 더 풀기
어렵다 말할래요. 세월이 명약이라 믿고 산 건 아니지만
정답도 오답도 없는 난공불락 그리움이 물오른 목련가지
마다 울먹울먹 맺히는 계절
저것은 누구 뿔입니다? 하늘이라도 치받을
-엔솔러지 현대사설시조포럼 『게 누구냐?』2017.
비금도
박해성
"나 요즘 연애시 써, 도통 잠을 못 잔다니까"
계절로 치자면 늦가을쯤이고 하루라면 저물녘인 K가 롤
리팝 같은
나타샤를 사랑하노라 고백합니다. 듣고 보니 비밀 같아 먼
수평선으로
눈길을 돌리는 나, 거짓이거니 농담이거니 …슬쩍 엿본 그
의 두 눈이
우련 붉어집디다. 아, 병이 깊었구나! 나는 그냥 알 것만
같아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 걷습니다. K는 화난 듯 무안한 듯 저만치
앞서갑니다.
구부정한 뒷 모습이 마치 나를 보는 듯해 눈물이 핑 돌았는
데요. 나 또
한 사랑에 빠져, 벼락같은 사랑에 빠져 발해를 놓지 못합
니다그려. 그
리하여 우리는 서로 함께인 듯 홀로인 듯 지치도록 명사십
리를 걸었습
니다.
나 또한 사랑에 빠져, 벼락같은 사랑에 빠져
- 계간 『문학청춘』2018. 봄호